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떄 전국대회가 7개였는데..
첫번째 열리는 대회 대통령배에서 경남상고 곽재성이 신일고의 조성민을 2:0완봉시키며 우승했고
바로 다음에 열린 부산에서열리는 화랑대기에서도 곽재성,차명주,장문석의경남상고가 우승했다.
화랑대기에서 박찬호는 우수타격상을 수상했고..
이때 경남상고감독 안병환은 박찬호의 피칭을 보고
"이 왠 괴물이냐?? 이런놈이 경남상고소속이라면 전국대회 전관왕도 가능하겠다" 라고 생각했다함.
그리고 나머지 7개대회를
광주일고가 에이스박재홍을 앞세워 2번우승, 조성민,설종진,강혁,김재현의 신일고가 봉황대기포함 2번우승,
염종석,손민한,진갑용,주형광의 부산고가
전국체전우승을하면서 7개 전국대회의 우승팀이 가려짐)
아주 어릴떄였지만..
이때 박찬호를 알게되면서 임선동 조성민등의 선수보다 훨씬 더 대단한 선수가 될것 같다고
혼자 생각한 적이 있다. 봄소풍가는 버스에서 스포츠신문을 보면서 말이다.
그리고 2년후 천마기 대학야구에서 156km를 기록하면서 스포츠신문을 도배해버린 박찬호의 기사를 보며
"거봐~~ 내생각이 맞았네" 라고 혼자 미친놈처럼 중얼중얼..
다 알겠지만 모를지도 모르는 단 한분을 위해 다시 설명..
박찬호는 대학시절에 달던 16번을 다저스에서 달고싶어했지만
3루주루코치가 달고있어서 16번을 뒤집어서 61을 달았다.
그리고 1년후 노모히데오가 다저스에 입단했고..
그때 3루주루코치가 그만둬서 백넘버 16번이 남았다.
일본에서 11번을 달던 노모히데오는 별의미없이 비어있는 번호 16번을 달게됐다.
둘은 그렇게 16번, 61번을 달면서 아시아 최고투수 라이벌전을 시작한다.
1. 아빠 그리고 남편, 찬호씨
“저희 딸 애린이를 보면서 그런 걸 느껴요. 이런 게 자식이구나. 애린이가 본능적으로 저한테 주는 감동이 많거든요.” - 박찬호 INT 中
가족을 위해 공을 던질 수 있어 행복하고 그로 인해 야구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박찬호! 처음 본 제작진에게도 먼저 다가와 손 키스를 날리는 애교는 기본, 노래 실력까지 아낌없이 뽐낸 애린(여/3살). 원정 떠나는 아빠를 향해 유모차에 누워 손을 흔드는 세린(여/1살)의 사랑스런 모습과 더불어 이들과 함께 하는 박찬호의 일상을 들여다본다. ‘아빠’ 박찬호가 공개한, 소소하지만 그 무엇보다 소중한 육아일기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박찬호 선수 본인 말대로 자기가 우리나라에서 신랑감 1위로 뽑혔다는데 리혜씨가 일본에서 날아와서 선을 볼 줄 알았죠. 박찬호 선수도 그렇게 생각했고. 저도 그렇게 생각했고. 근데 안 온다는 거예요.” - 차인표 INT 中
“ 너무너무 결혼 하자고 하니까 할 수 없이 했죠.
저는 찬호씨가 나라에서 그렇게 결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는 걸 몰랐었거든요.
그래가지고 저는 찬호씨랑 결혼하면 좋을 거다 꿈이 없었어요. 야구 선수 부인이 진짜 얼마나 힘들 건지는 모르지만 아주 많이 힘들 거라는 그런 게 약간 걱정이 많았어요.” - 박리혜, 박찬호 아내 INT 中
(형수님, 찬호형 무시 노노 ㅋㅋ)
6번째 만남이 결혼식이었다는 박찬호 부부. 첫 만남에서 결혼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미국, 일본을 오가며 1년 동안 끊임없이 벌어진 에피소드를 공개한다! 아내 리혜씨의 이상형은 순한 인상의 쌍꺼풀 없는 소위 ‘권상우 스타일’의 ‘간장남’이었지만 남편의 첫인상은? 당대 최고의 1등 신랑감을 만나보지도 않고 퇴짜 놓았던 이유는? 인터뷰 도중 아내의 돌발행동에 당황한 박찬호와 제작진, 결국 촬영이 잠시 중단되었는데...
재일동포 3세 출신으로 메뉴플래너와 푸드라이터를 겸하는 프랑스 요리전문가인 아내 박리혜씨. 야구에 관심조차 없었고 더욱이 야구선수의 부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는 그녀는 어느새 야구 전문가가 되어 남편의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해내고 있다. 결혼과 동시에 일을 포기해야했지만, 이제는 가족을 위해 요리하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라 말하는 그녀만의 특별한 요리 비법을 소개한다.
2. ‘메이저리거’ 박찬호 - 지금의 그가 있기까지
<박찬호의 힘든 시기를 함께 했던 차인표> <박찬호의 30년 죽마고우 홍원기 코치>
<박찬호의 심리상담을 맡고 있는 하비도프만> <야구 국가대표 후배 송승준 선수>
“어떠한 방법이든 메이저리그까지 기어가라면 기어가든 아무튼 어떤 일을 시키더라도 그걸 다 수긍하고 메이저리그를 다시 갈 수 있는 길이라면 해야 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을 때가 있었죠.” - 박찬호 INT 中
“먹는 거 욕심, 서로 지기 싫어하는 그런 것도 좀 많았던 것 같아요.” - 홍원기, 히어로즈 투수코치 INT 中
“오늘은 운동은 이것까지 해야 된다 그러면 그거보다 한 개 더해요. 항상.” - 이태일, 네이버 스포츠 실장 INT 中
미국 현지에서 박찬호를 24시간 밀착 취재했던 당시 특파원들, 30년 지기 죽마고우 홍원기 히어로즈 코치, 담당 심리학 박사인 하비 도프만 등 오랜 시간 가까이에서 그를 지켜본 이들이 입을 열었다! 박찬호가 머리에 양말 하나 매고 새벽에 바닷가를 뛸 수밖에 없었던 사연은? 10년째 박찬호의 심리 상담을 맡고 있는 도프만 박사가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그의 첫마디는?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던 박찬호 지인들의 생생한 증언과 본인이 털어놓은 속 깊은 이야기가 공개된다. 또한, 국내에서 한 번도 중계되지 않았던 박찬호의 2007년 마이너리그 경기 자료 및 텍사스 시절 루키리그(*마이너리그 중 최하위 리그) 미공개 영상을 통해 지금의 그가 있기까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박찬호의 또 다른 모습을 조명해본다.
4. 박찬호의 끝나지 않은 경기 - 그가 아직도 마운드에 오르는 이유
“누구나 다 그런 뭐..‘죽고 싶다’라는 생각을 할 거예요.
저도 한 때는 그런 생각이 들고..”
- 박찬호 INT 中
“이 마음 한 구석에서 아직도 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 박찬호 INT 中
메이저리그 통산 120승 투수에 이르기까지.
2002년, 텍사스 레인저스와 6천5백만 달러에 계약을 했던 특급 투수는
2008년, 50만 달러에 LA다저스 스프링캠프 초청선수가 되었다.
화려했던 전성기를 뒤로 끝없이 이어진 부진, 이내 마이너리그로의 추락.
그에게 있어 야구는 삶 그 자체이기에, 반복되는 침체기는 감당하기 벅찬 시련일 수밖에 없었다.
‘코리안 특급’에게 환호했던 이들은 점점 멀어져만 갔고,
격려와 용기 대신 ‘먹튀’라는 별명, 쏟아지는 악플, 은퇴를 논하는 목소리가 높았던 것이 현실이었다.
한 때 죽음까지 생각했던 혹독한 기간,
그러나 그는 묵묵히 자신과의 긴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재기에 성공했다.
지금이 있기까지, 많은 것을 견뎌내고 또 포기해야했지만
이제는 부와 명예를 다 거머쥐어 편히 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국의 팬들을 생각하며 마운드에 오른다는 박찬호.
장소가 어디인지는 상관없습니다.
2012년에도.. 2013년에도..
또다시 시작해주세요.
(2006년 샌디에고, 2008년 다저스. 박찬호 실착 유니폼. 큰돈주고 샀음 ㅋ)
사랑해요. 찬호형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