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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요 14:1-7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요 14:1-7 / [길.진리.생명]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라. 2-3) 내 아버지가 계시는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있을 곳을 준비하러 간다. 모든 준비가 끝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항상 같이 있도록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도마가 말하였다. `아닙니다. 저희는 알지 못합니다.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6)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오지 못한다. 7) 내가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는 너희가 그분을 알았고 또 보았다'
제자 중에 있을 배신자와 예수의 떠나심, 그리고 베드로의 부인에 관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이야기를 듣고 근심하는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십니다.
근심하지 말라(1-3)예수께서는 제자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에 대한 말씀으로 근심에 싸여 있는 제자들을 권면하십니다. 예수께서는 근심과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믿음이라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믿음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진리와 약속에 기초합니다. 약속은 실현될 것이기에 제자들은 근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 세 가지 비밀을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가 많고, 예수께서는 이 거처를 예비하러 가셨다가 다시 오셔서 제자들을 영접하실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시는 이유는 바로 제자들을 위한 거처를 예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집, 거할 곳, 거처는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공간적 의미이기 보다는 하나님의 임재가 거하는 곳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적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이 모든 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이후에 이루어질 일들입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4-7) 예수께서 가시는 길은 제자들이 따라가야 할 길입니다. 그 길은 다른 많은 길 중의 하나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갈 수 있는 생명의 길입니다. 구원에 이르는 길은 다른 종교와 구분되는 기독교의 배타적 특징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에 이르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기에, 예수만이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 되십니다. 그런데 도마는 예수의 말씀을 공간적 관점에서 이해했기에 말씀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무지한 모습은 도마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동일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와 함께 하면서 배우고 따랐지만 그 삶과 가르침이 지시하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이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를 아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요 10:30).
적용: 두려움과 근심에 사로잡혀 있을 때 해결할 수 있는 신앙적인 방법은 진리의 말씀과 약속을 생각하는 데 있습니다. 당신은 근심과 걱정으로 괴로울 때 신앙인으로서 무엇을 생각합니까?
세상에 사는 동안 어떤 문제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그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해 주셨는지 살피고 그 말씀을 신뢰한다면 자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입니다.
< 설 교 >
예수님의 길, 하나님의 길
요 14:1-14 / 이수영 목사
오늘 본문말씀은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 중 하나가 당신을 팔아넘길 것이고 수제자 베드로는 세 번 씩이나 당신을 부인할 것이며 당신 자신은 제자들을 떠나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서 아버지께로 가시겠다고 예고하신 상황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자들이 당연히 가졌을 불안감을 덜어주시기 위해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 자신이 위태롭고 두렵고 괴로운 처지에 계셨을 터인데도 그의 말씀은 너무나 평화롭고 확신에 차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셨습니다. “근심하지 말라.”는 것은 현재 닥친 상황과 또 앞으로 전개될 상황 때문에 겁을 먹고 마음의 요동침에 의해 자신이 압도되도록 내버려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신 것은 근심하지 않고 마음의 평정을 지킬 수 있는 근거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임을 가르쳐주신 말씀입니다.
일단 제자들에게 믿음 안에서 근심하지 말 것을 당부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아버지께로 가심이 왜 필요하고 제자들에게 유익한 일인지를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설명해주셨습니다. 2-4절 말씀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가시는 길이 십자가를 지고 죽는 길이며 그러나 다시 살아나셔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길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제자들에게 하나님나라에 들어가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길을 여시는 일임을 상기시키신 것입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그들 모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임을 알려주신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하신 것은 하나님나라에 제자들이 거할 곳이 많지만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주님께서 지금 아버지께로 가셔서 다 예비하고 오시면 될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하신 것은 그 동안 여러 차례 말씀하신 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두고 가시는 길이 어떤 길인지를 그들이 다 잘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기대와는 달리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도마가 나서서 말한 것입니다. 5절을 봅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도마의 이 말은 사실상 예수님이 누구이시고 그가 왜 오셨으며 이제 무엇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지 하는 문제의 본질적 이해에 있어서 제자들이 전적인 무지상태에 있었음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당신의 존재와 사역에 대한 본질적인 가르침을 또 다시 요약하여 주신 것이 6-7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셨고 당신에 의해서가 아니면 하나님께 나아갈 다른 길이 없음을, 하나님을 알 길도 하나님을 볼 길도 없음을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신을 알고 당신의 길을 따르는 것이 진리와 생명을 진정으로 소유하는 유일한 길임을 확실히 가르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시고 곧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당신께서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셔서 아버지께로 가셨다가 다시 오시는 일만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문을 여는 길이며 그 하나님의 뜻을 믿고 따르는 것만이 구원과 영생을 누리는 길임을 재확인시켜주신 것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토마스 아 켐피스의 명상은 그 말씀의 뜻을 이해하는 데 유익을 줄 것입니다. 14세기의 신비주의 수도사였으며 유명한 책 “그리스도를 본받아”의 저자로 알려진 토마스 아 켐피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따르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길 없이는 갈 수 없고, 진리 없이는 알 수 없으며, 생명 없이는 살 수 없다. 나는 너희가 따라야 할 길이고, 너희가 믿어야 할 진리이며, 너희가 바라야 할 생명이다. 나는 거부할 수 없는 길이고, 잘못 될 수 없는 진리이며, 영원한 생명이다. 나는 가장 곧바른 길이고, 절대적 진리이며, 참된 삶, 복된 삶, 창조되지 않은 생명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뜻으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뒤따른 빌립의 말은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달아 알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을 또 드러냅니다. 8절입니다: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9-11절입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빌립뿐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아니 오늘날 수많은 신자들조차도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이 특수한 관계성과 신비한 일치성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많은 놀라운 일들로 인해 그것을 이해하고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결국 구원과 영생의 열쇄인 것입니다.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존재와 사역은 믿음의 대상임을 강조하신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믿음의 중요성을 가르치셨습니다. 12-1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하게 하며, 큰 일을 행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게 하며, 무슨 일이든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라.”는 말씀의 뜻을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더 큰 일들을 하게 되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그 뒤를 따르는 말씀 즉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말씀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하나님의 권능으로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그 열매를 맺게 되고 그 구원의 진리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며 온 세상으로 전파될 것인데 제자들이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을 목도하며 또 그 사역에 동참하게 되리라는 뜻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하신 말씀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기도 끝에 “예수님의 이름으로”라는 말만 붙이면 무슨 일이든 다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내 뜻을 하나님의 뜻과 일치시키고 내 목적을 예수님의 목적과 일치시켜 구하는 것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렇게만 하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의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가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중요한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 사이의 하나 되심입니다. 1절에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신 말씀, 6-7절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하신 말씀, 9-11절에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하신 말씀은 아들이신 예수님과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각각의 존재이시면서도 같은 한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밝히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고, 그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가 행하시는 일은 곧 하나님의 일이고, 그의 길은 곧 하나님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근 공중파 TV방송의 하나인 SBS가 이란 제목으로, 또 그 제1부에는 “예수는 신의 아들인가?” 하는 제목을 달고 제작하여 방영한 내용에 대한 우리의 답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그가 가신 길과 그가 우리에게 제시하시는 길은 곧 하나님의 길이라는 것은 성경의 증언이며 결코 양보할 수 없고 흔들리지 않을 우리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SBS는 지난 6월 29일부터 7월 13일까지 4부작으로 된 이란 제목의 제작물을 방영했습니다. 그 방송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할 뿐 아니라 그의 역사성까지도 부정하는가 하면, 기독교를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갈등과 전쟁을 유발하는 극단적 종교로 부각시키는 데 주된 목적을 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상업방송이라 하지만 공공성을 지닌 공중파 TV방송이 특정종교에 대해, 그것도 이천 년의 역사를 통해 곳곳에서 숱한 박해와 중상모략을 이기며 변증되고 검증되어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고 확산되었으며 오늘날 23억 인의 신자를 갖고 있는 대표적 고등종교인 기독교에 대해 악의적이고 심히 편파적이며 왜곡된 내용의 방송을 기획하고 강행했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헌법으로 보장된 자유민주주의국가에서는 자기가 속해있지 않고 잘 알지 못하는 종교에 대해 공개적으로 함부로 말하지 않는 것이 최소한의 상식이고 교양입니다. 그런데 그런 무식하고 몰지각한 일을 국내 3대 TV사의 하나가 저질렀다는 사실은 그 방송사가 거부할 수 없는 어떤 거대한 힘이 작용하지 않았나 하는 의혹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SBS는 그 방송의 기획의도가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뿌리를 찾고 종교 간의 화해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라 했지만 그것은 진실하지도 않고 제 분수를 알지도 못하는 일입니다. 그런 일은 상업방송인 SBS가 할 일도 아니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SBS가 종교 간의 화해의 길을 모색한다는 허울 좋은 기획의도를 내걸었지만 그들이 보여준 것은 기독교를 모독하고 이슬람교를 선전하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대표적인 세 집단이 있습니다. 하나는 김정일 북한정권이고, 다른 하나는 김정일을 맹신적으로 추종하는 남한의 범 종김 집단이며, 또 다른 하나는 이슬람 세력입니다. SBS가 이 중의 그 어느 집단과도 아무 상관이 없기를 바랍니다.
SBS의 방송으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강한 불쾌감과 분노를 느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방송을 기획하고 강행한 인사들과 그 방송의 의도와 행동에 동조하는 모든 세력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하고자 합니다. 요일4:1-6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그들은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누가 뭐라 해도 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고 유일하게 참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이것을 시인하는 이들이 바로 하나님께 속한 이들임을 기억합시다. 이것을 시인하지 않는 자들은 적그리스도의 영임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하나님께 속한 이들은 이미 악한 영, 거짓의 영, 세상에 속한 영, 적그리스도의 영들을 이겼다는 이 말씀으로부터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용기와 힘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길을 찾는 사람
요 14:1-6 / 조용기 목사
“길을 찾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인생과 길은 분리할래야 분리할 수 없는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는 논두렁길을 걸어가고, 오솔길을 통해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 길에는 온갖 들풀, 꽃, 곤충, 새, 짐승들이 함께 다니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많은 사람들이 다니던 마을 길, 우마차나 버스가 다니던 신작로, 철길, 바다 위를 다니는 뱃길, 하늘의 길을 나르는 항로 등등 온갖 길이 있습니다. 인간은 세상길만 갖고 살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한 단계 높은 눈에 안 보이는 삶의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영혼의 길인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의 길은 잃어버리면 찾아 나갈 수가 있지만 영혼의 길은 잃어버리면 찾지를 못합니다.
<본론>
1. 태어날 때부터 길 잃은 인생
그런데 가장 큰 비극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영혼의 길을 잃어버리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처음 조상되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하고 에덴에서 쫓겨나간 이후로 태생의 고향집에서 쫓겨난 아담은 그 후손들에게 길 잃은 채 태어나게 했었습니다. 우리는 부모 뱃속에서부터 아담의 씨를 받아 죄의 자녀로 태어난 것입니다. 죄는 바로 하나님과 멀어진 길을 잃어버린 존재인 것입니다.
창세기 3장 17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이와 같이 그는 먹지 말라한 선악과를 먹고 에덴에서 쫓겨나서 저주받은 땅에서 갈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게 된 것입니다. 에덴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수없이 아담은 하와의 손을 잡고 황혼길에 에덴의 언덕에 앉아서 내려다보고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에덴 담을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화염검을 두고 길을 막고 그들이 한발자국도 들어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창세기 3장 24절에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들은 길을 잃은 채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서 존재적인 절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삶의 근본 되신 하나님과 영혼의 고향을 잃은 채 세상에 방황하며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죽고는 어떻게 되는지 전혀 모릅니다. 매일같이 일어나고 일하고 자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만 생각하고 그 이후에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태생으로 우리는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인 것입니다.
전도서 2장 23절에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
평생에 근심하고 수고하며 살지만 그러나 길을 잃어버리고 마음속에 영혼을 찾는 간절한 소망이 있습니다. 돈이 있어도 마음이 무엇인지 허전합니다. 권력을 가져도 마음이 허전합니다. 명예와 지위를 가져도 마음에 텅 빈 공간을 채울 수가 없습니다.
전세계복음화운동(The Global Evangelization Movement)에 따르면 인구의 95.5%가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구상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중에 기독교는 33%에 불과합니다. 그 이외에는 62.5%가 불교와 힌두교,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를 믿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절대다수의 인간이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인간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 중에서 하나님을 찾고 영원을 사모하는 존재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가까운 침팬지도 교회당을 지었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인도에는 무려 5천만마리의 원숭이가 살고 있다고 하는데 원숭이가 가정예배를 드렸다든지 교회당을 지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동물에게는 모든 감각은 사람처럼 가지고 있지만 마음속에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이 늘 고향을 그리워하는 그 마음이 사람의 가슴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향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를 못할 따름인 것입니다.
2. 인간만이 영원을 사모하며 길을 찾음
인간만이 영원을 사모하며 길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전도서 3장 11절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다고 한 것입니다.
자나 깨나 잃어버린 고향을 찾는 마음 영원한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사람들은 유물론적 무신론자들이 있습니다. 영혼이나 하나님은 없다. 인간을 하나의 물질로 보는 자들로써 길이 없다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고 만다. 막스 레닌 공산주의는 이것을 이론으로 확립해서 인간은 물질이므로 죽여서 파묻어 버리면 흙으로 돌아가고 말고 영혼이라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이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아무리 그렇게 말을 해도 그들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소련 공산당이 무너지고 난 다음에 제가 제일 먼저 크렘린에 들어가서 부흥회를 열었습니다. 그 어마어마하고 무시무시한 크렘린 궁에 들어가서 우리 교회와 같이 생겼습니다. 그 궁에 들어가서 집회를 하는데 소련 사람들이 인산인해로 모이고 입추의 여지없이 모였습니다. 내 뒤에는 레닌의 동상이 그려져 있습니다. 레닌 동상 앞에서 저는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할 때 모든 사람들이 아멘으로 받아들이고 예수 믿을 사람 손 들으라고 하니까 모두다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못 생각했는가보다 싶어서 아니오 예수를 안 믿던 사람이 처음 예수 믿기를 원하면 손을 들으라고 하니까 또 다 손을 들어요. 그래서 왜 이러느냐 하니까 “우리는 처음부터 예수가 누군지 몰랐다. 공산주의사회에서 사랑은 물질로만 되어있지 영혼이 없다고 배웠기 때문에 영혼이 없다고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음속에 영혼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오늘 그것이 누군지 알았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나왔습니다. 소련이 무너지고 난 다음에 저는 소련 여러 도시에서 레닌그라드에 가서도 집회를 하고 우크라이나에 가서도 집회를 하고 또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집회를 하고 했는데 수만 수십만 명이 들판에 모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오는 것을 보았었습니다. 아무리 인간은 물질이요, 동물에 불과하다고 말을 해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고 있다는 증거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하나님 이외에 인간의 종교를 만들어서 인본주의적인 종교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예레미야 2장 13절에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하나님 이외에 우상과 사신을 섬기는데 섬기기는 섬기는데 생명이 없습니다. 웅덩이는 종교인데 종교를 만들었으나 터진 웅덩이라. 물을 가둘 수가 없습니다. 헛되이 신앙을 가지는 것입니다. 또 마귀의 미혹에 빠져서 그리스도를 잘못 믿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계시를 잘못 받아서 자기가 하나님의 사자라고 말하는 사람이 우리 한국에도 여러 명 생겼습니다. 자기가 재림주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가 야훼 하나님이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거짓말쟁이인 마귀를 받아 들여서 속아서 하나님을 찾되 잘못 찾아 거짓의 말을 듣고 자기가 재림주다. 자기가 바로 하나님이다. 자기가 심판자다. 이런 말을 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한이서 1장 7절에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지금도 미혹하는 적그리스도들이 우리 주위에 많이 횡횡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를 알고 정신을 차리고 깨어있지 아니하면 잘못하다가는 미혹되고 유혹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정신을 차리고 말씀 중심에 서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외여행을 할 때 꼭 필요한 것은 지도가 필요해요. 지도 없이 가다가는 길을 잃어버리고 한없이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꼭 지도를 자세히 보고 가는 길을 알고 여행을 해야 바른길을 찾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천국 가는 지도는 바로 성경이요 그 지도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여러 가지 형태로 말을 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전부 예수님께 가르킨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자가 없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5장 20절에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야 말로 참 하나님이시오 예수님이 영생입니다. “당신 영생을 받았습니까?” “몰라요.” 그렇게 하면 안돼요.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면 예수님이 바로 우리 영생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천국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이외에 다른 길을 걸어가면 안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천하에 종교는 많습니다. 지도자는 많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을 이름은 한분밖에 없습니다. 나사렛 예수인 것입니다.
이슬람교도였던 한 사람이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을 깨닫게 되고 영접하게 되고 기독교로 개종을 했습니다. 그 후 그는 교회 회교 공동체 집회에 잡혀 와서 심문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왜 마호메트를 배신하고 기독교로 개종했느냐?” 그렇게 물으니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세상을 살면서 길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가다가 보니 죽은 사람이 한 사람 누워 있고 그 옆에는 산 사람이 한 사람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합니까?” 이에 회교인들이 “우리를 놀리느냐, 당연히 산 사람에게 물어 보아야지.”라고 하자 그는 “제가 보니 마호메트는 죽어서 그 무덤이 메카에 있고 예수님은 무덤이 없이 살아났습니다. 그러므로 죽은 마호메트에게 길을 묻는 대신에 살아계신 예수님께 길을 물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 지도자들이 아무 말도 못했다는 그 이야기를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참 길을 찾기 위해 헤매지만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고 변함없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신 것입니다. 죽었다가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신 분 즉, 하늘 길을 증명하신 분은 예수밖에 없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은 예수밖에 없고 또 죽었다가 부활해서 하늘로 올라가신 분은 예수밖에 없습니다. 온 길 간 길을 아시는 분은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은 세상에서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피를 따라서 이 세상에 태어났고 수양과 도덕과 자기 나름대로 계시를 받아서 지도자가 되었다고 했는데 예수님은 아버지가 없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마리아에게 잉태해서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이요 완전한 사람이었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죄악을 다 짊어지고 그 빚을 갚기 위해서 십자가에 올라가셨습니다. 하나님 아들 예수님은 빚이 없기 때문에 자기 빚으로 십자가에 올라간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과 나의 죄, 불의, 추악, 저주, 절망의 빚을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올라가서 몸 찢고 피 흘려 빚을 갚고 감옥에 들어가서 사흘 만에 청산하고 부활해서 일어나서 빚을 다 훨훨 털어버리셨습니다. 예수님 몸에는 빛의 먼지가 붙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다 빚쟁이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활활 빚을 털어 버리고 자유와 해방을 얻은 삶이 되는 것입니다.
3. 참된 진리의 길
그리고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늘 길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전에도 제가 말씀했습니다만 어떠한 사람이 산길을 걸어가는데 길을 몰라서 인디언을 고용했습니다. 그 인디언을 따라가는데 산에 수풀이 우거지고 나무가 잔뜩 많고 돌자갈 밭이 있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보오~ 길이 없는데 당신 잘못 가는 것 아니요?” 그러니까 돌아오면서 싱긋 웃으면서 “내가 바로 길이요 나만 따라오면 틀림없어요.”그래서 길이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인디언만 따라가니까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천국이 어디 있는지 모릅니다. 여기에 있는지 우편에 있는지 좌편에 있는지 천리밖에 있는지 구만리장천에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어딘지 천국이 있는 줄 아는데 길을 몰라요. 길을 안다고 하는 사람들마다 다 자기도 길을 몰라서 죽고는 깨어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만이 죽었다가 부활하셔서 승천하시므로 예수님이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만 따라 가면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 따라갈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만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로 4절에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났다고 말한 것입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 죽음에서 살아나 일어나는 길을 알고 살아나서 천당 간 사람이 천당 가는 길을 아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20절에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은 살아날 뿐 아니라 하늘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므로 천국 길로 안내하실 분 즉, 성령 보혜사를 보내서 우리 마음에 성령님의 인도로써 깨닫고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따라가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성령은 바람과 같다 했습니다. 바람을 본 자 있습니까? 못 보았습니다. 바람을 만져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바람이 있는 것은 다 압니다. 바람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숨 쉬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본 자가 없고 만진 자가 없지만 예수를 깨달은 것은 여러분이 예수님을 만나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성령이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성령이 마음에 이해력을 주셔서 예수님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는 것도 성령님이 우리를 끊임없이 이끌어 주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없는 사람은 예수를 믿을 수가 없고 예수님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이끌어서 항상 예수님 품에 안기게 만들고 예수님을 따라 가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32절로 33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예수님이 약속하시기를 내가 하늘에 가면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을 받아서 너희에게 보내 주시겠다고 했는데 오순절날 성령이 이 땅에 임하신 것입니다. 그 성령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같이 계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인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바로 예수님의 영이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1절로 4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주님이 어디로 가는지 우리가 모르는데 어떻게 길을 압니까? 예수님이 바로 그 길인 것입니다. 주님은 2천년 동안 여러분과 나의 있을 곳을 예비해 놓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언제 육신의 장막집을 떠나도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서 영원히 있을 곳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4. 막힌 길을 뚫은 예수님
우리에게 막힌 담은 다 헐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외에 우리 앞길에 막힌 장애물을 제칠 사람이 없습니다. 종교도 철학도 수양도 도덕도 우리 앞에 막힌 장막을 제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 장막을 장애물을 건너가는 것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 섰을 때 절망했습니다. 건너갈 수가 없습니다. 그 넓은 홍해 건너서 어떻게 애굽을 피해서 가는 것입니까? 하나님만이 홍해수를 갈라놓은 것입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은 마귀가 막고 죄가 막고 사망이 우리를 막아서 조금도 천국 길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그 길을 예수님 혼자 십자가에서 마귀를 멸하고 죄를 멸하고 모든 사망의 세력을 멸해 버리고 길을 확 열어 놓고 만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이르렀었습니다. 응아~하고 태어날 때부터 벌써 사망에 잡힌 사람으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 앞길에 마귀가 막고 죄가 막고 사망이 길을 막고 있는데 그 길을 뚫을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이 세상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죽음을 헤치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죄와 마귀와 사망의 장애물을 재껴 버리고 우리에게 활짝 열린 문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뚜렷한 길인 것입니다. 이제는 여러분, 여러분 앞에 막힌 담이 없습니다. 장애물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처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영생의 길이 믿음을 통해서 활짝 열려 있는 것입니다.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귀에는 아무 소리 안 들리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어도 예수님이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참 길이 되고 거짓이 아닌 참 진리가 되고 예수님이 바로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로 20절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하나님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휘장이 막혀 있었는데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실 때 휘장 문이 쫙 찢어진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하나님께 나가는 문이 확 열려 있습니다. 어디에서나 예수 이름만 의지하고 예수 이름을 부르면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께 나아가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 이름만 부르면 예수 이름 가운데서 아버지에게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주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수양과 도덕을 닦아야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8절로 9절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잘나서 잘해서 훌륭해서 하나님 앞에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잘난 자도 못난 자도 남자도 여자도 어른도 어린이도 믿음으로 어떻게 믿느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고 로마서 10장 10절에 말한 것처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구주시며 날 위해서 죽었다가 날 위해서 부활했다고 믿고 입으로 고백하면 그 자리에서 즉시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을 받는데 10년, 20년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옆에 달렸던 강도가 숨이 끊어지기 전에 “주여, 주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 말했습니다. 그것은 언제 가서 모든 죄를 회개하고 잘못을 고백하고 교회 가서 예배드리고 할 시간이 없어요. 지금 못 박혀서 죽어 가는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주님, 주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그 말을 고백할 때 예수님께서 “오늘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굉장히 중요한 것이 마음에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마음으로 믿어도 입으로 부인하면 구원은 받지 못합니다.
제가 옛날에 육군 대위 한 사람이 암에 걸려 죽어 가는데 그 부인은 우리 교회 교인인데 그 남편을 구원해 달라고 해서 그 죽음의 침상 옆에 가서 제가 아무리 간청을 해도 “나는 군인이요. 당당하게 죽지 비겁하게 죽을 때 예수를 믿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비겁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냥 예수님은 나의 구주라고 말 한마디만 입으로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천국이 열립니다. 당신에게 천국과 지옥이 지금 선택 길에 있는데 입으로 예수님이 나의 구주가 된다고 말 한마디만 하십시오. 그러면 구원을 받습니다.” 끝까지 입을 다물고 말을 안 하고 죽었습니다. 그런 고집이 훌륭한 것 같지만 영원한 지옥 불에 탈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이름을 고백하면 문이 활짝 열리고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존 아담스가 나이가 많이 늙어서 하루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짚고 벌벌벌 떨면서 산책을 하고 있는데 주변 사람이 와서 인사를 하고 “존 아담스 대통령님 평안하십니까?” 그러니까 “존 아담스는 평안한데 그 집이 헐어서 말이 아닙니다. 지붕이 뚫어져서 물이 새고 파벽풍창이 되어서 기둥이 다 나오고 지팡이로 지탱을 해야 살수가 있습니다.” “아이구 저럴 수가 어디 있습니까? 과거에 대통령으로 지낸 분이 지붕이 다 무너지고 파벽풍창이 되고 기둥이 다 흔들려서 받쳐야 된다니 그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모금을 해서라도 그 집을 고쳐야지요.” 하니까 하하하 웃으면서 “모금을 해서 고칠 집이 아닙니다.” 모자를 벗더니만 머리가 다 빠진 머리를 보고 “기와가 다 떨어져 나갔습니다.” 옷을 이렇게 들추면서 갈비뼈 뼈가 보이거든요. “벽이 다 파벽풍창이 되어서 여기 기둥이 다 보입니다. 흔들려서 내가 지팡이로 내 몸을 지탱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존 아담스는 괜찮지만 집이 이렇게 헐었으니 이제 얼마 있지 아니하면 저 곳으로 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사를 가면 그곳에서는 주님이 나에게 영원히 살 집을 지어 놓았으므로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그런 말을 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저곳으로 이사를 가야할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영원히 있을 곳이 없습니다. 행인과 나그네로 지나가는 것입니다. 잠시 동안 좋은 집에 살았다고 해도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고 순식간에 그 날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날이 얼마나 빨리 가는지 모릅니다. 제가 어릴 때는 어찌나 한 달이 늦게 가든지 빨리 좀 가면 좋겠다 싶은데 요사이는 한 달이 자고 깨면 그냥 한 달입니다. 그렇게 쏜살같이 날이 지나가는 것입니다.
목사님 한 분이 말기 암 진단으로 3개월 시한부를 산다는 친구 부인의 병원에 문안을 갔는데 그 부인의 얼굴을 너무나 환하고 좋거든요. “사모님, 암이 걸려서 그렇게 고생한다면서 어떻게 얼굴이 환합니까?” 그러니까 그 부인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나는 병중에 있습니다만 그래도 지금 오늘 살아 있으니 살아서 우리 남편을 보고 우리 자식들을 볼 수 있으니 기쁘지요. 그리고 내가 아무리 아파도 내 마음속에 나는 소망이 있으니까 고통을 참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주님이 날 데리러 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언제고 내 숨이 끊어지자마자 나는 이 육신 떠나게 되고 예수님의 손을 잡고 영원한 집으로 갈 수 있는 소망과 꿈이 있고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고통 중에라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마음에 소망이 있고 꿈이 있고 믿음이 있으면 어떠한 역경도 견뎌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망을 잃어버리고 꿈이 없어지고 믿음이 상실되어지면 어떠한 고통도 견디지 못하고 넘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셔 예수님을 우리가 만나면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대학을 안 나와도 대학원을 안 나와도 석박사가 안되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내가 죄인된 사람이 예수 믿어 구원받아 천국 가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에서 해방된 것을 알고 이 세상에 의미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천국 갈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는 것을 알게 되므로 이 사람은 진리를 깨닫고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예수를 알고 진리를 알면 이 세상에 묶이지 않습니다. 죄악에 묶이지 않습니다. 마귀에 묶이지 않습니다. 육체의 삶에 묶이지 않습니다. 하늘나라를 향하여 즐거움을 가지고 유유히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예수님만 하늘 고향에 가는 길인 것입니다. 고향을 찾는 우리 마음은 예수님을 찾게 되면 만족하게 되고 그 길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신 사람은 구원의 길, 천국 가는 길, 믿음의 길, 소망의 길, 사랑의 길, 의의 길, 평화의 길, 기쁨의 길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길이 있습니다. 어둡고 캄캄한데 있지 않습니다. 담이 막히고 장애물이 막힌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 앞에 훤히 트인 길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아닌 길 찾은 사람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여러분은 길을 찾은 사람이요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길로 이끌어줘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영원한 길이요, 영원한 진리요, 영원한 생명이 되시고 여러분을 끝까지 여러분을 떠나지 않고 여러분과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하리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주님은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그는 십자가를 걸머지고 우리를 위해서 고통을 대신 당한 분이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가 좋을 때도 같이 계시고 고통당할 때도 함께 고통을 걸머지고 같이 계셔 주시는 것입니다. 이 예수를 의지하고 사는 우리에게는 영원한 소망과 기쁨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주님 우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항상 주님을 의지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 모두는 길을 찾고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길을 찾아가다 낭패와 실망을 당하고 고통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아무도 우리에게 참된 길이 될 수도 없습니다. 남편도 아내도 자식도 지위도 명예도 권세도 돈도 쾌락도 우리의 살길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의 살길은 우리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참 길이 되시는 것입니다. 생명의 길, 위로의 길, 우리에게 영광의 길, 승리의 길이 되시는 것이니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시고 살게 도와주시옵소서. 순식간에도 예수님을 떠나지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과 함께 사는 그것만이 참된 행복인 것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
요 14:1-3 / 정필도 목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33년 동안 계셨습니다. 33세 되신 해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후에 40일을 계시다가 승천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이 다 중요합니다마는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말씀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말씀이고,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이며, 또 하나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그 성령의 세례를 먼저 받아라. 성령의 세례를 받고 나서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하늘로 올라갈 때 옆에 있던 흰옷 입은 두 천사가 “지금 구름 타고 올라가신 주님이 너희들이 본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라고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을 말씀했습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말씀이 318번 나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자세하고, 확실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이 세상에 오실 때는 자기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장차 재림하실 때에는 만왕의 왕으로서, 심판주로 수많은 천군천사와 함께 영광 중에, 모든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오실 것입니다. 2천 년 전에는 마구간에서 초라하게 태어나셨지만, 재림하시는 주님은 영광중에 천군천사와 함께 모든 사람이 보는 가운데 오실 것입니다. 이때, 마치 알곡은 모아 곳간에 집어넣고, 쭉정이는 모아서 불태워버리듯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성도들은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과 함께 천국으로 가서 영원히 살게 되고, 남은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장 7절에 보면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모든 사람들, 예수님을 찌른 자, 예수 믿는 자들을 괴롭힌 사람들도 TV를 보듯이 전 세계에서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30~31절에는 「그 때에 인자! 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언제 오실까요? 마태복음 24장 36절에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신다고 했습니다. 만약에 누가 몇 날 며칠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말하면 ‘미혹의 영을 받았구나, 정신이 이상하구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도 그날을 모른다고 말씀하신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속히 오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2장 7절에 보면「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며 속히 오시리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7절에 보면 예수님이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노아의 때에 홍수 심판을 하시기 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일상과 세상일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하지만, 이 비가 심판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래서 홍수로 전부 멸하기까지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하던 대로 열심히 일하고, 먹고, 마시고, 놀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그렇게 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갑자기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밭에서 같이 일하는 두 사람이 있는데, 예수님이 오시는 날에 한 사람이 갑자기 없어집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늘로 올라가고 한 사람은 남게 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언제 오시든지 흠과 티와 책망받을 것이 없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가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워 오는 것을 알듯이, 예수님이 오시는 날이 되면 몇 날 며칠에 오시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그날이 가까워질수록 징조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4장 3~14절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그날이 되면 어떤 징조가 보이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천국 복음이 모! 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렇게 환란이 와도 여러분과 같은 사람들이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선교를 하여 땅 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면 그때야 예수님이 오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직전에 큰 환란이 있고, 그 환란 후에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라고 마태복음 24장 29~31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큰 환란이 오면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할 사람들이 있을 것을 예수님이 아시고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시고, 모든 것이 예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큰 환란이 와도 우리가 걱정할 것이 없고, 담대할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우리 주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사람에게는 심판이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5장 24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진실로 예수님을 영접했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심판의 대상이 아닙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도 예수님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심판이 없고, 오직 상급이 있을 뿐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2절에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상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신앙생활 하느라고, 믿음 지키느라고 얼마나 고생이 많습니까. 직장에서도 예수 믿는다고 얼마나 불이익을 받는 것이 많습니까. 예수 믿기 때문에 억울해도 참는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게 바쁜데도 시간을 내어서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섬기는 것,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꼭 기억하시고, 상을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상이 있을 뿐이지 심판은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 보면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때때로 환란을 당하도록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신앙의 지조를 지키고, 죽도록 충성하면 생?! 資? 면류관을 받는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가 행한 대로 상급이 있기 때문에 상 받을 일을 한 사람은 참 좋지만, 상 받을 일을 하지 않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예수를 믿어도 편하게만 믿으려고 하고, 봉사는 하지 않으려고 하고, 교회도 가고 싶으면 가고, 가기 싫으면 가지 않고, 예수를 믿기만 했지 도무지 상 받을 일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천국에 가서 죄송하고 부끄러울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 속지 마십시오. 이렇게 예수를 믿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왕에 예수를 믿는다면 하나님 앞에 상 받을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면 세 번 놀라게 된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나 같은 죄인이 천국에 들어가게 된 것에 놀라게 됩니다. 두 번째는 꼭 지옥에 갈 줄 알았던 사람이 천국에 와있는 것을 보고 놀라게 되는데, 이는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옆에 있던 강도와 같이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입니다. 세 번째로는 천국에 꼭 갈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이 지옥에 간 것을 보고 놀라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주를 위해서 사는 것 같았는데, 거듭난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열심을 가지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만 아는 죄가 많은데도 회개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빨리 회개하지 않고 내일로 미루다가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천국에 갈 사람 같은데, 지옥에 가는 사람은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마태복음 7장 21~23절에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 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볼 때는 ‘주여! 주여!’하고 기도하니까 신앙이 좋은 줄 알았고, 선지자 노릇을 하며 많은 권능을 보이니까 하나님의 종 중의 종이라고 하지만, 주님은 “나는 너를 모른다. 너와 상관이 없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고, 불법을 많이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주의 종들을 아프게 하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일은 많이 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나쁜 인간에게서 어떻게 이런 기적이 나타나느냐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24절에 보면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고 했습니다. 거짓선지자들, 거짓 그리스도인들도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미혹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장 9~12절에 보면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 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의 종들도 능력과 표적을 행합니다. 절대로 표적을 좋아하지 마십시오. 성령의 역사로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아무리 그런 능력이 나타나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고, 불법을 행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좋을 대로 사는 사람은 거짓 선지자라는 것을 알고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는 예수님이 언제 오시든지 맞이할 수 있도록 늘 준비해놓고 살아야 합니다. 둘째는 천국에 소망을 두고, 아무리 힘들어도, 환란이 와도 잘 참고 인내하면서 천국을 바라보면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주님 만날 날을 사모하면서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하면서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사는 성도들은 자연히 늘 깨어 기도하게 되고, 신앙의 지조를 지키게 되고, 죽도록 충성합니다. 주님을 만날 날을 사모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절대로 한눈을 팔지 않습니다. 그리고 억울해도 참고, 괴로워도 참으며, 깨어 기도하고, 거룩하게 살게 되고,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들은 타락하게 됩니다. 그들은 주님의 재림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주님이 한 십년 후에나 오실까?’하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방탕하게 되고,깨어 기도하지 않고, 회개도 하지 않고, 못된 짓을 많이 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것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의 재림에 대해 관심을 갖느냐 갖지 않느냐에 따라 길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1장 34~35절에 보면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 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날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조심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방탕하고, 술 취하고, 밤낮 먹고 사는 것만 생각하여 생활의 염려에 마음이 둔해져서 주님의 재림에 대해 생각하기도 싫고, 그러다 예수님이 오시면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48~5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여러분 누가 악한 종인 줄 아십니까? ‘주님이 더디 오실 거야. 주님은 앞으로 몇 년 후에나 오실 거야.’라며 사는 사람이 악한 종입니다. 그 마음을 품는 순간 악신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못된 짓을 하고,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예수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이 살다가 전혀 알지 못하는 날 갑자기 주님이 오시면 그 사람이 갈 곳은 어디입니까?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위험한 것이 ‘설마 내가 오늘 죽을까?’, ‘설마 오늘 예수님이 오실까?’라며 죄를 저지르고 마는 것입니다. 실컷 먹고 마시고, 음란한 짓을 하다가 내일 회개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은 사탄이 주는 생각입니다. 회개는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성령이 역사해야만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회개할 마음이 생기면 그 자리에서 해야 합니다. 문밖으로 나가다 마음이 변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늘 주시는 말씀을 마음에 잘 새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날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심판을 받고, 지옥 불에 들어가는 날이지만,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는 이 재림의 날이 가장 기쁜 날, 축복의 날입니다. 모든 수고가 끝나는 날입니다. 다시는 환란이 없고, 시험도 없고, 고통도 없습니다. 늙거나 병들거나 죽음이 없습니다. 아마 이날에 우리 모두가 너무너무 기뻐서 뛰고 춤추며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항상 그날을 바라보며 깨어 기도하고, 주님이 언제 오시더라도 흠과 티와 책망받을 것이 없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해놓고 사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요 14:1-6 / 조용기 목사
할렐루야~ 옆에 계신 분들에게 ‘하나님 집에 잘 오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십시오. 교회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 집이십니다. 세상에서 고생하며 한주일 살다가 아버지를 찾아와서 아버지 말씀도 듣고 아버지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 요구도 하고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 교회에 찾아오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서론>
저는 여러분에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이 제목으로 오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세계복음운동이 1999년 발표한 통계 자료에 의하면 전 세계 인구의 95.5%가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모든 인간 안에는 영원을 사모하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소원인 종교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기독교는 33%에 불과하고, 62.5%가 불교와 힌두교,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입니다. 그러나 세계 인구의 95.5%가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은 삶에 대한 불안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무언가 영적이고 절대적인 존재자를 찾아 헤매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인 것입니다. 종교를 왜 가집니까? 내가 이 세상에 살며 불안하니까 인간의 힘으로 헤쳐 나갈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있으니까 초인간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마음속에 잠재의식적으로 알고 있으므로 종교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동물들은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영혼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영혼이 있기 때문에 잘못된 종교를 가질 수는 있지만은 그러나 종교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살아 있는 동안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반드시 해봐야 되고 또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아무리 부귀영화 공명에 둘러싸여 있다 해도 그 순간에 죽음이 이를 향해서 돌진해 옵니다. 언제고 내 이 삶은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왜 살까? 무엇 때문에 사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안물어볼 사람이 없습니다. 이처럼 누구에게나 죽음이란 삶의 한계점이 주어져 있기 때문에 그 마지막 날에 이르기까지 바르게 살아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삶의 나침반을 꼭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이 망망대해의 인생의 바다에서 나침반이 없이 어떻게 바로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반드시 우리 앞길을 밝혀 주는 나침반이 필요한 것입니다.
<본론>
1. 목적이 분명한 삶
우리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기 위해서는 목적이 분명한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목적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은 취생몽사합니다. 술취해서 살다가 꿈같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왜 사는 이유를 모르고 살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아갈 때 반드시 삶의 목적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목적에 끌려가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대통령도 될 수 있고 국회의원도 될 수 있고 대학총장, 재벌, 예술가, 과학자, 군인. 무엇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높은 자기 인생을 종국적으로 끌고가는 목적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목적이 있는 과학자, 목적이 있는 대학교총장, 목적이 있는 대통령, 목적이 있는 예술가. 무슨 목적이 있어야지요. 목적이 없이 인생을 사는 사람은 취생몽사하고 마는 것입니다. 마음의 광야에서 방황하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마음 속에 목적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한없는 광야입니다. 이 광야에서 사람들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가 알지 못합니다. 무식한 농부라도 밭에서 일하다가 허리를 툭툭치고 일어나서 “휴우~ 사는게 뭐냐” 그러면 벌써 농부가 아닙니다. 철학자입니다. 종교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인생에 삶의 목적을 찾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느냐.
미국 기독교계의 지도자 존 맥스웰(J. Maxwell)은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의 차이점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삶의 목적과 비전이 있고,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현재만 보고 지금만 보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삶에 목적이 있어요. 삶의 비전이 있어요. 목적과 비전을 보고 달려가나 실패하는 사람은 현재 내 발등에 떨어진 불만 봐요. 현재 내 앞만 바라봐요. 목적을 알지 못합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목표가 사람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조사했는데 그 결과는 이렇습니다.
지능지수, 학력, 성장배경 등이 비슷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27%는 목표가 없고, 60%는 목표가 희미하며, 10%는 단기 목표를 갖고 있었습니다. 3%의 사람만이 분명한 장기 목표를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장기목표를 갖고 있던 3%는 25년 후 사회 각계의 최고 인사가 되었고, 단기 목표를 갖고 있던 10%는 사회의 중상층 인사가 되었습니다. 목표가 희미했던 60%는 중하위 층이 되고, 목표가 없었던 27%는 모두 최하위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목표가 이끄는 삶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삶의 목표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이처럼 큰 차이가 납니다. 또한 목표를 가졌다 할지라도 그 목표를 얼마나 분명히 가졌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은 크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적을 갖되 매우 분명한 목적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 귀한 삶을 취생몽사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방황하지 않고 어둠에 허덕이지 않고 살려면 빛과 진리 속에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어두운데는 빛이 필요한 것입니다. 거짓이 있는 곳에는 진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광야같은 인생을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빛과 진리 속에 살아야 되는데 그 빛과 진리가 누굽니까?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안그렇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참이라고 나는 생각을 하고 확신을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가지고 있는 마음의 죄책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사람들마다 마음에 죄책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로써 죄책이 있고 엄마는 엄마로써 죄책이 있고 정치인은 정치인데로 죄책이 있고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써 마음에 죄책이 있고 이 죄책이 다 마음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죄책을 매일같이 씻어내고 평안을 갖고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계셔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내 죄 때문에 몸찢고 피흘린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고 그 앞에 기도하고 죄를 씻고 평안하게 되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때가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에 먼지와 때가 몸에 붙어요. 그러나 먼지와 때가 묻으면 목욕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목욕을 안하고 먼지와 때를 묻혀놓고 있으면 그 사람은 불성실한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사람은 다 죄를 지어요. 그러나 죄를 회개할 수 있는 곳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회개 안하고 그냥 돌아다니면 버림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하고 용서와 마음의 의를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모실 때에 인생의 허무와 무의미에서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인생에 살고 있습니까? 삶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삶의 의미와 진리는 바로 나다. 돈이 진리와 빛도 의미도 아니고 권력도 빛과 의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는 얼마 안있다가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돈도 지나가고 권력도 지나가고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제가 50년 목회하는 동안에 우리 한국에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모든 대통령을 수없이 만나고 가까이 대화를 하고 함께 식사도 하고 여러 가지 토론도 했는데 지금 돌아보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꿈같아요.
이 세상에 인간은 누구든지 태어나면 사라질 때가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허무와 무의미에서 헤어나기 위해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그리스도 안에 살아야 우리가 허무와 무의미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죽었으나 천국에서 살아 있으니까 또 장차 만날터이니까 허무와 무의미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극복하고 영생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를 만나야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 25절로 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영원한 가정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아버지를 몰랐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 앞에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해서 우리가 죄사함을 받고 아버지 앞에 나와서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아버지는 우리 현재와 미래를 보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로 3절에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은 이미 미래가 다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여러분이 있을 곳을 다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평안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 집이 없다는 것은 굉장히 슬픈 일입니다. 더구나 이 세상을 떠나서 영원한 세계에 들어갔는데 영원히 있을 곳이 없는 사람은 영원히 버림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얼마나 슬픈 일인 것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있을 곳이 많고 우리 주님이 우리 손잡고 아버지에게 가서 인사드리고 아버지가 우리 위해서 예비한 천국 낙원으로 들어가 살게 되니 얼마나 기쁘고 즐겁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이와같은 큰 영광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미국 시카고에 있는 러쉬 대학 병원에서는 1천 200명의 노인들을 인터뷰하며 인생의 꿈과 목적을 질문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인생의 확실한 목표와 방향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5년 이내에 사망할 확률이 절반 정도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적이 없고 방향이 없는 사람들보다도 훨씬 오래 살았었습니다. 연구원들은 삶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스트레스를 억제하는 호르몬이 더 많이 나온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목적이 있는 사람 속에는 삶의 호르몬이 나와서 스트레스를 중화시키므로 빨리 늙지 않고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목적을 가지고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목적이 분명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빛과 진리 안에서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와 허무와 무의미에서 해방되고, 죽음을 극복하며, 하나님과 함께 참 행복을 누리며 살아갈 수가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 제일 중요한 것이 앞으로 영원히 살아갈 목표를 분명히 갖고 사는 것입니다. 목표가 이끄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더라도 궁극적인 목표에 보탬이 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늘나라와 하늘의 의를 먼저 구하면 그 이 세상에 사는데 있어 우리가 필요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어떻게 할까를 다 더하여 주겠다. 궁극적인 목표가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하늘 아버지께 가서 아버지를 모시고 영원히 사는 것이 나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 있으면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를 믿고 아버지를 찬양하는 것을 내 마음에 궁극적인 목표를 삼고 살면은 무엇을 하든지 그 아버지의 도움을 받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장사를 하더라도 아버지여 도와주시옵소서. 결국 나 아버지 섬기는 자식 아닙니까? 전쟁이 일어나면 “생명을 아버지여 구출하여 주시옵소서. 결국은 아버지를 내가 섬기지 않습니까?” 길을 잃어 방황하다가도 “아버지여 나에게 길을 이끌어 주시옵소서. 결국 나는 아버지의 자식 아닙니까?” 궁극적인 목표에 의지하여 살면 마음에 평안을 갖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2. 봉사와 헌신의 삶
그 다음에 우리는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무가치하게 살지 않고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아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며 살라고 성경은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 27절에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인간을 사는 목표는 내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을 찬양하되 또한 내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이웃 없이 나 혼자 못살지 않습니까? 남편이 있고 아내가 있고 일가친척이 있고 이웃사촌이 있고 우리는 이웃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을 섬기며 사는 것이 참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에 대한 참된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생을 사는 가치인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눅 10:33-35)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왜 여리고로 내려갔습니까? 여리고에는 농산물이 풍부하게 잘됩니다. 농산물을 예루살렘에 가서 팔고 도로 여리고로 내려갈 때는 돈을 많이 가지고 올라갑니다. 그러므로 도둑놈이 기다리고 있다가 돈을 빼앗기 위해서 거기 사람을 죽입니다. 한 사람이 거의 죽게 되었는데 아무도 이 사람을 돌봐주지 않습니다. 제사장이 지나가다가 그 사람 보고 “왜 조심해서 다니지 무엇하다가 강도를 만나 얻어 맞가 죽게 되었나” 고개를 설설 흔들고 지나가 버립니다. 성전에 일을 돌보는 레위인도 와서 보고 고개를 흔들고 총총 걸음으로 가버립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 유대인들이 개로 취급하는 사마리아인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이 사람을 보고 그는 짐승에서 내려서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이란 기름과 포도주 밖에 없으므로 포도주를 부어서 소독을 하고 기름을 부어서 유하게 만들고 자기 옷을 찢어서 붕대를 만들어서 감고 그리고 그를 자기 짐승에 싣고 주막에 가서 주막 주인에게 돈을 주면서 “잘 돌봐주시오. 내가 일끝나고 돌아올 때 부비가 더 들었으면 내가 갚아 주리이다.” 굉장한 선을 베풀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 말을 하시고 누가 이 사람의 참된 이웃이 되겠느냐? 말할 필요없이 선한 사마리아인인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인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욕을 얻어 먹고 무식하고 천하다고 했지만 그는 마음에 이웃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동정이 있었습니다. 이웃이 고난을 당할 때 자기의 것을 가지고서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웃에 무관심한 제사장과 레위인은 참이웃이 아닌 것입니다.
로마서 12장 15절로 16절에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우리가 이웃과 인생의 짐을 같이 걸머지고 사는 것입니다. 우는 자와는 같이 울고 웃는 자와는 같이 웃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우리가 도와주고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면서 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관심한 삶을 살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이웃이 죽든 살든 나만 잘먹고 잘입고 잘살면 된다. 그것은 인생을 잘못 사는 것입니다. 반드시 자기도 도움이 필요할 때가 오는 것입니다. 그때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제일 먼저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우리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이지만 그 궁극적인 목표 밑에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웃이 굶느냐. 이웃이 고통을 당하느냐. 이웃이 문제를 가지고 괴로워 하느냐. 관심을 가지고 이웃을 도와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오늘 인생을 살아가는데 굉장히 필요한 것입니다.
나는 우리 한국이 36년 동안 일본의 수탈을 당하고 6.25사변으로 모든 것이 다 파괴되고 그 어려운 가운데 경제재건을 해서 국민소득 2만 달러에 도달하게 되니까 우리가 오늘날 이웃을 돕고 있습니다. 아이티에서 지진이 나서 수많은 사람이 죽고 사람들이 올데 갈데 없을 때 우리가 많은 헌금을 드려서 이웃을 돕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이 사랑이 많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돕는 사랑의 손길을 계수하고 있는 이상 하나님은 우리를 더욱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라 그리하면 돌려 줄 것이니 곧 후이 되어 눌러서 흔들어서 넘치게 해서 안겨 주리라. 그냥 돌려주는 것이 아닙니다. 꼭 친정 어머니가 딸네 집을 돌아갈 때 “자, 이 포대 이것 열어라. 그리고 밀이나 쌀이라도 대어서 눌러서 흔들어서 넘치게 해서..”“아이 엄마 그러지 마라. 시어머니 보면 큰일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러한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과 행복 나누는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사랑과 행복나누기 운동을 통해서 이 사회에 밑을 들여다 보면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제가 2년 동안 은퇴하고 난 다음 사랑과 행복나누기 운동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고 고통당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너무 무관심의 대상이 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가서 고통을 함께 나누어 주고 사랑을 함께 나눠주면 얼마나 기뻐하고 좋아하는지 몰라요.
마태복음 25장 35절로 40절에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그때 의인들이 말하기를 “주님 언제 주님이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고 옥에 갇혔습니까?” “내가 이 적은 한 사람에게 하는 것이 바로 나를 위해서 한 것이다.” 몰인정하고 무정하게 사는 사람은 “주님, 언제 주님이 주리고 목마르고 나그네 되고 헐벗고 병들어서 옥에 갇힌 것을 보았습니까? 우리 그런 것 못보았는데요?” “이 적은 사람 한 사람에게 안해준 것이 내게 안해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이웃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다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다 주님이 창조한 인생이기 때문에 우리 주님과 연관성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 사람을 도와주는 것은 바로 예수님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도와줄 때 예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지극히 적은 자 하나에게 도움을 베풀어 주는 것이 곧 예수님께 도움을 베풀어 준것이라고 했으니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일인 것입니까? 우리가 도와주려면 나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무엇을 도와줍니까? 사마리아인이 뭘 가졌습니까? 여행할 때 마시려는 포도주하고 그 기름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기름은 하도 태양이 비취니까 피부가 건조해지므로 기름을 바르는 것입니다. 제게 가진 것이라곤 포도주와 기름밖에 없습니다. 그것 가지고 도와줬다.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기름으로 유하게 하고 입은 옷 찢어서 두루마기를 찢어서 붕대를 만들어서 도와준 것입니다. 우리가 있는 것으로 도우라고 하지 없는 것으로 가지고 도우라고 말안합니다. 이웃을 도와줄 때 내게 있는 것으로 광야에 나갔을 때 남자만 5천명, 부녀자 기만명이 왔을 때 예수님이 저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제자들이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조금씩 이 사람에게 줄지라도 3백데나리온이나 되는 떡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돈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린 아이의 보릿떳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이것은 상점에서 파는 것이 아닙니다. 집에서 만드는 형편없는 보리떡 5개와 물고기 2마리를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주님은 있는 것을 기쁘고 감사하게 받아서 축복해서 주니 5천명, 부녀자까지 합쳐서 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 배불리 먹고 12바구니가 남았습니다. 있는 것을 가지고 이웃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없는 것으로 도우라는 말 안합니다. 제가 사랑과 행복나누기 운동에 나가면 여러분이 물질로도 헌금하지만 실제적으로 옷도 주시고 신발도 주시고 약품도 갖다 주는데 있는 것을 내놓으면 그것을 가지고 나가서 이웃을 도와요. 그것만도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요한일서 3장 18절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말과 혀로만 사랑한다 돌본다고 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행위와 진실함을 바라보시는 것입니다.
신명기 15장 7절로 10절에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주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 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에게 필요한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주라 너는 반드시 그에게 줄 것이요 줄 때에는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말미암아 네 하나님 야훼께서 네가 하는 모든 일과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복받은 사람은 이웃의 가난한 사람에게 꾸어주는 것이 복을 더 많이 받는 길인 것입니다. 나는 복받은 사람인데 어떻게 해서 더 복을 받습니까? 복을 나누어 주면 더 복을 많이 받는 것입니다. 복을 나누어 주지 아니하면 있는 복도 뺏기는 것입니다.
1800년대 중반에 스위스 출신의 실업가요 은행가인 한 사람이 더 많은 돈과 권력과 명예를 얻기 위해 나폴레옹 3세가 있는 불란서로 갔습니다. 그의 야망은 나폴레옹 3세를 만나서 불란서와 스위스의 경제협력을 맺고 유럽 대륙의 부의 중심부에 서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 나폴레옹 황제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위해 이미 이탈리아 북부로 떠난 뒤였습니다. 그가 나폴레옹을 따라 전선으로 나갔다가 치열한 전투의 장에서 양국 군의 시체와 피 흘리는 부상병들의 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 그는 이 전장을 떠나면서 그 동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새로운 꿈을 갖게 된 것입니다. 적군과 아군을 막론하고 부상당한 군인들을 치료하고 돌보는 일을 해야 되겠다. 나아가 그는 민족과 인종을 뛰어 넘는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이룰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국제 적십자 운동이 탄생하게 된 배경으로 이 사람이 바로 적십자 운동을 창시한 앙리 뒤낭(Jean Henri Dunant) 이었습니다. 원래는 돈벌이하러 갔다가 전장터의 비참한 부상당한 병사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그는 세계 적십자사를 만들어서 적군이나 아군없이 사랑으로 돌보아주는 운동을 펼친 것입니다. 이 적십자 운동을 통해서 세계에 수많은 전쟁터에서 적군이나 아군의 사랑과 도움을 받은 것이 이루 말로다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와 권력을 위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에까지 뛰어들었던 그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인생의 올바른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 주위의 고통 받고 죽어가는 이웃을 위해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기꺼이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웃을 위해서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사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어느 마을에 작은 교회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 교회 안 뜰에는 교인들이 돈을 모아서 예수님 상을 만들어서 세워 놓았습니다. 그런데 연합군의 폭격을 받아서 예수님상이 깨졌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에 잿더미에서 예수님 상을 일으켜 보니 두 팔이 끊어져 버렸습니다. 두 팔이 잘려나간 예수님의 몸둥아리만 있는 동상을 갖다 놓고 교회에서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을 깨뜨려서 새로운 동상을 만드느냐. 하나는 팔 두 개를 만들어서 갖다 붙이느냐. 안그러면 팔 없는 예수님 동상을 그대로 세우느냐. 격렬한 토론한 끝에 교인들이 동의한 것은 팔 없는 그리스도의 동상을 그대로 세우자. 그리고 난 후 그 밑에 이런 글을 적어 놓자. “주님은 팔이 없습니다. 당신의 팔이 필요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팔을 통해서 사랑을 베풀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팔을 빌려주십시오.” 그 글자를 적어 놓았습니다. 그 동상에 서 있는 사람마다 그 동상보고 자기 팔을 봤습니다. 주님이 내 팔이 필요하다. 동상에 없으니까. 주님은 사랑의 주님인데 사랑을 베풀라고 하니 내 팔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여기 있는 이 팔로 주님의 일 안하면 안되겠구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일해야 되겠다는 심정이 들어오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그 교회가 그 사회에 크게 기여하게 되고 수많은 사람을 예수 믿게 했다는 간증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두 팔이 되겠다는 각오로 어려운 이웃을 위해 헌신의 삶을 살아가면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되고 행복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3. 가치 있는 삶
그 다음에 우리가 인생을 사는 것은 이제 내 자신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제1차 목표고 그 다음에는 이웃을 섬기고 셋째는 자신을 섬기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섬겨서 가치있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세월은 빨리 갑니다. 세월이 지나가기 전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시편 90편 10절에 보면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로 18절에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을 세 가지만 생각해 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활을 시위에 당겨서 탁 쏘면 화살이 한번 날라가면 다시 안돌아옵니다. 돌아와. 돌아와. 화살이 돌아와. 안돌아옵니다. 그냥 가버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말 한번 하고 담지 못하는 것은 참 고약한 일이지요. 제일 정치가들이 조심해야 될 것은 입을 조심해야 됩니다. 한번 뱉어 놓는 도로 걷을 수가 없어요. 세 번째는 시간입니다. 지나간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일단 잃어버린 젊음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이 시간을 정말로 아껴쓰고 행복하게 써야 되는 것입니다. 세월이 다 지나고 난 다음에 내 인생을 너무나 헛살았다고 탄식을 하면 얼마나 절망인 것입니까? 시간은 우리 삶 자체이며 우리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낭비 중에서도 가장 큰 낭비가 바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6절로 17절에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주의 뜻을 알아 가치있는 일로 인생을 보내야지 무가치하게 세월을 보내면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간을 아끼고 나를 향한 주님의 뜻을 분명히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우리가 가치있게 살기 위해서는 언제나 기뻐하고 감사하면서 살고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산다는 것이 우리가 자기가 정말 후회하지 않고 사는 인생인 것입니다. 자기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하지 않고 낭비하고 보내버렸다면 나중에 크게 후회하지 않습니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50년 목회를 뒤돌아보면서 마음에 후회가 없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50년 동안에 보통 사람은 다섯 번 5년간 휴가를 가집니다. 그런데 나는 한 번도 휴가를 가진 적이 없습니다. 50년 간에 70만 성도를 만들기 위해서 자고 깨고 쉬고 휴가가고 했다가는 그 못해요. 밤도 없고 낮도 없고 아침도 없고 저녁도 없고 겨울도 여름도 없이 뛰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괴로웠는데 지금은 지나고 보니까 휴가갔다가 와서 사는 저나 휴가도 못가고 목회하는 나나 같아요. 그때 나보고 휴가도 안가고 그렇게 산다고 좋은 일이 있을까 보느냐. 그렇게 말했는데 지금 그 친구들하고 나하고 만나보면 나는 과거를 돌아볼 때 후회할 것이 없고 만족하고 감사한데 그 친구들은 굉장히 후회가 많아요. 이것도 해볼걸, 저것도 해볼걸... 미병이 들어서 늘 걸걸 거리지만 나는 걸걸 거리지 않아요.
고린도전서 4장 2절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우리가 무엇을 맡든지 충성을 다해야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22절로 23절에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내가 사람을 섬기는 것도 주님을 섬기듯이 충성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고 누가 알아주겠노? 사람보고 알아달라고 할 필요 없어요. 내 양심이 알고 하나님이 알면 되었어요. 반드시 그 충성은 그 보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2004년 4월 “2003년 올해의 아름다운 중국 청년상”이라는 시상식이 중국에서 있었는데 한 젊은이가 휠체어를 타고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장원청 (張雲成)으로 25세인 그는 앞으로 3년 정도 밖에는 살지 못하는 근육병에 걸린 환자였습니다. 중국사람입니다. 장원청은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글씨를 터득하고 작가의 꿈을 향해 처절하게 싸웠습니다. 그가 글씨 한 자를 쓰는데 무려 6분이 걸렸습니다. 한자 글자 한자 쓰는데 6분이 걸려요. 하루에 그가 쓸 수 있는 글자수는 77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그가 17만 자의 육필 원고를 세상에 내놓았을 때, 13억 중국인들은 모두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흘만 걸을 수 있다면 어머니의 가녀린 어깨에서 무거운 물통을 내려 내 어깨에 지겠다. 또한 전력을 다해 일하고 돈을 벌어 어머니가 가장 드시고 싶어 하면서도 비싸서 차마 못 사 드시는 바나나를 사드리고 행복하게 모실 것이다. 이제 나에게 남은 삶이 얼마라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사람이라면 주어진 생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얼마나 내가 더 오래 사는가 생각 안한다는 것입니다. 얼마를 더 오래 살든지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서 충실하게 사는 것이 자기 의무라고 말한 것입니다.
정신의학자 퀴블러 로스(Elizabeth Kubler-Ross) 와 케슬러(David Kessler)는 죽음 직전의 사람들 수백 명을 인터뷰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인생에서 꼭 배워야 할 것들’을 받아 적어 책으로 엮었는데, 그것이 바로 「인생수업」이라는 책인 것입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떠올리는 것은 즐겁게 지낸 놀이의 순간이라고 합니다. 죽을 때 마지막 기억나는 것이 인생을 살 때 즐거워했던 그것이 마지막 기억에 난다는 것입니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면서 그들이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은“인생을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않았어야 하는데”라고 합니다. 행복하고 즐거웠던 순간을 떠올리며 미소 짓지 못할 때 이들은 가장 안타까워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인생을 성실하게 살고 기쁘게 살고 행복하고 살고 가치있게 사는 것이 죽을 때 기억나는 것입니다. 그 이외의 것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입니다.
퀴블러 로스는 이 책에서 우리의 비극은 인생이 짧다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너무 늦게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후회 없는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죽음이란 삶의 한계점이 있기 전에 지금이라도 빨리 남은 생애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살려면, 우선 사는 목적을 분명히 안 후에,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랑과 행복을 나누는 봉사와 헌신된 삶을 살아가야 하고, 항상 매일 기뻐하고 감사하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빛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만이 참으로 후회하지 않는 올바르고 행복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빛내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43장 7절에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서 우리를 지었고 우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하는 인생들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에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 존재의 모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되어서 우리 개인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한평생을 원망하고 탄식하고 가슴치고 울고 슬프게 살아서 뭐합니까? 행복하게 살아야 해요.
전도서 3장 12절로 13절에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사람마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인 줄도 또한 알았도다”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 이것 하나님의 선물인줄 알라. 수고하고 사는 인생 중에 낙을 가지고 살아야 돼요. 행복하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불평, 원망, 탄식하고 살면 인생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하게 살아야 돼요. 그러므로 우리가 부부간에 살아도 아내가 남편이 행복하게 인생을 살도록 협조해 주고 남편도 아내가 행복하게 인생을 살도록 협조를 해줘야 되는 것입니다. 나를 섬기라고 하고 내 중심으로 내 고집으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인생이란 같이 협동해서 사는 것이지.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면서 협조해서 사는 것이 인생이지. 내가 걸어가는데 전부 끌려오라고 이런 방식으로 인생을 살면 안되는 것입니다. 옛날 옛날 호랑이 담배 피울 때 그렇게 살았는지 모르겠지만은 요사이는 그렇게 살면 안돼요. 요사이 젊은이들 그렇게 사는 젊은이들 없습니다. 남편이나 아내나 서로 동등한 인격을 가지고 서로 도와주면서 살아야지. 지금이라도 여러분 생활의 방향을 행복해질 수 있는 방향으로 바꾸십시오. 많이 웃고, 많이 감사하고, 시간있으면 친구들하고 놀러도 많이 가요. 관광도 많이 가시고...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을 가지고 살게 되는 여러분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전남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로 올해 정년 퇴임한 국제정신분석가 이무석 박사가 의과대학에 다닐 때의 일입니다. 당시 교수님 중에는 고함지르고 욕도 하시는 매우 무서운 분이 한 분 계셨는데, 심지어 수술 중에 실수한 레지던트를 때려서 발로차서 내쫓았다는 소문이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수술실력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우리나라 최고의 찬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무석 박사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그분이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는 소문을 들었다고 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주일 예배 시간에 헌금 위원으로 봉사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무석 박사가 교수님을 만나 그 경위를 묻자 이렇게 간증하셨습니다. “나는 신을 믿지 않았어. 비과학적이라 생각했지. 의사 생활을 하면서 말기 암 환자들이 주변 사람들을 원망하고 욕을 하며 불안에 떨다가 죽어 가는 모습을 자주 보면서 그분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어. 그런데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환자가 있었는데, 그분의 얼굴은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어. 그분은 지독한 통증을 잘 참으면서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위로해 주었어. 내가 회진 나가면 그분은 언제나 나에게 웃으며 감사하다고 했어. 나는 그때 나라면 저렇게 죽음 앞에서 편안할 수 있을까? 저분에게는 무언가 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중에 그 이유를 알았는데 그분은 예수님을 믿고 있었어. 그분에게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시작이었지. 그후 주위를 살펴보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도 다르더라. 내가 예수님을 믿게 된데 대해서는 다른 이유도 있지만 그분의 영향이 제일 컸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결론>
인간은 누구나 삶의 한계점인 죽음 앞에서 불안과 두려움에 떱니다. 그러나 우리가 올바른 삶의 나침반을 가지고 삶의 목적을 분명히 하고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며 가치있는 삶을 살았을 때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미소지으며 감사하고 평안하게 죽을 수 있습니다. 안죽는게 제일 좋은데 그러나 죽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다 죽거든요. 사람은 어찌할 수 없이 죽는 것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요, 죽고난 다음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증명하시오. 당신 그 말했으니까 증명하시오. 당당히 증명했지요. 죽은 나사로를 죽은 지 나흘 만에 썩은 냄새가 나는데 무덤에 있는 것을 나사로야 나오라! 나왔습니다. 자기 자신이 죽어 무덤에 들어간 지 사흘 만에 일어났습니다. 증명했어요. 예수님 안에서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주를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는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 믿는 여러분은 죽음은 쇼에 불과한 것입니다. 걱정할 것 없어요. 지금 이미 예수 믿었으니 이제는 죽음이 없습니다. 상황의 변화에 불과하지. 육의 사람이 영의 사람으로 변화된 체험에 불과하지요.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확실히 알면은 죽음이 다가오면 조금 두려워 하려다가 그만두는 것입니다. 성령이 위로해 주기 때문에 마음에 평안이 다가오고 죽음을 극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한번 따라 말씀하세요. 첫째로, 목적이 분명한 삶을 살자. 둘째로,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자. 셋째로, 가치있는 삶을 살자. 그렇게 하면 올바르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후회하지 않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
요 14:1-6 / 김영규 목사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14-16장은 흔히 다락방 강화라고 합니다. 이 부분은 대중 설교가 아니라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행하신 유언적인 교훈들입니다. 내용은 주로 주님과의 관계, 장차 다가올 일들, 성령 강림을 비롯한 영적 세계에 관한 것들입니다.
14장 서두는 근심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1) (Mh; tarassevsqw uJmw'n hJ kardiva Let not your heart be troubled) “근심하다”는 말은 물이 출렁이는 모습입니다.(5:7) 이때에 제자들의 마음은 파도치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따라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신다고 하십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리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의 공동체는 어떻게 되며, 그들이 바라던 주님의 나라는 어떻게 세워집니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그들의 삶은 또 어떻게 됩니까? 이런 저런 근심이 파도처럼 몰려왔습니다.
오늘 나의 근심은 뭡니까? 제자들의 근심을 그래도 고상한 근심입니다. 주님을 잘 따르려는 근심이요, 주님의 일을 하려는 근심입니다. 오늘 우리의 근심은 신앙적인 것보다는 세속적인 것이 더 많습니다. 120세를 살았던 모세는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의 年數가 기껏해야 70이요 건강하면 80년인데, 그나마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날아가듯 사라집니다.”(시90:10) 산다는 것이 덧없을 뿐 아니라, 그나마 수고와 슬픔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살이를 ‘108 번뇌’로 표현합니다. 주님은 의식주에 매여 있는 사람들의 근심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6:25) 오늘 나는 무엇을 근심하고 있습니까? 신앙 문제입니까? 먹고 사는 문제입니까?
어떤 근심이든지 근심하지 마세요. 근심하지 말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일단 근심을 쓰레기통에 버리세요. 근심이 눈에 보이나요? 마음에 붙어 있는데! 그래도 우선 암 덩어리처럼 마음에서 떼어내세요. 소유하지 말고 처분하세요. 그리고 다음 명령을 기다리세요.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 다음 명령은 주님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근심의 해답은 믿음입니다. 주님을 향한 믿음이 근심을 매장하는 첫 번째 해답이고, 유일한 해답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믿고 또 별도로 예수를 믿으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예수님께 대한 신앙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믿는 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됩니다. 이 말씀의 강조점은 오히려 “나를 믿으라”는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 눈에 보이지 않으나, 예수님은 사람의 육체로 오셨기 때문에 눈에 보입니다. 먼저 보이는 예수를 믿으세요. 그러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주님은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것을 믿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사람 믿지 말고, 돈 믿지 말고, 재수나 운수 믿지 말고, 별 볼일 없는 지식이나 경험 믿지 말고, 자기 재주 능력 믿지 말라는 거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세요. 그러면 근심의 뿌리가 뽑힙니다.
믿음은 의심의 반대편에 있습니다.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으세요. 주께서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신 시점은 정말로 믿음이 필요한 때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때에 유다는 예수를 믿지 못하고 떠나가 버렸습니다. 수제자 베드로도 주님을 믿지 못해서 세 번이나 부인하리라 했습니다. 도마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은 주님이 가시는 길을 의심하면서 근심에 빠졌습니다. 이런 때에 필요한 것은 오직 주님을 믿는 믿음뿐입니다. 아무 거나 믿으면 안 됩니다. 믿을 만 한 대상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만 믿으세요.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근심을 버리고, 주님을 믿고, 그 다음은 비전입니다. 우리의 눈이 어디를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2) 주님은 아버지지 집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내 아버지 집”이 어디를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첫째는 장차 세상을 떠나서 들어갈 하나님 나라, 즉 천국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통해서 있게 될 하나님의 품입니다. 지상에서는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되었든지 공통점은 주님과 함께 산다는 점입니다. 땅에서 근심하지 말고,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땅의 거처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품에 살려고 하세요. 아버지 집은 나의 영원한 고향입니다.
아버지 집은 우리의 고향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동물에게는 回歸的 本能이 있습니다. 제비나 기러기는 철이 되면 자기 고향을 찾아 갑니다. 아무데나 다니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전에 머물던 곳을 찾아갑니다. 뭍을 떠난 뱀장어나 연어는 대양으로 다니다가 수년이 지나 성어가 되면 고향을 찾아 돌아옵니다. 오는 길목에서 잡혀 죽는 한이 있어도 상관치 않고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사람도 마찬가집니다. 몇 해 전에 소천하신 박석선 장로님은 일본에서 오래 사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망향의 동산에 산소를 마련하시고 그곳에 묻히셨습니다. 몸이라도 고향 땅에 묻히시겠다는 소원이셨습니다. 인간은 고향을 바라고 사는 존재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고향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하나님의 품입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좋은 집이 있다 해도 영원한 안식처는 아닙니다. 다만 나그네의 거처일 뿐입니다.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습니다. “거할 곳”(μοναι, mansions, rooms<μενω, live, stay) 이란 말은 거실이 많은 옛날 궁전을 의미합니다. 자유롭고 무한한 공간입니다. 요즘 서울시의 주택 보급률은 97% 정도 됩니다. 주택수를 가구 수로 나눈 비율입니다. 그러나 자기 소유의 주택에 사는 사람은 60% 미만입니다. 사람마다 내 집 마련을 위해 허리띠 졸라매고 내 집이 생기는 그날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그래서 마련한 공간이 얼마나 되나요? 25평, 30평, 40평 50평. 그만 해도 자랑스런 나의 공간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품은 무한히 넓습니다. 유지비도 세금도 없습니다. 그곳은 누가 훼방하지도 않습니다. 다툼이 없습니다. 평화롭고 기쁘고 즐겁습니다. 모두 다 그곳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예전에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산에 올라가 밤새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집집마다 비취는 불들이 별처럼 많이 보입니다. 아파트도 빌딩도 맨션 주택도 한 점의 빛으로 보입니다. “저 집집마다 여러 식구들이 있겠지? 저 먼지 같은 좁은 곳을 서로 차지하려고 누가 부자냐 따지고, 서로 네가 잘 났네 내가 잘 났네 다투는구나!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시야를 조금만 높이세요. 서울 시내 바닥에서 육칠백 미터만 눈을 높여도 세상이 부질없게 보입니다. 우리의 눈을 더 높인다면 세상 근심은 싹 없어질 것입니다. 거할 곳이 많은 아버지 집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영원한 고향을 볼 때 우리는 참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안식처를 준비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주님은 우선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2)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거처를 예비하러 가십니다. 거처를 예비한다는 것은 하남 미사 지구처럼 무슨 신도시를 건설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T. D. Bernard는 말하기를, 주께서 처소를 예비하신다는 것은 인간을 위한 장소를 예비한다는 뜻 보다는, 이미 있는 아버지의 품에 인간을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는 뜻이라 했습니다. 아무튼지 이 세상은 어차피 심판 받아 없어질 세계이므로 모든 사람들은 이 세상을 떠나서 새로운 처소로 가야만 합니다. 이 영원한 거처를 주님은 준비하러 가십니다.
그리고 처소가 예비 되면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3) “다시 와서”란 말씀, “나 있는 곳에”란 말씀 역시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주님의 부활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부활하셔서 제자들 앞에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 앞에 다시 나타나심으로써 완전한 구원의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하나님 품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나 있는 곳에”라는 말씀은 곧 주님의 품에 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예수님을 믿으면 주님의 품에 살게 됩니다. 둘째로는 주님의 재림입니다. 주님은 세상 종말에 다시 오십니다. 성경에는 적어도 300여 곳 이상의 재림 약속이 있습니다. 다시 오시는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여 영원히 하나님 품에 살도록 하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 있는 곳”은 곧 영원 천국입니다. 그 곳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모든 악이 제거된 곳이며, 불행이 사라진 곳입니다. 오직 기쁨과 소망과 신뢰와 행복만이 있는 영원한 곳입니다.(21:22,23, 요일2:28)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그러면 그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의 품은 우리의 영원한 고향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곳에 가야만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님 품으로 가는 길을 어떻게 찾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4) 하셨습니다. 이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도마가 반문합니다.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5) 도저히 그 길을 모르겠다는 말입니다. 앞서서 베드로도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13:33,36)
오늘날 모든 사람들도 역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모릅니다. 그 까닭은 두 가집니다. 첫째, 그 길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길이 아니고 영적인 길이기 때문입니다. 경부 고속도로나, 아니면 비행기나 배를 타고 갈수 있는 길이라면 얼마든지 노력해서 찾을 수 있겠지요. 인간의 노력과 첨단 과학 장비로 찾아 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물질 수단으로 접근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길로 가야만 됩니다. 돈으로나 권력으로 찾지 못합니다. 인간 학문이나 지식으로 찾지 못하며, 고행과 선행 속에도 없습니다. 오직 영적 눈이 열릴 때에만 가능합니다. 둘째, 인간에게 영의 세계를 바로 볼 수 있는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인류 시조 아담이 타락한 이후로, 즉, 사람들이 하나님을 등진 순간부터 인간의 마음은 어두워졌습니다. 육체만 바라보고 영혼을 보지 못합니다. 물질세계만 볼 줄 알았지 영적 세계를 볼 줄 모릅니다. 양심의 눈도 어두워졌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 예주님 자신이 바로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아버지께로 갑니다. 이 말씀 속에 두 가지 사실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강조는, 예수님 자신이 바로 길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무슨 길을 찾지 말고, 예수님만 의지하고 있으면 됩니다. 우리는 잠깐 세상살이를 하면서도 매 순간 누군가를 의지하고 의탁합니다. 법에 무식해서 변호사 사법서사를 찾아갑니다. 기계를 몰라서 서비스 센타를 찾습니다. 집수리 할 재주가 없어서 미장공 부르고 배관공을 부릅니다. 도대체 우리 인생에 무엇 하나 제대로 알기 때문에 내 손으로 하는 것이 없어요. 우리는 잠깐 해외여행을 떠나면서도 자기 힘으로 비행기나 배를 조종하고 다니는 사람 없습니다. 전문가의 손에 맡깁니다. 조종사에게, 항해사에게, 또는 가이드에게 생명과 모든 것을 맡깁니다. 하물며 영원한 하나님의 집으로 가는 길을 우리의 손과 머리로 어떻게 찾겠습니까? 천국으로 가는 길은 안내자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찍이 “나는 선한 목자라!” 양은 목자를 따라가는 재주만 있으면 됩니다. 양은 천하의 지리를 익힐 필요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예수를 따라가는 재주 하나만 제대로 가지고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 목소리를 구별할 줄 알고, 듣고 따라갈 줄 알면 됩니다.(10:19-20,히10:19-22) 도마는 길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신이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길입니다.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해가 이루어집니다.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용서받고, 주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됩니다. 주님은 아버지께 이르는 모든 수단이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6) 이 귀절은 세 개의 정관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Egwv eijmi hJ oJdo;" kai; hJ ajlhvqeia kai; hJ zwhv:”(I am the way, I am the truth, I am the life) 강조형입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길이요, 참 진리요, 참 생명이라! 이 길과 진리와 생명은 한 덩어리로 뭉쳐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는 ‘길’입니다. 하나님과 우주를 계시하는 ‘진리’십니다. 육체와 영혼을 영원히 살게 하는 ‘생명’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만 믿으면 곧바로 나와 주님과 아버지가 한 세계에 살게 됩니다.
두 번째 강조점은, 예수의 유일성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 얼마나 확정적인 단언입니까? 요즘 종교 다원주의가 강조됩니다. 다원주의는 포스트모던 사회의 특징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유독 기독교 신앙이 많은 도전을 받습니다. 왜 오직 예수만 믿어야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도 메시아는 많다는 주장입니다. 누구나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세상 논리로는 그렇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으니 종교는 다원화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종교의 창시자가 될 수 있고, 교주도 될 수 있습니다. 신학교를 세울 수도 있고, 신학자가 될 수도 있고, 교리를 가르칠 자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도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다고 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은 아니며, 종교라고 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것도 아니며, 교리를 주장한다고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종교를 가지는 것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과는 별개입니다. 우리를 낳아 주신 부모님은 오직 한 분뿐입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한 분입니다. 세상에 무수한 별이 있어도 지구를 살리는 것은 태양 하나 뿐입니다. 이 세상에 ‘나’라는 존재가 하나뿐이며, 생명도 하나뿐입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며, 하나님이 보내신 분도 한 분 뿐입니다. 우주의 질서가 하나이며 그 운행자도 하나뿐입니다. 베드로는 말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4:12)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고전8:4-6,딤전2:5)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17:3) 모세는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4-5)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 외에는 위하는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신5:6)
예수님은 지금 내 삶의 어디에 계십니까?
중요한 것은 오늘 나의 믿음입니다. 지금 예수 그리스도는 내 인생의 어떤 위치에 계십니까? 내 마음 중심에 계십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근심 속에 살아갑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근심하지 말고, 주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품 안에 영원한 거처를 준비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아버지 품으로 인도하실 뿐 아니라, 그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인생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이러한 주님을 믿고 의지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뿐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사실 믿기 어려운 상황에서 주어졌습니다. 주님은 이 모든 말씀을 죽는 날 저녁에 하셨습니다. 잠시 후에 십자가에 매달릴 사람이 ‘내가 곧 길이요’ 했고, 흉악한 군병들이 십자가 아래서 승리를 구가하는 순간에 ‘내가 곧 진리요’ 했으며, 잠시 후면 무덤에 들어갈 사람이 ‘내가 곧 생명이니’ 했습니다. 그러니 주님의 말씀은 믿음 없이는 납득하기 힘든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모든 제자들이 다 믿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사실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님을 마음 중심에 모셔 들이세요. 주께서 나를 영원한 고향으로 안내하십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주님은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렀으리라”(2)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요 14:1-6 / 김광일 목사
“예수와 함께 한 저녁식사”의 저자 데이비드 그레고리(David Gregory)는 복음의 진수를 그의 저서를 통해 설명하였습니다. 주인공 닉 코민스키는 교회와는 담 쌓고 살던 무신론자였습니다. 어느 날 발신인이 ‘예수’ 라고 되어 있는 초대장이 도착합니다. 근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의 저녁식사였습니다. 장난기 많은 친구들이 벌인 이벤트 정도로 생각하고 찾아간 주인공은 자신이 예수라 주장하는 사람을 만나 신앙적 진리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그때 예수가 말합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구원은 오직 예수를 통해 받느니라. 하나님의 사랑만이 공의를 이룬다.” 예수는 닉의 명함 뒤에 마더 테레사의 이름을 맨 위에 적고 선을 그었습니다. 아래에 악한 히틀러의 이름을 쓰고 선을 그었습니다. 닉의 이름은 테레사 쪽 가까운 곳에 적고는 선을 그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말하십니다. “조그마한 명함 안에 모든 눈금을 넣을 수 없지만, 어쨌든 히틀러는 여기 있다. 당신은 여기 쯤 있고, 테레사는 여기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기준이 얼마나 높은지 아는가?” 예수는 명함을 테이블 위에 세웠습니다. “시카고의 고층 빌딩 시어스 타워의 맨 아래 주춧돌에 이 명함을 놓는다고 가정해 보자. 하나님의 기준은 타워의 꼭대기 즉 100층의 높이에 있는 것이다.” 그때 닉이 질문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의하면 테레사와 히틀러는 결국 같은 수준이란 말인가요?” “아니다. 히틀러는 악랄했고, 테레사는 자비를 베풀었으니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테레사의 선행 역시 하나님과의 격차를 메우기엔 히틀러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두 사람 모두 죄인이고 그 공력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것이다.” 닉은 잠시 생각을 한 후 “그렇다면 누구도 그 기준에 못 미치겠네요?” 예수께서 대답합니다. “자신의 쌓은 공적으로는 어림도 없다. 하나님의 기준은 한 치도 모자람이 없는 완벽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그 죄를 짊어지셨고, 죄 값을 치루기 위해 목숨까지 버리셨다. 그것으로 하나님의 정의는 충족되었고 우리를 향해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그러기에 우리는 구원의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만 하면 된다.” 닉이 말합니다. “알 수가 없네요. 성경에 보면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은 예수이지 하나님이 아니잖아요?” 예수가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예수의 희생을 통해 우리의 죄를 속량해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로 말미암은 복음이 아닙니까?
요한복음 14-16장은 다락방 강화라고 부릅니다. 설교가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행하신 유언적인 교훈입니다. 예수와의 관계, 장차 다가올 일들, 성령 강림을 비롯한 영적 세계에 관한 것들입니다. 14장의 서두는 ‘근심하지 말라’로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따라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신다 하셨기에 제자들의 마음은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근심합니다. “제자공동체는 어떻게 되며, 그들이 바라던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세워지는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던 자신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나 예수께서는 근심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고 하십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집을 바라보라 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어떻게 찾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의 유일성을 의미합니다. 현대 기독교는 종교 다원주의에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왜 예수만 믿어야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도 구원받을 수 있지 않는가?’ 그러나 성경은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예수가 삶 속에서 어디 계십니까? 중심에 계십니까? 무엇으로 말미암아 사십니까? 오직 예수로 말미암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첫째로 길이시니
어떤 사람이 숲을 지나야 하는데 길을 몰라 인디언을 안내인으로 고용했습니다. 그 인디언을 따라가는데 수풀이 우거지고 온통 돌밭일 뿐 길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보기엔 길이 없는 것 같은데 잘못 가고 있는 것은 아니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인디언이 돌아보며 웃으면서 “내가 바로 길입니다. 나만 따라오면 틀림없지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결국 길은 전혀 없었지만 인디언만 따라가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천국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 가는 길을 안다고 했지만 자신도 그 길을 몰라 죽고 말았습니다. 오직 예수만이 죽었다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길이 되셨으니 우리는 예수만 따라 가면 됩니다. 결코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오로지 길이신 예수만 따라가야 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고 변함없는 길은 예수 밖에 없습니다. 하늘의 길을 증명하신 이가 바로 예수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은 예수밖에 없고 죽었다가 부활해서 하늘로 올라가신 분도 예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온 길’과 ‘가는 길’을 아시는 분은 예수밖에 없습니다.
문제에 봉착했다는 말은 길이 막혔다는 의미입니다. 길이 있으면 문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인생길에는 크고 작은 문제들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문제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이는 질병 때문에, 어떤 이는 자녀 때문에, 어떤 이는 물질 때문에, 어떤 이는 가정문제로, 어떤 이는 인간관계의 갈등으로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 길이 막혀 버린 것입니다. 누구도 이 길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길을 찾기 위해 힘쓰지만 곧 한계에 이르고 맙니다. 그런데 예수가 스스로 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만이 길을 알고 있는 유일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문제로 길이 막혔든지 길이신 예수께로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예수가 길이며 예수를 따르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둘째로 진리이시니
힌두교에 심취해 있다가 그리스도인이 된 인도의 한 교수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에 교수까지 네 사람이 타게 되었습니다. 각자 소개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교롭게도 종교가 각자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종교가 달라도 같은 배를 탄 사람들이지요. 결국 같은 목적지를 가진 같은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러자 가만히 있던 교수가 버럭 고함을 쳤습니다. “아니오. 당신들은 같은 배를 탔는지 모르지만 나는 다르오. 나는 다른 배를 탔소!” 진리는 타협할 수 없습니다. 진리는 오직 하나뿐입니다. 진리 안에 바로 서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다는 것은 종교적인 의식이나 인격수양의 차원을 넘어서 절대적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세상에 여러 종교가 있습니다. 공자나 소크라테스와 같은 성현들은 진리를 설명은 하지만 진리는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곧 진리입니다. 진리는 하나님 말씀입니다.
예수는 절대적 진리입니다. 결코 변치 않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예수가 진리이기 때문에 믿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진리는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진리 안에 거하시기 바랍니다. 진리이신 예수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으며, 예수를 통해서만 자유와 큰 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셋째로 생명이시니
19세기 미국의 부흥사 무디(D. L. Moody)의 말입니다. “얼마 있지 않아 여러분은 나에 대한 소문을 들을 것입니다. 무디가 죽었다는 소문 말입니다. 혹 신문에도 나서 여러분이 보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에게 부탁하는 것은 그런 소문 곧이듣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나는 영원히 살 것입니다. 내가 이 육신을 벗어 놓을 때는 지금보다 더 분명히, 더 똑똑히, 더 깨끗이, 더 풍성하게, 더 행복하게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본문 6절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는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모든 생명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로 인하여 보존됩니다. 예수는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생명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로 말미암아 그 영혼이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으면 죽었던 영혼이 거듭나게 됩니다. 거듭난 성도는 예수의 생명과 연합되었으므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은 약동하는 힘입니다. 예수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면 절망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불안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생명이 강하기에 죽음까지도 결박할 수 없습니다. 생명이신 예수를 통해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죠쉬 맥도웰 (Josh McDowell) 교수는 베스트셀러 작가였습니다. 처음에는 기독교를 반박하는 책을 저술하고자 했지만 예수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 후 좋지 않은 성격에 변화가 따랐습니다. 그는 항상 자기가 옳다고 생각해 자기 말이나 행동을 의심하는 사람을 그냥 두지 않았고 항상 성질이 발끈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은 후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증오심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는 알콜 중독자였던 아버지를 심히 미워하였습니다. 하지만 믿기로 결심한 후 5개월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파고 들어오면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고 못된 성질과 기질이 변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를 정면으로 보게 되었고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라고 말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말뿐만 아니라 사랑을 행동으로 보이려고 애썼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하여 그가 입원하게 되었는데 병실에 찾아온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나 같은 아버지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게 되었는가?” “저는 6개월 전만해도 아버지를 경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영접한 후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지만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긴 것 같습니다.” 잠시 후 아버지가 말하였습니다. “얘야, 만일 그분이 너의 삶 속에서 하신 일을 역시 나의 삶 속에서도 하실 수만 있다면 나도 그분에게 기회를 드리고 싶구나.” 예수를 영접하여 구원받고 축복받는 삶만 원하지 정작 자신의 일그러진 인격이나 잘못된 성질을 고치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서 신앙의 년 수만 날로 더해가는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왜 예수를 믿는가’ 라는 질문을 심각하여 던지고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결코 아무것도 변할 수 없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는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진리를 찾지 못하고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생명을 찾지 못하고 사망의 권세에 눌려 있습니다. 그러기에 부디 길이신 예수, 진리이신 예수, 생명이신 예수로 말미암아 삶과 인격에 변화가 따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로 말미암아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 뵈올 그 날을 준비하십시오
요 14:!-3 / 인명진 목사
오늘이 8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할 기회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떠나기 전에 특별하게 꼭 드려야 할 말씀을 드리는 중에 있습니다. 오늘 드릴 말씀도 그 중의 하나로 여러분이 꼭 기억하여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길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것도 모르고 무작정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지난 날 우리가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면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런 일이 내 인생에 일어날 것이라고 미리 알고 있었던 일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서 살게 될 줄 알았던 사람은 없습니다.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들이 우리의 인생가운데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일은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에서 계속해서 되풀이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 인생의 앞날에 무슨 일이 있을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인생길입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우리 인생의 앞날에 꼭 일어나게 될 확실한 일이 있습니다. 제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목사 40년에 반 귀신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말은 다 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의 앞날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고 또 저 자신의 앞날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분의 앞날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은 언젠가 꼭 죽게 될 것입니다.’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말입니다.
또 한 가지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살면서 앞으로 어떤 사람을 만날지 알 수 없지만 제가 한 가지 예언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앞으로 꼭 만나게 될 분이 있는데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미래에 꼭 일어나게 될 일 죽음에 대해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일에 대해 많은 사람이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나에게 죽음이 올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자신은 죽음과는 전혀 관계없이 천년만년 살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간단합니다. 욕심을 부리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욕심을 부린다는 것은 자기가 죽을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면서 산다는 증거입니다. 언젠가는 예수님을 꼭 만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언젠가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서 그렇게 소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사실을 늘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이 두 가지 사실을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나도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기 때문에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도 언젠가 예수님을 만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제대로 인생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설마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것인가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여기 있는 청소년부 학생들을 포함한 우리 모두는 100년 후 쯤에 어떤 모습일 것 같습니까? 단지 상상과 추측이 아니라 사실로 우리에게 일어날 일입니다. 사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내 인생에 꼭 있을 두 가지 일, 죽음과 예수님을 만나게 될 일을 잘 해결하기 위한 것입니다. 나에게 꼭 있을 죽음의 문제, 언젠가 만나게 될 예수님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하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가 죽은 후에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별로 없지만 신약성경에는 죽은 후에 무슨 일이 있을 것인가에 대해 예수님 자신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이 올 텐데 숨이 넘어가는 그 순간부터, 눈을 감는 그 순간부터 무슨 일이 있을지 궁금합니다.
주위에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장례를 치르면서 지금쯤 죽은 사람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지금쯤 죽은 사람이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4장을 보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다 죽음 죽은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는 것 때문에 걱정을 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흙으로 빚어 우리의 육신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생기를 우리의 코에 불어넣으셔서 우리 인간이 생령이 되었다고 합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절에 보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죽음은 땅에 지은 우리의 장막집 무너지는 것이라고 것입니다. 세월이 오래 지나면 여기저기 무너지고 고장이 나는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흙으로 만든 우리의 장막집이 스르르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육신 속에 있었던 우리의 생기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에는 육신 속에 거했는데 그 육신이 없어지니까 그 영이 거할 곳이 없어져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거처를 마련하러 가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영혼의 거처를 마련하러 가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3절 말씀을 보면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생명이 끊어지고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 우리의 영혼이 죽음의 문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그때 죽음의 문 앞에서 우리를 맞이하실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죽은 후에 어떻게 될까 궁금해 하지만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의 문에 들어서면 예수님이 맞이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낯선 곳입니다. 불안하고 두려운 곳입니다. 여러 사람이 같이 간다면 그렇게 불안하지 않겠지만 죽음은 혼자 가야하기 때문에 두렵고 불안하기 그지없는 곳입니다. 마치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이국땅 공항에 내린 것과 같은 심정이 죽음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심정입니다. 그때 우리를 기다리는 분이 있는데 바로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누구든지 이렇게 죽은 후에 제일 먼저 만나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처분에 따라 우리의 운명이 결정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이 예수님을 만나는 게 너무 좋고 반갑고 기쁜 사람이 있고 반대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섭섭하고 서먹서먹하고 멋쩍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속하십니까? 예수님을 만나면 기쁘고 즐겁다면 예수님과 잘 지낸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기다렸던 사람들, 뭔가 내세울 것이 있는 사람들, 예수님이 괄시할 수 없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서먹서먹하고 멋쩍은 사람은 평상시 예수님에게 잘해드릴 것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후회가 막급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가 불가피하게 꼭 만나게 될 예수님, 그것도 절박한 상태에서 막다른 곳에서 만나게 될 예수님, 반갑게 잘 만나야 합니다. 평상시에 잘할 것 하는 후회하는 마음으로 만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는 젊으니까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언제 어떻게 예수님을 만나게 될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평상시에 예수님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후회할 때는 너무 늦습니다.
저는 목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 장례식을 인도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이 사람이 지금쯤 예수님을 만났을 텐데 화기애애한 만남일까, 아니면 이럴 줄 알았으면 세상에 있을 때 예수님에게 잘할 것 하며 후회할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평상시에 예수님을 만날 준비를 잘 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자랑스럽게 떳떳하게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실 수 있도록 수고했다 칭찬하실 수 있도록 잘 해야 합니다.
제가 언젠가 처음 가보는 낯선 나라에 가게 되어 공항에 내렸는데 저를 마중 나온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 사람이 한국에 왔을 때 제가 잘 대접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만나게 될 줄 알았으면 한국에서 이 사람을 만났을 때 잘 해줄 것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그렇게 만나면 안 됩니다. 반갑게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잘 만날 수 있도록 늘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위의 가난한 사람을 대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올데갈데없는 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만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로 성경에 보면 누구든지 예외 없이 죽은 후에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25장에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은 후에 일어날 일을 주님이 직접 가르쳐주셨습니다. 심판의 기준이 예수님에게 어떻게 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심판대 앞에 선 사람이 누가 예수님이었느냐고 물을 때 예수님께서는 네 주위에 있었던 가난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네 곁에 있었던 병든 사람이, 감옥에 갇힌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주위의 가난한 사람을 돌보지 않은 사람은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언젠가 50년 후에, 100년 후에 다 당하게 될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점에 있어 우리 갈릴리교회의 교인들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늘나라에서 어느 교회에 다니다 왔느냐 물으실 때 갈릴리교회에서 왔다고 하면 무조건 천국에 들어가게 할 것입니다. 내가 배가 고팠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 보살펴주었다 칭찬하실 것입니다. 제가 이 교회에서 지난 27년 동안 했던 것 중에 특별한 것이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나라에서 영생에 들어갈 수 있도록 여러분의 삶을 인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은 저에 대해 이런 저런 불평을 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때가 되면 다 저에게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한 가지 걱정스러운 것은 사실 이 말씀은 우리 교회 대부분의 교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토요일 아침이 되면 사랑의 도시락을 싸고 북한 어린이를 돕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봉사와 헌신과 헌금으로 극진하게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고 본적이 없다고 하시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장부를 뒤적이며 헌금을 한 기록도 없다고 섭섭해 하실 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심판은 누구에게나 꼭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잘 준비를 해야 합니다. 후회를 해도 그때는 늦습니다. 이 말씀은 성경의 이야기 그대로입니다.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예수님의 칭찬을 받고 영생의 축복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준비한 집에서 영원토록 찬양하며 지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이며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행복은 길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 두고 온 재산 이럴 줄 알았으면 잘 쓰고 올 것을 그랬다고 후회해도 늦습니다. 지금 제대로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나는 죽음과는 관계없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50년 후, 100년 후에 내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언젠가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행복하고 죽음의 문 너머에서 기다리는 예수님을 반갑게 기쁘게 만나 주님의 심판대 앞에 칭찬받고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이 사실을 여러분에게 가르치지 않았다면 저는 목회를 잘못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심판대 앞에 낙제를 하고 지옥불에 들어가야 한다면 저는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나라에서 칭찬받고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히 삽시다. 그곳은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고 이별도 없고 죽음도 없는 하나님나라에서 삽니다. 주님 만나 칭찬받고 상급 받을 수 있도록 잘 준비합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영원토록 살도록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원한 복락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