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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를 가득 메운 청중들. ⓒ 미주뉴스앤조이 | ||
요즘도 나는 생각해 본다. 만약 앤이 나에게 "여보, 이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나도 알아. 내 옆에 남아 줘서 고마워"라고 말했더라면, 내가 앤과의 결혼 생활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지 않았었을까. 그러나 그녀는 단 한 번도 나에게 그런 말을 건네주지 않았다. 분노가 그녀의 인생을 잠식해버렸다. 그 분노의 대상은 나였다. 가끔 난 그녀가 나를 사람으로 보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항상 앤이 그런 상태였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앤이 폭발할 때마다 앤의 잔인함은 한계를 모르고 커져만 갔다. 그런 폭발은 갈수록 자주 일어났다.
아담과의 신앙생활
한때 천주교인이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앤은 격렬하게 반대를 했다. 세크리드하트성당에 나가던 아담과 나는 다른 교회를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담과 나는 교회의 교인이 되어 공동체 생활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성당은 잘 짜인 구조 덕분인지는 몰라도 회중들에 대한 인식이 개신교만 못했다.
존 스미스 목사를 만난 것이 그 무렵이었다. 감리교 행사에 강사로 초대받아간 나는 화장실에서 존 스미스 목사와 마주쳤다. 어느 교회를 다니냐는 그의 질문에 나는 "여기 저기"라고 대답했다. 존 스미스 목사는 나에게 "강의하는 대로 사는 분은 아니시군요"라고 말했다. '이런 목사라면 괜찮겠군'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인디애나 주 출신의 존 스미스 목사는 캘리포니아에서 목회를 하다 결혼 생활에 실패해서 인디애나로 돌아와 있었다. 이혼한 목사에게 돌아갈 교회란 아주 작고 볼 품 없는 것뿐이었다. 우리가 살던 사우스밴드 동네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몰려 사는 곳에 있는 브로드웨이감리교회가 그가 시무하던 곳이었다. 흑인이 모여 사는 동네였는데, 커다란 공장이 폐쇄된 뒤 점점 죽어가는 곳이었다.
존 스미스 목사는 그 교회를 살리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목회를 하고 있었다. 독일인 공동체가 지었던 이 교회는 건물만큼 튼튼했다. 존 목사가 교회에 왔을 때 교인 숫자는 60명을 넘지 않았다. 존 목사는 숫자 따위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이웃 주민들을 위해 아이들을 돌봐줄 어린이집을 만드는 일과 식료품 제공을 먼저 시작했다.
원래 다니고 있던 흑인 교회가 성가대 여행을 이유로 문을 닫은 것을 주일에 가서야 알고 나는 존 목사의 교회에 가보기로 마음먹었다. 수백 명이 예배드리도록 설계 되어있는 그 교회에는 30여 명이 앉아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존 목사의 설교는 매우 훌륭했다. 그는 설교를 통해 우리가 성찬식을 매주 하는 것이 옳은데, 브로드웨이교회가 아직 그런 문화에 익숙하지 않으니 좀 기다려 보자는 말을 했었다. 매우 인상 깊은 설교였다.
아담의 세례
아담과 나는 그 교회에 출석하기로 마음먹었다. 존 목사는 알고 보니 예일신학교 출신이었다. 우리는 점점 더 교회의 일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6개월가량 다닌 후 나는 존 목사에게 교회의 정식 교인이 되고 싶다는 의사를 전했다. 존 목사는 전에 다니던 교회가 어디냐고 물었다.
별 생각이 없었던 나는 대답을 못했다. 내가 텍사스를 떠난 이후 어떤 교회에 소속되어 있었는지 따져본 적이 없었던 탓이었다. 존 목사는 내가 전형적인 "교회에 미안해해야 하는" 교인 타입이라고 농담을 했다. 존 목사는 새신자 교육을 받은 다음에야 정식 교인이 될 수 있겠다고 알려줬다. 나는 일 년간 새신자 교육 과정을 즐거운 마음으로 이수했다.
▲ 스탠리 하우어워스 교수. ⓒ 미주뉴스앤조이 | ||
1980년 부활절에 나는 브로드웨이감리교회의 교인이 됐다. 존 목사는 부활절을 "성주간"으로 선포하고 부활절 새벽 4시에 예배를 시작했다. 우리는 불을 피워놓고 시편을 읽고 구원 역사에 관한 공연을 했으며 부활을 축하했다.
난 내가 죽어서 천국에 간 줄로만 알았다. 이곳은 단순히 훌륭한 예배를 위한 공동체라기보다는 공동체 그 자체였다. 교인들은 전부 정말 특별하게 평범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담은 브로드웨이감리교회에 나가는 것을 즐겼다. 그저 즐길 뿐 아니라 여러 교회 활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아담은 아직 견신례를 받지 않았다. 아담의 나이는 13살이었다. 우리 교회에는 견신례를 받을 나이의 학생들이 여럿 있었다. 존 목사는 아이들을 견신례를 받게 인도하는 것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사명 중의 하나라고 여겼다.
견신례 과정은 성경 공부와 교회 역사 공부 등으로 이루어졌으며 1년 과정이었다. 존 목사와 견신례 후보 학생들은 1년간 4차례에 걸쳐 언약을 맺었다. 존 목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언약을 새롭게 했어야만 했던 과정을 학생들에게 상기시켰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과, 교회와, 공동체와 새로운 언약을 맺은 바 있다고 강조했다. 존 목사는 학생들에게 교회의 교인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설명해주려고 애썼다.
부활절을 앞두고 고난주간을 맞아 마지막 언약을 맺었다.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 아침 아담과 나는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담은 교회가 자신에게 주는 의미가 너무 커서 이 언약을 맺지 못하겠다고 하소연했다. 아담의 엄마, 앤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증상을 보이는 기간에 있었다. 아담은 이 순간, 이 인생이 너무나 힘들다고 말했다. 아담은 더 이상의 책임을 지는 것에 대해 너무나 버거워했다. 나는 아담을 따로 설득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아담에게 존 목사와 상의를 한 번 해보면 어떻겠냐고 말을 건넸다. 아담만 괜찮다면 존 목사에게 전화를 걸어 고난주간이 시작하기 전에 자리를 만들어 보겠다고 했다.
아담이 학교에 가 있는 동안 나는 존에게 전화를 걸어 약속은 잡았다. 종려 주일 전 토요일이었다. 존 목사는 아담과 대화를 나눴고 나는 커피숍에서 기다렸다. 어떤 식으로 일이 풀려갈지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앤은 한 번도 교회에 나간 적이 없었지만, 존 목사는 앤이 아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앤이 다른 사람과는 다르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몇 시간 뒤에 다시 교회에 돌아가 아담을 차에 태우고 집으로 향했다. 아담은 마지막 언약을 맺기로 했다고 전해왔다. 존 목사는 아담의 이야기를 동감하며 들어줬다고 했다. 자기도 아담처럼 느낄 때가 있다고 말했다. 존 목사 역시 사람들이 그에게 거는 기대 모두를 충족시키며 살 수는 없었다고 했다.
존 목사는 오히려 아담에게 "너 혼자만으로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어. 교회의 교인이 된다는 것은 도움을 요청하고 그 도움을 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야. 도움을 받을 줄 알아야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거란다"라고 말해줬다고 아담이 전했다.
현명한 목사를 만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담은 부활절에 교회의 교인이 됐다. 정말 훌륭한 고난주간과 부활절이었다. 새크리드하트성당처럼 웅장한 부활절 예배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담과 나는 새크리드하트성당과 브로드웨이 교회의 교인들의 따뜻한 환대 속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며 우리 구원의 드라마 속에 함께 참여하기 때문에 기독교인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느 교단의 교인인지에 대해 모호했던 점을 부인할 생각은 없다. 부활절 아침에 내가 바라봤던 풍경, 노틀담의 스크리드하트성당의 천주교와 브로드웨이교회의 기독교인들 사이에는 반석같이 단단한 유대가 있었다는 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공동체들이 없었더라면, 아담과 나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