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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게시판 스크랩 3 야고보서
am 추천 0 조회 103 07.10.02 12: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4혀를 조심하라 <3:1-12>


앞서 말에 대하여 경고해 온 야고보(1:19-26)는, 말을 많이 하게 되는 교사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다.【1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내 형제들아는 1:2의 주석을 보라.

선생은 디다스칼로이(διδάσκαλοι)로서 권위의 의미를 대표하며 강조하는 것이다(G. Poteat). 이 말에 대해 파커(P. Parker)가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 용어(master)는 그리스 문학에 종종 나타나는데, 존경의 칭호로서 ‘주’와 ‘왕’이란 말과 쌍을 이룬다. 신약 성경에서는 가끔 세례 요한과 같은 비크리스트교 지도자들에게 적용되거나(눅 3:12), 또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눅 2:46, 요 3:10)에게 적용되었다. 또한, 이 용어는 주로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며, 그 외에 거의 공적 지위란 암시로서 초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적용되었다.1)

여기의 선생이란 구체적으로 그 자신을 포함한 ‘교회의 지도자들’(A. E. Barnett)을 의미하는데, 크게 두 부류로 구별된다. 하나는, 일정한 교회에 적을 두고서 가르치는 선생(행 13:1)과 교회들을 순회하면서 가르치는 바울이나 바나바 또는 실라와 같은 선교사들이다.

바울은 교사(개체 교회)를 사도와 예언자 바로 다음에 둘 정도로(참조: 고전 12:28, 엡 4:11) 교사직을 중요시하고 있다. 어드만(C. R. Erdman)은 “종교적 진리를 가르치는 교사란 참으로 존귀한 직분이며, 반드시 있어야 할 직분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교사란 존경과 신뢰의 대상이었다.

초대 교회의 선생들이 가르친 대상에 대해 바클레이(W. Ba- rclay)는 크리스트교로 개종한 사람들이라고 하며, 윌리암즈(R. R. Williams)는 세례를 받기 위해 준비하는 자들을 첨가시킨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크리스트교 교육의 대상이란 모두를 포괄하는 것이다.

교회 교사와 일반 교사의 다른 점은 그 내용에 있다.

교회에서 교사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 요소는 영적 지혜와 영적 지식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행위, 즉 복음인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행위란 인간의 전 삶의 영역을 포괄하는 것이며, 끊임없는 신앙적 실존의 성장을 위해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이와 같이 중대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교사가 유의해야 할 두 가지 점을 바클레이(W. Barclay)가 잘 지적하고 있다. (1) 자신의 의견도 아니며 자신의 선입관도 아닌 진리를 가르치는 일에 항상 유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항상 자신의 생활과 자신의 교훈이 모순되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상, 교사의 직분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교사직을 수행하는 교사 자신의 책임 의식이다.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교사의 철저한 책임 의식이란 반드시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토대로 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철저하게 책임을 의식한다고 해서 교사로서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에게 부과된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질 각오로 착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일을 그르치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까닭은 중요성을 인식하고 확고한 책임 의식이 있지만, 그 일을 감당할 능력이나 자질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사가 가르치는 일에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일을 감당할 능력과 자질이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고전 14:9).

교사가 반드시 갖춰야 할 또 하나의 요소는, 이 일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이라고 하는 확고한 소명 의식이다(米田豊).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인간으로서(신자라 할지라도)완벽한 능력과 자질을 갖춘다는 것이 가능한가? 더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 외의 모든 영적 세계에 관한 것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는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크리스트교의 교사직의 특이성을 살펴보아야 한다. 크리스트교의 교사란 자신의 사상이나 지식 또는 지혜를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훈과 죽음 그리고 부활 및 재림에 관한 영적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며, 창조주 하나님의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주 구원의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동시에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인간을 포함한 전 우주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도록 교훈하는 것이다.

루셀(L. M. Russell)은 “기독교 교육이란 인간들의 참된 인간성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도록 부르시는 그리스도의 초대에 참여하는 것이다.”2)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크리스트교의 교사란 크리스트교 교육의 시작과 진행과 목적을 그리스도 안에서 수행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마 28:16-20).

따라서, 크리스트교의 교사의 능력과 자질이란 대 교사인 그리스도의 도구 됨이다. 다시 말하면, 교사란 자기 자신이 피교육자를 가르친다는 우월감을 버리고, 다만 자신의 입과 행위를 통해서 피교육자를 양육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리자가 된다는 것은 곧 그분의 교사직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 대해 루셀(L. M. Russell)이 잘 설명하고 있다. “교사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삶 속에 역사하시는 자신의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교사가 되시기 때문에 참여자이다. … 또한, 교사는 결코 홀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참여자이다.”3)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교사는 항상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늘 기도와 말씀을 통해 주님을 배우며, 그분의 영을 소유하려는 진지하고도 끈질긴 열정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4)

선생의 위치가 이처럼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야고보가 믿음의 형제들에게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경고하는 이유에 대해, 칼뱅(J. Calvin)은 “교사란 소명에 대한 너무 지나친 열정을 저지하는 것이다.”라고 설명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이 점에 대해 이스톤(B. S. Easton)은 “야고보가 경고하는 것은 교사의 일을 책임질 만한 자질이 없으면서도 교사로서 행세하려고 하는 믿는 자들의 혀의 죄이다.”라고 잘 설명하고 있다.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크리스트교 교육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부족과 그에 따른 책임 의식의 결여, 그리고 교사의 일을 수행할 만한 능력과 자질이 없이, 다만 “교사직의 특권 및 부수입”(G. Poteat) 그리고 명예와 존경심을 얻기 위한 이기적인 목적으로 교사가 되었고, 또 되려고 하는 모든 이들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방금 열거한 것들을 갖추지 않은 채 교사가 될 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가르침은 자연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성숙시키기는커녕, 오히려 실족케 하는 것이다. 믿는 자들을 실족케 한다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가는 예수님 자신의 말씀에서 분명해진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마 18:6-7).

야고보 역시 교사라는 특수한 위치 때문에 빚어지는 잘못에 대해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함부로 교사가 되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교사란 위치의 중요성으로 인해 그들은 잘할 때 상급도 크고, 잘못할 때 벌도 중한 법이다”(이상근).

야고보는 교사가 받을 심판이 더 큰 주된 원인이 바로 교사의 도구인 입이라고 한다.【2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실수는 프타이오멘(πταίομεν)이며 ‘넘어지다’, ‘떨어지다’, ‘실수하다’, ‘범죄하다’ 등을 의미한다.

야고보는 자신을 포함하여(E. C. S. Gibson) 모든 사람이 다 약하기 때문에 실수하기 쉽다(黑崎幸吉)고 한다. 실상, 모든 인간은 여러 가지 면에서 넘어지고 있는데(E. C. S. Gibson), 특히 가장 쉽게 저지르는 것은 말의 죄이다(R. R. Williams, W. Barclay). 그러므로 야고보는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하는 것이다.

깁손(E. C. S. Gibson)은 “혀를 온전히 지배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라고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혀를 주님의 영의 통제에 맡김으로써 가능해지며(마 10:19-20, 행 6:10, 7:55-56), 따라서 온전한 사람이라고 불려지는 것이다.

여기서의 온전(텔레이오스, τέλειος)이란 “신적 의미에서의 절대적 완전이라기보다 기독교적인 의미에서의 완전”(마 5:48: C. R. Erdman), 즉 “탁월한 기질과 성격을 갖춘 성숙한 그리스도인”(R. R. Williams)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만이 자신의 온 몸을 굴레 씌울 수 있다.

온 몸이란 그의 모든 행위(J. Calvin, M. Henry)의 기구이고, 그 상징이다(이상근).

굴레 씌운다(칼리나고게사이, χαλιναγωγήσαι)는 ‘통제하다’(J. Calvin), ‘억제하다’(C. R. Erdman, 黑崎幸吉)를 의미한다.

주님께 맡겨 자신의 인격의 표현인 혀를 잘 통제하는 자는 온전한 자로서 자신의 전 삶을 이루는 행위를 주님 안에서 잘 지배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더욱 뚜렷하게 부각시키기 위해서 야고보는 두 가지의 비유를 들고 있다.

먼저, 그는【3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라고 하였다.

아무리 사납고 힘센 이라 할지라도, 그 입에 조그만 재갈을 먹여 온 몸을 기수의 뜻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지극히 작은 혀를 조정함으로써 자신의 전 행위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는【4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라고 하였다.

이 구절도 3절과 같은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조그만 재갈을 먹여 커다란 말의 모든 동작을 조종하고, 작은 키를 조종함으로 큰 배의 항로를 마음대로 지배한다고 한 야고보는,【5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라고 한다.

이 구절에 대해 (1) 큰 일을 한다는 설(J. Calvin), (2) 큰 해를 일으킨다는 설(H. Alford). (3) 선악간에 큰 일을 한다는 설(A. Clarke) 등이 있다.

3절과 4절은 작은 것이 좋은 면에서 큰 위력을 나타낸다는 내용이고, 5절 후반은 작은 것이 큰 피해를 준다는 내용이므로, (3)설을 취해야 할 것이다.

칼뱅(J. Calvin)은 “만약 혀가 적절하게 잘 통제된다면, 우리의 전 삶의 양식에 대한 재갈로서 봉사한다. 그러나, 만일 혀가 거칠게 움직이고 방종한다면, 모든 것을 불태우는 성냥개비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포티트(G. Poteat) 역시 “말해진 말은 어떤 육체적 행동보다 더 선악에 있어서 더욱 강한 힘이 될 수 있다.”라고 하였다.

결국 야고보는 모든 사람이 실수하기 쉬운 혀를 많이 사용하는 교사나 교사가 되려고 하는 자, 특히 기독교 교육의 중대성과 책임 의식, 일을 감당할 능력과 자질, 그리고 소명 의식 등이 없이 교사가 되려고 하는 자들은 당연한 결과로서 말에 실수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말이란 선악간에 큰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작은 혀가 잘 지배됨으로써(주님의 성령에 의해서만 온전한 혀의 지배가 가능하다.)  얻어지는 큰 유익을 설명하였다. 포티트(G. Poteat)는 “위로의 말은 모든 영혼을 절망으로부터 건질 수 있다. 대담한 말은 정의를 위한 강력한 타격이 된다. 영감에 가득 찬 말들은 인류 형제애의 목표를 향한 도보 행진을 시작하게 한다.”라고 하였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한 헨리의 말은 영국의 지배를 받던 미국인들에게 큰 용기를 불러일으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힘이 되었다.

혀의 유용한 위력을 말한 야고보는 혀의 무서운 해독에 대해,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라고 한다. 해서도 해 가르치고 있다.

보라(이두, ἰδοὺ)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표현이다.

야고보는 혀의 막대한 피해를 많은 나무’(휠렌, ὕλην)5)태우는 작은 불에다 비유한다. “이러한 비유는 나사렛의 목수의 아들에게서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은 그리스 언어의 매우 간결한 사용이며, 본래적 양식인 ‘불꽃으로부터 불붙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R. R. Williams). “고대인들은 숲의 불에 대해 빈번하게 언급하고 있다”(E. C. S. Gibson).

큰 숲을 태우는 작은 불과 같은 것이 곧 혀라고 한 야고보는 구체적으로 혀의 엄청난 피해를 설명하고 있다.【6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이 구절을 앞선 구와 연결시켜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개역 한글판 성경)로 읽어야 한다는 설(H. Alford, “Huther, Shegg”6))과 뒤따르는 구와 연결시켜 ‘혀는 우리의 지체 중에서 불의의 세계’로 읽어야 한다는 설7)이 있다.

본문 자체는 어느 편이든 취하게 되어 있으나, 후 설을 취하는 것이 전체의 문맥을 더 명료하게 한다(이상근).

여기의 는 물론 주님의 능력에 의해 통제되지 않고, 임의대로 움직이는 혀를 의미하는 것이다.

아무튼, 야고보는 잘 제어되지 않은 혀를 가리켜, 큰 숲을 불태워 버리는 불이라고 하고(잠 28:11), 또 우리 몸의 지체 중에서 불의의 세계라고 한다.

불의의 세계(ὁ κόσμος τής ἀδικίας)에 대해, (1) 세계(코스모스, κόσμος)를 훈장(Ornament)으로 해석하여 혀가 지체 가운데서 ‘불의의 훈장’(상징)이라고 하는 설(Greek Fathers, Westein. storr Eward),8) (2) 불의의(테스 아디키아스, τής ἀδικίας)라는 소유격을 형용사격으로 보아 ‘불의한 세계’라고 하는 설,9) (3) 불의가 지배하는 전 세계, 또는 불의가 지배하는 모든 영역으로 해석하는 설(shegg) 등이 있다.

이상근 님은 “세계에 관사가 있으므로, 이를 막연한 어떤 영역으로 보는 (3)설은 옳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이를 훈장으로 보는 것도 부적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2)설이 가장 무흠하고 전체의 뜻도 분명해진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불의한 세계로 읽을 경우에는 혀 자체가 불의한 것이 되고 마는데, 야고보가 의미하는 것은 혀 자체가 악하다는 것이 아니라 많은 불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黑崎幸吉, NEB). 따라서, 혀가 불의한 세계라고 하기보다는 소유격 그대로 혀는 불의의 세계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M. Henry, B. S. Easton, W. Barclay).

세계란 장식이란 의미도 있으나, 여기서는 “이 세상, 특히 하나님이 없는 세계, 또는 하나님께 대해 무지한 세계, 때로 하나님께 적의를 품는 세계를 뜻한다”(W. Barclay). 즉, 하나님을 떠나 불의가 가득한 지체가 곧 혀(제어되지 않은)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제어되지 않은, 불의로 가득 찬 혀가 끼치는 무서운 피해에 대해, 야고보는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라고 하였다.

여기의 온 몸은 각 지체를 포함하는 “전 인격”(J. Wesley)을 의미하며, 더럽히고는 죄와 죄책 가운데로 끌고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솔로몬은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전 5:6)라고 하였다.

은 게네세오스(γενέσεως)로서 ‘존재하기 시작하다’, ‘창조되다’, ‘낳다’, ‘자라다’ 등의 뜻에서 왔으며, ‘세계’(마 1:1), ‘나심’(마 1:18), ‘모든 피조물’(Plato) 등의 의미가 있다.

바퀴는 트로콘(τροχὸν)으로서 ‘진로’, ‘과정’, ‘코스’, ‘바퀴’ 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생의 바퀴는 “자연의 수레바퀴”(Worldsworth)10)나 “모든 피조물의 윤회하는 생애”(H. Alford)나 “생의 진로”(黑崎幸吉)가 아니라, 단순히 ‘일생’11)을 의미하는 것이다. 깁손(E. C. S. Gibson)은 “프럼트리의 해석이 자연스럽다. 즉, 출생으로부터 전 생애의 모습을 뜻한다. … 전도서 12:6에도 삶이 수레바퀴에 비유된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는 계절과 해가 바뀜에 따라 다른 악덕들은 고쳐지는데, 그 반면에 혀의 악덕은 불길처럼 생의 모든 시기에 흩어지고 널리 퍼지면서(J. Calvin) “인간의 전 생애를 파멸시킨다”(W. Barclay)는 뜻이다.

이와 같이 인생을 불살라 파멸시키는 혀의 불이란, 지옥12) 불에서 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혀의 불이 지옥 불에서 점화되었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칼뱅(J. Calvin)이 잘 설명하고 있다. “사단은 유혹들에 의해 까불려진 모든 종류의 악의 불을 지상에 붙였다. 야고보의 요지는 사단이 보낸 불이 혀에 의해 가장 쉽사리 점화되어 활활 타오른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혀란 지옥의 불을 잡아 조장하고 증가시키는 그럴 듯한 도구라는 것이다.”

지옥 불에 점화되어 온 몸을 죄로 불살라 생 전체를 태워 버리는 혀의 엄청난 피해를 깨우친 야고보는, 이어서 혀의 길들이기 어려운 특성을 다른 생물들과 비교하며 설명하고 있다.

그는【7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종류는 퓨시스(φύσις)로서 ‘성질’ 또는 ‘성격’(E. C. S. Gibson, 黑崎幸吉)으로 읽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 또한, 이 낱말은 사람에게에도 걸려 있으므로, 모든 종류의 동물들의 성질이 사람의 성질에 의해 길들여졌고, 길들여져 왔다고 읽는 것이 정확하다.

길들므로는 다마제타이(δαμάζεται)로서 제어하여 유용하고 유익한 것으로 만든다는 뜻이다(W. Barclay).

한 마디로 말해, 온순한 동물은 물론, 아무리 사납고 흉포한 성질을 가진 동물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노력에 의해 그 본성처럼 유용하고 유익한 것으로 만들어지지 않는 동물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혀는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야고보는【8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라고 한다.

웨슬리(J. Wesley)는 “사람이란 자신의 나 다른 사람의 혀나 길들일 수 없다.”라고 하였다. 랑게(Lange)는 “혀를 길들일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이 격동할 때에 악마적 힘이 있는 것을 보이고 있고, 그 힘에 대해서 인간성이란 아무 힘이 없는 것이다.”13)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길들여지지 않는 혀란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제어되지 않는다면, ‘말한다’는 특권이 그 영혼의 파멸을 가져온다(C. R. Erdman). 그뿐만 아니라 중상, 참소, 조소, 아첨, 논쟁, 악담, 거짓말 등은 남의 인격을 죽이며, 영생에 이르는 길에서 파멸시킨다. 시편 기자는 그와 같은 혀의 악독에 대해 “뱀같이 그 혀를 날카롭게 하니 그 입술 아래는 독사의 독이 있나이다”(140:3)라고 하였다.

야고보는 악독이 가득한 혀의 이중적 특성에 대해,【9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야고보는 우리라고 함으로써 그 자신 역시 모든 사람에게 있는 혀의 이중성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호모이오신, ὁμοίωσιν: ‘비슷한 것’, ‘유사’)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에 대해 칼뱅(J. Calvin)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본질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담의 죄로 인해 없어졌다는 것이 부정된다면, 우리는 그 형상이, 아직 그것의 어떤 윤곽이 나타난다는 면에서, 슬프게도 손상되었다는 것을 시인해야만 한다. 의, 공평, 선을 추구하는 자유와 같은 것들은 없어졌으나, 많은 자질(gifts)들이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짐승보다 우월한 것이다.”

이상근 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이란 창세기1:26을 가리킨다. 이는 성서적이나(고전 11:7), 외경이나(Sirac, ⅩⅦ, 3, Wisd. ⅱ-23, 4 Esdr ⅷ-44 등), 성서 외의 문헌에도 (Philo, Akiba) 보편적인 사상이다.

벤겔(J. A. Bengel)은 “형상대로란 육적이 아니라 영적 요소, 즉 인간의 공의성, 진실성, 자비성 등 정신적인 면에서 하나님 같게 지음받았다는 것이다. … 인간이 타락했다 하더라도, 모든 인간 속에는 하나님의 모양을 찾을 수 있고, 이 모양(인간의 고귀성)때문에 사람은 피차 존경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야고보는 성령의 지배를 거역하는 교인들의 혀의 이중성에 대해,【10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라고 하였다. 

바클레이(W. Barclay)는 “혀는 축복할 수도 있고, 저주할 수도 있다. 혀는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위로할 수도 있다. 혀는 가장 아름다운 말을 할 수도 있고, 가장 불결한 말을 할 수도 있다.”라고 하지만, 야고보의 의도는 혀가 선이나 악 어느 쪽으로나 사용된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혀의 위선적인 죄악을 책망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칼뱅(J. Calvin)이 잘 파악하고 있다. “인간이 같은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인간을 저주한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위선이다. 형제를 저주하는 혀로 하나님께 대해 위장된 찬양을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죄스런 모독이다.”

이러한 혀의 위선적인 이중 성격은 인간의 본성의 분열 상태를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성령이 역사하지 않는 한 혀의 이중적인 기질을 극복할 수 없는 것이다.

야고보는 혀의 이중적 특성이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창조 질서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11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12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한 마디로 말해, 한 원리로부터 다른 것이 나올 수 없다. 어느 것도 그것이 본질에 관계되지 않은 채로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이다(E. C. S. Gibson). 디다케(didache)에도 같은 교훈이 들어 있다. “너는 두 마음이 되지 말라. 또, 두 말을 하지 말라. 이는 두 갈래의 혀는 죽음의 올무이기 때문이다”(2장).

3:1-12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선생이 되지 말라는 야고보의 경고는 교육의 중대성, 책임 의식, 일을 감당할 능력이나 자질, 그리고 소명 의식 등이 없이 다만 교사란 특권 의식과 부수입을 목적하여 교사가 된 자나, 되려는 자들에 대한 것이다. 이들은 자연적으로 그들 자신의 입으로 많은 실수를 저지르게 되며, 맡은 일의 중요성에 비례하여 더 무거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교사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작은 지체인 혀는 지옥 불에 가장 잘 감염되고, 또한 그 죄악의 불길을 무섭게 확산시켜 많은 생명을 파멸시키는 것이다. 더욱더 무서운 것은 사나운 동물조차도 사람의 성격에 의해 길들여지는데, 혀는 길들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악독과 위선으로 가득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이 혀가 온전히 지배될 때에 전 인격과 생애를 올바로 통제할 수 있게 되며, 또한 큰 유익을 끼치게 되는데, 이는 오직 말씀이 육신이 되신 주님의 영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즉, 사람이 주님을 영접함으로써 “마음이 정결해지고, 완전한 사랑으로 채워지면, 입에서는 은혜의 말 또는 사랑의 말만이 나오게 된다”(米田豊).




15참 지혜와 거짓 지혜<3:13-18>

(3:1-12)에서 인간의 지체 중에서 작지만, 자신과 남에게 막대한 피해를 줄 수 있는 혀를 주로 사용하는 교사(지도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을 경계한 야고보는, 이제 지혜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13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인간 세계에는 지혜와 총명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면서도 지혜롭고 총명하다고 자부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교사나 그 밖의 다른 지도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칼뱅(J. Calvin)은 “이러한 위선자들은 주변 사람들을 멸시함으로써 스스로를 뽐내며 과시하는 것이 보통이다. … 옛날에는 많은 철학자들이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 대해 냉소적으로 빈정거림으로써 명성을 얻었다.”라고 하였다. 어드만(C. R. Erdman)도 “저들의 뽐내고 자랑하는 지혜란 것은, 거짓 지혜요 허망한 지혜다. 이런 사람들이 단지 교사들 가운데만 있는 것도 아니며, 초대 교회에 국한되지도 않는다는 것은 진실로 불행한 사실이다. 야고보가 책망하는 이 거짓 지혜의 소유자는 오늘에도 너무나 많다. 인간을 아는 사람은 자기뿐인 것 같이 뽐내며, 증오와 분노로 논쟁에 눈을 붉히며, 말끝마다 진리를 옹호하기 위함이라고 호언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라고 더욱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라고 표현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 표현은 질문(R. R. Williams, W. Barclay)이 아니라, 가장 지혜롭다고 떠들고 자랑하는 자들에 대한 도전이다(C. R. Erdman).

앞(3:1-12)에서 선생과 관련시키면서 말에 대해 경고한 야고보는, 이제 마음의 문제 곧 지혜를 다루는 것이다.

지혜란 소포스(σοφὸς)로서 본래 고전 그리스어에서는 수공이나 예술에 숙련된 것을 의미하였고, 나아가서 과학을 공부한 것을 의미하였다. 그리스 철학에서는 일보 더 나아가 도덕적 의미에서 사용하게 된 것이다(이상근). 이 낱말이 신약 성경에서는 ‘숙달된’(롬 16:19), ‘학식 많은’ 혹은 ‘교화된’(고전 1:19, 20), ‘실제적인 삶의 행위’(엡 5:15) 등으로 사용되었고(G. R. Berry), 최고의 신적인 지혜(롬 16:27, 딤전 1:17)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었다.

야고보는 지혜를 단순한 개념이나 명상 또는 과학적인 의미에서의 지식, 영리함, 교활 등이 아니라, “삶에 있어서의 실제적 행위(선행)란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M. Henry, G. Poteat, 米田豊). 따라서, 지혜자란 항상 ‘보다 더’(1:5의 주석을 보라.) 유용하고도 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총명은 에피스테몬(ἐπιστήμων)으로서 신약 성경에는 여기에만 사용되었으나, 구약 성경(LXX)에는 지혜와 같이 나타나며(신 1:13, 4:6 등)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다(E. C. S. Gibson). 이 낱말은 ‘지식’(AV) 또는 ‘이해’(RSV)라는 의미도 있다.

야고보가 강조하는 것은 정말 그러한 지혜와 총명이 있다면 행위로 그것을 입증하라는 것이다. 그는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자랑하는 이들에게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고 요구하고 있다.

지혜의 온유함이란 ‘지혜와 결부된 온유’(J. A. Bengel), ‘지혜에 어울리는 온유’(H. Alford), ‘지혜의 합당한 온유’(Meyer)14) 등의 뜻이며, 질투나 당쟁심과는 반대되는 심정이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 대한 적절한 번역은 다음과 같다. “지혜로운 사람답게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착한 생활을 함으로써 그 증거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공동 번역 신약 성서). 참된 지혜란 항상 온유한 마음을 가지며, 그로 인해 행해지는 선한 생활을 통해 알려진다는 것이다. 참된 믿음의 사람이 그에 따르는 행위로 그 믿음이 참된 것임을 입증하는 것처럼,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온유한 마음과 그에 따른 행위로 그 지혜를 입증하는 것이다.

온유는 프라위테티(πρᾳΰτητι)로서 본래 “고전 그리스어에서는 ‘노여움을 완화하는 방법인 외적 행위’(Aristotle), 혹은 ‘힘이나 가혹의 반대가 되는바 정죄 받은 자에 대한 인정으로서의 외적 행위’(Platon), 혹은 ‘노함의 반대인 외적인 행위’(Herodotus)로 규정하였다.15) 이 낱말은 거만 또는 불손과 반대어이다(J. H. Ropes).

이상근 님은 “그리스도인의 온유란 내적인 요소로서 마음의 평정성, 유화성, 친절성 등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특성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요소들인 것이다. 즉, 죄 많은 사람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대하는 겸손한 심정에서 온유성이 생기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드만(C. R. Erdman)은 “온유함이란 약하게 굴음이란 뜻이 아니다. 온유와 나약을 연결시키는 것은 만부당한 일이다.… 자기의 실력에 대하여 확신이 있는 강한 자만이 참으로 온유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주목할 만한 설명을 하고 있다.

기사와 이적을 행하시고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신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라고 증언함으로써, 온유와 겸손이란 능력이 있을 때에 가능한 것임을 암시하셨다. 따라서, 인간이 온유해지는 길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지혜를 얻는 길이기도 하다.

야고보는 지혜와 총명이 있다고 하면서, 지혜의 온유함으로 행하지 않는 사람의 심중을 간파하여,【14그러나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라고 경고하고 있다.

마음은 카르디아(καρδίᾳ)로서, 생명의 근원이며(잠 4:23), 생각(롬 10:6, 고후 3:14), 욕구(롬 10:1), 욕정(롬 1:24), 의지(고전 4:5, 7:31, 고후 7:3), 결단(고전 7:37), 행위(롬 2:15, 6:17), 근심과 고통(롬 9:1, 2), 슬픔(고후 2:4), 사랑(롬 5:5, 고후 7:3) 등의 주체이다.

특히, 중요한 점은 마음이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이다. 회개란 이성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변화되는 것이며(고후 4:6), 변화된 마음은 하나님과 관계한다(마 5:8, 벧전 3:4).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감찰하며(삼상 16:7, 롬 8:27, 살전 2:4),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어 주신다(고후 4:6). 또한, 우리 마음을 강하게 하시고(살전 3:13), 마음에 성령을 주시고(고후 1:22),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 마음에 거하게 하신다(갈 4:6, 엡 3:17, 골 3:15).

인간은 마음에 할례를 받고(레 26:41,겔 44:7, 롬 2:29), 마음에 말씀을 담아(롬 10:8), 마음으로 순종해야 한다(롬 6:17).

지혜가 있다고 자랑하나 온유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행위가 없고, 오히려 마음속에 독한 시기다툼이 있는 사람은 실상 거짓된 지혜자로서 자랑할 것도 없으며, 더 이상 진리를 거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기는 젤론(ζήλος)으로서 ‘열중’, ‘열심’(요 2:17), ‘경쟁’, ‘질투’(행 5:17, 13:45), ‘맹렬’(히 10:27) 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젤로스는 본래 좋은 의미의 말이었다. 그것은 고상한 것을 볼 때, 그것을 나누어 가지거나, 또는 그렇게 고상하게 되고자 하는 좋은 기대에서 비롯되는 경쟁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그 의미가 변질되어 다른 사람의 소유를 탐하는 것이나, 또는 자신에게 합당치 않은 것까지라도 가지고 싶어하는 잘못된 욕망을 의미하게 되었다.”라고 설명하였다󰡕�(갈 5:20의 주석). 이러한 시기는 인간의 우월감이나 열등감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특히 열등감에서 강렬한 시기심이 발동하는 것이다.

黑崎幸吉은 “남의 우월을 시기하고, 또한 자기의 우월을 주장하려는 열심이 있는 마음이라.”고 함으로써 나쁜 의미로 풀이하고 있는데, 이는 일면만을 보는 것이다.

깁손(E. C. S. Gibson)은 “시기란 그 자체가 악한 것일 수도 있고, 선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독한(피크론, πικρὸν)이란 형용사가 시기의 특징을 규정하고 있다.”라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야고보는 독한이란 형용사를 붙여서 자신이 언급한 시기가 나쁜 의미의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黑崎幸吉은 “이러한 시기란 자기 우월감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우월감뿐만 아니라 열등감에서도 나오는 것이다. 대부분의 우월감이란 깊은 열등 의식의 위장으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실제로 강렬한 시기심이란 열등감에서 더욱 많이 나타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거짓 지혜자의 또 하나의 특징은 다툼이다. 이 말은 에리테이안(ἐριθείαν)이며, “삯꾼(에리토스, ἔριθος)에서 온 말로서 원래 ‘삯을 위한 노동’을 뜻했고, 거기서 ‘당쟁심’, ‘당파심’16)을 의미하게 되었다”(E. C. S. Gibson, 이상근). 또, 이 낱말은 ‘이기적 야심’을 의미하기도 한다.17)

바클레이(W. Barclay)는 “에리테이안은 반드시 나쁜 의미만을 가진 단어는 아니었다. 그것은 원래 ‘삯을 주고 빌리는 방적기’란 뜻으로 여직공들이 사용하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임금을 얻기 위해 하는 일’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 정치의 영역에서는 다른 것은 일체 배제하고 자신을 위한 것만을 생각하는 ‘당파심’이란 의미의 말이 되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음모와 책략을 꾀하며 어떠한 수단이라도 사용한다는 의미의 말이 된 것이다.”라고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독한 시기나 당파심 또는 이기적인 야심을 가진 사람이 스스로 지혜 있다고 자랑하지만, 실상 진리를 거스르고 있는 것이므로 자랑할 게 없는 것이다. 야고보는【15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라고 규정한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지혜가 아닌 거짓 지혜는 세 가지 특징, 즉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인 특징이 있다.

첫째, 세상적이란 에피게이오스(ἐπίγειος)로서 ‘세상(earth)에 속한 것’(고후 5:1, 빌2:10), ‘세상적인 것’(빌 3:19)을 의미한다(G. R. Berry). 이외에도 ‘땅의 일’(요 3:12, 빌 3:19), ‘땅에 속한 인간’(고전 5:14, 빌 2:10)이란 뜻이 있다. 따라서, 세상적 지혜는 하늘의 것과 반대되는 것, 즉 “빛의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J. Wesley), 오히려 세상에 속한 것으로 “멸망할 세상만을 바라보는 지혜이다”(김철손).

그러므로 그 지혜의 근거와 원리는 하나님의 진리와 상반되는 세상이며, “그 표준 역시 세상적인 것이다”(W. Barclay). 또한, 그 목적 역시 세상일을 성취하는 것이며, 세상 것들을 얻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세상적 지혜를 가진 사람의 모든 삶의 동기와 목적은 세상적인 것이다.

이러한 지혜의 활용은 예수 그리스도18)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되는 것이므로, “세상일에는 지혜 있게 보이나 하늘의 일에는 전혀 어두우며”(이상근), 결국 “사단의 함정에 빠질 것이고 지적 파멸을 초래할 것이다”(J. Calvin). 그가 아무리 하나님을 떠나 인간의 전 삶의 양식에 탁월하여 세상 것을 얻는다 해도, 결국 죽음이 찾아올 때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고전 3:19)라고 하였다. 

둘째, 정욕적이란 프쉬키케(ψυχική)로서 성령과 반대되는바 자연적인 것을 의미한다(고전 2:14, 15:44, 46, 유 19). “이 말은 단순히 육체적이란 말이 아니라,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성신의 감동을 받지 못한 자연인을 뜻한다”(C. R. Erdman).이 외에도 ‘동물’, ‘짐승의’, ‘감각적인’ 등의 의미가 있다.19)

그러므로 “정욕적인 지혜란 성령에 의해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연인 그대로의 동물적 정신에 속한 것으로”(R. R. Williams), “동물이 먹이를 얻거나 살아남기 위하여 물어뜯으며 으르렁거리는 지혜밖에 되지 않는다”(W. Barclay). 한 마디로 말해, 정욕적 지혜란 성령과 대립되는 것으로 본능에 속한 지혜이다.

셋째, 마귀적이란 다이모니오데스(δαιμονιώδης)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가 작용하므로 발휘되는 것이다((J. Wesley).

이 지혜는 “마귀의 뜻을 좇는 것이고, 또한 마귀의 정신에 합치되는 것으로”(C. R. Erdman), “자만, 이기심, 악의의 것들로 가득 차 있다”(E. C. S. Gibson). 마귀의 지혜를 가진 인간은 늘 불안과 초조감에 사로잡혀 남을 해치려고 한다. 마귀적인 지혜의 독특한 성격은 하나님을 거역케 하며, 그로 인해 파멸케 만드는 것이다.

이 사실은 아담과 이브의 범죄와 타락의 과정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창 2-3장). 특히, 놀랄 만한 것은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을 줄 뻔히 알고 있는 사람에게 따먹도록 유혹하여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 만큼 사단의 지혜란 인간을 넘어뜨리는 마력적인 힘이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악한 지혜를 가진 사단이 인간의 심령을 파고들 때, 그 인간은 범죄하여 타락할 수밖에 없다(삼상 18:10. 참조: 요 13:2).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로프스(J. H. Ropes)는 “거짓 지혜, 즉 세상적이며,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지혜는 땅을 향하고 위의 세계를 향하지 않으며, 단순히 자연을 향하고 성령을 향하지 않으며, 대적하는 악의 신을 향하고 하나님의 신을 향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결국 거짓 지혜란 영적인 것보다 물질적인 것을, 하늘의 보화보다 세상 보화를,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영원한 것보다 일시적인 것을, 영생보다 육체적 생명을 더 소중히 여겨 추구하는 삶의 수단과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야고보는 세상적이며,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지혜의 특성과 그 결과에 대해,【16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요란은 아카타스타시아(ἀκαταστασία)로서 ‘불안정’, ‘폭동’, ‘혼란’, ‘무질서’ 등을 의미한다(G. R. Berry). 이것은 거짓 지혜자 자신은 물론, 타인이나 공동체 전체에서 야기되는 결과이다. 이와 달리, 하나님께서는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다(고전 14:33).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는 혼돈과 무질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거짓 지혜는 특히, 교사들 및 그 밖의 다른 지도자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데, 이런 이들로 인해 가정과 교회 그리고 모든 공동체들이 혼란과 분열의 고통에 휘말리게 되고, 온갖 악한 일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이제까지 말한 거짓 지혜와 대조되는 참 지혜에 대해,【17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라고 설명하고 있다.

위로부터 난 지혜20)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참 지혜를 의미하는 것이다. 헨리(M. Henry)는 “참 지혜란 사람들과의 대화나 세상 지식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라고 하였다.

성결하고는 하그네(ἁγνή)로서 “어원적 뜻은 신 앞에 나가기에 충분한 깨끗함이다. 이 말은 처음에는 의례적인 의미로 쓰여졌으나, 후에 도덕적인 깨끗함을 의미하게 되었다”(W. Barclay). 더욱 구체적으로 말하면, “지적, 육적, 악마적인 것들, 즉 죄의 집념이나 행위에 물들지 않은 상태”(黑崎幸吉), “위선과 자기성 배제”(J. Calvin), “세속적, 자연적, 악마적인 것을 떠난 순수함”(J. Wesley) 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성결이란 인간에 의해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말미암아 가능한 것이다. 그분을 믿음으로 죄를 씻음 받은 우리는 항상 그를 바라보는 생활(히 12:2)을 통해 성결을 보존하게 되는 것이다.

야고보는 성결(순결) 다음에 화평을 놓음으로써 성결(순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화평이 깨진 것은 아담의 범죄 때문이었다. 죄는 평화를 파괴하는 결정적 요인이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평화를 회복하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화목 제물이 되셨는데, 이것은 평화를 깨뜨리는 죄를 제거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진정한 평화란 죄로부터의 성결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죄악이 내포된 평화란 진정한 평화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성결은 평화를 희생해서라도 보전해야만 하는 것이다(E. C. S. Gibson).

여기의 화평하고는 에이레니케(εἰρηνική)이며, 그 명사형은 에이레네(εἰρήνη)로서 평화를 의미한다. … 이것이 인간에 대해 사용될 때의 기본적 의미는 인간과 인간, 또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W. Barclay, 김철손),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해로부터 생기는 마음의 평화를 지시하는 것이다(G. R. Berry).

이러한 평화란 순결한 마음에 따르며, 또한 그것에 의존하는 것이다(M. Henry). 그러므로 야고보는 성결을 희생하면서까지 화평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악과 타협하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C. R. Erdman).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평화를 얻은 자들은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 평화를 이루기 위해 평화를 깨뜨리는 죄악과 피 흘리는 싸움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우리 죄를 사하여 화평케 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에서 명백해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과의 화평을 성취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켜,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못 박히신)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고전 1:23 전반-24)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화평을 이루기 위해 영적 싸움을 싸울 때, 반드시 십자가로 승리하신 주님을 앞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화평케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게 되는 것이다(마 5:9).

관용하고는 에피에이케스(ἐπιεικής)로서 “신약 성경의 그리스어 중에 가장 번역하기 어려운 낱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성문법 이상의 것’이라고 하였고, 또 ‘정의이며, 정의 이상의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또한, ‘법률 자체가 부정하게 되었을 때에 사실을 바르게 하기 위하여 간섭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 자신에게 해 줄 것을 원하는 친절한 배려를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능력이다”(W. Barclay).

이 낱말은 “분노에 대해 참는 것을 의미하는 것.”(E. C. S. Gibson)이라기보다는, “지나치게 엄격하지 않은”(J. Calvin) 부드러운 마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용심이란 양보, 또는 이해를 통하여 남의 주장을 용납함을 의미할”(박윤선) 뿐만 아니라, 마땅히 책벌해야 할 실수나 죄악을 범한 사람을 이해하고 용납하는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관용이란 합법적인 동시에 초 합법적인 것이다. 이것은 바로 죗값으로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인간에게 베푸신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서 명백하게 나타났다.

양순하며는 유페이테스(εὐπειθής)로서 여기만 나타나는데, ‘간청 받기 쉬운’이란 뜻이다(E. C. S. Gibson). 이 낱말은 “교만”(黑崎幸吉)이나, “변하기 쉬운 것이나 고집불통이 아니라”(W. Barclay), “즐겨 남의 말을 청종하고”(J. Wesley, 黑崎幸吉, 이상근), “될 수 있는 대로 순종하고 협력하고 화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C. R. Erdman).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긍휼은 엘레우스(ἐλέους)로서 부당하거나 혹은 타당하게 고통을 당하는 인간에 대한 동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동정이란 하나님의 동정의 반영이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적으로 친절하고 선한 모든 것을 행할 마음이다”(M. Henry). 이러한 마음의 실행이 곧 선한 열매인 것이다.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편벽은 아디아크리토스(ἀδιάκριτος)로서 원래 ‘의심하지 않는 것’, ‘판단하지 않는 것’, ‘부당한 추측을 하지 않는 것’, 그리고 ‘차별하지 않는 것’ 등을 의미한다(M. Henry). 그렇다고 해서 “선악의 모든 구별을 없애거나, 판단력을 상실하여 악을 덕으로 찬양하는 것에 대한 무관심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J. Calvin). 오히려 신앙적인 확신 위에 기초한 한결같은 마음가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위로부터 난 지혜는 빛이요 진리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거짓이 있을 수 없다. 여기에는 거짓 지혜에서 보는 것처럼, 기만이나 속임수 그리고 외식이 내포되지 않는다.

야고보는 위로부터 난 참 지혜를 가진 자들에 대해,【18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심어와 관계되는 것에 대해 화평이라고 하는 설(J. Wesley, C. R. Erdman)과 의의 열매라고 하는 설(J. Calvin, M. Henry, 박윤선)이 있다. 

여기서는 후자를 취하는 것이 더욱 적합한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의 의미는 화평케 하는 자들은 평화로운 마음(태도)으로 의의 씨(열매)를 심어 그 열매를 거두게 된다는 것이다. 깁손(E. C. S. Gibson)은 “의의 열매란 의로운 행동이 산출하는 것으로 구약 성경에서 자주 사용된 표현이다”(잠 3:9, 11:30, 암 6:12, 사 32:17. 참조 : 빌 1:11).

3:13-18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야고보는 두 종류의 지혜를 말하고 있다.

특히, 교사나 지도자들 중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처럼, 스스로 지혜(총명) 있다고 자만하고 자랑하면서 온유한 마음으로 행하기는커녕, 오히려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는 사람은 실상 진리를 거스르는 거짓 지혜자이다.

독한 시기란 지나친 우월감이나, 또는 열등감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다툼이란 당파심 또는 이기적 야심으로 자신의 욕구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거짓 지혜는 세상적이며, 정욕적이며, 마귀적이다. 즉, 그 지혜의 근거와 원리는 하나님과 상반되는 세상이며, 그 표준 역시 세상적인 것이다. 또한, 그 목적은 세상 것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 일에는 전혀 맹목이며, 그로 인해 결국은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 지혜는 어디까지나 성령과 대립되는 자연적이며 동물적인 본능에 속하므로 정욕적인 것이다.

끝으로, 마귀적이라 함은 사단이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가 작용하므로 발휘되는 지혜라는 것이다. 이 지혜를 가진 인간은 늘 불안과 초조감에 사로잡혀 남을 해치려고 한다.

결국 거짓 지혜란 영적인 것보다 물질적인 것을, 하늘의 보화보다 세상 보화를,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을, 영원한 것보다 일시적인 것을, 영생보다 육체적 생명을 더 중히 여기며 그것들을 얻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다. 이 지혜의 결과란 혼란과 모든 악한 일들이다.

그러나, 위(하나님)로부터 난 지혜인 참 지혜의 특징은 첫째가 성결인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말미암은 것이다.

둘째는 화평이다. 이것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화목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이며, 그로 인해 평화를 얻은 우리는 화평케 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싸울 각오를 가져야 한다.

셋째는, 합법적이며 동시에 초 합법적인 정신으로서의 관용이다. 이것은 죄인을 위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서 극명하게 나타난 것이다.

넷째는, 양순으로 남의 말을 잘 청종하여 순종하고 협력하는 것을 말한다.

다섯째는,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한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이유로든 고통을 당하는 자들에 대한 동정이며, 이를 실행하는 것이 곧 선한 열매인 것이다.

끝으로, 참 지혜는 편벽이나 거짓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지혜를 소유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고전  1:24, 2:7-8)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 그리스도”(골 2:3)를 소유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이러한 지혜를 가진 자들, 즉 화평케 하는 자들은 평화로운 마음으로 의의 씨를 심어 그 열매를 거둔다고 한다.




16정욕을 버려라<4:1-3>

하나님의 은사로서의 지혜의 한 결과인 평화에 대해 언급한 야고보는 이제 그 정반대인 싸움에 대해 논하고 있다.【1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이스톤(B. S. Easton)은 “이 구절은 유대교 전체에 적합하다.”라고 하였고, 이상근 님은 “유대인들은 편당과 분쟁을 쉽사리 하는 백성이다.”라고 하였다. 헨리(M. Henry)는 더욱 구체적으로 “사도는 여기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싸우는 것을 비난한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윌리암즈(R. R. Williams)와 黑崎幸吉은 서신의 독자 중에 당파 싸움으로 서로 맞서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지시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박윤선 님은 교회 지도자들을 경계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어드만(C. R. Erdman)은 교회 안에서의 파쟁과 불화를 책망한 것이 틀림없다고 하였다.

이스톤(B. S. Easton)은 싸움다툼이란 그리스 작가들에 의해 쌍으로 쓰여진 용어로 거의 구별이 없다고 하였다. 굳이 구별한다면, 싸움(폴레모이, πόλεμοι)은 ‘전쟁’을, 다툼(마카이, μά-χαι)은 ‘전투’, ‘투쟁’(고후 7:5, 딤후 2:23, 딛 3:9) 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초대 교회에서 싸움과 다툼이 흔했다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서신을 보아도 알 수 있다(고전 3:1-9, 빌 4:2 등). 이러한 교회 내의 분쟁은 교회를 어지럽혔고, 많은 교파들을 만드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고, 또한 그리스도의 본질적인 사업에 커다란 장애 요인이 되어 왔다.

야고보는 교회 내의 싸움과 다툼의 원인에 대해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라고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 밝힌 원인은 개인과 개인의 다툼으로부터 국가와 국가의 전쟁에 이르는 모든 종류의 싸움의 원인이기도 하다.

黑崎幸吉은 “이 말은 영혼 또는 내주하는 하나님의 영(5절)에 대하여 싸우는 것을 뜻하며(롬 7:23, 벧전 2:11), 정욕이 반대당(H. Alford)이나 반대하는 모든 것(Mayor) 또는 정욕 서로간에 싸운다는 뜻은 아니다. 이와 같은 설명은 어떤 온전케 하는 원리나 목적 또는 충성에 의해 해결되지 않은 내적 갈등에 대한 현대 심리학의 묘사와 일치하는 것이다(G. Poteat).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제시하신 바른 삶의 원리로서의 영적 법칙을 거역하여 싸우는 정욕 때문에 모든 종류의 싸움과 투쟁이 발생하는 것이다.

정욕이란 헤도논(ἡδονών)으로서 ‘쾌락’, ‘성적 욕망’, ‘육체적 욕망’ 등을 의미한다(눅 8:14, 딛 3:3, 벧후 2:13, 약 4:3: G. R. Berry). 특히, 여기서 야고보가 의미하는 것은 ‘쾌락’(J. Calvin, 박윤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나쁜 의미로서의 모든 육체적 욕망으로 보는 것이 문맥상 더욱 적절하다.

야고보의 취지는 성령의 소욕을 거스르는 육적이며 세상적인 소욕(갈 5:16-17), 즉 권력욕과 지배욕, 쾌락의 욕망, 부의 욕망, 명예욕 등으로 인해 모든 다툼과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싸움의 원인인 정욕이 인간의 모든 염원을 성취하는 것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2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여기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얻기 위한 인간의 두 가지 태도를 찾아볼 수 있다. 한 가지는 철저하게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고(2절), 또 한 가지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특히,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은 기도의 동기를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켜야 된다는 것이다(3절).

전자에 해당되는 것으로, 얻고자 하는 것에 대한 강렬한 욕심(에피튀메이테, ἐπιθυμείτε)이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고, 심지어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얻거나 취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다툼과 싸움을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란 일단 악한 욕망에 빠지면 다함이 없으며(J. Calvin), 따라서 마음속에 평안과 만족이 있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거룩한 욕망이 아닌 죄스런 욕심의 노예가 될 때, 끊임없는 불평과 원망을 일삼게 되므로 결국엔 멸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살인하며 시기하여도란 표현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살인이란 낱말이다. 칼뱅(J. Calvin)은 “나는 우리가 프토네이테(φθονείτε: 탐하며)로 읽어야 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살인이란 말은 그 상황에 적합하지 않다.”라고 하지만, “사본들과 고대 번역들은 모두 포뉴에테(φονεύετε: 살인하며)로 되어 있는 점을 보아 살인하며로 읽어야 할 것이다”(E. C. S. Gibson).

이상근 님은 “이 말을 조화시키기 위해 살인하며를 ‘미워하며’의 뜻으로 보는 견해(Estius, De Wette, Bcyschlag), 이를 ‘도덕적 자살 행동을 하며’로 해석하는 견해(Oecumenius, Theoph- ylact), 살인하며를 형용사로 취급하여 ‘살인적으로 시기하여도’로 읽는 견해(Pott, Gebser) 등이 있으나, 역시 문자적으로 살인하며로 읽는 견해(알포드, 보우만, 쉐그)가 가장 좋을 듯하다.

현실적으로 욕심 때문에 살인하는 일들은 얼마든지 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살인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요일 3:15 전반) 란 말씀을 명심하여 미움마저도 버려야 한다.

야고보의 취지는 하나님께 구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수단방법, 즉 욕심을 부리고, 살인하며, 시기하고, 싸운다 할지라도, 그 사람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아무리 발버둥치고 몸부림쳐도 얻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육체적인 욕심과 살인과 시기로 가득 찬 마음속에 하나님과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자리잡을 여지가 없는 것이다. 설사 하나님께 구한다 해도 동기가 악하므로 응답받을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야고보는 분명하게【3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드만(C. R. Erdman)이나 黑崎幸吉은 “기도해도 얻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의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바클레이(W. Barclay)가 더욱 자세하게 하고 있다. “단순히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만 행해진다면 그 기도는 근본적으로 이기적인 것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하기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응답한다는 것은 곧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도를 가리켜, 야고보는 잘못 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잘못은 카코스(κακώς)로서 ‘악하게’라는 뜻이다. 즉, 정욕으로 쓰려고 기도하는 것은, 한 마디로 말해, 악하다는 것이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1:5 후반)께 얻기 위해서 우리는 올바른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올바른 기도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黑崎幸吉),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드리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W. Barclay). 한 마디로 말해, 인생의 중심에서 자기 자신을 옮겨 버리고, 그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기 전까지는 결단코 올바른 기도를 드릴 수 없는 것이다(W. Barclay).

박윤선 님은 “기도의 응답을 많이 받은 죠지 물러는 요구가 있다고 해서 얼른 기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기도하기 전에 먼저 꿇어앉아 성경을 오래 동안 묵상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한 후에야 기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라고 하였다.

4:1-3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야고보는 교회 내의 분쟁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싸움과 투쟁의 근본적인 원인이 외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과 더불어 싸우는 육적이며, 세상적인 욕망에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이러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욕심을 부리고, 심지어는 살인하고 시기하며 싸우지만, 실상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설령 하나님께 구한다 해도, 악한 동기와 목적으로 잘못 구하기 때문에 얻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응받받을 수 있는 올바른 기도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하는 것이다.





17하나님을 가까이 하라<4:4-10>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처하면서 세상 것에 대한 탐욕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혹독하게 경고하고 있다.【4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간음하는 여자들을 문자적인 의미로 취하는 학자들도 있기는 하나(Winer, Hort),21) 대다수 학자들은 이를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22)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선민 사이를 부부 관계로 비유하고, 신앙의 정조를 버린 이스라엘을 간음한 아내로 경책한 부분이 많이 있다(사 54:5, 62:4, 5, 렘 3:2, 겔 16장, 호 9:1).

신약 성경에도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다(고후 11:2, 엡 5:24-28, 계 19:7, 21:9. 참조: 마 12:3-9, 25:1-13, 막 8:38)

“비유적인 의미에서 남편인 하나님께만 충실하고, 또한 애정을 가져야만 할 아내인 이스라엘, 또는 새 이스라엘인 교회가 도리어 하나님께 대해 불충한 것을 가리켜 영적 혹은 신앙적 의미에서의 간부라고 하는 것이다”(김철손).

하나님께 대한 불충으로서의 영적 간음이란 상대적으로 세상의 벗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원수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야고보는 아주 단호하게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세상이란 코스무(κόσμου)로서 ‘우주’ 또는 ‘세상’(요 1:9, 10, 롬 1:20, 딤전 6:7, 히 9:26, 요일 4:1), ‘모든 인간’(마 5:14, 눅 12:30, 요 1:29, 3:17), ‘하나님을 떠난 인간’ 또는 ‘하나님과 대립되는 불 신앙적인 삶’(요 3:16, 8:23, 18:36, 고전 1:20, 엡 2:2, 벧전 5:9, 벧후 2:5, 요일 3:13, 4:5) 등을 의미한다. 이 외에 ‘단장’, ‘화장’, ‘꾸밈’(벧전 3:4) 등의 뜻도 있다.

여기서는 주로 육체적인 욕심, 즉 이기적이며 죄스런 욕심을 쫓는 세상적인 삶을 의미하고 있다.

바울도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즉, 일반적으로 세상을 하나님과 대립되는 인간(인간성), 그리고 그의 삶의 원리로서 기술하고 있다(고전 1:20-21, 27, 28, 고전 2:6-8, 3:19, 롬 11:12, 골 2:8, 20, 딤후 4:10, 고전 2:12, 고전 6:3-4, 7:33-34, 고전 8:4, 11:32).

바클레이(W. Barclay)는 “하나님을 떠나 있는 세상이란 의미, 즉 불경건한 세상, 자신의 방법으로 하고자 하는 세상, 하나님의 방법을 거부하는 세상 등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라고 설명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 여기의 세상이란 이스톤(B. S. Easton)의 말대로 “악의 전체성이다. 마찬가지로 유대교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밖에 있는 모든 것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란 쾌락을 추구하는 자(G. Poteat, B. S. Easton, 박윤선)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힘으로 살려고 하는 세상적 삶의 원리를 따르는 자이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복과 은혜를 구하는 대신에, “세속적인 행복과 혜택을 구한다”(J. Wesley). 또한, “이런 사람들의 궁극적 관심은 하늘의 보화와 영권 그리고 영적 능력이 아니라, 세상의 부와 명예와 권력 등을 얻는 데 있다”(黑崎幸吉).

이와 같은 생활 양식이 바로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요일 2:15-16, 딤후 4:10). 이 점은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분명해진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 “하나님과 세상이 대립 관계에 있으므로, 하나님을 섬기려면 세상을 부인하라는 것이 성서의 반복되는 명령이다”(J. Calvin).

야고보는 하나님만을 사랑해야 할 인간이 세상을 사랑하는 데,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그런 인간들을 사랑하시는가를 일깨워 주고 있다.【5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이 구절은 아주 난해한 구절로서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의 주체가 규명되어야 올바른 이해가 가능해진다. 헨리(M. Henry)와 웨슬리(J. Wesley), 이스톤(B. S. Easton)과 윌리암즈(R. R. Williams) 등은 ‘인간의 영’으로 이해하고 있다. 특히, 윌리암즈(R. R. Williams)는 “많은 주석가들이 영이란 그리스도인들이 믿는바 그들 속에 거하는 성령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은 인간의 형체에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living soul)이 되게 하셨다고 한 말씀의 의미에서의 인간의 영으로 취하는 것이 더 낫다. 이 영이 타락의 이야기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시기에 가득 찬 욕망으로 변화되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칼뱅(J. Calvin)은 “… 인간의 영(spirit)이나 정신(soul)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그러나, 더 나은 해석은 그것을 하나님의 성령으로 보는 것이다. 그는 그들의 시기로부터 그들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통제받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기를 원한다.”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보는 것(Bede, Cyril, Euthymius)23)은 옳지만, 그가 시기를 인간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 점에 대해 이상근 님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시기하기까지 하면서 사모하신다는 것이다. 비록 아내는 부정하여 세상과 짝하였지만 남편은 아내를 시기하기까지 하면서 사모하신다는 것이다(출 34:14).”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질투, 혹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란 출애굽기 20:5, 34:14, 신명기 4:24, 5:9, 6:15, 32:16, 21, 에스겔 35:11, 스바냐 1:18, 3:8 등에 언급되어 있다.

또 하나의 난점은 말씀이 무엇을 지시하느냐 함이다. 이상근 님은 여러 주장을 비교하면서 나름대로의 견해를 내세우고 있다. (1) 구약의 대의(Knowling), (2) 신약의 어느 구절(J. A. Bengel, Oesterley), (3) 야고보 자신의 말(Mayor), (4) 잃어버린 고전(Chrysostom) (5) '말씀’이 내포된 구는 후대의 삽입구(Kern, Bouman, Weiss, Hofmann) 등의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늘 성서의 어떤 구절을 가리키므로(West- cott, Oesterley), 이도 어떤 성구의 인용으로 보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사 60:1, 2(Mayor), 사 29:10(H. Alford), 사 6:10(Jewett), 사 58:11, 슥 14:8 (Westcott) 또는 창 4:7, 6:3, 8:21, 민 11:29, 35:34, 겔 36:17, 벧전 2:1 등이란 추측들이 많으나 결정적으로 지적하기 어렵다.

이스톤(B. S. Easton)은 “구약 성경, 위경, 남아 있는 어떤 유대적 문서나 랍비적 문서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이 사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성서란 후기 교회가 받아들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포함했기(참조: 요 7:38, 딤후 3:8, 유 14:15 등) 때문이다.”라고 하여, 초기에만 인정되었던 어떤 성구의 인용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칼뱅(J. Calvin)이 “성서 안에 그런 문장이 발견되지 않는다. … 우리는 이것이 성서에서 종종 발견되는 교훈임을 말해 왔다.”라고 하여, 어떤 성구의 인용이라기보다는 성서의 내용을 인용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야고보에 의하면, 하나님의 성령께서 배반한 우리를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신다는 말을 우리가 헛된 줄로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더욱 큰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그는【6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라고 하였다.

일렀으되더욱 큰 은혜를 주시는 것이란 이미 잠언 3:34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영적 간음을 한 우리를 시기하기까지 사모하시는 하나님, 즉 우리로부터 이 세상의 모든 집착을 버린 참 사랑을 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위대한 요구를 성취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더욱 큰 은혜를 주신다(M. Henry).

더욱 큰 은혜란 “시기와 증오에 이르는 자연적 유혹보다 더 강하다거나”(R. R. Williams), 또는 “겸비를 주실 뿐 아니라 그 위에 더욱 큰 은혜를 주신다는 의미”(박윤선)가 아니라, 사모할 뿐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은혜를 주신다는 의미에서 한 말이다.

은혜는 카린(χάριν)으로서 헬라인들의 인사말이었던 카이레인(χαίρειν)이나, 라틴어 gratia에 해당하며 ‘총애’나 ‘호의’를 의미한다.

특히, 이 개념은 바울 서신들에서 독특하고도 풍부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밀톤(C. L. Milton)은 “바울 서신들에 있어서 은혜란 예수님-그분의 성육과 생애와 죽음과 부활- 안에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무제약적이며 분에 넘치는 자비에 적용된다.

이 은혜로부터 인간은 용서의 복, 하나님과의 평화, 구원, 하나님께 복종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분의 교회 안에서의 봉사를 위한 선물들을 받게 되는 것이다.”24)라고 설명하고 있다.

신학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은혜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일”(M. Henry), 인간을 즐겁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R. T. Stamm), 그리고 죄스런 피조물이 필요로 하는 모든 신령한 복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E. Huxtable) 등의 뜻이다. 한 마디로 말해, 받을 자격이 없는 인간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만으로는 아직 카리스(χάρις: 은혜)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다.

카리스(은혜)에 대한 가장 핵심적인 의미란 곧 ‘죄의 용서’(M. Luther, R. C. H. Lenski)이다󰡕�(갈 1:3의 주석). 하나님의 은혜 중 은혜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현된 속죄의 사랑이며(롬 5:7), 그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이 특수한 은혜를 체험하지 못할 때, 일반적인 은혜란 진정한 의미에서의 은혜라고 할 수 없다. 만일 누가복음 15:11 이하에 나오는 탕자가, 아버지로부터 많은 선물(은혜)을 받았으나 용서를 받지 못했다면 그 선물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인간이 죽음과 멸망으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죄악의 사슬에서 구속받는 은혜를 받지 못했다면,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에게 주시는 일반적인 은혜가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이 구속의 은혜야말로 모든 은혜를 은혜 되게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그분을 통해서 인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은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은혜는 구체적으로 겸손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상대적으로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서 물리치신다.

바클레이(W. Barclay)나 어드만(C. R. Erdman)은 필요한 도움을 겸손하게 하나님께 구해야 은혜를 받는다고 하지만, 여기서 야고보가 의도하는 것은 구하는 태도라기보다는 오히려 겸손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 은혜를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은혜를 받아들일 자격으로서의 겸손한 사람(B. S. Easton)이란 무능하거나 무기력한 사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 자신의 부족(실존적 한계성)을 인식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인식이란 영적 능력이 있을 때에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영적 능력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만큼 더 겸손해지게 마련이다. 다시 말하면, 벼가 익으면 익을수록 무거워지므로 저절로 머리가 수그러지는 것처럼,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겸손해지게 되는 것이다. 흔히 생각하듯, 자신을 의도적으로 낮추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가식일 뿐이다.

참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는 사람은 항상 완전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헨리(M. Henry)는 “이들은 필요한 은혜를 알고 그것을 얻기 위해 기도하며 감사하는 사람들이다.”라고 하였다.

겸손한 자와는 달리, 교만한 자는 영적으로 무지하여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또한 알려고도 하지 않으면서도 마치 자기 자신이 절대자인 것처럼, 또는 하나님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여 자기 본위와 자기 위주의 생활을 한다. 이들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 항상 경멸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런 사실은 교만(휴페레파노이스, ὑπερηφάνοις)의 뜻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낱말은 타인 위에 자신을 올려놓는 사람(W. Barclay), 모든 사람에 대한 절대적인 경멸(Theophrastus),25) 그리고 모든 악의 본거지며 극치(Theophylact)26) 등의 의미가 있다.

이와 같이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거역한다. 자신의 이해에 있어서 그는 하나님의 진리를 거역하며, 자신의 의지에 있어서 그는 하나님의 법도를 거역하고, 자신의 열정에 있어서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는 것이 이상할 것 없다”(M. Henry).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한 야고보는, 독자들에게 자기를 내세우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라고 명하고 있다.【7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헨리(M. Henry)는 구체적으로 “너의 이해를 하나님의 진리에 복종시켜라. 너의 의지를 하나님의 의지 곧 하나님의 계율의 의지와 섭리의 의지에 복종시켜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께 대한 복종이란 복을 받고 은혜와 능력을 얻는 비결이라는 것이 성경의 주된 교훈 중의 하나이다. 박윤선 님은 “하나님을 순종하는 자와는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므로 마귀를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이 그에게 있다.”라고 하였다. 즉, 복종을 통해 힘을 얻으며, 그로 인해 마귀를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이다(B. S. Easton, 米田豊).

마귀란 디아볼로(διαβόλῳ: 원형은 디아볼로스, διάβολος)로서 사단(σατάν)과 동일한 존재로 마가와 바울을 비롯한 신약 성경 기자들에 의해 인격적인 악의 왕으로 믿어졌다(마 4:1, 3, 5, 8, 눅 4:2, 3, 6, 13, 8:12, 벧전 5:8, 롬 16:20, 엡 4:27, 히 2:14, 약 4:7, 요 13:2, 27, 요일 3:8, 10, 12, 5:18, 19, 계 12:9, 유 9). 예수님 또한 그렇게 믿으셨다(마 6:13, 13:39, 25:41, 막 3:23, 26, 4:15, 눅 4:8, 10:18, 11:18, 13:6, 22:3, 31, 요 8:44).

마귀(사단)의 별명은 ‘바알세블’(마 12:27), ‘벨리알’(고후 6:15), ‘악귀의 머리’(막 3:22), ‘이 세상의 왕’(요 14:30),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 ‘뱀’(고후 11:3), ‘용’(계 12:3), ‘원수’(계 11:12), ‘악한 자’(엡 6:16), ‘대적자’(벧전 5:8), ‘고소자’(계 12:10), ‘시험하는 자’(마 4:4), ‘속이는 자’(계 12:9), ‘살인자’(요 8:44), ‘거짓말쟁이’(요 8:44) 등이다.

이 외에 마귀를 표시하는 다이모니온(δαιμόνιον)은 복수로 사용되어 그 수가 많은 것을 표시하며, 사단의 부하들로 취급되고 있다.

마귀(사단)는 비범한 능력을 가진 초자연적 존재로서 하나님을 대적하며, 인간들을 유혹하여 타락시키는 짓을 한다(욥 1:6, 슥 3:1, 마 4:1-, 13:39, 눅 4:1-, 8:12, 요 13:2, 행 10:38, 엡 6:11, 딤전 3:6, 7:11, 딤후 2:26, 3:3, 살전 2:3, 약 4:7, 벧전 5:8). 그는 죽음의 권세를 가진(히 2:14) 이 세상의 통치자이지만, 그리스도에게 결정적으로 패배를 당하였다(마 25:31, 유 9, 계 2:10, 12:9, 12, 20:2, 10).

또, 마귀의 모든 활동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도구로 이용되는 것이다(고전 5:5, 고후 12:7). 예를 들면, 마귀는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주어(요 13:2), 그로 하여금 예수님을 팔게 했지만, 결국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에 이용된 꼴이 되고 말았다.

그와 같이 마귀의 모든 활동은 하나님의 원대하고도 심오한 섭리를 위해 허용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님에 의해 멸망당할 운명에 처해 있는 존재이다(계 20:10).

마귀를 대적하는 방법에 대해,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 5:8, 9)라고 하였다(참조: 엡 6:10 이하). 다시 말하면, “마귀를 대적하는 행동과 태도는 우리 자신이 가져야 할 것”(C. R. Erdman)이 아니라, 마귀를 이기신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도 주님의 영을 소유하지(롬 8:9, 11) 않고는 마귀를 제대로 대적할 수가 없다.

다음으로, 야고보는【8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라고 명하고 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는 구약 성경에서 제사장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으며(출 19:22, 겔 42:13, 44:13), 또한 내적 태도로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을 의미하였다(시 73:28, 사 58:2, 사 29:13, 호 12:6). 물론, 여기서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기도함으로써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시 145:18).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해 주신다(신 4:7). 야고보가 의도하는 것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것이 전적으로 그들의 잘하는 데(하나님을 가까이함) 달렸다는 의미가 아니다”(박윤선). 또한, 사람이 하나님을 가까이 했기 때문에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를 가까이 해 주신다는 뜻도 아니다. 실상,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 우리(불신자 포함)는 곧잘 하나님을 떠나 산다.

헨리(M. Henry)는 “하나님과의 소통과 대화의 삶에서 멀고 소외된 영은 하나님과 친숙해져야 한다. 예배와 제도와 하나님께서 요구하는 모든 의무에 있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라고 하였다.

야고보는 하나님을 떠나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거침없이 죄인들이라고 일컫는다. 그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고 한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손을 깨끗이 하라는 원래 의례적인 깨끗함 이상의 뜻을 보여 주지는 않았다. 나중에 도덕적 성결을 의미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즉, “모든 죄스런 행동 내지는 생활에서 떠나 깨끗해지라는 것이다”(J. Wesley, B. S. Easton, 米田豊).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카르디아스, καρδίας: 1:14의 주석을 보라.)을 성결케 하라는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는 마음(B. S. Easton, 박윤선), 즉 영적 간음(J. Wesley)으로부터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순결을 지키라는 것이다(벧전 1:22, 요일 3:3).

한 마디로 말해, 성령을 좇아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행실을 깨끗하게 하라는 것이다.

둘째,【9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라고 한다.

이 구절은 절실한 회개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상근 님은 “슬픔은 마음에서, 애통은 표정에서, 그리고 울음은 드디어 터뜨리는 비애의 과정이다.”라고 하나, 반드시 그렇게 구분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슬픔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비탄 곧 불신앙과 죄악들에 대한 슬픔은 생의 종착점이 아니라, 생의 출발점이 되어야만 한다.

야고보는 구체적으로 이전의 불신앙적 웃음과 육적 즐거움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무가치하고 죄스런 것이었나를 깨닫고, 그것을 부끄러워하며 애통하고 근심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혹은 그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기쁨과 평안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바클레이(W. Barclay)도 “자기 충족적이고 쾌락을 애호하며 자기 만족적이고 무분별한 독자들에게 자신들의 죄에 직면해 보고,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비통하게 느끼며 두려움을 품어 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은혜에 도달할 수 있으며 지상의 즐거움보다 더욱 큰 기쁨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교훈은 예수님의 교훈을 반영하는 것이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현재의 죄악 생활을 애통하며 회개하는 자는 복을 받지만, 오히려 그 죄악 생활을 웃고 즐기는 자는 그 날에 영원히 애통하게 될 것이다(마 25:30).

끝으로,【10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라고 한다.

이 구절은 4:6 후반의 의미와 같은 것이다. 米田豊은 “주님의 임재를 생각하여 겸비하는 자는 더욱 은혜 입고 그 뜻을 따르게 된다.”라고 하였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의 윗사람이나 감독관 앞에서는 말과 행동을 삼간다. 그들은 윗사람이나 감독관들이 싫어하는 오만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주의 임재를 의식한다면, 남이 보거나 안 보거나 상관없이 늘 겸손해질 수 있을 것이다. 대능의 주님이시며, 구속의 사랑을 베푸신 주님 앞에서 오만해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주님을 인식하는 동시에 자신의 부족을 인식하여 낮아지는 사람을 주님께서 높여 주신다. 이러한 사상은 성경 전반에 흐르고 있다(욥 22:29, 잠 29:23, 사 57:15, 마 23:12, 눅 14:11).

이스라엘의 첫 왕이라는 영광으로부터 하나님의 후회 거리가 된 사울 왕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사무엘을 통해 전달됐는데, 그 내용은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삼상 15:17)라는 것이었다. 바울 역시, 하나님과 동등 됨을 포기하고 죽기까지 낮아지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다(빌 2:6-8).

주님 앞에서 낮추는 자는 하나님에 의해 죄악과 고통의 수렁에서 건져지고, 또한 죽음으로부터 영원한 나라로 들림 받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포티트(G. Poteat)는 “인간 정신의 단 하나의 실제적 고귀함과 인간 해방은 하나님께 대한 겸손을 통해 온다.”라고 설명하였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아주 좋은 비유를 들고 있다. “나무가 크게 성장하기 위해 그 뿌리를 깊이 내려야만 하듯이, 자신의 정신을 겸손 속에 뿌리박지 않은 사람은 높은 곳을 찾다가 몰락하게 될 것이다.

4:4-10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야고보는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그 뜻을 따라 충실해야 할 백성이 세상과 벗이 되는 것, 즉 세상 원리를 따라 세상 것들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영적인 간음이요,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 가 하나님을 배반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를 시기할 정도로 사모하실 뿐만 아니라, 그 위에 더욱 큰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교만한 자가 아니라 겸손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부족을 바로 알고, 필요한 것들을 받아들일 마음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복종하여 능력을 얻은 후, 마귀를 대적하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길은 죄악에 물든 마음과 행실에서 떠나는 것이고, 옛 생활의 웃음과 즐거움을 애통과 근심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있을 때, 구원의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된다. 다음으로, 항상 주님의 임재를 의식하면서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죄악과 고통, 죽음과 멸망의 늪에서 건져 올리실 것이다.







18형제를 비방하지 마라<4:11-12>


인간이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다른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전자의 관계가 바로 성립될 때에 비로소 후자의 관계가 제대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후자의 관계란 전자의 관계를 입증해 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야고보는 앞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도리를 논했고, 여기서는 사람에 대한 도리를 논하는 것이다. 특히, 그는 인간이 가장 잘 범하는 말의 죄에 대해,【11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라고 경고하고 있다.

비방하지는 카타라레이테(καταλαλείτε)로서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거나 해치는 어떤 것을 말한다”(M. Henry), “대항하여 말한다”(G. R. Berry)를 의미한다. 특히, 바클레이(W. Barclay)는 “현재 그 곳에 없기 때문에 변명할 수 없는 사람을 비방하고, 모욕하며, 중상하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하였다.

판단하는은 크리논(κρίνων)으로서 “단지 평하는 이상에서 결정적으로 남의 가치를 규정짓는 것이다”(이상근). 여기서 “야고보는 거칠고 트집만 잡는 비판을 염두에 둔 것이다”(E. C. S. Gibson).

야고보의 취지는 형제들, 그것도 그 곳에 없기 때문에 자신을 변호할 기회가 없는 사람을 대항하여 상처를 입히거나 중상하거나, 불명예스럽게 단정해 버리는 말들을 금하라는 것이다.

이 경고는 예수님의 말씀인 마태복음 5:22과 7:1-5을 생각나게 한다. 또한, 바울도 로마서 14장에서 같은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바울도 야고보처럼 형제나 이웃(12절 후반)을 비판하지 말라고 하는데, 그 근본 이유는 약간 다르다.

이 점에 대해 어드만(C. R. Erdman)이 잘 파악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보다 훨씬 나은 사람들의 허물을 적발하려는 잘못을 지적한 것이며, 바울은 같은 동료로서 다같이 주님의 종으로 일하면서 외람 되게 주인 대신에 동료가 동료를 심판하려는 잘못을 지적하였다. 이에 비해 야고보는 남을 평론한다는 것 자체가 불법이며 율법을 무시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예수님과 바울 그리고 야고보가 판단하지 말라고 한 말씀은 어려운 문제를 야기시킨다. 즉, 남에 대한 판단이면 어떤 것이든 하지 말라는 뜻인가? 아니면, 해야 할 판단과 해서는 안 될 판단이 있다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포티트(G. Poteat)가 잘 설명하고 있다.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않고 인생을 살 수 있는가? 다른 사람과 관계할 때, 그들의 성격이나 능력들을 비평적으로 평할 수 없는 것인가? 그와 같이 필요한 식별이 비난받아야 하는가? 더욱이, 저자는 자신의 독자들에게 금하고 있는 비난을 하고 있지 않는가? 예를 들면, 불충실한 피조물들, 죄인들, 이중 마음을 가진 사람들 등이 있다. 예수님이나 바울처럼 야고보도 인간 관계에 있어서 필요한 도덕적 평가를 금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바울도 같은 의미의 말들을 하였다.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고전 6:2).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고전 6:5).

남을 판단해야 할 경우에, 우리는 자기 자신의 가치 기준을 내세우는 잘못을 피해야 한다. 칼뱅(J. Calvin)이 잘 파악한 대로, “모든 인간은 다른 사람이 그 자신의 방향에 따라 살기를 원하는, 태어날 때부터의 병폐가 있다.” 이러한 자세를 버리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법을 따라 판단해야 한다. 이러한 판단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사랑이 동기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과 바울 그리고 야고보가 금한 판단은, 한 마디로 말해, 가장된 우월감에서 또는 우월감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남을 정죄하고 파괴시키는 악의에 가득 찬 비방과 판단이다.

야고보는 구체적으로 악의에서 나오는 비방이나 판단을 하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로, 그는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내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남에 대한 비방이나 판단이 어떻게 율법에 대한 비방이며, 판단이 되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 먼저 율법을 바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의 율법이란 “판단을 금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황금률(마 7:1-5)”이 아니라, 전후 문맥상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1:25)이며 최고한 법(2:8)인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을 의미하는 것이다.27)

그러므로 남을 비방하는 것은 곧 율법을 비방하는 것이며, 남을 판단하는 것은 율법을 무가치한 것으로 판단해 버리는 것이다. 이들은 마땅히 율법을 지켜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어김으로써 자신들을 율법 위에 두는 것이다. 이들은 제멋대로 율법을 지키거나 거역하며, 때로는 생략하거나 의역하여 실제적으로 율법을 재판하는 자가 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야고보는 비방이나 판단을 금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그는【12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라고 하였다.

참된 의미에서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한 분이시므로, 그분 외에 어느 누구도 남을 비방하거나 판단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이상근 님은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부여하셨고,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랑의 계명을 주셨다(요 13:34).”라고 하였다. 더욱 자세하게 말하면, 예수님이 주신 새 계명이란 하나님께서 입법하신 십계명에 대한 새로운 해석(문자적이며 자의적 해석을 일삼던 유대교 전통에 비하여)인데, 그 요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마 22:34-40). 이 법은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절대성에 근거한 것이므로, 없애 버릴 사람도 없고, 또한 논박할 사람도 없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법이란 이 법에 종속되어야만 인간을 위한 법으로서의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참된 의미에서, 유일한 입법자이신 하나께서는 또한 유일한 재판자이시다. 하나님의 재판권은 자신의 절대성과 창조 능력에 있다. 인간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인간을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는 능력과 권한을 있으시다(신 32:39, 삼상 2:6, 왕하 5:7, 마 10:28, 시 68:20).

黑崎幸吉은 하나님의 심판은 그 율법에 따라 행해진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은 사랑의 법을 따라 행해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 한 분만이 참 입법자시며 재판자이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법을 어겨 남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대권을 빼앗는 것이며,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 되는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참람된 행위 곧 비방이나 판단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야고보는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라고 힐책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불완전한 인간인 네 판단이 정말 하나님의 판단처럼 정확할 수 있느냐고 하는 것이다.

헨리(M. Henry)는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말라고 하는 또 다른 이유를 내세우고 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형제이므로 서로 모독하거나 헐뜯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다지 설득력 있는 해석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야고보의 의도는 같은 믿음의 형제끼리는 물론, 인간 상호간의 비방과 판단을 금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다.

4:11-12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야고보는 사랑의 동기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가장된 우월감 내지는 자기 정당화의 동기로 남을 파멸케 하는 비방자나 판단자가 되지 말라고 한다. 그 이유는 곧 사랑의 율법을 비방하며 판단하는 것으로 율법을 지켜야 할 인간이 외람 되게 율법을 심판하는 죄악을 범하는 것이며, 또한 유일하신 입법자이시며 재판자이신 하나님의 대권을 빼앗는 모독 행위이기 때문이다.




19주님의 뜻을 따르라<4:13-17>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생명을 단 한시도 마음대로 지속하거나 없앨 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물론 내일의 인생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감에 넘쳐 꿈을 꾸고 계획을 세운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불신자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믿는 자들 중에도 많이 있다.

야고보는 그러한 그리스도인들에게【13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라고 경계하고 있다.

들으라라고 번역된 아게 눈(ἄγε νύν)은 본절과 5:1에만 있는 말로서 특히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하여 부르는 말이다(黑崎幸吉).

이 말의 대상에 대해 이상근 님은 불신 유대인(Mayor), 또는 유대 신자를 통해 불신 유대인에게 준 것(Lange)이란 견해를 비판하면서, 행함이 없는 유대 신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앞(1:1의 주석)에서 밝힌 내용을 미루어 볼 때, 유대인 신자라고 못박기 어렵다.

바클레이(W. Barclay)는 그 당시 세계의 대 무역상이었던 유대인들이라고 하였고, 칼뱅(J. Calvin)과 웨슬리(J. Wesley)는 하나님께 대해 무지한 불신자들이라고 하였으며, 어드만(C. R. Erdman)과 윌리암즈(R. R. Williams)는 이 부분을 상상적인 것이라 주장하면서 그 대상을 사업가들과 유대 장사꾼들이라고 하였고, 黑崎幸吉은 세속적 신자(유대인) 또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확실한 대상은 너희 중에라는 말에 의해 밝혀진다. 이 말은 이 부분이 상상이 아니라는 것과 어떤 부류의 불신자들이 아니라는 두 가지 사실을 명백하게 해 주고, 또한 그리스도인들을 지시하는 것임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 내용으로 보아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부한 자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인생을 좌우하려고 하는 “유명무실한 그리스도인들”(A. E. Barnett)이 그 대상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야고보의 교훈의 취지는 불신자들에게까지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에 대한 예시는 상업의 세계로부터 취해진 것이다(R. R. Williams). 이 점에 대해 어드만(C. R. Erdman)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계산되어 있다. 자신만만하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될 틈이 없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 다 맡아 해 나간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완전히 우리 손 안에 있다. 그 도시로 가는 여행 계획도 안전하게 다 되어 있다. ‘일 년’은 그들의 계획 안에 쥐어 있다. 병도 재난도 없을 것이다. 장사는 물샐틈없이 계획되었으니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이런 정신은 오늘에 있어서도 신자로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 너무나 많다.”

이것은 하나님보다도 자기 자신의 지혜나 힘을 더욱 신뢰하는 교만이며 불신앙적 태도다.

이와 같이 “지나친 자기 신뢰는 자신으로 하여금 자신의 계획에서 하나님을 배제하게 만든다”(A. E. Barnett). 바로 이 점을 야고보가 책망하는 것이다.

야고보의 의도는 계획하는 것이 나쁘다거나, 생업에 종사하는 것이 잘못이라거나, 혹은 이익을 보려고 하는 것이 죄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더욱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빈틈없이 수행함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 요는 인간 개개인에 대해 경륜과 목적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자신들의 인생 계획에서 제외해 버리는 우둔을 책하는 것이다.

야고보는 그러한 교인들에게【14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라고 일깨우고 있다.

사람이 아무리 당당하게 꿈을 꾸고, 계획을 세우고, 성취의 확신을 장담한다 해도, 실제로 그들은 내일 일이 어떻게 될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의 확신이란 거짓된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며, 결국 자기 기만의 생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실제로 우리는 매일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께서 도도하게 어떤 것을 할 수 있다고 확약하는 교만한 인간들을 어떻게 좌절시키는가를 알고 있다”(J. Calvin).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들이 계획하고 확신하는 바와 같이, 정말로 도시에 도착할 수 있을지 없을지, 또 도착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곳에서 일 년을 유할 수 있을지 없을지, 그리고 유할 수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장사하여 이익을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매우 불확실한 것으로 아무도 알 수가 없다. 그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잠언 기자가 잘 설명하고 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16:1).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16:9). 즉, 일의 성사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이다.

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의 생명조차도 하나님의 손가락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자신의 생명이 내일도 지속될지 알수 없으며, 또 자신의 생명에 대해 인간은 아무런 힘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실로 인간의 생명이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이 덧없는 것이다. 생명의 지속에 관한 불확실성은 결정적으로 모든 미래사에 대한 불확실성을 유발시킨다. 이 점에 대해 잠언 기자가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27:1)라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도 같은 의미의 비유를 들고 있다(눅 12:16-21).

생명의 덧없음과 미래사의 불확실성은 인간들로 하여금 세 종류의 인생관을 갖게 해 준다.

이 점에 대해 포티트(G. Poteat)가 잘 설명하고 있다. “인생은 덧없는 것이어서 생의 놀랄 만한 일을 경험하는 시간은 너무 짧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모든 것을 맛보는 데에 방심해서는 안 된다. 고대 중국 철학자인 양주(Yang Chu)는 ‘일백 년이란 긴 생애의 한계다. 천 년 동안의 인생을 얻은 자 없다. … 무의식적인 유아기와 노년기가 그 반을 차지한다. 밤에 잠자는 동안 무의식적으로 보내는 시간과 낮 동안에 깨어 있지만 낭비되는 시간 또한 그 나머지의 절반에 이른다. 또, 고통과 병이 반가량 채워질 것이므로 실제로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는 10여 년밖에 없다. … 그러므로 우리는 서둘러 인생을 즐기고 죽음에는 관심을 갖지 말아야 한다. … 귀로 하여금 좋아하는 것을 듣게 하라. 눈으로 하여금 좋아하는 것을 보게 하라. 코로 하여금 좋아하는 것을 냄새맡게 하라. 입으로 하여금 좋아하는 것을 말하게 하라. 육으로 하여금 갖고 싶어하는 연락을 즐기게 하고, 마음으로 하여금 좋아하는 것을 행하게 하라.’라고 말한다. 이것은 에피큐리안이나 물질주의자들의 인생에 대한 평가다.”

두 번째의 인생관은 스토익 철학이나 불교의 교훈이다. 인생은 덧없으므로 인간들의 여러 행위에 있어서 자기 탐닉이나 자기 몰두란 끝을 잘린 민족만을 줄 수 있다. 생애 대한 욕망은 운명적으로 절망으로 결정되어 있다. 즉, 인간이란 병을 통해서, 그리고 나이 늙어서 죽음에 이르게 되므로 환멸이나 권태나 절망을 피하기 위해 인생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 번째의 인생관은 크리스트교의 교훈이다. 생의 덧없음을 허용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고, 인간의 생애란 영원과 연결되는 것이다. … 만일 사람이 영원의 빛에서 살고, 그가 그것을 필요로 한다면 그는 환멸과 좌절로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 일시적인 것은 영원과 관련하여 그의 의미를 발견한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의 모든 생의 경험은 이 관계성 때문에 가치를 갖는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인의 생에 대한 관념은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면을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데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인 인생관) 삶이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또한 그분이 곧 그러한 삶에 이르는 길이 되기도 하신다.

인간이란 생명의 덧없음과 인생사의 불확실성을 깊이 인식하면 할수록 더욱 겸허하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인간 실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하나님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계획을 세우고 큰소리치는 교만한 인간들에게 올바른 인생 태도를 제시해 주고 있다.【15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 구절은 도리어(안티, ἀντὶ)에 강조점이 있다. “도리어는 13절의 ‘너희 중에 말하기를’을 받는 것으로 보고, 14절은 삽입절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J. H. Ropes).

주의 뜻이면에 대해 이스톤(B. S. Easton)은 “이 표현과 비슷한 유대적 교훈은 거의 없다. 오히려 ‘신들이 원한다면’이란 표현 형식은 헬라 세계에서는 아주 평범할 정도로 관습적인 표헌이다.”라고 하는데, 실상 유대인들에게도 그와 비슷하게 무슨 일을 하려 할 때에 ‘그 이름(하나님)이 원하신다면’이란 표현을 사용하였다.

또한, “이 표현은 회회교도도 사용하며 오히려 회회교도에게서 기원하였다는 설도 있다(Ginsberg). 금일 구미의 신자들 사회에서도 무슨 미래의 계획을 말할 때면 ‘주의 뜻이면, if Lord Will’을 습관적으로 말한다”(이상근).

바울도 “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고전 4:19), 또 “주께서 만일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유하기를 바람이라“(고전16:7)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야고보가 주의 뜻이면이라 했을 때의 란 하나님이시지 그리스도가 아니다(B. S. Easton). 주의 뜻이란 말은 하나님의 계시된 의지를 가리킨다는 것보다 미래에 대한 그의 섭리적 지배를 의미한다(박윤선). 그것은 구체적으로 인간의 생명의 존속 문제와 미래의 일(계획)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이다.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란, 한 마디로 말해, 우리 생명 자체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헨리(M. Henry)는 “우리는 우리의 때가 우리 자신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처리에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한에서만, 그리고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환경에서만 살아간다. 그러므로 생명 자체도 하나님께 복종되어야 한다.”라고 잘 설명하고 있다.

생명의 존속 문제에 관한 절대적 권한은 하나님께만 있다. 하나님만이 생명의 창조주시며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이 생명의 존속이란 모든 인간사의 성패에 앞서는 절대적인 기본 조건이다.

또한, 우리가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수 있는 것도 주의 뜻에 의해서이다. 칼뱅(J. Calvin)은 “자신에 대해 겸손한 견해를 가지고 믿는 무리가 그들의 발걸음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 인도되고 있음을 인식할 때, 무조건적으로 그들은 이것이나 저것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공포에 떨거나, 또는 그것에 마비되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와 모든 계획을 하나님의 수중에 맡기는 것이다”(W. Barclay).

다시 말하면, “신앙자란 무조건 현세를 도피하는 것도, 숙명적인 소극성에 사는 것도 아니다. 최대한 노력을 쏟으나 그것이 주님의 뜻에 지배를 받는 데 있는 것이다”(이상근).

우리가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계획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대한 복종적인 의존이 돼야 한다”(M. Henry)기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인 의미에서 우리의 모든 계획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우리의 일의 성패란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느냐, 일치하지 않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의 생명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주어진 것이므로, 올바른 삶의 태도란 인생 전체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른 절대적 복종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분의 오심은 성부의 보내심에 대한 복종인 동시에 그 자신의 자발적 행위이며, 그분의 삶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고, 그분의 죽음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성취하는 것이다. 그로 인해 성부께서는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신 것이다.

올바른 삶의 자세를 제시한 야고보는, 실제로 그와 상반되는 삶을 살면서 오히려 자랑을 일삼는 자들에게 날카롭게 질책하고 있다.【16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13절에 언급된 바와 같이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인생 계획 내지는 생활 자세를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랑을 일삼는데 그것은 헛된 자랑이며 악한 것이다.

허탄한 자랑이란 알라조네이아이스(ἀλαζονείαις)인데, “그것은 어원적으로 떠돌아다니는 돌팔이 의사라는 특징이 있다. 그는 병이 낫지 않았는데도 고쳤다고 하고, 자기가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자랑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할 수도 없는 것을 자랑하는 사람의 특징이 있다”(W. Barclay).

黑崎幸吉은 “요한일서 2:16에도 나오는데, 그 뜻은 없는 것을 있는 채 뽐내고 변화 무상한 지상인의 일들을 확실한 일처럼 자랑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생명과 인생사의 주관자인 하나님을 떠나거나 무시하면서 자신의 건강과 계획, 지략과 능력 등을 믿고 자랑하는 자랑이란 헛된 교만일 뿐이다. 인간이 마땅히 믿고 의지해야 할 하나님을 저버리고, 안개와 같이 아무것도 아닌 자기를 내세우는 것은 곧 자기를 우상화하는 죄이므로 악한 것이다.

결국 야고보는【17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라고 결론짓는다.

黑崎幸吉은 여기서의 이란 자기를 낮추고,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뜻을 따라 이것 저것을 행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크리스트교적인 의미의 선이란 믿음과 직결되어 있다. 바울은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라고 규정짓고 있다.

스코트(Scott)는 야고보와 바울의 관계에 대해, “여기서 야고보는 바울을 보총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의 말한 바는 어떤 일이 옳은지 의심하면서 행하는 것은 죄라고 하였다. 야고보는 어떤 일이 옳은 줄을 알면서도 하지 않고 두는 것도 죄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28)라고 설명하였다.

야고보의 의도는 행해야 할 선을 행치 않는 것이 죄인 것과 마찬가지로, 행해서는 안 될 악을 행하는 것 또한 죄라는 것이다(M. Henry, 黑崎幸吉).

(하마르티아, ἁμαρτία)는 1:15의 주석을 보라.

칼뱅(J. Calvin)은 “선을 알면서 행치 않는 죄는 선을 알지 못해서 행치 않는 죄보다 더욱 큰 죄이며, 따라서 더 큰 죄책이 따른다.”라고 하였다.

4:13-17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야고보는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꿈과 계획을 세우며, 그 성취를 장담하는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두 가지 이유로 경고하고 있다. 첫째, 인간의 미래사는 하나님의 주관 하에 있으므로 인간은 내일 일을 알 수 없으며, 자랑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둘째, 더 근본적인 것으로 모든 계획을 수행해 나갈 인간의 생명 조차도 덧없는 것이며, 그나마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생명과 인생사의 불확실성 때문에 불신앙적인 생의 태도란 헛된 교만이요 자기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생명의 주인이시며, 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만 하고, 그분의 뜻을 따라 계획하고 행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신의 능력과 수단 등을 자랑하는 것은 헛된 자랑이며 악한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선인 줄 알면서도 행치 않으면 더욱 큰 죄책 아래 떨어지는 것이다.




20불의한 부자에 대한 경고<5:1-6>



야고보는 부자들에게 임박한 고난을 선포하고, 그 이유로 그들의 네 가지 죄악들을 열거하고 있다. 이 부분은 특히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의 논조를 반영하고 있다(사 28:14, 암 4:1-3).

먼저, 야고보는 부자들이 당할 고난을 선포한다.【1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바네트(A. E. Barnett)는 “욕망과 마찬가지로 부는 거짓 되고 헛된 목표로서 지금 저주받는다.”라고 하지만, 재물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며(J. Wesley), 또한 재산이 많은 것이 죄는 아니다(C. R. Erdman).

부자들이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재산이 많거나, “부한 특권 계급”(이상근)이기 때문이 아니라, “불의한 부자들”(J. Calvin, 박윤선)이기 때문이다.

헨리(M. Henry)는 비난받는 부자들을 가리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세상적이며 불신앙적인 유대인들이라고 한다. 그는 그 이유로 6절의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라는 말씀을 내세운다. 즉, 그러한 일을 그리스도인이 행할 힘이 없고, 있다면 부유한 유대인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설득력이 없다. 실제로 초대 교인들 중에는 음행이나(고전 1:1, 엡 5:3), 살인(4:2)을 저지른 이들이 있었다. 따라서, 유대인 부자들이라고 규정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리스도인이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불의한 부자들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참조 : 2:6).

불의한 부자들에게 임할 고생고생은 탈라이포리아이스(τ-αλιπωρίαις)로서 “주님의 날이 임할 때에 받을 심판, 즉 미래적인 의미의 큰 불행을 의미하는 것”(W. Barclay, 박윤선)으로 국한시키기보다는, 닥칠 모든 고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불의한 부자들은 축적한 재물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징벌, 특히 마지막 심판으로 인한 고생을 생각하고 울고 통곡해야 하는 것이다.

통곡하라는 올로뤼존테스(ὀλολύζοντες)로서 “단순히 통곡한다는 뜻보다 더 강한바 ‘울부짖는다’고 하는 뜻을 가진 의성어이다”(W. Barclay). 구약 성경에는 가끔 애곡한다로 번역되었는데, 특히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사람들의 광란적인 공포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사 13:6, 14:31, 15:2-3, 16:7, 23:1, 14, 65:14, 암 8:3 등).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화 있을찐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눅 6:25)라고 하셨다.

여기의 울고 통곡하라는 “회개에의 권면”(박윤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고통과 공포의 표현이다”(B. S. Easton, M. Henry, 黑崎幸吉). 이 점에 대해 칼뱅은 “회개 때는 울지만 위로가 오기 때문에 통곡까지는 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야고보는 부자들이 울고 통곡할 수밖에 없는 고생, 즉 그들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게 되는 이유로 그들의 네 가지 죄악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그는 먼저,【2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3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라고 하였다.

야고보가 열거하는 네 가지 죄악 중 처음 것은 탐욕으로서의 부의 축적이다. 실제로 옛날 동방의 부자들은 주요한 재산으로 곡식과 의복과 금은을 많이 쌓아 두었다. 또한, 그들의 재물금은은 썩고 좀먹고 녹슬어 무가치하게 되기도 하였다.

여기에 사용된 세 동사(쎄쌔펜, σέσηπεν; 게고넨, γέγονεν; 카티오타이, κατίωται)는 예언적 완료형으로, 그 의미는 말세가 이미 시작되었으며, 따라서 지상적 부란 이미 가치를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모든 류의 부가 무가치하게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부의 덧없음이나,29) “부자가 당할 고생”(E. C. S. Gibson), 또는 “부가 그 소유자에게 끼칠 피해나 슬픔”(M. Henry, 黑崎幸吉)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부자들의 탐욕(축적)의 죄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선한 사업을 위해 활용하도록 맡겨 주신 부(삼상 2:7, 대하 1:12, 전 5:19, 잠 22:4)를 이기적인 목적으로 축적하여 못쓰게 한 죄이다.

칼뱅(J. Calvin)은 “부의 축적의 결과가 아무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하고 없어진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사용하도록 창조한 것을 파멸시킨 것이므로 그들은 인류의 적이기도 하다.”라고 하였다.

“그들의 죄의 가증스러움은 소멸되기 때문에 의지할 수 없는 물질”(박윤선)을 썩히기까지 하면서도, 이웃의 굶주림을 외면하는 것이다.

금은이 녹슬었고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에 대해, 바클레이(W. Barclay)는 “이 비유를 통해 최고로 귀중하고, 외견상으로는 파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물건이라 할지라도 부패하고 붕괴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위에서 본 것처럼 “물질이 본래의 용도대로 쓰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黑崎幸吉). 즉, 녹이란 부자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이웃을 위해 재물을 사용하는 대신에, 자기 자신만을 위해 썩도록 축적하는 죄를 의미하는 것이다.

바로 그 죄가 그들이 지옥 불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을 증거가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부의 축적이란 지옥불을 끌어 모으는 격이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도서 기자는 “내가 해 아래서 큰 폐단 되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 되도록 지키는 것이라”(5:13)고 한 것이다.

지옥 불의 고통을 당하게 만드는 부의 축적이 바로 말세에 행해졌다는 것이 야고보의 더 큰 탄식이었다.

말세는 에스카타이스 헤메라이스(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로서 문자적 의미는 ‘마지막 날들’이다. 대체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부터 재림하시는 날까지의 기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말세에 가장 시급한 것은 구원받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을 서둘러 찾아야 할 시기에 오히려 재물을 축적하는 죄악을 범하고 있다는 것이 야고보의 한탄이다.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윌리암즈(R. R. Williams)는 “Vulgate(Jerome의 라틴어 성서)이 쓰여진 4세기 이전의 초대 교인들은, ‘진노’란 말을 놓아서 ‘너희가 말세에 진노를 쌓았다’라는 의미로 이해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칼뱅(J. Calvin)도 “마지막 날까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쌓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부의 축적이 지옥 불의 형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면, 결국 말세에 재물을 쌓았다는 것과 진노를 쌓았다는 것은 같은 의미의 표현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부자들의 두 번째 죄에 대해, 야고보는【4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앞의 추수한은 아메산톤(ἀμησάντων)으로서 “주로 곡물을 추수하는 데 사용되었고(레 25:11, 신 24:19, 사 17:5, 37:30), 뒤의 추수한은 테리산톤(θερισάντων)으로서 모든 종류의 추수에 사용되었다”(E. C. S. Gibson).

“당시의 팔레스틴의 노동자들은 항상 기아선상에서 허덕이고 있었다. 그들이 받는 임금은 적어서 하루라도 지불되지 않으면 그들의 가족은 굶지 않으면 안 되었다”(W. Barclay). 이러한 상황은 다른 지역도 거의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들은 “자신들을 부하게 한 원인인 노동자(그 중 당시에 있어서 가장 일반적이요, 또한 착취당하기 쉬운 농군을 예로 들고 있다)들을 착취하였다”(黑崎幸吉).

“이러한 일은 고의적이든 부지중이든, 또한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흔한 일이었다”(이상근). 가난한 품꾼들의 품삯을 착취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사악한 기만이다. 칼뱅(J. Calvin)은 “인정 있고 정당한 사람이 자신의 육축의 생명을 돌아본다면(잠 12:10),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고용한바 땀흘려 일한 노동자에 대해 동정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얼마나 비인간적인 야만인가!”라고 비난하였다.

한 마디로 말해, 부자들의 부의 축적이 죄악이라고 날카롭게 지적한 야고보는, 그들이 부를 축적하는 수단이 또한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잔혹한가를 지적하고 있다. 주겠다고 약속한 임금을 주지 않는 것은 또한 사기 행위이다(참조: 잠 21:6).

“이것은 어느 시대에나 있는 죄악이다. 노동자에게 정당한 임금을 주지 않고, 노동자에게 갈 이익을 자본주가 독점하며, 도리어 그를 학대하는 것이 소위 풀어야 할 사회의 중심 문제이다”(W. Barclay).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가진 자들의 사회에 대한 책임 의식과 청지기로서의 신앙적 책임 의식의 구현이다(신 24:14-15, 레 9:13, 잠 3:28, 렘 22:13, 말 3:5, 딤전 6:17-19). 보다 더 차원 높은 해결책은 하나님 사랑의 일환으로서의 이웃 사랑을 실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부자들은 자신들의 부가 자신들을 위해 일해 주는 사람들에 의해 얻은 것임을 인식하고, 고마운 마음으로 부의 공정한 분배를 실현해야 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힘이 없어 고용주에게 저항하지 못하고, 착취와 학대를 받는 피고용인들에게 절대적인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힘과 위로가 되신다는 것이 야고보의 주장이다. 그는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소리가 만군의 귀에 들렸느니라라고 하였다.

이 선언은 불의한 부자들에게는 가장 무서운 선언이다. 그들은 현세에서 제멋대로 임금을 착취하고, 더욱이 항거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농군이나 품꾼들을 경멸하며 기고만장하지만, 그러나 그들이 주지 아니한 삯이 아우성치며(참조: 창 4:10, 18:20, 19:13), 억울함을 당한 품꾼들의 울부짖음이 하나님의 귀에 상달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현실 세계에서 빚어지는 모든 불의와 부조리를 불꽃같은 눈(계 1:14)으로 감찰하시고, 특히 눌린 자, 약한 자, 가난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

야고보는 약한 자들의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일컬어 만군의 주(κυρίου Σαβαὼθ)라 한다. 이 표현은 구약 성경적이며, 또한 유대적인 하나님 칭호이다. 이것은 이사야 5:9로부터 인용되었고, 신약 성경에서는 이곳 외에 로마서 9:29(사 5:9의 인용)에서만 사용되었다. 원래는 이스라엘 군대의 총사령관으로서의 하나님을 표현하였고, 여기서부터 하늘의 별들의 수, 천군 천사의 수를 의미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야고보의 의도는 현세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억누르고 착취하는 등 횡포를 일삼는 부자들이 아무리 권세가 막강하다 할지라도, 하늘과 땅의 지배권을 가지신 하나님의 대능 앞에는 무기력한 것이며, 결국 그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반면에, 만군의 주께서는 현세에서 억울하게 고통 당하는 자들의 권익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과 배려를 보이신다는 것이다.

부자들의 세 번째 죄에 대해, 야고보는【5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라고 비난한다.

사치하고연락하여는 에트뤼파세트(ἐτρυφήσατε)와 에스파타레사테(ἐσπαταλήσατε)이다. 전자(τρυφάω)는 파괴한다는 뜻의 어근에서 온 말이다. 이것은 인간의 도덕적 소질을 천천히 약화시키고 파괴하는 호사를 묘사한 말이며, 영육의 힘을 파괴시키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사치를 묘사한 말이다(W. Barclay).

후자(σπαταλάω)는 매우 나쁜 말로서 정욕적인 쾌락을 일삼은 음란하고 방탕한 생활을 의미한다(W. Barclay).

불의하게 재물을 긁어모은 부자들은 재물을 악용하는 또 다른 죄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이방인이요 순례자로서 잠시 동안 살 수밖에 없는 곳, 영원한 삶을 위해 주님을 영접하여 살아야 하는 땅에서”(M. Henry) 오히려 지나치게 호사하며 음란과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다(참조: 눅 16:19-). 그러나, “부자가 다 이 죄에 빠지고 있다.”(黑崎幸吉)고는 할 수 없다.

야고보는 불의한 부자들의 사치와 음란한 생활을 가리켜,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라고 하였다. 이 구절은 매우 난해하다. 도살의 날에에 대해서는 (1) 심판의 날이라는 설(J. H. Ropes), (2) 구약의 법대로 희생에 바칠 동물이 도살될 날이라는 설(J. Calvin, A. Clarke, 黑崎幸吉), (3) 연희 때에 생물이 도살될 날이라는 설(J. A. Bengel) 등이 있다.

본문의 내용-사치와 연락의 생활-으로 미루어 볼 때, (1)과 (2)설은 적합하지 않고 (3)설이 적합하다.

따라서, 야고보의 의도는 죽을 날인지도 모르고 살지도록 먹어대는 연회 시의 짐승처럼, 불의한 부자들도 그들에게 닥쳐올 무서운 형벌을 모르고 마음껏 사치하고 음란과 방탕을 일삼는다는 것이다.

부자들의 네 번째 죄에 대해, 야고보는【6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밝히고 있다.

재물을 썩도록 축적하고, 품삯을 속여 빼앗고, 재물을 악용하는 죄를 범한 부자들의 죄는 여기에 와서 그 극에 이른다.

옳은 자(톤 디카이온, τὸν δίκαιον)에 대해, 일부 교부들은 그는 너희를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를 근거로 그리스도로 이해하였고(참조: 사 53:7, 마 26:63), 바클레이(W. Barclay)는 베드로가 이사야 53:7을 예수님을 묘사하는 데 인용하므로, 예수께 대한 언급인 것 같다고 하였다.

벤겔(J. A. Bengel)은 이 말이 저자의 별명이었다는 점을 들어 야고보 자신으로 보고 있다.

옳은 자를 야고보 자신으로 보는 견해는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라는 표현과 모순되므로 옳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옳은 자‘를 일반적인 의미로 취급해야 한다.30)

특히, 깁손(E. C. S. Gibson)은 “첫눈에는 우리 주님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 같다(행 3:14, 7:52, 22:14). 그러나, 이 견해는 우리가 전체의 문장을 통하여 구약 성경의 사상과 표현들을 어떻게 빌려 왔는가를 기억할 때, 또한 우리가 이사야 3:10(70인 역)에서 악한 자가 Δήσωμεν τὸν δίκαιοὅτι δύσχρηστος ἡμίν ἐστί-Wisd. ii: ‘가난한 의인을 억압하자. … 그를  정죄하여 수치스럽게 죽게 만들자.’라고 한 특수한 부분에 놓인 문장-라는 말로 대표된다는 것을 발견할 때 받아들일 수 없다.…단수인 τὸν δίκαιον은 집합적으로 그 부류를 지시하곤 하였다(참조: 암 2:6, 5:12).”라고 올바로 설명하고 있다.

윌리암즈(R. R. Williams)도 만일 예수님이시라면, “그가 너희를 저항하지 않았다는 현재 시제는 이상하다.”라고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이스톤(B. S. Easton)도 그리스도와 일치시키는 것은 모호하다고 반대하면서, 덧붙여 스데반과 일치시키는 것도 독단적이고 인위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칼뱅(J. Calvin)과 로프스(J. H. Ropes)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취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하였다.

야고보의 의도는 불의한 부자들이 “아무런 저항 능력도 없고, 자위의 방편도 없고, 또 적대할 의사조차 없는 자”(박윤선)들을 부의 힘으로 법을 이용하여 정죄하고 죽였다는 것이다.31)

악한 부자들이 의인을 정죄하고 죽이는 가장 큰 이유는, 부당한 생활을 하는 그들에게는 의인이란 꺼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바클레이(W. Barclay)가 적절한 예를 들고 있다. “알키아비데스(Alcibiades)는 소크라테스의 친구였다. 그런데 알키아비데스는 자신의 위대한 재능 때문에 때때로 방탕하며, 무모하며, 퇴폐적인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가끔 소크라테스에게 ‘소크라테스, 나는 당신을 싫어하오, 이유는 당신을 만날 때마다 내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당신이 일깨워 주기 때문이요.’라고 말하곤 하였다.”

5:1-6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야고보는 일반적으로 불의한 부자들에게 하나님의 엄하신 심판으로 인해 울부짖으며 통곡할 날이 임할 것을 선포한다. 그 이유는 부자들이 품삯을 착취하는 등의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썩기까지 축적하였고, 또한 그 재물을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남용했으며, 심지어 저항할 힘은 물론 생각도 없는 가난한 의인들을 정죄하고 죽였기 때문이다.





21주님의 재림 때까지 참아라<5:7-11>


불의한 부자들의 죄악상과 그들에게 고통을 당하는 가난한 의인들에 대해 논해 온 야고보는,【7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아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러므로란 이 부분이 5:1-6과 관련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그 다음의 교훈은 포악한 압제자들에게 고통을 당하는 삯꾼으로서의 고생(C. R. Erdman)이나, 부자들에게 당하는 핍박(J. Calvin)을 길이 참으라는 것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어떤 형태의 고난이나 고통을 당하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길이 참으라는 것이다.

참다는 마크로튀메사테(μακροθυμήσατε)로서 주로 사람에 대해 관용의 태도를 보이는 인내를 의미한다. 이에 비해 휘포모네(ὑ-πομονή: 1:3의 주석을 보라.)는 사건이나 환경에 대한 인내를 의미한다(黑崎幸吉, “Trench”32)). 그러나, 때때로 “이 두 낱말은 같이 사용되기도 하고(골 1:11), 또 동의어로 취급되기도 한다”(Lightfoot).33)

야고보 역시 두 낱말을 구분해서 쓰지 않는다. 이 사실은 사물이나 환경에 대해 참는 농부의 비유에서도  마크로튀미아를 사용하고 있음을 보아 알 수 있다.

야고보는 핍박과 환난을 당하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관용의 태도로 참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인내란 무한정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 강림하시기까지이다.

주의 강림강림(재림)은 파루시아스(παρουσίας)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술할 때에 가장 많이 사용된 낱말이다(마 24:3, 27, 37, 39, 고전 15:23, 살전 2:19, 3:13, 4:15, 5:23, 살후 2:1, 요일 2:28, 벧후 1:16, 3:4).

신약 성경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을 “우리 주 예수의 날”(고후 1:14), “그 날”(롬 13:12, 고후 3:13, 살전 5:4), “그리스도의 날”(빌 1:10, 2:16), “주 예수의 날”(고후 5:5), “주의 날”(살전 5:2),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고전 1:8)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나타내는 말과 그 의미는 다음과 같다.

󰡔�아포칼뤼프시스(ἀποκάλυψις)는 ‘쓴 것을 벗기다’, 또는 ‘벌거벗기다’라는 의미가 있다. 즉, 주님의 재림이란 모든 것을 벌거벗겨 완전히 드러내 보이는 사건이다(1:7, 13, 4:13, 살후 1:7).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술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마 24:3, 27, 37, 39, 고전 15:23, 살전 2:19, 3:13, 4:15, 5:23, 살후 2:1, 요일 2:28, 벧후 1:16, 3:4). 이 말의 통속적인 뜻은 누군가가 거기에 있다거나 도착했다는 것이다. 이 밖에, 전문적인 용어로 군대에 의해 나라가 침략 당하는 것에도 사용되었다. 또, 특별히 왕이나 행정 장관이 나라 안에 있는 어떤 곳을 방문하는 일에도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말이 예수께 대해 사용되었을 때는 그리스도의 재림 곧 파루시아는 하늘로부터 오는 지상에의 침입과 백성의 궁극적인 복종과 예찬을 받기 위한 왕의 내림을 의미한다(W. Barclay).

에피파네이아(ἐπιφάνεια: 살후 2:8, 딤전 6:14, 딤후 4:1, 8, 딛 2:13)는 신이 예배드리는 자에게 현현하는 것에 사용되었고, 또 황제의 즉위식에 대해서도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이 말이 그리스도께 적용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나타나시는 것, 즉 하나님을 기다리는 신자들에게나 하나님을 반역하거나 모독하는 불신자들에게 나타나시는 것을 의미한다(메카더, W. Barclay).

  신약 성경의 재림 사상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시기는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극비에 속한 문제로서(마 24:36, 막 13:12, 행 1:7), 밤에 도둑이 들어오는 것처럼 예기치 않은 때에 임하신다. 그러나, 재림하시는 순간에는 번개가 번쩍 하는 것과 같이 모두가 알게끔 오신다(마 24:27, 37, 39, 살전 5:2, 벧후 3:10).

그리스도의 재림은 초림과는 달리, 위엄과 영광 그리고 대 격변의 사건이며(살전 4:16), 성도들이 함께 강림한다(고전 15:23, 살전 3:13). 또, 재림 사건은 마지막 심판(롬 1:8, 2:2-10, 3:6)과 모든 것의 완성으로 특징지어진다.

마지막 심판은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 뚜렷한 구별이 있다. 전자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고 선포되었으므로, 영원한 형벌의 심판으로부터 면제될 뿐 아니라(롬 5:9-11) 완전한 영광의 생명을 얻는다(고전 15:53). 반면에, 후자는 지금 여기서의 모든 삶이 그 자신에게 진노를 쌓는 것이므로, 마지막 형벌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다(롬 2:5). 주님께서 오시는 날에는 어두운 비밀들이 밝혀지고, 마음의 뜻과 동기까지 드러나게 된다(고전 4:5). 마지막 심판은 불신자들에게 갑작스런 파멸이며 진노요 저주이다(살전 1:10, 5:3, 9, 살후 2:10-12). 이 형벌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다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은 모든 것이 완성되는 때이다. 그 날에 하나님의 모든 대적들은 파멸하게 된다(고전 15:24, 살후 2:8). 이미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 실질적인 힘을 상실한 죽음은 맨 나중에 멸망된다(고전 15:24-28).

그 반면에, 성도들은 신령한 몸(골 3:4, 롬 8:23, 빌 3:21, 고전 15:42-44)으로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감으로써, 죄로 인한 모든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어 영광의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롬 8:18-21). 그리고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되어 하나님께 바쳐지며, 만물을 지배한 그리스도도 아버지께 복종하게 된다(고전 15:24-28).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다음과 같아야 한다.    ⑴ 언제나 깨어 있어야 하며(벧전 4:7), 주님을 영접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마 24:36-51, 벧전 4:7, 살전 3:13, 5:23, 롬 13:11-14). ⑵ 인간적인 생각으로 재림이 아무리 지연되는 것 같더라도 실망하거나 망각해서는 안 되는데(벧후 3:4), 이는 하나님께서는 시간에 대하여 인간과 같은 관념을 갖지 않으시기(벧후 3:8) 때문이다. ⑶ 그 날에 우리는 사랑의 친교 중에 발견되도록 해야 한다(벧전 4:8-9, 고전 16:14, 22). ⑷ 그 날을 위해 항상 그리스도 안에서 생활해야 한다(요일 2:28). 주님의 재림을 대망하는 종말론적 신앙의 올바른 자세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적인 모든 일과 의무를 주님 안에서 더욱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은 신자의 노력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신자와   함께 항상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에 의해서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야고보는 바로 이러한 이유, 즉 그리스도의 재림이 불신자들에게는 영원한 멸망의 날인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완전한 구원의 날이요 영원한 천국 소망이 실현되는 날이기 때문에 핍박과 환난 중에도 재림의 날까지 길이 참으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농부의 비유를 들어 인내에 대해 교훈하고 있다.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팔레스틴 지역은 4월 하순부터 10월 중순까지는 건조기이며, 10월 하순부터 4월 중순까지는 우기로 되어 있다. 우량은 1, 2월이 가장 많고, 3, 4월 가면서 줄어든다.34)

이른 비는 10월 하순과 11월 상순에 오는 비를 가리키는데, 이 비가 안 오면 뿌려진 씨가 전연 싹트지 않는다(W. Barclay).

늦은 비는 3, 4월35)에 오는 비로 추수 직전에 오는 비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 늦은 비(호 6:3)는 봄비(렘 5:24)라고도 일컬어진다.

팔레스틴의 농부들은 열매를 얻기 위해 이른 비늦은 비를 기다리면서 길이 참는다. “그들이 참고 기다릴 수 있는 것은 열매를 얻을 확실한 소망 때문이다”(黑崎幸吉).

그와 마찬가지로, 믿음의 형제들도 임박한 주의 재림에 대한 소망(구원의 완성과 모든 것의 완성)을 가지고 현실적인 모든 고난을 길이 참아야 하는 것이다(8절 상반).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는 농부에 대하여 언급한 야고보는,【8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라고 권면하고 있다.

마음(카르디아스, καρδίας)은 3:14의 주석을 보라.

마음을 굳게 하라라고 한 것은 구체적으로 “믿음을 굳게 하라”(M. Henry, W. Barclay)는 뜻이다. 우리의 믿음이 동요되어 약해지거나 떨어지기 쉬운 환난의 때에, 우리는 더욱 임박한 재림의 소망을 바라며 믿음을 더욱 굳게 지켜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말씀에 착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서운 핍박과 시험이 제자들에게 닥칠 것을 아신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라고 하셨다.

다음으로, 야고보는【9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라고 충고하고 있다.

원망하지는 스테나제테(στενάζετε)로서 ‘탓하다’(공동 번역 신약 성서), ‘신음하다’, ‘근심하다’, ‘번민하다’, ‘투덜대다’, ‘탄식하다’(막 7:34, 히 13:17) 등을 의미한다.

대개 사람들은 곤고한 때에 남을 탓하거나 원망하기 쉽다. 대개의 불평과 원망이란 길이 참는 힘을 잃어버릴 때 나오는 법이다. 특히, “여기서 야고보는 곤고한 시기에 단지 압제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믿는 자들 상호간에 대해 원망하고 불평하기 쉬운 기질이 생기는 것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B. S. Easton).

사람들, 더욱이 곧 있을 재림 주의 심판을 믿는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상호 원망이란 환경 탓도 있겠지만, 실은 그 믿음이 약해지거나 떨어진 증거이다. 그 실례로 홍해와 애굽 군대 사이에서 죽음의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원망한 것을 들 수 있다(출 14장). 만일 이스라엘이 직전에 그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열 가지의 놀라운 권능을 보여 주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확고부동했더라면, 그들은 원망 대신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도하며 기다렸을 것이다. 그들의 광야 여행 중의 원망들도 같은 의미로 설명될 수 있다.

어쨌든, 형제들이 서로 비난하거나 원망하는 것은,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깨뜨리는 것이며, 그로 인해 심판자로부터 똑같은 비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마 7:1).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원망이나 비난을 하지 않음으로써 심판을 면해야 하는 것이다. 벤겔(J. A. Bengel)은 “원망은 하는 자나 받는 자를 다 해롭게 한다.”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은 문 밖에서 막 방으로 들어오려고 하는 심판자”(黑崎幸吉)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인내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주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그리스도인은 현실의 모든 불의와 부조리 그리고 그로 인해 빚어지는 고난을 묵인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야고보가 주님의 재림 때까지 마음을 굳게 하고 서로 원망하지 말고 길이 참으라고 한 것은 현실 도피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그가 의도하는 것은 “불의와 압제에 저항하지 말고, 반드시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고통과 절망에 직면하여 그들의 주께 대한 충성이 확고부동하기를 요청하는 것이다”(G. Poteat).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인은 화평과 사랑과 인내를 잃지 말고,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높은 심정을 유지하면서, 각 방면으로 사회 제도와 도덕을 개량하여 사회적 불의와 부조리를 제거해야 한다(C. R. Erdman). 다시 말하면, 세례 요한이 주님의 초림을 예비했듯이(눅 3:2-6), 말세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재림을 위해 예비하면서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의 형제들에게 임박한 주님의 재림을 원망 없이, 믿음을 굳게 하여 길이 참으라고 권한 야고보는, 믿음의 인내자들의 표본을 제시하고 있다.【10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성경적 사상에 있어서 이름이란 그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존재의 본질적인 성격의 표현이며, 또한 인간의 이름은 그 인간의 개성을 드러내므로”(R. Abba)36)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이란 주님으로 말미암아 예언한 선지자들이라는 뜻이다.

그들은 늘 귀를 기울여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것을 백성에게 전하여 주는 것으로 사명을 삼았으며, 이들은 신약 성경 시대에도 있었다(행 21:9, 고전 12:28). 이러한 사람들은 맡겨진 사명의 고귀성에 비추어 그에 적합하게 하나님께서 가장 위대한 명예를 부여하고, 가장 큰 호의와 권능을 베풀어주셨다.

그 반면에, 세상 사람들, 특히 집권자나 부자 등의 특권층에게서는 박해를 받아 왔다. 하나님의 특별한 호의와 인정을 받은 선지자들이 현실적으로 핍박을 받았다는 사실은, 핍박과 환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많은 위로가 된다.37)

또한, 선지자들이 고난 중에도 오래 참고 맡겨진 사명을 완수했다는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재림 때까지 인내하며 믿음의 생활을 하는 데 커다란 용기가 된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라고 하는 것이다. 이들이 받은 보상이란 현실적인 의미에서의 물질적인 것도 있지만, 주로 영적인 복이었다. 즉, 그들이 주님의 이름 때문에 세상에서 핍박을 받는 그 자체가 곧 신령한 복이며 기쁨이라는 것이다. 또, 그러한 핍박 속에서도 인내하며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그들에게는 여전히 하나님께로부터 사랑과 힘을 얻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야고보는 욥의 인내를 들고 있다.【11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이상근 님은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고 한 저자는 그 선지자들의 대표로 욥을 든다. 구약에서 욥을 선지자로 간주한 기록들이 있는 것이다(겔 14:4, 20, 또한 시락 49:9).”라고 하지만, 실제로 욥을 앞서 말한 선지자들과 같이 취급하기는 어렵다. 에스겔은 그를 선지자로서가 아니라, 대표적인 의인으로 인용하고 있다(겔 14:4, 20). 야고보는 욥을 인내하여 복을 받는 자의 대표로 취하고 있다.

욥이 당한 고난은 아주 극심하고 다양하였다. 그는 잘 알 수 없는 원인(하나님의 허용 아래서 시험한 사단의 시기에 가득 찬 행위라고 서언에서 밝혔지만) 때문에 온갖 재난을 당하고, 지위를 상실하고, 모든 자녀들이 졸지에 압사하고, 견디기 어려운 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등 극도의 고통을 겪었다. 그가 당한 고난이란 가히 인간이 겪는 모든 고난의 종합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고난 가운데서 욥은 결국 승리하였다.

이스톤(B. S. Easton)은 “욥의 ‘인내’(patience: KJV)라는 표현보다 욥의 ‘확고 부동’(steadfastness: RSV)이란 표현이 훨씬 더 좋다. 그 까닭은 욥이 도덕적 완전성을 끊임없이 견지한 반면에,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항거했으므로 고통에 대한 인내로 묘사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물론, 욥은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고, 자기의 고난에 대해 의문을 품었으며, 때로는 투쟁하고 항거하였다. 그렇지만 욥의 위대성, 즉 그의 인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전적으로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을 견지하였다. 그러므로 욥의 인내는 믿음의 인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욥이 놀라운 복을 받은 이유이다.

그래서, 야고보는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서는 자시니라라고 하는 것이다.

주께서 주신 결말은 문자적으로 ‘주의 결말’(τὸ τέλος κυρίου)이므로, 이를 주님 자신의 결말인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보는 학자들이 있으나(A. E. Barnett), 본문의 내용과 거리가 멀다. 이는 주님께서 욥을 위해 지으신 결말이다.38)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란 독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욥에게 베풀어주신 놀라운 복(욥 42:12-17)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자이심을 알 수 있다.

자비란 폴뤼스플랑크노스(πολύσπλαγχνός)로서 남의 고통에 대한 동정을 의미하고(黑崎幸吉), 긍휼은 오이크트리몬(οἰκτίρμων)으로서 약자를 대하는 동정을 의미한다. 결국 자비긍휼이나 동정을 의미하는 말이다.

5:7-11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야고보는 현실적으로 핍박과 고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원망을 버리고, 확고한 믿음으로 주님의 재림 때까지 길이 참아 하나님의 복을 받으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기까지 참고 견딤으로 승리하시고(골 2:15), 부활의 영광을 누리신 주님 안에서, 그분의 재림을 바라는 소망으로 모든 고난을 인내할 수 있다. 끝까지 참고 견디는 자들은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께로부터 놀라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22맹세하지 말라<5:12>



핍박과 환난 가운데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의 재림 때까지 인내하라고 권면한 야고보는, 이제 맹세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12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무엇보다도는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의도의 중요성을 나타낸다(J. Wesley, 黑崎幸吉). 이 점에 대해 헨리(M. Henry)는 “맹세란 가장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명예를 더럽히며, 가장 현저하게 하나님의 성함과 권위를 경멸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스톤(B. S. Easton)은 “맹세를 하는 것이 이 서신에서 비난이 대상이 된 다른 것들보다 더 큰 죄라는 것이 이해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과장된 견해로 이해하고 있다. 과장이기는 해도, 어쨌든 야고보가 맹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매우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맹세를 금하는 야고보의 말은 마태복음 5:33-37의 예수님의 교훈의 반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나 야고보가 금한 맹세란 어떤 성격의 것인가를 규명해야 한다. 즉, 맹세라면 어떤 것이든 다 금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대한 서원이나 법정에서의 선서 등은 허용하고 있는 것인가?

재세례파(Anabaptists)39)나 퀘이커(Quakers)40)에서는 야고보의 교훈에 입각하여 법정에서의 선서를 금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야고보의 의도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야고보는 법정에서의 선서41)나 현대적 의미의 서약(W. Barclay)이나 혼인 서약 등을 금하는 것이 아니며, 또 서원을 금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 대한 서원은 구약 성경에서 얼마든지 허용되고 있다(창 28:20, 31:13, 레 7:16, 22:18, 21, 23, 23:38, 27:2, 민 6:2, 5, 15:3, 21:2, 29:39, 30:2, 3, 신 12:17, 삿 11:30, 39, 삼상 1:21, 삼하 15:7, 욥 22:27, 시 50:14, 56:12, 61:5, 116:14, 잠 20:25, 전 5:4, 사 19:21, 렘 44:25, 욘 1:16, 나 1:15, 신 12:11, 민 6:21 등).

신약 성경에서는 바울이 서원한 바 있어 머리를 깎았다(행 18:18)는 기록이 있고, 그 외에도 사도행전 21:23에 서원한 사람들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 자신도 맹세하셨고(창 22:16, 민 14:23, 시 89:3, 110:4, 사 45:23, 히 6:13), 그리스도께서도 맹세하셨으며(마 26:63), 바울도 역시 종종 하나님의 증거를 구하였다(롬 1:10, 빌 1:8, 살전 2:5, 10, 고후 1:23).

그렇다면, 야고보가 금한 맹세란 어떤 성격의 것이며, 그것을 금한 이유는 무엇인가?

“맹세란 의심스런 더 열등한 것을 확증하기 위해 어떤 확실하거나 위대한 것의 명성을 걸어 약속하는 것이다”(M. Henry). 이러한 맹세는 어느 사회에서도 볼 수 있으나, 특히 유대인들에게서 심하였다(이상근). 이 점에 대해 바클레이(W. Barclay)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유대 세계에서는 구속력이 있는 맹세와 구속력이 없는 맹세가 있었다. 전자는 하나님의 성함이 직접 사용된 맹세로서 하나님께서 그 거래의 능동적인 동참자가 되시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 반면에, 후자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사용한 맹세로서 하나님께서 그 거래에 동참하지 않으시므로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회피할 수 있는 맹세를 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 헨리(M. Henry)도 “신성 모독적인 맹세는 유대인들 사이에는 매우 습관적이었다.”라고 하였다.

칼뱅(J. Calvin)은 “유대인들은 하늘과 땅으로 맹세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함에 대한 남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함을 걸지 않는 한 아무런 해가 없다고 생각했다.”라고 하였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야고보는 하늘로나 땅으로나 다른 어떤 것으로나 맹세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는 것이다.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마 5:34-35)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결국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련성을 갖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성함으로 맹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야고보가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 맹세함으로써 상대방의 신임을 얻어 자신의 이기적 야심을 충족시키는 위선 때문이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거짓과 죄악을 진실하고 의로운 것으로 확신시키기 위해 맹세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예로, 베드로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는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비자의 말에 두 번씩이나 맹세하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다(마 26:69-74). 결과적으로 이러한 맹세는 신성 모독적인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인간이란 미래의 사실에 대해 확실한 지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함부로 맹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C. R. Erdman, 黑崎幸吉).

야고보는 맹세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경고한 후에 그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黑崎幸吉은 “어디까지나 성실하게 살아,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고 살아 나갈 것을 말한다. 그런 인간은 새삼스럽게 맹세할 필요가 없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해, “진실하라는 것이며, 진실할 때에 맹세는 불필요하다”(J. Calvin, M. Henry).

다시 말하면, “맹세에 의해 제공될 외부적인 지지가 실제로 정직한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것이다”(G. Poteat). “정직한 사회란 맹세가 필요 없는 사회이다”(W. Barclay).

현대 사회의 특징의 하나는 부정직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어느 범죄학자는 기만이 우리 땅에서 가장 널리 퍼진 범죄 행위라고 진술하였다. 지옥에서와 마찬가지로 존경할 만한 사업계에도 널리 퍼져 있다”(G. Poteat).

이러한 현대 사회의 현실을 그리스도인들은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그 사회 속에 정직과 성실성에 대한 성서적 정신을 심어 나가야 한다. 이 일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맹세를 하지 않고도 그렇다 혹은 아니라는 말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말은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이어야 한다(시 51:6)는 뜻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죄 정함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죄 정함을 면하라(μὴ εἰς ὑπὸ κρίσιν πέσητε: 심판 아래 떨어지는 것을 면하라)는 א, A, B 사본 등을 따른 것이고; K, L, P 사본 등에는 μὴ εἰς ὑπόκρισιν πέσητε(위선에 빠지지 않게 하라)로 되어 있다.42) 후자의 뜻을 취해도 문맥상 별 문제가 없지만, 여기서는 전자의 뜻을 취하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

5:12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야고보는 하나님께 대한 서원이나 법정에서의 서약 등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야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행하는 위선된 맹세이다. 그의 참된 의도는 맹세가 필요 없도록 그만큼 신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며, 그렇게 살 때에 심판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이다.









23고난과 기도<5:13-18>



이 부분은 앞과의 논리적 관계가 없는 것으로(B. S. Easton), 야고보서의 다른 어떤 부분보다도 교회의 생활과 관습에 대해 더 큰 영향력을 나타내고 있다(R. R. Williams).

이 부분은【13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로 시작된다.

짧은 자문자답 식으로 된 이 구절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애용했던 표현법인데, 그 내용은 “섭리의 뜻에 자신을 적용시키는 것”(M. Henry),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고난의 때와 희락의 때에 처신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박윤선).

인생이란 고난과 즐거움이 엮어 나가는 하나의 직물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에 승리하고 성공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고난과 즐거움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혜란 환경에 잘 적응하는 것이며, 또한 고통과 번영 모두에 잘 적용하는 것이다”(M. Henry).

먼저, 야고보는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라고 권하고 있다. 이스톤(B. S. Easton)은 “고난이란 슬픔과 병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용어이다.”라고 하였다. 대체로 고난은 자신의 실수나 죄로 인한 것, 다른 사람으로 인한 것, 다른 사람을 위함으로 발생하는 것, 즉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면서 당하는 고난,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 등의 종류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간에 고난을 당하면 의기소침해지고, 철저한 절망 가운데 빠져 불평하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한다. 그들의 고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란 고난의 현실을 도피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난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간에, 모든 고난은 그 인간의 마음과 직결되어 있으므로 현실을 피한다고 해서 고난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야고보가 제시한 고난의 해결책이란, 한 마디로 말해, 기도이다. 깁손(E. C. S. Gibson)은 고난 당하는 이들은 결핍된 것이 충족되어야 하고, 슬픔이 제거되어야 하는데, 이것을 위해서는 기도가 필수적이라고 한다. 바네트(A. E. Barnett)는 “기도는 신적 능력의 근원에 수도꼭지를 다는 것.”이라는 재미있고도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실상, 모든 고난은 기도로 극복할 수 있다(시 50:15, 27:12-13, 81:7, 빌 4:6-7). 특히, “가장 잘 받아들여지는 기도는 회한의 겸손한 정신으로부터 나오는 기도이다”(M. Henry).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모든 고난은 기도를 자극하며, 기도로 이용되어야 한다. 그 기도는 고난과 그 부정적인 결과들을 극복하게 해 주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령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40:1-2)라고 고백하였다(참조: 출 3:7-).

우리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후에 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때마다 모세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신 사실을 잘 알고 있다(출 14:15-15:25, 17:4-, 11-).

그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의 고난이란 생의 걸림돌이 아니라, 생의 도약을 위한 디딤돌인 것이다.

다음으로, 야고보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라고 충고한다. 환희와 번영의 날에 찬송을 불러 넘치는 기쁨을 하나님께 고한다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그러나, “대체로 즐거운 때에는 마음이 부풀어 하나님을 잊기 쉬우며”(黑崎幸吉), 또한 “마음이 방종해지면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하게 되기 어렵다”(박윤선). 모세는 하나님의 많은 은혜와 복을 받은 이스라엘이 환희와 번영 중에 오히려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가증된 죄악을 경책하였다(신 32:10-16).

은혜를 안다는 것은 실로 중요하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고통 중에 기도하고 기쁨 중에 찬송한다.

이스톤(B. S. Easton)은 “찬송할지니라(KJV)는 신적 영감을 받은 찬송가들만이 크리스트교 예배에 적합하다는 청교도의 주장에 의해 영향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초대 교회에는 알려지지 않았다(참조: 골 3:16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찬송할지니라로 번역된 팔레토(ψαλλέτω)의 뜻에 의해 더욱 분명해진다.

팔레토(ψαλλέτω)에 대해, 이상근 님은 “원래는 ‘잡아 친다’(줄 같은 것을)는 뜻이었으나, 여기서 ‘거문고를 탄다’는 뜻이 되었고, 나아가서 ‘거문고를 타면서 찬송함’을 뜻하게 되었다. … 신약에서는 단순히 ‘찬미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고전 14:15, 엡 5:19).”라고 설명하였다. 윌리암즈(R. R. Williams)는 “하프를 치게 하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신약 성경 어느 곳에서나 노래, 특히 찬송을 부르는 것으로 사용된다.”라고 하였고, 헨리(M. Henry)는 “원래 찬송 혹은 어떤 다른 말의 추가 없이 다만 노래부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결국 팔레토(ψαλλέτω)는 악기를 동반해 ‘노래하다’, ‘찬송하다’, ‘시를 노래하다’ 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감사에 넘쳐 솟아 나오는 찬송은 기도의 최고의 형태”(E. C. S. Gibson)라고 할 수 있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초대 교회는 항상 찬송하는 교회였다(고전 14:15, 26, 롬 15:9, 시 18:49. 참조: 골 3:16, 엡 5:19).”라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에 대한 찬미의 노래가 그리스도인들의 입술로부터 넘쳐 나오는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기쁨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하였다.

찬송하는 교회로서의 특징을 가진 초대 교회에 대해 헨리(M. Henry)가 더 잘 입증하고 있다. “우리는  기독교의 초창기의 여러 문서로부터(특히, Pliny의 편지43)와 Justine Martyr44) 그리고 Tertullian45)의 어떤 문장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성경으로부터 혹은 개인적인 평정으로부터 취해진 찬송을 부르는데 익숙해 있었음을 배운다.” 과학 만능주의와 물질 만능주의가 팽배한 현대 세계에, 교회의 기쁨과 즐거움에 넘친 찬송이 주는 영향은 매우 클 것이다.

고난의 때에 기도하고 즐거운 때에 찬송하라는 야고보의 의도는, “하나님께서 어떤 경우에도 인간을 부르신다는 것이고”(J. Calvin, 黑崎幸吉), 또한 “기쁨이거나 슬픔이거나 모든 정서는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것이다”(B. S. Easton).

어드만(C. R. Erdman)은 “예배는 기도와 찬송으로 되어 있다. 집에서나 교회에서나 예배하는 것이 우리의 하소연을 하나님께 여쭈고 은혜 받는 길이다.”라고 하는데, 그 말 자체는 옳지만 야고보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야고보의 의도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형편이나 사정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승리하며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결정적인 비결은 바울의 고백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2-13).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의 고난 중에서 특별히 병의 문제를 처리하는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다.【14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이상근 님은 “병자를 찾아 기도하는 것은 유대의 오랜 전통이었다(cf. Edersheim, Jewish Social Life). 일찍이는 히스기야가 병들었을 때에 이사야가 심방하였다(왕하 20:1).”라고 하였다. 그러나, “초대 교회만큼 병자에 대하여 헌신적으로 돌봐 준 교회는 드물 것이다. 실상 초대 교회는 병 고치는 교회라는 특징이 있었다”(바클레이).

야고보는 병든 자에게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장로(프레스뷔테로스, πρεσβύτερος)란 원래 ‘늙다’란 의미를 가진 말이었으며, 따라서 장로의 권위의 참 근원은 나이에 있었다. 장로란 연장자(욥 32:4)나, 한 가문의 어른(창 10:21)이나, 한 지파의 장(레 4:15)에게 적용된 명칭이었다. 장로는 씨족 사회, 또는 부족 사회의 권위 있는 존재이었다(출 18:13-). 신명기 1:13에는 ‘관원’으로 되어 있으나, 출애굽기 18:12에는 이미 이같은 관리들이 선출되기 전에 장로가 있었던 것으로 보도하고 있다. 민수기 11:16 이하에는, 이스라엘 노인 중에 관원인 장로들 중에서 70인을 선정하여 이스라엘의 장로회를 구성한 것을 말하고 있다(비교: 출 24:1, 9). 그들은 전투 지휘자, 논쟁의 재판관, 충고와 권면자 혹은 행정상의 증인 등의 역할을 하였다. 특히, 중요한 것은 공동체를 유지하고 대표하는 공동체의 초점이라 할 수 있다(레 4:13-21, 신 21:1-9).

󰡔�“그 후부터 장로는 유대인 생활의 전통적인 특색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예언자의 친구로서의 장로(왕하 6:32)나, 왕의 충고자로서의 장로(왕상 20:8, 21:11)나, 국가의 정사를 맡아보는 행정관들의 동료로서의 장로(에 10:8)를 찾아볼 수 있다. … 장로들은 회당의 관리자들이었다. 그들은 설교는 하지 않았으나 회당의 행정과 질서를 맡아보았고, 또 회원에 대한 훈련을 실시하였다”(W. Barclay)󰡕�(벧전 5:1의 주석).

신약 시대의 각 유대 공동체에는 장로회가 있었다. 디아스포라에서는 장로회를 보통 게루시아(γερουσία)라고 하였고, 장로들을 아르콘테스(ἄρχοντες)라고 불렀다. 물론, 장로회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71명으로 구성된 의회인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이었다. 이 산헤드린(공회)은 유대 민족의 ‘절대적 법정’으로 봉사하였다.46)

󰡔�장로 제도를 가지고 있던 민족은 유대만이 아니었다. 스파르타의 지도층은 ‘장로회’란 뜻인 게루시아(γερουσία)라고 불렸다. 로마의 의회는 ‘원로원’이라고 불렸는데, 이 말은 노인이라는 뜻인 세넥스(senex)에서 유래되었다. 영국에서는 공동체의 사항을 관리하는 사람들을 ‘장로들’이란 뜻인 알더멘(aldermen)이라고 불렀다. 신약 시대의 애굽에는 어느 마을에나 공동체의 문제를 처리하는 장로들이 있었다. 이와 같이 장로에는 오랜 역사가 있었으며, 거의 모든 사회에 장로와 같은 지위가 설정되어 있었다(W. Barclay)󰡕�(딤전 3:1의 주석).

󰡔�“소아시아에서도 협의회의 회원들이 장로들이라고 불렸다. 심지어 이교 세계의 종교 단체들에도 훈련을 책임진 ‘장로 제사장들’이 있었다. 우리는 소크노파에우스(Socnopaeus) 신전에서, 지나치게 머리를 길게 기르고, 양의 털옷을 입었기 때문에 비난받고 있던 어떤 제사장의 문제-제사장은 여자 같이 하는 것과 사치의 죄를 범해서는 안 되었다-를 처리한 ‘장로 제사장들’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다”󰡕�(W. Barclay).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이, 크리스트교가 ‘장로’라는 칭호를 사용하기 이전부터 유대 세계나 그리스, 로마 세계 등에서 명예로운 칭호로 사용하고 있었다.

크리스트교의 장로직은 유대교에서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마 처음 얼마 동안은 나이 많은 교회 지도자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장로라고 불렀던 것 같다. 그러다가 교회가 점점 부흥하게 되니까 조직적인 교회 관리와 지도를 위해 장로 제도를 만든 것 같다. 그러나, 크리스트교의 장로들이 처음 임명된 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이스톤(B. S. Easton)은 “야고보의 말씀(약 5:14)은 장로들의 통치 아래 있는 크리스트교의 공적 조직에 대한 구체적 언급이다.”라고 하였다. 깁손(E. C. S. Gibson)은 “장로 제도의 시작에 대한 설명은 없지만, 그러나 장로들은 사도행전 11:30에 이미 있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사도행전 14:23에서, 우리는 바울과 바나바가 그들의 첫 선교 여행 때에 설립했던 모든 교회 안에 장로들을 임명했다는 것을 안다.”라고 하였다[참조: 딛 1:5]. 간혹 사도들이 자신들을 장로라고 부르기도 했지만(벧전 5:1), 일반적으로 장로는 사도들보다는 낮은 지위(이상근)로서 교회를 대표하는(黑崎幸吉, 박윤선) 지도적 위치를 가진 모든 사람을 포함하는 것이다(J. Calvin, M. Henry, R. R. Williams).

장로들의 임무는 병자를 심방하여 기도하고(약 5:14), 교훈과 권면을 해 주고(롬 11:8, 살전 5:12), 가르치는 일을 힘쓰고(딤전 5:17), 재정 관리를 하고(행 11:30), 다스리고 심령을 돌보는 것이다(행 20:28-29).

󰡔�이제 우리는 초대 교회의 장로와 감독을 동일시하는 현대 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⑴ 장로들은 도처에서 임명되고 있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제1차 선교 여행 후에, 자기들이 세운 교회에 장로들을 세웠다(행 14:23). 바울은 그레데의 모든 성에 장로들을 세우도록 그 곳에 디도를 남겨 두었다.

⑵ 감독과 장로의 직책의 성격은 그 의도나 목적에 있어서 동일하다(딤전 3:2-7, 딛 1:6-9).

⑶ 빌립보서의 서두에 있는 바울의 인사는 감독과 집사들에게 한 것이다(1:1).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장로는 어느 교회에나 다 있었기 때문에, 바울이 장로들에게 인사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따라서, 감독과 장로는 동일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⑷ 바울이 마지막 여행길에 예루살렘에 들렀을 때, 밀레도에서 만날 수 있도록 에베소의 장로들을 청하려고 사람을 보냈다(행 20:17). 그리고 그들에게 연설하는 도중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치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을 감독자로 삼으셨다고 말하였다(행 20:28).

⑸ 베드로가 아시아 교회들에게 써 보낸 편지 속에 장로로서 장로들에게 권하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벧전 5:1), 그 내용 중에 장로들의 역할은 하나님의 양떼를 치는 일이라고 하였다(벧전 5:2). 그가 ‘치다’라는 뜻으로 사용한 말은 에피스코푼테스(ἐπισ-κοπούντες)라는 동사인데, 바로 이 말에서 ‘감독’(에피스코포스, ἐπίσκοπος)이란 말이 파생된 것이다󰡕�(딤전 3:1의 주석).

󰡔�블럼(E. A. Blum)은 “장로는 그 직책의 위엄을 나타내고, 감독은 그 기능-감독하는-을 나타낸다.”라고 하였다󰡕�(요이 1의 주석). 대체로 장로는 사람을, 감독은 그 사람의 직무를 나타낸다. 후에 교회가 발전하고 더욱 조직화되면서 장로들의 모임 자체가 지도자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 필요성에 의해 세워진 장로가 곧 교회의 감독자로 불려지게 된 것이다.

야고보가 병든 자에게 장로들을 청하라고 한 것에 대해, 黑崎幸吉은 “장로에게 특히 병 고치는 은사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교회를 대표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장로들이 교회의 신앙을 지도하는 만큼,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비해 성령의 능력과 은총이 아주 강하고, 현저한 은사를 받았다는 사실(J. Calvin. 참조: R. R. Williams)을 볼 때에 그들에게 신유의 은사가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장로들이 교회를 대표하여 병자를 위해 해야 할 일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다. B 사본에는 주의가 없이 “그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로 되어 있다(E. C. S. Gibson). 만일 주의란 말이 시인된다면, 그것은 주 예수를 언급하는 것으로 취해져야 한다(E. C. S. Gibson).

米田豊은 기름을 가리켜 성령의 능력을 표징하는 것이라 하지만, 실은 당시에 널리 쓰이던 치료 약이었다(사 1:6, 막 6:13, 눅 10:34).47) 깁손(E. C. S. Gibson)은 기름의 의약적 사용은 미슈나(Mishnah)48)에도 언급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름 바름은 8세기말부터 죽어 가는 자에게 사죄의 표시로서(이상근), 그리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과 더 잘 싸우도록 하기 위해(M. Henry), 즉 그 영혼으로 하여금 죽음을 예비하게 하는 표시로 사용되기 시작했으며(C. R. Erdman), 1545년 12월 13일부터 1963년 12월 4일에 걸친 트랜트 회의의 결정을 거쳐 종유식(Extreme Unction)이 교회의 일곱 가지 성례의 하나로 결정되었다.49) 그러나, 이 의식은 병자를 고치기 위한 야고보의 본래의 의도를 전적으로 왜곡한 것이다.50)

야고보는 믿는 자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약으로서의 기름을 사용하도록 하면서, 보다 더 중요한 요소인 기도를 명한다. 바클레이(W. Barclay)는 “이것은 유대교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유대인은 병이 나게 되면 의사에게 가지 않고 랍비를 찾아갔다. 그러면 랍비는 기름-그리스인 의사 칼렌(Galen)이 말한 ‘약 중의 약’-을 병자에게 주고 기도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칼뱅(J. Calvin)은 “치유의 은사가 일시적인 것으로, 그 시기 이후에는 계속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것의 표적(기름) 역시 영구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치유의 은사가 그 후에도 계속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해 바클레이(W. Barclay)가 좋은 실례를 제시하고 있다. “제3세기 중엽의 저술가 터툴리안(Tertullian)은 토르파키온(Torpacion)이라는 그리스도인이 손으로 기름을 붓는 것에 의하여 로마 황제 알렉산더 세베루스(Alexander Severus)까지도 고침을 받았으며, 황제는 그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여 토르파키온을 자신의 궁중에 맞아들여 그가 죽을 때까지 귀빈으로 대우하였다고 한다.”

이어서 바클레이(W. Barclay)는 “수세기 동안 교회는 계속해서 병자를 고치는 수단으로 기름 바르는 일을 해 왔다. … 이 외에 안수를 통한 치유에 관한 기록도 많이 남아 있다.”라고 하였다.

병자에 대한 기름 바름과 기도(자신 혹은  타인)의 겸용은 두 종류의 극단적 태도-치유란 기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약(의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과, 반대로 약을 써서는 안 되며 다만 기도로 고침 받아야 믿음이 있는 것이란 생각-가 잘못된 것임을 입증해 준다. 기름 바름(준 성례전적 치유 효과를 갖는다: B. S. Easton)과 기도에 있어서 야고보가 강조하는 것은 기름이 아니라 믿음의 기도이다. 병자 혹은 심방자들의 믿음의 기도가 주님께 상달되어 기름의 의약적 효능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히스기야 왕은 자신의 기도가 주님께 상달됐을 때, 지시받은 대로 무화과 한 뭉치를 종처에 발라 죽을병에서 살아났다(사 38:21).

치유에 있어서의 결정적인 역할이 기도라는 것은 야고보 자신의 말에서 더욱 분명해진다.【15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기름이 병든 자를 구원한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상근 님의 말대로 기름을 바르는 것과 같은 인간적인 방법들은 주님께서 쓰시는 기구에 지나지 않으며, 그분이 고쳐 주시지 않는 한 어떤 방법도 효능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기도(1:6의 주석을 보라.)가 절대로 필요하고 중요하다. “여기서의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간접으로 어떤 방법을 사용하시든지, 직접으로 기적을 나타내시든지 마음대로 하실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의료 방법을 다하면서 그 뜻에 온전히 순복하는 믿음을 말한다”(C. R. Erdman).

이러한 믿음은 기도하는 자나 받는 자 모두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믿음의 기도는 그리스도인을 도움의 궁극적인 근원에 접촉시킴으로써”(A. E. Barnett) 병든 자가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구원하리니(소세이, σώσει)는 여기서는 마태복음 9:21, 22 등의 문장에서처럼 육체적인 치유를 의미한다(E. C. S. Gibson).

믿음의 기도로 인한 치유란 곧 주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께서 병든 자의 기도, 또는 병든 자를 위한 믿음의 기도를 통해 병상에서 일으켜 주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믿음의 기도는 반드시 치유의 결과를 가져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믿음으로 기도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병을 고쳐 주시는 데 있지 않고, 다른 데 있을 경우에는 치유되지 않는 것이다(黑崎幸吉). 그 좋은 예로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던 바울을 들 수 있다(고후 12:7-9).

병든 자의 믿음의 기도가 초래하는 또 하나의 놀라운 결과는 그 병이 죄로 인한 것일 경우에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야고보는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라고 하였다. “유대인들은 항상 고통과 죄를 동일시하였지만, 우리는 그와 같이 기계적으로 동일시할 수는 없다”(W. Barclay). 병이 죄의 결과일 경우도 있지만(막 2:1-12), 그렇지 않은 병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야고보의 혹시라는 말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또한, 예수께서는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요 9:3). 이와 같은 것으로 바울의 육체의 가시를 들 수 있다(고후 1:7).

믿음의 기도로 치유되고 용서받는다고 한 야고보는,【16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라고 하였다.

이상근 님은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할 것이고-기도는 믿음으로 하여야 하며-믿음을 위해서는 죄 사함을 받아야 되며-죄 사함 받기 위해서는 죄를 고하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믿음을 위해서 죄 사함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기도가 죄 사함 받게 하는 것이며, 또한 근본적인 의미에서 믿음이란 모든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사면되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 대 사면은 우리의 죄가 고해지기도 전에 하나님 편에서 베푸신 것이다. 야고보가 너희 죄를 서로 고하라 하는 것은 믿는 자들의 실수나 잘못으로서의 죄를 고백하라는 말이다.

고함(엑소몰로게이스테, ἐξομλογείσθε)은 자발적인 고백, 또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을 의미한다.

이러한 죄의 고백은 이미 받은바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에 대한 신뢰와 확신에서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트루나이젠(E. Thurneysen)도 같은 의미의 말을 하고 있다. “용서란 단순히 우리가 이미 고백했기 때문에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용서가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그리고 용서가 홀로 도움을 주는 도움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서로 죄를 고백한다.”51).

야고보가 여기서 의도하는 것은 장로들 혹은 사제들(카톨릭)에게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포함하여 그리스도인 상호간에 고백하라는 것이다.

물론, “죄의 고백이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것이며 기도의 한 분야이다”(A. E. Barnett).

유대교나 ‘모라비안 교도’52)는 하나님과 인간 모두에게 죄를 고백하게 한다. 그러나, “이 원리는 확실히 지혜롭게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서로 죄를 고백한다는 것은 좋은 결과보다는 헤아릴 수 없는 상처를 주는 경우가 더 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W. Barclay). 헨리(M. Henry)는 고백의 경우를 화해에 필요하거나, 잘못된 행동에 대한 보상으로나, 혹은 양심이란 면에서나, 혹은 자신의 정신적 안정을 위한 것 등으로 제한하고 있다.

“사적이건 공적이건 죄의 고백이 초래하는 좋은 결과는 정신적이며 육체적인 구원을 얻게 하고”(G. Poteat), “친밀과 우정을 더욱 공고히 하며”(M. Henry), 무엇보다도 간절한 기도를 하도록 자극을 주는 것이다.

우리는 고백을 통해 그의 죄와 그로 인한 정신적 또는 육체적 고통을 절감하게 되며, 따라서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죄의 고백이란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서로에게 유익이 될 때에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죄(병의 원인)의 고백은 반드시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칼뱅(J. Calvin)은 “야고보는 고백의 유익이 우리 형제들의 기도로부터 하나님 안에서 도움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들 상호간의 기도와 간구로써 죄가 사해지고 병이 낫게 되는 것이다(M. Henry).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능력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게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W. Barclay).

야고보는 기도 중에 특별히 효력이 있는 기도를 가리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라고 하였다. 여기서의 의인이란 복음적인 의미에서의 의인을 말하는 것이다.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이다. 이들의 간구가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것이다.

간구(데에시스, δέησις)는 “특별한 조건을 내건 간곡한 청원이고”(이상근), 역사하는 힘이 많다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응답을 잘 받으므로 큰 “유익과 효력이 있다”(J. Calvin)는 뜻이다.

야고보는 그 실례로서 엘리야를 들고 있다.【17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우리는 놀라운 일을 성취한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을 평범 이상의 특정 인물로 보거나,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즐기는 반신 반인이나 영웅들로 생각하기 쉽다”(J. Calvin). 이러한 생각을 하는 한 우리는 기도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기 어려우며, 또한 엘리야의 기도의 능력을 들어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 “엘리야가 성취한 것은 초인의 마술적 수행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 자신과 꼭 같은 인간의 행위에 의한 것, 즉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의 사용을 통해서였다”(B. S. Easton).

엘리야가 우리와 성정이 같다고 하는 것은 그가 기도의 놀라운 응답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그와 같은 응답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하며, 따라서 기도에 대한 용기와 소망을 갖게 해 주는 것이다.

성정이 같은은 호모이오파테스(ὁμοιοπαθὴς)로서 ὃμοις(같은)와 πάθοι(정)의 합성어이다. 그 의미는 본성이나 구조가 같다는 것이다. 실제로 “엘리야는 연약하여 범죄하기 쉬운 인간성을 가졌으며”(J. Wesley), “결점이 있었고 무질서한 격정에 사로잡히기도 하였다(M. Henry).

야고보가 여기서 언급하는 엘리야의 기도는 가뭄과 비에 관련된 것이다. 저가 비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18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이 이야기는 열왕기상 17장과 18장에서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엘리야가 기도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53)

열왕기상 17:1에 보면, 단지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여 한발이 있을 것을 예언했을 뿐이다. 이를 가리켜, 야고보는 엘리야가 간절히 기도한즉 한발이 임했다고 하는 것이다.

간절히 기도한즉(προσευχῇ προσηύξατο)의 문자적 의미는 ‘기도로 기도하였다’는 것으로 매우 강한 표현이다.

한발에 대한 예언이 간절한 기도로 말미암은 한발로 바꿔진 것 곧 예언이 기도로 바뀐 것과, 엘리야가 갈멜산에 올라가 땅에 엎드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은(왕상 18:42) 후에 비가 온 것을 가리켜, 야고보가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다고 한 것에 대해, 黑崎幸吉은 “전후 관계로 기도를 뜻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라고 하지만 설득력이 없다. 깁손(E. C. S. Gibson)은 야고보의 추론이라 하고, 이스톤(B. S. Easton)은 전승에 기인한 것 같다고 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 바클레이(W. Barclay)가 잘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유대교의 랍비적 주석이 성서의 의미를 전개시킨 좋은 예가 된다. … 열왕기상 17:1에 하나님 앞에서의 엘리야의 예언이 기록되어 있다. 기도에 대한 유대인의 자세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세이다. 이 구절에 대해, 랍비들은 한발이 엘리야의 기도의 결과였다고 지적하는 데 착안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18:42의 땅에 엎드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은 엘리야의 모습에서 랍비들은 다시 괴로워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하여 한발을 그치게 한 것은 엘리야의 기도였다고 귀납할 것을 느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야고보가 한발의 기간을 3년 6개월이라 하는데, 이것을 뒷받침할 만한 구약 성경의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제3년에 비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했다는 것이다(왕상 18:1).

아무튼, 3년 6개월이란 한발 기간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도 언급되고 있다(눅 4:25). 깁손(E. C. S. Gibson)은 “아마 유대인들에 의해 고난의 시기의 상징으로서 취해진 전승을 따라 전해진 기간일 것이다.”라고 추측하였다. 이스톤(B. S. Easton)은 더욱 구체적으로, “아마도 본문은 다니엘 7:25과 12:7의 악의 존속 기간을 지시하는 묵시적 상징주의에서 사용된 시기인(계 12:6, 14, 13:5) 1년, 2년 그리고 반년에 의해 영향받았을 것이다.”라고 추측하고 있다.

결국 3년 6개월이란 하나의 상징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엘리야의 기도가 3년 6개월 동안의 가뭄에 영향을 주었다는 기록은 “지나간 세월에서처럼 기도하도록 용기를 주는 데 별 영향을 주지 못한다”(G. Poteat). 그러나, 반드시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기도가 자연을 바꾼다는 것은 모든 세기의 헌신적인 그리스도인의 보편적 경험이다”(R. R. Williams). 하나님에 의한 자연의 변화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5:13-18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야고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고난의 때에는 불평과 원망 대신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고난을 극복하라고 한다. 반면에, 즐거울 때에는 감사에 넘친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라고 한다. 즉. 어떤 환경과 처지에 있든지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다(참조: 빌 4:12-13).

그는 병고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장로들을 청하여 주님의 성함으로 당시의 치료 약이었던 기름을 바르며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치유란 약에 의해서라기보다는 믿음의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믿음의 기도는 죄로 인한 병일 경우에는 사죄와 치유를 동시에 받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간에 죄를 고백하며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특히, 그는 서로를 위해 기도할 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의 기도는 놀라운 위력을 나타낸다고 하면서 그 실례로 엘리야를 들고 있다.



24배교자를 돌이켜라<5:19-20>

앞에서(5:13-18) 병 고침과 죄 사함에 대해 가르친 야고보는, 여기서 온전히 영혼의 병을 고치는 일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C. R. Erdman). 칼뱅(J. Calvin)이나 黑崎幸吉은 몸의 병을 고치는 일보다 한층 더 중요한 일이 영혼을 건지는 일이라고 한다. 야고보는 이 서신을 끝맺으면서 믿음의 형제들에게 가장 중대한 사명에 대해,【19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이라고 일깨우고 있다.

너희 중에를 가리켜, 와드(R. A. Ward)는 독자들이 혼합된 무리들이란 이유를 들어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내 형제들아는 말을 보아 믿는 형제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당시 초대 교회에서는 일단 믿었다가도 혹은 유대교로 되돌아가고 혹은 그리스 철학에 혹은 동방의 신비 종교에 미혹되는 자들이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또한 모든 시대에 공통되는 일이기도 하다.

미혹하여는 플라네테(πλανηθῇ)로서 ‘방랑하다’, ‘배회하다’ 등을 의미한다(R. A. Ward). 따라서, 그 말속에 이미 정도 또는 진리에서 이탈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여기서 진리란 테스 알레테이아스(τής ἀληθείας)로서 “진리의 위대한 규칙과 표준인 복음”(C. R. Erdman), 또는 종교적 원리의 전체이다. 그와 같은 뜻으로 바울(고후 4:2, 갈 5:7, 엡 4:24)과 요한(요 8:32, 16:13, 요일 3:19)도 사용하고 있다. “이는 구약에서는 의와 거의 동일시되었고, 신약 시대에서는 그리스도교의 별명처럼 불리고 있다”(이상근).

결국 야고보는 복음에서 떠나 죄악의 길에서 방황하는 사람들, 즉 배교자들을 돌이키라고 하는 것이다. “진리를 떠나 죽음의 위협 아래 있는”(A. E. Barnett) “사람들을 바로잡아 돌아서게 하는 일보다 더 고귀한 일이 없다”(J. Calvin). 이 일은 과연 최고 최대의 사랑이며, 주님의 구속 사업에 동참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최대의 기쁨을 돌리는 일이다(눅 15:7).

그러므로 우리는 타락한 자들을 다시 회개시키는 일에 수고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 잠언 기자는 “무릇 악인더러 옳다 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요 국민에게 미움을 받으려니와 오직 그를 견책하는 자는 기쁨을 얻을 것이요 또 좋은 복을 얻으리라”(24:24-25)라고 하였다. 또한, 레위기 19:17에는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라고 하였다.

헨리(M. Henry)는 “우리의 모든 노력에 의해서 돌이킬 수 없다 할지라도, 아직 우리는 그를 핍박하거나 파괴시킬 수 없다. 그것은 아직도 하나님의 성령의 도움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배교자나 불신자들을 복음에로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이 점에 대해 예수께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인간 구원을 위한 복음의 역사(1:18, 21)란 성령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위대한 선교사 바울이 바울 된 것은 성령께 사로잡혔기 때문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러한 성령의 임재 또는 동행은 기도에 의해서 가능해지는 것이다(눅 11:13, 행 1:14, 2:1. 참조: .8:17, 19:6. 비교: 행10:44에는 말씀들을 때). 이러한 사실을 터득한 바울은 전도의 문이 열리기를 위하여 기도하였고, 또한 성도들에게도 기도를 부탁했던 것이다(엡 6:19, 골 4:3).

배교자를 돌아서게 하는 자에 대해, 야고보는【20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라고 하였다.

이 구절에서 어려운 문제는 그 영혼은 누구의 영혼을 가리키는 것이며, 또 허다한 죄는 누구의 죄를 지시하는 것인가 함이다. 다시 말하면, 남을 돌이킨 자의 영혼이 구원받는다는 뜻인지, 아니면 권면을 받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선 자가 용서받아 구원받는다는 뜻인지가 문제라는 것이다.

헨리(M. Henry)는 배교자나 불신자를 미혹된 길에서 돌이킨 자가 자신의 영혼을 사망(1:15의 주석을 보라.)에서 구원한다고 한다. 바네트(A. E. Barnett)와 깁손(E. C. S. Gibson)도 잠언 10:12과 베드로전서 4:8을 들어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즉, 사랑이 모든 허물을 가리우고 허다한 죄를 덮는 것처럼, 죄인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자도 그 자신의 죄를 사함 받을 뿐 아니라,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바클레이(W. Barclay)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잘못된 길에서 돌이킨 자, 즉 형제를 구원한 이는 자기 자신의 많은 죄를 가리우게 된 것이기도 하다. 환언하면, 다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자기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것이다(단 12:3, 딤전 4:16).”

계속해서 그는 유대 격언인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의롭게 하는 자는 죄가 그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라는 말을 소개하면서, 다른 사람의 생애에 광명을 가져다 준 사람은 자기 자신도 그것의 혜택을 입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생애를 하나님께 인도한 사람은 자기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과 격리시킬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설명을 더 보충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구원이 자신의 선행-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이키는 일 등-에 의해서 성취된다는 주장을 납득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사죄와 구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자유로운 은총에 의한 것이지, 인간의 노력이나 선행에 의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에 응답하여 배교자나 불신자를 주님께로 돌이키도록 조력할 뿐이지, 그 이상의 일은 할 수 없다. 물론, 죄인을 주님께로 돌아서게 하는 일로 용서받거나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주님의 일에 충성함으로써 상급을 받는 것까지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구원의 조건이 인간의 공덕이 아님을 밝히는 것뿐이다.

또한, 그들이 들고 있는 베드로전서 4:8과 잠언 10:12의 말씀은, 남에게 베푼 사랑의 덕택으로 자신의 죄와 허물이 소멸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속죄적인 사랑이 인간의 죄와 허물을 해결하신다는 뜻이다.

이스톤(B. S. Easton)은 “엄격한 복음적 교훈에 따르면 선행이 아무리 많아도 지극히 적은 죄조차도 속죄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개신교의 해석은 대개 20절 전체가 개종된 인간에게 적용되어야만 한다고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루터(M. Luther)가 아주 정확하게 설명한 것처럼, 20절의 두 마지막 구절은 하나가 아니라, 두 인간을 언급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런 것 같다. 즉, 죄인을 돌이키는 것은 이중적 유익을 준다. 그리고 개종된 영혼뿐만 아니라, 그와 마찬가지로 개종하는 영혼에게도 도움이 된다(잠 24:24-25).”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주장 역시 앞서 논한 이유들에 비추어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러므로 야고보가 의도하는 것은, 죄에서 돌아선 자의 영혼이 사망에서 구원받으며, 허다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이다.54) 다시 말하면, 이미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서게 함으로써 그 죄인들도 구원받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사랑의 행위는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는 일이다. 이 일을 통해서 인간은 하나님께 가장 큰 기쁨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5:19-20의 고찰 결과에 의하면, 야고보는 미혹하여 복음의 도를 떠나 방황하는 배교자나 불신자들을 그 죄와 멸망의 길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서게 함으로써, 그 죄인들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을 받게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일보다 더 시급하고 중대한 일은 없는 것이다.
















저자:崔世昌 목사

   ․1948년 인천광역시에서 출생

   ․감리교 신학대학․동 대학원 졸업

   ․현 풍성 감리교회 시무

   ․협성신학대학교 강사 역임

   ․현 인천여자신학교 교수

   ※저자 연락처:426-3051


■ 저서

   ① 갈라디아서(신약 주석 시리즈)

   ② 에베소서(신약 주석 시리즈)

   ③ 빌립보서(신약 주석 시리즈)

   ④ 데살로니가전·후서(신약 주석 시리즈)

   ⑤ 골로새서·빌레몬서(신약 주석 시리즈)

   ⑥ 디모데전·후·디도서(신약 주석 시리즈)

   ⑦ 로마서(신약 주석 시리즈)

   ⑧ 마가복음(신약 주석 시리즈)

   ⑨ 고린도전서(신약 주석 시리즈)

   ⑩ 고린도후서(신약 주석 시리즈)

   ⑪ 베드로전·후서(신약 주석 시리즈)

   임박한 종말 때의 처신(주석 설교집)

   ㉡ 십자가의 도(주석 설교집)

   ㉢ 복음 선교의 삶(주석 설교집)

   ㉣ 신앙인의 불신앙(주석 설교집)

   ㉤ 원죄(주석 설교집)

   ㉥ 어떻게 부활되나(주석 설교집)

   ⓐ 예수의 비유(바클레이 著, 역서)

   

           신약 주석 시리즈   야고보서         

━━━━━━━━━━━━━━━━━━━━━━━━━━━━━━━━━━━    1979년 10월 10일 1판 1쇄 발행

  1990년  8월 25일 1판 4쇄 발행

  1997년  4월 15일 2판 1쇄 발행

                                            지은이 최  세  창

                                            발행인 이  덕  희

                                            발행처  글  벗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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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편 번호 138-160

                                         ☎ 426-3051, 481-5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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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번호  가 제17-21호(1988. 2. 26.)                 값 8,000원




1) P. Parker,“Teacher” in IDB, Vol, pp. 522-523.


2) L. M. Russel, Christian Education in Mission(Philadelphia: The       Westminster Press), p. 28, 35.


3) Ibid., p. 103.


4) 참조: B. S. Easton은 “당시의 유대교에서 선생(rabbi)이 된다는        것은 그 일을 감당함에 있어서 많은 종류의 경고를 받을 필요가        없도록 아주 길고도 엄격한 연구와 훈련을 받았다.”라고 하였다.


5) G. R. Berry: ‘숲’ 또는 ‘연료’.


6) in 이상근.


7) “Westcott, Lange, Hofmann, Mayor”(in 이상근), 이상근.


8) in 이상근.


9) “Vulgate-‘universitas iniquitatis’, Erasmus, 칼뱅, De Wette”(in        이상근, J. Calvin, H. Alford, 이상근.


10) in 이상근.


11) J. Calvin, R. R. Williams, E. C. S. Gibson, 이상근.


12) E. C. S. Gibson, ‘지옥’(게헨나: γέ-εννα)은 마 5:22, 29, 30, 10:28,       18:9, 23:15, 33, 막 9:43, 45, 47, 눅 12:5에서 언급된다. 주님이 사       용하신 것을 제외하면 이곳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이 말은 구약        의 힌놈의 골짜기(Valley of Hinnom)혹은 힌놈의 아들들의 골짜기       (Valley of the sons of Hinnom)를 그리스도화한 형태이다. … 후       에 지옥의 모습이 되었다...유대인들이 고통의 장소를 지시할 때,        사용했으며 후기 랍비들은 이 계곡을 지옥의 입으로 고정시켰다.


13) in 이상근.


14) in 黑崎幸吉.


15) in 이상근.


16) J. Calvin, 黑崎幸吉.


17) W. Barclay, B. S. Easton, G. Poteat, R. R. Williams.


18) 골로새서 2:3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가지신 분이시라고       하였고; 고린도전서 1:24과 2:7-8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였다.


19) J. Wesley, G. R. Berry, B. S. Easton, 이상근.


20) W. Barclay와 E. C. S. Gibson: 랍비 문서들에 많이 나타나는 표       현이다.


21) in 이상근.


22) J. Wesley, W. Barclay, E. C. S. Gibson, 박윤선.


23) in 이상근.


24) C. L. Milton, “Grace” in IDB, Vol. 2(New York: Abingdon           Press, 1962), p. 468..


25) in W. Barclay.


26) 상동.


27) C. R. Erdman, W. Barclay, R. R. Williams, 黑崎幸吉, 이상근. 참       조: M. Henry, B. S. Easton.


28) in 이상근.


29) J. Wesley, B. S. Easton, A. E. Barnett, 黑崎幸吉.


30) J. Calvin, M. Henry, R. R. Williams, E. C. S. Gibson, B. S.           Easton, 이상근.


31) J. Calvin, C. R. Erdman, 黑崎幸吉, 이상근.


32) in 이상근.


33) 상동.


34) 그리스도교 대 사전(서울: 대한 기독교 서회, 1978, 4판), p. 1085.


35) 비교: W. Barclay와 B. S. Easton은 4, 5월이라고 한다.


36) R. Abba, “Name” in IDB, Vol. 3(New York: Abingdon Press,        1962), p. 500.


37) J. Calvin, W. Barclay, 黑崎幸吉, 이상근, 박윤선.


38) J. Calvin, M. Henry, R. R. Williams, E. C. S. Gibson, 黑崎幸吉,       米田豊, 박윤선, Syriac Version.



39) 그리스도교 대사전, op. cit., pp. 901-903. 이 종파는 16세기초의        종교 개혁 당시 독일, 화란, 스위스 등지에서 일부 과격한 개혁 주       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일으킨 운동의 산물로서, Münzer,            Hübmaier, Denck, Grebel 등이 그 지도자들이다.

       재세례파란 명칭은 유아 세례를 부인하고, 장년이 되어 신앙 고       백을 할 때에 다시 세례를 받아야 온전한 신자가 된다고 주장한        데서 유래했다.

       이들의 공통적인 주장: (1) 성서만이 교회와 생활의 유일한 표       준이 된다. 동시에 성서를 자기 스스로 해석할 수 있는 권리가 있       다고 주장한다. (2) 국가와 교회는 엄격히 분리되어야 하며, 국가       권력이 교회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 (3) 교회는 거듭난 자들의 자       발적 모임으로서 세례와 엄격한 규율에 의해 그 순수성이 유지되       어야 한다. (4) 유아 세례는 비 성서적이다. 폴란드와 스위스 지방       의 재세례파는 침례가 정당한 세례 예식이라고 주장한다. (5) 개체       교회가 목사와 직원을 선출할 권리가 있다. (6) 법정 성서와 관리       취임을 거부한다. (7) 행2:24 이하를 본받아 자발적 공산주의를 주       장한다.


40) Ibid., pp. 1039-1040. 시조인 조지 폭스(G. Fox, 1624-91)의 독특한      회심의 경험을 통해 시작됨. 1647년경에 퀘이커란 명칭이 붙었다.       생활 태도는 열성적이고도 공격적이며 굳굳한 정신력의 발휘를 도      모했다. 그들은 모든 교회의 형식(세례, 십일조, 성찬식 등)을 거부      하고 분노를 가지며, 다만 그리스도와의 내적 교통을 중시한다. 종      교적 경험을 중시하며, 성서 시대 이후의 영감을 주장한다. 사회 개      량에 관심을 갖는다. 1952년 말부터 조직화되기 시작하여 총회로       모이기도 하며, 여기서 장로를 뽑기도 한다.


41) J. Calvin, R. R. Williams, E. C. S. Gibson, 이상근.


42) in J. H. Ropes.


43) 그리스도교 대 사전, pp. 1120-1121. 플리니우스의 편지, Pliny's        Letters 비테니아의 총독 플리니우스 (61?-114?)의 편지집. 트라        야누스 왕의 신임을 받고 문필가로서 명사들에게 공표를 예정한        편지를 보내고, 그것들을 모아서 발표했다. 문체가 화려하고 내용       도 풍부한데 1-2세기초의 교양 있는 로마인의 생활이나 사회상을       아는 귀중한 자료이다. 트라야누스 왕과의 왕복 서신에는(제10권,       110?) 비테니아의 그리스도인들의 처리 문제가 쓰였는데, 초기 교       회의 귀중한 문헌이다. 소아시아 지방의 여러 도시, 농촌에 남녀        노소 계급을 가리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생겨 로마의 종교가 위협       당하고 있음을 기록했다. … 그리스도인은 일정한 날(일요일) 새벽       에 모여 그리스도를 신으로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며, 악한 일, 도       적질, 간음을 안하며, 거짓말하지 않음을 맹세하고, 후에 다시 모       여 음식을 취한다. … 기독교를 위법시하여 관용 정책을 쓰지 않       았다.


44) Ibid., p. 824. (100-165) 초기 크리스트교 변증 철학자이며 순교자      이다. 이교도인 부모 밑에서 사마리아 세겜에서 출생하였다. 청년       시절에 희랍의 학문과 철학을 공부하였다. 후에 유대인 그리스도인      을 만나 크리스트교로 개종하였다. 로마에 크리스트교 학교를 개설      했으며, 저서로 변증론 I, II, 트리포와의 대화가 있다.


45) Ibid., p. 1057. (150/160-220?) 칼타고의 로마 백부장의 아들로 출      생, 처음에 법률과 수사학 그리고 희랍 고전을 배웠으며, 그후 로마      의 법률가로 명성을 떨쳤다. 195-6년경에 크리스트교로 개종하여       신부가 되었으며, 크리스트교와 철학 사이의 무관계성을 주장하였      다. 특히, 교회와 성서와 전승의 권위를 강조한다. 그는 또 “나는       불합리하기 때문에 믿는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내세웠다.


46) IDB, Vol. 2, p. 73.


47) 참조: J. Wesley, J. H. Ropes, R. R. Williams, B. S. Easton, 黑       崎幸吉, 박윤선.


48) op. cit., p. 348. 이 명칭은 히브리어 sanah에서 왔는데 ‘반복한다’      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전승에 의하면 200년경에 랍비 유다 하나시      가 최종적으로 편집 완성한 것이라 한다. 주로 할라카(율법의 문자      적 의미와 그 타당성을 취급한 것)적인 전승 단편을 편집한 것인데      탈무드의 제1부를 구성하고 있다.


49) Ibid., p. 1073.


50) 참조: J. Calvin, C. R. Erdman, W. Barclay, 黑崎幸吉.


51) W. Luthi and E. Thurneysen, Preaching, Evangelical Confession

     , The Lord’s Super in The Local Congregation, trans. by F. J.       Brooke(Virginia: John Knox Press, 1960), pp. 68-69.


52) 그리스도교 대사전, op. cit., p. 319. 종교 개혁의 선구자인 후스의       감화로 모라비아와 보헤미아 지방에서 생긴 개신 교회, 전통적으       로 교육에 열중했고, 현세적인 생활을 떠나 성서에만 근거한 크리       스트교로 돌아가서 엄격한 신앙 규율을 갖고, 일상 생활에서 성도       들의 교제를 실현시키려 했다. 교구는 유럽, 영국, 북미, 남미로 나       뉘고 대부분이 농촌에서 독자적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북미       에 약 200교회, 신도 6만2천(1960 현재).


53) J. Calvin, E. C. S. Gibson, B. S. Easton, W. Barclay, 黑崎幸吉,      이상근.


54) J. Calvin, R. R. Williams, 黑崎幸吉, 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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