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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이다. 훌륭한 아버지가 되고 싶었다. 내가 받지 못했던 모든 것을 너희들에게 주리라.
너희들이 태어났을 때도, 너희들이 자라갈 때도, 훌륭한 아비가 되겠다고. 나는 다짐했다.
헌데 또 내 다른 마음은 내가 훌륭한 왕이 되길 원한다.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이 나라
고구려의 백성만을 생각하는 그런 왕. 내게 있어 고구려는 그렇다. 나 유리. 개인의 모든 것을 쉬이 버릴
수 있는. 나 자신은 댈 것도 아닌. 그런 것이다.
난 나를 보는 백성들을 져버릴 수 없다. 내겐 너희 말고도 무수한 자식들이 있다. 나만을
바라보는, 나로 인해 살아가는, 나 하나에 생사가 달린 여린 그들. 나는 이 자리의 책임을 알고 있다.
그랬기에 나는.
.... 너희를 죽일 수 밖에 없었다.
01.
동부여. 서 궁.
날이 춥다. 이미 흰 눈이 궁을 덮은지 오래, 부인은 금 자수가 놓인 검은 선을 댄 호화로운 솜 옷을 입고
침상에 길게 누워있었다. 붉은색의 화려한 옷. 서리 내린 흑단 머리칼 사이로 보이는 살이 뽀얀 것이
여간 요요한 것이 아니다. 젊은 날엔 아마 여러 사내를 홀리고도 남았을 미색이 여전히 엿보이는 그
여인은-. 무언가 심각하게 생각하는 눈초리를 흘겨 뜨곤 허공만을 바라봤다.
생각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 깊은 검은 눈이 이내 분노로 끈다. 그러나 곧 요염이 감긴 눈. 미간이
찌푸려진 뒤 다시 떠진 그 눈엔 체념이 가득하다. 부인은 턱을 괴던 것을 관 두고 곧 침상에 앉았다. 긴
머리칼이 어깨위로 흐트러진다.
“혹, 근심이라도 있으신 겐지요?”
화로를 돌보던 시비가 묻는다. 상아빛의 부슥, 부슥 소리가 나는 고운 옷을 입은 시비는 주름진 손으로
화로의 불을 더욱 지피다 곧 재를 마시고 콜록거린다. 그런 시비를 보며 부인은 웃는다.
“내 생에 근심이 없을 때가 어디 있나.”
흘려가는 말이기는 뼈가 있다. 깊이 하실 말씀이 있음을 시비는 알 수 있었다. 한 두해 모신 어른이
아니다. 또 어디 보통 어른인가.
“유화님, 하실 말씀이 있으시거든 저에게 말씀하여 보세요. 입이 근질근질 하신 눈치십니다.”
“잔망스런 것. 말버릇이 하루가 지날 때마다 더욱 건방져져. 같이 늙어가는 처지다, 이 말이냐?”
시비는 빙긋 웃었고, 부인도 빙긋 웃는다. 그러나 그 웃음은 곧 끊어지고 만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쉬이 웃을 수도 없다.
웃을 수도 없는 이 처지에 유화는 눈물이 날 것 같다. 이리도 박복한 팔자라니. 억울한 마음에 눈물이 다
나올 것 같다. 그러나 이미 그런 눈물엔 익숙한 그녀다. 이미 유화는 눈물을 웃음으로 바꾸는 법을 안다.
허나 종종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만약, 해모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팔자가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
옛날이다. 북부여의 태자 해모수는 사냥을 하러 남으로 내려왔다 유화를 만났다. 워낙 출중한 미색의
유화이니 사내인 그가 혹하는 것도 그리 탓할 일만은 아니겠지만. 고작 열 여섯의 어린 소녀에게 혼약을
약조하여 멋대로 취해버린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마음이 퍽 깊고, 유화 또한
해모수가 싫지만은 않았는지, 해모수는 유화를 북부여로 데려갔고 이에 유화의 아비 하백은 노했다.
하백에게 있어선 아직 어리고 어여쁜 딸을 북부여의 태자란 놈이 멋대로 갈취를 해간 것이었다. 그는
거리낌없이 북부여의 왕에게 분노를 표했고 북부여의 왕은 근심에 빠졌다. 하백은 수로를 이용하여
장사를 하는 대 상인으로, 중국과 두 부여 그리고 남으로 삼한과의 길이 되며, 스스로 사병까지 키우는
무시 못 할 사내였고 그 자체가 하나의 세력이었다. 그런 자와 사이가 나빠져서 북부여에 이로울 것이
없었다. 그 화는 결국 해모수에게 튀었고 왕의 화가 두려운 해모수는 자신은 모르는 일이라며 유화를
하백에게 돌려보냈다.
결국 모든 책임은 약한 유화에게 돌아왔고 설상가상으로 아이가 생겼다. 자신을 버린 사내의 아이를
가진 유화. 그녀는 하백에게 있어 더 이상 어여쁜 딸이 아닌 그저 수치를 안겨준 망나니 여식에
불과했다. 하백은 수치를 안겨준 그녀를 쫓아냈고. 그때가 겨우 열 일곱. 무책임한 해모수에겐 그 어떤
연통하나 없었다. 그가 태자가 되지 못하고 그 해에 죽었다는 것을 들었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었고 두
번이나 배신을 당한 기분에 유화는 죽으려고 작정을 하고 강에 뛰어들었다.
헌데. 신의 장난인지, 아니면 도움인지 마침 매사냥을 하던 동부여의 금와왕의 눈에 띄었고 왕은
죽으려고 물에 빠진 유화를 가마에 태워 궁으로 데려갔다. 그것이 유화 그녀가 금와왕의 후실이 된 사연.
가문이 못난 것도 아니고 박색인 것도 아니다. 못 배운 것도 아니고 성격이 모난 것도 아니었으니 후실이
될 자격은 충분했다. 그저 흠이라면 다른 사내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일까. 그러나 금와왕에겐 문제가
되지 못했다. 이미 유화의 미색에 반한 금와왕은 그녀가 낳은 아이가 북부여 태자의 아이든, 누구의
아이든 오직 유화의 아이일 뿐이었고. 왕이 그렇다고 하니 그 누가 딴지를 걸어오지 못했다.
허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왕의 총애를 받다 하루아침에 다른 계집에게 빼앗겨버린 왕후와 그
계집이 낳은 아들에게 아버지를 빼앗겨버린 태자 대소는 그러하지 않았다. 그들 모자는 다른 자식들과
다른 형제들 모두와 도모하여 기댈 곳이라곤 금와 밖에 없는 가엾은 유화와 주몽모자를 괴롭혔고.
견디다 못한 유화는 그들에게 눌려 뜻하나 펼치지 못하는 아들을 벗들과 함께 남으로 보냈다. 아들은
결국 소서노라는 여걸을 만나 제 뜻을 펼쳤고 유화는 이에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주몽이 남으로 떠나버리자 금와는 더욱 유화를 두둔하기 시작했고, 이에 왕후 모자의 괴롭힘과 텃세도
한결 줄어갔다. 이는 10년전에 왕후가 죽음을 맞이하고 끝을 보였고. 금와의 눈밖에 나길 싫어하는
대소는 유화더러 ‘어마마마’라고 까지 칭했다. 책봉만 아니 받았을 뿐이지 이미 유화는 동부여의
왕후였다. 정을 준 사내에게 배신 당하고, 아비에게 버림받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남으로 떠나
보내며 결국엔 혼자 쓸쓸히 남아버린 그녀지만 말년에는 태자에게 어머니 소리를 들으며 모두에게 왕후
대접을 받으며 그리 편하게 살아가려니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금와. 그가 죽었다. 1년 전 겨울에, 고작 고뿔 하나에 건강을 잃고 쓰러지더니
기침만 연신 하다 죽어버렸다. 오직 그 밖에 기댈 곳이 없는 유화만을 홀려 남겨 둔 채. 그러니 모든 것이
다 변해버렸다. 주변도, 궁도, 정말 모든 것이.
그가 죽고. 상이 끝나자 대소가 그 왕위를 이어받았다. 몇 개월. 왕의 죽음 뒤의 나라를 수습하던 대소는
안정을 되찾고 내실에 더욱 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눈엣가시였던 모자에게 눈을 돌렸다.
아들놈은 부여를 떠나 남으로 내려가 소서노라는 여자와 함께 고구려를 세웠으니 나중으로 치고. 당장
해치워버리기 쉬운 것이 바로 유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연약한 그녀다. 남은 것은 지친 세월을 향한 독기와 체념 그리고 예전의 미색을
간직한 늙은 몸뚱이뿐인 그녀.
“조심, 또 조심 하셔야 할듯합니다. 그 편협한 심보가 어딜 갈까.”
“그런 말을 하다간 목이 달아난다. 쿡, 나야 어차피 곧 죽을 몸. 하얗게 새어가는 이 머리가 보이지
않느냐? 허나. 다만 내 걱정 되는 것은……”
“……며느님이시죠?”
눈치 빠른 시비가 답한다. 유화는 쿡 웃으며 말했다.
“..그래. 편히 잘 수가 없다.”
웃음 뒤가 쓰리다. 유화는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그 아이를 떠올렸다. 옛날. 아직 주몽이 어릴 적, 유화도
지금보다 젊을 적. 금와왕이 정해준 아이와 주몽이 혼례식을 올린 적이 있다. 예씨 성을 가진 참한 아이.
단아하여 말수도 적고 숫기도 많은 아이라, 종종 주몽이 심심한 각시라며 유화 앞에서 놀려대던 것을
기억한다.
그 아이도 유화처럼 남았다. 남으로 떠나는 날. 남산만하게 부른 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여에 남게 된
그 아이. 아마 언젠가 해모수에게 버림받은 유화처럼 배신감을 느꼈을, 허나 그 단아한 성품에 싫다 좋다
밉다 그 말 한마디도 못한.
그 아이도 덩그러니 남았다. 자신도, 주몽도 하나도 닮지 않은 어린 사내아이와 덜렁 남아있다. 살얼음판
같은 이 부여에. 마치 예전의 유화처럼.
[낭군의 길에 도움은 못줄 망정 장애는 되지 말아야지요. 원망 않습니다. 그 분과 저의 길이 달랐을 뿐.
저는…. 저는 그저 유리와 함께 이 곳을 지킬 겁니다.]
그 아이는 말했다. 유리가 태어난 지 며칠이나 되었을까. 성품처럼 조용히 말하던 것을 유화는 여즉
기억한다. 그 모습이 어찌나 답답하고 어찌나 눈에 익던지. 주몽은 나라를 세우고 소서노의 눈치가 보인
것인지 그 두 아이를 찾지 않았다. 아들은 역시 아버지를 닮는다. 사정은 달랐다고 하나 상처는 같다.
참으로 몹쓸 핏줄이 아닌가.
“찾는다지. 그 못된 대소 놈이 말이다. 나도 죽이려고 시시탐탐 기회를 노리면서도, 그 참한 것과 그 어린
것을 죽여 없애기 위해 깊은 곳에 숨어버린 두 아이를 찾는다고 들었다.”
유화는 곧 노기 섞인 어조로 말했다. 이에 시비는 대답이 없다. 그러나 그 대답은 침묵이라는 또 다른
대답으로 유화는 곧 주먹을 쥐었다. 그러나 곧 너털, 그녀는 웃는다. 마치 승리라도 한 것 같은 웃음이다.
“그렇게는 안될 게다. 17년. 그 두 아이가 나조차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꽁꽁 숨어있는 것이 17년이다.
안되지. 나는 죽어도 그 아이들을 죽어선 안되지.”
그럼에도 어딘가 불안한지 웃음은 곧 사라졌다. 대소는 만만한 놈이 아니다. 그 능력을 떠나서 그 성격이
도통 당해낼 수 없는 놈이다. 놈은 집요하다. 왕이 된 것으로 만족을 하지 않을 것이다. 주몽과 소서노가
세운 고구려는 아직 부여에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다. 소문엔 그 세력이 점점 커져 비류 국마저
삼켜버렸다고 하지만 부여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분명 대소는 고구려를 멸망시키려고 할
것이고. 주몽을 제 손으로 죽이려 들것이다. 그런 녀석이니 그 약한 두 아이들을 죽이는 것이 힘들까.
유화는 곧 결심한 듯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 표정이 결연하여 다시 그녀의 독기가 보인다. 주몽을
남으로 떠나 보낼 때의 그 얼굴이다.
“자귀를 불러와라. 내 죽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
그 놈의 피는 그녀에게 근심만을 안긴다. 해모수도, 그가 남긴 주몽도 모두 그녀에게 근심만을 안겨주어
끝이 다가오는 지금까지 그녀를 편히 쉬지 못하게 한다.
참으로 몹쓸 피가 아닌가.
※
오랫만이에요!
악의 꽃을 들고온다고 했었는데.
그건 보류해 두었답니다. 아무래도 그 소설을 쓰려면
설명이 많을것같아서. 아예 전 이야기부터 시작하기로 했어요. 히히;
재밌게 읽어주시구요, 감사해요♡
첫댓글 꺄아 대박!! 완전 재밌어요. 님 !! 담편도 기대할게요 ㅋ 그리고 황진희 ost 나쁜남자 - 백지영 ← 이노래 들으면서 봤는데... 진짜 굿이네요
오, 저도 그 노래 좋아하는데! 백지영 노래 굿이라지요. 님도 굿입니다!ㅋㅋ 감사해요♡
요즘 방송한다는 주몽인건가요? 난 TV시청 안본지 2-3년된것같은데...작가님의 델프라의 상인 소설 재밌게봤습니다. 이것도 감사히 잘보겠습니다
우주님! 달아주신 댓글 모두 잘 읽었어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 황조가도 응원부탁드려요 감사해요!!♡
정말 재미있습니다^^ 다음 편 기대할게요. 그리고 더불어 악의 꽃도 기대하겠습니다(...)
악의 꽃은 오래오래 기다리셔야 할듯해요. 그래도 열심히 달려보겠사와요!! 감사해요♡
재밌어요오 히히히히 건필하세요옹!
바비님 감사합니다, 건필할게요 ^^♥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대단해요 히제이님!!!! 앞으로 여기에 푹-빠져 살게 될 듯 ㅋㅋㅋㅋㅋㅋ
와아아아아-!!!!!! ㅋㅋ vinegar님 정말 오랫만이에요♡♡♡♡
와아 ;ㅂ; 정말 재밌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역시 흥미진진 현실감이 있어서 더욱 좋아요~
오오 녹차님♥♥ ♥
진짜 재밌어요ㅜㅜㅜㅜ....... 담편도 기대할게요*^_^*
정말 감사드립니다. 건필할게요! ㅎㅎ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쭉, 건필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끼히히, 여기는 이제 올라왔군요. 왠지 모를 뿌듯함? ㅋㅋㅋ
ㅋㅋㅋㅋ 앞으로도 그쪽?연재가 더 빠를듯. 카페랑 맞춰서 올릴거거든요 히히
삭제된 댓글 입니다.
미소님!!!! 잘 계셨어요? 와 너무너무 반가워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우와 재미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 성실연재 부탁드립니다 ! 화이팅이요~
오 첨뵙는분! 감사해요♡
히제이니임~돌아오셨군여!!! 주몽이야기인가봐요! 또같이달려영!-_-*
내가뭘님!!! 반가워요, 으아 약속도 어기고 늦게 돌아온 저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ㅠㅠ 그래영 달려보아요!!!!
진짜 오랜만에 히제이님 소설 읽는 것 같네요>< 정말 재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