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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강 의 기적을 생각해 보고 한강기적도 생각해 보고 외화 벌어 기업성장/ 국가 경제발전에 보탬되게 해 보려고 독일에 갔을 때 라인강을 오르 내리는 저 분주한 콘테이너 바지선을 보면서 .....사색에도 잠겼었는데...경제가 잘 풀려야 하는데 ...고민되네...내수 경기가 정말 안 존네...
수출도 연일 기름가 상승으로 점점 어려워지네...답답하네...이곳 안산(반월공단,시화공단)도 조업중단 및 단축업체가 많이 늘어나고 해외로 공장이전하는 곳이 많은데...다른 나라로 가서 그 나라 고용이나 창출 시켜주는 데 이곳 근로자의 일자리는 점점 없어지고 공장에서 하루벌어 하루 먹는 근로자의 주머니에 돈이 들어 올리 없고 기업주는 생존 때문에 간다지만 살수도 있겠지만 들어 오는 외국 공장은 없네...이왕 이전 하려면 개성으로나 가서 경공업 위주로 라도 내 땅에 돈 써서 우수한 노동력/언어소통/고구려 역사 도둑 중국 /독도 달라는 일본 왜구 도둑 놈 득세/돈 벌 곳이 있어야 자식학교 보내고 졸업 시키고 직장 잡고 장가/시집도 보내야 하는데 졸업해도 취직 안되는 세상 의욕이 떨어 지네...이것이 속 상하네 요...보혁 갈등은 막심하고 도둑이 훼초리 들고 곤장질 적반하장 ,정치는 부패,관료도 부패,정책은 일관성 부재,기업.가계는 불안 하네...국가는 IDENTITY,CONSENSUS가 없네...
문제는 내년/후년 그리고 미래가 밝아야 하는데...
만추에 나를 태운 루푸프한자 독일 항공기는 힘찬 굉음과 함께 서쪽 하늘로 날아 올랐다
앞으로 10시간을 날아가야한다.어느 새 황해를 건너 천산 산맥 위 중국 상공 날고 있었다.
몽고상공 시베리아 상공을 계속 날고 있었다.오후 서너시에 이륙을 했어도 서쪽으로 계속 날아야 하기에 가도 가도 밝은 대낮만 계속된다.매번 해외출장 때 마다 지상 약 1만-1만2천 미터 상공(직선 하늘로 20리-30리 높이)을 날 때면 조용히 생각한다.
여기에서 직선으로 20키로 미터(50리) 만 더 올라가면 대기권을 벗어나 우주로 가는 것이라고 말이다,그리고 항공기가 고도를 잡고 날아가면 그야말로 사방을 둘러봐도 수백리를 둘러봐도 완전 구름바다 뿐 일때가 많다......그 신비롭고 아름다운,지상에서 가장 포근한 촉감만을 주는 목화 솜 구름바다,남극의 온 백색 얼음바다,은세계 위 만을 안전하게 날아가고 그 아름다움이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려 낼수도,형용할수도 없는,우주의 신비,조물주의 섭리가 아니면 만들어 낼수도 흉내 낼수도 상상 조차 할수 없지 않은가!
참으로 신비롭고 인간은 얼마나 연약하고 강한 존재 인가를 생각하며,지구는 축복 스럽게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지구상의 아무리 높은 산도 빌딩도 상공에서 바라보면 보이지도 보일 듯 말뜻 보이지 않는가 ? 부자가 무슨 소용인가,하물며 졸부들은.....단지 불빛만이 고도를 아주 많이 낮추어 졌을 때 저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 빛 같이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지금 내가 얼마나 높이 올라 와서 생명을 주는 저 강렬한 태양과 또한 각국 정상을 비롯한 인간 모두에게 신비로움과 동경과 사색을 갖게 하는 저 밝은 달은 내가 여름 날, 멍석에 누워서 밤 하늘을 바라 보며 보았던 그 달과 똑 같이 않은가 단지 더 깨끗하며 더 가깝고 우주에서 보는 듯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홀로 기도도 해 본다,내가 염원하고 있는 바를 이루어 달라고 말이다.상공에서 비행기 속에 있는,그 때마다 인간은 한번 왔다가는 나그네 이지 않는가 라는 질문도 내 자신에게 하면서 말이다.솔직히 신앙생활과 기도생활을 아주 안해서도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님께 대한 두려움과 죄송함도 절실히 느낀다.매번 그리고 반성과 다짐도 해 본다.
그러면서 그 곳에서의 옅은구름에라도 가려진 달을 볼 때도 있었는데 나는 그 달을 바라보면서 혹시 주님은 이곳 아니 저기 어디에 숨어 계시는 걸까 ? 혹시 저 쪽에 하느님 모습의 일부라도 아니 혹시 아주 바늘구멍 만큼의 일부라도...그러나 내가 주님을 위해 한 일이라곤 없고 간구하는 것만 많으니 일말의 양심도 전혀 없음과 죄 의식에서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태양 과 구름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고향 동산에 묻혀 계신 나를 몹시 귀여워 해 주시던 나의 뿌리 인 할아버지 할머니의 산소도 생각나고,고향 팔순이 넘으신 부모님과 그리고 집 사람과 대학 다니는 딸과 아들의 모습도 떠오르고 나의 인생살이가 주마등 처럼 스쳐가는구나.....
부모님에게는 효도도,처 자식에게는 잘 해주지도 못해 항상 미안했던 마음이 들 뿐이다.한참을 지났는 데도 아직도 시베리아 상공을 지나고 있지 않는가 !
그렇지만 비행기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 우랄 산맥을 드디어 지나고 스칸디나비아 핀란드 상공에서 기수를 남으로 돌려 게르만 독일 상공으로 접어 들었다. 한 참 한 동안 날아 프랑크 푸르트 국제 공항에 기착했다.
전 유럽의 관문공항 이자 독일의 중심국제 공항에 난 내렸다.프랑크푸르트역으로 가서 함부르크행 야간 열차를 타야 한다.프랑크푸르트 역은 서울역과는 비교가 안되는 커다란 역이었다...독일에서 출발하여 전 독일과 각 인접국 국경도 지나 달려가는 유로레일 열차는 독일이 자랑하는 지멘쓰 ICE(이체) 특급 열차는 빠리로,스위스로,밀라노로,암스테르담으로.....사방 유럽 각국으로 거미줄 처럼 나 있는 철길을 따라 멀리 멀리 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힘찬 기적소리를 울리면서.....
그렇다 나는 지금 40여년 전,1962년 내가 국민학교 2 학년 때 만나고 지금 내 나이 50 이 되어서야 중년이 되어 있는 60 이 가까히 된 여인,성은 이 요 이름은 영순이라고 하는 먼 누님을 만나러 가는 여정인 것이다.
누님은 지금 같이 늦은 가을 아니 겨울에는 하얀 카라가 있는 곤색 상하의 교복에 자주색 책 가방을 오른 손에 들고 있던 아주 예쁜 고등학교 3학년 여학생 이었던 것을 나는 보았고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며 얼굴 또한 희고 예뻣었는 대....
그리고 그 곳에서 나의 중요한 사업적인 일도 보고 난 발길을 저 유명한 독일 시인 하이네의 고향이며 독일 루르 공업지대가 있는 뒤셀도르프로 가기로 되어 있다.
그리고 난 중세 /역사의 고장 쾰른에 들러 600 년에 걸쳐 완성된 쾰른 성당에 가서 미사도 보고 싶고 하이델베르크 대학에도, 라인강 을 지나 스위스의 알프스,이태리 밀라노,프랑스 빠리,영국 런던에 도착할 것이 계획되어 있고 이미 유로 여행 기차표를 한국 출발 할 때 사 가지고 손에 쥐고 기차를 타러 가는 것 이다 .
그야 말로 차표 한장 손에 들고......다시 인천 공항으로 와서 집에는 전화로 안부만 묻고 워낙 피곤하니 싸우나에 가서 피로를 다소나마 풀고 다시 인천 공항에서 밤 비행길 기다렸다가 호주 국영 비행기 Qantas(콴타스)를 타고 다시 호주 시드니로 10시간을 가야만 한다,다음날
아침 나는 08:00에 시드니 공항에 도착 그리고 그 공항에서2시간 기다렸다가 지상 최고의 낙원 이라고 할수 있는 평화롭기 비할 때 없는 호주 서쪽의 시드니에서도 시차가 3시간이 나기 때문에 실제는 6 시간을 비행해서 도착해야 한다. 퍼스(Perth) 로 가야 한다,다시 시드니로 와서 일을 며칠 본후 동부 브리스베인을 거쳐 뉴질랜드 오클랜드,넬슨 ,웰링톤,크라이스처치 오클랜드로 다시 와서 일 보고 와야 하는 장거리 출장인대 이제 시작이니 이 얼마나 고닲은 인생 길 이겠는가...까마득 해 보이기만 하구나.
열차는 기적 소리를 내면서 밤공기를 가르며 차창 밖으로 한참 만에 기차역들이 스쳐간다.감회가 다른 분위기다,라인강을 따라 불빛이 보이며 MAINZ HBF,KOBLENZ HBF,BONN HBZ(서독 수도)..... 북동쪽 흑해에 있는 독일 최대의 항구도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그 거리는 아마도 부산에서 신의주에 이르는 거리 이상의 거리다.
함부르크에 드디어 새벽에 도착 했다.공기는 차가웠다
5.16군사 구테타 후 독일 간호원 파견 제 1진 각도에서 2명씩 선발된 젊은 여인 이었다.
잠시 과거로 돌아가자...62년도를 회상 해 보면 우린 1 아니면 2학년 이었다 ... 한국의 자화상 일지 ...엄마 아주머니 할머니들은 머리에는 수건을 모자대신 쓰고,키도 들고 그 때는 ...몸빼를 일반적으로 입고 살지 않았는가...국방색 몸빼 말이다...내의 하나 변변한것도 없었고,요즘 그흔한 양말과 여성 부래지어 같은 것은 꿈에도 없던 시기 였지 않는가...
요즘 나도 만나는 사람들마다 모두 힘들다고들 많이 듣고 산다.IMF 때보다도 몇배 더 어렵다고 들 하고 실직자가 늘어 나고 ,대졸자가 취직을 꿈도 못 꾼다.사오정 오륙도는 훨씬 내려갔다. 하지만 뒤돌아 보면 우리 한국인들은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시기를 수없이 겪어 왔고, 그때마다 좌절하지 않고 힘을 모아 슬기롭게 극복해 온 빛나는 전통을 갖고 있지 않는가.
내가 와 있는 이곳 도이칠란트는 2차 대전 후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었고 통일도 이룩 했지만 그 시절은 배고픈 배를 움쳐지기도,굶고 자고,굶고 학교에 오고,도시락 못 갖고 오는 우리의 친구들이 태반 이었지 않았던가...
한국이 전후(戰後)의 폐허 속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궈내고 선진국의 문턱으로 달음질친 역정(歷程)을 되돌아 보면 한국 경제의 고비고비 마다 배어 있는 한국인들의 눈물과 장탄식, 불굴의 도전 정신과 지혜들을 되새기면서 오늘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를 얻었으면 하는 바람도 해 본다.
1964년 12월 10일 오전 10시55분, 독일(당시 서독) 루르 지방 함보른 탄광의 한 공회당. 얼굴과 작업복에 석탄가루가 묻은 500여명의 한국인 광부, 한복차림의 한국인 간호사, 독일인들 앞에 당시 독일을 방문 중인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나타 나시었단다.
실내에 애국가가 울려퍼졌지만 “동해물과 백두산이…” 가사는 들리지 않았다. “대한사람 대한으로…” 마지막 대목에 이르러서야 박 대통령과 광부, 간호사들의 목멘 소리가 간신히 들렸을 뿐이었다고 한다.
“여러분, 난 지금 몹시 부끄럽고 가슴 아픕니다. 대한민국 대통령으로서 무엇을 했나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합니다. …나에게 시간을 주십시오. 우리 후손만큼은 결코 이렇게 타국에 팔려나오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정말 반드시….”
떨리는 목소리로 계속되던 박 대통령의 연설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고 하며 광부, 간호사뿐 아니라 곁에 있던 육영수(陸英修) 여사, 뤼브케 서독 대통령도 손수건을 꺼내 들면서 공회당 안은 ‘눈물 바다’로 변했다.
당시 청와대 경제고문 자격으로 박 대통령 통역을 맡았던 백영훈(白永勳·74·전 중앙대 교수) 박사는 “탄광을 떠나는 승용차 안에서 박 대통령은 ‘내가 죄인이다’라며 눈물을 흘렸고, 옆에 있던 뤼브케 대통령이 ‘울지 마십시오. 분단된 두 나라가 합심하여 경제부흥을 이룹시다’라고 위로하는 말을 통역하면서 나 역시 울었다”고 회고했다.
첫댓글 지난 역사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이 대목은 감동적이네요.. 한시대의 역사의 그늘속에서, 한편 억압당한 사람들은 애통하겠지만 그래도 그들의 피와 땀이 밑거름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해방-좌우 이념 대결 속에 친일파 척결도 못하고-정부수립-6.25 동란-휴전-자유당 부패-민주당 무능-4.19-5.16 군사 쿠데타-공화당 집권-구걸하며 어렵게 돈 빌려 근대화 박차... 한강의 기적...
그렇게 해서 얻은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지켜나가야 할텐데....
반성할것은 반성하고 미래로 잘 나아가야 하는데요 이 정부도 남은 임기 잘 할려고 하겠지..
그렇게 피땀 흘려 국가의 틀을 만들고 경제를 일으킨 나라인데 몇몇의 머저리들이 지도자의 위치에서 국민에게 비전의 제시나 희망은 커녕 퇴임후 업적을 염두에 두다가 오히려 발전과 성장의 근간을 흔들고 자기 잘난척만 하다 다른 나라들에게 추적이나 당하고 있으니~
FTA 를 더욱 잘 해서 선진국 국가를 일으켜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