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위 감독은 전성기 때 홍콩 영화에 한 획을 그은 엄청난 거장이다.
그 시절 홍콩의 낭만을 스크린에 담은 영화 <중경삼림>
많은 영화 팬들의 Best 영화 리스트의 단골 손님인 <화양연화>
그리고 왕가위 유니버스의 시작점이었던 <아비정전>까지 엄청난 전성기를 보냈다.
하지만 그의 전성기 필모그래피 중에서 한 가지 이질적인 작품이 있다.
그가 촬영한 영화의 배경은 외국이 등장하더라도 항상 홍콩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딱 한 작품이 홍콩이 아닌 다른 도시, 심지어 뜬금없이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중심으로 촬영되었다.
게다가 영화 내용은 양조위와 장국영의 동성애를 그리고 있어 파격을 더하고 있다.
바로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호평 받는 영화 <해피투게더>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왕가위 감독은 왜 갑자기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영화를 촬영하기로 마음 먹었을까?
"사람들이 내 영화 제작에 어떤 감독이 가장 영향을 끼쳤냐고 물어보면, 나는 많은 감독들에게서 배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은 바로 마누엘 푸익입니다."
왕가위는 <거미 여인의 키스>, <천사의 음부>로 유명한 아르헨티나의 소설가 마누엘 푸익의 작품에 매료되었고, 그의 소설 중에서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어페어>에 큰 영감을 받게 되었다.
왕가위 감독은 무조건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고, 자신의 차기작에 반드시 이 제목을 사용하기 위해서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날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해피투게더>의 제작 비하인드를 담은 다큐 <부에노스아이레스 제로 디그리>를 보면 슬레이트에 B.A. Affair라고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영화의 최종 이름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부에노스아이레스 어페어>가 되지 않았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촬영을 끝낸 이후에 이 영화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야기만이 아닌 홍콩의 이야기가 담겨있다는 걸 왕가위 감독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의 제목은 우리가 아는 제목 <해피투게더>가 되었다.
간혹 <해피투게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왕가위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어페어>에 영감을 받았다고 하니 원작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서 찾아보는 경우가 있는데, 만약 내용적인 유사성을 기대하고 가면 실망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왜냐하면 사실 내용적으로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사실과 동성애라는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며 유사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왕가위는 사실 <부에노스아이레스 어페어>의 스토리 라인에 끌렸던 것은 아니다.
만약 스토리를 시간 순으로 재배열 했을 때 스토리 자체는 매우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가위는 푸익이 이 단순한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과 사랑에 빠졌던 것이다.
푸익은 이 소설을 전개할 때 직선적인 서사기법을 사용하는 대신 시간 순서를 왜곡시키고 같은 시간 속의 다른 인물의 시각으로 전환하기도 한다.
이런 연출 방식을 왕가위가 좋아했다는 걸 중심으로 <부에노스아이레스 어페어>를 읽고 난 다음 <해피투게더>와 유사성을 찾아본다면(시간과 시점 변화에 주목!) <해피투게더>라는 명작에서 또 다른 재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