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하지 마시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치면서 모교에서 처음으로 담임을 맡았던 때다.
당시 나는 젊었었고, 또한 교육에 대한 사명감과 정의감에 그 누구보다도 불타 있었다.
그런데 담임한 학급에서 학기 초부터 도난사건이 자주 일어났다. 도난 물건이라야 학생들의 연필이나 볼펜,
아니면 당시 버스표 정도였지만, 이런 사건이 하필이면 내가 담임한 학급에서 빈번히 일어나니, 자존심이
강한 내 처지가 말이 아니었다.
1학기가 지나고 2학기도 거의 지나가고 있건만 도난사건은 일주일이 멀다하고 일어났고, 범인은 아무리
추적해도 오리무중이었다.
나는 잔머리를 굴려 종례시간에 학생들에게 종이를 한 장씩 나눠주고, 범인으로 의심이 가는 학생 이름을
적어내라고 했다.
학생들이 적어낸 쪽지를 모아 교무실에 들고 와서 하나하나 펴보니, 학생들의 80% 이상이 A군을 지목했다.
그러다보니 나도 A군이 의심이 갔다. 왜냐면 학급에서 도난 사건이 일어나면 A군은 유난히 안절부절 하였고, 더구나 남의 시선을 이리저리 피했다.
그러나 A군이 범인으로 의심은 가지만 도저히 확증을 잡을 수가 없었다.
성격이 급한 나는 참지를 못하고 방법 중 가장 하급의 방법을 택했다.
그 날도 역시 소소한 도난사건이 생긴 것을 빌미로, 종례를 일찍 끝내고 A군을 조용히 남겨 아무도 없는
과학실험실로 데리고 가서 의자에 앉혀 놓고 점잖게 유도 심문을 했다.
그러나 A군은 처음부터 협의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억울하다고 눈물까지 보였다.
할 수 없이 학생들로부터 받은 쪽지를 보여주며 이래도 자백하지 않겠느냐고 엄포를 했지만, A군은
절대로 자기는 범인이 아니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렇지만 이미 A군을 범인으로 지목한 나는 말로 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A군을 엎드려뻗쳐 시켜놓고 대걸레 자루로 엉덩이를 때리면서 자백을 강요했다.
그러나 A군은 끝내 자백을 하지 않았다. 결국 나도 지쳐서 그 날은 성과 없이 A군을 집으로 돌려보낼 수
밖에 없었다. 난감했다. 맥없이 집에 돌아와 잠을 자려니, 그날 밤은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역시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불안한 마음을 안고 아침 일찍 출근하여 교무실에 앉아있는데,
교무실문이 열리면서 건장한 40대 정도의 남자학부형이 나타났다. 나도 모르게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학부형에게 다가가 어찌 오셨느냐고 물으니, 예상대로 학부형은 A군의 담임인 나를 찾아왔다고 했다.
내가 A군의 담임이라고 정중히 인사를 드리고, 내 자리로 안내하여 옆에 있는 의자를 권하면서 앉으시라고
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서랍을 열고 학생들로부터 받은 쪽지를 A군의 부친에게 내 놓았다. 그러자 A군의 부친은
쪽지를 하나하나 읽어보고, 잠시 눈을 감고 묵묵히 앉아 있더니, 간단히 한 말씀을 했다.
‘내 아이는 내가 믿는다. 내 말을 믿고 앞으로 내 아이는 의심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나는 A군의 부친에게 두 번 세 번 머리를 조아리며 앞으로는 절대로, 누가 뭐래도 A군을 의심치 않겠다고
단단히 약속했다.
그 후에도 학급에서 여전히 도난사건이 일어났지만, 크게 별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학년말에 가서야 드디어 엉뚱한 장소에서 전혀 생각지 못한 진범이 잡혔다.
P군이었다. P군은 평소 말이 별로 없고, 얌전한 학생으로 그 누구도 P군을 범인으로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문제라면 P군은 부모가 일찍 이혼하여 연로한 할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라고 있을 뿐이다.
학년말에 P군이 현장에서 잡혔을 때는 그동안 P군의 손이 커져서 교무실이 빈틈을 타 선생님들의 값이
나가는 사전이나 참고서등을 훔쳐 헌책방에 내 팔다가 선생님들의 원성으로 잠복근무를 하던 교무실
사환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P군을 조사해보니 그동안 학급에서 벌어진 소소한 도난 사건이 모두 P군의 소행이었다.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P군은 학교 교칙에 따라 인근학교로 전학을 당하고 말았다.
지금도 A군과 P군을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하다. 그러나 나는 A군을 통해 의심에 따른 무서운 결과를
일찍이 알게 되었고, 또한 P군의 좋지 못한 버릇을 좀 더 일찍 발견하여 끝까지 선도하지 못하고,
전학을 보낸 것이 몹시 아쉽다. 그 때가 지금 나라면 어찌했을까?
2019.8.8
첫댓글 감명 깊게 잘앍었습니다.
남을 의심 한다는 것은 죄악입니다. 학생들은 왜 a군을 지목했을까? a 군과 p 군을 다른 방법으로 지도했으면 어땠을까요?
그러나 지금은 두학생 모두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 했을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