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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독서편지
0. 만주사변에서 신사참배까지
오늘은 한국 근대사 산책 8권의 이야기를 할게.
8권의 부제는 ‘만주사변에서 신사참배까지’란다.
만주사변은 1931년이고,
신사참배는 1930년대 중반부터 많이 강요했으므로,
8권의 다룬 시대는 1930년대 초반부터 중후반까지라고 보면 돼.
그럼 바로 시작해 볼게.
일제의 강압과 폭력을 피해 많은 우리나라 동포들이 만주 지역에 가서 터를 잡았단다.
그러다 보니 가끔씩 만주 지역의 한인 농민과 중국 농민 간의 다툼이 있곤 했어.
심각한 정도는 아니고, 가끔씩 일어나는 일이지.
그런데, 일본이 이것을 사악하게 이용하려고 했어.
일본은 일상적이 이 사소한 마찰을 허구로 왜곡하여
중국 사람이 한국 사람을 죽였다고 소문을 퍼뜨렸어.
국내에도 이 소식이 전해지고,
조선일보는 이 소식을 호외까지 내면서 대서특필했단다.
이 소식에 대해 신중하게 대응했던 동아일보와 다른 행보였어.
조선일보를 통해 전해진 이 소식은 국내에 있는 백성들을 열 받게 했어.
분풀이 하겠다면서 국내에 살고 있는 화교들을 공격하였고,
이 사건으로 100여 명의 화교들이 죽는 사건이 일어났어.
그런데 이것도 알고 보니, 혼란의 틈을 타서 일본인들이 죽인 것이 대부분이었단다.
이 소식은 다시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중국에서는 중국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을 공격하는 일들이 벌어졌단다.
완전히 일본의 음모에 말려든 거지.
일본은 중국에 있는 조선 사람들을 중국인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일본군을 대거 투입하였고,
이 군대를 이용하여 그대로 만주를 점령하였단다.
이것이 바로 만주 사변이란다.
때는 1931년 9월 18일이었어.
여기서 안타까운 것은 조선일보의 이 소식을 접하는 자세였단다.
일본의 앞잡이 신문이 다 되었다고는 하지만,
신문의 영향력을 생각했을 했을 때,
좀더 정확한 정보를 입수한 후 기사를 썼어야 했어.
근현대에 와서 신문은 이렇게 많은 영향력을 넘어 권력까지 갖게 된단다.
1930년대에도 그런 신문의 권력에 대한 비판을 한 이가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 당시 신문을 비판하는 글을 읽어보면
오늘날 신문에도 딱 맞는 글 같더구나.
많은 매체들이 생겨나서 옛날보다 신문의 영향력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듯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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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117)
당시 신문이 누린 권력과 신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 월간 <동광> 1931년 12월호에 실린 <신문 비판 특집>은 주목할 만하다. 이 기사는 대화형식으로 신문에 대한 세평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조선의 신문계에 사장이면 판서 격은 되고 중역이면 참판 격은 된다는 말을 못 들었나? 그 밑에 국장도 있고 부장도 있으니까 벼슬 못한 조선 민간 유지에게는 이것이나마 훌륭한 벼슬자리인 줄을 모르는가? …… 연전에 모 신문에서 수재금을 모집하니까 푼푼이 들어온 것이 5만여 원이요, 또 요새 이충무공 성금모집도 2만 원을 돌파했으니, 이 돈 없는 조선에서 그만한 돈을 모은다는 것은 신문의 위력이 아니고는 못할 일이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시골 가서 보면 석유 등잔 희미한 불빛 밑에서 동리 사람들이 모여 앉아서 신문지가 해지도록 돌려가며 읽고, 신문에 난 말이면 만고의 진리로 듣는 형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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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0년대
1930년대 들어서면서 독립운동은 한풀 꺾이게 되었단다.
일본 침략 기간이 길어지다 보니,
많은 이들이 변절하여 친일파가 되었고,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도 그 열정을 이어가기 힘들었나 봐.
이때 다시 독립운동의 횃불을 켠 이들이 있으니,
바로 김구 선생이 만든 임시정부 의열 투쟁 단체인 한인애국단이란다.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가 일본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도쿄에서 일왕 암살 시도를 했단다.
폭탄이 안타깝게도 불발이라서 실패를 했지만 큰 반향을 일으켰어.
그리고 1932년 4월에는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전승기념 및 천장절 기념식 행사장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본군 요인들을 죽인 사건이었단다.
윤봉길 의사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고,
1932년 12월 19일 총살형으로 삶을 마감하셨단다.
아직 100년도 채 안된 시절이었구나.
…
1920년대부터 유행하던 사회주의 노선의 국내 활동은
1930년대 들어서면서 일본의 탄압에 의해 더욱 힘들어졌단다.
국내 공산당을 이끌던 이들은 이재유, 이현상, 김삼룡 등이 있었어.
이들은 경성 트로이카로도 불렀는데,
국내에서 공산당 재건을 위해 노력했단다.
이들의 이야기는 아빠도 오래 전에 안재성 님의 <경성 트로이카>라는 책들 통해서
읽어본 적이 있구나. 기억은 거의 나지 않지만…
일제의 탄압에 의해 이재유는 여섯 번 체포 당하고 여섯 번을 탈출했대.
대단하시구나.
…
상해에서 체포되어 국내 감옥에 수감 중인 여운형은 가출옥하게 되었는데,
그 후에 조선중앙일보 사장에 취임하기도 했대.
당시 신문 시장은 동아일보가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하는구나.
그런데 금광으로 떼돈을 번 방응모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동아일보의 인력을 빼오면서 조선일보가 성장하게 되었대.
그때 빼온 인력들 중에 밉상 이광수도 있었단다.
이광수는 조선일보 부사장을 비롯하여 다섯 가지 직책을 맡으면서
조선일보를 동아일보와 함께 양강체제를 만드는데 일조를 했다는구나.
당시 신문 구독자수를 늘리기 위한 방법 중에 하나가 연재 소설을 싣는 것이었어.
그래서 1930년대는 신문 연재 소설의 전성기였다고 하는구나.
많은 작품들이 신문에 연재되었는데,
그 중 가장 인기를 끈 작품은 홍명희의 <임꺽정>이라고 하는구나.
이 책은 그 이후에 오랫동안 인기를 끈 역사소설이 되었지.
…
1920년대 사회주의 문학예술문학운동단체로 번성했던 카프도
일제의 탄압으로 몰락했다는구나.
카프 멤버 중 안막이라는 작가가 있어. 물론 아빠는 처음 들어보는 작가야.
그런데 왜 이 사람을 이야기하냐면,
안막의 아내가 엄청 유명한 무용가인 최승희라는 사람이란다.
최승희라는 사람의 자세한 내용은 모르지만,
일제 시대 유명한 무용가라는 것은 알고 있었거든.
이 책에서 잠깐 최승희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이 분이 전세계로 활동하는 무용가였더구나.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줄은 몰랐네.
친일 논란이 있었지만, 당시 무용이라는 재능을 펼치려면 어쩔 수 없다고 변론하는 이들도 있었어.
해방 후에는 남편 따라 북한으로 갔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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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139)
167센티미터의 큰 키를 가졌던 최승희는 1937년부터 5년간 세계 공연을 나섰으며, 이때에 ‘반도의 무희’ ‘동양의 진주’ ‘동양의 이사도라 던컨’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전성기 당시 최승희는 ‘톱스타’답게 각국의 최정상급 명사 예술인들과 교류를 맺었다. 그와 교류한 서양인으로는 미국 공연 시절 사귄 지휘자 스토코프스키, 소설가 존 스타인벡, 루이스 레에나, 존 그로프,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 로버트 테일러, 게리 쿠퍼 등이 있다. 유럽에서는 화가 피카소를 비롯하여 시인 장 콕토, 소설가 로맹 롤랑, 미셀 지몽, 영화배우 샬 보아에이 등이 그녀와 친교를 맺었다. 파리 공연 때 파카소로부터 그림 한 점을 선사받았는데, 시가로 수억대를 호가하는 이 그림의 행방을 두고 나중에 안씨 집안(시댁)과 최씨 집안(친정) 간에 한 때 불화가 있었던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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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문학 단체로 구인회가 있었는데
이효석, 이무영, 정지용, 이상, 김유정 등도 이 단체의 멤버였대.
이상과 김유정이 비슷한 시기에 폐결핵을 사망했다고 하네.
창단 멤버는 아니지만 나중에 박태원이라는 분도 구인회 멤버가 되는데,
박태원은 아빠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한 분이란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읽어봤으면 하네.
몇 년 전에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오스카 상을 수상하면서,
봉준호 감독의 외할아버지로 박태원 작가가 소개된 적도 있어.
2. 약간의 희망
우리나라의 교육열은 엄청 높은 것으로 유명한데,
그 시작인지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제시대에도 교육열이 엄청 높았대.
보통학교 설립 운동이 일어나서 1면 1교제라 하여 한 개 면에 한 개 보통학교를 세웠대.
보통학교를 6년제로 바꾼 것도 이 시기였다고 하고…
과학이나 우생계몽운동도 일었는데,
지금은 우생학이 잘못된 학문이라서 폐기처분 당했지만,
당시에는 많이 유행했나 보구나.
우리나라에도 1933년 조선우생협회가 생겼대.
우생학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빠가 작년에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을 읽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지.
세계대공황과 히틀러가 우생학을 악용하면서 우생학은 쇠퇴했다고 하는구나.
…
1930년대에 조선을 제대로 알리자는 취지에서 조선학이 등장했다는구나.
많은 학자들이 참여하여 책들을 쓰셨어.
신채호도 합류하여 <조선상고사> 등 많은 역사책을 쓰셨단다.
<조선상고사>는 여순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쓰셨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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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농촌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이 유행했단다.
브나로드 운동은 아빠가 학창 시절에도 시험문제에 자주 출제되었던 기억이 있구나.
브나로드라는 말은 러시아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래.
이 운동의 취지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문자보급운동을 하였고,
이광수의 <흙>, 이기영의 <고향>, 심훈의 <상록수> 등이 출간되었어.
사실 심훈의 <상록수>라는 책은 브나로드가 끝난 1935년에 출간하긴 했지만,
농촌 계몽 소설로 브나로드 운동과 맥을 같이 하고 있었어.
이런 좋은 운동을 변절자 이광수가 주도한 것을 보면,
다른 뜻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어.
어떤 평론가는 이광수의 <흙>은 일본의 제국주의 노선이 담겨 있다고 평하기도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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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
브나로드운동을 주도한 것은 편집국장 이광수였으며, 그 운동의 시범작으로 쓴 것이 <흙>이다. 지수걸은 <흙>에 대해 “이광수가 <흙>에서 표방한 ‘하면 된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아는 것이 힘’ ‘티끌 모아 태산’ 등의 헛구호는 제국주의 지배모순을 은폐하기 위하여 일제가 선전한 자력갱생운동 구호와 거의 동일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며 “이러한 구호는 ‘안 해도 이미 되어 있는 자’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잘 안 될 사람’들에게 안주 삼아 내뱉는 비아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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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이 발표한 <상록수>는 동아일보 공모전에 당선되었는데,
상금으로 야학당을 지었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그 야학당은 해방 후에 이름을 상록초등학교(충남 당진에 있는 학교)로 바꾸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단다.
…
우리나라 선수로써 올림픽에서 가장 먼저 금메달을 딴 사람은 손기정이라는 분이란다.
비록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참가했지만,
당시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큰 힘을 주었다고 하는구나.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종목에서
1등은 손기정, 3등은 남승룡이 차지하면서 시상대에는 조선의 젊은이들이 두 명이나 있었어.
심훈은 당시의 감격을 글로 쓰셨는데,
지금 읽어봐도 감격이 전해지는 듯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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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시인 심훈은 8월 10일 새벽 <조선중앙일보>가 발행한 신문 호외를 받아들고 그 뒷장에 “그대들(손기정, 남승룡 선수)의 첩보를 전하는 호외 뒷등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들의 심장 속에 솟음치던 피가 2300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세계의 인류를 향해 외치고 싶다. 인제는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 터이냐!”라고 갈겨썼다. 감격에 몸을 떤 심훈은 그 즉흥시를 들고 <조선중앙일보>의 편집실을 찾아가 한바탕 읽어 들려주고는 사라졌는데, 그 이튿날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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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면서,
동아일보 등 일부 신문에서 손기정 선수의 소식을 전하면서
일장기를 지우고 신문에 실었단다.
일본은 크게 격분했지.
이후 동아일보는 일제의 강력한 탄압을 받게 되는데,
탄압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조선일보와 함께 일제 어용지로 전락하게 되었다고 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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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6)
<동아일보>는 일장기 말소 사건 후 일제의 압력에 굴복하여 친일 어용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물론 <조선일보>의 경우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조선일보>는 일제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찬양하기에 바빴다. 1937년 1월 1일 <조선일보>는 일왕 부부의 사진을 1면에 크게 싣고 같은 지면에 총독의 새해 기념사와 휘호를 실었다. 이후 해마다 1월 1일자 1면에 일왕 부부의 사진을 커다랗게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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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암흑의 시대
1937년 7월 일본은 중일 전쟁을 일으켰어.
승리한 일본은 중국 난징을 공격하여 민간인들을 포함한 수십만 명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난징대학살도 이 시기에 일어났단다.
…
김구의 한인애국단 활동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독립운동의 침체기는 이어졌단다.
독립투쟁에 있어서 분열과 연합이 이어졌는데,
우파는 김구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벌였단다.
김원봉은 김구의 단체에 가담하지 않고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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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9)
김원봉은 1937년 12월 초에 김구 중심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 가담하지 않은 중간파, 좌파세력을 결집해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다.
한상도는 “이로써 1930년대 후반기, 중국 관내 지역 한인들은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김구의 우파그룹과, 상대적으로 진보적 민족주의 성향으로 가던 김원봉 중심의 중간좌파그룹으로 양극화되어갔다.”고 했다. 1938년엔 장제스가 직접 나서 한인세력의 단결과 재편성을 촉구하게 된다. 끝없는 분열! 당시 독립군세력이 처해 있던 최악의 열악한 상황을 감안하면 이해 못할 것도 없지만, 잘했다고 박수를 쳐주긴 어렵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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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1938년에는 김원봉이 조선의용대를 이끌면서,
반대로 김구의 한국광복운동단체 연합회에 조선의용대 합류를 제안했지만,
이번에는 김구가 거절을 했다고 하는구나.
…
1937년 연해주에서도 아픈 역사가 만들어지고 있었단다.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고려인들이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이주해야 했어.
그 먼 길을 좁은 기차 칸에서 빽빽이 이동을 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단다.
그뿐만 아니라 소련은 반역죄의 명목으로 2000여 명의 고려인이 총살 당했다고 하는구나.
나라 잃음 설움은 국내외 가릴 것 없이
우리 백성들의 희생으로 돌아왔단다.
왜 소련은 스탈린이라는 독재자가 정권을 잡게 되었는지, 안타깝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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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1934년 사할인에서 출생해 <고려일보>의 사장을 지낸 조영환은 “러시아는 한인 이주민을 교묘히 이용하여 연해주 일대의 미개간지를 개척한 후에는 이 개간지에 러시아인을 이주시킨 다음 한인들을 다시 오지인 미개간지대로 추방했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1935년 이후 연해주에 상주하는 한민족 수가 근 30만 명이었는데 그 후에도 인구수가 증가하고 있었다. 조국이 인접한 이 지대가 장래에는 한민족의 자치지역으로 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스탈린 체제는 1932년부터 한민족 중 인텔리, 기술자, 농업전문가, 당 관리요원, 군무자 등 민족의 두뇌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이유는 일제 스파이라는 것이다. 한평생 조선의 독립을 위해 반일투쟁에 몸바쳐온 연해주 한민족들에게 역사의 철천지원수인 일제의 스파이라는 혐의는 만인의 단죄를 받는 야수적인 행위였다. 그 때문에 1932~1937년까지만해도 한민족의 핵심 지식인 2000여 명이 학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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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이전에도 일제의 탄압으로 만주로 이민 가는 백성들이 많았는데,
1930년대도 열풍이라고 할 정도로 만주로 이민 가는 사람들이 많았단다.
한편 1930년대 국내에도 자본주의 시스템이 들어오면서,
갑부가 되려는 이들이 많았어.
그로 인해 금광과 부동산 열풍이 일었고,
주식 투기꾼들도 많았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여러 큰 기업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 중에 경성방직이 대표적인 기업이라고 하는구나.
경성방직은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이어졌는데,
김성수, 김연수 형제가 이 기업을 이끌었는데,
이들 또한 친일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단다.
자본주의 흐름을 탔을 뿐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는구나.
…
4. 신사참배
일본은 1930년대 중반으로 넘어오면서 황국식민화 운동을 하였고,
그 일환으로 한글 교육을 중단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했단다.
1938년 6월에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을 만들어서
언론사가 주도하는 국민총동원도 했어.
이것의 목적은 내선일체를 강화하는 것이었어.
그리고 일본군에 지원하도록 언론사들이 앞장서 독려했단다.
지원병에 대한 대우로 좋게 해주다보니 지원병이 증가했는데,
이것은 먹기 살기 위한 생계형 지원이 대부분이었다고 하는구나.
일제는 역사에 있어도 식민사관을 주입하려고 했어.
단군조선에 관련된 모든 책들을 태워버렸단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에 대한 자료가 적게 되었나 보구나.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우리나라 역사를 왜곡하기 시작했단다.
이 조직에 최남선도 참여하여 일선동조를 주장하는 만행을 저질렀어.
일본은 우리나라 역사를 식민사관으로 서술한 <조선사> 35권을 펴내기도 했어.
이 <조선사>는 박은식이 1915년에 쓴 <한국통사>가 한국에서 인기를 끌자
식민사관으로 기획하여 만든 책이라고 하는구나.
이젠 완전히 조선을 식민지가 아닌 자신의 나라로 끌어들이려고 한 거야.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하여 <조선사> 제작에 참여한
대표적인 식민사관 사학자 이병도라는 사람이 있단다.
이 사람은 아빠도 알만큼 유명한 식민사관 역사가란다.
그런데 문제는 해방 후에도 이병도와 그의 제자들이 한국사를 주도했다는 거야.
그래서 오랫동안 한국사는 식민사관 역사를 배워 온 것이라고 예전에도 들었어.
이런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안되니,
오늘날 정치판에도 아직도 친일파들이 많은 것 같구나. 된장.
…
1937년 6월 수양동우회라는 사건이 있었는데, 아빠는 처음 들어보는 사건이란다.
무려 181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었는데,
4년 5개월 재판 끝에 다행해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대.
그런데 그동안 감옥에 있으면 대부분 전향을 했고,
모진 고문으로 죽은 이들도 있었어.
그 중에 도산 안창도도 포함되어 있었단다.
감옥에서는 죽지 않았지만, 투옥 중에 병을 얻어 병 보석이 되었고,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고 하는구나. (1938년 3월)
의아한 것은 안창호의 제자였던 이광수는 안창호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일본에 자신이 전향할 테니 동우회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모두 무죄를 받게 해달라고 했다는구나.
이것은 이광수가 자신이 친일 하게 된 변명으로 많이 이야기를 한대.
자신의 말대로 친일이 동우회 사건의 무죄를 받기 위한 위장 친일이었다면,
그 이후 그런 행동을 하면 안되지.
그는 이 사건 이후 주요한 등과 함께 철저하고 악랄한 친일파가 되었단다.
…
신사 참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전국 곳곳에 신사를 지었다고 하는구나.
1943년에는 무려 854개를 지었대.
신사 참배를 신을 숭배하는 것으로
유일신을 믿는 가톨릭이나 개신교에서는 원칙적으로 용납이 안 되는 것이나,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신사참배를 허용했다고 하는구나.
종교도 결국 강자의 편이구나.
개신교도들 중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한 이들도 있었는데,
이로 인해 2000여 명이 투옥되고,
200여개의 교회가 폐쇄되고,
50여 명이 순교했다는 아픈 역사가 있구나.
….
여기까지 8권의 이야기란다.
오늘은 다른 때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구나.
글이 엄청 길어졌네.
그 만큼 아픈 역사가 많던 시절이라서 그랬나 보구나.
이제 두 권 남았는데,
올해가 가기 전에 읽어야겠구나.
독서 편지가 많이 밀려서, 너희들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은 내년이 되겠구나.
그럼 오늘은 이만.
PS,
책의 첫 문장: 미국에서 1920년대는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 또는 재즈 시대(Jazz Age)’라고도 할 만큼 번영과 즐거움이 솟구친 시대였다.
책의 끝 문장: 1940년대 들어 그 전쟁기계 국가의 광란은 극을 치닫게 되며, 그 와중에서 조선인의 신음 소리는 더욱 높아져만 간다.
책제목 : 한국 근대사 산책 8
지은이 : 강준만
펴낸곳 : 인물과사상사
페이지 : 376 page
책무게 : 526 g
펴낸날 : 2008년 08월 25일
책정가 : 14,000원
읽은날 : 2023.11.29~2023.12.01
글쓴날 : 2023.12.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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