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 및 금구집회 이후 남접세력의 동태는 교조신원운동 등 동학교단 상층부를 움직이는 것에 더 이상 의지하지 않고, 남접의 독자적인 힘으로 농민봉기로 계획하게 됩니다. 그 중 고부는 군수 조병갑과 전운사(轉運使=지방에서 조세를 거두어 서울로 운반하는 일을 담당한 관리) 조필영, 균전사(均田使=각 도의 농토를 정확히 조사하기 위하여 파견한 어사로, 전답의 측량뿐만 아니라 등급도 결정하고, 민정을 살펴 부정의 유무를 조사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관리) 김창석의 탐학까지 가세되어 농민들의 불만이 드높아 농민봉기의 최적의 조건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앞서 살펴본대로 조병갑은 1892년 5월 고부군수로 부임하자마자 백성을 수탈하는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특히 1893년에는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돌아 농민의 생활은 그야말로 비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에 1893년 11월 40여명이 고부관아로 몰려가 만석보의 물세를 감면해달라고 진정했으나 군수 조병갑은 오히려 양민을 선동하는 난민(亂民)으로 몰아 부쳐 그 가운데 대표 몇 사람을 구금하였습니다. 그 후 농민들의 진정은 계속되어 다음 섣달에는 또 60여명이 몰려갔으나 쫓겨나고 말았지요. 이와 같은 합법적인 방법에 대한 한계를 절감한 전봉준을 비롯한 농민들은 무력항쟁을 위한 사발통문(沙鉢通文) 거사계획을 수립하게 됩니다.
사발통문은 계사년(癸巳年,1893) 11월에 고부 서부면 죽산리(現 井邑市 古阜面 新中里 舟山마을) 송두호의 집에서 전봉준․최경선 등 20명이 결의사항과 함께 사발모양으로 둥글게 서명된 문서로서 1968년 12월 4일 전라북도 정읍군 고부면 신중리에 거주하는 송기태씨가 신문에 발표하여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 후《나라사랑》제15호에 소개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서명자의 필체가 모두 같아 진위 논란이 일기도 했으나 현재는 필사본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본문과 뒷부분이 떨어져 나가 그 전부를 밝힐 수는 없지만, 이 사발통문은 갑오농민혁명이 우발적인 감정의 폭발이 아니라 전봉준, 최경선, 송대화 등이 중심이 되어 사전에 계획을 세워 고부농민봉기를 준비했으며, 또 실행에 옮겨져 1894년 3월의 갑오농민혁명 1차 봉기를 이끌어 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사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癸巳 十一月 日 各里里執綱 座下 右(위)와 如히 檄文을 四方에 飛傳하니 物論이 鼎沸하였다. 每日亂亡을 謳歌하던 民衆들은 處處에 모여서 말하되 「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에이 참 잘 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百姓들이 한 사람이나 어디 남아 있겠나 하며 기일이 오기만 기다리더라. 全琫準, 宋斗浩, 鄭鐘赫, 宋大和, 金道三, 宋柱玉, 宋柱晟, 黃洪模 崔興烈, 李鳳根, 黃贊五, 金應七, 黃彩五, 李文炯, 宋國燮, 李成夏, 孫如玉, 崔景善, 林魯鴻, 宋寅浩(둥글게 서명한 서명자 20명을 전봉준을 중심으로 하여 시계방향으로 정리함.) 이때에 道人들은 善後策을 討議決定하기 위하여 古阜 西部面 竹山里 宋斗浩家에 都所를 定하고 每日雲集하여 次序를 決定하니, 그 決議된 內容은 좌(아래 - 인용자)와 如하다. 1. 古阜城을 擊破하고 郡守 趙秉甲을 梟首할 事. 1. 軍器倉과 火藥庫를 占領할 事. 1. 郡守에게 阿諛하여 人民을 侵漁한 貪吏를 擊懲할 事. 1. 全州營을 陷落하고 京師로 直向할 事. 右(위)와 같이 決議되고 따라서 軍略에 能하고 庶事에 敏活한 領導者될 將군… (여기서부터 누락됨, 띄어쓰기와 맞춤법을 현대식으로 바꿈)
분위기가 이렇듯 어수선하게 되자 전라감사 김문현은 중앙에 보고하여 고부 군수 조병갑을 11월 30일자로 익산군수(益山郡守)로 발령내고 12월 한 달 동안에 다섯 사람을 고부 군수로 발령냈으나 모두 갖은 핑계로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풍요로운 만큼 수탈하기 좋은 고부를 마다한 이유는 당시 관리들의 인사를 담당하는 주무장관인 이조 판서 심상훈이 조병갑과 사돈지간이기 때문이었답니다. 조병갑이 고부를 떠나지 않으려고 중앙에 손을 쓰고 있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인데 눈치 없이 고부 군수로 부임해온다면 심상훈의 눈밖에 나서 출세를 기대하기 어렵게 되기 때문이었지요.
한편 조병갑이 익산군수로 발령나게 되자 1차 공격 목표를 상실하게 된 전봉준 등은 거사를 미루어 오다가 갑오년 정월(正月)에 와서 조병갑이 다시 고부 군수로 유임되자 마침내 고부관아를 습격하여 군수 조병갑과 향리(鄕吏)들을 징치키로 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