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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2. 묵상글 (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 맑은 정신으로 살기 .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아직 / 05:34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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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2.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5.09.02 05:31
- 맑은 정신으로 살기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맑은 정신에 관해서 얘기합니다.
그래서 맑은 정신이 뭘까 생각해 봅니다.
앞뒤 문맥을 보면 잠에 취해 있지 않고 술에 취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맑은 정신이란 잠과 술에 취해 있지 않은 정신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더 큰 맥락은 빛과 어둠, 낮과 밤의 맥락입니다.
정신이 빛 안에 있고 낮의 상태여야 하고,
어둠의 밤 중에 있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빛이란 빛이신 하느님이고
낮이란 빛이 있는 상태 곧 은총의 상태입니다.
반대로 밤과 어둠이란 빛이신 하느님이 계시지 아니하여
은총 가운데 머물지 않고 죄의 어둠 가운데 머무는 상태입니다.
어두운 밤에 우리가 하는 것은 잠자는 것이고,
잠자야 할 밤에 잠자지 않으면 욕망 때문일 것입니다.
실로 요즘 특히 젊은이 가운데 거꾸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야 할 밤에 뭘 하고 사람을 만나고 일해야 할 낮에 잡니다.
암약한다고 하는데 암약(暗躍)이란 말이 밤에 활발히 활동하는 거지요.
중독자일 경우 낮술을 먹기도 하지만 밤에 술을 먹고,
술에 취해 밤에 욕망을 실현하고,
밤에 음모를 꾸미고 범죄를 저지릅니다.
마찬가지로 정신도 밤과 어둠 가운데 있으면 안 됩니다.
밤과 어둠 가운데 있는 정신을 우리는 썩어빠진 정신이라고 합니다.
정신이 썩은 겁니다.
올바른 정신은 나간 겁니다.
바오로 사도와 프란치스코는 이것을 일컬어
육의 정신(spirit of the flesh)이라고 하는데
주님의 영(Spirit of the Lord)과 반대되는 정신입니다.
어제부터 루카 복음을 읽는 우리가 어제는
성령이 주님 위에 내리셨다는 복음을 읽고
오늘은 주님께서 성령으로 더러운 마귀의 영을 쫓아내는 복음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더러운 마귀의 영(spirit of an unclean demon)이란 어떤 영입니까?
세속에 점령당한 영이고, 당연히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맑은 영이 아닙니다.
빛이신 주님의 진리와 주님의 영 가운데 있지 않고,
빛이신 주님과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며
세속의 어둠에 머물고 안주하려는 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속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속 가운데 살고 있는 프란치스칸들을 재속프란치스칸이라고 합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는 거지만 세속 가운데 살고 있는 재속프란치스칸들이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빛의 자녀요 대낮의 자녀로 살아가려면
얼마나 어렵고 깨어 있으려고 얼마나 애를 써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분들이 무척 존경스럽고 그분들에게 많이 도전받는 저입니다.
어쨌거나 우리 모두 깨어 있는 정신, 맑은 정신으로 살아가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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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부님의 23년 강론글 먼저 게시합니다. <05:30>
연중 22주 화요일-빛의 자녀로 살기
2023.09.05 04:53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빛이나 낮의 자녀는 어떤 사람이고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리고 밤이나 어둠에 속했다는데 밤이나 어둠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절망의 상태 그러니까 희망이 전혀 없어 앞이 캄캄한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요?
만약 이런 뜻이라면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은
절망에 빠진 사람이 되겠습니다.
옛날에 ‘어둠의 자식들’이란 소설이 인기를 끌었고 그래서 영화화되기도 했지요.
여기서 어둠의 자식들이란 윤락과 온갖 범죄가 들끓는 뒷골목사람들을 일컫는데,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어둠도 이렇듯 죄의 세계를 말하는 것일까요?
그런 뜻이 없지 않지만 오늘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는 어둠의 자식이란
빛 속에 있지 않은 사람들을 일컫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고,
빛이란 빛이신 그리스도를 일컫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과 연결하면 주님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악령과 같은 존재입니다.
어제도 봤듯이 주님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분인데
악령은 주님을 구원자가 아니라 멸망시키러 오신 분으로 여기고
그래서 자기와 아무 상관하지 말고 떠나가달라고 합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진짜 어둠은 빛이신 주님 안에 있지 않음입니다.
절망이나 죄의 어둠도 실은 빛이신 주님 안에 있지 않은 결과입니다.
주님 안에 있지 않을 때 우리는 절망하게 되고,
주님 안에서 살지 않을 때 우리는 죄의 자식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거부하는 어둠의 자식이 아니라,
그리고 어둠에 털버덕 주저앉아있는 자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빛의 자녀로 살아가고픈 뜨거운 열망이 있어야겠지요.
그런 열망에서 저는 오늘 화답송의 시편을 사랑하고
이 시편 가사에 곡을 붙이기도 했는데
저나 여러분 모두 시편이 노래하는 그런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라네.
저는 산 이들의 땅에서, 주님의 어지심을 보리라 믿나이다. 주님께 바라라.
힘내어 마음을 굳게 가져라. 주님께 바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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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2.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 승리의 주님의 전사(戰士)들
“영적(靈的) 전쟁”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27,1)
이런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백전백승, 천하무적의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어제의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꼭 강론에 남기고 싶었습니다. 때로 일기쓰듯 하는 강론인데 오늘이 그렇습니다. 어제 서울교대 8회 반 동창 친구들 11명을 만났습니다. 1970년 8월 현역입대전 함께 공부했고 그이후 교직생활은 물론 수도생활중, 2025년 지금까지 한번도 못만난 친구들이니 무려 55년만입니다. 그때는 20대 초였고 지금은 70대 후반에 들어선 친구들입니다. 기적이자 은총의 열매같은 만남의 선물이었습니다.
저의 불편을 배려하여 별내역 근처의 음식점에서 만나 식사했고, 이후 차로 10분 거리인 제 정주처인 요셉수도원을 방문해 오후 4시 30분까지 제집무실에서 환담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도원에 오자마자 친구들이 마련해온 꽃다발은 성모님 앞에 놓았고, 모두 성전에 들어와 잠시 기도시간도 가졌습니다.
가톨릭신자 다섯에 개신교 장로들을 포함 1명 불교 신자를 제외한 모두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었습니다. 한 친구딸은 14년전 수도원 피정때 제게 면담성사후 제 친필로 싸인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책을 선물받았다는 내용도 후에 전해 주었습니다.
수도원 성전에서 나와 정원에서 사진찍은후 집무실에 들려 행복기도문을 나눠주고 제가 읽고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음미했습니다. 이어 제 수도생활을 요약한 또 전부가 담긴 좌우명 기도문, “하루하루살았습니다”를 돌아가며 읽었습니다. 그리고 휴대폰마다 <하늘과 산>의 수도원 로고를 붙여줬고 설명도 분명히 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많이 감동했습니다. 평생 초등학교에 선생님으로 몸담았던 친구들이라 초등학생처럼 맑고 순수한 모습에 언행들이었습니다. 고분고분 말 잘 듣기가 70대 후반에 손주들을 둔 할아버지 친구들인데 그대로 초등학생같았습니다. 정말 어렵던 시절 1969-1970년까지 교대 2년동안 동고동락했던 학우이자 형제이자 전우같은 동창들이었습니다.
또 놀라운 것은, 1970년대초 20대때 가난과 불편으로 뾰족했던 각자 고유의 부족한 모습들이 <나라의 발전>과 더불어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 또 치유받아 둥글둥글 원만하고 평화롭게 변한 모습들이 서로 비슷하게 닮은 형제들 같았습니다. 서로간 55년동안 우정을 나눴기에 화기애애한 대화 모습도 참 편안해 좋았습니다. 영적전쟁 치열했던 세상 한복판에서 상처받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모습이 흡사 영적전쟁에 승리한 주님의 전사들 같았습니다.
떠나고 나서도 향기처럼 남아있는, 또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 잠자리 들기전까지 마음을 진정시켰습니다. 그렇습니다. 특히 믿는 이들에게 삶은 영적전쟁이요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어제 공생애가 시작되자 마자 출사표를 던진 예수님께 현장 영적 전투가 시작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하느님의 전사, 예수님입니다.
첫 번째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니 그대로 영적승리를 상징합니다. 오늘날 역시 영적전쟁의 인간현실은 여전히 계속됩니다. 아니 더욱 치열해 지는 현상이나 자살자들이나 곳곳에서 정신질환으로 많이 고통을 받는 것만 봐도 알수 있습니다. 더러운 영들은 다양하기가 한둘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망과 꿈을 잃고 갖가지 더러운 영에 들려 내외적 분열과 불화, 상처의 아픔에 시달리는 지요!
답은, 영적승리와 내외적 치유의 길은 단 하나 하느님의 전사 예수님과의 만남뿐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으니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축출 과정을 통해 주님의 전사로서 예수님의 권위의 정체가 잘 드러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고백하는 더러운 영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니가라.”
꾸짖으시니, 마귀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혼비백산 달아납니다. 예수님의 통쾌한 영적승리입니다. 그러자 이를 목격한 사람들은 몹시 놀라 고백합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여기서 권위는 희랍어로 “엑스오우시아” 즉 “존재로부터 나오는(ex-ousia)”것을 뜻하며, 라틴어로 ‘아욱토리타스(auctoritas)’는 “증가시키다’ 라는 동사 ‘아우게레(augere)에서 유래합니다. 그러니 참 권위는 하느님 중심으로부터 오는 악령을 제압하는 힘의 권위, 이웃을 살리는 권위, 치유하는 권위, 성장시키는 권위, 섬기는 권위,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답게 하는 권위, 어른이 되게 하는 권위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권위는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양의 노력과 더불어 내적중심의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저절로 승복하게 하는 선물같은 권위임을 깨닫습니다. 권위주의는 나쁘지만 참권위는 공동체 삶에는 필수입니다. 권위있는 어른이, 부모가, 교사가, 장상이, 성직자가 절실한 혼란한 시절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복음의 마귀들린 사람은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지 않을 때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그러니 삶의 중심에 살아 계신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전사로 주님과 우정의 관계를 날로 깊이할 때 영육의 건강과 더불어 권위있는 삶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그대로 닮은 주님의 전사, 바오로의 말씀이 주님의 전사로서 우리의 신원을 분명히 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니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혼자의 영적 전투가 아니라 더불어의 영적 전투입니다. 그러니 삶의 중심에 그리스도 예수님을 모시고 서로 영적 전우로서 영적 전우애를 발휘하여,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저마다 성장할 수 있도록 서로 영적 버팀목이 되는 주는 일이 정말 중요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하고 영적승리의 권위있는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네.“(시편27,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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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2.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희년선포”에 이어지는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이 전하는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있는 어촌 ‘카파르나움에서의 하루’라 일컬어지는 부분의 시작입니다. 그것은 안식일에 성전에서 마귀를 쫓아내는 일이었는데, 루카복음에 나오는 21개의 이적 중에 첫 번째의 이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르침’과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의 ‘치유’를 통해서 ‘메시아로서의 당신의 권위’를 드러내십니다. 사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은 이미 앞에서 ‘예수님 탄생예고 장면’(1,32.35)과 ‘세례 장면’(3,22)에서 선포되었는데, 여기서는 마귀들의 입을 통해 선포됩니다(4,34.41).
그런데 목격자들이 놀란 것은 구마치유가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곧 그분의 ‘말씀의 권위’였습니다. ‘권위 있는 한 마디 말씀’이었습니다. 곧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 4,35)라는 말씀에,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루카 4,35).
사실, 인간은 악마의 혀에 속아 범죄 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악의 지배 아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와를 속였던 악마의 그 혀 놀림을 중지시키고, 그에게서 쫓아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첫 번째 기적인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치유’는 악마의 지배로부터 인간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는 구원의 표징이 됩니다.
사실, 악마를 쫓아내는 일은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 구마자들도 그러한 일은 해 왔습니다. 사람들이 놀라워했던 것은 단지 악마를 쫓아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놀랐던 것은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곧 말씀이 이루어지는 권능과 힘을 지니고 있었기에 “권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합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이 나가지 않는가?”(루카 4,36)
“권위”(exousia)란 ‘힘’이란 뜻으로, ‘발설된 말씀이 이루어지는 힘’을 말합니다. 곧 예수님의 말씀에는 ‘하느님의 힘’이 실려 있어, 말씀하신대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이 예수님의 신적 권능, 곧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구마자들과는 달리,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면서 당신 스스로의 “말씀”으로 명령하실 뿐, 다른 누구의 이름을 빌리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바로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교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온갖 거짓의 혀 놀림을 멈추고, 어둠을 몰아내야 할 일입니다. 바로 우리 주님의 “권위 있는 말씀”의 힘으로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루카 4,34)
주님!
진리를 받아들이고 믿는 자 되게 하소서.
진리를 따르며 받드는 제자가 되게 하소서.
진리이신 당신으로 새로 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소서.
하여, 관계 맺는 모든 것 안에서 당신의 거룩한 이름이 빛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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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2.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75년에 제작된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단지 한 사람의 탈출이 아닌, 자유와 존엄, 인간의 내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제목을 빌리자면, 우리의 신앙 여정 또한 ‘둥지’에서 시작해 ‘하늘을 나는 새’로 완성됩니다. 둥지는 생명의 보금자리이자, 이윽고 세상을 향해 날아오르는 준비의 공간입니다. 둥지는 곧 공동체입니다. 엄마 새가 새끼에게 먹이를 주며 키우듯, 신앙의 공동체는 우리를 보호하고 자라게 합니다. 그러나 둥지에만 머물 수는 없습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날개를 펴고 비상해야 합니다. 새로운 둥지를 찾아야 하고, 그 둥지에서 또 다른 새들이 날아오를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시작된 ‘줌으로 하는 신앙 특강’은 그러한 새로운 둥지의 표징입니다. 닫힌 성당, 단절된 공동체, 막힌 신앙의 흐름 속에서도 몇몇 이들이 작은 디지털 둥지를 만들었습니다. 플로리다, 뉴욕, 보스턴, 버지니아, 토론토에서 모인 이들이 서로의 열정을 모아 줌이라는 창을 통해 신앙의 불씨를 지켰습니다. 당시 저는 미주가톨릭 평화신문에서 사목했습니다. 그분들이 저를 찾아왔고, 저는 기꺼이 그분들이 활동할 수 있는 둥지가 되어 주었습니다. 줌으로 하는 신앙 특강을 신문에 공지하였고, 평화신문의 이름으로 포스터를 제작하였고, 특강이 끝난 후에는 신문에 기사로 만들었습니다. 어느덧 5년이 흘렀습니다. 지난 5월 저는 북미주 한인 사목 협의회 대표를 맡게 되었습니다. 줌으로 하는 신앙 특강 팀에게 새로운 둥지를 제안했습니다. 북미주 한인 사목 협의회 소속으로 줌으로 하는 신앙 특강이 함께 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팀원들은 함께 논의하였고, 그렇게 또 저를 찾아왔습니다. 북미주 한인 사목 협의회는 줌으로 하는 신앙 특강을 후원하고 신앙 특강의 프로그램은 북미주 한인 사목 협의회의 활동이 될 것입니다. 그 둥지는 이제 북미주 한인 사목 사제 협의회라는 더 넓은 지붕 아래로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분들이 단순히 지식의 축적을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실천을 위한 자리였고, 구체적으로는 말씀을 배우고 삶에 옮기기 위한 여정이었습니다. 단순히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르침을 살아내고자 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마귀도 예수님을 압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도 하느님의 뜻을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면서 따르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들의 지식과 권위로 하느님의 길을 막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물음이 떠오릅니다. “나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보다 “나는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가?”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진리는 주관적 진리이며, 존재 안에서 살아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지식이 아니라 존재 전체로 살아낸 실천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지식은 때로 명예와 권력을 좇으며 십자가를 외면하게 합니다. 그러나 실천은 고통과 외로움을 감수하면서도 사랑을 선택합니다. 신앙은 정보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말했습니다. “복음을 전하십시오. 필요하면 말을 사용하십시오.”
우리는 신앙의 둥지에서 자란 새끼 새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날개를 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누군가의 둥지가 되어 줄 때입니다. 나의 지식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나의 경험이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며, 나의 기도가 누군가의 날개가 되는 순간, 그 자리는 이미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시편의 말처럼,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을 우러러보는 삶”은 곧 지식에서 실천으로, 둥지에서 날아오름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순례입니다. 줌으로 하는 신앙 특강 팀이 그 둥지에서 다시 하늘로 날아올라,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하늘을 열어 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들 또한 오늘도 실천을 선택하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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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2.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부활의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 of the Resurrection)!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2025년 9월 1일 월요일- 서른여섯 번째 주간 (호명환 번역): 현존 수양
로렌스 수사의 기도 방식은 단순하며 사랑이 가득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매일 묵상은 그리스도교 관상 전통에 뿌리를 두고 리처드 로어와 CAC 운영진, 그리고 객원 교수들의 묵상 글을 제공해 주어 우리의 영적 수양을 심화시켜 주고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동정(compassion)을 구현하도록 도와줍니다.
CAC의 We Conspire(우리는 함께 숨을 쉽니다.)는 로렌스 수사(Brother Lawrence: 1611-1691)의 삶과 가르침에 대해 소개해 줍니다. 그의 단순하고 겸손한 삶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느님 현존을 수행"하는 데 있어 크나큰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의 지혜는 우리가 만일 우리의 정신을 차분히 하고 우리의 마음을 온전히 내려놓는 법을 배운다면 매 순간 하느님과의 신성한 연결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해 줍니다.
17세기 중반 니콜라스 허만(Nicholas Herman)이라는 이름의 한 남성이 프랑스 파리의 가르멜 수도원에 입회하였습니다. 유럽의 30년 전쟁에 참전하여 싸우다 부상을 당해 다리에 지속적인 고통을 느끼던 그는 "부활의 로렌스 형제"라는 수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도원 주방에서 일하다가, 마침내 주방장이 되었습니다. 냄비와 프라이팬의 쨍그랑거리는 소음 속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분주한 시간에도 로렌스 수사는 하느님 현존에 대한 의식(awareness)으로 돌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단순한 기도 방법을 수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 기도를 '하느님 현존의 수양'이라고 불렀으며, "가장 신성하고, 가장 활력이 넘치고, 가장 쉽고, 가장 효과적인 기도"라고 설명했습니다. [1]
로렌스 수사의 기도 방식은 너무 단순해서 자칫 잘못하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 매 순간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의식(awareness)을 키우며 그 의식에 우리의 정신을 모두 집중하는 것입니다. 로렌스 수사는 기도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신성한 현존을 향한 자기들의 지향을 살펴보게 해 주는 기도문을 사용하여 외라고 권고합니다. 예를 들어, "저의 하느님, 저는 전부 당신의 것입니다." 혹은 "사랑의 하느님, 저는 온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혹은 "사랑이시여, 제 안에 새로운 마음을 창조해 주소서." 하고 기도하거나, 그 자리에서 사랑이 담긴 다른 어떤 문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2] 하느님의 신성한 현존 수양은 때때로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계신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해" 그리고 "그분의 은총을 맛보기 위해" 그저 단순하게 잠시 멈추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3] 그것은 우리가 언제나 하느님께 온전히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며 평화로운 마음으로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로렌스 수사는 우리에게 깨우침을 주는 놀라운 선생입니다. 그는 전쟁과 전염병, 가난을 견디며 살았습니다. 그는 불안감의 고통을 겪기도 했고 전쟁에서 부상을 당하는 고통도 겪었으며 다양한 모욕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멍청한 미련퉁이"라고 부르기까지 했습니다. 그의 다리 통증이 너무나 심해서 수도원 장상은 그에게 20년간의 부엌 일을 마치고 샌들을 수선하는 일을 맡겼습니다. 그렇지만 번역가이자 CAC 핵심 교수진인 카르멘 아세베도 버처(Carmen Acevedo Butcher)는 그를 다음과 같이 찬미합니다. "삶의 모진 시련들에 대해 탁월하고 차분하게 대응한 그의 삶은 이 겸손한 수사를 현존 기도에 있어 시간이 검증한 접근 가능하고 인간적인 멘토가 되게 해 주었습니다." [4]
로렌스 수사에게는 고통 그 자체마저도 하느님의 신성한 현존을 수양하는 데 자양분이 됩니다. 우리는 로렌스 수사가 쓴 많은 영적 금언과, 다른 이들에게 써 보낸 편지들, 그리고 로렌스 수사에게서 배우는 데 열성을 다했던 조셉 부포트(Joseph Beaufort)라는 이름의 수사와의 인터뷰들을 통해 그의 자애롭고 온화한 증거의 삶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건강에 문제가 생겨 고통을 겪는 이웃 수도원의 한 수녀에게 보낸 편지에서 로렌스 수사는 현존 수행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신성한 사랑이 고통스러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 준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죽음에 임박하여 걸을 수조차 없었던 때에도 로렌스 수사는 하느님을 사랑 가득한 어버이로 마음 깊이 바라보았고, 친구요 어버이신 신성한 하느님께서 우리를 끌어안아 주실 때 "모든 괴로움은 사라지고 오직 감미로움만 남는다."고 확언하였습니다. [5]
우리 공동체 이야기
로렌스 수사의 소책자는 제가 소유한 가장 오래된 물건입니다. 저는 10대 때에 그 책을 제 할머니의 서재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제 삶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현존을 인식하며 깊은 영감과 무한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할머니가 1972년에 이 책을 어머니에게 주셨고, 어머니도 여러 해 후에 이 책을 저에게 물려주셨습니다. 이 소중한 소책자는, CAC가 오늘날도 저에게 위로를 주고 있듯이, 제 삶의 여러 시기에 저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Bridget W.
References
[1] Nicolas Herman, Brother Lawrence of the Resurrection, Practice of the Presence, trans. Carmen Acevedo Butcher (Broadleaf Books, 2022), 54.
[2] Practice of the Presence, 54.
[3] Practice, 142.
[4] Practice, 29.
[5] Practice, 117.
Adapted from “Practicing the Presence,” CAC’s We Conspire, January 2025.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Bruce Tang, untitled (detail), 2019, photo, Japan,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지금 이 순간과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면, 거룩함이라는 것이 단순하고 평범한 리듬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는 웅장한 대성당이 필요없고, 다만 주방 식탁만 있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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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2.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예수님이 누구신지 잘 알기는 하는데.... 그분의 삶을 따르는 것은 마다하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더러운 영과 그 영이 들린 사람 사이가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소리를 지르는 것처럼 이야기가 서술되고 있지만, 그가 외치는 소리를 들어보면 그 말을 하는 장본인은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들어가 있는 더러운 영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러고 나서 그 더러운 영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정의합니다. 마치 신앙 고백이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하는 신앙 고백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1인칭 단수형으로 서술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마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신앙 고백을 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한 번 봅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말들은 다 더러운 영(들)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더러운 영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수님을 자기 맘대로 통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무언가에게 이름을 붙이거나 그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권한(힘)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느님께서는 아담에게 당신이 창조하신 모든 존재에게 이름을 붙이는 힘을 주시면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한을 아담과 공유하십니다.
요즘도, 아시겠지만, 가톨릭 구마사제들은, 구마 예식에 따라, 악마에게 이름을 묻고 나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악마가 들린 사람에게서 그 악마를 쫓아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에 나오는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필사적으로 예수님에 대해 어떤 힘, 즉 통제력을 행사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게레사인들 지방에서 마귀 들린 어떤 남자에게서 마귀들을 쫓아내실 때도 이 마귀들은 비슷한 고백을 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마르 5,7: 마태 8,29; 루카 8,28).
마귀마저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님께 명합니다. 참 묘한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우리도...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고백하기는 하는데, 실제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시는 삶이 우리에게 너무 큰 부담이 될 때가 있지 않습니까?!
루카 복음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겐네사렛 호수에서 예수님께서 물고기를 많이 잡게 해 주신 다음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예수님을 잘 알긴 하는데.... 그분의 삶을 따르는 것은 마다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어떻게든 믿음으로 고백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습니다만, 그분의 삶을 따르는 것은 경우에 따라 마다하고 싶을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아니, 그런 상황이 닥칠 때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우리 마음에서 아예 자취를 감추어 버리기가 일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특별히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듣는 회당에 있었다는 점을 우리는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어떻게 회당에 들어가 있었을까요? 아마도 그때까지 누구도 그 사람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달리 말해, 그 사람은 여느 사람들처럼 때마다 회당에 들어가는 사람 중 하나였을 거라는 말이지요. 우리처럼....
그러나 우리에게는 사도 베드로라는 참 친밀한 본보기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순간 예수님께 자기에게서 떠나가 달라고 요청했지만, 결국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과정에서 그는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악마)이라는 질책을 받기도 하고, 심지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음에도 그는 결국 예수님의 제자로서 거듭 나게 됩니다. 자신의 부족함에도, 자신의 그 많은 죄에도 베드로가 마침내 알게 되었던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놀란 사람들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베드로도 이 진리를 분명히 깨닫고 온전한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일 것입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우리 믿음의 크나큰 본보기인 가장 큰 이유는 그도 우리처럼 약한 인간성을 지녔다는 점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더러운 영들을 당해 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힘으로는 가능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가능합니다!
교황 레오 13세가 하루는 묵상을 하다가 사탄이 하느님과 대화를 하는 환시를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환시에서 사탄이 하느님께 100년 안에 교회를 완전히 파괴할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하느님께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허락을 청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할 수 있으면 해 보라고 허락하셨고요....
그래서 교황은 놀란 나머지 대천사 성 미카엘에게 바치는 기도를 만들어 교우들로 하여금 바치게 했다고 합니다.
저도 매일 아침 이 기도를 바칩니다. 물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우리 교회에서도 이 기도를 별로 바치지 않습니다만....
"성 미카엘 대천사님, 싸움 중에 있는 저희를 보호하소서.
사탄의 악의와 간계에 대한 저희의 보호자가 되소서.
오, 하느님, 겸손되이 당신께 청하오니 그를 강금하소서.
그리고 천상 군대의 영도자시여,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하여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사탄과 모든 악령들을 지옥으로 쫓아 버리소서. 아멘."
하느님께서 어찌하여 사탄에게 교회를 멸망시킬 대담한 요청을 허락해 주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죄로 기울어지는 경향, 에고의 경향을 하느님께서 잘 아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어제 CAC 매일 묵상에서 소개된 로렌스 수사님처럼 시시각각 하느님 현존을 깊이 인식하고 의식하기 위한 수양을 통해 마귀의 유혹에 대항하며 주님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에 정진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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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2.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루카 4,36-37)
안식일에 시작된 새 창조
루카는 옛 창조가 끝난 때에 새 창조가 시작되었음을 알려 주고자, 주님께서 거룩한 치유 행위를 안식일에 시작하셨다고 기록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은 율법 아래가 아니라 율법 위에 계시며, 율법을 폐지하는 분이 아니라 완성하는 분(마태 5,17 참조)임을 보여 준 것이지요. “주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그분의 입김으로 그 모든 군대가 만들어졌네"(시편 33,6)이라고 쓰여 있듯이, 세상은 율법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으로 만들어졌으니까요. 그런즉 율법은 폐지되지 않고완성되며,그로써 잘못되었던 인류가 새롭게 태어납니다.
사도도 말합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콜로 3,9-10; 참조: 에페 4,22.24). 그분께서 안식일에 일을 시작하심으로써 당신께서 창조주임을 보여 주신 것은 적절했습니다. 그분은 이 일과 저 일을 엮어서, 당신이 이미 시작하신 일을 마침내 완수하셨습니다.
-암브로시우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둘째 오솔길】
버림과 그대로 둠
설교 20
버림과 그대로 둠은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
여행 중에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르셨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집으로 모셔 들였다(루카 10,38).
우리 주님이 “서로 사랑하시오”라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성서는 이것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합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나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물고 하느님도 그 사람 안에 머무십니다”(1요한 4, 16). 여기서 요한은 아주 정확히 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시는데 내가 하느님 안에 있지 않고, 내가 하느님 안에 있는데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모든 것이 갈라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하느님 안에 있다면, 나는 하느님보다 못하지 않을 것이고, 하느님은 나보다 더 높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주님, 당신께서는 저더러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건만, 저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점에 대하여 아주 적절히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 이들보다 더 나를 사랑합니까?’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이 아십니다”(.요한 21,15). 주님, 당신께서 내게도 똑같은 물음을 던지신다면,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대답하겠습니다. 당신께서 내게 그와 같은 물음을 던지시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을 것입니다.(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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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3.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엑카르트는 동물들이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법이 없다고 말한다. 어딘가 다른 자리에서 엑카르트는 한 마리의 개와 한 명의 아이에게서 배운 것을 예로 든다. 그는 이들에게서 에너지와 존재를 깊이 공유하는 것을 배웠다고말한다.
“내가 사막에 홀로 있어 두려움을 느낀다면, 나는 한 아이가 나와 함께 있어 주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의 두려움은 사라지고, 나는 강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생명 자체는 고귀하고, 기쁨으로 가득 차 있고, 강력합니다. 나와 함께 있어 줄 아이가 없다면, 나는 적어도 한 마리의 동물을 데라고 가서 위로를 받겠습니다. 그러므로, 두렵고 검은 표지의 책 속에서 놀라운 일을 일으키는 자들이여, 그대들을 돕도룩 한 마리의 동물, 한 마리의 개를 데려가십시오. 그러면 그 동물 안에 있는 생명이 그대들에게 힘을 줄 것입니다. 이는 평등이 만물에게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생명 자체의 힘”과 “만물에게 힘을 주는” 평둥에 대한 탁월한 증언이다. 이 증언으로 엑카르트는 만물의 평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고 있다. 만물이 평등한 까닭은 그들이 하느님, 곧 존재의 신성한 원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엑카르트의 이 이야기를 한 젊은 목사와 함께 나눈 적이 있다. 그가 답례로 해 준 이야기는 이렇다: 그 부부는 살인 사건이 일어난 집을 아주 싼값에 장만했다고 한다. 그 집에 입주한 첫날 밤에 그들은 두려움과 기분 나쁜 느낌 때문에 방에서 잠을 청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들은 밖으로 나가 지신들의 어린 아기를 안고 와서 자신들 사이에 뉘었다.
그러고 나서야 그들은 그날 밤은 물론이고 그 이후로도 잠을 푹 잘 수 있었다. 아기가 그들과 그들의 새집에 복을 가져다주었던 것이다. 이토록 생명 자체는 고귀하고, 기쁨으로 가득 차 있고, 강력하다.
우리가 다른 피조물을 평등하게 대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근원과 그들의 근원이 같기 때문이다. “모든 피조물을 낳을 때, 아버지께서는 나도 낳았다. 나는 모든 피조물과 함께 흘러 나왔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 안에 머물러 있다."
우리의 뿌리나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우리의 공통 조상과 접촉을 유지하는 것이고 만물의 형제애와 접촉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모든 피조물과 똑같이 느끼고 인식한다." 존재의 원 안에서, 중심점은 원둘레의 다름 모든 점과 같은 거리에 있다. 이 중심점이야말로 우리가 뛰어들어야 할 존재의 원초적 근원이다. 엑카르트는 인간 우월주의와 생물 우월주의를 배격한다. 그는 피조물 전체가 신적인 평등을 똑같이 나누고 있다고 생각한다. “피조물과 하느님은 평등하다. 실로 이 평등은 하느님이 자신을 비웠기에 기능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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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2.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신부 되기 전, 수영을 전혀 할 줄 몰랐습니다. 방학 때, 신학생으로 여름 캠프에 가면 어떻게 하면 수영장을 피할 수 있을까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수영 잘하는 사람이 부러웠고, 나도 수영을 얼른 배워서 멋진 모습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상상만 계속했었습니다.
신부가 되자마자 수영을 배웠습니다. 열심히 해서 이제 남 부럽지 않을 정도의 실력도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영을 포기했습니다. 수영하면서 비염이 생겼고, 이에 따라 생활의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수영은 제게 맞지 않는 운동이었습니다. 지금도 멋지게 수영하는 제 모습을 상상하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전혀 상상하지 않고 있으며, 수영 잘하는 사람을 부러워하지도 않습니다.
도전해 본 경험만으로도 제 인생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갖게 되었고, 제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또 이 도전의 경험을 통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고, 따라서 다른 새로운 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습니다.
도전을 통해 반드시 어떤 목표를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작 그 자체로라도 충분히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작을 아예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각종 이유를 만들면서 할 수 없다고만 생각하고 있으며, 그 목표에 도달하기 힘들다면서 처음부터 그냥 포기하는 경우가 참 많아 보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그렇습니다. 주님 따르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며 포기합니다. 그러나 진짜 그럴까요? 주님을 따르는 그 시작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 불가한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는 특별한 권위가 있었기에 모두 놀라지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율법과 전통을 인용해서 해석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들의 권위로 직접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권위가 드러나는 장면이 곧바로 나옵니다. 바로 마귀를 쫓아내는 장면입니다.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 예수님을 마귀가 먼저 알아보면서,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루카 4,34)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정체는 십자가의 부활을 통해 드러나야 하는 것이지, 마귀의 입을 통해 드러나는 것을 거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가르치실 뿐만 아니라, 직접 악의 세력을 지배하십니다. 이렇게 큰 힘을 가지신 분인에 어떻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 안에 머물 때 악의 세력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당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가라. 당신이 사랑하는 것, 당신에게 필요한 것,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만이 남을 때까지 천천히 다듬어가면서 말이다(리오 바바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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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2.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박윤식 [big-llight]
■ 기도는 악한 기운을 선한 기운으로 /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도 가르치셨는데,
그 곳에 마귀의 영이 들린 이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는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심을 압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조용히 그이에게서 나가라.’ 라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곧 떨어져 나갔다.
아무 해도 끼치지 못하고서.‘
마귀는 누구일까?
그는 하느님 일을 방해하며 하느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사이를 이간질로 단절시키는 못된 세력일 게다.
사실 공동체가 주님 안에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갈라질 때,
누가 뭐래도 거기에는 분명히 마귀의 세력이 판치고 있는 것이리라.
서로를 이렇게 못 믿어 증오하고 사랑을 나누지 못한다면,
그 가운데 분명히 마귀가 있다고 보아야만 한다.
그렇지만 그 못된 마귀가 ‘나’이거나,
아니면 또한 주위의 여러 ‘너’일 수도 있다.
지금 우리가 해방되어야 할 마귀인 더러운 그 영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자.
우리는 때때로 욕망에서 자라난 병든 영들에 사로잡혀 있을뿐더러,
수많은 이의 영적 생명을 앗아 가는 악한 기운에도 짓눌려 가면서 살고 있기도 하다.
그러기에 개인의 내적 회심으로 이끄는 기도와 성찰만이 아니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병든 부분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참으로 중요하다.
이것을 이루기위해서 각자의 삶에서 처한 현세의 세속적 사고에서 벗어나 하느님 영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선물을 제대로 알아보는 영적 삶을 위한 터 잡기가 누구에게나 꼭 필요할 게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떤 악한 기운에 간혹 자기도 모르게 다가가서는
사회 병리적 현상과 왜곡된 시각에 빠져 든다.
이는 어제오늘이 아닌 세속적 삶의 긴 여정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기에.
우리 신앙인의 삶의 체험에서 마귀는 예수님의 꾸짖음에 늘 쫓겨난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에는 보이지 않는 성령이라는 분명한 힘이 있다.
‘악한 영’을 제압하는 능력이다. 미사 때마다 듣는 그 말씀이 약효이다.
우리가 매번 깨닫지 못하지만,
그 ‘말씀의 힘’은 침묵속의 긴 복음묵상을 통해 내면에 확실하게 쌓여만 갈게다.
그렇지만 마귀는 그 반대의 ‘나쁜 생각’으로만 몰고 간다.
그 놈 때문에 ‘선한 생각’으로 돌아서고 싶어도 그게 그리 쉽지는 않을 게다.
그러기에 예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할게다.
그래서 주님 도움을, 늘 시도 때도 없이 청하는 거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질병, 언제 당할지도 모를 사고, 예기치 못한 이별?
사실 우리는 주님 계획 아래 있음을 늘 기억하면서
무엇이 우리를 악하게 만드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 마귀의 영에 빠져들 약한 기운이 도사리는 곳에 하느님 기운을 모셔 오자.
이런 악한 기운을 보호하는 것은 하느님만의 은총이다.
그분께서는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시는 분이 아니시기에.
어쩌면 말씀의 권위를 지키려면 세상 것들에 대한 애착에서 초탈해야만 한다.
말씀에 권위를 부여하시는 분은 성령이신데
그 성령의 불은 세속과 육체의 욕망으로 약화될 수 있기에.
세상 애착을 벗어난 이의 한마디 말이
수천 마디 말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곤 한다.
사실 산업 사회는 인간을 개인적이고 이기적으로만 몬다.
이웃과 단절된 채 고독하게 지낸다.
이에서 벗어나려면 참된 만남과 진솔한 대화가 꼭 필요할 게다.
만남 가운데 최고는 주님 만나는 거다.
거기에 행복과 기쁨이 있다.
이 순간부터 침묵 시간이 유달리 행복해지고, 삶이 충만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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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자료는 추가 안내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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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2.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나자렛 회당에 이어 카파르나움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을 들은 이들은 놀랐습니다.
그분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루카 4,32)이라고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권위를 지니셨을까요?
우리말로 ‘권위’라고 옮긴 이 그리스 말은 ‘권한’ 또는 ‘권능’으로도 옮겨지는 낱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도 내쫓는 능력을 지니셨기 때문에, 그리고 기적을 일으키는 권능을 지니셨기 때문에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기 전에도 사람들은 그분 말씀에 놀랐습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것은 그분 말씀에 담긴 권위를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1,22)라고 말합니다.
율법 학자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권위자들이었음에도 마르코 복음서는 마치 이들에게 권위가 없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의 권위는 참된 권위를 뜻할 것입니다.
우리는 권위자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의 표현이 아닌 경우가 꽤 있습니다.
반면에 아무 직위가 없는 사람이지만, 그 앞에서 진심으로 머리를 숙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권위는 그의 인격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사랑이나 선과 같은 인류 보편 가치를 훌륭하게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그분 존재에서 나오며, 그 권위는 사랑에서 나오는 권위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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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2.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슬로우 묵상] 마침내 나! -
|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루카 4,35) 존재의 권위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존재의 울림이었습니다. 율법학자들은 의도를 담아 규율을 가르쳤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 아버지와의 내적 일치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자유와 진리였습니다. 악령조차 그 앞에 설 수 없었습니다. 악령의 고백과 내적 저항 "당신은 하느님이 거룩하신 분입니다" 더러운 영은 하느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고백하면서도 빛을 두려워하며 어둠 속에 머무르려 합니다. 더러운 영의 이 모습은 진리를 알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변하려 하지 않는 우리의 내적 저항과 닮았습니다. 알면서도 저지르는 잘못, 알면서도 다른 이의 빛이 나의 어둠을 비추는 걸 피하고 싶은 마음, 옳다고 인정하면서도 어차피 이 세상은 정의롭지 않다며 대세를 따르는 말과 행위들, 알면서도 고치지 않으려는 습관, 내면의 성장이 필요함을 알면서도 회피하고 싶은 관계 갈등— 이것이 바로 우리 안의 '더러운 영'이 저항하는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명령, 내적 해방 "나가라" 예수님의 한마디 앞에 어둠은 스스로 무너지고 악령은 아무 힘도 쓰지 못한 채 떠나갔습니다. 진정한 치유는 억압이 아니라 주님의 현존 안에서 이루어지는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해방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내면의 더러운 영으로부터 나 역시 해방되고 싶은 갈망이 일어납니다. 잠시 멈춰 내적 고요 속에서 주님의 현존을 인식하는 시간을 갖고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저지르는 잘못, 영적 비추임 앞에서의 내적 저항 앞에서 "나가라"라고 명령해 주시길 주님께 청합니다. 묵상 중이든, 또는 일상의 순간이든 내면의 저항과 만날 때마다, "주님, 제 안의 두려움에게 '나가라' 하고 말씀해 주세요" 라고 청합니다. 신비롭게도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평화가 불안을 대신하고, 사랑이 미움을 대신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참된 자유를 만나게 됩니다. 주님, 저의 말과 행동이 억누르는 힘이 아니라 살리는 권위가 되게 하소서. 제 안의 두려움과 불안이 침묵하게 하시고, 존재의 중심에서 흘러나오는 평화로 세상을 밝히게 하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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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2.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김명겸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곧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처럼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고 부르지만
마지막에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으로 알아봅니다.
물론 이것을 그가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 안에 있는 더러운 영이 알려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을 이제 막 시작하셨고
그 첫 시작이 어떠했는지 우리는 어제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보다
거부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으로 알아보기는
아직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더러운 영이 알려준 지식도
온전한 지식은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멸망시키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즉 그의 지식은 정확하지 못한 것을 넘어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세상은 점점 하느님을 머리로 이해하려 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믿음은 맹목적인 믿음이고
그래서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교회도 더는 맹목적인 믿음을 말하지 않습니다.
믿음과 이해가 함께 가야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믿음의 부작용을 말하면서
이성적인 것만이 옳다고 말하면서
믿음과 이해의 조화보다는
이성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싶어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아는 것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는 지식이
고백으로 넘어가지 않는다면
하느님이 누구이신지 아는 것이
관계를 맺는 것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우리도 멸망이라는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느님의 원래 의도도 아니고
하느님께서 그런 분도 아니시기에
본인만 불행한 삶을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알아가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하느님과 관계 맺음도
함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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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902.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루카 4,31-37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던 예수님께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큰 소리로 외칩니다. 사악한 영에 휘둘리는 사람이 안식일에 회당에서 공동체와 함께 종교예식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랍지요. 그러나 오히려 이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사탄의 목적은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분열시키는 것이기에 그 일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바로 회당인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정신 바짝 차리고 하느님 뜻에, 주님 말씀에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당 다니는 사람들은 죄를 지어서는 안된다는 완벽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실 그런 생각은 완벽을 추구하는 모습이라기보다 교만에 가깝습니다. 내가 마음 먹고 노력하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고 여기기에 당연히 남들도 그래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그런 이들이 보이는 특징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교만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자기는 굳이 하느님의 도움과 보호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여기기에, 하느님과 친교 맺는 일 자체를 부담스러운 일로 여기는 겁니다. 자기가 알아서 충분히 잘 할 수 있는데, 자기 뜻과 계획대로 하면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 같은데, 괜히 하느님의 계명과 주님의 가르침을 지키느라 그러지 못한다고 느끼기도 하지요. 그러다보면 하느님이라는 존재가 나에게 은총이 아니라 ‘족쇄’가 됩니다. 그분께서 베푸시는 은총이 나에게 혜택이 아니라 ‘걸림돌’이 됩니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가장 좋은 것들을 베풀어 주시는데, 오히려 하느님 때문에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한다고, 자신이 가진 걸 그분에게 빼앗긴다고 느끼는 겁니다. 그래서 ‘당신이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테니 제발 간섭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시라고 하느님을 저 멀리 밀어냅니다.
그런 이들을 그냥 내버려둔다면 많은 이들이 그런 잘못된 생각에 물들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게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일이라고, 주님 뜻을 따르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여 멀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조용히 하라’며 마귀의 입을 막으시고, 그가 괴롭히던 사람에게서 더 나아가 공동체 전체에서 쫓아내십니다. 우리도 팍팍한 세상살이에 이리저리 치이다보면 돈과 권력이 최고라 여기는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려 마귀의 영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 상태로 오래 머물러 있으면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으로부터 멀어져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당장 그 영을 나에게서 끊어내면 안좋은 일이 생기거나 손해를 입게 될까봐 두려워 그러지 못하지요. 그러나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마귀의 영은 우리와 관련한 그 어떤 권한도 갖고 있지 않으니까요. 고통과 시련 한가운데에 우리를 내동댕이칠 수는 있어도, 우리의 구원과 참된 행복에 그 어떤 해도 끼치지 못하니까요. 우리의 구원과 참된 행복을 결정하실 권위는 오직 주님께만 있으니, 우리는 그저 주님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그분 뜻을 따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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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1.”은 박 베드로 형제님이 보내주신 자료입니다.
## 공유하신 분께서 강론글이나 묵상글 수합과정에서 과년도의 자료를
사용하신 것도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 1. ================================================
♣복음말씀의 향기♣ No4334
9월2일 [연중 제 22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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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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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인천교구 오세찬 스테파노(연수성당 보좌)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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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좌절하고 쓰러지는 한 인간이야말로 하느님이 일하시는 장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 가운데, 두드러진 일 하나는 죄와 폭력으로 훼손되고 오염된 인간 고유의 가치를 복원시켜주시는 일이었습니다. 악령과 병, 죽음의 세력으로부터 시달려 갈 데 까지 간 사람들에게 본래의 아름다움을 되찾아주신 일이었습니다.
최선의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최선의 길로 이끄십니다. 시련이 다가올지라도 기를 쓰고서라도 최선의 하느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사랑의 태양이신 하느님께서 그대를 향해 활짝 팔을 펼치실 것입니다.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한지 때로 스토커 같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외면할 때도 우리를 떠나가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분께 정면으로 대들면서 막살아도 우리 곁을 맴도십니다.
고질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을지라도 우리와의 끈을 놓지 않으십니다. 악령이 들려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 다녀도,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혀를 내두르며 다 떠나간다 할지라도 하느님만은 끝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견뎌낼 때, 언젠가 사랑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자비의 팔을 펼치실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기대와 희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의 하느님, 그 모습이 오늘 복음에 생생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더러운 마귀의 영이 한 가련한 사람 안에 들어가 예수님을 향해 외칩니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한 가련한 인간 안에 들어가, 그의 영혼은 물론, 육체와, 정신, 품위를 완전히 훼손시킨 악령, 그 악령의 활동으로 인해 죽음 문턱까지 도달한 한 가련한 인간의 고통 앞에 사람들은 다들 서둘러 피해갔습니다. 다들 두려워 떨었습니다. 다들 악령이 자신에게 옮겨붙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소름이 다 끼쳤습니다.
그러나 오직 단 한 분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가십니다. 구원의 손을 펼치십니다. 본래의 고귀한 성품을 되찾아주십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던 본래의 모습을 회복시켜주십니다.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복원시켜주십니다.
고뇌하고 절망하고 좌절하고 쓰러지는 한 인간, 그 인간이야말로 하느님께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하는 소중한 장소입니다.
오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힘겹다면, 오늘 모든 것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괴롭다면, 오늘 비참으로 흐려진 눈을 들 수 없다면,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사랑의 하느님께서 환한 얼굴로 그대에게 다가올 순간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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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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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변해야 당신의 말도 변합니다 >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크게 놀랍니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권위는 단순히 목소리가 크거나 논리가 정연해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에는 ‘힘(Dynamis)’이 있었습니다. 그 권위는 더러운 마귀의 영조차도 굴복시키는, 현실을 바꾸는 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명령하시자, 예수님께 말을 걸던 마귀는 즉시 떠나갔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권위 있는 말을 하고 싶어 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상사는 부하에게, 그리고 저 역시 신자분들에게 제 말이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상한 경험을 합니다. 아무리 옳은 말을 하고 소리를 높여도, 내 말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올 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내 말에는 권위가 실리지 않을까요?
오늘 복음은 그 이유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다른 이에게 “조용히 하여라!” 하고 명령하기 전에, 먼저 내 안의 어두운 영의 목소리부터 잠재울 수 있는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떠드는 목소리는 무엇입니까? 바로 ‘생각’입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만 가지 생각을 합니다. 걱정, 불안, 욕망, 판단… 이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 우리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 생각을 멈출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내 영혼의 수준이, 창세기의 하와처럼 ‘뱀과 대화하는 수준’으로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와는 뱀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 열매를 먹어도 정말 죽지 않을까?”, “하느님처럼 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우리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의 메커니즘입니다. 내 안의 뱀(자아)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우리는 그 말에 일일이 대꾸하며 대화를 이어갑니다. 하와는 자기 안의 뱀의 목소리를 잠재울 힘이 없었기에, 결국 그녀 자신의 목소리마저 아담을 유혹하는 ‘뱀의 목소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내면의 목소리를 잠재우지 못해 자신의 권위를 모두 잃어버린 비극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실제 주인공이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천재 수학자, 존 내쉬(John Nash)입니다.
그는 20대에 현대 경제학의 근간이 되는 ‘내쉬 균형’ 이론을 정립한, 세상을 바꾼 천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순간부터 현실과 망상을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대학 시절의 룸메이트, 어린 소녀, 그리고 정부 비밀요원이라는 환상의 인물들이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들은 그에게 비밀 임무를 부여하고, 그를 위협하며, 그의 삶 전체를 지배했습니다.
존 내쉬는 이 내면의 목소리가 거짓임을 이성적으로 알면서도 그들과의 대화를 멈출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천재적인 두뇌로 그 생각들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오히려 생각의 노예가 되어 정신병원에 갇히는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의 위대한 수학 이론을 설명하던 목소리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혼잣말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에 재갈을 물리지 못했기에, 세상에 대해서도 말의 권위를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뱀의 목소리를 잠재울 수 있을까요? 요즘 유행하는 명상이나 마인드풀니스가 도움이 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 노력만으로 생각을 없애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가장 강력한 방법은 ‘정체성의 변화’입니다. “나는 너와 대화할 수준이 아니다!”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내 안의 시끄럽게 떠드는 자아를 ‘뱀’으로 인식하고, 나는 세례를 통해 더 이상 흙으로 빚어진 아담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믿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만이 내 안의 뱀을 침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권위입니다.
여기, 바로 이 정체성의 변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세상에 엄청난 영향을 준 한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가족과 모든 것을 잃고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입니다.
그의 머릿속에도 절망과 죽음, 복수심이라는 ‘뱀의 목소리’가 매일같이 속삭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느 날, 영하 20도의 추위 속에서 강제 노동을 하러 가던 길에, 자신의 정체성을 바꾸는 거룩한 체험을 합니다. 그는 그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그 순간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내 아내를 생각했다… 내 앞에 아내의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떠올랐다… 바로 그 순간 진리가 나를 관통했다.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높은 목표라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사랑 안에서, 그리고 사랑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인간 존재의 가장 큰 비밀을.”
바로 그 순간, 그는 더 이상 ‘모든 것을 잃은 수감번호 119,104’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자, ‘이 지옥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찾아내 가르쳐야 할 사명을 받은 의사’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습니다. 이 정체성의 변화는 그의 내면에서 울리던 절망의 목소리를 잠재웠고, 그에게서 그 어떤 고문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내적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는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 이 체험을 바탕으로 ‘로고테라피(의미치료)’를 창시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절망에서 구원했습니다. 그의 말에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먼저 자신의 내면을 침묵시키는 권위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권위의 본질입니다.
성체를 영할 때, 우리는 사람에서 하느님을 모신
‘성전’으로 변화합니다. 하느님께서 뱀과 대화하시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한 마디로 내 생각의 주인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13세기, 위대한 설교가이자 도미니코회의 창설자인 성 도미니코는 이단이 들끓던 프랑스 남부로 파견되었습니다. 그는 밤낮으로 기도하고 연구하며, 이단자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열정적으로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밤, 지쳐 성당에서 기도하던 그에게 성모님께서 나타나시어 묵주를 건네주시며 말씀하셨다고 전해집니다. “네 말이 아니라, 이 기도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다.”
도미니코 성인은 깨달았습니다.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유창한 말이나 논리가 아니라, 먼저 자신의 말을 멈추고 하느님의 말씀이 일하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는 기도와 그를 통해 얻는 믿음에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묵주기도를 마음을 모아 할 때 대화의 상대로 자아가 절대 끼어들 수 없습니다. 그 이후로 그의 설교는 그때부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권위는 우리 시대의 마더 데레사 성녀에게서도 발견됩니다. 한번은 한 기자가, 캘커타에 병원을 짓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성녀에게 비꼬는 투로 물었습니다. “수녀님, 당신이 가진 것이라고는 고작 2페니뿐인데, 어떻게 이 큰 병원을 짓겠다는 겁니까?” 그 기자는 마치 뱀의 목소리처럼 마더 데레사의 마음을 흔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더 데레사는 조용히, 그러나 세상의 모든 소음을 잠재우는 권위로 대답했습니다.
“제가 가진 것은 2페니가 맞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가난하지 않으십니다.” 기자는, 아니 뱀과 같은 자아는 마더 데레사의 대화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더 데레사는 이미 하느님과 함께였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일어는 생각은 모조리 ‘하느님이 되어라!‘ 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조용히 하여라! 내가 이미 하느님과 함께 있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었다.”라고 말하면 됩니다. 하느님이 되려는 내면의 목소리는, 우리가 성체를 통해 하느님이 되었다고 믿을 때 비로소 멈추게 할 수 있고, 그때 사람들에게 하는 말은 그들의 뱀들도 입을 틀어막게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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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75년에 제작된 영화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는 단지 한 사람의 탈출이 아닌, 자유와 존엄, 인간의 내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제목을 빌리자면, 우리의 신앙 여정 또한 ‘둥지’에서 시작해 ‘하늘을 나는 새’로 완성됩니다. 둥지는 생명의 보금자리이자, 이윽고 세상을 향해 날아오르는 준비의 공간입니다. 둥지는 곧 공동체입니다. 엄마 새가 새끼에게 먹이를 주며 키우듯, 신앙의 공동체는 우리를 보호하고 자라게 합니다. 그러나 둥지에만 머물 수는 없습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날개를 펴고 비상해야 합니다. 새로운 둥지를 찾아야 하고, 그 둥지에서 또 다른 새들이 날아오를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시작된 ‘줌으로 하는 신앙 특강’은 그러한 새로운 둥지의 표징입니다. 닫힌 성당, 단절된 공동체, 막힌 신앙의 흐름 속에서도 몇몇 이들이 작은 디지털 둥지를 만들었습니다. 플로리다, 뉴욕, 보스턴, 버지니아, 토론토에서 모인 이들이 서로의 열정을 모아 줌이라는 창을 통해 신앙의 불씨를 지켰습니다. 당시 저는 미주가톨릭 평화신문에서 사목했습니다. 그분들이 저를 찾아왔고, 저는 기꺼이 그분들이 활동할 수 있는 둥지가 되어 주었습니다. 줌으로 하는 신앙 특강을 신문에 공지하였고, 평화신문의 이름으로 포스터를 제작하였고, 특강이 끝난 후에는 신문에 기사로 만들었습니다. 어느덧 5년이 흘렀습니다. 지난 5월 저는 북미주 한인 사목 협의회 대표를 맡게 되었습니다. 줌으로 하는 신앙 특강 팀에게 새로운 둥지를 제안했습니다. 북미주 한인 사목 협의회 소속으로 줌으로 하는 신앙 특강이 함께 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팀원들은 함께 논의하였고, 그렇게 또 저를 찾아왔습니다. 북미주 한인 사목 협의회는 줌으로 하는 신앙 특강을 후원하고 신앙 특강의 프로그램은 북미주 한인 사목 협의회의 활동이 될 것입니다. 그 둥지는 이제 북미주 한인 사목 사제 협의회라는 더 넓은 지붕 아래로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분들이 단순히 지식의 축적을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실천을 위한 자리였고, 구체적으로는 말씀을 배우고 삶에 옮기기 위한 여정이었습니다. 단순히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가르침을 살아내고자 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마귀도 예수님을 압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도 하느님의 뜻을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알면서 따르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들의 지식과 권위로 하느님의 길을 막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물음이 떠오릅니다. “나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보다 “나는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가?”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진리는 주관적 진리이며, 존재 안에서 살아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지식이 아니라 존재 전체로 살아낸 실천이 진리라는 것입니다. 지식은 때로 명예와 권력을 좇으며 십자가를 외면하게 합니다. 그러나 실천은 고통과 외로움을 감수하면서도 사랑을 선택합니다. 신앙은 정보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성 프란치스코는 말했습니다. “복음을 전하십시오. 필요하면 말을 사용하십시오.”
우리는 신앙의 둥지에서 자란 새끼 새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날개를 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때로는 누군가의 둥지가 되어 줄 때입니다. 나의 지식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나의 경험이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며, 나의 기도가 누군가의 날개가 되는 순간, 그 자리는 이미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시편의 말처럼,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을 우러러보는 삶”은 곧 지식에서 실천으로, 둥지에서 날아오름으로 이어지는 신앙의 순례입니다. 줌으로 하는 신앙 특강 팀이 그 둥지에서 다시 하늘로 날아올라,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하늘을 열어 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들 또한 오늘도 실천을 선택하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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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김태훈 리푸죠 신부님]
나자렛 회당에 이어 카파르나움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을 들은 이들은 놀랐습니다. 그분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루카 4,32)이라고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권위를 지니셨을까요?
우리말로 ‘권위’라고 옮긴 이 그리스 말은 ‘권한’ 또는 ‘권능’으로도 옮겨지는 낱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도 내쫓는 능력을 지니셨기 때문에, 그리고 기적을 일으키는 권능을 지니셨기 때문에 그 말씀에 권위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기 전에도 사람들은 그분 말씀에 놀랐습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것은 그분 말씀에 담긴 권위를 확인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1,22)라고 말합니다. 율법 학자들은 당시 사회적으로 권위자들이었음에도 마르코 복음서는 마치 이들에게 권위가 없는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의 권위는 참된 권위를 뜻할 것입니다.
우리는 권위자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존경의 표현이 아닌 경우가 꽤 있습니다. 반면에 아무 직위가 없는 사람이지만, 그 앞에서 진심으로 머리를 숙이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권위는 그의 인격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사랑이나 선과 같은 인류 보편 가치를 훌륭하게 실천하며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그분 존재에서 나오며, 그 권위는 사랑에서 나오는 권위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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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4,31-37: 정말 그 말씀은 신기하구나.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34절) 주님께서는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35절) 하시며 치유해주신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놀란 것은 조용하고 간단한 말 한마디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주셨다는 것이다. 그들이 생각하는 지도자들과 다른 크나큰 차이가 있음을 보았고 놀랐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면에서도 새로운 권위 있는 가르침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예수님은 여기서 볼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보내신 당신의 아들임을 이러한 권능을 보여주심으로서 계시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마귀들이 그분을 알아보는데도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분을 올바로 믿고 따르고 있는가? 주님의 권능을 참으로 믿고 우리의 구세주로 고백하고 있는가?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신앙인이면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그들과 같이 되지 않도록 살아야 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의 은총은 항상 우리에게 베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보는 것은 우리의 깨어있는 신앙의 눈이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느끼기 위해서는 우리가 항상 하느님 안에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즉 깨어있는 삶이 될 때 언제나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삶이 될 때 우리는 하느님 안에 한 형제자매인 우리의 이웃들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자세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면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장이 되고, 우리 자신도 이웃 안에서 주님을 알아 뵙고 사랑해 드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삶으로 우리의 말과 행동이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참된 가르침이 되고 권위 있는 말씀이 될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하느님 자녀의 삶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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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권위와 힘>
루카 4,31-37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권위와 힘>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루카 4,36)
믿게 하는
믿음의
권위와 힘
희망하게 하는
희망의
권위와 힘
사랑하게 하는
사랑의
권위와 힘
선하게 하는
선한
권위와 힘
바르게 하는
바른
권위와 힘
깨끗하게 하는
깨끗한
권위와 힘
자유롭게 하는
자유로운
권위와 힘
거룩하게 하는
거룩한
권위와 힘
연대하게 하는
연대의
권위와 힘
살게 하는
산
권위와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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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시는 권위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 고을로 내려가시어, 안식일에 사람들을 가르치셨는데,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마귀는 그를 사람들 한가운데에 내동댕이치기는 하였지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그에게서 나갔다. 그러자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루카 4,31-37)
1) “그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말은,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자기들을 압도하는 ‘어떤 힘’을 느끼고 몹시 놀랐다는 뜻입니다. 36절, “모든 사람이 몹시 놀라,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하며 서로 말하였다.”라는 말은, 자기들이 압도당한 그 ‘힘’이 ‘하느님의 힘’이었음을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마귀들은 사람의 명령에는 절대로 복종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명령에만 복종하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마귀가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떠난 것은, ‘예수님의 명령은 곧 하느님의 명령’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예수님의 말씀에 들어 있는 ‘권위’는 ‘하느님의 힘’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는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힘을 가지고 계시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일이지만, 예수님을 ‘사람으로만’ 생각한 이들에게는 예수님께서 그 힘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2) 나중에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에게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습니다.(루카 9,1) 사도들은 자신들이 받은 그 힘과 권한으로 ‘많은 마귀’를 쫓아냈습니다.(마르 6,13)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당신의 힘과 권한을 주신 일은, 아주 넘겨주신 일이 아니라, 위임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대리자로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냈습니다. 사도들 자신들의 힘으로 쫓아낸 것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들은 그것을 잊어버리고 자신들의 힘으로만 쫓아내려다가 실패하는 일을 겪기도 했습니다.(마르 9,28)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려면, 또는 기적을 일으키려면 항상 예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하고,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한다고 해서 아무나 마귀를 쫓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행전에 바로 그런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마자로 돌아다니는 몇몇 유다인까지도 ‘바오로가 선포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명령한다.’ 하면서, 악령 들린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해 보려고 시도하였다. 그런데 스케우아스라는 유다인 대사제의 일곱 아들이 그렇게 하자, 악령이 그들에게 ‘나는 예수도 알고 바오로도 아는데 너희는 누구냐?’ 하였다. 그때에 악령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모조리 억누르고 짓누르는 바람에, 그들은 옷이 벗겨지고 상처를 입어 그 집에서 달아났다."(사도 19,13-16)
믿음도 없이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해서 무엇인가를 하려고 시도한다면, 아무런 힘도 발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3) 우리는 복음서에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놀랐고, 소문을 퍼뜨렸다는 것만 기록되어 있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은 기록되어 있지 않은 점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어쩌면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 몇 명 정도는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놀라기만 했고, 그것이 믿음으로 이어진 것은 아닙니다. 뒤의 10장을 보면,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라고 예수님께서 꾸짖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리 놀라운 일을 목격하고 체험해도, 자동적으로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만이 변화되고, 변화된 사람만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4) 인간 세상의 인간적인 권위는 인격과 인품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의 힘’이고, 그것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하느님 자비의 힘’입니다. 그 힘이 가장 잘 드러난 일이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간의 눈으로만 보면, 아무 힘도 없이 일방적으로 당하신 일로 보이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죽음으로 죽음을 이기신 일이고, ‘하느님 자비의 힘’의 위대함을 잘 드러내는 일입니다.
바로 그것을 깨닫고 믿게 된 어떤 백인대장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모습을 보면서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라고 고백했습니다.(마르 15,39) <그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믿음 없는 자들’은 “너 자신이나 구해 보아라.”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독했습니다.(마르 15,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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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느님 능력의 소유자>
“등불 하나가 천년 어둠을 물리친다.”는 옛 말이 있습니다. 빛을 가지고 있으면 어둠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필요할 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빛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어둠에 대처할 수 없습니다. 물론 빛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 악의 세력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권능으로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이고 그분의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숨어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이 숨 쉬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의 숨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빛을 선택하면 어둠이 물러나고 어둠을 선택하면 빛이 물러납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빛은 어둠이 짙을수록 더 큰 빛을 발하게 됩니다.
더러운 영은 예수님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며 대항을 시도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주신 권위를 가지고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 4,34. 35). 하시며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분명 그 능력을 사도들을 비롯한 우리에게도 주셨습니다.
루카10장 17이하에 보면 제자들이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인정하고 잘 관리하고 성장시켜야 합니다. 이미 주어졌는데도 알지 못하는 것은 내가 깨어있지 못한 탓입니다. 참 신앙인은 예수님의 권위에 힘입어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권위를 전합니다.
오늘날의 시대는 너무나 시끄럽고 번잡하고 자극적입니다. 마귀들이 더는 일할 데가 없을 정도로 모든 삶의 자리를 점령했다고도 합니다. 유혹이 많고 번잡한 시대에 하느님의 권능을 잘 사용하기 위해서 먼저 침묵과 고독으로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시끄러울수록 침묵 속에서 절망과 혼란을 이겨내는 능력을 드러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하느님께 복종하고 악마에게 대항하십시오. 그러면 악마가 여러분에게서 달아날 것입니다. 하느님께 가까이 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야고4,7-8). 하고 말하였습니다. 알게 모르게 다가오는 어둠의 세력, 곧 하느님보다는 인간의 욕심을 부추기는 마음에서 자유롭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에서 자유로운 힘이 바로 신앙에서 나옵니다.
20세기의 영성가 토마스 머튼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자신을 채울수록 텅 비어가니. 많은 것을 움켜쥐면서 나는 오히려 모든 것을 잃었다. 쾌락과 즐거움에 사로잡히면서 나는 오히려 실망과 분노와 두려움을 느꼈다.” 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은 달콤하지만, 세상 것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결국 그 끝은 파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육의 관심사는 하느님을 적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 6-8)
우리가 하느님의 숨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헌신하고 결코 인간적인 욕심이나 인정에 매달리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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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위’가 있다고 합니다. 더러운 영을 내쫓으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그분의 권위를 언급합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과 뒷부분에 연거푸 두 번 나타나는 예수님의 권위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더러운 영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만 예수님과는 거리를 두지요. ‘무슨 상관’이냐며 예수님을 멀리합니다. 더러운 영은 제 이익과 제 삶의 안위를 행여 잃어버릴까 노심초사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더러운 영은 자신의 삶이 다른 이와 어떻게 다른지 구별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자리를 제 삶의 자리라고 우기는 것이 더러운 영입니다. 타인의 자리를 맴돌다 그것이 제 것인 양 여기며 기생하는 삶이 더러운 영의 삶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제대로 안다고 하여도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방해꾼일 뿐이며 낯설고 불편한, 그야말로 ‘타인’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과 더러운 영을 구별하십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데서 시작됩니다. 아픈 이를 아픈 이로 보고, 슬픈 이를 슬픈 이로 보며 순수한 눈으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바라보는 데 예수님의 권위가 있습니다. 제 것과 남의 것을 구별하지 못하여 본래의 모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에 질서와 고유성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권위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사유하고 존중하며 기념하는 오늘,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움켜쥐기보다, 우리 각자의 눈에 틀어박힌 들보를 빼내고 제 삶의 자리가 어디인지, 우리의 눈이 자기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타인의 모습을있는 그대로 보고 있는지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예.’ 할 것은 ‘예.’라고만 할 수 있는 순수함과 순박함이 예수님의 참된 권위를 닮아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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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참된 권위>
"나자렛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내가 잘 아는 자매가 하나 있다. 최근 그 자매는 엄청난 충격과 고통을 받고 있다. 이유인즉 그 자매와 그 자매의 형제자매들이 지금까지 애써 아끼고 저축한 돈을 한꺼번에 사기당하여 날려버리고 덧붙여 빚까지 떠 안게 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하느님께서는 하셔도 너무 하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내치실수가... 어떻게들 살아왔는데... 남들 잘 먹을 때 안 먹고 남들 옷 살 때 사지 않고 남들 집 살 때 전세집에서 살고 아끼고 또 아끼고 절약하면서 살아왔는데...
하느님께서는 가끔 이렇게 너무 하신다고 하실 정도로 선한 사람을 내치실 때가 있다. 오늘 악령들린 사람 안에 들어있던 마귀가 "나자렛 예수님, 왜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반문하듯이 때로 이러한 일을 당할 때 우리 또한 “예수님, 왜 이러십니까? 왜 당신 자녀가 잘 되는 꼴을 못봐주십니까?“ 하고 싶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악령들린 사람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강하게 내침이 필요하다. 그 악귀를 그 사람에게서 떼어내기 위해서는 초죽음이 될 정도의 강력한 처방이 필요하다. 그래서 보통 예수님께서 악령들린 사람을 치유하고 나면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버린다. 그리고 악령이 완전히 그 사람에게서 떠나간 뒤에야 비로소 천천히 기운을 회복하게 된다.
그렇다! 우리 안에도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마귀들이 들어와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 그 마귀들을 몰아내어 주시기 위해서 때론 이해하기 어렵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내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마귀를 내치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분이 우리를 미워하실 리가 없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지긋지긋한 마귀들을 몰아내어 주시며 치유시켜 주시길 원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내치시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왜냐하면 마귀의 힘이 워낙 강력하여 잘 안떨어지려 하기 때문에 우리도 함께 쓰러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지나보면 안다. 그분은 우리를 죽지 않을 정도로 내치신다. 우리는 악령이 떠나간 후에 조금씩 의식을 회복하게 되고 영적으로 참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오늘 내가 아는 자매에게 말해주어야 겠다. 하느님께서는 자매를 정말로 사랑하신다고... 그래서 아프지만 내치셨다고... 자매를 내치신게 아니라 자매 안에 있는 자매가 의식하지 못하는 악령을 내치신 거라고... 그렇지 않으면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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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보다 좋은 교육의 원천>
+찬미예수님
안타깝게도 여름이 지나 새 학기가 밝았습니다. 여름 행사들이 없었기에 여느 여름보다 한가롭게 지냈을 것 같은데 뒤돌아보면 여전히 바쁘게 시간을 보냈습니다. 학생들의 성적 평가를 마치고 좋아한 게 엊그제 같은데 바로 오늘, 2학기 수업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그런데 지난 학기보다도 2학기를 준비하는 제 마음은 더욱 무겁고 부담스럽습니다. 그 이유는, <가톨릭 사회교리>라는 수업을 한 과목 더 맡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가르쳐야 할 과목이 더 늘었다는 양적 부담 때문에 마음이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사회교리>라는 과목명이 제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 이들이 있고 고달프게 살아가는 비참한 이들도 있습니다. 과거로부터 이어져 오는 사회적 병폐가 있기도 하고 새로운 시대 안에서 생겨나는 문제들도 있습니다.
<사회교리>란, 바로 이러한 문제들을 어떻게 예수님의 시선에서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치는 학문입니다. 문제는 고학년들의 수업인 만큼 저의 시선과 생각이 사제가 되기 직전의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수업은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수업 중 하나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만큼 가르치기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저는 응당 사회 안에서 고민하며 살아가는 사제로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 연대성의 원리 등 당연한 논리들만 가르치고 싶지 않습니다. 보다 더 사회의 움직임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양심에 따라서 투신할 수 있는 뜨거운 마음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물론 이것은 저의 과도한 욕심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최선은 다 하고 싶으니 커다란 책임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다행히도 오늘의 복음은 제가 앞으로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치면 될지 그 방향을 제시해 줍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유다인들의 ‘회당’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와는 다른 장소입니다. 회당은 주로 교육적인 시설물이었고 종교를 첫째가는 교육으로 여겼던 유다인들은 이곳에서 하느님 말씀의 낭독과 그에 대한 해설을 행했습니다. 성전이 예배를 드리고 희생제물을 바쳤던 장소였다면 회당은 그야말로 훈육의 장소였던 것입니다. 이 교육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다름 아닌 모세의 율법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직접 모세에게 전해주신 이 율법을 가장 거룩한 말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이를 절대적인 구속력을 가지는 규율로 여겼고 조금도 어기지 않기 위해 수만 가지 법규를 만들어 가르쳤습니다. 이 가르침은 도덕적인 율법에서 시작해서 무한한 규율과 규칙으로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복음말씀에서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마귀를 쫒아내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라며 경탄합니다. 이들이 놀라는 이유는 단순히 예수님이 더러운 영을 쫒아내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와 힘”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제의 답은 마귀의 영이 하는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예수님께 소리를 지르고 도망칩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이 간단한 말에서 두 가지 예수님의 권위의 원천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중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함을 기반으로 행동하신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인간을 죄와 약점에서 해방시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당시 회당에서 율법을 가르치던 학자들과 예수님의 차이점이 드러납니다. 율법학자들은 하느님의 거룩함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율법의 글자 자체만을 객관적으로 세분화시켜 가르치던 이들입니다.
그 안에는 하느님의 사랑도 자비도 결여되어 있으니 당연히 거룩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또한 율법에 얽매이다 보니 인간을 해방시키기 보다는 오히려 구속하곤 했습니다. 진정으로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은 사랑을 기반으로 해야 하는데 이들은 오히려 구속하고 있으니 그 말에 권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 어려움을 느낄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내버려 둔다고 원망하며 쉽게 등을 돌려버리곤 합니다.
우리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돌보아 주시며 당신만의 방법으로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시는 분, 우리의 삶을 생명으로 이끄시는 분이 바로 우리가 믿는 하느님임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일상생활 속에서 율법주의에 쉽게 빠져들곤 합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내 관점에서 해석하고 저것은 제대로 된 것이 아닌데라고 생각하며 미워합니다.
또한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다는 이유로 타인을 마음 속으로 단죄하고 알게 모르게 무언의 폭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가 믿는 생명의 하느님, 구원의 하느님은 종종 잊혀집니다. 오늘 성체를 받아 모시며 우리의 신앙이 참으로 선행과 사랑, 하느님께 나아가는 소신있는 기쁨을 가지고 있는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자녀로써 복음말씀을 듣는 우리들은 예수님을 굳건히 믿고 따름으로써 세상 안에 우리의 사랑을 드러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오늘의 복음을 묵상하다보니 저 역시 이번 학기 학생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마음을 다 잡게 됩니다. 글자와 교재의 내용에 집착하기 보다는 크나 큰 하느님의 거룩함을 기반으로 모든 인류를 자유롭게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열정을 담아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물론 여러모로 부족한 것이 있겠지만 제가 최선을 다 한다면 하느님이 알아서 채워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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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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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영적 승리의 주님의 전사(戰士)들>
-영적(靈的) 전쟁-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시편 27,1)
이런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백전백승, 천하무적의 영적승리의 삶입니다. 어제의 감동을 잊지 못합니다. 꼭 강론에 남기고 싶었습니다. 때로 일기쓰듯 하는 강론인데 오늘이 그렇습니다. 어제 서울교대 8회 반 동창 친구들 11명을 만났습니다. 1970년 8월 현역입대전 함께 공부했고 그이후 교직생활은 물론 수도생활중, 2025년 지금까지 한번도 못만난 친구들이니 무려 55년만입니다. 그때는 20대 초였고 지금은 70대 후반에 들어선 친구들입니다. 기적이자 은총의 열매같은 만남의 선물이었습니다.
저의 불편을 배려하여 별내역 근처의 음식점에서 만나 식사했고, 이후 차로 10분 거리인 제 정주처인 요셉수도원을 방문해 오후 4시 30분까지 제집무실에서 환담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도원에 오자마자 친구들이 마련해온 꽃다발은 성모님 앞에 놓았고, 모두 성전에 들어와 잠시 기도시간도 가졌습니다.
가톨릭신자 다섯에 개신교 장로들을 포함 1명 불교 신자를 제외한 모두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었습니다. 한 친구딸은 14년전 수도원 피정때 제게 면담성사후 제 친필로 싸인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책을 선물받았다는 내용도 후에 전해 주었습니다.
수도원 성전에서 나와 정원에서 사진찍은후 집무실에 들려 행복기도문을 나눠주고 제가 읽고 함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음미했습니다. 이어 제 수도생활을 요약한 또 전부가 담긴 좌우명 기도문, “하루하루살았습니다”를 돌아가며 읽었습니다. 그리고 휴대폰마다 <하늘과 산>의 수도원 로고를 붙여줬고 설명도 분명히 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을 깨닫고 많이 감동했습니다. 평생 초등학교에 선생님으로 몸담았던 친구들이라 초등학생처럼 맑고 순수한 모습에 언행들이었습니다. 고분고분 말 잘 듣기가 70대 후반에 손주들을 둔 할아버지 친구들인데 그대로 초등학생같았습니다. 정말 어렵던 시절 1969-1970년까지 교대 2년동안 동고동락했던 학우이자 형제이자 전우같은 동창들이었습니다.
또 놀라운 것은, 1970년대초 20대때 가난과 불편으로 뾰족했던 각자 고유의 부족한 모습들이 <나라의 발전>과 더불어 착하고 성실하게 살아, 또 치유받아 둥글둥글 원만하고 평화롭게 변한 모습들이 서로 비슷하게 닮은 형제들 같았습니다. 서로간 55년동안 우정을 나눴기에 화기애애한 대화 모습도 참 편안해 좋았습니다. 영적전쟁 치열했던 세상 한복판에서 상처받지 않고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모습이 흡사 영적전쟁에 승리한 주님의 전사들 같았습니다.
떠나고 나서도 향기처럼 남아있는, 또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 잠자리 들기전까지 마음을 진정시켰습니다. 그렇습니다. 특히 믿는 이들에게 삶은 영적전쟁이요 제대가 없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어제 공생애가 시작되자 마자 출사표를 던진 예수님께 현장 영적 전투가 시작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한 하느님의 전사, 예수님입니다.
첫 번째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니 그대로 영적승리를 상징합니다. 오늘날 역시 영적전쟁의 인간현실은 여전히 계속됩니다. 아니 더욱 치열해 지는 현상이나 자살자들이나 곳곳에서 정신질환으로 많이 고통을 받는 것만 봐도 알수 있습니다. 더러운 영들은 다양하기가 한둘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희망과 꿈을 잃고 갖가지 더러운 영에 들려 내외적 분열과 불화, 상처의 아픔에 시달리는 지요!
답은, 영적승리와 내외적 치유의 길은 단 하나 하느님의 전사 예수님과의 만남뿐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으니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축출 과정을 통해 주님의 전사로서 예수님의 권위의 정체가 잘 드러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정체를 고백하는 더러운 영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꾸짖으시니, 마귀는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하고 혼비백산 달아납니다. 예수님의 통쾌한 영적승리입니다. 그러자 이를 목격한 사람들은 몹시 놀라 고백합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
여기서 권위는 희랍어로 “엑스오우시아” 즉 “존재로부터 나오는(ex-ousia)”것을 뜻하며, 라틴어로 ‘아욱토리타스(auctoritas)’는 “증가시키다’ 라는 동사 ‘아우게레(augere)에서 유래합니다. 그러니 참 권위는 하느님 중심으로부터 나오는 악령을 제압하는 힘의 권위, 이웃을 살리는 권위, 치유하는 권위, 성장시키는 권위, 섬기는 권위,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답게 하는 권위, 어른이 되게 하는 권위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런 권위는 밖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수양의 노력과 더불어 내적중심의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저절로 승복하게 하는 선물같은 권위임을 깨닫습니다. 권위주의는 나쁘지만 참권위는 공동체 삶에는 필수입니다. 권위있고 반듯한 어른이, 부모가, 교사가, 장상이, 성직자가 절실한 혼란한 시절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복음의 마귀들린 사람은 삶의 중심에 주님을 모시지 않을 때 우리 모두의 가능성입니다. 그러니 삶의 중심에 살아 계신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전사로 주님과 우정의 관계를 날로 깊이할 때 영육의 건강과 더불어 권위있는 삶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그대로 닮은 주님의 전사, 바오로의 말씀이 주님의 전사로서 우리의 신원을 분명히 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니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살아 있든지 죽어 있든지 당신과 함께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혼자의 영적 전투가 아니라 더불어의 영적 전투입니다. 그러니 삶의 중심에 그리스도 예수님을 모시고 서로 영적 전우로서 영적 전우애를 발휘하여,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저마다 성장할 수 있도록 서로 영적 버팀목이 되어주는 일이 정말 중요합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하고 영적승리의 권위있는 삶을 살게 합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 바라보고, 그분의 성전 우러러보는 것이네.“(시편 27,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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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맑은 정신으로 살기>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바오로 사도는 오늘 맑은 정신에 관해서 얘기합니다. 그래서 맑은 정신이 뭘까 생각해 봅니다.
앞뒤 문맥을 보면 잠에 취해 있지 않고 술에 취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맑은 정신이란 잠과 술에 취해 있지 않은 정신이 되겠습니다.
그런데 더 큰 맥락은 빛과 어둠, 낮과 밤의 맥락입니다. 정신이 빛 안에 있고 낮의 상태여야 하고, 어둠의 밤 중에 있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여기서 빛이란 빛이신 하느님이고 낮이란 빛이 있는 상태 곧 은총의 상태입니다. 반대로 밤과 어둠이란 빛이신 하느님이 계시지 아니하여 은총 가운데 머물지 않고 죄의 어둠 가운데 머무는 상태입니다.
어두운 밤에 우리가 하는 것은 잠자는 것이고, 잠자야 할 밤에 잠자지 않으면 욕망 때문일 것입니다.
실로 요즘 특히 젊은이 가운데 거꾸로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야 할 밤에 뭘 하고 사람을 만나고 일해야 할 낮에 잡니다.
암약한다고 하는데 암약(暗躍)이란 말이 밤에 활발히 활동하는 거지요. 중독자일 경우 낮술을 먹기도 하지만 밤에 술을 먹고, 술에 취해 밤에 욕망을 실현하고, 밤에 음모를 꾸미고 범죄를 저지릅니다.
마찬가지로 정신도 밤과 어둠 가운데 있으면 안 됩니다. 밤과 어둠 가운데 있는 정신을 우리는 썩어빠진 정신이라고 합니다.
정신이 썩은 겁니다.올바른 정신은 나간 겁니다.
바오로 사도와 프란치스코는 이것을 일컬어 육의 정신(spirit of the flesh)이라고 하는데 주님의 영(Spirit of the Lord)과 반대되는 정신입니다.
어제부터 루카 복음을 읽는 우리가 어제는 성령이 주님 위에 내리셨다는 복음을 읽고 오늘은 주님께서 성령으로 더러운 마귀의 영을 쫓아내는 복음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더러운 마귀의 영(spirit of an unclean demon)이란 어떤 영입니까? 세속에 점령당한 영이고, 당연히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맑은 영이 아닙니다.
빛이신 주님의 진리와 주님의 영 가운데 있지 않고, 빛이신 주님과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며 세속의 어둠에 머물고 안주하려는 영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속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속 가운데 살고 있는 프란치스칸들을 재속프란치스칸이라고 합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는 거지만 세속 가운데 살고 있는 재속프란치스칸들이 오늘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빛의 자녀요 대낮의 자녀로 살아가려면 얼마나 어렵고 깨어 있으려고 얼마나 애를 써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그분들이 무척 존경스럽고 그분들에게 많이 도전받는 저입니다. 어쨌거나 우리 모두 깨어 있는 정신, 맑은 정신으로 살아가도록 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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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4,35)
<악령에서 해방된 삶!>
오늘 복음(루카4,31-37)은 '예수님께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가르침에 몹시 놀랍니다. 예수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권위로, 곧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루카4,35)라는 권위 있는 말씀으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십니다.
하느님을 닮은 존재인 인간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은 영에 의해 움직여지는 존재입니다. 두 개의 영이 우리를 움직입니다. 하나는 깨끗한 영인 '성령'이며, 또 하나의 영은 더러운 영인 '악령'입니다.
이 두 영에 의해 지금 여기에서 천국의 삶을 살기도 하고, 지옥의 삶을 살기도 합니다. 지옥의 삶은 악령에 이끌리는 삶입니다. 곧 교만과 시기 질투와 탐욕과 인색과 분노와 음욕과 게으름으로 드러나는 삶입니다.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저이가 권위와 힘을 가지고 명령하니 더러운 영들도 나가지 않는가?"(루카 4,3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악령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 악령에 의해 억압받고 있는 이들을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오신 하느님이십니다.
악령에 사로잡힌 이에게 우리는 이렇게 악령을 쫓아내는 '구마기도'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악령아! 이 사람에게서 썩 나가라."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위해 기도합시다! 나 자신을 위해 구마기도를 자주 바칩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악령아! 내 안에서 썩 나가라."
오늘 독서(1테살 5,1-6.9-11)에서 사도 바오로가 우리에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1테살 5,5-6)
오늘이 악령에서 해방된 천국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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