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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1. 묵상글 (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 너의 희망은 무엇이고, 너희 기도는 무엇인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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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1.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9.01 01:57
- 너의 희망은 무엇이고, 너희 기도는 무엇인가?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제가 조숙했는지 어른들이 부르던 <희망가>을 곧잘 따라 했고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 가사를 생생히 기억합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 다시 꿈 같도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이 가사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렸을 때 나의 희망은 뭐였고,
지금 나의 희망은 무엇일까?
어렸을 때 저의 희망은 오로지 하나였습니다.
사제가 되는 것.
중간에 제가 프란치스칸이 되었지만,
프란치스코의 제자가 되기에 어림없다고 생각되어 잠시 수도원을 나갔을 때는
신문 기자를 하면서 소설 쓰는 사람이 되는, 그런 희망을 가진 적도 있었지요.
그 후엔 꼭 짚어 얘기할 수 있는 희망이 있었던 같지는 않고,
굳이 얘기한다면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건설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전에 한번 얘기한 적 있듯이,
아직도 할 일이 많은 사람처럼 사는데, 그래도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새로운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이제 하기 시작한 점입니다.
새로운 희망이라면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의 희망이 아닙니다.
이전의 희망이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건설하는 것,
곧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가져오는 것이었다면
새로운 희망은 하느님 나라에 제가 들어가는 것이겠습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까지 저의 희망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떠나는 것이며, 세상을 아름답게 떠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저의 흔들림 없는 희망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이 세상에서 무슨 희망을 이제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의 희망을 꿈꾸다가는 도리어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머지않아 저는 제 건강을 근근이 유지하는 삶을 살아야 할 텐데,
이때 제가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희망은 없기에
그러기에 도리어 저세상에 희망을 둘 수밖에 없게 될 것이고
그 희망만이 절망이 아니라 저에게 희망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저의 기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뭘 달라는 기도는 줄어들겠지요.
건강을 주십사 기도하기보다는 아프더라도 하느님 원망하지 않게 해달라고,
아플 때 프란치스코처럼 백배의 고통을 더 주십사 하고 청하진 못하더라도
그 고통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견딜 수 있게 해달라고,
그래서 그때도 늘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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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1.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의 ‘출사표’이자 ‘좌우명’
“희년의 영성을 살자”
“새로운 노래를 주께 불러 드려라.
온 누리여, 주님께 노래 불러라.”(시편96,1)
오늘은 9월1일, 순교자 성월의 첫날이자 “제10차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기도의 날을 제정한후, 가톨릭교회를 비롯한 전 세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매년 9월1일부터 10월4일까지 창조시기를 보냅니다. 10월4일은 생태분야의 수호성인이며 그리스도교 모든 교파에서 사랑하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축일입니다.
올해의 창조시기는 창조세계와의 평화를 주제로 함께 기도하고 행동할 것을 권합니다. 그 어느때 보다 생태적 삶, 생태적 회심, 생태적 영성이 강조되는 때입니다. 9월의 순교영성은 생태영성으로 실현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마침 가톨릭평화신문 ‘비우는 노년의 삶’이란 컬럼난 일부도 한눈에 들어와 나눕니다. 이 또한 생태영성의 실천이겠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면을 잘 들여다 봐야 한다. 남은 시간이 적을수록 채우는 것보다 잘 비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욕심을 내려놓고 시간도 공간도 잘 비워야 한다. 떠난 후에도 내가 머물던 자리가 깨끗하고 아름답도록!”
레오 교황은 오늘 담화문을 통해 “피조물을 돌봄은 믿음과 인류애의 표현”임을 강조하였고, 어제 삼종기도후, “교회는 언제나 겸손의 학교, 모든 이들을 환영하는 학교가 되도록 하자”는 멋진 강론과 더불어 오늘 기도의 날에 언급하며 신자들의 분발을 촉구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함께, 우리는 오늘을 기념하고, 그것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 10월4일 창조시기까지 연장합니다. 800년전에 작성된 성인의 <형제인 태양 찬가>의 영성안에서, 그분의 선물을 망치지 않고 우리 공동의 집을 보호하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우리의 실천을 새롭게 하도록 합시다.”
이런 일련의 교회의 중요한 행사와 더불어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한 오늘 복음의 내용 역시 참 잘 어울립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출발에 앞선 출사표같고, 평생 삶의 지침을 천명한, 예수님의 평생 삶을 요약한 좌우명같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때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물론 우리 믿는 이들은 희년의 영성을 50년, 25년 마다도 아닌, 날마다 희년의 영성, 해방의 영성, 자유의 영성을 살아야 합니다. 희년의 영성은 생태적 영성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해방과 자유의 희년의 영성을, 생태적 회심과 영성을 살게 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바로 이 오늘은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현재의 ‘오늘’을 지칭합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예수님과 함께 자발적 기쁨으로 희년의 영성, 생태적 영성을, 순교적 영성을 사는 것입니다. 참 역설적인 것이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함과 더불어 배척을 당하신다는 것입니다. 희년 영성의 실천에 많은 장애물이 뒤따르는 부정적 어둔 현실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나온 예수님의 탄식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이어 예수님은 엘리야와 사렙타의 과부와, 엘리사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실화를 들면서 내자렛 고향인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만, 이들은 더욱 적대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여 산 위의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 했지만 예수님은 이를 정면돌파해 유유히, 홀연히, 미련없이, 홀가분하게, 참으로 자유인답게 이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시니 이 또한 놀라운 희년 영성의 실현이자 믿음의 기적입니다.
바로 해방과 자유의 희년 영성을 고스란히 전수받은 바오로 사도의 진면목이 죽음의 공포에 두려워하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주님의 재림을 언급하며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모습에서 유감없이 드러납니다.
“희망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
희망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당시 그리스 사람들은 대체로 내세를 믿지 않았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슬픔을 피할 수 없으며 결국은 십중팔구 염세주의, 허무주의의 늪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고, 부활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니 바로 이것이 우리가 고대하는 구원이요 영광이요 천국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온전한 해방과 자유의 희년의 영성을, 파스카의 영성을 살게 하십니다.
“하늘은 기뻐하라, 땅은 춤추라,
바다여, 우렁차게 소리 질러라
그 안의 모든 것도 소리 질러라.“(시편96,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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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1.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루카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후, 당신이 자란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며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그리고 “오늘 이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선언하십니다. 이 희년선포는 단지 빚진 이가 탕감 받거나, 눈먼 이가 보게 되거나, 혹은 억압과 묶인 것으로부터 벗어나거나, 가난한 이가 기쁜 소식을 듣거나, 하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죄나 어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진정한 해방인 것이 아니라, ‘빛’으로 나아갈 때라야 진정한 해방과 자유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진리이신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갈 때라야 진정 자유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희년선포’는 한 마디로, ‘에덴의 회복’, 곧 하느님께서 주신 본래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본래의 신원인 하느님의 자녀로 회복시키시며, 해방을 실현하십니다.
그러나 해방이 선포되고 빛이 왔건만, 고향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배척하고 죽이려고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 4,30)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언덕 위 벼랑에까지 그분을 떨어뜨리려 내몰아갔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가시는 그분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수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당신이 수난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직 오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때가 되면, 당신께서는 수난을 스스로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강제로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그야말로, 당신께서 원하지 않으실 때는 잡혀가지 않으시고, 당신께서 원하실 때에는 스스로 잡혀 나무에 달리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완고’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역하였습니다. 혹 오늘 우리도 완고함과 고집으로 형제를 불신하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지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주님! 오늘 저희가 결코 당신을 배척하지 않게 하소서!
제 형제를 배척하는 바람에 당신을 배척해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
주님!
원하시어 붙잡히시고 원하시어 빠져나가신 당신께서는
원하시어 고난을 받으시고 원하시어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벼랑에 내몰려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가셔야 할 길을 유유히 가시는 당신을 따라 유유히 걷게 하소서.
당신이 원하시는 바를 저도 원하게 하시고
당신이 원하시면 저도 유유히 걷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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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1.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부제님과 10년 동안 성서 공부했던 형제님들이 1박2일 피정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매 주일 독서와 복음 말씀을 중심으로 성서 공부를 하겠다고 합니다. 피정 중에 부제님은 대화의 방법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공감, 경청, 인정, 판단하지 않기, 상대방의 느낌보다는 내 느낌을 전하기’를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인정과 판단하지 않기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인정하지 않으면 상대방을 나의 주관대로 판단하게 됩니다. 상대방이 견해가 틀린 것이 아니라 나와는 다른 것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운전 중에 다른 차가 갑자기 끼어들면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판단합니다. 상대방이 운전 버릇이 없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면 화가 나고, 화가 나면 욕도 하게 됩니다. 톱과 뱀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뱀이 길을 가다가 그만 톱에 스치고 말았습니다. 그냥 지나가면 될 것을 뱀은 톱을 판단했습니다. 톱이 잘못했다고 판단한 뱀은 톱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뱀의 입은 더 큰 상처가 생겼습니다. 톱이 잘못했다고 판단한 뱀은 톱을 몸으로 감았습니다. 결국 뱀은 죽고 말았습니다. 판단은 감정을 화나게 하고, 그 화가 결국 파국으로 이어집니다.
저도 상대방을 인정하지 못해서 마음이 상했던 적이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달라스 오기 전에 중남부 꾸르실료 지도신부로 내정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서울 대교구 사제 모임 대표를 맡았습니다. 제가 선임이기에 맡게 되었습니다. 지난 5월에 북미주 사목 사제 협의회 모임이 있었습니다. 원하지는 않았지만, 투표가 있었고 제가 대표 사제가 되었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열심히 일해서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을 때 주님께서 칭찬하셨듯이 이왕 제게 주어진 일이니 기쁘게 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본당 사목에 충실해야지, 왜 그렇게 많은 직책을 맡았느냐는 말을 들었습니다. 거절을 쉽게 하지 못하는 저의 성격도 잘 알고, 저를 걱정해서 하는 말인데 저를 판단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상했습니다. 감정이 상하니 고운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배려와 걱정해 주어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판단하기보다는 먼저 상대방의 견해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생각을 하셨습니다. 좋은 결과를 먼저 찾았다면 예수님께서도 포기하셨을지 모릅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징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사사건건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위험한 선동꾼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와 희생보다는 영광의 자리에서 얻을 높은 자리만 꿈꾸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은 선택된 민족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은 혈연과 신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에게 은총으로 주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생각을 먼저 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갇힌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눈먼 이들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생각은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들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를 비롯한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에 신학과 교리의 기둥을 세웠습니다. 수많은 성인과 성녀들은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전에 먼저 좋은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모든 선의 근원인 하느님,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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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1.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참으로 현존하기 위한 선택!~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8월 31일 일요일- 서른여섯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종교간의 우애와 연대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보다 더 도움이 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리처드 로어 신부는 기도를 하느님의 신비 앞에 현존하고자 하는 수행이라고 설명합니다.
제 글을 잘 아시는 분이라면 누구나 제가 순간과의 즉각적이고 직접적인 접촉이 하느님과의 신성한 일치로 가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벌거벗겨진 채 방어적이지 않으며 비-이원론적인 현존이야말로 참된 현존을 만날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저는 관상이라는 주제에 수백 가지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저는 우리가 대부분 수백 가지 차원에서 이러한 관상에 저항하거나 부정하거나 회피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세상에서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간단한 것을 가르치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모든 신비는 그 자체로 여러 차원의 계시와 드러남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관상적 자각이라는 "생명의 나무"(tree of life)는 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수련기 때 스페인의 프란치스코 데 오수나 수사(friar Francisco de Osuna)가 가르친 '생각 없는 생각'(pensar sin pensar) 혹은 '전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것'(no pensar nada)이라고 하는 프란치스칸 명상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생각 없이 생각하는" 침묵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그 명상을 하다 여러 번이나 잠에 빠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그 기 명상법은 제가 그때까지 거의 전부라고 배웠던 말로 하는 기도나 공동 기도, 혹은 청원 기도의 틀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효과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기도는 과연 하느님/궁극적 실재와 접촉하는 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도가 우리에 관해서나 사건들에 관해서 하느님의 마음을 바꾸기 위한 시도는 절대 아닙니다. 기도는 우선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무한성과 신비, 그리고 용서와 같은 것들이 우리 내면에서 울려 퍼지게 하는 것입니다. 자그만 정신은 위대한 것들을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둘은 다른 주파수를 가진 채널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큰 정신은 큰 것들을 보고 알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채널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유사한 것이 그와 유사한 것을 알게 되어 있는 것이지요. [1]
제가 오랫동안 배웠고 가르쳤던 모든 것 중에서 저는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보다 더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실제로 시간이 증명해 낸 지혜입니다. 수많은 전통의 많은 지도자들은 이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에 대해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힌두교 스승들, 선승들과 티벳트 불교의 수도승들, 수피 시인들, 유대교 랍비들,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들 등이 그 예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는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회원들, 무지의 구름, 가르멜 수도회의 로렌스 수사(Brother Lawrence)등이 그런 이들입니다. 그리고 앨런 왓츠(Alan Watts)와 틱낫한(Thich Nhat Hanh), 에크하르트 톨레(Eckhart Tolle)와 같은 현 시대의 스승들 역시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현재의 순간이라는 이 진실되고 심오한 전통이 수많은 이에게서 잊혀진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회의 사제 장 피에르 드 코사드(Jean-Pierre de Caussade)는 이런 타입의 기도를 "현 순간의 성사"(sacrament of the present moment)라고 칭했습니다. 그의 저서 하느님 섭리에 순종하는 삶: 자기 포기(Abandonment to Divine Providence)에서 이 기도의 핵심 주제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겼다면, 우리에게는 오직 하나의 규칙만이 있게 됩니다: 그것은 현 순간에 머무는 의무입니다." [2] 현 순간 안에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현존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평범한 눈에는 숨어 계시긴 하지만, 종교가 이것을 더 복잡하게 만든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3]
우리 공동체 이야기
로렌스 수사의 소책자는 제가 소유한 가장 오래된 물건입니다. 저는 10대 때에 그 책을 제 할머니의 서재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제 삶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현존을 인식하며 깊은 영감과 무한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할머니가 1972년에 이 책을 어머니에게 주셨고, 어머니도 여러 해 후에 이 책을 저에게 물려주셨습니다. 이 소중한 소책자는, CAC가 오늘날도 저에게 위로를 주고 있듯이, 제 삶의 여러 시기에 저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Bridget W.
References
[1] Adapted from Richard Rohr, The Naked Now: Learning to See as the Mystics See (Crossroad Publishing, 2009), 105, 113, 102.
[2] Jean-Pierre de Caussade, Abandonment to Divine Providence, trans. John Beevers (Image Books, 1975), 81.
[3] Adapted from Richard Rohr, Living the Eternal Now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05). Available as MP3 download.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Bruce Tang, untitled (detail), 2019, photo, Japan,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지금 이 순간과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면, 거룩함이라는 것이 단순하고 평범한 리듬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는 웅장한 대성당이 필요없고, 다만 주방 식탁만 있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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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1.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우리에게는 적극적이고 강력한 희망의 눈과 마음이 필요합니다!
세쿼이아 나무(sequoia tree)는 높이가 최대 115미터까지 자라며 최대 수명은 3,000년 정도 된다고 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과 뉴질랜드가 원산지인 이 나무에는 특별한 비밀이 있다고 합니다. 이 거대한 나무는 불 때문에 성장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숲에 불이 나야만 나무가 자라기 시작한다는 말입니다.
산불이 나서 숲 전체를 다 태우지 않으면 이 나무의 씨앗 껍데기가 절대 열리지 않는다는군요.
뜨거운 열이 이 씨앗 껍데기를 쪼개고 잿더미가 흙에 섞여 자양분이 되어야만 이 나무의 새로운 생명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참 묘하지요?!
파괴처럼 여겨지는 것이 실제로는 생명의 시작이라니 말입니다. 비극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은 변화와 변모의 촉발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선포하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불과 같지 않습니까?! 그분은 우리의 통념을 뒤흔드십니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지금, 여기에서 가난한 이들과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에게 기쁜 소식과 해방과 새로운 시야가 열리기 시작한다고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그런가요? 정말로 지금, 여기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요??
자, 이제 영의 눈을 떠 봅시다! 지금까지의 통념으로가 아니라 새로운 희망으로 주변을 보자는 말입니다. 여전히, 아니 영원히 지금, 여기, 우리 가운데서 이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 복음의 실현을 위해 일하시는 하느님의 눈으로 말입니다!
지그문트 바우만(Zigmunt Baumann: 1925-2017)은 우리가 강력한 희망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그게 과연 이루어질까?" 하는 회의적인 시각이 아니라 "그건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일이야!" 라는 강력한 희망의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우만은 [희망: 살아 있는 자의 의무]라는 저서에서 몇 가지 중요한 성찰거리를 제시하는데, 그 중 하나는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주제입니다. 그것은 "창조적 변화를 만들어내는 실천에 참여하는 것"이며, "그 자체로 예측 불가능한 존재가 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자유롭게 되는 것"이라고 그는 강조하여 말합니다. 이런 인간은 질서와 위계를 중요시하는 사회에서 마찰을 겪을 수밖에 없다고 보지만, 인간의 행위는 반응일 뿐 아니라 생성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전제인지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여 말합니다!
바우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인간이 지닌 가능성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가능성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본래 심어주신 가능성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가능성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은 "내가 사랑할 수 있을까?..." 하는 소극적이고 피동적인 삶의 자세를 지니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는 사랑할 가능성이 충분해!" 하며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삶의 자세를 지니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더불어 복음을 궁극적으로 실현해 가시는 데 있어 전제되어야 할 가장 깊숙한 토대여야 합니다!
오늘은 이런 의미에서 젊은 미술가 달해 작가(정다혜)가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오늘의 화두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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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1.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잡혀 간 이들이 해방되는 희년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 여기서 ‘가난한 이들’은 다른 민족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정말로 가난했으니까요. 그들에게는 하느님도, 율법도, 예언자도, 정의도, 나머지 다른 덕들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하느님은 그분을 가난한 이들에게 보내어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을까요? ”잡혀 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가 그 답입니다. 우리는 잡혀 간 포로들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사탄에게 묶인 채 사로잡힌 신세가 되어 그에게 복종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잡혀 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바로 이 말씀과 그분 가르침의 선포로 눈먼 이들이 앞을 봅니다. 그런즉 그분의 ‘선포’는 잡혀 간 이들’만 아니라 ‘눈먼 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예수님께서 치유하여 떠나보내신, 짓밟히고 부서진 사람들이 바로 이 억압받는 이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 이 모든 것이 선포된 것은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운 해’로 돌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눈을
떠 보게 되고, 사슬에서 풀려나고, 모든 상처가 치유되는 때입니다.
-오리게네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20
버림과 그대로 둠은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
여행 중에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르셨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집으로 모셔 들였다(루카 10,38).
이처럼 우리의 사랑은 단일해야 합니다. 평등과 일치가 있는 곳이 아니면 사랑은 있을 수 없습니다. 주인과 종 사이에는 평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사이에는 평등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내와 남편은 서로 같지는 않지만, 사랑 속에서는 평등합니다. 이를 두고 성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은 남자의 머리나 발을 취하지 않고 남자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다(창세 2,22).
하느님이 남자의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신 까닭은, 둘로 갈라진 곳에서는 부족함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한쪽은 다른 한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아님”이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이 “아님”은 쓰라린 아픔 이외의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어떠한 평화도 자리하지 않습니다. 나의 손아귀에 사과 한 개가 쥐어져 있다고 해 봅시다. 그 사과는 나의 눈에 욕구를 불러일으키지만, 나의 입이 그 달콤한 맛을 보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반면에 내가 그것을 먹어 버린다면, 나는 나의 눈에게서 욕구를 빼앗아 버리는 셈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은 일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둘 가운데 어느 하나가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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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2. 빙엔의 힐데가르트, 정홍규
영성과 생활의 통합
오늘날 많은 이들이 삶의 의미를 추구하면서도 고갈되고 풍요와 안락을 추구하면서도 우리의 공동기반인 지구를 황폐화시키고 스스로 메말라 가는 것을 느낀다. 종교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많은 경우에 신앙과 생활이 다르게 별도로 움직인다. 전례, 의식에 참여하고 함께 활동하는 것으로만 당장 눈앞의 복을 기원하는 것으로만 채울 뿐, 일상생활에 당연한 부분들, 장을 보고 먹고 입고 일하는 것들은 영성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 또한 영성생활의 일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루하루 살아가고 사람들과 나누며 봉사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나와 우리 생활에 바탕이 되는 자연과의 나눔과 교류에는 마음을 쓰고 돌아보려 하지 않는다. 자신을 돌아볼 여유도 없는 바쁜 시간들이다.
이렇게 해서 창조의 세계 지구는 더더욱 황폐해지고 자연과 분리된 인간의 의식에선 경이로움과 신비함이 사라지면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몸과 영의 삶 또한 황폐해지고 이젠 곳곳에서 그동안 덮여 었던 이들의 증세가 심각하게 나타나는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환경과 영성의 회복을 추구하는 눈으로 현대 학문들의 성과를 분석하면서 밝혀진 것은 결국 모든 문화에 담겨있는 지혜, 모든 영적인 전통의 중심에 담긴 깊은 통찰 안에 일치되는 내용, 곧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상호 연결되는 관계에 놓여 있고 내재적인 것으로부터 초월적인 것으로의 역동적인 관계 안에서 지양되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깊이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이웃과 창조의 세계와 이어져 있는 나의 삶 안에서 구원의 창조를 이어가는 깊은 영성을 느끼도록 찾아가야 한다. 몸과 영이, 우리와 자연이 함께 어우러지며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고 일깨우며 지내도록 해야 한다.
사랑의 원리로 이어지는 창조의 과정에서 시대를 보고, 모든 창조물의 질서 안에서 대우주인 우주와 소우주인 인간의 연관을 보았던 12세기의 힐데가르트는 정신만이 아니라 몸의 오관을 통해서 다양한 방법으로 심층생태학적인 영성을 일깨운다. 우리 자신인 자연으로부터의 소외, 우리가 함께 하는 자연환경으로부터의 소외를 극복하고, 우리 자신의 신체기관들을 살아있는 체계인 땅(지구)에 통합된 부분으로 제험하며, 개인적인 자아의 한계를 “생태적인 자아’로 확대하도룩, 그리고 함께 하는 환경 안에서의 “연대적인 존재”로서 스스로를 의식하고 그런 의식에 머무르도록 이꿀어 주는 다양한 길을 제시하고있다.
일상생활 안에서, 자연의 모든 것들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접촉하며 이루는 관계 안에 있음을 깨닫게 하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고 내적인 기쁨을 불러일으키고 충전될 수 있도록 우리의 감각과 정신을 일깨워준다. 지금까지 영성적인 줄기에서 다루지 않았던 부분, 부족했던 부분들을 영성적으로 다시 살도록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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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1.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느 신부와 쇼핑몰 안을 걷고 있었습니다. 물건을 사러 간 것은 아니고, 쇼핑몰 안에 있는 어느 식당에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많은 상점이 있었는데, 그 신부가 갑자기 그 자리에 서더니 “저것 너무 멋있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명품을 파는 가게였습니다. 그래서 ‘신부가 명품을 좋아하네.’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그 명품 가게 안의 진열이 너무 멋있지 않냐면서 감탄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선 세종대왕 때에 지어진 ‘석보상절’이라는 불경 해설서에서는 아름다움의 ‘아름’을 ‘나’로 해석하고 있다고 합니다. 즉, 아름다움은 곧 ‘나다움’과 맞닿아 있는 감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순간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명품이 아니라 상품을 진열하는 방식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신부의 모습처럼, 남들은 모두 별로라고 말하는 것을 아름답다면서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차이를 가지고 있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이 차이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자기만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이는 다른 이가 바라보는 아름다움을 무시하고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각자의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루며 사는 세상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을 알리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공생활을 시작하며 나자렛 고향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일부를 봉독하고 나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은총의 말씀에 군중들은 놀라워했지만, 곧바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 4,22)라고 의문을 표시합니다. 함께 기뻐해야 할 중요한 순간에,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 틀린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이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고,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까지 합니다.
익숙함과 선입견 때문에 주님의 현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조화를 깨뜨리는 모습이 됩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 역시 간직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다양하게 활동하시는 주님을 자기만의 잘못된 판단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명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
주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시길 원합니까? 주님과 언제나 함께해야 우리의 구원도 가능하게 됩니다. 따라서 익숙함과 선입견으로 자기만 맞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주님의 기쁜 소식이 이루어짐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의 명언: 사랑을 주고 받는 것은 양방향에서 태양을 느끼는 것과 같다(데이비드 비스코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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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1.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 [big-llight]
■ 예수님 기쁜 소식을 지금 여기서 체험해야만 /
‘있는 나’라는 하느님 이름의 뜻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란다.
예수님은 그 하느님의 뜻을 ‘지금 여기’에서 실현하심으로써 믿는 이들에게 기쁨을 주신다.
믿음은 과거나 미래의 일이 결코 아니다.
과거는 이미 가 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우리 소관이 아니다.
믿음은 ‘지금 여기’에서 머뭇거림이 없이 당장 실천되어야 한다.
따라서 사랑하려면 지금 이 시각 여기서 다들 알게 해야 하고,
용서하려면 지금 이 시각 여기서 당장 해야 한다.
이사야 예언서의 내용이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 부어 주시니, 그분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다시 돌려주시고는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성경 말씀을 봉독하신 뒤 희년을 선포하시는 것으로 당신사명을 시작하신다.
그분께서는 구원사명의 첫발을 내디디시는 장면을 하나의 장엄한 의식처럼 행사하고 계신다.
어쩌면 교회의 다양한 의식은 우리를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도록 인도한다.
예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기억하고 살아 있게 해 주는 의식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참된 마음으로 주님 안에서 형제들과 함께하는 기도와 전례일 게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사명과 관련하여 지적하신 것에는 두 가지 사실이 돋보인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신 분, 곧 당신 자신이 메시아시라고 선언하셨는데,
이는 당신께서 구약의 가르침을 성취하는 분이시라는 거다.
둘째는 예수님 사명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것을 알리시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은 고향 나자렛에서 당신 사명을 많은 이 앞에서 선포하셨다.
그분의 이 사명은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온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이었다.
곧, 대희년(大禧年)의 정신을 이 땅에 실현시키심으로써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로움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시면서 예수님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고 당당하게 일리셨다.
희년이란 칠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안식년을 일곱 번 지내고 난 다음 해인 50년이 되는 해를 말한다.
희년에는 빚을 진 이는 빚을 덜고,
땅을 빼앗긴 이는 땅을 돌려받으며,
노예생활을 하는 이는 그 신분에서 해방된다.
이처럼 희년에는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된 모든 이에게 기쁨을 누리게 하는 것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단 한 번도 그 정신이 실현된 적이 없었다.
이제 이 희년의 정신은 예수님을 통해 완성될 것이다.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알리는 일이 예수님께서 장차 가실 방향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길을 가야만 할까?
어떻게 가는 게 그분의 길을 따르는 것일까?
이리하여 우리 모두는 그분께서 가신 그 길만을 따라 가야 한다.
물론 우리가 지녀야 할 이 사명은 지금 여기에서
그분의 기쁜 소식인 은혜로움을 만방에 선포해야 하는 것이리라.
그리하여 이 땅에 하느님의 참 모습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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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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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1.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신 뒤에 본격적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이 공생활의 첫걸음은 갈릴래아에서 하신 전교, 특히 나자렛 회당에서 하신 복음 선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이 예식에 독서자와 설교자로서 참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의 한 대목을(61장 참조) 찾아 읽으신 다음, 이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고국 땅으로 돌아왔으나 폐허가 된 도시와 이방인 차지가 된 땅을 보면서 고통받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와 희망을 선포하였던 예언자의 모습을 몸소 실행하시며, 당신 사명이 바로 그 예언자의 사명과 같음을 밝히십니다.
이렇게 당신 공생활 전체의 청사진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이나 죄인도 하느님께서 환대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당신 말씀과 삶으로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이기심과 욕구와 죄의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자유와 해방이 선물로 거저 주어집니다.
삶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해서 잘못된 선택을 하는 이들의 눈이 열리고 하느님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분을 만나고 받아들이는 모든 이에게, 모든 빚이 탕감되고 노예살이가 끝나며 정의가 올바로 세워지는 기쁨의 해가 현실이 됩니다.
그리고 이 기쁨의 해는 하느님 보복의 날이기도 합니다(이사 61,2 참조).
잘못한 이에게 벌을 주는 보복이 아니라, 당신 백성을 괴롭히던 가난과 억압과 고통이라는 악에게 하시는 보복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당신 자신처럼 아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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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1.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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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8&id=2116401&menu=4770
위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리스트에서 “서하”를 찿아 들어가세요.
게재가 안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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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1.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회당에 들어가십니다.
이사야서에서 구원을 노래하는 구절을 읽으시자
사람들이 예수님께 주목합니다.
지금까지 기다려왔던 메시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서의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 메시아로서 이 세상에 오셨음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예수님을 좋게 말합니다.
그러나 곧 사람들의 태도는 바뀝니다.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 부르면서
그가 메시아일리 없다는 생각에 도달합니다.
메시아 기대가 너무 커서
예수가 메시아라고 너무 성급하게 생각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성을 가지고 다시 생각해 보니
메시아는 어디에서 오는지 아무도 모르며
적어도 예수의 고향인 갈릴래아 나자렛이 아니라
예루살렘이 있는 유다 출신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엘리야와 엘리사를 언급하십니다.
나아만은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 다른 엘리사의 모습에
처음에는 엘리사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하지만 엘리사의 말을 받아들였을 때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칫 눈에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전부입니다.
물론 우리는 모든 것을 볼 수 없고
모든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판단은 한계가 있고
그만큼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판단이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못 보고 있는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은
항상 염두에 둘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을 때
나자렛 사람들처럼
예수님께 아무 것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나아만처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더 잘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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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1.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4,16-30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고향인 나자렛 고을 사람들이 지닌 ‘선입견’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들과 함께 어린시절을 보낸 ‘동네 사람’으로, 별 볼 일 없는 목수집안 출신 ‘노동자’로 보고 있지요. 그리고 자신들이 예수님에 대해 아는 그 내용이 그분의 전부라고 착각합니다. 그렇기에 그런 예수님이 놀라운 지혜를 가지고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자기들 눈에 보이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을 받아들였다면, 그분에게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놀라운 지혜를 통해 그분께서 하느님께서 자기들에게 보내신 ‘그리스도’이심을 한 눈에 알아보았겠지요. 그러나 ‘목수의 아들’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았기에, 자기들이 예수님에 대해 아는 것이 그분의 전부라고 속단했기에, 그분의 참모습을 알아보지 못한 겁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이유를 그들의 마음 속에 가득한 ‘교만’에서 찾으십니다. 유다인들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선민의식’이 그것이지요. 자기들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으로 뽑으신 유일한 민족이기에 이방인들보다 우월하다고, 자신들이 지금은 여러가지 이유로 로마의 지배를 받으며 고통을 겪고 있지만, 메시아가 오시기만 하면 강력한 힘과 권능으로 이방민족들을 몰아내시고 자기들에게 번영을 가져다주실 거라고 믿었습니다. 물론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는 마음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의 마음 속에 가득한 교만 때문에 사회의 작고 약한 이들을 무시하며 함부로 판단했다는 것이지요. 그랬기에 별 볼 일 없는 목수 출신인 예수님이 메시아일리가 없다는 잘못된 결론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그리스도께서 자기들 마을에 오셨는데도 ‘소 닭 보듯’ 하고 말았습니다. 그분 말씀을 한 마디라도 더 귀담아 들으며 마음에 새기고 따랐어야 했는데 말이지요. 그 결과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총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사렙타의 과부 이야기와 시리아 장수 나아만의 이야기를 상기시키십니다. 하느님께 특별히 선택된 민족이라는 ‘선민의식’과, 그런 자신들은 당연히 구원받을 거라는 ‘특권의식’에 사로잡혀서는 구원받기 위해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모습을 질책하신 겁니다. 선택된 민족이라면 선택된 민족답게 하느님께서 왜 자신들을 당신 백성으로 뽑으셨는지 그 이유와 의미를 생각하며 더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했어야 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자기들에게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적극적으로 헤아리며 최선을 다해 실천했어야 합니다. 구원은 그렇게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하는 이들에게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선물이기 때문이지요. 그건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지 세례를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그저 주일에 성당에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구원이 자동으로 보장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답게, 철저하게 주님 뒤를 따르는 추종의 삶을 살아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갖추게 되는 겁니다. 그 점을 생각하며 자기 모습과 삶을 성찰해보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라는 것이 오늘 복음이 주는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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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333
9월1일 [연중 제 22주간 월요일(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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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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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진호 비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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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자랑스러운 순교자들의 후예로서 녹색 순교를 적극적으로 실천합시다!>
오늘은 9월 순교자 성월 첫째 날인 동시에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저도 돌아보니 많은 성찰이 필요한 날인 것 같습니다.
물때가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적당히 먹을 만큼만 잡아야 하는데, 들고 올라오기 힘들 정도로 많은 수확물을 싹쓸이한 것을 깊이 반성합니다.
살짝 나이를 들어가면서 드는 생각입니다. 남은 세월, 길어봐야 20년인데, 이 시기를 어떻게 지낼까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남은 20년 잘 살아가기 위한 2가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2가지 계획이 다 피조물 보호와 생태 영성 실천과 관련된 것입니다.
첫 번째는 지구 살리기 운동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생태 환경 운동을 요즘 녹색 순교라고도 이야기합니다.
교황으로 선출되신 베르골료 추기경님께서 교황명을 무엇으로 하실 것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주저 없이 자연을 사랑하신 아시시 프란치스코로 정하셨고,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발표하셨으며, 기회 닿을 때 마다 하나 밖에 없는 공동의 집 지구를 살리자고 목청을 높이셨는데, 이런 일련의 노력은 그분의 녹색 순교 의지를 잘 반영한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많은 분들이 환경 파괴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강 건너 불처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강의 중에 빼놓지 않고 생태 환경적 회심을 호소하는 당부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요즘 순교에 대한 재해석이 이루어지면서, 순교도 여러 가지라고 강조합니다. 피를 흘리며 하느님을 증거⦁증언하는 적색 순교가 있는가 하면, 피를 흘리지 않더라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매일 다가오는 고통을 기꺼이 인내하고 수용하는 백색 순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강조되고 있는 또 다른 순교 한 가지가 있으니, 바로 녹색 순교입니다. 녹색 순교란 하느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시는 공동의 집인 지구를 살리기 위해 생태 환경을 배우고 실천하며, 생태적 각성, 생태적 회심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인간의 과도한 욕심과 이기심으로 인해 크게 훼손된 환경을 회복시키기 위해 과도한 소비문화를 성찰하고 소박하고 검소한 삶을 추구하는 것을 녹색 순교라고 합니다.
또 한 가지 계획은 이것입니다. 작아지기, 낮아지기, 단순해지기. 제 개인적으로 제 신앙 여정과 수도 여정을 돌아보며 하느님께, 그리고 수도회에 백번 천번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살았으면, 그저 그런 삶을 살았을 텐데, 만일 결혼했더라면, 꾸리꾸리한 제 성향상 몇 번이고 쫓겨났을 텐데, 수도회에 들어와서 정말이지 큰 복을 받았습니다. 하고 싶은 사목 원 없이 해보고, 요직이란 요직은 다 맡아보고, 전 세계를 다 다니고, 이만저만 복을 누린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남은 날들은 작은 일, 굳은 일, 형제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태도가 있습니다. 인상 쓰지 말고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콧노래를 부르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이 시대 순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 핏줄 안에 순교자의 후예로서 순교자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순교자의 후예로서 너무나 당연히 순교의 삶을 추구해야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 이 시대, 내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박해하는 요소가 어떤 것인가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박해하는 요소들과 맞서 싸우는 것이 바로 이 시대 우리에게 요청되는 순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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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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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가두는 것은 지금 당신이 가장 익숙한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아주 가슴 아픈 장면을 마주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가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처음 사람들의 반응은 놀라움과 감탄이었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러나 그 감탄은 순식간에 차가운 의심과 경멸로 바뀝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고,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자신들의 ‘익숙함’이라는 감옥에 갇혀, 눈앞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아는 ‘목수의 아들 예수’라는 낡은 상자 안에, 살아있는 진리 자체이신 분을 가두려 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익숙함은 분노가 되어,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내쫓고 벼랑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무서운 질문을 던집니다. 왜 우리의 영적인 삶에서, 가장 따뜻하고 편안해야 할 ‘고향’이, 종종 진리를 죽이려는 가장 위험한 장소가 되는 것일까요?
진정한 성장을 위해 우리가 떠나야 할 ‘고향’은, 단순히 태어난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나의 성공 경험일 수도 있고, 나의 지식, 혹은 나를 규정하는 세상의 평가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 ‘천재’라는 이름의 가장 화려한 고향에 갇혀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던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윌리엄 제임스 시디스(William James Sidis)입니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IQ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로, 생후 18개월에 뉴욕 타임스를 읽었고, 11살에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천재 신동’이라는 타이틀이 바로 그의 고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고향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엄청난 기대와 압박 속에서, 그는 점차 사람들을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익숙한 ‘천재 신동’으로 머물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버드를 졸업한 후 그는 교수직을 거부하고, 일부러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허드렛일을 찾아다녔습니다. 결국 1944년, 46세의 나이에 그는 보스턴의 허름한 단칸방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하지만 여기, 정반대의 삶을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설 ‘반지의 제왕’의 작가, J.R.R. 톨킨은 옥스퍼드 대학교의 교수라는 안락한 고향을 떠나, 수십 년간 ‘중간계’라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세계를 창조하는 고독한 길을 걸었습니다. 일론 머스크는 페이팔 매각으로 얻은 ‘안락한 백만장자’라는 고향을 떠나, 파산의 위험을 무릅쓰고 테슬라와 스페이스X라는 미지의 세계에 도전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법칙이 우리의 신앙생활, 특히 기도의 여정에서는 어떻게 적용될까요? 영적인 성장이란 끊임없이 과거의 익숙함과 편안함을 박차고, 새롭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그저 계속 염경기도, 묵주기도, 혹은 뜨거운 심령기도에만 머물며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제가 ‘더 높은 기도’라는 책을 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성장해야 합니다. 염경기도나 심령기도의 은총을 충분히 체험했다면, 이제 그 익숙함을 떠나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독서기도’라는 새로운 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독서기도가 편안해졌다면, 그 말씀을 나의 삶으로 가져오는 ‘묵상기도’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묵상이 익숙해질 때, 마침내 모든 생각과 말을 내려놓고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향심기도’와 ‘관상기도’라는 더 높은 봉우리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익숙해졌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 고향을 떠나야 할 때라는 신호입니다.
위대한 영성의 대가들은 모두 이 ‘떠남의 여정’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영혼의 성장을 일곱 개의 궁방을 차례로 통과해 나아가는 여정으로 묘사하며, 영혼이 안락한 ‘고향’에 머무르려는 위험에 대해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어떤 영혼들은 제삼 궁방에서 누리는 평화와 위안에 만족하여 더 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큰 불행입니다.” 그녀는 각각의 궁방에서 얻는 은총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만 마침내 일곱 번째 궁방에서 주님과 온전히 일치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가르멜의 산길’을 오르는 영혼에게, 우리가 이전에 느꼈던 기도의 달콤함과 위로라는 ‘영적 고향’마저도 기꺼이 포기하고 떠나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을 맛보려면 아무것도 맛보려 하지 마라. 모든 것을 알려면 아무것도 알려 하지 마라. 모든 것을 소유하려면 아무것도 소유하려 하지 마라.”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라는 말은 어찌보면 ‘고향에서 계속 환영받으려면 예언자가 되기는 포기하라.“라는 의미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익숙해졌다면 지금 자리를 박차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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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부제님과 10년 동안 성서 공부했던 형제님들이 1박2일 피정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매 주일 독서와 복음 말씀을 중심으로 성서 공부를 하겠다고 합니다. 피정 중에 부제님은 대화의 방법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공감, 경청, 인정, 판단하지 않기, 상대방의 느낌보다는 내 느낌을 전하기’를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인정과 판단하지 않기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인정하지 않으면 상대방을 나의 주관대로 판단하게 됩니다. 상대방이 견해가 틀린 것이 아니라 나와는 다른 것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운전 중에 다른 차가 갑자기 끼어들면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판단합니다. 상대방이 운전 버릇이 없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면 화가 나고, 화가 나면 욕도 하게 됩니다. 톱과 뱀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뱀이 길을 가다가 그만 톱에 스치고 말았습니다. 그냥 지나가면 될 것을 뱀은 톱을 판단했습니다. 톱이 잘못했다고 판단한 뱀은 톱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뱀의 입은 더 큰 상처가 생겼습니다. 톱이 잘못했다고 판단한 뱀은 톱을 몸으로 감았습니다. 결국 뱀은 죽고 말았습니다. 판단은 감정을 화나게 하고, 그 화가 결국 파국으로 이어집니다.
저도 상대방을 인정하지 못해서 마음이 상했던 적이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작년에 달라스 오기 전에 중남부 꾸르실료 지도신부로 내정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서울 대교구 사제 모임 대표를 맡았습니다. 제가 선임이기에 맡게 되었습니다. 지난 5월에 북미주 사목 사제 협의회 모임이 있었습니다. 원하지는 않았지만, 투표가 있었고 제가 대표 사제가 되었습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열심히 일해서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을 때 주님께서 칭찬하셨듯이 이왕 제게 주어진 일이니 기쁘게 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본당 사목에 충실해야지, 왜 그렇게 많은 직책을 맡았느냐는 말을 들었습니다. 거절을 쉽게 하지 못하는 저의 성격도 잘 알고, 저를 걱정해서 하는 말인데 저를 판단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상했습니다. 감정이 상하니 고운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다스리고 배려와 걱정해 주어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판단하기보다는 먼저 상대방의 견해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생각을 하셨습니다. 좋은 결과를 먼저 찾았다면 예수님께서도 포기하셨을지 모릅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의 표징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사사건건 예수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로마의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위험한 선동꾼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와 희생보다는 영광의 자리에서 얻을 높은 자리만 꿈꾸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은 선택된 민족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은 혈연과 신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이에게 은총으로 주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좋은 생각을 먼저 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갇힌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눈먼 이들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좋은 생각은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끌어들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를 비롯한 초대교회의 교부들은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에 신학과 교리의 기둥을 세웠습니다. 수많은 성인과 성녀들은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전에 먼저 좋은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모든 선의 근원인 하느님, 저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으시어 생생한 믿음으로 은총의 씨앗이 자라나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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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신 뒤에 본격적으로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이 공생활의 첫걸음은 갈릴래아에서 하신 전교, 특히 나자렛 회당에서 하신 복음 선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늘 하시던 대로 이 예식에 독서자와 설교자로서 참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서의 한 대목을(61장 참조) 찾아 읽으신 다음, 이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빌론 유배에서 고국 땅으로 돌아왔으나 폐허가 된 도시와 이방인 차지가 된 땅을 보면서 고통받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로와 희망을 선포하였던 예언자의 모습을 몸소 실행하시며, 당신 사명이 바로 그 예언자의 사명과 같음을 밝히십니다. 이렇게 당신 공생활 전체의 청사진을 제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이나 죄인도 하느님께서 환대하시고 사랑하신다는 기쁜 소식을 당신 말씀과 삶으로 선포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이기심과 욕구와 죄의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자유와 해방이 선물로 거저 주어집니다. 삶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해서 잘못된 선택을 하는 이들의 눈이 열리고 하느님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분을 만나고 받아들이는 모든 이에게, 모든 빚이 탕감되고 노예살이가 끝나며 정의가 올바로 세워지는 기쁨의 해가 현실이 됩니다. 그리고 이 기쁨의 해는 하느님의 보복의 날이기도 합니다(이사 61,2 참조). 잘못한 이에게 벌을 주는 보복이 아니라, 당신 백성을 괴롭히던 가난과 억압과 고통이라는 악에게 하시는 보복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당신 자신처럼 아끼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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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4,16-30: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예수께서는 회당에서 이사 61,1을 읽으신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18-19절)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 또 무엇을 위해서 사셔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예수님의 생애의 핵심을 드러내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이 성경 말씀을 읽고 나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 그분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고 그들을 가장 먼저 축복하셨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22절) 배우지도 못한 사람이 글을 읽는 것을 보고 신기해하지만, 은총의 말씀에 놀라면서도 그 말씀을 하찮게 여겼다. 예수께서는 왜 고향에서 기적을 행하지 않으시는지 엘리야가 사렙타 마을의 과부에게만 갔고, 엘리사가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고쳐준 이야기를 들어 설명하셨다. 주님의 이 말씀은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여 치유 받을 다른 민족들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나자렛 사람들은 이 말씀에 분노하여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 그들은 주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주님을 산 위 벼랑으로 끌고 가 거기에서 밀어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분은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아직 수난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말씀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신앙이 필요했는데, 신앙의 눈이 필요했는데, 그러한 눈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배경을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들의 마음과 눈은 가려져 있었으므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우리도 다른 이들 앞에 작은 구세주, 다른 구원자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항상 조그마한 일에서부터 주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을 전해줄 수 있는 우리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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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당신의 사람이게 하소서>
루카 4,16-30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당신의 사람이게 하소서>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ㄴ)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
당신께서 보내시어
떠나는 길에
첫 걸음에서
마지막 걸음까지
걸음마다 해방을
걸음마다 기쁨을
걸음마다 축복을
걸음마다 믿음을
걸음마다 희망을
걸음마다 사랑을
당신께서 보내시어
떠나는 길에
첫 걸음에서
마지막 걸음까지
억압을 가로질러 해방으로
체념을 가로질러 기쁨으로
저주를 가로질러 축복으로
불신을 가로질러 믿음으로
절망을 가로질러 희망으로
증오를 가로질러 사랑으로
당신께서 보내시어
떠나는 길에
첫 걸음에서
마지막 걸음까지
영원을 향한 지금여기에서
해방의 기쁨으로 축복하며
믿음의 희망으로 사랑하는
당신의 사람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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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복음은, 믿고 회개하는 이에게만 기쁜 소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16-24)
1) 예수님의 복음은,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면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만 ‘기쁜 소식’이 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한 소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마태 4,17) 아마도 나자렛에서도 회개를 강조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나, 회개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복음은 ‘듣기 싫은 소식’입니다.
22절의 “그러면서”는, 뜻으로는 “그러면서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은총의 말씀’이라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가난한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점 때문에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목수는 목수 일이나 할 것이지 어찌 예언자 행세를 하는가?”가 나자렛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는, “다른 곳에서 일으켰던 기적들을 여기서도 해 보아라.”인데, 예수님께서 다른 고을에서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들을 나자렛에서도 하라고 요구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나자렛 사람들이 영혼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현세적인 복을 받아 누리는 것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어쩌면 그들은 메시아 강생 자체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또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라는 말씀은, “다른 지역 사람들은 나를 믿는데, 너희는 왜 믿지 않느냐?”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전체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생각하면,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이방인들은 나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 믿는데, 하느님을 믿는다는 너희는 왜 믿지 않느냐?”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2) 그런데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듣기 싫어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님께 화를 냈고(루카 4,28),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4,29)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하신 것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 없이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이고, 또 이방인들도 하느님을 믿고 회개하는데 유대인들은 제대로 믿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것을 꾸짖기 위해서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뜻을 알아들었고, 그 말씀이 유대인들을 모독하는 말로 생각해서 화를 냈고, 또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방인은 절대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 또는 하느님께서는 이방인들을 구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고정관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부정하는’ 말로, 또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로 생각한 것입니다.
3) 나자렛 사람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독선적이고 폐쇄적인 모습은 복음의 반대쪽에 있는 모습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유대인들을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루카 3,7ㄴ-9)
진실하게 회개하지 않으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돌들만큼의 가치도 없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답게 충실하게 살아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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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연중 제22주간부터 우리는 평일 복음에서 루카 복음서를 읽게 됩니다. 그 첫날인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고향 나자렛으로 향하십니다.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여러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신 뒤에 고향을 방문하시는데(마태 13,54-58; 마르 6,1-6 참조), 루카 복음서에서는 고향 방문이 그분 공생활의 시작에 나타납니다. 루카 복음서의 나자렛 이야기는 예수님 활동의 서막을 올리며 앞으로 전개될 그분의 행적과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요약하여 미리 제시하는 기능을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활 전체는 구약의 예언, 특히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실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름부음으로 주님의 영이 내리셨다는 말씀은 세례를 받고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머리 위로 성령께서 오시는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3,21-22 참조)
그는 앞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는”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루카 복음서에서 전개되는 예수님의 활동들은 이 예언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그분을 따르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메시아의 앞길은 성공과 승리가 보장되는 듯 보였으나, 예수님께서는 이와 전혀 다른 수난과 패배의 길을 걷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겪을 그 비극적인 운명을 받아들이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 공생활의 장엄한 시작을 알리는 단락임에도 그 시작부터 위기에 놓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함께 그리고 있습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고을 밖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시는 모습은 뒤에 당신의 백성에게 배척당하실 모습을 암시합니다.
이처럼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 전체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공생활의 시작(나자렛 설교)에서 마침(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습을 그려보며, 그 여정이 죄와 죽음의 속박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구원하시는 길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이천 년 전 사람들에게 구원의 실현을 알리시던 이 말씀은 같은 복음을 듣고 있는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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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아테네 다음으로 큰 그리스 제2의 도시이며 마케도니아 지방에서 중심 도시라 할 수 있는 테살로니카에 있는 믿음의 공동체는 사도 바오로 입장에서는 이방도시인 것입니다.
이 도시가 크고 문화적으로 상위권에 있다는 것은 그 만큼 현실적이고 또 종교적으로는 그리스의 다신 사회이기에 사도 바오로에게는 선교하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그들에게 부활사상은 생소하리만큼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사도 바오로는 그들에게 강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테살로니카 4장 14절)
주님의 부활사상은 사도 바오로의 동족인 유대인들에게도 반대를 받아왔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는 주님에 대한 부활 뿐 아니라 그 분께서 약속하신 세상종말과 심판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지고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웅장하고도 상세한 설명은 복음의 핵심이면서도 이방 공동체에 새로움과 함께 확신에 찬 복음선포인 것입니다.
“명령의 외침과 대천사의 목소리와 하느님의나팔 소리가 울리면, 주님께서 친히 하늘에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러면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이들이 다시 살아나고, 그다음으로, 그때까지 남아 있게 될 우리 산 이들이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들려 올라가 공중에서 주님을맞이할 것입니다.”(테살로니카 4장 16절-17절)
주님께서 당신 고향이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 가십니다. 예수님께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건네받으시고 희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읽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의 기쁜소식’, ‘희년’을 알리는 예언서(이사야 예언서 61장 1절-2절)를 인용하시며 이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복음 4장 21절)
군중은 그분을 좋아하지만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아닌가?”(루카 복음 4장 22절)라며 언짢아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반응을 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복음 4장 24절)
그리고 이어서 이방인 사렙 과부에게 내리신 하느님의 기적과 나병환자 시리아 사람 나아만에게 베푸신 하느님의 기적 이야기를 하시며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신앙에 대해 암시하며 비판하십니다.
동네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비유의 말씀이 자신들을 가리키는 것을 알고 화가 잔뜩나서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몹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서 떨어트리려 하지만 에수님께서는 그들 한 가운데를 가로 질러 그곳을 떠나가십니다. 동네사람들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 그것도 별 생각 없이 바라보던 그 모습, 요셉의 아들이라는 그 옛날의 기억에 예수님을 가두어 버립니다. 그들은 이사야 예언 말씀의 성취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예 들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도 사람을 판단할 때, 외모로 풍기는 인상을 보고, 또 사람들의 말을 듣고 전체를 못 보고 한 부분을 봅니다. 그리고 그때의 상황과 자신의 심리에 따라 남에 대한 판단이 더욱 흐려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기억에 담아 둔 사람은 변할 줄 모릅니다. 우리도 잘 알지만 사람은 변하고 또 나름대로 성숙되어 갑니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그 사람의 기억은 변할 줄 모르고 그 사람에 대해 잘 안다고 하면서 함부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경험과 교훈의 말씀에는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라는 지혜로운 말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있는대로 볼 줄 알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기도와 오랜 수련의 덕목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색안경을 벗고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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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신부와 쇼핑몰 안을 걷고 있었습니다. 물건을 사러 간 것은 아니고, 쇼핑몰 안에 있는 어느 식당에 가기 위해서였습니다. 많은 상점이 있었는데, 그 신부가 갑자기 그 자리에 서더니 “저것 너무 멋있지 않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명품을 파는 가게였습니다. 그래서 ‘신부가 명품을 좋아하네.’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그 명품 가게 안의 진열이 너무 멋있지 않냐면서 감탄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선 세종대왕 때에 지어진 ‘석보상절’이라는 불경 해설서에서는 아름다움의 ‘아름’을 ‘나’로 해석하고 있다고 합니다. 즉, 아름다움은 곧 ‘나다움’과 맞닿아 있는 감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순간이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명품이 아니라 상품을 진열하는 방식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신부의 모습처럼, 남들은 모두 별로라고 말하는 것을 아름답다면서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차이를 가지고 있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이 차이를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자기만의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요. 그런데 이는 다른 이가 바라보는 아름다움을 무시하고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각자의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루며 사는 세상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을 알리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공생활을 시작하며 나자렛 고향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일부를 봉독하고 나서,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 은총의 말씀에 군중들은 놀라워했지만, 곧바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루카 4,22)라고 의문을 표시합니다. 함께 기뻐해야 할 중요한 순간에,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 틀린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이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고,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까지 합니다.
익숙함과 선입견 때문에 주님의 현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조화를 깨뜨리는 모습이 됩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 역시 간직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다양하게 활동하시는 주님을 자기만의 잘못된 판단으로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명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루카 4,30)
주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시길 원합니까? 주님과 언제나 함께해야 우리의 구원도 가능하게 됩니다. 따라서 익숙함과 선입견으로 자기만 맞다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주님의 기쁜 소식이 이루어짐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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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수님의 ‘출사표’이자 ‘좌우명’>
“희년의 영성을 살자”
“새로운 노래를 주께 불러 드려라.온 누리여, 주님께 노래 불러라.”(시편96,1)
오늘은 9월1일, 순교자 성월의 첫날이자 “제10차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 기도의 날을 제정한 후, 가톨릭교회를 비롯한 전 세계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매년 9월1일부터 10월4일까지 창조시기를 보냅니다. 10월4일은 생태분야의 수호성인이며 그리스도교 모든 교파에서 사랑하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축일입니다.
올해의 창조시기는 창조세계와의 평화를 주제로 함께 기도하고 행동할 것을 권합니다. 그 어느때 보다 생태적 삶, 생태적 회심, 생태적 영성이 강조되는 때입니다. 9월의 순교영성은 생태영성으로 실현되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마침 가톨릭평화신문 ‘비우는 노년의 삶’이란 컬럼난 일부도 한눈에 들어와 나눕니다. 이 또한 생태영성의 실천이겠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면을 잘 들여다 봐야 한다. 남은 시간이 적을수록 채우는 것보다 잘 비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욕심을 내려놓고 시간도 공간도 잘 비워야 한다. 떠난 후에도 내가 머물던 자리가 깨끗하고 아름답도록!”
레오 교황은 오늘 담화문을 통해 “피조물을 돌봄은 믿음과 인류애의 표현”임을 강조하였고, 어제 삼종기도후, “교회는 언제나 겸손의 학교, 모든 이들을 환영하는 학교가 되도록 하자”는 멋진 강론과 더불어 오늘 기도의 날에 언급하며 신자들의 분발을 촉구했습니다.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과 함께, 우리는 오늘을 기념하고, 그것을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축일 10월4일 창조시기까지 연장합니다. 800년전에 작성된 성인의 <형제인 태양 찬가>의 영성안에서, 그분의 선물을 망치지 않고 우리 공동의 집을 보호하며 하느님을 찬미하고 우리의 실천을 새롭게 하도록 합시다.”
이런 일련의 교회의 중요한 행사와 더불어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인용한 오늘 복음의 내용 역시 참 잘 어울립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출발에 앞선 출사표같고, 평생 삶의 지침을 천명한, 예수님의 평생 삶을 요약한 좌우명같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때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은 물론 우리 믿는 이들은 희년의 영성을 50년, 25년 마다도 아닌, 날마다 희년의 영성, 해방의 영성, 자유의 영성을 살아야 합니다. 희년의 영성은 생태적 영성을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해방과 자유의 희년의 영성을, 생태적 회심과 영성을 살게 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바로 이 오늘은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현재의 ‘오늘’을 지칭합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예수님과 함께 자발적 기쁨으로 희년의 영성, 생태적 영성을, 순교적 영성을 사는 것입니다. 참 역설적인 것이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함과 더불어 배척을 당하신다는 것입니다. 희년 영성의 실천에 많은 장애물이 뒤따르는 부정적 어둔 현실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나온 예수님의 탄식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이어 예수님은 엘리야와 사렙타의 과부와, 엘리사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실화를 들면서 내자렛 고향인들의 회개를 촉구합니다만, 이들은 더욱 적대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여 산 위의 벼랑까지 끌고 가 떨어뜨리려 했지만 예수님은 이를 정면돌파해 유유히, 홀연히, 미련없이, 홀가분하게, 참으로 자유인답게 이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시니 이 또한 놀라운 희년 영성의 실현이자 믿음의 기적입니다.
바로 해방과 자유의 희년 영성을 고스란히 전수받은 바오로 사도의 진면목이 죽음의 공포에 두려워하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주님의 재림을 언급하며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모습에서 유감없이 드러납니다.
“희망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음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와같이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죽은 이들을 그분과 함께 데려가실 것입니다.”
희망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당시 그리스 사람들은 대체로 내세를 믿지 않았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는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슬픔을 피할 수 없으며 결국은 십중팔구 염세주의, 허무주의의 늪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정체성을 새롭게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고, 부활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이니 바로 이것이 우리가 고대하는 구원이요 영광이요 천국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온전한 해방과 자유의 희년의 영성을, 파스카의 영성을 살게 하십니다.
“하늘은 기뻐하라, 땅은 춤추라, 바다여, 우렁차게 소리 질러라 그 안의 모든 것도 소리 질러라.“(시편 96,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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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너의 희망은 무엇이고, 너희 기도는 무엇인가?>
"형제 여러분, 죽은 이들의 문제를 여러분도 알기를 바랍니다. 희망을 가지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슬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 제가 조숙했는지 어른들이 부르던 <희망가>을 곧잘 따라 했고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 가사를 생생히 기억합니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만사가 춘몽 중에 또 다시 꿈 같도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노래를 부르는 이유는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이 가사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렸을 때 나의 희망은 뭐였고, 지금 나의 희망은 무엇일까?
어렸을 때 저의 희망은 오로지 하나였습니다. 사제가 되는 것.
중간에 제가 프란치스칸이 되었지만, 프란치스코의 제자가 되기에 어림없다고 생각되어 잠시 수도원을 나갔을 때는 신문 기자를 하면서 소설 쓰는 사람이 되는, 그런 희망을 가진 적도 있었지요.
그 후엔 꼭 짚어 얘기할 수 있는 희망이 있었던 같지는 않고,굳이 얘기한다면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건설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은, 전에 한번 얘기한 적 있듯이, 아직도 할 일이 많은 사람처럼 사는데, 그래도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새로운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을 이제 하기 시작한 점입니다.
새로운 희망이라면 이제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의 희망이 아닙니다. 이전의 희망이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건설하는 것, 곧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가져오는 것이었다면 새로운 희망은 하느님 나라에 제가 들어가는 것이겠습니다.
달리 말하면 지금까지 저의 희망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떠나는 것이며, 세상을 아름답게 떠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저의 흔들림 없는 희망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이 세상에서 무슨 희망을 이제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의 희망을 꿈꾸다가는 도리어 절망하게 될 것입니다.
머지않아 저는 제 건강을 근근이 유지하는 삶을 살아야 할 텐데, 이때 제가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있는 희망은 없기에 그러기에 도리어 저세상에 희망을 둘 수밖에 없게 될 것이고 그 희망만이 절망이 아니라 저에게 희망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저의 기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뭘 달라는 기도는 줄어들겠지요.
건강을 주십사 기도하기보다는 아프더라도 하느님 원망하지 않게 해달라고, 아플 때 프란치스코처럼 백배의 고통을 더 주십사 하고 청하진 못하더라도 그 고통을 하느님께서 주시는 고통으로 받아들이고 견딜 수 있게 해달라고, 그래서 그때도 늘 주님께서 함께하심을 느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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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4,21)
<또 하나의 순교의 삶!>
오늘 복음(루카4,16-30)은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는 말씀과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 당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이 희년 선포가 바로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이며, 이 세상에 오신 분명한 이유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4,18-19)
이 희년이 바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이며, 이는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인 인간을 넘어,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에게로 확장되어져야 하는 '기쁨과 자유와 해방의 나라'입니다.
오늘은 '열 번째 맞이하는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에 '찬미 받으소서(Laudato Si)'라는 두 번째 회칙을 반포하시면서, 창조 질서의 파괴와 기후 위기의 심각한 문제로 공동의 집인 지구가 죽어가고 있는 심각한 문제를 언급하셨고, 그리고 매년 9월 1일을 '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존재이며,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빚으신 우리의 형제자매들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입니다.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파괴한 우리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우리의 형제자매들인 하느님의 피조물들을 사랑하고, 그래서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지구공동체를 만드는 것, 이것이 '또 하나의 순교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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