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말리 ‘No Woman, No Cry’ ~ 신나는 레게음악? 사실은 운동권노래
사진 속 남자의 헤어스타일은 우리에게 레게 머리로 잘 알려진 드레드록(dreadlock)이다. 뭐라 말할 수 없는 표정의 이 남자가 손에 들고 피는 것은 다름 아닌 마리화나. '이런 분위기 왠지 익숙하다. 그렇지! 이 사람은 뮤지션일거야'라고 추측한 사람이 있다면 꽤나 눈치가 빠른 사람이다. 우선은 당신의 추측이 맞았다. '그럼 그렇지.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원래 머리가 길고 요란하잖아. 이 레게머리를 봐. 게다가 마리화나는 음악인들이 자주 애용하잖아'라고 추측의 나래를 펴기 시작할지도 모르겠다. 자 이제 그만! 뮤지션까지는 맞았지만 그 이후의 추측은 완전히 틀렸다.
사진 속의 뮤지션 '밥 말리'(Bob Marley)는 자메이카 출신으로 우리에게는 그다지 친숙하지 않은 레게 음악의 '전설'로 불린다. 그리고 그가 드레드록 헤어스타일로 마리화나를 피우고 있는 것은 그에게는 성스러운 '종교의식'이다. 이 종교의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그의 고향인 자메이카 얘기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영국군 대위와 자메이카 흑인 여성 사이에 태어난 밥 말리 쿠바에서 남서쪽으로 145km 부근에 위치한 카리브해의 작은 섬나라 자메이카. 아름다운 해변으로 유명한 이 나라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나머지 17세기에 영국의 식민지가 되어 버렸다. 자메이카를 손에 넣은 영국의 백인들은 그 곳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했는데 기존에 이 땅의 주인이던 인디오들은 백인들이 험하게 부려서 거의 다 죽어버렸기 때문에,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노예로 대규모로 데려왔다. 졸지에 이역만리로 이주하게 된 흑인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달래기 위해 고향을 생각하며 노래를 불렀다. 이러한 노예들의 애환이 서린 자메이카 토속음악이 1950년대에 미국으로부터 전해진 '리듬 앤 블루스'와 만나면서 '레게' 음악이 탄생했다. 1945년 영국군 대위와 자메이카 흑인 여성 사이에 태어난 밥 말리는 어쩌면 이러한 레게음악을 가장 잘 부를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버지 없이 태어났고 아버지에 대해 알지도 못합니다. 어머니는 나를 학교에 보내려고 일주일에 겨우 20실링을 받으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 나는 교육을 받지 않았습니다. 대신 나는 영감을 받았습니다. 내가 계속해서 교육을 받았다면 아마도 멍청한 바보가 되었겠지요" 식민 잔재와 인종 차별, 그리고 가난이라는 모순을 한 몸에 안고 태어난 밥 말리는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 슬럼가인 '트렌치타운'에서 축구와 음악에 푹 빠진 소년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열다섯 살 때부터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밴드를 구성해 음악활동을 시작한 밥 말리는 당시에 흑인들의 해방 사상을 담은 신흥종교 '라스타파리아니즘'(Rastafarianism)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드레드록과 마리화나는 내 인생! 라스타파리아니즘은 기독교와 아프리카의 토속 신앙이 결합된 신비적 요소가 가득한 종교다. 에티오피아의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1892~1975)를 구세주의 재래로 여기는 이 종교는 노예로 강제 이주된 흑인들이 다시 아프리카로 회귀해야 한다는 운동과 맞물리면서 강력한 대중적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이 종교에서는 어떠한 종류의 신체 훼손도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구성원들은 자신의 긴 머리를 유지하기 위해서 드레드록(dreadlock)이라는 독특한 헤어스타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 '간자'라고 부르는 마리화나를 피움으로써 영적인 고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밥 말리에게 있어서 드레드록과 마리화나는 자신이 믿는 라스타파리아니즘에 대한 엄숙한 제사이자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리고 레게 음악은 바로 그러한 자신의 종교 신념을 담아서 대중들에게 전달하는 도구였다.
▲ 밥 말리의 공연모습
"음악으로써 혁명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을 깨우치고 선동하고 미래에 대해 듣게 할 수는 있다." 음악이 혁명의 중요한 무기가 될 수 있음을 확신한 밥 말리는 동료들과 함께 웨일러스(Wailers)라는 밴드를 결성해서 레게음악을 통해 공공연하게 혁명을 얘기하고 행동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밴드 이름이 '외쳐대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니 그들이 얼마나 목적의식적이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그가 1974년에 발표한 대표적인 앨범 <내티 드레드(Natty Dread)>에 수록된 곡들은 기득권들에 맞서서 민중들이 총궐기해 권리를 찾아와야 한다는 얘기를 공공연하게 주장하고 있다.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트렌치타운 국회 앞뜰에 앉아 있던 때가 기억나네요. 그때 우리는 선한 사람들 속에 섞여 있던 위선자들을 가려내고 있었죠. 긴 투쟁 동안 우리는 좋은 친구들을 얻었고, 또 많은 벗들을 잃었죠. 위대한 미래, 당신은 지난 날들을 잊지 못할 거예요. 이제 눈물을 닦으세요. 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여인이여 울음을 그쳐요, 어여쁜 소녀여, 눈물을 거두어요. 트렌치타운 국회 앞뜰에 앉아 있던 때를 기억해요. 그때 조지는 밤새도록 통나무를 태워 불을 지폈지요. 우리는 옥수수죽을 끓여 함께 나눠먹었구요. 두 발은 나의 유일한 운송수단이에요. 그래서 나는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해요. 내가 죽더라도 모든 것은 잘 될 거예요. -‘No Woman, No Cry(여인이여, 울지 말아요)’, <Natty Dread> 앨범 中 -
"음악은 혁명의 중요한 무기" 앨범의 두번째 곡으로 전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No Woman, No Cry'(여인이여, 울지 말아요)외에도 이 앨범에는 'Them belly full(But we hungry)'와 'Revolution', 'Rebel music(3 o'clock roadblock)' 등 민중들의 직접 행동을 촉구하는 소위 '불온한' 음악으로 가득하다. 그의 이러한 급진적 정치성향은 그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기도 했다.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하지는 않았지만 심정적으로 사회주의 성향의 인민국가당(PNP)을 지지했던 밥 말리는 1976년 자메이카 총선을 앞두고 인민국가당을 지원하는 콘서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친미우익정당인 자메이카노동당(JLP)의 사주로 의심되는 총기 테러로 부인과 매니저가 크게 다치고 자신도 팔에 상처를 입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밥 말리는 약 2년 동안 영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1978년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밥 말리는 거의 내전 상태에 돌입한 자국의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기획된 4월 22일의 평화 콘서트에 참여해서 인민국가당의 지도자 마이클 만리와 자메이카노동당의 지도자 에드워드 시가의 손을 맞잡게 하는 역사적인 장면을 연출해 냈다(물론 그러한 이벤트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 1978년 4월 22일 평화 콘서트에서 두 정당 지도자의 손을 맞잡게 한 밥 말리. 두 정당 지도자의 어색한 표정이 인상적(?)이다.
"그러니까 레게음악은 라스타에 의해 창조된 음악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대지의 힘, 인간의 리듬을 담고 있습니다…그것은 노동하는 사람들의 리듬, 그들의 움직임이며 민중들의 음악입니다. 아시겠습니까?" 1978년에 라스타파리아니즘의 고향인 에티오피아를 방문한 밥 말리는 당시 에티오피아 사회주의 정부가 주최한 대규모 집회에 참여하면서 아프리카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 그리고 아프리카 나라들의 독립문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기회를 접하게 되었다. 1980년에는 영국제국주의와 소수 기득권을 대변하는 백인정권을 무너뜨리고 아프리카의 짐바브웨에 들어선 사회주의 흑인정권을 기념하는 콘서트에서 '짐바브웨'라는 노래를 직접 만들어서 부르기도 했다. 더이상 내부의 권력투쟁은 그만 우린 단결하여 사소한 어려움은 극복해야 해 누가 진정한 혁명투사인지 곧 알게 되겠지 난 우리가 서로 싸우는 걸 원하지 않아 우린 싸워야 해 우린 싸울 거야 우리의 권리를 위하여 - 짐바브웨(Zimbabwe) -
36세의 젊은 나이에 뇌종양으로 세상과 이별 세계 곳곳을 돌며 레게음악을 통해 라스타파리아니즘의 전도사를 자처한 밥 말리는 1981년 36세의 젊은 나이에 뇌종양으로 안타깝게도 세상과 이별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가 세계 곳곳에 뿌린 레게음악의 씨앗은 무럭무럭 자라나서 전 세계의 수많은 음악인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가수 김건모의 '핑계' 등을 통해 레게음악이 90년대부터 알려졌다. 그러나 그저 흥겨운 리듬을 가진 외국의 음악 정도로만 치부되고 그 안에 담긴 제국주의와 기득권 세력에 대한 저항정신이 거세되어 있는 점이 매우 안타깝다. 영혼이 없는 음악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 세상을 바꾼 예술 >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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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말리 앤 더 웨일러스의 <노 우먼 노 크라이>(1974) ~ 정치와 신앙과 음악을 일체화하다
때로 한 장의 인물사진이 시대의 정서와 정세를 상징하곤 한다. 프랑스의 사진작가 펠릭스 나다르의 주장처럼 “모델을 정신적으로 인지”함으로써 드러나는 “사진의 심리적 측면”이, 중세의 성상화와 같은 아우라를 뿜어내는 경우다. 학생 운동이 절정에 이른 1960년대 후반 전세계의 대학 캠퍼스를 벽지처럼 장식했던 베레모의 체 게바라와 인민복의 마오쩌둥 사진들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덧붙이건대, 1970년대 중반 그 사진들을 대체한 것은 사자의 갈기를 연상시키는 드레드록 헤어스타일의 밥 말리 초상이었다. 그것은 일개 록 스타의 포스터가 아니라 정치와 신앙과 음악을 일체화시킨 영웅적 존재의 이미지였다.
비평가 윌리엄 매킨은 “어떤 대중음악가도 정치적 존재감과 음악적 위상을 밥 말리와 같이 결합시키지는 못했다”고 평했다. 실제로 말리는 가난한 섬나라 자메이카를 레게 선율의 명료한 이미지로 세계인의 뇌리 속에 각인시킨 위대한 뮤지션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상에 불타는 젊은이들의 영혼을 사로잡은 제3세계 부흥 운동의 아이콘이기도 했다. 300년 넘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청산하고 1962년 비로소 독립을 쟁취하긴 했지만, 자메이카는 여전히 인구의 2%가 부의 80%를 독점하는 불평등의 나라였고 빈곤이 범죄를 낳는 악순환의 고리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상태였다. 수도 킹스턴의 대표적 슬럼인 트렌치타운의 비루한 공공주택단지에서 성장기를 보낸 말리는 그 비참한 현실을 고발한 노래들로 세상을 각성시킨 혁명가였던 것이다.
웨일러스의 멤버로 이미 60년대 중반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한 밥 말리는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마침내 세계적인 뮤지션으로 자리매김했다. 그에게 공연의 오프닝을 맡긴 롤링 스톤스(당시 기타리스트 키스 리처즈는 항상 밥 말리의 아이콘적 사진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무대에 올랐다)와 그의 노래 ‘아이 샷 더 셰리프’를 커버해 빌보드 차트 정상에 올린 에릭 클랩턴의 외적 조력이 상당한 구실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인 요인은 ‘노 우먼 노 크라이’의 성공이었다. 1974년 앨범 <내티 드레드>의 수록곡으로 처음 발표되었던 이 노래는 이듬해 7월 벌어진 전설적인 런던 라이시엄 극장 공연의 실황 녹음으로 최상의 격찬을 받았다.
‘노 우먼 노 크라이’는 밥 말리가 트렌치타운에서 보낸 과거를 회상하며 만든 노래다. “우리가 가진 좋은 친구들과 우리가 잃은 좋은 친구들”을 떠올리며 “이 위대한 미래에도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잊을 수 없습니다”라고 얘기하는, 서글프지만 결연한 외유내강의 진혼곡이다. 말리는 이 노래의 저작권을, 기타 연주를 가르쳐준 멘토이자 거처를 제공해준 은인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필생의 친구였던, 빈센트 포드에게 줌으로써 곤궁한 시기의 기억을 스스로 보상하기도 했다. 인민의 영웅다운 행보였다.
고로, 노래 제목의 의미는 ‘노 우먼, 노 크라이’(여자가 없으면 울 일도 없다)가 아니라 ‘노, 우먼, 노 크라이’(여자여 울지 말아요)가 맞다.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 |
출처: 사색과 여유 원문보기 글쓴이: Woodst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