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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이번 주일 본문은 3부분으로 구성된다: (1) 전복(subversion)에 관한 4개의 비유(31-33, 44-46); (2) 가려냄(sorting)과 최후의 심판에 관한 비유(47-50); (3) 마태의 자신의 일에 관한 이해. 두 번째 부분에 나오는 비유들은 지난주에 다룬 가라지의 비유와 유사하여서 여기서는 첫 번째와 세 번째 부분에 관해서만 설명하려고 한다.
겨자와 누룩, 도둑과 상인. 이 비유들의 전복적인 내용과 등장 인물들의 부정적 특징 등은 13장의 다른 비유에 나타나는 풍성한 소출, 가라지의 제거, 진실한 제자의 구별 등의 주제와 대조된다. 겨자(31)는 농부들이 밭에서 발견하면 뽑아버리고 싶은 가라지와 같은 것인데, 여기서는 시작할 때는 작지만 크게 자란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는 비유로 사용되었다. 누룩(33)은 사체를 부패시키고 무교절 기간에 집안에서 제거해야 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좋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나님은 여인이 밀가루에 누룩을 섞듯이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발효하도록 만드셨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밭에서 보물을 발견하고, 밭 주인에게는 그 사실을 숨긴 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그 밭을 사는 사람과 같다고 했다.(44) 우선, 왜 그 사람이 남의 밭에서 땅을 파고 있었는지 수상하다. 그의 행동은 절도에 해당한다. 당시 상인은 오늘날 중고차 판매인이 받는 것과 같은 취급을 받았다. 그들의 숨은 의도와 비양심적 태도는 늘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 상인은 절대적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모든 것을 팔아서 망할 수도 있는 위험을 자초하였다. 일단 절대적 상품을 구매하고 나면 더 이상 사거나 파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이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의 제자도를 묘사하기 위해 <관습을 깨뜨리는 사람과 사물>을 미화한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이상적인 시민상-는 로마제국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일러준다.
이 비유들은 보수적 성향의 중산층의 종교가 되어버린 미국의 기독교에 근본적인 도전이 된다. 오늘 본문은 제자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도록 한다. 사람들에게 오늘날 중산층의 <도덕, 모범적 시민의식, 책임감 있는 성품> 등에 관해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기관이 무엇인지 물어보라. 대부분 교회라고 대답할 것이다.
주류 교회(mainline churches)는 더 이상 이전에 갖고 있었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1900년대부터 1950년대 말까지 주류적 역할을 했지만, 더 이상 주류라는 말은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나 “주류” 와 “인습적”(conventional, 전통적)이라는 표현의 유사성 때문에 주류 교회적 심리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 비유들은 하나님 나라에 적합한 제자가 되기 위해 어떤 준비를 갖춰야 하는지 물음으로 주류 교회적 심리에 대해 도전장을 던진다. 사회의 바탕이 건강(평화와 정의가 충만한 샬롬이라는 의미에서)할 때, 교회가 사회와 조화를 이루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교회는 사람들이 잘 적응하고 균형을 이루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런데 사회가 하나님의 나라보다는 로마 제국과 더 유사하여, 정책이나 예산이 사회적 불평등과 구속적 폭력(redemptive violence: 폭력으로 구원을 달성하려는 생각)을 조장한다면 교회의 역할은 무엇인가? 병든 사회에 적응하고 그 안에서 균형 잡힌 생활을 하도록 돕는 것은 복음에 반대되는 일이다. Warren Carter가 언급한 것처럼 “개인이 병든 사회에 잘 적응하려면, 부패만이 온전히 그 목적을 이루게 할 것이다.”(Matthew and the Margins: A Sociopolitical and Religious Reading, 2000, 291) 교회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해야 할 일은 오늘날의 가라지, 누룩, 도둑, 상인을 구별할 줄 아는 제자를 길러내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서 마태는 “이해(understanding, 깨달음)”라는 주제로 돌아온다. 예수는 가까운 제자들에게 “너희가 이 모든 것들을 깨달았느냐?”(51)고 묻는다. 그들은 예라고 대답했다. 그다음 마태는 <많은 학자들이 마태의 자기 이해라고 규정하는> 특이한 발언을 하고 있다: “하늘 나라를 위하여 훈련을 받은 율법학자는 누구나, 자기 곳간에서 새 것과 낡은 것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 (Every scribe who has been trained for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the master of a household who brings out of his treasure what is new and what is old. NRSV)”(52)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우리가 율법학자를 토라의 해석자로 이해한다면, 하늘 나라를 위해 훈련받은 율법학자는 <성경, 해석의 전통, 예수의 가르침> 등으로 더욱 보강되고 풍성해진 보물을 갖고 있다.
옛것을 꺼내는 것은 전통-히브리 성경과 그 주석의 전통-으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내놓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어떤 측면에서는 전통과의 연속성을 유지하고, 다른 측면에서는 전통의 의미를 바꾸는 방식으로>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 자체를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1) 전통으로부터 받은 가르침 (2) 당대의 <하늘 나라의 율법학자가 되기 위해 훈련받은 자들>을 통해 살아있는 주님(the living Lord)이 공동체에게 주는 가르침. 전통은 전달과 수용, 대화와 논쟁의 과정과 분리될 수 없다.
마태의 자기 이해는 오늘날 복음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자들이 스스로에 대해 성찰하는 데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 나는 스스로를 명백하게 <하늘 나라의 율법학자로 훈련받은 자>로 이해하는 설교자를 만나본 기억이 없다. 마태의 본문은 우리를 그렇게 이해하도록 권유한다. 우리가 설교하거나 가르칠 때 우리 스스로를 어떤 자로 이해하는가? 구약과 신약 성경이 우리의 낡은 전통이라면, “새 것”에 해당하는 것은 무엇인가? 52절에 소개된 마태의 자기 이해는 우리의 자기 이해를 위한 사색의 좋은 출발점이 된다.
주석적 관점
마태복은 주석에서 데이비스와 알리슨은 세 번째 예수의 담론(13:1-53)을 단순히 세 부분으로 나눈다. 첫 번째 부분은(1-23절)은 예수의 사역에 대한 복합적인 반응에 대한 이해를 제공하고 있다. 두 번째 부분은(24-43절)은 호의적인 반응의 결여에 대한(24-30,36-43) 둘째 이유로서 악한 자들의 악의적인 일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은(44-53)은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기 위한 적절한 반응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각 부분들은 그 부분의 비유의 내용에 관한 요청으로 끝난다.
그러한 패턴을 따라, 오늘 성서 정과의 여섯 가지 짧은 비유들이 두 번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네 가지 주제로 나누어 진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31-33)은 가라지의 비유와 그것의 설명 가운데 위치한다. 이 두 비유들은 분명히 문제되는 복음선포의 순수성과 하나님나라 미덕의 놀라운 마지막 결과의 대조에 초점을 두고 있다.
오늘 본문의 여섯 비유들 중에 다섯 가지는 비슷한 패턴을 따르고 있다. 다섯 가지 비유들은 “하늘나라는 ...와 같다”를 함축적인 말로 시작한다. 이 공식은 위더링톤에 따르면 지혜교사의 방식을 따른 것인데, 이것은 마태의 구조적 공식은 예수를 새로운 모세가 아니라 “지혜교사”로 제시한다는 그의 주장을 강화시킨다. 예외는 마지막 비유인데(52), 단순히 지혜교사의 은유적 묘사로 간주될 수 있다.
겨자씨비유와 누룩의 비유는 둘 다 호의를 주지 않거나 변화의 교훈을 제시하는데 정결하지 못한 그러한 요소들을 사용한 것이다. 마태의 겨자씨 비유의 설명은 Q 전승이나 정경이 아닌 도마복음서와 비슷하다. 오늘날에 겨자씨를 이상화하는 이미지와는 반대로, 겨자씨 관목은 고대의 사람들의 정원에 추가하고 싶지 않은 식물이었다. 그 겨자씨 관목은 소중한 정원의 공간을 낭비하는 잡초이다. 앞의 가라지의 비유와 같이 겨자는 몹시 뽑고 싶거나 태우고 싶은 식물이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예수는 작고 별 소용없는 어떤 것이 놀랍게 자라나 쉼터나 배양지를 제공한다. 예수는 이것을 하나님의 활동에 비유했다. 앞의 비유의 교훈이 다른 사람들은 쓸데없는 것으로 여길 때 하나님의 나라에서 궁극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리킴으로 강조된다.
짝이 되는 비유들이 듣는 사람의 능동적 상상력에 의해 그려진 이미지를 보완하는 패턴을 따르면서, 누룩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변화하는 능력을 강조한다. 누룩은 오늘날 부엌에서 사용하는 효모균과 다르다. 성경시대에는 누룩은 거의 보편적으로 어떤 악한 것이나 정결하지 못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 시대의 팽창제는 장차 빵을 굽는 효소로 사용하기 위해 남은 빵의 부분을 부패하도록 놓아둠으로써 만들어졌다. 충분히 부패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데 새로운 반죽이 부풀도록 하지 못한다. 오랫동안 부패하게 놓아둠으로써 빵만 망치는 것이 아니라 음식물도 독성화 시킨다. 누룩은 치명적이다. 겨자씨와 같이 작은 양만이 밀가루를 부풀게 한다. 여자가 섞은 가루 서말로 결혼식 잔치를 위해 충분한 빵을 구울 수 있다. 이 비유에서 추가적 관심(누가복음의 잃어버린 동전의 비유와 같이)은 예수의 역할을 그 여인에 비유한다는 것이다.
44-50절의 마지막 부분의 비유들은 마태복음에 유일하다. 이 설교모음의 다른 비유와는 달리, 이 세 비유들은 예수나 듣는 사람의 수용성(이해력)에 관한 것이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하나님나라의 궁극적 가치에 관한 것이다. 처음 두 개의 비유, 숨겨놓은 보물비유와 값진 진주 비유는 박해받는 안디옥 기독교인들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하나님나라의 선물을 우연히, 또는 오랜 노력 끝에 발견했든지, 그들은 복음에서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가치가 있는 그러한 최고한 가치를 찾았던 것이다.
그물 비유의 종말론적 본질은 하나님나라의 가치에 대해 말한다. 가리지 비유에서와 같이, 심판의 날이 올 것이다. 마지막 시대에 심판이 올 것이고, 심판은 선이든 악이든 현재에서 결정된 결과로 오는 것이다.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하나님나라의 약속은 넓게 뿌려졌다. 하지만 “잡은 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결정되는 것은 우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한 천사들에 의해서이다.
마지막 비유는 제자들에게 하신 마무리 진술인데, 그것 또한 마태복음에만 있다. 예수와 같이 제자들도 율법학자이다.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나눈 사람들은 이제 적절한 마지막 교훈을 통해 선생들이 된다. 마태 동시대인들이 직면한 도전과 비슷한 도전들이 계속되었다. 그러기에 담화는 상기시키는 것으로 끝난다. 진실로 지혜 교사들은 옛 것과 새것 모두에 가치가 있음을 깨닫는 것이고. 지혜는 둘 모두에서 발견되는 진리를 존중한다.
마지막 그룹의 비유들로 마태는 하나님나라는 주변화되고, 정결하지 못하고, 남은 자들에 의해 수용되는 것이라는 메시지로 마친다. 의례들의 규칙은(누룩에 관해서와 같이) 종말에 적용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반응은 현재 사는 사람들 모두에게 주어진 하나님나라 장점들의 미래적 실제화이다. 그러기에 에수의 진짜 가족을 찾은 사람이다. 들을 귀와 이해할 귀를 가진 자이다.
목회적 관점
군중들이 실망했다면 어쩌면 몇몇 제자들도 그랬을지 모르겠다. 예수는 씨앗과 나무에 관한 비유를 한 가지 더 말씀하시고서, 빵을 굽고, 밭을 갈고, 낚시를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그렇다, 그는 부유한 상인에 관한 이야기 하나를 덧붙이지만 나머지는 모두 겨자나무처럼 평범하다. 어떤 왕이나 심지어 왕자도 이 왕국의 비유에 등장하지 않는다. 열혈당 시몬이나 그의 동료 유다를 기쁘게 하는 군 장성이나 혁명 지도자는 없다. 그들은 실망했음에 틀림없다.
우리 교인들도 실망할지 모르겠다. 하늘에 대한 그들의 비전이 겨자나무와 집안일을 포함하는지 의심스럽다. 하나님은 농부 또는 빵 굽는 여성보다 좀 더 자주 “주님” 또는 “왕”으로 여겨진다. 마찬가지로, 현대의 기독교 음악은 예수를 “우러러보는” 것에 대해 노래하며, 예수를 높이고 가장 높은 하늘에서 그를 찬양한다.
그렇지만, 예수가 자신의 나라와 하늘나라에 대해 한 이야기는 말 그대로 땅으로 내려왔다. 그 이야기들은 소작농, 주부, 어부 같이 일상생활을 하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고상한 비전이 아니다.
물론 그게 요점의 전부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신과 인간이 만나는 신비 인 성육신을 믿으라고 요청받았다. 예수의 비유에서, 예수께서는 성육신의 초점을 그 자신에게가 아니라 주위의 세계에 두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 생활에서 가장 흔한 것(31, 33, 44, 45, 47 절)과 같다. 예수 자신처럼, 우리에게 볼 눈과 들을 귀만 있으면 이 일상 세계는 신과 인간의 거룩한 만남을 구체화한다.
그 구체화에서, 그의 비유는 그리스 신화 또는 로마 신화나 이솝 우화와 크게 다르다. 예수의 이야기에는 인간으로 변장하거나 말하는 동물 같은 신이 없으며, 여자와 남자가 매일 일하는 실제 생활이 있을 뿐이다.
마태에 따르면, 예수가 광야에서 나올 때 제일 먼저 한 일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3:2) 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는 거의 모든 시간에 누군가를 치유하거나 소외된 사람들을 만나거나 여성을 존중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본다. 그는 또한 하늘나라의 비유를 통해 하늘나라가 가까이에 있음을 보여준다.
예수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달콤한 미래 안에 있는 밀교의 왕국이 아니라 겨자나무나 빵 한 조각처럼 가까이에 있다. 하나님 나라가 영원한 고통의 위협보다 훨씬 가까이 있다는 것이 믿음으로 초청하는 그의 부르심의 기초다. 이 다섯 가지 비유 가운데 마지막 비유만이 종말론적인 심판과 이를 가는 이야기를 포함한다. 나머지 비유들은 반죽을 하는 것에서부터 밭을 가는 것까지 일상생활의 구석구석에서 하나님을 그리고 있다. 예수는 사람들이 지옥을 두려워하게 해서가 아니라 천국을 가까이에서 보도록 도와줌으로써 인간의 삶을 변화시킨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러한 이미지를 제시함으로 그의 조상 모세가 그의 백성에게 한 고별사를 반복한다. 약속의 땅 경계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 명령은 당신들에게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고 상기시킨다(신 30:14). 세상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에서 예수는 그 진리를 재확인한다.
또한 예수는 세상의 일곱 가지 경이로움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상상하지 않는다. 그는 심지어 당당한 레바논의 삼나무를 사용하지 않고, 작은 겨자나무를 사용한다. 그 씨앗은 가장 작은 것의 상징이며 그 씨앗에서 나오는 나무는 아무리 크더라도 하찮은 나무, 좀 더 정확하게는 하찮은 덤불이다. 겨자는 그 시대의 칡이나 소금삼나무다. 하나님의 나라의 이미지로 그것이 어떠한가?
다음으로, 누룩이 부패와 불순의 상징인 전통에서, 빵 100덩어리를 만들 수 있는 누룩이 있다. 하지만 예수의 비유에서 누룩은 하나님 나라의 기적적인 성장의 대리자가 된다. 하나님이 겨자씨와 누룩을 사용하여 왕국을 키우실 수 있다면 당신과 함께 무엇을 하실 수 있을지 상상해보라.
가장 작은 것에서 풍성한 것을, 하찮은 덤불에서 생명나무를, 발효하는 누룩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먹일 빵으로의 기적적인 변형을. 하나님의 나라가 그와 같다고 예수는 설명한다.
다음 두 비유가 그 보물을 위해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소작인 농부와 진주 상인의 과한 반응은 오직 앞선 비유의 커다란 겨자 덤불과 빵조각들과 일치한다.
물론, 하나님 나라는 커다란 진주나 숨겨진 보물의 가치를 은이나 금이 아니라 덤불과 빵으로 매긴다는 역설이 있다. 당신은 칡을 얻으려고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가?
예수의 비유는 단순한 도덕적 우화가 아니라 그러한 결단을 요구한다. 비유는 모세의 고별사처럼,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는 우리의 책임을 강조한다. 모세는 그것을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 가운데 선택하는 것으로 말한다(신 30:15). 예수의 비유는 좋은 물고기 혹은 나쁜 물고기로 하나님의 나라 대 악한 자의 나라를 가리킨다. 모세와 마찬가지로 예수도 우리를 궁지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워지는 것은 우리에게 매일 그 나라를 선택하라고 도전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의 비유들이 세상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지 못하게 한다. 교인들은 대개 겨자를 슈퍼마켓 선반의 플라스틱 병에서 찾고, 비닐봉지에 들어 있는 빵을 사며, 진주는 홈쇼핑에서 할인가로 산다. 1세기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야기가 다른 세계에 대한 이야기인 것처럼 우리에게 낯설 수 있다.
그러므로, 새로운 비유를 찾으라. 당신의 세계에서 겨자씨처럼 풍성한 것은 무엇인가? 우리 시대에, 누룩처럼 부패한 것으로 경멸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변화시키는 힘의 대리자는 무엇인가? 밭을 가는 사람이나 진주를 찾는 상인처럼, 교인들이 그것을 가지려고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처럼 새 이야기를 통해 시대를 초월한 진리를 말해보라. 그의 눈을 통해 당신 주위의 세계를 보라. 그런 다음 가까이에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비전을 향해 당신의 교회의 눈과 귀를 열라.
설교적 관점
-이 본문에 대한 익숙한 접근은 겨자씨의 놀라운 자라남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즉 작고 평범한 씨로부터 5미터나 되는 큰 나무로 자라 잎도 무성하여 뜨거운 중동의 기후에서 새들에게 그늘과 쉴 곳을 제공하기에 충분하게 되었다.
작은 것으로부터 눈에 보이는 성장이라는 이 주제는 매 시대 교회에 큰 힘이 되었고 이 본문으로부터 적절하게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본문은 또 다른 접근을 할 수 있다. 이 본문은 감추어진 것에 대한 비유와 연관되어 있어서 [밭에 감추인 보화, 평범한 진주 속에 감추어진 값진 진주, 좋은 고기들이 감추어진 가득잡힌 그물등] 설교자가 이 본문을 다른 시각으로 살펴보도록 초대하고 있다.
-겨자씨 역시 감추어져 있다. 거의 무게가 나가지 않고 거칠게 뚫고나오는 잡초처럼 자라는 겨자씨는 농부의 밭에 가지런히 의도적으로 뿌려지지 않는다. 설교자는 여기서 의문을 가질 수가있다: 이 비유의 첫 번째 강조점은 성장이 아니었는가? 혹은 겨자씨 비유는 이어 나오는 비유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무언가 침입해 들어가고 예상하지 못한 결과늘 낳는 어떤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겨자씨는 다른 씨가 담긴 커다란 자루 안에 눈에 뜨이지 않게 있다가 마침내 주된 작물의 씨앗을 뿌릴 때에 함께 땅 위에 떨어진다. 계획적으로 뿌린 씨앗이 싹을 틔고 자라는 것에 관심이 있지 어느 누구도 [겨자씨에] 주목하지 않는다. 겨자나무는 기대했던 것이 아니고 어느 누구도 겨자씨에 주목하지 않았다. 보기도 어렵고 관찰하기도 어려웠지만 겨자나무는 보다 중요한 작물과 함께 섞여있다. 겨자씨가 싹을 내고 자라나서 밭의 최종형태는 기대했던 바와 완전히 다르게 된다.
-아마도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충격에 빠졌을 것인데 그 이유는 하늘나라가 시작되고 커가는 방식은 잘 정돈된 곳에서 질서있고 예측가능하게 전개될 것이라고 추정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하늘나라는 콩처럼 질서정연하게 혹은 아름답게 줄을 맞추고 있는 라벤더 꽃이나 목화 또는 포도처럼 있는 것이다. 심겨져 있는 것은 계획된 것이고 따라서 모두 비슷하게 함께 자란다.
-그러나 하늘나라가 겨자씨와 같다는 것은 아마도 줄을 맞추어 가지런히 정돈된 작물이 끊임없이 예기치 않았던 침범을 당하고 마침내 뒤집어진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겨자씨는 다른 씨들이 담긴 자루 속에 혹은 씨뿌리는 사람의 손 안에 숨겨져있다.
-종종 우리는 하늘나라에 관하여 명확하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정의를 내리길[경계선을 정하길] 원한다. 의심스러운 것, 우리가 믿는 것 그리고 믿기 어려운 것을 규정하는 것은 바른 일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주일에 모여 예수가 불필요한 것처럼 살면서[예수는 1세기에 살면서 선을 행하는 멋진 사람으로 여기면서] 예수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라고 선포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교회에서 우리는 교회에 잘 맞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규정할 수 있기를 원한다. [교회 안에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우리가 말하는 정형화된 중요한 것들이 있다.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신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예전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세례에 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잘 정돈되어 주의깊게 내려온 교리와 실천에 대한 경계선을 정해두고 있다.
-그 때 그것들을 지켜나가려는 우리의 귀에 속삭이는 하나님의 소리를 또한 듣게된다. 그것은 우리의 경계선을 넘어 나아가게 하고 그것이 우리의 경계선인지 하나님의 경계선인지를 분별하도록 요청한다. 이러한 점에서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즉 겨자씨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바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작은 상징이다. 그것은 자루 안에, 씨 뿌리는 자의 손 안에, 교회 안에,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겨자씨처럼, 밭에 감추어진 보화처럼, 일반 진주 속에 감추어진 아주 좋은 진주처럼, 잡은 물고기 가운데 감추어진 맛있는 물고기처럼 그렇게 감추어져 있다.
-1980년 대 초 어느 때에 데스몬트 투투 (Desmond Tutu) 대주교가 한 공영방송 TV에서 놀라운 인터뷰를 했던 장면을 나는 기억한다. 지금으로서는 믿기 힘들겠지만 당시에는 인종차별정책이 (apartheid) 매우 강했고 그런 상황이 곧 종식되리라는 외적인 표지도 없었다. 투투주교는 미묘한 말을 했다: “백인이 우리 땅에 왔을 때 우리에게는 땅이 있었고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다같이 기도합시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눈을 떴을 때 그들은 땅을 가지고 있었고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더 좋은 것을 갖게 되었다.”4) 하늘나라는 겨자씨처럼 우리가 확신하거나 경계선이라고 여기는 곳에 침입해 들어와서 거기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 더 좋은 것을 창조해낸다. 우리가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늘나라는, 우리의 놀라운 침노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고있던 것을 변화시킬 때까지 도전을 주고 또 자라나고 있다.
-청소년 시기 이후 늘 교회 밖에 있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그가 말하기를 교회는 규제에 너무 관심을 쏟았기 때문에 그는 교회를 떠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교회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주자며 설득하였고 마침내 그는 그렇게 하기로 동의 하였다. 그는 주일에 용기를 내어 일어났고 교회로 갔다. 회중들은 고백기도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는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하였고 해야만 할 일들을 방치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건강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기도를 들었고 미소지으며 스스로에게 “좋으네”라고 말했다. “이 기도는 나와같은 사람들의 소리처럼 들렸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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