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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현궁 본채로 들어가기 전에 해설을 듣는 탐방객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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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둥상부 익공과 처마도리 아래에는 둥근 처마도리를 받치는 장여와 장여를 받치는 소로가 있어 집의 격조가 높음을 말해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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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채 집안의 여자들이 기거하는 행랑칸 툇마루에 걸터 앉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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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벽돌 굴둑이 있는 안채의 모습. 다락방 밑에 아궁이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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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채에서 내부 통로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아래 마당과 뜰을 오가는 통로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통과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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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현궁의 마당은 본래 사병들이 훈련도 하고 말과 마차 등이 대기하는 공간으로 잡인들의 접근은 얼씬도 못하는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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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현궁 마당에서 본 안채 전경과 외부 담장 |
[그린경제/얼레빗=최우성 기자]
운현궁은 본래 날씨를 살피던 서운관 앞에 있는 고개를 뜻하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의 사저로 고종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고종이 즉위한 뒤, 집터를 더 넓히고,
대원군으로서의 집의 권위를 부여받아 집의 이름도 운현궁으로 불렀으며,
이후 더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고 확장되어 그야말로 대궐 밖에 있는 '외궁'이 되었다.
고종이 등극한 후에도 왕의 나이가 어려 흥선대원군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섭정을 하여,
국내정치와 외교관의 면담이 이곳에서 주로 이루어졌으며,
명성황후도 왕비로 간택되기 전에, 이곳에서 궁궐의 예법을 익혔다.
따라서 운현궁의 솟을대문 안쪽에는 많은 수직장정들이 기거하여, 말과 마차들도 많이 있고,
수직사들은 대원군의 경호원으로 훈련도 하던 곳이었다.
운현궁의 외부 마당에서는 사랑채와 안채로 들어가는 문이 있는데,
사랑채로 통하는 오른쪽 대문은 솟을 대문으로 높게 설치되었고,
안채로 들어가는 문은 지붕의 높이가 낮은 대문으로 설치되었다.
사랑채는 현판을 '노락당(老樂堂'으로
집 주인인 대원군을 뜻하는 원로가 사는 집으로서의 당호를 나타내고 있으며,
안채는 노안당(老安堂), 이로당(二老堂)으로
모두가 노(老)자를 넣어 대원군과 그의 부인을 뜻하는 존칭의미가 들어 있다.
운현궁에는 이 외에도 건물이 여럿 더 있었는데,
당시 사대부 집안이면 어느 집이나 반드시 있던 사당이 있었고,
그 사당에는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과, 그의 할아버지인 은신군의 위패가 모셔졌었다.
또 당시에는 양식 건물인 '양관'도 있다.
양관은 1912년 일본이 왕족들의 회유를 위하여 서양식 건물로 지었다.
본래 사랑채인 노락당에는 남쪽으로 넓은 마당이 있었으나,
나라가 기울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사랑채 앞으로 경운초등학교가 들어서면서
운현궁의 모습도 축소되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운현궁의 사랑채인 노락당은 궁궐 건축 외에는 보기 드물게
기단을 3벌대(화강석 기단이 3단)의 높은 기단으로 하였고
기둥 위 장식도 몰익공장식(끝을 둥글게 마무리한 익공양식)에 처마도리도 둥근 굴도리를 썼다.
그 아래에는 장여와 소로를 두어 보기 드물게 호화롭고 품격있게 지었다.
내부 공간도 기둥간격을 넓게 하기 위하여 고주를 쓰고
우람한 보를 길게 걸어 넓은 실내공간을 만들어,
조선조 양반 사대부의 집 가운데서도 가장 크고 권위가 느껴지는 집이다.
운현궁의 안채인 노안당과 이로당은 사랑채보다 낮은 기단에
기둥 위 장식도 없는 민도리집(처마도리 아래 소로같은 장식재가 없는 집)으로 지어
사랑채와는 그 격을 달리하였다.
그리고 주인이 사는 집의 주변으로는 집안의 식솔들이 사는 곳으로 기단이 낮은 집으로 지었다.
한국의 전통건축에서는 집의 격도 그 집에 사는 사람의 격과 반드시 맞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서울에 많은 한옥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운현궁 같은 한옥은 궁궐 이외에는 보기 드문 고급 한옥이다.
비록 본래 전성기 운현궁 내 있던 집이 다 있지는 못하지만,
이만한 한옥을 답사하기는 쉽지 않은 운현궁이다.
당시에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세였지만, 역사의 부침에 따른 회한도 많이 간직한 집이다.
귀한 집을 둘러보며 근세 한국의 고단했던 역사를 되돌아본다.
이토록 큰 집이었지만,
밀려드는 서양 제국주의와 일본의 야욕 앞에서 대원군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 지금 보기에 커보이는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과,
그 경복궁의 근정전도,
북경의 자금성이나, 프랑스 베르사이유궁, 영국의 버킹검 궁전에 견주면 작아 보인다.
그만큼 세계는 넓고 크며 우리가 약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지금도 주변과 비교되는 일들이 많이 있다.
또 마찬가지로 우리의 주변에는 크고 야욕에 찬 4대강국이 늘 우리를 엿보고 있다.
우리는 그때나 지금이나 정신 바짝 치리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임을
운현궁을 둘러보면서도 새롭게 되새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