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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1951년 초에 개신교와 천주교, 범(凡)기독교계에만 군종제도 시행을 하면서 10여년 사이에 전체 인구, 특히 젊은 층 사이에서 기독교 인구 비중이 빠르게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전국의 형무소와 경찰서 유치장 등의 진입은 민족 해방의 기쁨이 다 가라앉기도 전인 1945년 12월부터 천주교도 배제한 채 현직 목사에게 전국의 형무소와 소년원의 ‘교무과장’ 직책을 독점하게 해주는 방식으로 오직 개신교에게만 허락하였습니다. 그리고 법무부 안에 이 형목 제도를 지원하는 ‘형정과刑政課’를 설치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식으로 당시 기독교에 비하여 신도가 훨씬 많았던 불교와 천도교를 비롯한 여러 비非기독교 종교들의 참여를 제도적으로 원천 봉쇄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기독교 국가’에서나 가능할 법한 이례적인 특혜였습니다. 군종장교와 형목刑牧은 기독교 성직자를 현직 국가공무원으로 임용하여 상시 고용체제로 운영하였으므로, 교회의 구성원들이 공무원 신분을 얻어 핵심 국가기구 안으로 직접 편입되어 들어가 탁월한 ‘선교 효과’를 낼 수 있게 보장해준 것입니다.
처음 형목 제도가 도입되던 과정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1945년 11월에 열린 ‘조선기독교남부대회’에서 정부에 형목 제도를 요구하기로 결정하고, 바로 다음 달인 12월 당시 군정청 인사행정처장이던 정일형 목사가 이를 수용해서 제도화되었습니다. 정일형 씨는 4‧19 혁명 뒤 장면 정권에서 외무부장관을 역임하고 8선 의원을 지냈죠. 중요한 점은 형무소 목사가 정식 공무원으로 임명되었다는 것, 그리고 4‧19 이후 이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개신교가 이를 독점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제도가 정교분리政敎分離 원칙에 위배된다고 생각한 개신교 신자는 없었습니다. 형목 제도 창설에 따라 전국 18개 형무소의 교무과장 직에 일제히 목사들이 임명되었는데, 이 중 장로교 목사가 13명, 감리교 목사가 5명이었습니다. 또 이를 위해 설치된 법무부 형정과의 초대 과장엔 장로교의 김창덕 목사가 취임했습니다.”
외부와 단절된 폐쇄조직인 군대와 함께 형무소에서도, 배타적으로 진입한 개신교의 ‘선교 효과’가 빠르게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러웠을 것입니다. 1949년 8월 《서울신문》 보도에 따르면, 당시 어려웠던 사회 · 경제상황 때문일 것으로 추정하지만 전국 19개 형무소에 수용 정원의 40~50%를 초과하여 남녀 죄수 1만4000명이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형무소에서나 지금 일주일에 한 번씩 강당에 죄수를 모아 놓고 전임 목사가 [기독교] 성서 구절을 인용하며 인간 철학을 강의하고 있는데 이것은 각 형무소마다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물론 목사들의 전도 활동이 너무 형식적이고 때로는 죄수를 만날 때마다 ‘예수를 믿으라’고 강요하여 역효과를 내는 경우도 있었지만, “형기 3분의 1 이상을 경과한 사람에게는 그가 가출옥 할 수 있도록 주선해주는[원문에는 구신(具申)하는] 막강한 권한이 형목에게 주어져 있었으므로 형무소 선교의 효과는 높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수감된 죄수들에게는 자신의 가출옥을 도와줄 수 있는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형목들이 죽이느냐 살리느냐 하는 ‘생사여탈권生死與奪権을 지닌 전지전능한 신神으로 여겨지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니 당연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형목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은혜를 베풀어주기를 바라지 않는 수감자들이 없었을 것입니다. 설사 무신론자일지라도 그들을 거부하고 ‘예수를 못 믿겠다, 기독교가 싫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한편 경찰공무원과 경찰서 안의 구치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선교를 할 수 있는 경목警牧 제도의 경우에는 이승만 정권 시절에 공식 도입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54년 1월부터 경기도 경찰국에서는 경무과장 조재용 총경의 적극 후원으로 이미 개신교의 경찰 전도가 시작되어 매주 한 번씩 예배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경찰 간부들이 교육을 받게 되는 부평 소재 국립경찰학교에서는 1956년 9월부터 대강당에서 수백 명이 참석하여 매주 일요일 예배를 진행하였으며, 경찰학교 학감 이강희 경무관이 “매주 일요일 목사 초청 예배를 보고, 치안국장에게 경목제도 도입을 건의하겠다”고 밝히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이런 움직임들이 이어져 1960년대에 정식 경목제도 도입 분위기를 조성하였던 것입니다.
이제는 교도소와 경찰서에 법당이 개설되어 스님들을 법사로 초청해 정기 법회를 진행하기도 하고, 전국교정인불자연합회가 조직되어 수백 명이 넘는 불자들이 형무소와 구치소에서 적극적으로 전법 활동에 나서고 있으며 조계종 포교사단에서도 교화활동을 적극 펼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국의 지방경찰청과 경찰서마다 경승이 위촉되어 경찰공무원과 구치감 수감자 등을 위한 포교와 상담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군종제도와 전쟁 포로수용소에서의 배타적 진입 허용 등 기독교에만 특혜를 주고 불교를 비롯한 다른 종교계에는 접근 자체를 원천 봉쇄했던 정부의 탄압과 차별 정책 시행은 이제 더 이상 펼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2010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교도소’로 개원한 ‘아가페기독교소망교도소’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교정교화 시설에서 기독교, 그 중에서도 개신교에만 특혜를 주는 정부 정책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소망교도소의 경우 2010년 개원된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 정권의 편향 사례로 여기고 있지만, 김대중 정권 시절에 이미 ‘행형법行刑法’을 개정하고 ‘민영교도소 등의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을 제정 · 공포하여 민영교도소를 설립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였으며 수탁선정심사위원회 심사를 거쳐 2002년 3월 재단법인 아가페를 수탁운영대상자로 결정 · 발표하는 등 형식상 ‘다른 종교계를 포함하여 민간 부문에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는 제스처를 쓰는 방식으로 예전에 비하여 그 차별 정책을 좀 더 세련되게 다듬었을 뿐입니다.
‘민영교도소 등의 설치·운영에 관한 법률’ 제25조 3항에서 “교정법인의 임직원과 민영교도소등의 장 및 직원은 수용자에게 특정 종교나 사상을 강요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소망교도소를 운영하는 아가페 재단 스스로 “한국교회에 대한 이미지 제고에 기여할 수”있고 “수용자 및 수용자 가족에 대한 직접적인 복음화 외에도 한국교회 이미지 개선을 통한 간접선교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한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결국 법률 규정은 단지 규정일 뿐 아예 처음부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는 게 확실합니다. 실제로 소망교도소에서는 재소자를 대상으로 다양한 기독교 선교활동을 하고 있고 실제로 이 법 규정을 지킨다고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글쎄요, 혹 믿는 이가 있다고 하면 지나치게 순진하다고 할 수밖에 없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