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0:17-18 영광의 몸을 입으신 예수께서는 곧 아버지께로 갈 것이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마리아에게 그만 만지고 가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의 소식을 전하라고 하셨다.
이전 말씀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두 제자들이 돌아간 뒤에도 무덤 밖에서 울고 있다가 인기척이 나서 무덤 안을 들여다 보니 두 천사가 있었다. 마리아는 두 천사에게 주님을 누가 가져갔는지 묻다가 뒤돌아보고 예수님을 보았지만 알지 못하고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울고 있었다. 마리아는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고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서야 예수님을 알아보고 “선생님” 이라고 불렀다. 이어지는 말씀은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명령을 받고 그 소식을 전하는 내용이다.
마리아를 부르신 예수님은 17절에서 “나를 붙들지 말라” 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정말 이상한 말이다. 성경 해석가들도 서로 의견이 엇갈린다. 자신이 부활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몸을 입은 하나님이시기에 만지지 말라고 했을 수 있다. 모세에게 만지지 말라고 하신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20:27절에서 도마에게 만져보라고 한 점이다. 만약 마리아에게는 영광의 몸을 입었으니 만지지 말라 하고 도마에게는 만지라 했다면 앞 뒤가 안맞는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여성을 심각하게 차별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번도 그런 적이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만지지 말라는 말씀을 하던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현재를 나타내는 명령형에 부정어가 붙으면 지금 이미 하고 있는 행동을 멈추라는 뜻이다. KJV는 단순히 “Touch me not”으로 번역했다. 하지만 ESV는 “Do not cling to me” 로 번역했고 NLT도 “Don’t cling to me로 번역했다. NASB는 원어의 이러한 의미를 그대로 살리기 위해 “Stop clinging to me” 로 번역했다. Borchert 는 NASB 는 너무 거칠게 번역했고 NLT는 좀 더 미묘한 느낌이라며 NIV가 번역한 “Do not hold on to me”가 좀더 자연스럽다고 했다(Borchert, 301).
그러나 NASB의 번역 원칙은 영어로 말이 잘 안되더라도 원어의 느낌을 그대로 직역하는 것이고 NIV는 직역과 의역의 중간에서 매끄러운 영어로 번역하기 때문이다. 2004년 처음 유학왔을 때 함께 강의를 듣던 Farmer Preacher 였던 나이 많은 목사님은 NASB를 두고 “Wooden!”이라며 그 표현들이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했다. 그러나 원어를 번역하는 일은 영어에서 얼마나 자연스러운 표현인가가 문제가 아니라 원어의 느낌을 얼마나 살렸느냐가 문제이다. 그리스어에서 명령형 현재는 지금 하고 있는 행동을 멈추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이미 예수님의 발을 잡은 상태이다.
한번 상상해 보자. 16절에서 마리아가 예수께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돌아서서 얼음이 되어 그 자리에 서 있었을까? 아니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생님~” 하고 천천히 슬로우 모션으로 달려가고 있었을까? 아니다. 예수님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뒤로 돌아선 마리아는 한걸음에 예수님께 다가가 즉시 몸을 굽혀 예수님의 발을 잡았을 것이다. 마태복음 28:9-10절에도 보면 마리아가 예수님을 발을 잡았다 했다. 미국이라면 포옹을 했겠지만 당시 이스라엘 여자들이 남자들을 포옹하는 문화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마리아는 너무 기쁘고 반가운 마음에 최고의 존경심을 표현하기 위해 이미 예수님의 발을 잡은 상태였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지지 말라는 말을 이해해야 한다. 이제 만지는 것을 즉시 멈추라는 뜻이다. 마리아는 음성을 듣자 마자 부활을 확신하고 즉시 돌아서서 예수님의 발을 만진 것이다. 마리아가 만진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부활을 이미 확신하고 있었기에 그만 만지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보았다는 증언을 듣고도 안 믿었다. 또 직접 자신이 보고 그 음성을 들었어도 못 믿겠다고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도마에게는 만져보라고 한 것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그만 만지라고 하신 것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들이 존재한다. 어떤 이들은 이제 새로운 시대가 열렸고 이제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새로운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한다.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예수님의 영화가 완성되었다는 것에 초점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육체적인 존재로 접촉하는 것은 끝났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예수께서 이미 영광의 몸을 입으셨기에 전처럼 육체적인 존재로 접촉하지 않고 성령을 통해 아주 친밀한 새로운 교제가 이루어질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다수는 예수께서 만지는 것을 그만 멈추라고 하신 것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새로운 관계가 시작될 것이라고 해석한 것은 예수께서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다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곧 아버지께로 올라간다고 하라고 하신 것에 초점을 맞춘다면 시간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17절 뒷부분에서 예수님은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라고 하신 것은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올라갔다 온 뒤에야 만질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앞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을 완전히 떠나 하나님께로 가실 것인데 이제 함께 있을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빨리 서둘러 가서 제자들에게 알리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잠깐 지상에 머무실 시간 동안 많은 제자들을 만나 복음 전하라는 명령을 하시고 떠나시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부활하신 그 순간에도 빨리 제자들을 만나 조금이라도 더 가르치고 떠나려고 그만 만지고 빨리 가서 전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렇게 두 사람이 예수님을 만진 것은 예수님이 단순히 영적 존재가 아니었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옷을 통과하시고 벽과 닫힌 문도 통과하셨지만 분명히 영이 아닌 육체를 갖고 계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장차 우리가 입을 영광의 몸의 특징이기도 하다. 1세기 말의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은 몸이 부활한 것이 아니고 영으로만 승천하셨다고 주장을 했다. 그러나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을 만진 것이나 도마가 예수님의 옆구리를 만진 것은 예수께서 몸으로 부활하셨다는 분명한 증거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과 동시에 부활하신 것이 아니다.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이다. 마찬가지로 영광의 몸으로 부활하신 것과 승천하신 것도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지금 본문의 예수님은 부활 하셨지만 아직 승천하지는 않으신 상태였다. 사도행전 1:3절에서는 40일 후에 승천하셨다고 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몸으로 12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 나중에는 몇 년 뒤인 바울에게도 나타나셨다고 했다.
17절 뒷부분의 “내 형제들” 이란 육신의 형제들이 아니라 남자 제자들을 말한다. 그들에게 가서 “내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셨다. “곧 올라간다” 라는 말은 현재형이기 때문에 “지금 올라가고 있다” 라는 뜻이다. 주석가들은 확실하게 정해진 일을 강조해서 말할 때 쓰던 표현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싶다. 어차피 코이네 그리스어 Syntax라는 것은 영어 사용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인위적으로 만든 것일 뿐이다(필자의 말이 아니고 미국인 신약학 교수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다).
우리가 한국에 가기 위해 짐을 싸고 있다면 우리도 “나 지금 한국 가” 라고 말할 수 있는 것과도 같다. 자동차로 가면서도 “나 지금 한국 가” 라고 한다. 걸프포트 공항에서 휴스턴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면서도 “나 지금 한국 가” 라고 말하는 것과도 같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지금 올라가고 있다” 라고 하신 것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제 승천하시려고 보따리를 싸시는 중이시라는 것이다. 이제 시간이 없다는 뜻이다. 빨리 가서 알려서 모두 모이게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특별히 강조하신 것은 “나의 아버지 곧 너희의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 이다. 마리아에게 알리라고 부탁한 것은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때문에 그를 믿는 자들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이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누구나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별한 관계가 된 것을 빨리 가서 다른 남자 제자들에게 알리라는 것이다.
당시 사회는 여자의 증언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인 마리아를 증인으로 삼으셨다. 그것도 당시 사람들이 벌레만큼도 안 여기던 일곱 귀신들린 여자를 이렇게 중요한 증인으로 삼으셨다. 뿐만 아니라 이제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가 되었다는 것도 가서 알리라 하셨다. 이것은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당시 세상 사람들의 사고를 완전히 뒤집어 놓은 혁명이다. 만약 오늘날 진보적인 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조작했다면 그 증인은 반드시 남자로 조작했을 것이다. 베드로나 요한이 먼저 만나서 예수님의 명령을 받아 전했어야 했다. 예수님이 아니라면 아무도 이렇게 세상 질서를 완전히 뒤집어 놓는 일을 할 사람이 없다.
18절은 1절과 똑같이 막달라 마리아가 갔다 라고 말한다. 한국어 번역은 다르지만 원어는 완전히 똑 같은 말이다. 1절에서는 빈 무덤을 보고 제자들에게 알리러 달려갔지만 이제 예수님을 직접 보고 들은 뒤 확신에 차서 다른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의 말씀을 전하러 달려간 것이다. 마리아는 제자들에게 가서 두 가지를 선포했다. 하나는 “내가 주를 보았다” 이고 다른 하나는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다. 세상에서 버림받았던 가장 천하고 더러운 여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으뜸 사도가 된 것이다. 사람들은 열두 제자들을 사도라 부르지만 요한은 마리아가 진짜 사도이고 으뜸가는 사도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12사도만이 공식적 사도라고 하면 마리아를 빼겠다. 그러나 바울 서신에서도 바울은 12사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지상사역과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하고 복음 전하라는 사명을 받은 제자들을 다 사도라고 불렀다. 만약 사도가 그리스도에 의해 보냄을 받은 자라면 막달라 마리아는 분명히 사도이다. 요한이 그렇게 증언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