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번쩍 떠 보라…고해 속에 극락이 있으니”
허무한 그림자 속에 허무하지 않음이 있다
어지러운 물결 따라 흐르지 말라
흐름을 넘어선 거기 묘미가 있나니
어지러이 내닫는 물 속의 달이여!
물이 내닫는가? 달이 내닫는가?
아니면 다른 무엇이 내닫는가?
➲ 강설
선지식이 후학을 이끄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어떤 이는 자신이 이미 깨달았다고 착각하여 천방지축 설치며 풍파를 일으키는데, 이런 자는 그의 잘못된 언행 모든 것을 부정하며 궁지로 몰아넣어서 더 이상 내 보일 것이 없게 만들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공(空)에 떨어져 매사에 부정적이면서 무기력해져 있는 사람이라면, 긍정적인 측면을 열어 적극적으로 나아가게 해주어야만 한다.
이 두 가지 방법은 옛날부터 선지식들이 사용했던 것이며, 오늘날에도 가장 중요한 지도법이라고 할 것이다. 예컨대 방향을 잘못 잡아 왼쪽으로 치우친 사람에게는 오른쪽으로 가라고 하고, 오른쪽으로 잘못 치우친 사람에게는 왼쪽으로 가라고 한다. 이것은 바른 길로 안내하는 것이지 왼쪽도 오른쪽도 목적이 아닌 것과 같다.
그러나 이것은 상대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오히려 부작용만 일으키기도 한다.
➲ 본칙 원문
擧 僧問雲門 不是目前機 亦非目前事 是如何 門云 倒一說
목전기(目前機) ‘눈앞의 기틀’ 즉 지도할 사람.
목전사(目前事) ‘눈앞의 상황’ 즉 지도할 상황.
도일설(倒一說) 뒤집힌 한마디, 뒤집힌 소리, 허튼 소리.
➲ 본칙
이런 얘기가 있다. 어떤 스님이 운문선사께 여쭈었다.
“지도할 상대도 없고 또한 지도할 상황도 아니라면 어떻게 합니까?
운문선사가 답하였다.
“허튼 소리!”
➲ 강설
누군가 마음먹고 운문선사를 시험하려 들었다. 앞에 지도할 상대도 없고 그럴 상황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 아마도 최강의 질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약한 사람이라면 옭아맬 수 있었겠지만 상대는 천하의 운문선사였다. 이미 질문 속에는 돌이킬 수 없는 오류가 있었다. 그것을 놓칠 운문선사가 아니다. 운문선사는 대뜸 후려쳐 버렸다.
“허튼 소리 하는구나!”
이 문답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도일설(倒一說)’을 번역할 때 대부분 ‘일설을 뒤집다’라는 뜻으로 이해한 모양이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지’라고 번역한다. 그런데 이것은 질문을 한 당사자를 곧바로 대하는 선사들의 말투가 아니다. 한문을 뜻풀이하는 방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선사들은 상대의 급소를 바로 공격해 버린다. 그러므로 ‘도일설’을 글자대로 풀이하면 ‘뒤집힌 한마디’ ‘뒤집힌 소리’가 되고, 선사들의 대화체로 바꾸면 ‘허튼 소리’라고 번역해야 한다.
질문자는 어설픈 솜씨로 운문선사에게 칼을 들이대었다. 하지만 상대는 천하의 고수였다. 목검으로 대련을 한다면 상처나 입고 말겠지만, 진검으로 겨룬다면 자기가 휘두른 칼로 인해 자신의 목이 달아나는 법이다.
운문선사에게 질문을 한 스님은 대체 무슨 잘못을 범한 것일까?
금강수보살(金剛手菩薩)의 활활 타는 불꽃이 무엇인지를 알면 곧 시원해지리라.
➲ 송 원문
倒一說 分一節 同死同生爲君訣
八萬四千非鳳毛 三十三人入虎穴
別別 擾擾怱怱水裏月
요요총총(擾擾怱怱) 물이 출렁거리며 급히 흐르는 모양. 즉 어지럽게 돌아가는 현상 세계.
➲ 송
허튼 소리여! 한 덩이를 쪼갬이니,
➲ 강설
생각으로 따지고 드는 질문자에게 운문선사는 “허튼 소리”라고 일갈하였지만, 사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자상하게 이끌어 준 것이다. 아니, 이보다 더 자상한 방법이 또 있겠는가. 이 한마디 말에 눈이 번쩍 떠진다면 곧바로 핵심을 보게 하는 것이다. 만약 운문선사께서 질문에 대해 상대가 하나씩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하게 설명하였다면, 질문자의 그 어리석음을 어느 세월에 타파하겠는가. 그런데 허튼 소리라는 답을 듣고 이 친구의 어리석음이 부서지기는 하였을까?
➲ 송
같이 죽고 같이 살아 그대 위해 결단함이라.
➲ 강설
선지식은 자신만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다. 욕을 먹는 한이 있어도, 후학에게 도움이 되려고 한다. 모름지기 자타일여(自他一如)의 경지에서 오직 상대로 하여금 모든 망상과 분별을 떠날 수 있도록 생사를 함께 해 주는 것이다.
➲ 송
팔만 사천 청중은 봉황의 깃털 아니요,
삼십 삼 조사는 호랑이 굴에 들었도다.
➲ 강설
팔만 사천 사람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들었다고 그들이 모두 부처의 경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설법한 말씀은 동일할지라도 듣는 사람의 경지에 따라 부처님의 말씀은 천차만별로 다르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뛰어난 제자들이 다 모였던 영취산 법석에서 오직 가섭존자만 부처님께서 꽃을 드신 뜻을 알고는 빙그레 웃었고, 나머지 대중은 그저 귀머거리가 되고 벙어리가 되었던 것이다.
삼십 삼 조사들은 큰 용기로 목숨을 걸었던 분들이다. 마치 호랑이굴로 들어가 이윽고 호랑이를 때려잡은 것과 같은 체험들을 하고는, 이윽고 깨달아 자유자재한 경지에 이른 분들이다. 그러니 그런 선지식을 만나려면 자신도 목숨을 걸고 덤벼야만 한다. 어설픈 말장난으로는 결코 진면목을 친견할 수 없다.
➲ 송
훌륭하고도 훌륭하도다.
어지러이 내닫는 물속의 달이여!
➲ 강설
눈을 번쩍 떠 보라. 눈앞에 전개되는 멋들어지고 훌륭한 모습을 스스로 볼 수 있으리라. 고해라고 하는 그 속에 극락이 있으며, 허무한 그림자 속에 허무하지 않음이 있다. 어지러운 물결 따라 흐르지 말라. 흐름을 넘어선 거기 묘미가 있나니.
참! 물이 내닫는가? 달이 내닫는가? 아니면 다른 무엇이 내닫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