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32주간 화요일 강론>(2024. 11. 12. 화)(루카 17,7-10)
(성 요사팟 주교 순교자 기념일)
복음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7,7-10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7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8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9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신앙생활은 ‘나 자신’이 구원받으려고 하는 생활입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으면,
들에서 돌아오는 그 종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겠느냐? 오히려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그리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7-10).”
1)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그토록 열성적으로, 또 헌신적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 9,23).”
“나는 내 몸을 단련하여 복종시킵니다. 다른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실격자가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1코린 9,27).”
바오로 사도가 첫 번째로 원한 것은 자기 자신의
구원이었고, 그가 두려워한 것은 실격자가 되는 것,
즉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고, 선교활동을 하는 이유도 같습니다.
바로 ‘나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그 일은 하느님 나라 건설에 동참하는 일이기도 하고,
주님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나 자신이 구원받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신앙생활은 내가 살려고 하는 생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시켜서 하는 생활이 아니라
‘내가 원해서 하는’ 생활입니다.
나 자신이 살려고, 내가 원해서 하는 생활이기 때문에
신앙생활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생활입니다.
<따라서 잘하고 있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생색낼 것도 없고,
주님께 고마워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2)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종이 주인을 위해서 하는 일’로 표현하셨을까?
(1)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더욱 생생하게 가르치기
위해서 사용하신 표현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2) 마치 종이 일하는 것처럼 억지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꾸짖기 위해서 사용하신 표현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이 좋은 예입니다.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28-32)”
큰아들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지위를 ‘종’으로 떨어뜨렸고,
아버지를 위해서 일한다는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큰아들이 하는 일은 아버지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바로 큰아들 자신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일을 한다면, 종이 아니라 주인입니다.>
현실을 보면, 비유에 나오는 큰아들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렇게 종처럼 억지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강제 노동을 하는
것이고, 그것은 신앙생활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3) 그런데 우리 주님은, 내가 나를 위해서, 즉 나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데도, 그것을 기뻐하시는
분이고, 또 나에게 고마워하시는 분입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당신의 목숨을 바치신 것을
우리가 먼저 고마워해야 하는데, 또 우리의 신앙생활과
회개를 인정해 주시고,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것을 우리가 먼저 기뻐해야 하는데, 주님께서는 당신이 먼저
우리의 회개와 신앙생활을 고마워하시고, 먼저 기뻐하십니다.
<나를 식탁에 앉히고, 내 곁에서 시중을 드는
주인의 모습이 바로 우리 주님의 모습입니다.
17장에 묘사되어 있는 주인의 모습은, 우리 주님의
모습이 아니라 세속의 일반적인 주인의 모습일 뿐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 작은아들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집으로 돌아온 것인데, 아버지는 그 아들이 돌아온 것
자체를 크게 기뻐하면서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벌입니다.
아버지의 그 심정이 바로 하느님의 심정입니다.
4) 대부분의 가정에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공부해라. 착하게 살아라. 이게 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다.” 라고 자주 말합니다.
자녀들은 아직 철이 없을 때에는
그 말을 ‘잔소리’라고만 생각하다가,
나중에 철이 들면 부모의 말이 진리이고,
그 말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의 계명들,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잔소리’가 아니라,
다 우리를 살리기 위한, 즉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기 위한 ‘진리’이고, ‘은총의 말씀’입니다.
[출처] 연중 제32주간 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