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맛골을 아시나요?
피할 피(避), 말 마(馬), 길 길, 그러니까 말을 피해 다니던 길이라는 뜻의 피맛골(避馬)은 현재 종로 1가 교보문고 뒤쪽에서 종로 6가까지 이어지는 뒷 골목길을 말합니다.
조선시대 종로는 궁궐과 관가가 가까워 가마나 말을 탄 고관대작의 왕래가 잦은 큰 길이었죠. 조선 시대에는 하급 관료나 서민들이 큰 길을 가다가 '물렀거라' 외치는 고관대작을 만나면 길가에 엎드거나 서서 머리를 조아려 예의를 표했는데, 이게 얼마나 귀찮은 일이었겠어요? 그래서 백성들이 아예 큰길 뒤편의 좁은 골목길로 맘 편하게 다니게 되었죠. 그러다보니 골목길을 따라 빈대떡집, 해장국집, 선술집, 국밥집, 색주가 등이 번창하면서 서민들에게 사랑받는 장소가 되었다고 하네요.
일설에는 임금이 성균관에 납시면 호위 무관들이 성균관 동쪽이던 이곳에 말을 묶어두고 임금이 나올 때까지 피해있었다고 해서 '피맛골'이라 했다는 설도 있네요.
어쨌든, 피맛골은 서민들이 즐겨 다니던 거리로, 서민들이 즐겨찾는 선술집(조선 시대에 백성/관리들이 즐겨 이용했던 술집 형태로 반드시 서서 마셔야 하며, 앉아서 마시면 건방지다고 시비가 붙었다 하네요. 술값만 받고 안주값은 따로 받지 않았기 때문에 빨리 먹고 가라고 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과 국밥집이 즐비했고, 1930년대 중반 종로 1가에서 동대문까지 피맛골에 220여개의 선술집이 있었다고 하네요. 또 일제 때, 궁중 음식을 만들던 이들이 궁궐 밖으로 나와 이 일대에 명월관, 태화관, 국일관 등 큰 음식점(야인시대 김두한)을 차리기도 하였습니다.
현재는 종로 1가 교보문고 뒤쪽에서 종로 3가 (낙원상가, 탑골 공원 뒤쪽) 종묘까지만 명맥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더라구요.
맥아더 장군이 서울 수복 계획을 세우면서 서울 폭격 계획을 세울 때, 당시 주일 공사 김용주가 경복궁, 덕수궁 등 고궁과 4대문을 피해달라고 요청했고 다행이 맥아더 장군이 이를 받아들이는 바람에 피맛골이 살아남았다고 하네요.
이렇게 살아남은 피맛골이 산업화 과정을 거치면거 정치인과 건설업자들에 의해 지금의 상업시설 통로로 변해버리고 말았답니다 - 우리에게 문화 역사 보존 의식은 돈에 밀려 어디서나 홀대 당하지 않나요?
오히려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 미국인 문화비평가 스콧 버거슨이 산업화를 빙자한 무차별적 역사 문화 훼손에 대해 '피맛골에 대한 강간'이라며 다음과 같이 분개하고 있답니다:
"한국이 (생각하는) 외국 관광객 유치를 위한 최상의 방법은 피맛골과 같은 역사적인 랜드마크를 파괴하고 서구에서도 볼 수 있는 똑같은 모양의 영혼없는 현대적 고층 건물을 세우는 것으로 보인다. (역사적 랜드마크를 부수고 현대적 고층 건물을 세우는 것이) 외국 관광객들을 떼로 불러 모으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출처: <문화+서울> 2005년 창간호 '서울시 문화 정책은 있다?') '물렀거라'라는 말꾼 소리가 쟁쟁하고 일제 때 김두한이 지켜주었던, 역사의 거리 피맛골은 재개발이란 미명하에 사라졌습니다(항상 미명 하에 사라집니다). 지금은 고층 빌딩들이 자태를 뽐내고 있죠. 작년 촛불 집회 끝나고 들러 집사람이랑 한 잔 했던 기억이 새롭네요. 그 때 참 사람들 많이 와서 한 잔씩 했었지요...
참 안타깝네요. 항상 역사의 쇠잔한 모습만 본다는 것이 말입니다.
역사를 부수고 새 건물만 짓는 나라는 모래 위에 탑 쌓는 나라인데 말입니다.
조만간 피맛골에 들러 동그랑땡에 한잔 걸쳐야 할 것 같네요.
글을 마무리 지으면서, 피맛골이란 말이 정겹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슬픈 이름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딱히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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