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신적 존엄성을 내려놓으시고 인간의 비참함을 선택하신 주님!
유학 시절 첫해 성 주간을 이탈리아 한 교구에 가서 주임 신부님 사목을 도와드린 적이 있습니다. 거기도 우리만큼은 아니지만, 부활절을 앞두고 꽤 많은 사람이 고백성사를 보더군요.
그리고 또 한 가지 기억에 남은 사목은 주임 신부님과 구역을 나눠 본당 내 모든 가정을 일일이 방문해서 가정 축복을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집에서는 으르렁거리는 초대형견으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하고, 어떤 집에서는 대환영을 받습니다.
거기 할머니들도 우리 한국의 할머니들 못지않게 인정이 많아, 축복 예식을 마치고 나올 때, 꼬깃꼬깃 접혀있는 쌈짓돈을 찔러주시곤 했는데, 주임 신부님 엄명에 따라 모두 모아 본당 사무실에 드리곤 했습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은 제가 사목 보조하던 본당에 유명하신 추기경님이 방문하셔서 성 목요일 만찬 미사를 집전하셨습니다. 미리 발씻김 예식에 참여할 신자들 열두명을 선발해서 의자까지 다 셋팅해놓았는데,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한 분이 안나타났습니다.
주임 신부님의 눈짓으로 엉겁결에 제가 부랴부랴 비어있는 한 자리에 가서 앉았습니다. 저는 그때 정말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 정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장난꾸러기였는데, 동짓날 어머니께서 큰 가마솥에 팥죽을 쑤고 계셨는데, 친구와 장난을 치다가 왼쪽 발이 펄펄 끓는 솥 속으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큰 화상을 입었고, 아직도 그 상흔이 크게 남아있습니다.
제가 의자에 앉아 양말을 벗는데, 상처도 크고 너무 부끄러워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훌륭하신 추기경님께서 제 발을 그냥 적당히 씻는 것이 아니라 아주 뽀득뽀득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거기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추기경님께서 제 발에다가 입까지 맞추셨습니다.
그때 저는 너무 부끄럽고, 당혹스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옛날 2천 년 전 예루살렘 다락방에 앉아있었던 베드로 사도의 심정도 이러했겠지, 하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졌습니다.
세족례와 관련해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족례를 거행하시기 전 겉옷을 벗으시고, 허리에 수건을 두르셨습니다. 신적 영광을 드러내는 겉옷을 벗으시고 종의 신원을 드러내는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신적 존엄성을 내려놓으시고, 인간이 내려갈 수 있는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신 것입니다.
세족례는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엄청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느님의 외아들이요 인류의 구세주이십니다. 왕 중의 왕,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렇다면 종들인 제자들이 왕이신 예수님의 발을 씻어주었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왕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발을 씻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족례를 통해서 당신은 세상의 왕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왕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섬김의 왕이고 봉사의 왕이고 겸손의 왕이심을 만천하에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족례를 통해 왕에 대한 전통적인 페러다임을 완전히 뒤바꿔놓으셨습니다. 왕직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뜻밖의 상황에 깜짝 놀란 수제자 베드로는 완강히 거부합니다. “제 발은 절대 씻지 못하십니다.” 베드로의 이 반응은 예수님의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인생관을 수용하지 못하겠다는 표현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 우리도 오늘 예수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친교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의 발을 씻어주시는 그분의 겸손한 제스처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태도를 우리 것으로 만들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권위나 힘을 가진 사람들은 더 이상 어깨에 힘 줘서는 안됩니다. 쥐 꼬리 만한 권위라 할지라도 뭔가가 우리에게 주어졌다면 그것을 이웃을 위해 봉사하고 이웃을 섬기는 데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족례의 정신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요한 13,16-20
사랑을 실천해도 행복하지 않은 이유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요한 13,16-17)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행복의 설계도를 제시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솔직해져야 합니다.
남의 발을 씻어준다고 정말 다 행복해질까요? 어떤 이들은 남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속으로 '내가 왜 이 짓을 해야 하나'라며 분노를 삭입니다.
비굴하게 노예처럼 남의 비위를 맞추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고문입니다.
오늘은 행복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왜 우리가 먼저 '스승이요 주님'이라는 자존감을 회복해야만 발을 씻어줄 때 행복할 수 있는지 그 심오한 영적 원리를 파헤쳐 보겠습니다.
행복의 정의: 행복은 외적 조건이 아니라 '자존감'의 수치입니다
우리는 흔히 돈이 많거나 성공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심리학은 이를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1978년 심리학자 필립 브릭먼(Philip Brickman)과 그의 연구팀은 충격적인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수백억 원의 로또에 당첨된 사람들과,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사람들의 행복도를 장기 추적한 것입니다.
당첨 직후에는 하늘을 날 것 같았고, 사고 직후에는 지옥 같았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불과 3개월에서 1년이 지나자, 두 집단의 행복도는 사고 이전의 '기본 수치'로
돌아왔습니다.
이를 '쾌락 적응(Hedonic Adaptation)'이라 부릅니다.
결국 행복은 외적 사건이 아니라, 내 안의 변하지 않는 '자존감'의 수치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100억이 생겨도 곧 불행해지지만,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도 평화를 누립니다.
(출처: Brickman et al., 『Lottery Winners and Accident Victims: Is Happiness Relative?』)
왜 사람들은 끊임없이 소유와 명예를 긁어모으려 할까요?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그들 내면에 자존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면이 텅 빈 사람은 외부의 것으로 자신을 포장해야만 비로소 존재감을 느낍니다.
내가 무언가를 움켜쥐려 할 때, 내 잠재의식은 이미 "나는 이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부족한 존재다" 라고 스스로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는 셈입니다. 부족하다고 믿으니 행복할 수 없습니다.
반면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자녀라는 '우주적인 배경'을 가졌음을 압니다.
주님이 나에게 "난 네게 다~ 주었다"라고 하시는 음성을 듣는 이들은 더 이상 세상의 박수에
목매지 않습니다.
이미 최고로 높으니, 기꺼이 낮아져도 자존심이 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보여주신 '왕의 여유'입니다.
많은 이들이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마지막 장면, 쉰들러가 울며 "차를 팔았더라면 더 구했을 텐데"
라고 한 고백이 사실인지 궁금해합니다.
역사적 기록과 생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는 실화에 근거한 진실입니다.
쉰들러는 전쟁 초기 자존감이 낮은 '거인'이었습니다.
그는 돈과 여자, 독일 나치 당원이라는 화려한
명예로 자신의 빈 영혼을 채우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유다인들의 비참한 '발'을 닦아주기
시작하며(구출 사역), 돈보다 귀한 '생명의 가치'에 눈을 뜹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실제로 파산했습니다. 하지만 생존자 '레오폴드 페이지'의 기록에 따르면, 쉰들러는 말년에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내가 공장주로 돈을 긁어모을 때는 매일 밤 불안과 허무에 시달렸네. 하지만 1,100명의 목숨을 위해 내 전 재산을 탕진하던 그 시간 동안, 나는 처음으로 내가 살아있다는 가치, 즉 '사람'이라는 자존감을 느꼈네.
그때가 내 생애 가장 평화롭고 행복한 시간이었지."
누군가를 높여주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을 때, 그는 비로소 세상의 종이 아니라 '다 가진 자(Haver)'가 된 것입니다. 다 가진 자가 되었을 때 인간은 가장 행복합니다. 이것이 바로 헬퍼스 하이(Helper's High)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주는 자가 더 행복한 이유는, 주는 행위 자체가 '나는 남에게 줄 것이 넘치도록 많은 위대한 존재'
라는 자존감을 자신에게 확증해주기 때문입니다.
(출처: 토마스 케닐리, 『쉰들러의 방주』; 미츠코 자크, 『오스카 쉰들러의 생애』)
17세기 콜롬비아의 성 베드로 클라베르 신부님은 자존감 전수의 승리를 보여준 성인입니다.
그는 짐승처럼 실려 온 노예들을 씻기며 단순히 봉사만 한 것이 아닙니다.
신부님의 전기 작가 앙헬 발투스는 신부님이 가장 행복해했던 순간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전염병에 걸려 배설물 속에 누워있던 노예 한 명이 신부님의 손길을 받고 "아, 나도 하느님의 아들이군요!"라고 고백하며 눈물을 흘릴 때, 클라베르 신부님은 그 노예의 썩어가는 발을 부여잡고 통곡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 주님! 제가 지금 당신의 얼굴을 봅니다.
이 형제가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으니, 이제 저도 제가 누구인지 알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생명을 전하는 행복한 노예입니다!"
이 인용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신부님이 누린 행복은 단순히 착한 일을 했다는 뿌듯함이 아니었습니다.
타인에게 '하느님 자녀'라는 정체성을 심어주어 그를 부활시킬 때, 그를 살려낸 자신 또한 하느님과 같은 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확신하며 '신적 행복'에 동기화된 것입니다.
상대를 하느님으로 대접할 때, 나 자신이 하느님임이 비로소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출처: 앙헬 발투스, 『성 베드로 클라베르의 생애』)
오늘 주님께서 우리 발을 씻어주시는 이유는 "너는 닦여야 할 죄인이 아니라, 내가 무릎을 꿇고
경배해야 할 고귀한 하느님이다"라고 선언하시기 위함입니다.
이 미사 중에 성체를 영하며 여러분의 자존감을 하느님 수준으로 업데이트하십시오.
내가 비굴한 상태에서 남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봉사를 통해 상대의 인정을 얻어내려는 비참한 '구걸'일 뿐입니다.
그런 세족례에는 행복이 없습니다.
진짜 행복은 내가 먼저 '다 가진 자'임을 믿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느님이 내 아버지이시고, 그분이 당신의 아드님까지 내어주셨는데 내가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이미 하늘나라의 상속자인 '다 가진 자'가 되어, 내 곁의 형제도 '다 가진 자'로 만들어주기 위해 무릎을 꿇으십시오.
그때 여러분이 누리는 행복은 지상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의 행복이 될 것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13,16-20: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직후,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16절).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17절)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참된 신앙은 지식을 실천으로 열매 맺게 한다. 야고보 사도도 이렇게 말한다.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야고 2,26).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역시 “지식이 덕으로 열매 맺지 못한다면, 그것은 영혼을 무겁게 짓누르는 짐에 불과하다.”(Hom. in Matthaeum 7,7)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가 배운 복음은 머릿속 지식이 아니라, 우리의 손과 발, 삶 전체로 드러나야 한다.
주님은 유다의 배신을 아셨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18절). 그러나 주님은 그를 배제하지 않으셨다. 이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자유의지를 주시고, 그 자유 안에서 사랑이 이루어지도록 하셨기 때문이다. 성 이레네오는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자유롭게 창조하셨으므로, 그가 자유로이 하느님을 따른다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된다.”(Adversus Haereses IV,37,1). 아담, 하와, 사울, 유다 모두 자유의 선택 앞에 섰지만, 주님의 은총은 그들의 죄보다 크셨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20절). 사도들은 단순한 인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파견을 받은 증인들이었다. 그들을 맞아들이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맞아들이는 것이며, 아버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 이냐시오는 이렇게 가르친다. “주교를 마치 주님 자신처럼 존중하십시오. 사도들이 보낸 이가 곧, 그리스도를 대신하기 때문입니다”(Ad Smyrnaeos 8,1). 교회는 언제나 이 진리를 지켜 왔다. 교회 헌장은 말한다. “주교들은 성령 안에서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는 교사로 세워졌으며, 그들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계속해서 당신 백성을 가르치신다.”(25항). 우리는 교회의 가르침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께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그분에 의해 파견된 사람이다. 우리가 사제와 주교,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그리스도를 맞아들일 때, 우리는 그분 안에서 아버지를 만나게 된다. 참된 행복은 지식이 아니라 실천이며, 실천은 파견된 삶으로 드러난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우리도 파견된 자로서 겸손과 충실함 속에 살아가도록 하자. 그리고 우리가 교회의 사도적 가르침을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그리스도를 통해 아버지께 나아가도록 은총을 청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삶에 감사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의 부족함이 크게 보이면서 사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지를 계속 생각했었습니다. 부모님께 따지고 싶었습니다. “왜 나를 이렇게 만드셨어요?”라고 말입니다. 내가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부족함을 안고 태어나 앞으로 계속 힘든 삶을 살 것만 같아서 두려웠습니다. 아마 이때가 사춘기 때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원망하며 성당도 잘 나가지 않았습니다. 어떠했을까요? 성당에 나가지 않으니, 마음이 편안하고 고민이 해결되었을까요? 아닙니다. 더 힘든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무엇이든 다 부정적으로 보였습니다.
“인간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인간은 행동과 선택을 통해 스스로 존재 의미를 만들어가는 창조적 존재다.”
장 폴 사르트르의 말입니다. 인간은 어떤 목적이나 의도가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먼저 존재한 다음에 스스로 자신의 본질을 만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의해 우리는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다른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그저 사랑 때문입니다. 존재하지 않음보다 존재함이 더 의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몫이 있습니다. 자기 본질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 의미를 만들어 가는 것, 이렇게 우리는 계속 성장하게끔 맞춰 있습니다. 그런데 멈추려는 나약함이 자주 등장합니다. 다시 마음을 잡아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스승이요 주님이시면서도 종의 모습으로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라는 말씀은, 가장 높으신 분이 가장 낮아지셨으니,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 역시 서로의 발을 씻어주는 겸손한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적이고도 강력한 초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아는 것에 멈추지 않고, 그대로 실천하면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이제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고대 근동 문화에서 누군가와 한 식탁에서 빵을 나눈다는 것은 깊은 신뢰와 생명의 연대, 평화의 언약을 상징했습니다. 그런데 발꿈치를 치켜듭니다. 주인을 향해 뒷발질하는 폭력적이고 배은망덕한 모습을 비유한 것입니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 13,20)
제자들이 곧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거나 부인할 연약한 존재들이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끝까지 신뢰하시며 하느님의 대리자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이지만, 존재 차체에 의미를 가지면서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참 행복에 이를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삶은, 목을 조일 게 아니라 만져줘야 하는 것(레이 브래드 버리).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04.30.목.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요한 13,16)
높아지려 애쓰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자리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보다
더 낮은 자리로
내려가십니다.
삶의 기준을 완전히
뒤집고 존재의 방향을
바꾸는 예수님의
진정한 초대는
낮아짐입니다.
섬김 없는 높음은 공허하고
섬김 속의 낮음은
더욱 충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내려놓음으로써
참된 권위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은
지배가 아니라
파견된 섬김의
길입니다.
섬김은 우리 자신을
타인과 연결시키며
존재의 깊은 안정을
가져옵니다.
겸손은 선택이 아니라
파견된 존재의 본질입니다.
자기를 드러내는 삶은
경쟁이 되고
하느님을 드러내는 삶은
진정한 복음이 됩니다.
종은 자신을 결코
증명하지 않습니다.
맡겨진 일을 통해
주인을
드러낼 뿐입니다.
낮아진다는 것은
불필요한 비교와
집착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사랑은 높은 곳에서
빛나지 않고,
낮은 자리에서
더 깊어집니다.
낮아지는
삶의 가치가
누군가를 살리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13,20)
'낮아져야 위에 것이 보이는 신비!'
오늘 복음(요한13,16-20)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저녁 만찬 때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요한13,16-1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요한13,20)
예수님의 이 말씀이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두 분 안에서 발하시는 성령이 본성상 온전한 하나로 연결되어이듯이,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도 그렇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온전하게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과의 연결은 구체적인 나의 삶으로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또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파견된 이들을 대할 때, 그들의 인간적인 모습만 바라보지 말고, 그들을 파견한 분을 바라보고, 그 바라봄 안에서 파견된 이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말씀으로 다가왔습니다.
나의 모습이 낮아져야, 겸손해져야, 그 위에 있는 것들이 보입니다. 내 것이 비워진 상태인 마음이 가난해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도 보이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들도 보입니다.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님께서는 겸손과 낮은 자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낮은 자의 모습으로 사셨고, 낮은 자의 모습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으며, 마침내는 완전 낮은 자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 모두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으니, 하느님께서 낮아지신 것입니다.
낮아져야 그 위의 것이 보입니다.
예수님처럼 낮은 자의 모습으로 살아갑시다!
복음말씀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보내셨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3,13-25
13 바오로 일행은 파포스에서 배를 타고 팜필리아의 페르게로 가고,
요한은 그들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14 그들은 페르게에서 더 나아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
15 율법과 예언서 봉독이 끝나자 회당장들이 그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형제들이여, 백성을 격려할 말씀이 있으면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6 그러자 바오로가 일어나 조용히 하라고 손짓한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을 선택하시고,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살이할 때에 그들을 큰 백성으로 키워 주셨으며,
권능의 팔로 그들을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셨습니다.
18 그리고 약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그들의 소행을 참아 주시고,
19 가나안 땅에서 일곱 민족을 멸하시어
그 땅을 그들의 상속 재산으로 주셨는데,
20 그때까지 약 사백오십 년이 걸렸습니다.
그 뒤에 사무엘 예언자 때까지 판관들을 세워 주시고,
21 그다음에 그들이 임금을 요구하자,
하느님께서는 벤야민 지파 사람으로서 키스의 아들인 사울을
그들에게 사십 년 동안 임금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22 그러고 나서 그를 물리치시고
그들에게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이사이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나의 뜻을 모두 실천할 것이다.’ 하고
증언해 주셨습니다.
23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24 이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25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3,16-20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17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8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19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해 둔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