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대한항공 858기를 폭파시켰다고 자백한 김현희씨가 15일 MBC 특별대담 <마유미의 삶, 김현희의 고백>에 출연해 KAL기 사건의 전말과 '가짜 김현희 논란'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방영 전부터 MBC 노조는 "(뉴라이트와 같은) 사회 특정세력의 요구를 방문진이 수용해, 방송된 지 10년이나 지난 프로에 대해 갑자기 진상조사를 요구해 온 것"이라며 우려를 표한 바 있고 KAL기 실종자 가족회도 <미디어스>와의 인터뷰에서 "우리 피해자들이 있는데 가해자만 불러 맨날 (방송)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지 않느냐"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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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일 방송된 MBC 특별대담 <마유미의 삶, 김현희의 고백> |
MBC는 이 같은 반발 여론에 아랑곳하지 않고 특별대담 <마유미의 삶, 김현희의 고백>을 15일 오후 11시 15분에 방영했다. 기자가 지적하고 싶은 건 김현희를 둘러싼 논쟁(이 부분에 대해서는 예전 <미디어스> 기사의 일독을 권한다. 기사링크)이 아닌 공영방송 MBC가 망각하고 있는 '저널리즘 원칙'이다.
1. 보도할 가치가 없는 내용…MBC, 종편의 생존 방식 답습하다.
이날 김현희의 주장은 그간 TV조선에서 말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김현희는 지난해 6월 종합편성채널 <TV조선>에서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본격적으로 저를 두고 가짜 몰이를 하기 시작했다"며 "(내 거처는) 보안사항인데 MBC가 습격해 노출시켰고, 이후 방송 3사가 모두 저를 가짜로 모는 편파 방송을 했다"고 밝혔다.
15일 특별대담에서도 'KAL사건의 전말'과 함께 "MBC가 저희 집을 촬영했는데 테러와 다르지 않았다"며 "공영방송 MBC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 수 있느냐"고 비판했다. 이어, 김씨는 "지상파 방송들이 공정보도를 해야 하는데, 가짜 의혹 조성에 앞장 섰던 방송들이 여태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기사와 방송됐던 것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한다" "법적인 대응도 할 것"이라며 <PD수첩>에 대해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두 방송에서 김현희 주장의 요는 '본인은 명백한 테러범'이라는 점과 '좌파(?)정부와 그 국가 기관, 그리고 MBC <PD수첩>이 본인을 가짜라고 매도했다'는 것이다. 그의 발언 중 팩트로서 새로운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발화자의 주장에서 새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면 보도의 가치는 현격히 떨어지는 게 저널리즘의 원칙이다. 보도할 가치가 없는 것을 보도할 경우, 남는 것은 '방송의 선정성'과 언론사의 '정치적 의도'뿐이다.
종편의 경우, 미국의 FOX방송처럼 자극과 선정성을 기반으로 자사 언론을 향유하는 특정 계층의 정치적 욕망을 충족시킨다. 이는 시청률을 자극하며 돈벌이에 혈안이 된 우파 언론들의 생존 방식이다. 종편과 같은 매체가 '보다 더 자극적, 보다 더 선정적' 콘텐츠로 방송 편성을 채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MBC는 공영방송이 아닌 우파 언론의 고루한 보도방식을 답습했다. 어쩌면 MBC경영진은 MBC의 위상이 처참하게 뭉개진 현실과 더 이상 공영성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고루한 방식만이 살 길이라고 판단했는지도 모른다.
2. 최소한의 기계적 중립조차 지키지 못한 특별대담
김현희는 대담 내내 <PD수첩> '16년간의 의혹, 대한항공 폭파범 김현희의 진실' 편의 내용을 지적했다. 그는 "내가 가짜면 대한민국이 KAL 858기를 폭파한 테러국이 되는 것이고 테러를 한 당사자 북한은 누명을 쓰는 것이 된다" "진짜가 가짜라고 말할 수 있냐"며 <PD수첩> 보도에 반박했다.
그렇다면 그가 찾아가야 할 곳은 MBC 스튜디오가 아니라 '언론중재위원회'였다. 언론보도에 의해 본인이 피해를 입었다면, 혹은 반론보도가 필요했다면 행정 절차를 밟으면 될 일이다. 명예가 훼손됐다면 소송을 통해 실추된 명예를 되찾으면 된다. 언론사에서 '정정보도'가 갖는 의미를 간파했다면, 그 절차에서의 승리가 본인 명예회복과 사실 정정에 더 유익하다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정말 <PD수첩>의 사과를 원한다면 말이다.
한학수 MBC PD도 16일 본인의 페이스북에 "김현희씨와 긴급히 특별방송할 정도로 새로운 사실이 있었는가. 당시 방송3사의 보도에 문제가 있었다면, 김현희씨는 언론중재위와 소송의 절차를 밟을 수 있다. 선정적인 자료화면을 곁들여가며, 1시간 동안 반론하는 것은 상식 밖"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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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일 오후 이진숙 MBC본부장의 안내를 받으며 스튜디오로 향하는 'KAL858기 폭파사건' 김현희(오른쪽)씨. ⓒ오마이뉴스 유성호 |
행정 절차의 복잡다단함 때문이었을까? MBC가 스스로 김현희의 '입'이 됐다. 그 결과 MBC가 김현희의 '입'을 통해 자사 프로그램인 <PD수첩>을 비난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공영방송이라면 이런 식의 일방향 대담이 아니라 김현희 발언에 반대적 입장을 가진, 이를 테면 국가원 진실위·진실화해위에 몸 담았던 전문가나 당시 <PD수첩>의 PD 등을 패널로 참석시켜 구색을 맞추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즉, MBC는 '기계적 중립'도 포기했다.
당시 프로그램을 제작했던 조준묵 PD는 16일 <미디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유족들이 가짜 김현희 의혹을 제기했기 때문에 방송을 한 것"이라며 "국정원 관계자가 진짜임을 확인해 주는 대목도 나온다"고 반박했다. 김현희는 <PD수첩>이 무엇을 짚고 있는지 사전 파악도 못한 것이다. 유족들은 현재까지도 김현희에게 공개 토론회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
또, 이날 방송은 방송의 객관성과 중립성 원칙도 무너뜨렸다. "좌파 정부에서는" "이적 단체" "국가 문란 행위" 등 김현희는 '가짜 김현희' 의혹을 반박하는 것을 넘어서 특정 집단에 대한 낙인찍기를 서슴지 않았다. 사회자였던 신동호 아나운서는 이에 대한 저지나 경고를 하지 않았을 뿐더러, '인간 김현희'의 모습을 부각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는 논리적 근거 대신 '인신 공격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김현희에게 공영방송 MBC는 무엇을 듣고 싶었는지 의문이다. MBC 경영진들의 '정치적 의도'가 짙게 깔렸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3. 본인의 주장대로 테러범이라면, 공중파에 버젓이 나와도 될까?
유족들이 주장하고 있는 '가짜 김현희 의혹'을 잠시 제쳐두고 그의 주장대로 그가 명백한 테러범이라면, 115명을 살해한 살인자가 버젓이 방송에 나와 요리 이야기를 하며, 속 편하게 본인 가정사를 이야기 해도 되는 걸까? 애먼 죽음을 당한 이들의 유족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 상황에서?
MBC가 보도 윤리에 대한 '머뭇거림'이 있었다면, 그리고 국가 폭력에 희생된 피해자들과 유족들의 인권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사전에 진행했다면 이렇게 무책임하게 방송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상식이다. 종편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파급력을 갖는 방송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말이다. 이 모든 과정을 거세한 MBC 특별대담은 '테러범' 김현희의 주장을 그대로 내보내면서, 테러범을 석상에 앉히는 촌극을 연출했다.
대담이 끝나고 기자와 친분이 있는 MBC의 한 취재기자는 "우리가 과연 언론인가"라며 자조적인 문자를 보내왔다. 언론이라면 응당 지켜야 할 선을 보란듯이 넘은 MBC경영진에 대한 원망과 기자로서 느꼈을 무력감을 고려해 보면 당연한 반응이다.
최소한의 보도 윤리마저 포기해 버린 MBC는 이대로 망가질 것인가? 김현희 특별대담이 향후 5년 동안의 MBC 모습일 것 같아 쓴웃음만 나온다. '막장' MBC보도의 정상화는 시청자들과 시민 단체, 그리고 MBC 내부 구성원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풀지 않는 한 요원한 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