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일요일 저녁 TV조선은 ”이승만 하와이 30년“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방송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 프로는 이승만 건국 대통령 탄신 148주년을 맞아 ’건국이념보급회‘라는 시민단체에서 교회 등에서 기부한 성금과 협찬금을 통해 제작한 저예산 프로였다. 그동안 이승만 전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한 초대 대통령인데도 불구하고 근대사에서 멀어진 금기(禁忌)의 인물이었다. 좌파세력의 집요하고도 끈질긴 친일 몰이와 독재 프레임을 씌워 그의 발자취를 지우는 데 총력을 쏟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그 당시 그의 유해는 하와이에 잠들수 밖에 없었고 국내에는 변변한 기념물조차 남겨진 것이 없었던 것이 현실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근 70여년 간 금기시 되었던 이승만 전 대통령 행적에 대한 방송이 TV조선의 전파를 타고 희미한 안개 속을 헤치며 세상에 첫발을 내딛게 되자 세상 여론이 달라지고 있음이 감지되고 있다. 일찍이 독립과 개화에 관심을 가졌던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수학(修學 )하며 국제정세의 흐름을 주밀하게 관찰했다. 일제의 패망으로 해방이 되어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좌,우 대립이 극심했던 어수선한 해방 이후의 사회 혼란 속에서도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시장경제라는 확고한 국가의 틀을 구축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 초기 국가의 초석을 닦은 업적은 상당히 많다. 그중에서도 우리의 안보와 직결된 업적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일 것이다. 만약 그때 이승만이 미국과 방위조약을 체결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 땅은 붉은 사상이 지배하는 노예국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최근 국내에는 민노총에 잠입한 간첩이 속속 검거되고 있다. 종북좌파세력은 북한의 주장을 앵무새처럼 읊으며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평화협정을 주장하는 이면에는 낮은 연방제를 통한 적화통일이 도사리고 있지만, 그것을 저지하는 가장 눈에 가시같은 존재가 바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일 것이다. 좌파세력은 한미상호방위조약만 파기할 수만 있다면 미군 주둔의 근거가 소멸되어 적화통일은 시간문제라는 신념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종북좌파세력이 반미 정치투쟁을 하는 이유일 것이다. 어쩌면 좌파세력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행적에 대해 극도로 혐오하고 증오하는 이유가 바로 한미상호방위조약 때문일 지도 모른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6.25 전쟁 휴전 당시를 즈음하여 미국에 대한 이승만의 끈질긴 노력과 벼랑 끝 압박으로 인해 탄생 된 조약이다. 당시 이승만 전 대통령은 국제정세에 능통한 현실주의자였다. 38선 이북에 중공군이 주둔해 있고, 북한의 배후에 소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승만이 노린 것은 그 당시 완성체가 되지 않았던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미국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음과 동시에 가급적 많은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고도로 기획된 정치적인 제스츄어가 필요했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6.25 전쟁은 휴전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휴전협정이 시작되기 전에 이승만은 북진통일 운운하며 휴전협정에 반대하는 자세를 취하며 협정서에 서명을 미루고 있었다. 휴전협정 반대 카드는 미국을 압박하기 위한 무기였다.
그날, 이승만은 미국 델레스 국무장관에게 연락하여 미국이 필리핀과 체결한 것과 같은 조약으로는 공산군이 대규모로 한반도에 남아있는 상황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가 없다면서 미국에 날을 세웠다. 여기에 덧붙여 일본이 비록 패전국이기는 하지만 언제든지 우리를 공격할 우려가 가장 큰 국가라면서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는 메신저까지 보냈다. 그러자 휴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던 미국에서는 이승만을 달래기 위해 매우 이례적으로 델레스 국무장관을 한국으로 급파했다. 그해 8월 4일, 델레스 국무장관이 서울에 도착하자 이승만은 반가워하지도 않고 고마워하지도 않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싸늘한 반응을 연출했다.
이튿날인 8월 5일, 이승만은 델레스 국무장관에게 한국국민은 공산주의인 소련도 두려운 존재지만 더 두려운 존재는 언제든지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는 일본을 더 두려워한다는 점을 강력하게 피력했고, 미국이 패전국인 일본과 군사적, 경제적으로 강화한다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라고 직격탄을 날리며 한국은 일본의 재점령 야욕을 반드시 분쇄해야 한다면서 미국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승만이 미국을 압박한 데는 노리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위협과 공격을 사전에 봉쇄하는 동시에 일본의 팽창 야욕도 저지시키기 위한 이중 봉쇄의 효과를 지닌 법적 장치 마련을 위해선 대한민국의 안보가 확실하게 보장되는 장치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인식에 방점을 찍고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승만의 요구에 순순히 응하지 않았다. 당초 델레스 국무장관의 방한은 한미상호방위조약에 재정적인 부담과 전쟁 발발 시 자동개입 조항이 삽입되면 미국 상원의 비준에 어려움이 있다면서 이승만의 요구를 거절할 목적의 방한이었다. 그 당시 미국의 속셈은 한국의 방위를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통해 지역 안보 체제에 맡기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승만은 미국의 전략을 훤히 꿰뚫고 있었기에 일본을 주체로 한 지역 안보 체제의 부당성을 계속 거론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이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계속 들고나오자 이승만은 미국의 요구와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승만은 오히려 평화선이라는 이승만 라인을 선포함과 동시에 일본 어선을 나포하여 갈등을 유발하는 등, 미국의 기대와는 반대 방향으로 계속해서 압박을 시도했다.
1953년 8월 7일, 이승만은 한국 분단의 책임이 미국에 있다는 공격적인 자세로 미국에 압박을 가하면서 한,미 간의 상호방위조약은 NATO 조약과 같이 유사시 미국의 즉각적이고 자동적인 개입이 보장되는 조약이 되어야 하고, 미국 상원의 비준을 받아야 하는 현실적인 조약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이처럼 이승만의 끈질긴 압박은 미국으로 하여금 조약에 응하지 않을 수 없는 무기가 되어 결국 그해 8월 8일 가조인에 서명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1953년 10월 1일 당시 변영태 외무장관이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에서 델레스 국무장관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공동 서명함으로써 정식으로 조약이 조인되었다.
이처럼 ’한미상호방위조약‘은 국제정세의 흐름을 읽는 외교적 능력이 탁월한 이승만이 있었기에 가능했고, 이 조약의 성공을 위해 이승만은 모험적인 벼랑 끝 외교 전술(brinkmanship)을 구사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맺어진 조약으로 인해 그 당시 한국군 20개 사단의 현대화, 전후 복구 사업지원 등의 부수적인 효과도 거들 수가 있었다. 이 내용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완범 교수가 저술한 ‘한미상호방위조약 추진배경과 협상 과정“ 논문에 수록되어 있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북한은 수시로 미사일 도발을 자행함에 따라 미국의 전략자산 역시 한반도에 전개하여 한국군과 북한 도발에 대비한 연합 훈련을 하고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없었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