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일본이 알아야할 '작은 과거'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떠오르는 삽화가 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3월1일 작가 손소희씨가 한 일본인 모자에게 베푼 소박한 선행 이야기다.
해방후 처음 맞은 3·1절 그날, 손씨는 서울 을지로 4가 중부시장 근처에서 한 떼의 '패전 일본인 귀향민' 과 마주쳤다. 남루한 행색에 궁기까지 겹친 비참한 모습이었다. 모두 지친 다리를 질질 끌며 걷는데 무리 중에서 갑자기 대여섯살난 아이가 털썩 길가에 주저앉더니 발을 주무르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증오했던 日人에 온정 베풀어▼
아무도 그런 아이의 모습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심지어 그 어머니마저 외면하고 한참을 걷다가 뒤돌아보며 고작 이런 말을 할 뿐이었다. "일어나서 걷는거야. 걷지 못하면 죽어야 해. 아무도 너를 업거나 안아줄 수 없어."
손씨는 이 슬픈 정경을 보다못해 아이에게 다가가 등을 내주었다고 한다. "내게 업혀라. 오늘이 3·1절이야. 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지은 죄값을 지금 어린 네가 톡톡히 치르고 있구나." 앞서가던 아이의 어머니가 눈물바람으로 고맙다며 목례를 하고, 손씨는 아이를 등에 업은 채 몇 개나 언덕을 넘어 행렬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날 아이를 내려준뒤 손씨는 '나 스스로를 비웃었다' 고 적었다. 유관순의 태극기 든 두 팔을 칼로 쳐 떨어트린 일본인 순사와 핏줄이 닿아있을지도 모를 소년에게 보낸 어쭙잖은 동정과 연민을 어떻게 설명해야 옳은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며, 발부리로 길가의 돌멩이를 걷어차며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침략전쟁을 정당화하면서, 이웃나라의 항의에 못이긴 척 몇몇 표현만 바꾼 새 역사교과서를 내겠다고 고집하는 요즘 일본인들에게 손씨의 일화를 들려주고 싶다. 발이 부르터 걷지못하는 아이를 업어준 인지상정조차 스스로 비웃어야 했던 손씨의 어쩔 수 없는 대일감정이 그 일화엔 배어있다. '유관순과 일본인 순사와 걷다지친 아이' 사이에서 손씨가 느꼈던 갈등을 지금도 대부분 한국인은 느끼고 있다.
해방 무렵 한국민의 일본에 대한 감정은 36년간 속절없이 당해온 직접피해에 대한 분노가 주된 것이었다. 부모형제를 징병 징용으로 끌고가 죽거나 다치게 했고 누이를 황국 군대의 노리개로 삼았으며 밥그릇과 수저까지 군수물자용품으로 빼앗아갔던 그들을 꿈에서라도 용서할 수 없었다.
지금은 어떤가. 침략과 수탈의 역사가 끝난지 벌써 56년이 지났으나 정말 제대로 된 반성과 사죄가 있었던가. 오히려 정치인과 우익학자들이 앞장서 식민지 지배를 시혜와 원조, 보호 쯤으로 호도하며 황국사관적 민족주의를 자국내에 전파하지 않는가. 일본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자학(自虐)사관' 에 불과하다며 아직도 한과 슬픔에 젖은 이웃국민들의 '가슴' 을 또다시 침략, 수탈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는 언론도 가세하고 있다. 교과서의 역사왜곡에 대한 한국과 중국의 항의를 내정간섭 차원으로 매도하더니 한편으론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것을 명백히 하라" 고 일본정부에 주문한다. 전후 일본의 교육은 일본역사에 대한 긍지를 결여해 좁은 시야를 가진 자폐적 일본인만 양산했다며 이를 시정해 자유주의사관을 키워야한다고 주장한다. 군국주의의 망령을 불러와 그걸 후손에게 심어주겠다는 얘기다.
하기야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한국인 영새 21,000여주의 말소조차 거부하고 있는 일본이다. 태평양전쟁때 희생된 한국인 군인과 군속의 원혼을 유족이나 우리 정부의 승인도 없이 신사에 합사조치함으로써 마치 원혼들이 천황에 충성하고 일본을 위해 목숨을 바친 것처럼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왜곡의 업보 두렵지 않나▼
태평양전쟁 전몰유족회 등이 "일본에 끌려가 죽은 것도 억울한데 일본을 위한 수호 제신으로 모셔지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며 근 10년째 영새의 말소를 요구하고 있으나 일본은 들은 척도 안한다. 그러니 중학 교과서의 역사왜곡에 대한 이웃의 항의 쯤은 '아시아의 맹주답게' 거쳐야할 통과의례 정도로 치부하는지 모른다.
그르친 역사에 대한 반성이 없으면 결국 그 역사가 자신을 되치게 된다. 패망해 쫓겨가던 어린이의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게 하려면 일본은 손소희씨의 '작은 과거' 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민병욱<논설위원>min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