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 2일
중국-대만 직항로 52년 만에 개설
대만 진먼다오에서 중국 샤먼으로 직행
하는 선박 태무호에 올1949년 이후
단절됐던 중국과 대만의
직항 바닷길이 2001년 1월 2일 반세기
만에 다시 열렸다.라탄 대만 관리들이
보도진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있다.
1949년 이후 단절됐던 중국과 대만의
직항 바닷길이 2001년 1월 2일 반세기
만에 다시 열렸다.
이날, 대만의 마조도를 출발한 대마호가
3시간 반 뒤 맞은 편에 있는 중국 복건성의
복주항에 도착함으로 중국과 대만이 52년
만에 직항로를 연 것이다.
마조도 남쪽에 있는 금문도에서도 이날
태무호 등 선박 2척이 직항길에 올라
중국 샤먼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직항은 대만의 마조도-금문도 2개 섬과
중국의 복주-하문 2개 항구 사이에 개설됐다.
대만 중국시보는 “정부가 마조도-금문도
2개 섬이 복건성-하문과 상호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에 소규모 무역을
양성화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도 “정부가 대만의
제의를 받아들였으며, 금문도와 마조도
주민들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정책을 지원할 것”이라고 보도했다.
천수이볜(陳水扁) 대만 총통은 지난 5월
취임 후 ‘소삼통(小三通)’을 주창해왔다.
‘소삼통’이란 중국과의 전면적인 삼통
(통상- 통항-통우) 실시에 앞서 우선
중국과 인접한 일부 섬들에 한해 3통을
실시한다는 것.
한편 중국 관광객을 태운 여객선이
2월 6일 푸젠성 샤먼을 떠나 대만의
진먼섬에 도착해 대만의 ‘소삼통’ 정책에
호응했다.
▶2007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첫 출근
▶2007년 제럴드 포드 전 미국 대통령 국장
▶2007년 최초 여성 헬기조종사는
김복선 예비역 대위
▶2003년 중국, 세계최초로
자기부상열차 시범운행에 성공
▶1992년 미국 언어학자 한스 쿠라트 사망
▶ 1982년 중고생 머리, 교복 자율화 발표
1982년 오늘!
문교부는 중・고등학생의 머리와 교복의 자율화 방안을 발표한다.
머리 모양은 새 학기부터, 교복은 다음 학년도 신입생부터 자율화한다는 내용이다.
배재학당 학생들이 처음으로 교복을 입기 시작한 1898년 이후 85년 만에 처음으로 교복자율화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문교부는 1986년 2학기부터 학교장의 재량에 따라 교복을 입거나 자유복을 입도록 정책을 바꿨다.
▶ 1976년 한국의 동양화가 박래현(朴崍賢) 사망
박래현 [朴崍賢, 1920.4.13~1976.1.2] 한국의 동양화가.
호 우향(雨鄕). 평남 진남포(鎭南浦) 출생. 1944년 일본 도쿄[東京]여자미술전문학교 일본화과를 졸업하고 1940년부터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 최고상인 창덕궁상(昌德宮賞)을 수상하였다.
8·15광복 후는 남편 김기창(金基昶)과 12차례 부부전(夫婦展)을 가졌고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기창과 같이 동양화의 전통적 관념을 타파하고 새로운 조형실험(造形實驗)을 전개하였다.
1956년 제8회 대한미술협회전과 제5회 국전(國展: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각각 대통령상을 받고 1961년 이후 국전 심사위원, 서울시 문화위원을 역임한 뒤, 서울대학교와 성신여자대학교 강사가 되었다.
또 1969년 뉴욕 플래트 그래픽 센터와 봅 블랙번 판화연구소에서 판화를 연구하여 동양화의 실험적 의욕을 판화란 매체로 실현시켰으며, 1974년 귀국 판화전을 계기로 새로운 시도를 전개할 무렵, 1976년 정초에 타계하였다.
그의 초기 작품은 다분히 일본화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광복 후 여성 특유의 감성을 바탕으로 한 섬세한 설채(設彩)와 면 분할에 의한 화면구성으로 동양화의 새로운 실험을 전개하였다.
1950년대에는 극히 일상적인 시정풍경에서 모티프를 찾았으나,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는 대상을 극복한 순수추상의 세계로 나감으로써 명쾌한 정신성을 추구하였다. 채색의 장식적 톤은 종합적으로 현대 서양의 입체파가 도달한 조형방법론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작품으로 《노점(露店)》 《이른 아침》 《화장(化粧)》 등이 있다.
▶1963년 드골 프랑스 대통령
독자적 핵군(핵무기 관련 군대)창설 선언
▶1959년 최초의 달 탐사선 루나 1호 발사
소련, 최초의 달 탐사선 '루나 1호' 발사
1959년 1월 2일 소련은 최초의 달 탐사선 루나 1호를 발사했다. 루나 1호의 성공적인 발사는 본격적인 우주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힘찬 서곡이었다. 소련의 무인 탐사선 루나 1호는 예정된 궤도를 이탈하긴 했지만 처음으로 달에 근접해 달 착륙의 청신호를 밝혔다. 발사 당시 루나 1호는 타원형의 몸체에 모두 10개의 긴 안테나를 장착하고 있었는데 소련의 붉은 군대를 상징하는 강철 휘장들을 덮어쓰고 있었다. 이후 17년 동안 소련은 모두 24개의 루나 우주선을 달에 띄웠다. 이들 가운데 루나 2호(1959. 9. 12 발사)가 처음으로 달과 충돌했고, 루나 9호(1966. 1. 31)는 최초로 달 표면에 착륙했다. 미국이 아폴로 계획을 서둘러 추진한 것도 소련의 스푸트니크와 루나 때문이었다. /브리태니커
지난 1959년 오늘 러시아어로 달을 뜻하는 소련의 무인 우주선 루나1호가 달을 향해 날아올랐다.
이 우주선의 몸체 무게는 361.3㎏, 속도는 초속 11.2 ㎞였다.
소련은 스푸트니크 1호를 발사하고 나서 이미 달 탐사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58년 이후에는 달을 착륙시킨 후 조사를 진행할 루나 계획을 실시했다. 최초 3번은 실패하였으나, 4번째 발사시도였던 1959년 1월 2일에 발사를 성공시켰다. 한편 세계 최초로 달 착륙을 시도했다가 기술적인 문제로 달 근방 5995㎞까지만 접근했다. 현재 루나 1호는 궤도를 바꾸어 지구와 화성 사이의 궤도를 돌고 있다.
Luna Rocket Launch
▶1959년 영국 첫 원자력잠수함 건조
▶1956년 민정당 발기
(최고위원 이범석, 장택상)
▶1951년 간행물 사전검열제 시작
▶1946년 공산당, 신탁통치 지지선언
▶1942년 일본군, 마닐라 점령
▶1937년 경기도 파주 부근 진도 3의 지진 발생
▶1935년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회 개최
▶1929년 미국-캐나다,
나이아가라 폭포 보호협정 조인
▶1921년 서재필, 미국 대통령과 요담
▶1920년 미국의 생화학자
아이작 아시모프 출생
▶1905년 일본군, 여순 점령
▶1896년 소련의 영화감독 베르토프 출생
▶ 1895년 - 1948년 스웨덴의 왕족, 외교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협상을 통해 450명의 덴마크 유대인을 포함한 31,000명을 독일 테레자인슈타트 강제수용소에서 구해낸 인물
사
폴케 베르나도테 아브 비스보리 백작
폴케 베르나도테 아브 비스보리 백작(스웨덴어: Folke Bernadotte greve af Wisborg, 1895년 1월 2일~ 1948년 9월 17일)은 스웨덴의 왕족, 외교관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협상을 통해 450명의 덴마크유대인을 포함한 31,000 명을 독일 테레자인슈타트강제수용소에서 구해냈다. 1945년 나치 친위대 총수 하인리히 힘러가 베르나도테에게 접근하여 자기 목숨을 보전하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전후 베르나도테는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 의해 1947년 ~ 1948년 아랍-이스라엘 분쟁 중재자로 선임되었다. 1948년 예루살렘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와중 시온주의 무장단체 레히에게 암살당했다.
▶1886년 노비의 세습제 폐지
1886년(고종 23) 노비의 세습을 법으로 금한 일.
조선시대의 노비는 천인이라 하여 공천(公賤)·사천(私賤)이 있었으며, 공천은 시노비(寺奴婢)·내노비(內奴婢)·관노비(官奴婢)·역노비(驛奴婢) 등이며, 사천은 사노비(私奴婢) 또는 반노비(班奴婢)·원노비(院奴婢)·교노비(校奴婢) 등이 있었다. 조선사회에는 노비의 수가 많아지고, 또한 노비 내에 분화가 생겨 노비 중에도 우열의 층이 생겼다. 공천은 사천보다 우월하여 노비로서 노비를 소유하는 경우가 있었고, 양민보다 우세한 노비도 있었다. 또 관노비는 전부 독립하여 생활하면서 입역(立役) 또는 공포(貢布)를 임무로 했다. 노비는 일종의 재산으로서, 상속·매매·기증·공출(供出)의 대상이 되었고, 종모법(從母法)에 의해 상속되었다.
정조 때는 도망자에 대한 처벌법인 노비추쇄법(奴婢推刷法)을 폐지했고, 1801년(순조 1) 내수사(內需司)와 각 관방(官房)의 노비원부(奴婢原簿)를 불태우고 공노비 5만을 해방시켰다. 86년(고종 23)에는 노비세습을 법으로 금하여 부분적인 개혁이 진행되었으며, 94년(고종 31)에는 공사노비제를 법제상으로 완전히 폐지하고 인신매매를 금함으로써 형식상 노비제는 소멸되었고,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남아 있던 유습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1872년 미국의 발명가 알버트 반스 출생
▶1822년 독일의 수리물리학자 클라우지우스 출생
▶1788년 조지아주가 미헌법상의 4번째주로 승격
▶1746년 페스탈로찌 출생
▶1492년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
그라나다 왕국 점령 · 스페인 통일
1492년 1월 2일, 이슬람이 지배하는 그라나다 왕국이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후계자인 이사벨라 여왕에게 멸망함으로써 스페인이 통일됐다.
1482년 그라나다를 향해 포문을 연지 12년 만이었다. 이로써 스페인은 780여 년 만에 정치적, 종교적 통일국가가 됐다.
이사벨라 여왕이 태어날 무렵, 스페인은 카스티야, 아라곤, 그라나다, 나바라의 4개 왕국으로 분열돼 있었다. 각각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왕위를 물려받은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드가 1469년에 결혼하면서 스페인 통일의 첫걸음이 시작됐다.
결혼 후 1474년 의붓오빠 헨리 4세에게 카스티야의 왕위를 물려받은 이사벨라 여왕은 5년 뒤 아라곤의 왕이 된 남편과 함께 카스티야 귀족들의 권력을 무력화 시킨 후에 그라나다를 손에 넣어 스페인 통일을 이루어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중 하나인 그라나다 왕국의 알람브라 궁전은 이 전쟁에서 폐허가 될 뻔한 위기를 넘겼다.
이사벨라 여왕이 자금을 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도 이 해에 이뤄졌다. 이사벨라 여왕은 종교를 탄압한 군주로도 이름을 날렸는데, 종교재판소를 통해 비가톨릭 교도를 추방하거나 개종시키면서 2,000여 명을 화형 시키기도 했다.
이후 이사벨라 여왕은 아메리카 대륙에까지 식민지를 둔 강력한 스페인 왕국을 남기고 1504년 11월 26일 사망했다.
그녀가 꿈꾼 유럽 통일제국은 이후 그의 외손자인 합스부르크가의 카를 5세가 완성했다.
세계사를 바꾼 세기의 결혼!
이사벨 1세 페르난도 2세
< Isabel Ⅰ & Fernando Ⅱ>
▶ 1880년 - 1955년 프랑스 항공기 설계사, 선원 및 기업가 - 루이 브레게
▶1484년 플루타크 영웅전,
이탈리아 인쇄업자 니콜라 젠손에 의해 출판
▶1410년 태조실록 편찬 시작
▶757년 안록산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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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5ZGFLs6meJo
출처 네이버지식백과,솦트리종려나무,반가운의hi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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