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봄에 무늬를 더하다
오창렬 시인
별밭
밤하늘의 어둠을 뚫을 때까지 창이었던 것이
창끝을 버리고 반짝이는 빛만 남았을 때 별이 되었지요
망망한 밤길에선 눈이 되어 지상의 길에서 길을 잇곤 하던 별
가까이 두고 아예 삶의 등대를 삼고 싶은 사람들은
별을 따고 싶다는 포부를 갖기도 했는데요
뻗은 손으로는 닿지 않고 별은
몇 개의 사다리로도 안 되는 높은 곳에 자리하여
별을 따다 준다는 말만으로도 서로를 키다리아저씨처럼 우러렀지요
사자자리, 물고기자리, 처녀자리, 오리온자리, ……
별자리를 이어보는 손가락 끝에서 밤은 전설처럼 깊었고요
어느 새벽에 깨어 별이 하늘에만 뜨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13층 창밖 아직 어둠에 잠긴 마을 위로
옛날의 밤하늘처럼 또록또록 별이 눈뜨고 있었는데요
간밤에 못다 한 숙제를 챙기는 초롱한 눈망울이랑
콩나물 한 접시를 무치는 손길들이 반짝, 반짝, 어둠을 튕겼을 터
남 다 자는 새벽에 펼쳐 드는 책 한 권이
또각거리는 도마소리가 하늘에 놓는 사다리여서
별을 딴다는 생각 없이도 하나, 둘, 별을 따고 있었던 것이지요
새벽마다 사람의 마을에도 별밭이 휘황했던 것이지요
별밭을 일구는 사람들
태초에 별이 있었고, 사람들의 밤은 별과 함께 시작되었을 것이다. 별이 있어 밤은 짧았고, 길어도 좋았을 것이다. 저 기원전의 유목민들이 밤하늘의 별들을 동물에 비유하면서 별자리가 생겨난 이래 바빌로니아와 이집트의 천문학이 그리스로 전해지면서 별자리에 신화 속 신과 영웅의 이름이 붙었다. 항해가 발달하고 망원경이 발달하면서 밤하늘은 별자리만으로도 가득 빛나게 되었다. 별자리는 밤하늘의 지도가 되어 주었다.
별자리가 되지 못한 별들을 두고도 우리는 너의 별, 나의 별 나누며 밤을 새웠다. 밤하늘의 별에 우리의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을 새겼다. 그렇게 우리의 시가 된 별은 우리의 사랑을 더 빛나게 하고, 우리의 슬픔을 헹궈 맑게 씻어주었다. 별은 또 초롱초롱한 빛만으로도 우리들의 용렬함을 맑고 높은 것으로 씻어주고 들어 올려주었다. 그리하여 세상에는 꿈꾸고 고뇌하는 가운데 특별한 신념을 실천하여 빛이 된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별이 된 사람이라고 기리기도 했다.
별은 너끈하게 우리들의 삶의 지도가 되어 주었던 것인데, 도시의 휘황한 불빛이 별을 대신하면서부터 우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점점 밤하늘을 잃어버렸다. 어쩌다 태양과 지구와 달과 화성이 일직선이 되는 우주 현상이 몇십 년 만에 일어난다고 뉴스가 우리를 현혹할지라도, 그때의 달과 금성과 화성 들은 관측의 대상일 뿐이다. 그 별에는 더 이상 우리의 추억이나 슬픔이 없는 까닭이다.
우리가 밤하늘의 별에 우리의 이야기를 새겨넣을 때 밤은 낮과 함께 우리의 시간이 되었고, 하늘은 땅과 함께 우리의 공간이 되었었다. 따라서 별이 사라졌다는 것은 밤과 하늘이 사라졌다는 얘기여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절반의 시간과 공간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의 존재인 우리는 별을 잃어버림으로써 결국 우리의 사랑과 슬픔까지를 상당 부분 잃고 사는 셈이다.
그러던 어느 새벽 나는 이 땅에서 별밭을 발견했다. 차가운 공기를 거실까지 밀고 나갔던 나로서도 희한한 새벽, 별밭의 찬란함에 나는 입 벌린 채 넋을 놓았다. 오랫동안 별밭을 잊고 살아온 터라 그때의 느낌은 ‘발견’의 기쁨, 그것도 전율에 가까운 기쁨이었다. 사람들의 욕망이 꾸는 꿈이 질척질척 뒤척이는 시간, 맑은 영혼들이 깨어 어둠을 뚫고 있었음을 기쁘게 알았다.
자신의 꿈을 키우며 책장을 넘기는 순한 눈망울의 학생, 가족의 새로운 하루를 위해 사랑을 요리하는 주부의 흰 손, 사람들의 다리가 되어 새벽을 실어 나르는 운전기사, 빗자루를 들고 지구를 청소하는 미화원 …… 그들은 내 상상 속에서 새벽의 어둠을 튕겨내며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 별들로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새벽마다 아름다운 별밭이 무성해지곤 했던 것이다. 그날 이후 세상에는 무슨 꿈으로 반짝일 수 있을까 고민하는 잠시 별이 되었을지 모를 나의 새벽도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