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까치 쉼터 찾는 시골은 어느 산이든지 솔숲이 번성하게 됨을 보게 된다.그런 번성함도 지난날엔 감상에 젖은 눈으로만 볼 수 없는 이들이 있었다.풀잎마저 이슬에 스며드는 아침에도 땔감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그것은 경상북도 경주시 서면의 샘촌에 위치한 오봉산으로 인해서이다.
그 아래의 첫 동네는 나의 고향으로 윤관 장군의 후손들이 옹기종기 모여사는 집성촌이다.
눈만 뜨면 오봉산이 마주한 나의 어럴적 고향집 둘레에는 삼면이 가까운 산이었다.남달리 산을 많이 접하시는 나의 아버지는 매년 산으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 오셨다.
봄이면 청솔가지로 만든 송기는 한겹만 벗겨도 물기가 촉촉하였다.그 속껍질은 간식과 걸맞게 질근질근 씹을 수도 있는 껌 역할까지 대행했다.송기얹은 아버지의 지게위에는 진달래가 하도 생기 있어 나비들도 잘 따르곤 하였다.
그런 중에도 부드러운 쑥취나물은 아버지의 나무치던 낫으로 잘 베어 오셨다.뒷잎 하얀 나물을 삶은 며칠 후면 이웃의 노인분들은 아버지의 곁으로 몇몇씩 모여 드신다.온정을 자주 나눔이었을까,그을은 노인분들의 흥겨움도 쑥떡 속에 오래도록 자자해졌다.
그럴 때면 초여름이 소리없이 다가서고 있다.뜨거워진 햇살이 앞동산에 떠오르면 나와 동네의 꼬마들은 삽짝문에 기대어 아버지를 기다린다.
한참 후면 가시가 송송한 줄기산딸기는 아버지의 지게에서 빠지지 않는 명물이었다.뽀족한 가시가 손가락에 찔려 따끔따끔하여도 우루루 몰려 따먹던 산딸기,빠알갛게 잘 익은 알갱이는 아버지의 속정처럼 먹고나도 훗날이면 또 찾게 된다.
그 당시만 해도 식전부터 선산에서 일하시던 나의 아버지는 무척이나 건강해 보이셨다.
점심 때의 도시락을 들고 다녔던 내게의 아버지는 넉넉한 오봉산이셨다.때론 큼직한 바위가 되어져 산에 서면 아버지가 산의 전부였다.
그리고 대나무로 만든 초립인 도시락을 들고 산에 오를 때면 청정한 개울물이 언제나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날씨가 더우면 더운대로 추우면 추운대로 나는 산 앞 개울가에 서서 골깊은 산을 향해
"아버지!아버지!"
하고 배에 힘을 주어 소리치면 이름모를 산새가 먼저 날개짓하며 달아나 버린다.그런 후 몇 번을 더 불러야 아버지의 대답은 메아리가 되어 나에게로 돌아온다.
팔남매중 유일하게 고향을 지키며 선산을 지키기로 작정한 사람은 나의 아버지셨다.아버지는 항일투쟁의 명목 등으로 학교를 세우신 이름이 있는 선비의 둘째 아들이셨다.그러나 아버지는 바쁜 농번기만 빼고는 늘 산 속에 계셨다.
스무살 때는 열여덟살이셨던 나의 어머니와 백년가약을 맺으신 나의 아버지는 휘파람 소리를 잘 내신다.내가 아버지의 남은 밥을 꿀맛처럼 먹게 되는 것도 아버지의 그 휘파람 때문이었다.
그러시다가 일에 흥이 더 나시면 러시아가 낳은 안나 아흠나토바의 '진혼곡'보다 감동적이고 한국고시에서 유명한 정몽주의 '단심가'보다 쾌창한 듯한 노래를 마음껏 부르신다.
"릴리리야,닐~리~리~야~아~..."
비록 박자는 완전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목소리는 산울림이 되어졌다.그래서 때로는 내가 아버지를 못찾을 때면,나는 아버지의 노래소리나 휘파람을 따라 오른다.그러면 아버지는 언제나 겸연적어 씨익 웃으신다.
논둑길을 길게 돌아 샛길을 향하여 산을 오르시던 내 아버지.그렇게 힘 좋으시던 아버지가 병마로 꼼짝없이 누우신지 벌써 이십 년!
일제 때는 징용으로 끌려가 힘없는 삶과 처참한 죽음을 보셨던 내 아버지,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버티시며 샘촌마을에 두고간 처자식을 위해 수 많은 편지로써 마음을 달래셨다는 나의 아버지.그리고 이 땅의 아들들....그러나 그렇게도 바라던 조국의 해방은 되었건만 동족상잔의 비극이 있을줄은 어이 알았으랴.
산 너머 산이 겹친 아버지의 고난은 배로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그것은 전란중 경찰의 간부이신 큰아버지의 직업이 문제였다.그러기에 인민군이 출동하는 밤이면 아버지는 콩밭이랑을 찾아야만 하셨다.
그런 난리를 많이 겪어서일까,나의 어린시절 이웃에는 젊었던 남자들은 그의 없었다.피바람의 흔적이었다.
황소대신 남편을 빼앗긴 이들중에는 미쳐버린 사람도 있다.또한 다른 곳으로 살러간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많은 상처를 안은 세월은 휴전선과 함께 이런 날을 낳았다.그때가 가슴이 저려 허공을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눈동자엔 슬픔이 고였음을 난 진작 몰랐었다.
이맛골 깊게 패인 아버지는 가끔씩 오남매의 자식들을 사랑방에 앉히셨다.그리곤 일제의 잔혹함과 육이오의 뼈저린 교훈을 가르치셨다.그렇지만 나와 형제 자매들은 또 그 소리하며 외면만 일삼았다.아버지에겐 불효막심한 일들임을 왜 이제야 알았을까!
그럼에도 아버지의 진솔한 내면을 보게 된 것은 어느 한방병원이었다.그렇게도 끈기있게 버티시던 아버지가 끝내는 반실불수가 되고난 후였다.
왜병에게 너무 맞아 골병들고 인민군들에게 습격 당했어도 목숨만은 살아나질 않았던가! 그렇게 가족들에게조차 안보이셨던 역사의 흔적을 보는 이들은 그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멍이 들어 더 이상 푸를 수 없었다.더 이상 검을 수도 없는 환란의 자국,시련의 자국들이 아니던가!
아! 이제는 언제 또 다시 그 산 앞에서 나의 꽃고무신에 물이 들어 찰박찰박이며
"아버지!아버지!"
하고 부를 수 있을까?
내 유년의 기억 너머로는
"나 여기 있다. 작년에 밤을 따던 밤나무 옆을 지나 돌감나무 쪽을 향하거라.그리고 네 조부와 조모의 산소 위로 계속 올라오너라.위로만......"
하실 것만 같은 오봉산은 그대로이고 여전히 시냇물도 흐른다.
소리내는 냇물처럼 메아리 된 이 땅의 아버지들이 그렇게도 바라던 남쪽에는 평화가 있다.
해마다 꽃도 피고 새도 운다.언젠가는 저 북쪽에도 압록강과 두만강이 녹아내려 평양이 짙푸른 초원으로 어우러지리라.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땅으로도 봄은 오리라.
그럴 때를 손꼽아 기다리며 이젠 내가 아버지에게 받았던 사랑을 되세겨서 펼쳐 보리라.미래지향적인 생각과 질펀한 용서의 메아리로 가슴 속을 데우리라.영원한 오봉산의 메아리로 품어 겸손한 삶의 선구자가 되리라.온유한 빛과 소금으로 남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