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의사 김득구 아들, 맨시니를 만나다>
1982년 11월 13일.
미국 라스베이거스 ‘시저스 팰리스 호텔’ 야외경기장에서 타이틀 매치 막이 올랐다. 김득구는 13라운드까지 투혼을 발휘했지만, 정타를 많이 허용해 이미 전세는 기울었다. 김득구의 얼굴은 상당히 부어있었다.
그리고 운명의 14라운드. 공소리와 함께 달려 나간 맨시니는 왼손 카운터를 적중시켰다. 김득구의 몸이 비틀대자 이를 놓치지 않고 연타를 날린다. 오른손 스트레이트가 그대로 꽃혔고, 김득구는 쓰러지고 만다. 힘을 모아 일어나보지만 심판은 이 상태로는 게임이 계속 될수 없다고 판단했다. 결국 맨시니의 TKO 승리를 선언한다.
김득구는 최선을 다했다. 일방적인 열세 예상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선전을 한 것이다. 하지만 비운의 사건은 경기 이후에 시작되었다.
복싱의 룰을 바꾼 링 위의 비극
경기 후 링에서 의식을 잃은 김득구는 병원으로 옮겨져 뇌 혈전 제거 수술을 2시간 30분동안 받았으나 결국 뇌사 판정을 받게 된다. 이어 5일 후 한국에서 온 어머니의 동의 하에 산소마스크를 제거했다. 김득구의 불꽃같은 삶은 이렇게 끝났다.
그에게 약혼녀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 뱃속의 아기는 아버지를 단 한번도 볼 수 없게 되었다. 불행은 어머니에게로 이어졌다. 그의 어머니가 자신의 가난이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에 자책감을 느끼고 유서를 남긴 뒤 김득구가 죽은 뒤 3개월 후에 농약을 먹고 자살했다.
그리고 당시 경기를 진행한 심판인 리처드 그린도 김득구 사후 7개월 후에 선수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득구 선수의 사망으로 인해 세계 복싱계에는 거센 논쟁이 일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언론에서는 연일 권투의 잔혹성을 지적하였고, 미국 하원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청문회까지 열렸다.
결국 세계권투협회(WBA)를 비롯한 국제 권투기구들은 15회 경기를 12회로 줄이고, 스탠딩다운제를 도입하는 등 선수를 보호하기 위한 특단의 대책들을 마련하였다. 또 올림픽 권투 종목 역시 1984년 LA 하계 올림픽부터 헤드기어 착용을 의무화 했다.
이덕구에서 ‘김득구’가 된 사연
‘비운의 복서’ 김득구는 1956년 강원도 고성(호적에는 전북 군산 출생으로 기재)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이후 두 번의 재가를 한다. 원래 이름은 이덕구였지만 1967년 어머니가 김호열과 결혼하면서, 양아버지의 성을 따 김득구로 개명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김득구는 1972년 이복형제들과의 갈등으로 14살 나이에 가출하여 서울로 상경한다. 권투 선수가 되기 전에는 빵 공장 종업원, 볼펜 장사, 구두닦이 등의 힘든 일을 하면서 홀로 생계를 꾸렸다. 그리고 검정고시에 붙어서 천호상고에 입학했다.
김득구는 학교 복싱부에서 기량을 쌓다가 김현치가 관장으로 있던 동아체육관에 입문한다. 당시 동아체육관은 전호연이 회장으로 있던 극동프로모션과 양대 산맥을 이루며 국내 프로복싱계를 주도하는 굴지의 복싱 도장이었다. 당시 동아체육관에는 유명 선수인 박종팔, 황준석, 김환진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김득구는 처음엔 아마추어 선수로서 활동하다가 1978년에 프로로 전향했다. 1980년 12월 이필구를 10회 판정으로 누르고 한국챔피언 타이틀을 얻는다. 1982년 2월에는 예상을 뒤엎고 당시 ‘탱크’로 불리던 한국 라이트급의 1인자 김광민에게 심판 전원일치 판정으로 승리하며 동양챔피언이 되었다.
"맨시니 상대로" 조작된 랭킹
이후 김득구에게 행운이자 불행이 될 세계 타이틀 매치가 무르익게 되는데, 당시 WBA 라이트급 세계챔피언은 레이 맨시니였다. 잘생긴 미남형 얼굴의 맨시니는 백인으로는 드물게 세계챔피언을 거머쥐었다. 맨시니는 당대의 강자였던 WBC 라이트급 챔피언 알렉시스 라르게요에게 도전했다가 KO로 패하면서 WBA로 우회하긴 했지만 실력으로 볼 때 충분히 챔피언을 롱런할 수 있는 재목이었다.
당시 세계 복싱계에선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김득구가 레이 맨시니와 싸우게 된 것은 프로모터 밥 애럼의 농간 때문이었다. 김득구는 세계적인 강자들과 싸울만한 기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이 복싱계의 일관된 평이었고, 김득구의 프로모터인 김현치 관장도 김득구의 기량이 세계적인 수준에 못미친다는 것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인정한 바 있다.
레이 맨시니가 챔피언으로 활동할 때 이미 세계 랭킹엔 하워드 데이비스나 에드윈 로자리오 등의 쟁쟁한 복서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들이야말로 레이 맨시니와 챔피언 자리를 두고 일합을 겨루기에 부족함이 없는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뛰어난 외모로 흥행성을 갖춘 맨시니가 패배하는 꼴을 볼 수 없었던 밥 애럼은 랭킹을 조작하여 맨시니의 타이틀전 상대로 위협적인 상대들을 모두 거르고, 상대적으로 쉬운 상대인 김득구를 WBA 랭킹 1위로 만든다. 이렇게 하여 밥 애럼은 김득구를 레이 맨시니의 타이틀 유지를 위한 희생양으로 삼고자 했다.
평생 죄책감에 시달린 맨시니
사고 상대방이었던 레이 맨시니는 김득구의 장례식에 참석했고, 이후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맨시니는 김득구와의 경기 이후로 자책감에 빠져 공백기가 길었으며 예전의 패기있는 인파이팅 스타일을 구사하지 못하고 치고 빠지는 아웃복싱 스타일로 변했다.
맨시니에 대해 다룬 다큐에서는 불행했던 경기가 한 복서의 아까운 생명과 전도유망한 천재 복서의 커리어를 일찍 마감하게 했다고 말할 만큼 김득구의 사망이 그의 복싱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분명하다. 맨시니 자신의 입으로도 "그 경기 이후로는 복싱이 싫어져서 복싱을 하는 것이 괴로웠다"고 술회할 만큼 트라우마로 남게 되었다.
김득구를 소재로 한 영화 '챔피언'이 개봉할 당시 한국을 찾았던 레이 맨시니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김득구를 '강인한 전사'라고 칭찬하면서, 그의 죽음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바뀌고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려왔다고 말했다.
만약 하늘에서 김득구와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을 해줄 거냐는 기자의 질문에 맨시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무말 없이 끌어안아 주겠다"는 말로 주위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또한 '살인 복서'로 낙인찍힌 자신을 오히려 위로해 준 한국인들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함을 표하기도 하였다.
치과의사가 된 아들, 맨시니를 만나다
김득구 사망 뒤 깊은 슬럼프에 빠져 결국 은퇴하고 영화배우의 길을 걷게 된 맨시니는 2011년 6월 김득구의 유복자인 김지완을 수소문해 미국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다. 맨시니는 훌륭하게 자라준 김득구의 아들을 보자 눈물을 쏟아내면서 "이제 비로소 편히 살 수 있을 것 같다"라는 말로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어느 정도 털어냈다.
김득구 사망 당시 약혼녀 뱃속에 있었던 유복자 김지완은 치과대학을 졸업, 현재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