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렴하다
김용선
쫑쫑 썬 오징어가 나보다 먼저 국물을 마시고 통통해졌다.
독촉하지 않아도 주문하기 무섭게 뚝딱 나온 뚝배기에 김이 오른다. 밑반찬 서너 가지와 양은그릇에 담긴 수란이 그림자로 따라 나와 앉는다. 국밥을 먹기 전에 참기름 한 방울 떨어뜨린 수란에 김 가루를 뿌려 호로록 먹는 일이 에피타이저다. 고소한 참기름 향과 노른자의 고소함, 간간한 김 가루의 조합은 콩나물 국밥에 부족한 단백질 보충을 자처한 수란의 반란이다. 하나 더 먹고 싶다. 충청도식은 국밥에 달걀을 넣고 끓이는데, 따로 먹는 맛도 퍽 산뜻하다. 콩나물 국밥집이 즐비한 전주 시장 통에서 이 집으로 발길을 끈 건‘토렴식 국밥’간판이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토렴’이라는 단어가 뭉근하게 가슴을 데우며, 후루룩 추억 한 그릇을 비우고 싶어졌다.
토렴은 밥이나 국수에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 따랐다 하여 덥히는 방법이다.
원래는 물들였던 빛깔을 도로 빨아낸다는 뜻의 퇴염(退染)에서 왔다는데, 토렴이라는 우리말이 훨씬 정감이 있다. 토렴이라는 단어 속에는 토’하고 내뿜었다, 다시 ‘렴’하고 빨아들이는 묘한 고무줄 탄력을 내포하고 있다. 한때 외국인들이 음식이 든 그릇에 국물을 여러 번 끼얹었다 다시 빼는 모습을 보고 비위생적이라는 지적과 함께 토렴 음식을 꺼려서‘따로 국밥’을 선호한 적이 있었다. 기호에 따라 지금도‘따로 국밥’메뉴가 있지만, 토렴은 국밥 안에 밥알의 식감을 눅눅하게 하지 않고, 맑은 국물을 유지하기 위한 최적의 조리법이다. 밥이 식으면서 밥알에 생기는 균열에 국물이 스며들게 되어 더욱 맛있는 국밥이 되는 과학적 요리법이다.
나는 어린 시절 장터에 가서 국밥을 먹은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부엌에서 엄마가 펄펄 끓는 국물을 이리 부었다 저리 부었다 하시던 모습이 더 또렷하다. 뜨거운 수증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르면 엄마의 얼굴은 가려졌다 보였다 했다. 그럴수록 엄마의 손은 더 재게 움직이는 것이었다. 안개꽃밭에 그려보는 엄마 모습이 환하게 웃으시고 이내 지워진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시는 아버지를 위해 보온 시설이 없던 그 때 금방 차려내는 한 그릇의 뜨끈함은 토렴이 만들어내는 신세계였다. 추운 겨울 집에 오자마자 가장 빠르고 가장 맛있게‘등 따습고 배부른’오감을 채워주던 엄마의 토렴국밥. 아버지가 몰고 온 바깥의 찬 기운은 엄마의 따스한 정성과 토렴하여 방안은 대번에 훈기로 채워진다. 자취 생활에서도 국물이 없을 때는 차가운 밥에 뜨거운 물로만 토렴해서 김치만 걸쳐 먹어도 꿀맛이었다. 물을 넣고 끓이거나 데우면 음식이 탁해지고 풀어지지만 토렴을 하면 밥알의 식감도 그대로 살리고, 먹기 좋은 온도로 빨리 먹을 수 있어 일석삼조의 효과를 보는 셈이다.
부부의 연으로 살아가는 우리네 삶도 토렴의 과정이다. 생활습관도 사고방식도 한 알 한 알 살아있는 밥알처럼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음식도, 생각도, 공간도 같이 섞어서 따르고, 다시 부으며 부부라는 한 그릇을 차려내는 일이다. 뜨거운 쪽이 찬 쪽으로 옮아가며, 많은 쪽이 모자란 쪽으로 덜어내며 알맞은 온도를 찾아가는 일이다.
옛날 김홍도의 그림에도 뚝배기를 기울이며 국밥 퍼먹는 장정들 모습이 나오는데, 누구나 그 그림을 보면 모락모락 김 오르는 국밥이 떠올라 군침이 돌 것이다. 순식간에 건져먹고 훌훌 마시고는, 소맷등으로 입가를 쓱 훔쳐내며‘어이 시원하다’하는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미리 삶은 국수나 미리 썰어둔 고기에 펄펄 끓는 국물을 부었다 뺐다 서너 번 하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최적화된 온도가 맞추어진다. 반찬이 없어도 결코 얕볼 수 없는 한 끼 식사가 서양식 페스트푸드 뺨치게 빠르게 나온다.
토렴한 국밥은 정이다. 뚝배기에 뜨거운 국물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담긴 정은 뜨거운 열기가 되고, 왼손 오른 손이 건너가고 오는 동안 노동 시간은 단축된다. 우르르 몰려와도 후다닥 먹을 수 있고, 후루룩 먹어도 꿀떡꿀떡 넘어간다. 정성으로 우려낸 깊은 정에 다시 한 번 끼얹은 온정이 더해져 후끈 몸을 덥힌다.
붙박이처럼 정해진 공간에만 있다가 모처럼 시간의 구애 없이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이 시간이 내게는 식고 시들해진 생활의 토렴이다. 아예 식어버린 날들이 아무리 토렴해도 데워지지 않아 마지못해 살아야 할 때도 있지만, 한가한 기웃거림에 담금질을 하다가 하루의 체온을 뜨끈하게 말아 내고 싶다.
이른 여름, 한옥 마을로 접어드는 길목도 토렴으로 바쁘다. 새뜻한 4월의 햇살이 건물 아래 희읍스름한 그늘을 연신 토렴하며 거리를 데우고 있다. 겨우내 움츠렸던 마른 가지들도 쉼 없이 들숨과 날숨으로 봄빛을 토렴하여 연둣빛 잎눈을 키워가고 있다. 아침나절 지나갈 때 허허롭던 거리는 어느 덧 인파의 향기로 훈훈하다. 빈 그릇처럼 무표정한 행인들의 인상도 화기가 피어나 애애하다.
어둠은 밝음을 토렴하여 새벽을 빚어내고, 4월은 5월을 토렴하여 훈풍을 만들어내고 있다. 살아가는 일은 좌절위에 희망을, 포기위에 도전을 따랐다 부었다 토렴하는 과정은 아닐까.
따르고 부어서 섞이는 한 그릇, 덜어내고 보태서 하나 되는 온기, 따로 또 같이, 토렴의 미학이다.
첫댓글 어둠은 밝음을 토렴하여 새벽을 빚어내고, 4월은 5월을 토렴하여 훈풍을 만들어내고 있다. 살아가는 일은 좌절위에 희망을, 포기위에 도전을 따랐다 부었다 토렴하는 과정은 아닐까.
따르고 부어서 섞이는 한 그릇, 덜어내고 보태서 하나 되는 온기, 따로 또 같이, 토렴의 미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