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 장에 가면
이 은 정
우리나라는 예부터 지역마다 날짜가 다른 오일장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17세기 말부터 시작해서 아주 번성했던 오일장은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 쇠퇴해져 가고 있는 실정이다. 대가족제도에서 핵가족시대로 생활방식이 변하고, 기업형의 대규모 마트 같은 유통방식이 늘어난 것이 한 원인이 된 것 같다.
그래도 우리 생활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편이다.
어린 시절에 나는 닷새마다 열리는 장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어머니는 장날마다 장에 가셨고, 무겁게 이고 오신 보따리에는 신기한 물건들과 맛있는 먹을거리들,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들이 가득했었다. 어머니를 졸라서 어렵게 따라가 본 장의 풍경들은 아직도 아련한 추억의 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
김해지방에는 다섯 군데의 오일장이 열린다.
매월 날짜의 끝수가 1일 6일은 녹산장, 2일 7일이 되는 날은 김해장, 장유 장은 3일 8일, 진례 장은 5일 10일이고, 내가 사는 진영은 4일 9일인데, 장날엔 시골동네의 버스 정거장이 제법 북적거렸고
“장에 가나?"
“장에 갔다 왔나?"
장바구니를 든 아낙네들이 수다스럽게 인사를 주고받는다.
그러나 이제는 장에 가는 사람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어서 장날에도 조용하기만 하다.
진영 장은 1885년에 설창마을에서 처음 시작이 되었고 1928년에 현재의 진영장터로 옮겨졌다고 하니 대략 80년 정도의 역사를 지닌 것 같다. 한창때는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북적거릴 정도로 아주 큰 장이었다고 한다.
진영은 유명한 소설가 김원일 씨의 고향이기도 하다.
1942년 장터 부근에서 태어났고,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진영에서 살았다고 하니, 그때는 오일장이 아주 번성했을 시기였을 것이다.
그의 소설 노을, 불의제전, 어둠의 혼 등이 모두 고향인 진영장터 부근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책 속에는 그가 보고 느꼈던 장터의 모습들이 사실적으로 묘사된 부분이 많은 것 같다.
장터부근의 금병공원에 가면 그의 문학비가 세워져 있고 장편소설 “노을”의 마지막 부분이 이렇게 새겨져 있다.
"지금 노을 진 차창 밖을 내다보는 현구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고향은 반드시
어둠을 기다리는 상처 깊은 고향이기보다 내일 아침을 예비하는 다시 오고 싶은 고향일 수 있으리라“
나는 진영장에 자주 가는 편이다.
특별히 무얼 사러 가는 일도 있지만, 그냥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맘에 드는 물건을 발견하면 충동구매를 하곤 한다.
진영농협 맞은편에서부터 시작되는 장판이 어물전, 싸전을 거쳐 기름 집과 채소 전, 과일전 등으로 이어지고 밭에서 직접 캐거나 따온 채소나 과일들을 파는 소규모 상인들이 차가 다니는 길거리까지 전을 펼친다.
싸전 옆에 자리 잡은 뻥튀기장수는 이 지역 다른 장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터집니다.'하는 신호로 호루라기를 호루루 불고는 펑! 하고 박상 터지는 소리를 내도 사람들은 오래 익숙해진 탓에 그리 놀라지도 않는다. 쌀이나 옥수수처럼 부피가 많이 늘어나는 건 소리가 크게 나고 콩이나 둥굴레 차 같은 것은 소리가 작은 것 같았다.
어물전으로 올라가는 길목엔 방금 찐 옥수수며 연근 삶은 것 등이 입맛을 당기게 하고 장어껍질을 고아서 만든 어묵 같은 특이한 먹을거리가 나올 때도 있다.
봄이면 여러 가지 묘목들과 꽃 화분을 파는 꽃시장이 서는데 꽃구경도 하고 명찰을 붙인 꽃 이름을 외우는 공부도 공짜로 할 수 있는 재미도 있다.
마트에서는 말 한마디 안 해도 가격표만 보고 물건을 살 수 있는 편리한 점이 있지만. 시장에선 일일이 물건값을 물어보고 흥정을 해야 하니 자연히 시끌벅적하다, 그래도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는 모습에서 사람 사는 즐거움이 있고, 값을 깎아 주고, 덤으로 얹어주는 모습에서 훈훈한 시골인심도 느낄 수 있다. 당연히 가격도 마트보다 훨씬 싸다.
젊은 사람들 중에도 알뜰 주부들은 오일장을 많이 이용하는 것 같다.
장터를 기웃거리다 보면 오랜만에 만난 이웃들끼리 이야기꽃을 피우는 여인네들을 자주 보는데, 나도 종종 친구들을 만나고 뜻이 맞으면 장터의 국숫집으로 가기도 한다.
언젠가 서울에 사는 며느리와 제사장을 보기 위해 진영장엘 갔는데, 옷가게를 쳐다보던 며느리가, 나이 드신 친정 할머니가 입을 스웨터와 블라우스를 골라서 사며 아주 안성맞춤이라며 좋아했었다, 만 원에서 오만 원 정도의 수수한 옷들을 파는 가게주인은 장사가 잘되느냐는 나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장사는 영 시원찮지만 그래도 어쩌다 찾는 단골손님들을 만나는 재미로 장날마다 전을 편다고 한다.
최근 들어서 재래시장을 활성화 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지역에 따라서는 구체적인 사업이 진행되고 있기도 하다. 진영시장도 건물 정비 사업이 시작되고 있는 중이다.
오늘은 진영장, 9일 장날이다.
지갑을 조금 두툼하게 챙기고 장으로 가는 14번 시내버스를 탄다.
검은 흙이 묻어 있는 싱싱한 마를 한 묶음 사고, 수삼도 조금 사야 하고, 내일 비가 온다고 하니 모종용 고구마 순도 두 단쯤 사야 한다. 운 좋으면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나 시원한 냉콩국수라도 한 그릇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장날에 사람이 북적거리면 왠지 기분이 좋아진다.
시끌벅적한 장터를 한 바퀴 돌아 나오면, 느슨해지려는 일상의 흐름이 생기를 찾게 되는 것 같다.
.정부와 지자체의 슬기로운 대처방안과 지역 주민들의 노력으로 진영장뿐만 아니라 쇠락해져 가는 우리 고유의 재래시장들이 모두 활기찬 장날을 맞이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첫댓글 어릴 때 밀양에서 진영장에 갈라면 김해가는 버스로 수산에서 내려 넙적한 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 했습니다. 재미있었습니다요.
지금은 길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