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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를 다시 생각하다 - 함양 선비문화 탐방로 ①
글 : 박대영 기자
SBS 뉴스 기사 등록일 : 2017.09.19.
내 고향은 산, 산 그리고 쪽박샘에 늙은 소나무, 소나무 그림자. 눈이 와 눈이 쌓여 장끼는 배고파 까투리를 거느려 마을로 내리고, 눈 녹은 마당에서 듣는 솔바람 소리. 부엌에서 뒤란에서 저녁 늦게 들려오는 어머니 목소리. <내 고향은> - 나태주
고향이란 유년 시절의 애틋하면서도 즐거웠던 추억들이 지천으로 널려있는 곳이다. 특히나 나처럼 시골을 고향으로 둔 사람들에겐 고향을 떠난 지 수십 년이 흘렀어도 그 흔적들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어쩌다 들른 타향살이 객의 향수를 자극한다. 하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깨닫게 되는 고향은 시인의 시처럼, “부엌에서 뒤란에서 저녁 늦게 들려오는 어머니 목소리”가 있는 곳인지라 마음 한 끝이 아릿해지는 아픔 내지 슬픔이 공존하는 곳이기도 하다. 연로한 노모와 마주하는 것은 반가움이면서도 가슴 먹먹한 안타까움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지나는 시간 속에서 늙어가는 육신을 어떻게 해볼 도리야 없지마는, 그렇다고 그러려니 하고 바라볼 수만도 없으니, 그저 마음만 아플 따름이다. 그러함에도 멀고 바쁨을 탓하며 자주 찾아뵙지 못하는지라, 고향은 늘 스스로의 무심함에 죄스런 마음만 가득한 부채의 장소이기도 하다. 나의 부채의 장소는 경상남도에 위치한 함양이다. 누군가는 산세가 좋아 살기 좋은 곳이라고도 하고, 또 누군가는 오지(奧地)라는 표현조차도 서슴치 않는 그 곳. 애써 좋은 방향으로 생각해서 보면, 나는 그 ‘살기 좋은 곳’에서 나고 자랐다. 남쪽으로는 지리산이, 북쪽으로는 덕유산이 자리한, 거창하게는 소백산맥의 고산준령의 틈바구니에 오목하니 자리 잡은 고을이 바로 함양이다. 사실 지금이야 함양 가는 길이 번듯해졌지만, 대진고속도로 개통 이전에는 그 길이 멀고도 험했다. 얼마 전 작고하신 내 장인께서 오래 전 함양(내 고향은 함양하고도 수동면이다)을 처음으로 방문하신 다음에 ‘자네, 성공했구먼.’ 하셨다. 당신께는 이런 시골에서 나고 자라 서울까지 와서 공부하고 밥 벌어 먹고 사는 모습이 그렇게 보이셨나 보다. 그 함양의 산과 계곡을 걸었다. 길의 이름은 <함양 선비문화 탐방로>. 덕유산 자락의 수려한 계곡을 따라 이어진 길이다. 그 계곡은 ‘화림동 계곡’이다. 예로부터 화림동 계곡은 8정(亭)8담(潭)이라고도 불리는데, 8개의 정자와 8곳의 소(沼)나 못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름에 걸맞게 계곡 곳곳에는 고풍스런 정자들이 저조차도 풍경인 양 고즈넉이 앉아 있다. ‘선비문화 탐방로’라는 이름조차도 이곳의 정자들이 지어준 이름일 것이다. 길은 ‘화림동계곡’이라 적힌 표지석 앞에서 시작된다. 계곡을 향해 걸음을 내딛으면, 이내 그림 같은 풍경 속에 정자 하나가 날아갈듯 널다란 바위 위에 서 있다. 거연정(居然亭)이다. 거연정은 이름 그대로 ‘자연(然)과 더불어 살고(居)’싶은 뭇 사람들의 바람이 담겨 있는 정자이다. 그래서인지 “자연에 내가 거하고, 내가 자연에 거하니 길손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고 세상일을 잊게 하는 곳”이라는 설명조차도 그럴듯해 보인다. 거연정은 조선중기 동지충추부사를 지낸 화림재 전시서가 억새로 정자를 지어 머무르던 곳이라 한다. 지금의 정자는 후손들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하였으며, 거연정이란 이름은 '한가히 내 자연(개천과 돌)을 즐기다‘라는 뜻을 지닌 주자의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이라는 시구에서 따왔다고 한다. 정자에 서면, 덕유산에서부터 먼 길을 내쳐 달려온 계곡물이 내는 소리와 선듯선듯 불어오는 바람에 서로 몸을 부대끼는 나뭇잎의 소리가 어우러져 나그네의 닫힌 마음을 풀어 헤친다. 게다가 날개짓이라도 하는 양 하늘로 치솟은 정자의 처마 너머의 푸르름이 더해지면 눈과 귀는 호강에 겨워 저절로 열리고 만다. 평화롭다는 느낌이 아마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보통의 정자들이 풍경 좋은 곳의 가장자리에 위치하면서 자연을 바라보는 형태인데 비해, 거연정은 풍경 가운데에 자리하면서 자신도 풍경의 일부인 양 앉아 있는지라, 그 도도함이 유별나다. 다행인 것은 그 도드라짐이 거연정의 매력이라는 점이다. 거연정이 들어선 곳은 거연정이 중심에 있기 때문에 그 풍광이 더 빛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기 때문이다. 선인들의 건축 미학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거연정을 돌아 나오면 <선비문화 탐방로>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길가에 자리한 탐방로 안내도를 보자, 온통 정자 이름뿐이다. 거연정, 동호정, 군자정, 영귀정, 경모정, 람천정, 농월정, 구로정... 선비문화라는 것이 정자에서 노닐던 풍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정자문화 탐방로’가 맞을 듯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나는 ‘선비’라는 단어에 숨어 있는 그 계급성 때문에 선비문화탐방로라는 이름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도 않는다. 선비라 하면 대체로 조선시대의 사대부를 일컫는 말인데, 그 사대부들의 유학에 기초한 폐쇄성에 거부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선비는 양반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지 않은가. 양반들의 정자에서의 탁족과 음주가무라는 놀이 문화를 아무리 높게 쳐주어 ‘풍류’라는 이름을 붙여준대도 결국 그들만의 놀이이지 않겠는가. 그것이 선비문화라면, 이 길의 이름이 조금은 아쉬워 보인다. 물론 선비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있음도 알고 있다. ‘딸깍발이’로 대표되는 ‘청렴과 강직’의 선비 정신을 떠받들자는 일련의 흐름이 있음도 부인할 수 없고, 나름의 새로운 해석을 내놓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상과 생각을 탄압 내지 말살하고, 계급으로서 행해졌던 역할과 행위들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길은 훌륭하다. 녹음이 한껏 드리워진 길은 나무데크로 이어놓아 걷는 일이 가벼운 산책 수준이다. 길의 왼편으로는 높고 낮은 계곡이 흐르고 그 계곡에 담기어진 물은 때로는 부드럽게, 또 때로는 사납게 강으로 바다로 줄달음치고 있었다. 얼마 걷지 많아 만나는 영귀정의 지붕에는 잡풀들이 원래 그곳이 제 땅이라도 되는 양 맹렬하게 뿌리를 박고 있었다. 영귀정의 쇠락한 모습이 명승지나 문화재로 선택되지 못한 정자가 맞닥뜨리는 운명의 한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길은 다시 나무 데크를 지나고, 이어 들길을 지난다. 길에는 농작물에 손대지 말라는 충고(혹은 경고)가 붉게 눈을 치뜨고 있었다. 아마도 욕심보다는 호기심 많은 손이 농작물을 상하게 했으리라. 얼마나 더 걸었을까. 세차게 내처 달리던 계곡물이 어느 평평한 너럭바위 곁에서 쉬어갈 무렵, 노인은 긴 장대 끝에 그물을 매어 천렵(川獵)을 하고 계신다. 무엇을 잡고 계시려나. 문득 계곡의 맑은 물에서 유유자적 노닐던 물고기들이 혼비백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얼마나 놀랐을까? 공연한 상상에 웃음이 난다. 노인께서 천렵하시는 곳에서 머지않은 곳에 동호정(東湖停)이 있다. 동호정은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몽진하는 선조를 업고 강을 건넜다는 동호 장만리 선생이 낙향해 머물던 곳으로, 그 후손이 19세기 경 자연암반 위에 지은 정자다. 동호정은 화림동의 계곡의 정자 중에 규모가 가장 크고 화려하다. 특히 동호정 앞은 자연 암반의 우묵한 지형에 따라 세차게 흐르던 화림동의 계곡물이 쉬어가는 곳으로 시내를 이루는데, 이 커다란 담소의 이름이 옥류담이다. 이 옥류담을 너른 품으로 안고 있는 암반의 이름은 차일암(遮日岩)이다. 자연을 벗 삼아 묵향(墨香) 흩날리며 일필휘지(一筆揮之) 시구(詩句)를 적으며 노래하던 선인들의 흔적은 삐걱대는 정자 마루에서나 짐작할 뿐 어디에도 없다. 그나마 그때를 기억하는 담소도, 저 커다란 바위도 워낙 입이 무거운지라 선인들이 탁족(濯足)하던 그때의 이야기를 들을 길도 없다. 다만 그들의 땅에서 일상의 한때를 즐기는 오늘의 향락객만 오락가락 할뿐이다. (*탁족 -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는 노래에서 따온 말로,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며 노는 선비들의 피서법이다.) 예로부터 함양은 선비(유학자)의 고장으로, 좌(左)안동(安東)우(右)함양(咸陽)으로 불리던 곳이다. 이황의 안동과 필적할 만큼 뛰어난 유학자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기 때문이다. 함양이 배출한 대표적인 인물이 일두 정여창(1450년∼1504년)이다. 정여창은 사림(士林)파의 중시조격인 김종직의 문하로, 연산군의 스승이었지만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탄핵되고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하지만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신원이 복권되어 동국도학(東國道學)의 종(宗)으로 숭상되고, 이후 1610년(광해2년) 정몽주,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와 더불어 동방5현으로 문묘에 종사하였던 유학자이다. 함양군 지곡면에는 정여창이 나고 자란 일두 고택(古宅)이 그 옛날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정여창을 배향한 서원인 남계서원(藍溪書院) 역시 잘 보존되어 있다. 남계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에도 존속한 47곳의 서원 중 하나다. 김일손을 모신 청계서원도 함양 수동면에 보존되어 있다. 참고로, 항양읍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최치원 선생이 함양 태수로 봉직할 때 자주 올랐다는 학사루(學士樓)라는 누각이 있다. 이 학사루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 하나는 이곳이 무오사화의 빌미가 되었던 곳이라는 것이다. 사림(士林)의 거두였던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이 학사루에 걸려 있던 유자광의 시를 내리도록 했고, 이에 원한을 품은 유자광이 훗날 김종직의 조의제문(弔意祭文)을 문제 삼아 사화(士禍)를 일으켰으니, 이 사화가 바로 무오사화(1498)인 것이다. 이 무오사화로 인해 김종직을 위시한 정여창, 김일손 등 신진세력인 사림파는 참화를 겪게 된다. 이미 죽은 김종직은 부관참시를 당하는 흉액을 겪기도 했다.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데없는 것이 세상사의 이치인지라, 계곡의 물은 그저 고요할 따름이다. 다만, 인걸들이 살다간 흔적들의 일부가 정자로 남아 계곡의 또 다른 풍경이 되어있음은 후손들에겐 선물이다. 계곡을 벗어난 길이 잠시 산자락을 오르다가, 제 갈 길은 결국 계곡뿐임을 고백이라도 하듯 이내 다시 계곡으로 이어진다. 계곡의 이편과 저편을 이어주는 징검다리가 정겹다. 더러는 물이 말라버려 제 목적을 잃은 징검다리도 있고, 겨우 돌무더기 주제에 댐이라도 되는 양 물을 막고선 채로 저 홀로 당당한 징검다리도 보인다. 결국은 징검다리도 길이었던 것을, 그 길 너머로 솔숲이 보인다. 소나무들은 어쩌다가 이곳에 무리를 지어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까? 산 아래 개천가에 숲을 이루고 있는 솔숲이 경이로우면서도 반갑다. 행인은 쉬어갈 수 있는 토막의 짬을 숲으로부터 얻는다. 다시 길은 나무데크로 연결되어 있고, 그 나무데크 길의 끝자락에 인삼밭이 있다.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인삼들이 검은 차양막 아래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길은 논둑길로 이어졌다가, 감자밭을 지나고, 과수원을 지나 마을 어귀에 다다른다. 호성마을이다. 마을 입구 작은 가로수에는 수많은 산악회와 모임들의 리본들이 나부낀다. 다녀간 흔적을 어떻게든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은 나무 하나를 리본으로 에워싸게 만든 것이다. 마치 티벳의 룽타(風馬)처럼 바람이 불면 제 몸을 흔들며 제 존재를 드러내 보지만, 차라리 안타까울 뿐이다. 티벳의 오색(五色) 룽따는 ‘바람의 말’이라는 이름처럼, 바람을 타고 하늘을 달려서 부처님의 말씀을 알리고 소원을 이루게 해달라는 염원이라도 담겨 있지만, 작은 나무를 괴롭히는 리본들의 더미에서는 경쟁심과 괴시욕만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과시욕의 결정판이 나타났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가 좋은 자리의 큼지막한 바위에 왠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게 아닌가. 누군가의 이름이다. 새삼 이곳저곳의 경치 좋은 계곡이나 산의 바위에 새겨진 많은 이름들이 떠올려진다. 허긴 만리장성이나 여러 외국의 세계문화유산에도 한글 이름을 적어 놓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는 소식을 듣는 우리이고 보면, 이마저도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적 특성이 아닐런지... 하지만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법치고는 너무 과하고 또 볼썽사납다. 살아가는 세월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나름 이해하려 노력도 해 보지만, 그래도 눈에 거슬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당대의 명필이 남긴 글씨체라면 또 다르겠지만.... 저 멀리 길은 숲속으로 달려가고 있다. 숲으로 흐르던 길은 결국은 다시 계곡을 따라 흐르고 만다. 물이 그러하듯 길마저도 계곡을 벗어나지 못한다. 간간이 듣는 빗방울이 조금씩 흩뿌리기 시작한다. 우중산책(雨中散策)이라... 걸음걸음 사이에 살며시 솟아나던 땀방울이 이내 어디론가 사라지고, 땀방울이 흐르던 그 자리에 빗방울이 스며든다. 오가는 이 하나 없는 개울가에 우두커니 서 있으려니 개울로 낙하하는 빗소리마저 피융피융~ 선율이 된다. 문득 여유롭다는 건 개울가의 바위에 걸터앉은 채 빗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그런 처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길을 걸으니, 너른 반석 위에 경모정이 보인다. 경모정은 고려의 개국공신인 배현경의 후손들이 뜻을 모아 지은 정자로, 화림동 계곡의 정자들이 대부분 19세기 말에 지어진데 비해 비교적 근래(1978년)에 지어진 정자다. 정자에 오르니 그 호젓함이 이를 데가 없다. 마음이 가라앉고 눈이 열리는 듯 머리가 환하여진다. 정자를 세우는 이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듯도 싶다. 이 청정한 자연을 두고 누구건 욕심이 나지 않겠는가. 다만 아쉬운 것은 그 욕심이 독점의 한 형태가 아니었을까 하는 염려다. 또 한편으론 그 욕심이 단순히 자연을 누리는 것이든 독점이든, 그마저도 그들만의 당연한(?) 특권이었다는 사실에 다음 세대의 지적이 있을 수밖에 없다. 토착권력을 지닌 그들에게는 자연마저도 독점하여야 할 대상이고, 그 마음을 실행할 현실적 힘이 있었던 것이다. 또 어쩌면 그들의 리그(토호나 양반사회)에서는 너나없이 세우는(또는 가진) 정자를 나라고 가지지 못할 것이 무언가라며, 그런 경쟁심이 이 화림동 계곡에, 나아가 덕유산 자락의 수많은 계곡들에 이러저러한 정자들이 경쟁적으로 들어서게 된 이유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 당시 사림(士林)이라 불리는 일군의 세력들이 내세웠던, 사물에 대한 궁리를 통해 이치에 다가간다는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주자학의 방법론은 사물에 대한 궁리보다는 이치에 대한 터득에 주력한 결과, 도덕적 완성으로 군주와 백성에게 봉사하겠다는 사대부의 이념은 퇴화되고 또 타락하고 말았다. 그렇게 그들이 중국의 주희(朱憙, 주자학을 집대성한 유학자) 이래 떠받들었던 퇴계와 율곡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 이르러 자기 계층의 이익에 철저히 봉사하는 폐쇄적이고 논쟁적인 학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흘러오다 결국 이르게 된 종착점은 왕실의 어른인 대비(大妃)가 상복을 몇 년간 입어야 하는지를 따지는 예송(禮訟)논쟁(論爭) 같은 것이었다. 예송논쟁은 근 20년 동안 이어진다. 문제는 성리학이 실사(實事)가 아닌 이치(理致)를 따지는 예학(禮學)으로 흐르면서 ‘그들만의’ 학문이 되어버렸으니, 통치이념으로서의 성리학은 결국 민중들의 삶과는 괴리된 채 수구사상으로서 그들만의 이념 놀이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조선에는 임금은 있었으되 절대 왕권을 통해 통치를 한 임금은 거의 없었다. 건국 초기 태종 이방원이 수많은 피를 손에 묻혀가며 왕권 강화를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그때뿐이었다. 조선은 재상 우위의 국가였고, 그런 이유로 지금으로 치면 내각책임제에 가까운 나라였다. 조선 중반기 이후로는 특히 더 그러했다. 그런데 국가를 운영하는 총리급이하 장차관들이 성리학이라는 하나의 경전만을 절대시하며, 그 경전의 해석에 따른 학풍에 따라 남인이니 북인이니, 서인이니 남인이니 하며 다투고 있었으니, 나라꼴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론 재상 우위의 국가체제가 역사에 범한 최고의 실책은 인조반정, 즉 광해군 폐위가 대표적이라는 많은 학자들의 지적에 동의한다. 특히 역사학자 이덕일은 광해군을 폐위시킨 인조반정(仁祖反正)이야말로 ‘조선의 운명을 비극으로 이끌어 간 시대착오적인 대표적인 사건’이라며 개탄한다. 이 사건은 성리학을 공부한, 중국(명나라)을 상국으로 여기는 이 땅의 사대부(서인 무리)들이 광해군의 북방 중립정책을 명나라에 대한 배신이라며 일으킨 쿠데타였다. 쇠락해가는 명나라와 신흥강자인 청나라에 끼인 조선이 선택할 수 있는 외교적 묘책이 무엇이 있겠는가. 현실적인 선택은 등거리(等距離) 외교였지만, 사대부라 불리는 당시의 지배층은 오랑캐인 청나라를 인정할 수 없다며 광해군 정권을 무너뜨리고 만다. 사대사상이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오늘날에도 대상만 다를 뿐 일각에서의 사대사상은 여전하다. 염려스러울 따름이다. 반정 후 조선은 인조라는 최악의 임금을 맞이하게 된다. 결과는 모두 다 아는 것처럼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는 참화로 이어지게 된다. 그들이 주장한 명나라를 우대하고 청나라를 배척하는 친명배청(親明背淸) 정책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조선이 배척 대상인 청나라보다 우위의 힘을 가져야 하는 것이 기본이었거늘, 그들은 주장만 했고, 책임은 힘없는 민초들이 지는 기막힌 상황이 빚어지고 만 것이다. 일부의 왕을 제외한 조선 중기 이후의 역사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들, 사대부라고도 불리고, 또 양반이었으며, 결국엔 선비라고도 불리었던 그들의 이해와 이익을 위해서만 봉사한 세월이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는 토호와 지주들과 결탁해 지주제를 더욱 공고히 하였으며, 소작료 인상을 통해 그들의 배를 불렸다. 그 와중에 국토는 피탈당하고, 그 땅에 사는 민중들의 삶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이 곤궁하였던 시절이 그 시절이었다. 그들이 섬기던 유학에 대한 맹신은 그렇게 일제의 강점이 있은 연후에야 멈출 수 있었으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런데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일제에 인한 강점이 이루어지자 두 팔 벌려 환영하면서 일제가 주는 먹이에 환호작약하며, 일가를 보존하고 토호로서 떵떵거리며 산 그들이 바로 당시 서인 계열의 사대부이며, 선비였던 그들이었다. 인조반정 후 정권을 잡은 송시열을 위시한 서인 계열의 사대부라는 사람들은 소중화(小中華) 사상에 갇혀 있었다. 소중화가 무엇인가? 조선이 작은 중국이라는 말이고, 그들의 중국인 송나라, 명나라가 망했으니, 유학의 대의를 조선이 대신 이어받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렇게 중국이 천하의 주인이며, 조선은 신하의 나라로 항상 군신의 의를 지켜야한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그들이다. 세상의 현실과 동떨어진 그들의 학문과 사상, 이를 통한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외세의 침략과 부패, 궁핍이라는 재앙을 만들어 내고, 결국 조선이라는 나라를 결딴내고 말았던 것이다. 19세기말의 중국과 조선이 외세의 침탈에 속절없이 짓밟힌 이유 중 그 첫째가 유학을 섬기던 사람들의 그러한 맹신 때문이라는 주장에 공감이 가는 이유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중국이나 조선에서는 유학사상에 어긋나는 언행을 하는 사람은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죽이기까지 했으니 어찌 다양한 사상이 싹틀 수 있었을 것인가. 이슬람 원리주의나 기독교 원리주의에 버금가는 유교 원리주의가 시대를 휩쓸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성리학적 탈레반이었다. 그렇게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어버렸던 중국과 조선의 운명은 외세의 침탈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는 뻔히 다 아는 바다. 중국의 학자인 이종오(李宗吾)는 그의 책 <난세를 평정하는 난세학>을 통해, 주자학으로 대표되는 유교적 원리주의를 비판한다. “(나는) 공자의 인격이 높지 않다거나 그의 학설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공자 이외의 사람에게도 인격과 독창적인 학설을 만들어낼 자격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뿐이다. 공자 자신이 우리를 억압하거나 우리에게 다른 학설을 만들지 말라고 말한 적은 없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후세의 위정자들이 한사코 공자를 앞세우며 모든 것을 억압하고 학자들의 견해가 감히 공자의 견해를 벗어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장정일의 <공부>) 그 위정자들이 선비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 시대의 기득권층들이었다. 그러니 내가 선비라는 단어를 좋아할 리가 없는 것이다. ‘강직하고 청렴한‘ 사표로서의 선비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렇지 않은 다수의 양반이면서 사대부였고, 또 잘 먹고 잘 살았던 그들이 선비라는 단어를 차용하고, 선비라는 단어에 새로운 긍정적인 이미지를 입혀 그들이 행한 수많은 오류와 모순들을 감추려 하고 있다는 의심 때문에 이 선비라는 단어에 거부감과 의구심을 갖고 있는 것이다. 길은 또다시 이어진다. 저 멀리 정자가 보인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우중(雨中) 산책, 선비를 만나다…함양 선비문화 탐방로 ②
글 : 박대영 기자
SBS 뉴스 기사 등록일 : 2017.10.17.
어제도 하로밤 나그네 집에 가마귀 가왁가왁 울며 새었소 오늘은 또 몇 십리 어디로 갈까 산으로 올라갈까 들로 갈까 오라는 곳이 없어 나는 못 가오 (하략) 김소월의 시 <길>의 부분이다. 길을 떠난 나그네의 외로운 심사가 아릿하게 스미듯 느껴져 온다. 오라는 데는 없지만 어디론가 가야하는 나그네의 설움이라니... 유치환이 파도를 두고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고 절규하던 그 맘과 꽤나 닮아 보인다. 사랑에 목마른 그와 가야 할 곳이 필요한 그는 그렇게 시 안에서 울부짖거나 조용히 울거나... 그 안타까운 마음을 뉘라서 알 것인가. 다만 비오는 날, 그 비를 맞으며 걷다보면 어느 정도는 그 서늘한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조금, 아주 조금은 말이다. 그렇게 그날도 걸을 수 있을 만큼만 비가 오고 있었다.
● 삶이란 결국 ’유랑과 회귀의 반복‘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삶이란 결국 ’유랑과 회귀의 반복‘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내 삶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차피 떠난다는 것은, 그렇게 사람이든 다른 무언가를 좇아 세상 속으로 또는 세상 밖으로 나서는 일이면서, 그러다가 또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과정의 반복이며, 그 반복은 결국 삶을 위한 연습이면서 본질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나 역시 돌아갈 그곳을 위해 오늘도 걷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길은 계곡을 따라 가지런히 이어지고 있었다. 선비문화탐방로의 장점은 계곡의 험한 곳에는 나무 데크로 길을 이어놓은지라 걷기가 편하다는 점이다. 반면에 이러한 장점이 가끔은 단점이 되기도 한다. 땅을 밟으며, 그 땅이 형성하는 높낮이에 따라 굴곡을 느끼며 소요하고픈 그들에겐 더욱 그러하다. 얼마를 걸었을까. 스스로를 드러내려는 수많은 단체의 리본들이 차양처럼 길을 막은 채로 나무를 장식하고 있었다. 차양을 살며시 걷고는 몇 걸음을 더 옮기자, 그 너머에 빗속에서 사색하는 또 하나의 정자가 보인다. 람천정(藍川亭)이다. 이곳 화림동 계곡이 예로부터 8정(亭)8담(淡)으로 불리는 이유는, 이렇듯 곳곳에 정자와 물이 있기 때문이다. 8정(亭) 중에서 이 람천정이 가장 소박하고, 또 안온해 보인다. 작은 규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드러나는, 그래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겸손하면서도 늠름하기 때문이다. 시냇물은 연신 떨어지는 빗물을 받아내느라 여념이 없지만, 정자는 저 홀로 고요하다. 이곳에서 어디로 갈까 잠시 길을 헷갈려 하다가 멀찍이 보이는 이정표에 안도의 한숨을 쉬고 다시 걷는 길은 반갑게도 흙길이다. 길은 산을 향하여 제 맘대로 뻗어 있었다. 그 길이 특별히 반가운 것은 어릴 적 내가 보고 또 걷던 그 길을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한적한 농로가 그렇듯, 길에도 잡풀이 가득하고, 수레든 경운기든 바퀴가 지나간 자리만큼만이 이곳이 길임을 알려준다. 들풀들의 맹렬한 기세도 바퀴자국만큼은 어쩌지 못한 것이다. 어릴 적에는 길 위의 질긴 풀들을 서로 묶어놓아 지나는 이들을 골탕 먹이기도 했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참 짓궂은 짓인지라, 머쓱해질 따름이다. 농로를 벗어나면, 길은 숲길로 이어진다. 긴 세월을 살아낸 나무들은 서로의 어깨를 짚어가며 경쟁이라도 하듯 하늘로 하늘로 승천을 꿈꾼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발을 옮길 때마다 이파리 위로 떨어지는 빗줄기의 타닥대며 고르게 흩어지는 소리는 소음인 양 또 음악인 양 경계의 문을 지나는 이를 위한 소박한 연주회 같기도 하다. 문득 이 길을 다시 걷기까지 잠시나마 겪었던 걷기의 슬럼프를 떠올린다. 말은 슬럼프지만 결국은 게으름이 주범이었을 것이다. 다시금 걸어야 할 이유를 곱씹어본다. ’인간은 걸을 수 있는 만큼만 존재한다.‘는 사르트르의 말이 아니더라도 걸어야 할 이유야 차고 넘친다. 이 길을 벗어나면 다음엔 어느 길을 걸을 것인가가 차라리 궁금하여진다. 세계 3대 트레일 코스인 미국 시에라 네바다산 ‘존 뮤어 트레일’의 주인공인 존 뮤어가 말하듯 ‘최고의 여행 준비는 차 몇 봉지와 빵 몇 덩이를 배낭에 던져 넣고, 뒷마당 울타리를 뛰어 넘는 것’이 아니던가. 그냥 걸으면 될 일이다.
● 조선의 노론이여! 지겹구나, 역겹구나.
선비문화탐방로를 걸으며 전편에서도 언급했듯이 조선과 성리학, 그리고 그 성리학을 금과옥조로 여기며 살아갔던 수많은 유학자들을 생각해 볼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곳 함양이야말로 좌(左)안동 우(右)함양으로 불리던 유학의 고장이 아니던가. 그 와중에 만난 고은 시인의 시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시인의 역작인 <만인보(萬人譜)> 28권에에 실린 <조선 노론>이라는 제목의 시다. 너무 길구나 3백년 넘어 5백년에 이르는구나 또 과장하고 또 왜곡해도 누가 감히 탓하겠느냐 저 폐허의 17세기 북방 후금과 명 사이 중립으로 등거리로 나라의 위기 맞선 광해군 그를 내쫓을 때 그 명분 대명천자를 배신함 그것 이 시대의 극(極)으로부터 노론 등장 몇차례 고비 잘도 넘겨 조선 후기의 풍운을 몽땅 틀어쥐었구나 그 후예 길구나 질기구나 일제 작위 받았구나 현대사 도처 부귀공명 누리는구나 지겹구나 역겹구나 오로지 후예 이동녕 하나 임정 요인으로 중국 땅바닥 떠도는 순결의 곤궁이었구나 시인에게도 조선시대의 대표 당파 중 하나였던 노론은 역사의 죄인이었나 보다. 그것도 ’지겹고 역겨울 정도‘로 말이다. 시인은 제목에서 노론을 거론하였지만, 시의 내용상으로 해당 당파는 ’서인(西人)‘이 맞을 듯싶다. 물론 노론도 서인에서 분화한 당파이긴 하지만 시기적으로 1680년 숙종대의 경신환국(庚申換局) 이후에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어졌음을 감안할 때, 광해군을 폐위할 당시에는 노론이라는 이름의 당파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당파는 영화 <남한산성>에 등장하는 최명길과 김상헌 등이 속했던 당파인 서인 세력들이었다. 서인 세력들은 ’인조반정(1623년)‘이라는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았고, 그 권력은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하기 전까지 300여년이라는 거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노론과 소론, 벽파와 시파로 분화되며 끊임없이 유지되었던 것이다. 초기 서인 세력들은 율곡 이이를 중심으로 학문적 계통을 세웠던지라 10만양병설 등 실용적인 현실정치를 추구하는 세력이었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후 그들은 성리학적 명분과 예학(禮學) 중심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그들에게 ’의리와 명분‘은 최고의 가치였으며, 성리학이라는 경전에 목숨을 걸었으며, 성리학에 반하는 그 어떤 학설이나 주장은 철저히 배척되었고, 사대(事大)사상이 지나쳐 나라의 안위보다도 명나라와의 의리를 더 중시하는 수구 세력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 결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국토는 결딴나고, 백성들은 칼에 찔리고 맞아서 또는 굶어서 죽었으며, 또 60만으로 추정되는 어마어마한 수의 백성들은 청나라의 노예로 끌려가야 하는 굴욕의 역사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화냥년(還鄕女)과 호로자식(胡盧子)으로 불리는 그들이 그렇게 청나라로 끌려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살아 돌아온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 아니던가. 국가 간의 전쟁은 필연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피할 수 있는 전쟁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점은 과거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북한 변수로 인한 한반도 전쟁 가능성에 많은 사람들은 걱정하고 또 두려워하고 있다. 전쟁 시나리오가 구체화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과거를 통해 배울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맹목적인 대결의식이 가져온 참화를 말이다. ’인류에게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다는데 있다‘는 아놀드 토인비의 말은 그래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병자년 당시, 명나라와의 전쟁만으로도 버거운 청나라가 굳이 조선을 침략한 이유는 조선이 청나라의 배후의 위협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청나라로서는 명나라와의 명운을 건 건곤일척의 전쟁을 앞두고 주변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스스로 명나라와 동맹국임을 자처하는 조선이야말로 청나라로서는 두고 볼 수 없는 배후의 적이었던 것이다. 이 모두가 인조반정 뒤 인조를 포함한 그 주역들이 자초한 것이었다. 전쟁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그렇게 엄동설한의 때에 단 3개월 만에 조선은 도륙을 면하지 못했고, 그렇게 항복을 하였으며, 인조는 삼전도로 나아가 청태조에게 머리를 땅바닥에 아홉 번 찧으며 사죄해야 했던 것이다. 그들의 맹목적 사대주의가 가져온 비참한 결과였다. 고은 시인도 지적하였듯이 서인(西人) 세력들은 광해군의 등거리 중립정책를 인정할 수가 없었다. 어찌 명나라를 배신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에게는 국가의 명운보다도, 임진왜란이라는 6년여의 전란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휼하는 것보다도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명분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서인 세력들이 광해군을 몰아낸 뒤 발표된 인목대비의 교지를 보면 그들의 명나라에 대한 인식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나라가 명나라를 섬겨온 지 2백년이 지났으니 의리에 있어서는 군신간이지만 은혜에 있어서는 부자 사이와 같고 임진년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는 영원토록 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선왕(선조)께서는 40년 간 보위에 계시면서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셔서 평생 한 번도 서쪽을 등지고 앉으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광해는 은덕을 저버리고 천자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배반하는 마음을 품고 오랑캐와 화친하였다. 천리를 멸절시키고 인륜을 막아 위로는 중국 조정에 죄를 짓고 아래로 백성들에게 원한을 사고 있는데 이러한 죄악을 저지른 자가 어떻게 나라의 임금으로서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으며 조종의 보위에 있으면서 종묘사직의 신령을 받들 수 있겠는가. 이에 그를 폐위시키노라.” 그들에게 중국, 특히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희(朱熹)의 나라인 송(宋)나라와 그 송나라를 계승한 명(明)나라는 아비와 다름없었던 것이다. 아비를 섬기는 마음이 지나쳐 제 몸인 나라와 자식과 같은 백성을 파멸의 길로 내몰았던 것이다. 거기에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국가를 환란 속으로 몰아간 그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집권 세력으로서의 지위를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조선이 망하는 그날까지도 집권 세력이었으며, 일제의 합병 후에도 송병준을 비롯한 그들은 작위까지 받으며 호의호식하였으니 어찌 시인의 입에서 욕인들 나오지 않겠는가. 문제는 지금까지도 이 땅의 곳곳에서 그들은 사대(事大)의 대상을 바꿔가며 그 권세와 부를 누리고 있다는 게 고은 시인의 평가다. 이 길이든 저 길이든 멀고도 험하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겁다.
● 귀소본능에 취하다.
자못 빗줄기가 굵어지는 터라 걸음을 서둘러야 할 것만 같다. 계곡이 내(川))를 이루고, 그 시냇물 속으로 하염없이 떨어지는 빗줄기는 행인의 머리 위로도 그 굵기를 더하며 제법 떨어진다. 우산을 펼쳐드니, 또 어쩌면 운 좋은 행락객이 된 느낌이다. 이렇게 분위기 있는, 또 운치 있는 걷기를 어딜 가서 또 경험해 볼 수 있을 것인가. 고향땅이 돌아온 탕자(?)인 내게 준 선물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얼마를 더 걸었을까. 갯가에 아름드리 뽕나무가 오디 향을 흩뿌리며 서 있다. 바닥에는 제 풀에 겨워 떨어진 오디들이 지천이다. 그야말로 자연산 그대로의 유기농 오디들이 행인들의 무심한 발길에 채이고 뭉개지고 있었던 것이다. 멀쩡하게 생긴 놈을 얼른 하나 입에 넣었다. 무슨 음식 프로그램도 아니고, 보는 이도 하나 없지만 오버액션이 나올 것만 같다. 시골의 순수한 바로 그 자연의 맛이다. 문득, 어린 시절 양은 주전자를 들고 오디를 따겠다고 이산 저산을 헤매던 기억이 새롭다. 먹을 것이 귀하던 그 당시에 오디는 어린 우리에게 더없이 좋은 먹거리였었다. 그래서 여름이면 오디를 따러 다니는 게 일 중에서도 큰일이었으며 또 즐거움이었다. 배고픈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뽕밭을 찾아 타고 넘은 산이 몇 개였던가. 그때는 그랬었다. 그런데 바로 그 오디가 땅바닥에서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저 홀로 뭉개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새삼 세월의 무상함과 그 세월의 변화가 가져온 오디에 대한 무관심이 조금은 아쉽기만 하다. 오디를 따겠다고 훠이휘이 산과 들을 헤매던 그 시절의 추억을 이제는 어디 가서 경험을 한단 말인가. 풍족한 먹거리가 가져온 역설이 아닐까 싶다. 이런 내 이야기에 내 처와 아이는 또 호랑이 담배피던 소리 한다고 뭐라 하겠지만... 여하튼 그렇다. 뽕나무 너머로 시내를 막아선 둑이 보이고 그 둑에 연결된 어도(魚道)가 보인다. 어도는 보(堡)나 작은 댐 같이 하천의 흐름을 방해하는 구조물이 있을 때 어류나 기타 수중 생물의 이동로 확보 차원에서 만들어둔 인공 구조물을 말한다. 이 어도를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는 어떤 사연이 있어 이 멀고 험한 길을 마다하지 않는 것인지 새삼 궁금하여진다. 흔히들 귀소본능(歸巢本能)이란 단어로 뭉뚱그려 설명하지만, ‘재들은 원래 그래’라는 말로 퉁치기에는 그들의 운명적 노력이 과소평가되는 느낌이라 무언가 그들의 노력을 달리 표현하고자 하지만, 과문한 탓한 달리 떠오르는 무언가 없는지라 아쉬울 따름이다. 하긴 우리들 역시 때가 되면, 특히 명절이 되면 길게는 10시간이 넘게 걸리는 길을 달려 고향으로 달려가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본능이란 단어 자체에 어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해 주는 어떤 힘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어느 순간 때가 되면 가야할 곳이 있고, 그렇게 그 곳으로 가야하는 어쩌지 못하는 힘이야말로 생명을 지닌 모두가 감당해야할 법칙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 법칙이야말로 우주 만물을 조화롭게 하는 근본 질서인지도 모를 일이다. 얼마 걷지 않아 만나는 오솔길이 소담스럽다. 금계국과 싸리꽃이 길을 환히 비추어주니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이런 길이라면 언제까지고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은데 아쉽게도 길은 다시 계곡을 만나 더 이상 오솔길이란 이름을 유지하지 못한다. 길은 도로로 이어진다. 얼마 걷지 않아 만나는 다리 아래로 계곡의 물은 그 폭을 넓혀가며 강으로 바다로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저 멀리 우뚝 솟은 한옥건물이 보인다. 황암사(黃巖祠)다. 처음에는 무슨 절인가 했다. 그런데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왜군과 싸우다 순국하신 순국선열들의 위패를 모신 곳이라는 설명에 자못 진지해진다. 산을 타고 흐르는 바위 절벽과 계곡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경관의 위용이 자못 장엄하다. 아쉬운 점은 길이 잠시 계곡을 떠나 도로로 이어져 있다는 점이다. 물론 도로를 걷는 여정은 길지 않다. 그 도로마저도 얼마가지 않아 폐도로로 연결되는지라 안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내 길은 다시 계곡을 따라 이어지고, 그 길은 나무데크로 만들어져 있는지라 걷는 것이 수월하기 그지없다. 하류로 내려올수록 계곡의 폭이 가히 작은 강 수준이다. 1,000여 평의 암반으로 이루어진 계곡의 풍광 또한 수려해진다. 황석산에서 흘러온 물이 보태어지니 물소리 또한 우렁차다.
● 농월정(弄月亭)에서 걸음을 멈추다
그 암반의 너른 계곡 너머로 농월정(弄月亭)이 보인다. ‘달을 희롱하는 정자’라... 이름이나 정자가 품고 있는 계곡이나 가히 화림동 계곡의 대표 정자가 아닐까 싶다. 농월정은 조선 선조 때 관찰사와 예조 참판을 지낸 박명부가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정자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목조 팔작지붕 2층 누각형태로 지어졌지만, 아쉽게도 2003년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지금의 정자는 2015년에 복원된 정자인지라, 그 고풍스러운 자태를 찾을 길은 없다. 박명부는 병자호란의 그날에 남한산성에서 결사항전을 주장했던 벼슬아치 중 한 명이었다. 예조참판이었으니 지금으로 치면 차관급의 고위 관리였던 것이다. 그의 직속 상사(예조판서)가 주전론(主戰論)의 주인공, 김상헌이다. 그랬던 그였으니 삼전도의 굴욕을 감당하는 일이 오죽했을 것인가. 그 길로 낙향하여 머문 곳이 바로 이곳 농월정이다. 아래는 낙향한 박명부가 농월정에 머무르며 지은 시 <농월정>이다. 길 옆에 있는 별천지의 그윽한 곳을 누가 알리오 산은 빙 둘러 있고 물은 머무는 듯하네 선돌을 비친 못의 물은 맑고도 가득차고 창에 찾아든 푸른 기운은 걷히다가 다시 뜨네 주린 아이 죽으로 입에 풀칠하여도 화내지 않고 손님이 와서 집에 머리를 부딪쳐도 싫어하지 않네 노는 사람들 일 없다 말하지 말게나 늙어서 멋대로 속세를 떠나니 또한 풍류일세 농월정(弄月亭)이라는 이름은 이태백의 시에서 따 왔다고 한다. 그저 달을 희롱한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란다. 글자 농(弄)자의 모습이 옥(玉)을 두 손으로 떠받드는 모양이라 이에 착안해 달을 두 손으로 조심스럽게 만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니 이태백의 혜안이 놀라울 따름이다. 농월정의 계곡은 너른 반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덕유산을 흘러 내려온 계곡물은 반석 사이의 틈으로, 또는 너럭바위 위로 미끄럼이라도 타듯 세차게 흐른다. 그렇게 흐르던 물들 중 더러는 한가로운 반석 위에 연못을 만들며 잠시 쉬어 가는데, 달 밝은 날이면 이 잔잔한 연못에도 달이 뜬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도 월연암(月淵岩)이다. 빗줄기가 굵어진다. 더 이상의 여정은 무리일 듯싶다. 완주가 코앞인데... 아쉬운 마음 크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나마 거연정에서 농월정까지 이어지는 화림동 계곡의 주요한 정자와 여유로웠던 길을 걸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내일은 신라시대의 최치원 선생이 함양(옛 지명은 천령)군수로 재직할 적에 방풍(防風), 방수(放水) 목적으로 조림하였다는 천연기념물 제154호, 함양읍에서 지척인 상림(上林)숲을 걸어야 할 것 같다.
※ 함양 선비문화 탐방로 가는 길
- 대중교통 함양시외버스터미널에서 안의면정류장에서 서하방면 버스를 갈아타고 봉전정류장에서 하차 (1일: 15회 운행) <함양버스 (055)963-3745>
- 먹거리 함양 안의면 소재지의 안의갈비찜과 갈비탕이 유명하다. 농월정 관광지의 산채정식도 좋고, 근처의 초계탕집도 추천할 만하다.
화림동계곡따라 정자(亭子)가 가득한 길
경남 함양 화림동계곡 선비문화탐방길
박효진 기자
여행스케치 기사 승인일 : 2015.05.28.
[여행스케치=함양] 경남 함양에는 마치 정자(亭子)의 백화점 같은 길이 있다. 시원한 풍광을 자랑하는 금천을 따라 아기자기한 정자와 시원한 너럭바위가 많아 예부터 ‘팔담팔정(八潭八亭)’으로 불리던 화림동계곡의 선비문화탐방길이 그곳이다. 오늘은 남강천의 상류인 아름다운 금천 변을 따라 화림동계곡을 걸어보자. 예부터 함양은 ‘좌 안동, 우 함양’으로 불리던 선비의 고장이다. 선비의 고장답게 함양 곳곳에는 정자와 누각이 많이 보존되어 있다. 그중 영남 유생들이 과거를 보기 위해 덕유산 육십령을 넘기 전 지나야 했던 화림동계곡에는 특히 아름다운 정자가 많이 남아있다. 이 아름다운 정자를 바라보며 남강천의 상류인 금천(錦川)의 풍광을 감상할 수 있는 길이 있다. 바로 오늘 소개할 화림동계곡 선비문화탐방로가 그것이다. 이 길의 들머리는 봉전마을의 거연정 휴게소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거연정 휴게소에는 주차장과 화장실, 작은 상점까지 있어 화림동계곡길 걷기의 시작점으로 제격인 곳이다. 때 이른 더위에 가벼운 복장으로 거연정 휴게소를 나선다. 휴게소를 나서자마자 길 건너 금천 암반 위에 단아하고 우아한 모습의 정자가 눈에 띈다. 이 길에서 첫 번째로 만나는 정자인 거연정(居然亭)이다. 거연정은 1640년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전시서 선생이 처음 지었으나, 1853년에 화재로 불탄 것을 1901년에 그의 후손들이 중수한 내력을 가지고 있다. 남강천의 경치가 빼어난 곳에 정자가 들어서 있으니 자연과 어울림이 기가 막히다. 그 풍경이 아름다워 사진 몇 장을 찍고 길을 나선다. 본격적으로 화림동계곡 길을 걸으려고 나섰건만, 불과 150여m도 못 가서 이번에는 군자정(君子亭)이 길을 가로 막는다. 이 길에서 두 번째로 만나는 정자인 군자정은 조선시대 문신인 일두 정여창 선생을 기리기 위해, 1802년에 건립한 정자로서 군자가 머무르던 곳이라는 의미에서 군자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담하고 소박한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금천과 잘 어울려 단아한 풍취를 풍기는 건물이다. 군자정을 돌아보고 봉전교를 건너 금천 변에 목조데크로 잘 닦인 길을 따라 가는데, 불과 200m도 못가서 세 번째 정자를 만나고 만다. 이번에는 팔각으로 지어진 영귀정(詠歸亭)이다. 안내판이 없어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지만 거연정이나 군자정에 비해 후대에 지어진 정자로 보인다. 이 길이 정자가 많은 길이라는 것은 알고 왔지만 반경 300m 이내에서 3개의 정자가 만나니 가히 ‘정자의 백화점’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다 싶다. 이제 제대로 걷는가 싶어 발걸음도 가볍게 나서는데 화림동계곡의 절경이 걷는 이의 시선을 자꾸 붙든다. 화림동계곡은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금천(錦川)이 남강천으로 흘러내리면서 멋진 너럭바위와 천변 숲과 함께 어울리며 멋진 경치를 만드는 계곡이다. 이름에 꽃 ‘화(花)’자와 수풀 ‘임(林)’자를 쓴 것처럼 이 길에는 이름 모를 꽃과 싱싱한 녹음을 자랑하는 나무가 가득하다. 초봄의 싱그러움을 만끽하며 목조데크를 따라 어느 정도 걸었을까. 갑자기 숲이 거기에서 끝나고 포장도로가 걷는 이를 맞이한다. 길을 잘못 든 게 아닐까 싶어 주위를 살펴보니 맞게 걸었다는 표식인 냥 이 길의 안내판이 나타난다. 약 200m 정도 포장도로를 따라 대전통영고속도로 굴다리까지 가서 왼쪽으로 꺾으니 나무데크로 만들어진 길이 다시 반갑게 맞아준다. 나무데크를 따라 버드나무, 전나무, 소나무 등이 우거진 숲을 지나 10분쯤 걸었을까. 저 멀리 이 길의 네 번째 정자인 동호정(東湖亭)이 보인다. 화림동계곡에서 가장 화려하고 큰 정자인 동호정은 임진왜란 때 선조의 몽진을 도와 공을 세웠던 동호 장만리 선생을 기리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1895년에 건립한 정자이다. 정자 앞의 푸른 물결을 자랑하는 옥녀담과 너럭바위인 차일암과 함께 어우러지니 선경(仙境)이란 이런 풍경을 말하는 것인가 싶다. 동호정을 지나 다시 녹음이 무성한 천변 길을 따라 걷는데 여기저기서 나비와 새가 날아다닌다. 이 길이 건강한 것 같아 마음마저 편안해진다. 길을 따라 10여분쯤 걸으니 천변 숲길이 끝나고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가 맞이한다. 농로를 따라 호성마을을 지나 조금 더 걸으니 다시 너른 천변이 이어지고 거기서 다섯 번째 정자인 경모정(景慕亭)을 만난다. 경모정은 조선 영조 때 호성마을 출신의 문신이던 계은 배상매 선생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978년에 건립한 정자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지는 않지만 소박한 멋이 있는 정자가 경치가 빼어난 너럭바위 위에 자리 잡고 있으니 가히 쉬어가기 좋은 정자다. 경모정에서 잠시 쉬었다 갈 길이 멀었다는 핑계로 일어난다. 이제 길은 다시 짙푸른 녹음이 묻어나는 화림동계곡 천변을 따라 이어진다. 10여분쯤 걸으니 녹음이 무성한 숲길 사이로 풍광이 빼어난 곳에 자리 잡은 여섯 번째 정자인 람천정(濫川亭)이 보인다. 고풍스러운 외관에 비해 람천정은 그리 오래된 정자가 아니다. 그래서 그 흔한 안내문도 없고, 문화재번호도 없지만 풍경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쉼터로 인근 주민들에게 사랑을 받는 곳이다. 람천정을 지나 다시 금천을 가로질러 황암사(黃巖祠) 방향으로 향한다. 이정표를 따라 시멘트로 포장된 둑길을 따라 20분쯤 걸으면 둑길이 끝나는 지점에 황암사가 있다. 황암사는 이름만으로는 사찰이 떠오르지만, 정유재란 때 왜적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3,500명 선열들의 넋을 위로하는 호국 사당이다. 잠시 들러 그들의 희생을 추모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이제 마지막 구간이다. 황암사 앞에서 육십령로(국도26호선)와 연결된 서하교를 건너 지금은 차량이 다니지 않는 옛 도로를 따라 걷는다. 도로 모퉁이를 크게 돌아 좀 더 걸으니 다시 국도가 나타난다. 이 길은 현재도 차량이 다니는 길이므로 걷는 이들이 조심해야 할 성싶다. 이곳에서 조금 더 걸어가니 왼편으로 계곡 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타난다. 계단을 따라 둑길을 걸으니 멀리 이 길의 종착지인 농월정(弄月亭) 이정표가 보인다. 농월정은 조선 선조 때 예조참판을 지낸 지족당 박명부 선생이 지은 정자로서 2003년 화재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농월정이 있던 자리 앞의 계곡은 여전히 맑고 푸르다. 이 계곡에 조용히 발을 담그고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자. 화림동계곡의 아름다움이 그대 마음속을 파고들 테니 말이다.
INFO. 화림동계곡 선비문화탐방길
코스: 거연정-군자정-영귀정-동호정-호성마을-경모정-람천정-잠수교-황암사-농월정 거리: 5.5km 소요 시간: 1시간 30분 주소: 경남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831-1(거연정 휴게소) TIP. 종착지인 농월정에서 출발지인 거연정 휴게소로 돌아가려면 농월정에서 30분 간격으로 운행되는 군내버스를 타고 봉전마을 앞에서 내리면 된다.
함양군 선비문화 탐방길 지도
함양군 선비문화 탐방길 개념도
(8정(亭)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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