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우중문에게
을지문덕(乙支文德)
그대의 귀신같은 책략은 천문을 꿰뚫고
신묘한 계산은 지리를 통달했네
전쟁에서 슬리한 공 이미 높으니
족한 줄 알고 그만 돌아가기 바라오.
與隋將于仲文詩(여수장우중문시)
神策究天文(신책구천문) 妙算窮地理(묘산궁지리)
戰勝功旣高(전승공기고) 知足願云止(지족원운지)
[어휘풀이]
-于仲文(우중문) : 수나라 장수
-天文(천문) : 하늘의 모든 형상
-地理(지리) : 땅의 모든 이치
-云(운) : ‘말하다’의 뜻이지만 여기서는 의미없는 어조사로 쓰였다.
[참조]
을지문덕(乙支文德) : 생몰 연대 미상
『삼국사기』에는 을지문덕의 어린 시절이나 사생활에 대한 기록이 없다.
『역대명장전』에는 을지문덕을 평양 석다산(石多山) 사람이라고 하였으며,
평안도 일대에서는 그에 대한 많은 전설들이 전해 오고 있다고 한다.
[역사 이야기]
살수대첩(薩水大捷)
612년(영양왕 23년) 중국 수(隋)나라의 군대를 고구려가 살수(지금의 청천강=사실은 청천강이 아니고 중국 지역으로 수정 작업중)에서 크게 격파한 전쟁이다. 돌궐(튀르크)과 고구려가 은밀히 접촉하고 있음을 간파한 수나라 양제(煬帝)는 측근 관료 및 백제와 신라의 충동을 받아 고구려에 대한 두 번째 대규모 침략을 결정했다. 수나라 육군은 지금의 북경에 집결 각각 12군으로 편성해 고구려를 향해 진군했다. 동원된 병력은 모두 113만 3,800명으로 군대를 출발시키는 데도 40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과 수나라 지휘 계통의 혼란 등으로 싸움이 지구전으로 돌입하자, 수나라는 우중문돠 우문술 등을 지휘관으로 한 30만 5천 명의 별동대를 편성해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 영토인 평양성을 직접 공격해 대세를 결정지으려 했다. 별동대는 고구려군의 게릴라 전술에 고전하면서 평양성 30리 지점까지 진군했다. 별동대에게는 식량 및 전투기재 등을 등짐으로 짊어지게 했는데 그 무게가 50kg에 달했다고 한다. 병사들은 지친 나머지 식량 등 보급품을 몽땅 묻어 버렸다.
이에 수나라 지휘부 내부의 불화와 물자 부족 등으로 수군은 더 이상의 진군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을지문덕 장군은 항복을 구실로 적진을 탐색하여 별동대 병사의 보급품이나 사기에 문제가 있음을 간파했다. 지휘부에서는 을지문덕이 자신들의 진영에 들어왔을 때 서로 의견 충돌이 생겼다. 우중문과 우문술은 을지문덕을 참수하려 했으나 참군(參軍)인 유시룡은 사신을 함부로 포박하면 안 된다는 논지로 을지문덕을 놓아주어 그는 무사히 탈출하게 되었다.
그 후 별동대는 진군하기로 결정을 하고 고구려를 공격해 들어왔다. 이때 고구려군은 일곱 번 공격하고 일곱 번 퇴각하며 적군을 평양성 부근까지 유인하는데 성공했다. 을지문덕은 거짓 항복 문서를 보내면서 한 편의 시를 같이 보내는데 이것이 「與隋將于仲文詩(여수장우중문시)」이다. 거듭된 진군으로 힘이 약해지고 군량이 부족해지자 그들은 퇴각을 결정했다.
강을 건너느라 수군이 반으로 나뉘었을 시점에 을지문덕은 맹공을 가했다. 후위의 붕괴에 동요한 30만 대군은 연괘적으로 우르르 무너졌다. 요동성까지 살아간 병력은 2,7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한편 수나라 해군은 바다를 건너 지금의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 평양성을 공격하려 했으나 왕의 아우 고건무(高建武)(영류왕)가 지휘하는 고구려 결사대에 의해 막대한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이처럼 수륙 양쪽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은 수나라 두 번째 침략도 실패로 끝났다. 한편 고구려도 거듭되는 수나라의 침공을 격퇴함으로써 고구려의 위치를 대내외에 알렸으나 국력의 소모로 뒷날 멸망에 이르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출처 : 한기와 함께하는 우리나라 역사 『노을빛 치마에 쓴 시』
지은이 : 고승주. 펴낸 곳 : 도서출판 책과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