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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굿뉴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요한 14,1-6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충실히 살아온 삶의 흔적!
거룩한 수녀님들 연피정을 동반해드리고 있습니다.
시작부터 마침까지 대침묵 속에 피정이 진행되니, 시간이 정말 느리게 가는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선물처럼 주어진 여유로움에 감사하며, 정말 오랜만에 제 발을 천천히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얼굴을 비롯해서 몸 전체는 매일 뽀득뽀득 씻고 관리를 하는 편이지만, 잘 보이지도 않고,
늘 가려져 있는 발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오늘 자세히 보니, 정말이지 발에게 미안했습니다.
보기가 흉할 정도였습니다.
매일 바쁘게 오르락내리락, 달리다시피 살아오다 보니 발바닥은 굳은살이 깊이 박히고, 뭐 한번 제대로 발라준 적이 없다 보니 부르트고 갈라져서 참 보기가 그랬습니다.
그러나 결코 부끄럽지는 않았습니다.
나름 열심히 살아온 흔적이로구나. 백방으로 이리저리 뛰어다닌 흔적이로구나, 하는 마음에 기뻤습니다.
한 본당에서 미사를 봉헌할 때였습니다.
신자들 대부분이 공단에서 일하는 근로자들과 농사짓는 농부들이셨는데, 영성체 때 펼친 손을 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고된 일에 손이 너무나 거칠고 투박했습니다.
사고를 당했던지 손가락 한두 개가 없는 분들도 꽤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끄러워하실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열심히 살아오신 흔적이요, 박수받으셔야 마땅한 훈장이라고 확신합니다.
오늘 노동절인 동시에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입니다.
의아해 하실지 모르겠지만 노동에도 영성이 있습니다.
‘노동의 영성’입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사용하신 용어입니다.
‘노동의 영성’, 그 핵심은 아주 쉽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창조주시며 구세주이신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의 일을 통해 인간과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열심히 노동하셨던 한 인간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출가하시기 전까지 양부 요셉을 따라 장인(匠人)으로서 매일 이마에 비지땀을 흘리며 사셨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일을 통하여 세상을 변화시켜나갈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을 완성시켜나갑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 창조사업을 계승합니다.
따라서 오늘 노동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과제 하나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가치 부여입니다.
그 어떤 일에 종사하든 자신의 일에 중요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자긍심을 지녀야 합니다.
오늘 노동자 성 요셉 기념일을 맞아 세상의 모든 노동자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하루 노동자 성 요셉의 전구에 힘입어 은총 충만한 하루, 새로운 에너지를 충만히 부여받는
행복한 하루가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들이 하시는 모든 일들, 세상을 위해,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 꼭 필요한 일임을 확신하십시오.
어려운 일이 될지 모르겠지만, 내가 매일 되풀이하는 이 일을 통해 내가 성장하고, 내가 성화되며, 내가 하느님 창조사업에 참여한다는 의식을 지니시면 좋겠습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요한 14,1-6
일과 싸우지 않으면 죄와 싸워야 한다
오늘 5월 1일, 교회는 노동자 성요셉을 기념합니다.
세상도 오늘을 노동절로 지냅니다.
그런데 세상이 노동을 바라보는 방식과 교회가 노동을 바라보는 방식은 많이 다릅니다.
세상은 노동을 자주 짐으로 봅니다.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것, 가능하면 적게 하고 많이 받아야 하는 것, 돈만 충분하면 벗어나고 싶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많은 노동이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부당한 임금, 과로, 착취, 경쟁, 인간을 부품처럼 대하는 구조가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죄입니다.
그래서 현대인은 한 가지 결론을 너무 쉽게 내려 버렸습니다.
‘일은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필요악이다.
일은 사람을 망가뜨린다.
그러니 행복은 일하지 않는 데 있다.’ 정말 그럴까요?
오늘 강론의 제목은 이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일과 싸우지 않으면 죄와 싸워야 한다.
이 말은 쉬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가만히 있으면 중립이 되지 않습니다.
밭을 가꾸지 않으면 그냥 빈 땅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잡초가 자랍니다.
방을 치우지 않으면 그냥 방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먼지가 쌓입니다.
마음도 그렇습니다.
손이 선을 만들지 않으면 상상력이 악을 만듭니다.
시간이 하느님께 봉헌되지 않으면 시간이 나를 잡아먹습니다.
일은 저주가 아니라 창조 때부터 주어진 소명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도 일하시니 당신도 일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이것을 가르칩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죄 이후의 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땀 흘림의 고통은 죄 이후에 심해졌지만, 일 자체는 타락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노동은 저주가 아니라 하느님을 닮기 위한 소명입니다.
다만 자기 자신의 영광을 위한 일은 타락의 길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는 일부터 말입니다.
왜 일을 하면 하느님을 닮을까요? 행복은 자존감입니다.
그런데 자존감은 ‘나는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라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참된 자존감은 ‘나는 하느님과 닮았어.’에서 옵니다.
하느님은 영원히 창조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있는 부모는 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요셉은 일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가장 닮은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순명은 감상적인 순명이 아니었습니다. 책임지는 순명이었습니다.
먹이고, 보호하고, 데리고 피신하고, 다시 돌아오고, 집을 세우고, 일해서 가족을 살리는 순명이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만일 요셉이 일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하느님께서 성모님과 예수님을 그에게 맡기셨을까요? 물론 하느님께서 사람을 선택하시는 기준은 세상의 능력주의와 다릅니다. 하느님은 부자를 고르시는 것도 아니고, 세상적으로 성공한 사람을 고르시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에게 책임을 맡기지 않으십니다.
은총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지만, 인간의 책임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선택은 마술이 아닙니다.
은총은 게으름을 거룩함으로 포장하지 않습니다.
먼저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용서받는 존재이기에 용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단지 마음씨가 좋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뜻 앞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신비 앞에서 도망칠 수도 있었습니다.
헤로데의 위협 앞에서 주저앉을 수도 있었습니다.
이집트 망명 생활의 고단함 속에서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움직였습니다.
천사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하자 그는 일어났습니다.
“아기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하자 그는 밤에 일어나 떠났습니다.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 하자 다시 움직였습니다.
요셉의 순명은 늘 발과 손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출처: 마태 1,20-24; 마태 2,13-23)
사랑은 감정만으로 사람을 지키지 못합니다. 사랑은 일해야 합니다.
아기를 사랑한다면 밤에 일어나야 합니다.
부모를 사랑한다면 병원에 모시고 가야 합니다. 공동체를 사랑한다면 청소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맡겨진 일을 해야 합니다.
일하지 않는 사랑은 결국 말뿐인 사랑이 됩니다.
다윗의 이야기가 이것을 무섭게 보여 줍니다. 성경은 다윗의 죄를 소개할 때 이상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해가 바뀌어 임금들이 출전하는 때가 되었다.” 그런데 다윗은 전쟁터에 나가지 않고 예루살렘에 머뭅니다.
그는 저녁때 잠자리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밧 세바를 봅니다.
그리고 죄가 시작됩니다.
간음, 거짓말, 살인, 은폐. 한순간에 무너진 것 같지만 사실 그 시작은 눈이 아니었습니다. 시작은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싸워야 할 전쟁터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싸우지 말아야 할 욕망과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졌습니다. (출처: 2사무 11장)
해야 할 일을 미루고 누워 있을 때 마음은 맑아집니까?
아니면 휴대폰을 만지며 비교하고, 불평하고, 음란한 상상에 빠지고, 남을 판단하고, 자기연민에 젖습니까?
몸은 쉬는데 영혼은 더 피곤해지는 경험을 우리는 압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은 창조하고, 돌보고, 사랑하고, 내어줍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그는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본성에서 멀어집니다.
저도 사실 쉬는 날도 무엇을 해야 할 지 하루 일과를 짜 놓습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으면 선택에 먹힙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는 그의 단편 「악마와 빵 조각」(1886)에서 노동과 죄의 상관관계를 기막히게 묘사했습니다.
한 가난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그는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가진 것도 많지 않았고, 먹을 것도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는 자기 밭을 갈았습니다. 자기 손으로 땅을 일구고, 자기 땀으로 하루를 버티는 사람이었습니다.
잠시 쉬려고 밭둑에 앉아 빵 조각을 먹으려 했는데, 그 사이에 작은 악마가 몰래 다가와 그 빵 조각을 훔쳐 갑니다.
작은 악마는 기대했습니다.
‘이제 저 인간이 화를 내겠지. 욕을 하겠지. 하느님을 원망하겠지.
그러면 내가 이긴 것이다.’
그런데 농부는 빵이 사라진 것을 보고도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져간 자가 배가 고팠나 보지.”
그리고 허허 웃고는 다시 밭으로 돌아가 일을 시작합니다.
이 장면이 중요합니다.
왜 농부는 악마에게 지지 않았습니까?
빵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마음이 한가해서도 아닙니다.
그는 일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 손으로 오늘을 감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 요셉의 두 가지 특징은, 의로움과 일을 사랑함입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의 가르침을 오늘의 말로 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노동은 죄를 씻는 세례수와 같고, 게으름은 죄를 낳는 자궁과 같다.
일하는 손은 천사의 손이 되고, 노는 손은 악마의 놀이터가 된다.
그대가 땀 흘릴 때, 하느님께서는 그대의 땀방울 속에 당신의 은총을 섞어 주신다.”
(출처: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창세기 강론』의 노동과 나태에 관한 교부적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의역)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14,1-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1절)라고 시작한다.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을 앞두고 두려움과 혼란에 휩싸였지만, 주님은 그들에게 믿음과 희망을 놓지 말라고 권고하신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2절). 아버지의 집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머무는 친교를 의미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쫓겨남도 없고, 멸망함도 없는 참된 거처를 가지게 된다. 곧 하느님 당신 자신이 우리의 거처가 되신다.”(In Io. Evang. Tract. 67,2).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믿음과 사랑 안에서 준비하는 삶은, 단지 미래의 보상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금 여기서 그 거처를 짓는 행위이다. 주님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3절)라고 약속하신다. 그분이 곧 영원한 생명이시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는 이렇게 강조한다. “그리스도는 생명이시다. 그분을 받아들이는 이는 더 이상 죽음 안에 있지 않고, 그분과 함께 거처하게 된다.”(In Ioannis Evangelium, lib. 9). 곧, 우리의 거처는 그리스도 자신이며, 그분 안에서 하느님과의 친교가 완성된다.
토마스의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6절). 여기서 길은 거룩한 삶, 진리는 교회의 신앙, 생명은 영원한 행복을 뜻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나는 길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진리이다. 나를 알지 않고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생명이다. 나와 함께하지 않고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In Io. Evang. Tract. 69,2). 즉, 예수님은 단순히 길을 보여 주시는 분이 아니라, 길 그 자체이시며, 우리가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시다.
교회는 이 진리를 끊임없이 선포해 왔다. 교회 헌장은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사람 사이의 유일한 중개자이시다. 그분 안에서, 그리고 그분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간다.”(14항). 우리가 아버지께 도달하는 방법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사랑의 행위로써 길을 걷고, 진리를 받아들이며, 생명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성 이레네오가 말하듯이, “살아 있는 인간이 하느님의 영광이며, 인간의 생명은 하느님을 보는 것이다.”(Adversus Haereses IV,20,7). 그리스도는 이 길과 진리와 생명의 원천으로 우리를 아버지께 인도하신다. 우리는 종종 제자들처럼 길을 잃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고 느낀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우리에게 길, 진리, 생명으로 오셨다. 우리의 불안을 믿음으로 바꾸어 주시고, 우리의 길을 생명으로 이끄시어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기며 살기 위해, ‘평범해서는 안 된다.’, ‘특별해야 한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평범하지 않은 특별함이 삶 안에서 커다란 스트레스로 다가옵니다. 이를 위한 에너지 소비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남과 다르게 살기 위해 특별한 ‘나’를 찾지만, 사실 ‘나’라는 그 자체로 특별하고 다른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도 충분히 다르고 특별하게 살 수 있습니다. 굳이 가식이나 위선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남과 경쟁하고 비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힘 빼고 ‘나’로 살면서 즐거우면 됩니다.
어렸을 때 미술 시간이 정말 싫었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크레파스가 나빠서, 도화지에 문제가 있어서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곧 알 수 있었습니다. 원래 못 그린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무리 좋은 크레파스나 도화지가 있어도 마찬가지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미술 시간이 가장 싫었습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 신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너무나 행복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미술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못 하는 것이 있음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남들보다 못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나만의 것도 있기에 충분히 괜찮습니다. 더구나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힘센 사랑의 주님께서 우리와 늘 함께하십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스승의 떠남과 베드로의 배반 예고(13장)로 인해 불안과 두려움에 휩싸인 제자들을 향한 위로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3년 동안 모든 것을 걸고 따랐던 스승이 떠나간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 중 하나가 배반할 것이라는 말씀에 영적,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런 제자를 향해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처럼,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게 됩니다(요한 14,6 참조). 주님의 사랑 외에는 우리의 구원이 있을 수 없음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삶을 살면서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에서 방향을 잃고 마음이 산란해지곤 합니다. 그때 세상은 여러 가지 화려한 길과 방법론을 제시하면서, 특별한 ‘나’가 되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말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방법으로도 특별한 ‘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저 조금 다를 뿐입니다.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통해서만 특별한 ‘나’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 온전히 시선을 고정하고 그분의 뒤를 묵묵히 따를 때, 영원한 생명의 길로 나아가는 진정으로 특별한 ‘나’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아무리 강한 사람도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해야 더 좋은 결과를 얻는다(크리스 노블).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 13,55)
초록의 5월은
드러내지 않는 삶처럼
성모님과 성 요셉을
참 많이 닮았습니다.
진정한 인간 관계는
새롭게 바라보는 데서
시작됩니다.
요셉의 직업은
목수였습니다.
예수님 역시
그의 삶 안에서
노동을 배우셨습니다.
평범한 노동 속에
깃든 사랑이 곧
하느님의 구원입니다.
사람의 가치는 보이는
신분이 아니라
살아낸 사랑에 있습니다.
이름 없이, 빛나지 않아도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든 노동은
하느님 앞에서 이미
가장 존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노동과
일상의 평범함 속에
자신을 숨기시고,
그 안에서 구원을
이루십니다.
지금 이 순간의
성실함과 사랑이
가장 깊은 기도가
됩니다.
성 요셉의 삶은
드러내지 않고,
주장하지 않으며,
그저 자신의 자리에서
충실히 살아가는
삶입니다.
가장 충실한 삶이
가장 깊은 것을
이끕니다.
오늘의 평범한 하루를
사랑으로 살아낼 때,
그 삶은 이미 가장 좋은
봉헌의 삶입니다.
성 요셉의 노동은
사랑으로 살아낸
하느님께 드리는
침묵이며 기도입니다.
모든 노동이
존중받길 기도합니다.
세상의 모든
노동의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는
이들을 기억합니다.
※카톡 신부님 - 굿뉴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13,55)
'땀의 찬가인 노동!'
오늘 복음(마태13,54-58)은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무시를 당하시는 말씀'입니다.
돌아가시기 3년 전부터 행하신 예수님의 활동을 '예수님의 공생활'이라고 합니다. 이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활동인 '땀의 찬가'입니다.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마태13,54ㄷ-55ㄱ) 라는 예수님 고향 사람들의 놀람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보지 못하고 노동자의 아들로만 보았습니다.
성모성월이며 가정의 달, 생명의 달인 5월 첫 날은 예수님의 양아버지이신 노동자 성 요셉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성 요셉은 직업이 목수인 노동자였습니다. 그러니 예수님도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는 목수의 아들이셨고, 노동자의 아들로 사셨습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15,1)
하느님 아버지의 창조 활동을 전하는 오늘 독서(창세1,26-2,3)가 이를 말해주고 있고, 아들 예수님의 땀의 찬가인 공생활이 이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땀의 찬가인 노동!'
'노동'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의 창조 사업을 계속 이어가고 있는, 하느님의 창조 질서를 보존하는 신성한 구원 활동'입니다.
그런데도 신성한 의미를 지닌 노동의 가치가 무시되고 있고, 노동자들이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면서 무시 당하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의 수호자이신 성 요셉과 세상 구원을 위해 정말 열심히 땀을 흘리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열심히 나와 너 그리고 모두의 생명을 위해 땀 흘리는 노동자들이 됩시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일을 성실하고 충실하게 완수하여 마침내 악속된 영원한 생명의 잔치에로 함께 들어가도록 합시다!
"주님, 저희 손이 하는 일에 힘을 실어 주소서."
복음말씀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약속을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13,26-33
그 무렵 바오로가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에 가 회당에서 말하였다.
26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27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죄하여,
안식일마다 봉독되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
28 그들은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목도 찾아내지 못하였지만,
그분을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하였습니다.
29 그리하여 그분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그들이 그렇게 다 이행한 뒤,
사람들은 그분을 나무에서 내려 무덤에 모셨습니다.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 뒤에 그분께서는 당신과 함께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이들에게
여러 날 동안 나타나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분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32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33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시편 제이편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