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논의되는 한국 현대미술의 정체성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형식과 내용의 상호 관계이다. 즉 가장 보완적이고 균제적이어야 할 양대관계의 이상적 조화가 이루어지지 못한데서 야기되는 원인을 이 글에서는 규명하고저 했으며 그러므로서 기본적 입장을 예술의 기초적 구조 측면에 서서 정체성에 대한 사실 접근과 비판을 가하려했다. 범위나 논제의 광범위함으로 인해 비교적 핵심적인 내용만을 간추리는 형식을 취하였다.
1. 예술의 구조 3요소
일반적으로 예술을 구축하고 있는 기초적인 요소를 분류함에 있어서는 1)형식(Form)과 2)내용(Content)의 양대맥락으로 나누고 있다. 여기서 형식이란 어떠한 예술작품에 표현된 내용을 구축하는 존재방법이면서도 모든 예술작품의 표현방법, 과정에 있어서의 현상적 범위를 포괄할 수 있다. 사실상 내용이 존재하는 것은 형식이라는 표현때문이며 그 표현의 강점과 강도에 따라서 내용의 감정과 강약 또한 달리하게 된다. 그러므로 립스(Th. Lipps)는 「내용의 존재방식(Daseinsweise)」이라 했고 폴겔트(j. Volkelt)는「 대상의 표면 현상(Oberfl?chenerscheinung)」이라고 말했다.
조형예술에 있어서 형식의 해석은 각기 다르지만 일반적으로는 형, 선, 색채, 공간규정 등이 열거되며 모든 재료의 재질감과 표면적 현상등도 광의의 뜻으로 포괄될 수 있다. 그외에도 조형적 원리의 일체인 원근, 구도, 조화, 통일, 명암 등도 모두가 해당된다.
내용이란 그 하나는 형식으로 표현되기 이전에 예술작품에 투여, 이입되어지는 작가의 사유체계를 말할 수도 있으며, 다른 하나는 표현 이후형식으로부터 발생되는 의미를 말할 수 있다. 후자는 형식으로부터 도출되는 일체의 미적가치나 의미를 말하고 있으면서도 전자는 형식의 근원, 그 정신적 원천으로서의 입장을 포괄하게 된다. 폴겔트는 이를 「 대상의 체험적 의미 」라고 말하고 있으며 지적이고 감각적인 분류로 나뉘는 예가 있다. 물론 이는 미적 감관작용에서 제기되는 감정의 이중적 구조와 맞물려서 이해되어질수 있는 논제로서 엄밀하게는 예술작품의 정신세계에 대한 총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이는 지각대상의 성격을 강하게 내포한다.
즉 초록색 사물을 바라볼 때 그 사물의 실체는 초록색이지만 그 초록색의 매력을 느끼는 것은 정신적 행위기 때문에 정신적 지각의 움직임이나 심미가 없이는 초록색이라는 형식은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된다. 뿐만아니라 초록색의 감정, 미적가치, 정서적 세밀함은 철저히 지각의 산물이다. 여기서 지각의 정신적 행위는 바로 내용의 문제이다. 이것은 흔히 수, 범위, 모양, 무게, 동작등 추상적, 측정가능한 1차적(primary), 소리, 색채, 냄새, 맛, 촉감등 측정곤란한 감각성질의 2차적(secondary)성질에 이어서 3차적(tertiary) 성질로 간주하려는 영국의 철학자 보상케(Bernard Bosanquet)의 이론으로 비유될 수 있다. 즉 고차적 내용에 도달하면 이미 일차적인 형태의 특정으로는 불가능한 우아함, 섬세, 강함, 번쩍임등의 지각적 판단이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의 지각은 지극히 감각적인 상태와는 다소 상대적일 수 있으며 眞 , 善의 개념이 동시에 수반되는 작가의 성품과 삶의 영위방식, 학문의 깊이등 모든 예술외적이랄 수 있는 문제들이 동시에 적용되어 진다. 그러므로 「현상하는 생의 충실」이라는 말이 대두될 정도로 내용에는 작가의 삶과 직결된다.
한 폭의 풍경, 그풍경의 형상속에 내재된 또하나의 비형상적 풍경은 물론 전자의 풍경에 의해 비롯되지만 후자의 풍경은 분명히 전자와는 많은 차이를 지닌다. 비록 간단한 상상의 숲을 예시하고 있는 풍경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를 전경(Vordergrund) 후경(Hintergrund)라고 표현한다. 내용은 바로 후경인 것이며 마음을 그린다는 동양의 寫意的인 소산과 직결된다. 동시에 작품의 철학이요, 미학적 기초, 비가시적인 것, 이데올로기 등의 모든 면을 총괄한다.
위와 같은 두가지 대표적인 요소를 통해 예술이 구축된다고 볼 수 있으나 학설에 따라서는 형식의 요소중에서 다시 재료와 소재를 나누고 그 중 소재를 독립적으로 바라보려는 예도 있다. 이를 독립한다면 셋째번에 해당하게 되는데 소재는 크게 표현수단인 매제(medium)적 입장과 표현의 대상으로 보려는 입장이 있다. 이는 제재(Subject)라고 부르고 있는데 조형예술에서는 특히 중요시 한다. 왜냐하면 첬째는 어떤 분야보다도 조형예술은 그 매제를 선택하는 폭이 넓을 뿐 아니라 다양성으로 인한 무한함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며 둘째는 그 매제 자체가 어느 때는 훌륭한 조형수단으로 등장될 수 있는 언어체계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자연대상은 모두가 다 그러하다. 흙, 나무결, 금속, 천, 색소 등은 모두가 그좋은 예이다. 물론 제재인 표현대상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른 어느 장르와는 달리 오로지 제재의 선택이나 꼴라쥬, 재현만으로도 에술적 내용이 가능한 독특함 때문에 이 소재(Meterial)문제는 광의의 뜻에서 보면 형식의 전체를 통해 해당되는 중요성을 지닌다. 오데브레히트(R.odebrecht)같은 학자는 소재에 대해 창작수단의 의식, 예술향수 등의 체험적인 일체성을 강조한다.
2.正體性과 전통성
여기서 정체성이란 「본디 존재하는 참모습」으로서 다시 말하면 전통성이라는 모체를 중심으로 한 변속적이면서도 새롭게 구현된 참존재의 실체, 근원을 말하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다시금「전통」이란 어떤 집단, 국가등의 공동체에서 옛부터 이어 내려오는 사상, 관습, 행위, 형태등의 양식과 정신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의「양식」과「정신」이라는 뜻을 다소 예술학적 용어로 해석한 것이 바로「형식」과「내용」이라는 말이 된다. 즉 정체성의 정의는 본디의 존재, 그 참모습이면서 전통이라는 일상적 개념을 모태로 예술을 구축한다고 생각했던 기초적 3대요소인 형식, 내용, 소재의 주체에 관한 모든 것을 포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정체성의 구현, 그 핵심적 과제는 바로 이 삼자간의 문제로 다원화되며 이에 기준하여 한 민족, 한 집단, 한 작가의 본디 실체를 구현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전통(tradition)이라는 언어 자체도 옛부터 전해오는 물질·정신문화, 사고와 행위의 관습, 의례 양식, 사람이나 사건들에 대한 이미지의 본 뜻에서 논의되고 있으며 그 복합적 영역내에서 현대적 구현이 가능한 것이다. 즉 전통의 형식이랄 수 있는 물질 문화와 그 내용, 정신문화 이미지 및 소재 그 모두가 다원적으로 합성되어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된다는 말이다. 다만 우리는 여기에서 정체성과 전통성의 내면에는 위의 3대 요소가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유기적 관계의 시간적 개념이 작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할 따름이다. 또한 그것이 전자에서 살펴 보았던 개별적인 상태의 것이 아닌 복수적이고 집체적이며 나아가 시대적인 패러다임(Paradigm)을 전제로 한 공동화된 역사성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추인하게 된다. 그러므로 정체성의 추구는 「전통적 역사속에 내재되어온 공통분모에서 도출된 형식, 내용, 소재의 주체」를 중심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더하여 여기서 우리는 이른바 전통주의(traditiditionalism)나 전통지향적 사고에 관한 개념은 위의 사실들 중 과거에 집착함으로써 현재 또는 미래에 대한 시간적 개념을 달리하는 경우를 말한다. 즉 과거의 문화유산에 대한 집착에 의거하여 현재의 외부적 요소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보수적 성향으로서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결국 현대를 영위하는 고대의 유산이라는 시대적인 충돌과 오류로 이어지게 된다. 사회사적으로는 서양의 중세 봉건시대를 좋은 예로 들 수 있지만 그 보다는 중국의 송대, 원대, 청대 문예사조나 우리 조선시대의 미술사 엮시 그 대표적인 예로서 아예 重古사상이 모든 예술사조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이러한 경우에는 그 전통은 이어지는 듯 하지만 정체성의 정의에서 언급했던 「변속적이면서도 새롭게 구현된 참존재의 실체와 근원」이라는 뜻에 있어서 대치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정체성이란 전통성의 3요소를 바탕으로한 기틀위에서도 시대적 요인이 적절히 구현된 상태를 말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자각할 필요가 있다. 뵐프린은 "모든 것이 모든 시대에 가능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렇고 보면 정체성이란 전통성의 개념위에 다시 한번 시대적, 그 주체적 요소를 강조한 상태의 의미를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3. 근대한국미술에 있어서 정체성의 문제
우리미술의 과거를 되돌아 보면 한마디로 우리는 외세의 지배나 그 일방적인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한국사관중에서 한반도의 슬픈 운명을 논한 반도적 지리조건, 특히 대륙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도 없으며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내려갈 수도 없는 한반도의 위치와 형세에 대한 운명적 비극의 내용에서는 물론 식민사관으로 보는 견해도 옳다. 그러나 일면에서는 결코 부인할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도 인지되는 요소라는 것 또한 자명하다.
생각해보면 조선왕조 오백년까지 우리문화·미술은 교섭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거대한 중국의 일방적인 문화공급에 의해 외래사조의 수용이 이루어졌다. 물론 그 상당부분에서는 無飾 (무식), 無華(무화), 無巧(무교)의 독특한 우리 미감을 발현해 가면서 점진적으로 그 정체성을 구축한예도 많이 있었으나 민족사의 큰 테두리 그 자체가 궁극적으로는 중국의 추인하에 왕조가 지탱되었으므로 그 慕華(모화)사상이 자연스럽게 싹트게 되고 종국에서는 秋史 金正喜와 같은 분이 조선조 최고의 문인·서예가이자 동시에 한국적 정체성 입장에서 보면 지나친 중국 숭배주의자라는 재평가의 여지를 남기는 예도 적지않게 대두되었던 것이다.
사실상 鄭敾(정선)의 미적 가치를 그토록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어쩌면 중국의 그 거대한 문화유산의 무게에서 그가 그나마도 한국적 산수, 자연을 바탕으로 한 회화세계를 구현하려했다는 이유에서 그렇다. 고대의 한국미술, 그것은 어쩌면 탈중국의 의지와 그 정도 여하에 따라 단적으로 그 정체적 가치체계를 측정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미술은 중국적인 문화유산과 직결되어 있었고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영향권에 있었다.
근대는 혼란기를 거쳐 결국 일본압제하에서의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며 鮮展1)과 같은 대표적인 예로서 대변되는 친일적인 계기가 아예 공식화되다시피 하였다. 물론 協展2)같은 서화협회 주최의 대응전시가 있기는 했으나 얼마를 가지 못하고 해방직전까지는 거의 유일한 등용문으로서 근대한국미술의 핵심적 무대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후 우리는 주지되다시피 중국과 일본, 이 두나라의 문화적 영향력이 단절돠면서 해방과 전쟁을 지나게 되고, 하루아침에 척日(척일)기치를 내걸게 된다. 그것은 범민족 의식에 입각한 입장이었으며 당시로서는 미술계중진의 거의 대다수라 할만한 鮮展작가들에 대한 재평가가 시도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전혀 예상치 못한 두가지의 상태로 이어졌다. 즉 하나는 친일작가들에 대한 관대한 용서와 함께 거의 전면적인 재등용과 다른 하나는 서구사조, 모더니즘을 앞세운 유럽과 미국사조의 또다른 외세수용의 현상이 자극되었던 것이다.
문화란 어느 단일 민족의 의지나 역사만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망상적인 쇄국적 발상일수도 있지만 적어도 민족적 문화란 그 민족의 정체적 사상과 형식의 구축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위와같은 우리의 역사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조선시대 이후만 보더라도 우리미술, 문화를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창조하고 그것을 하나의 페러다임으로 축출해내는 역사적인 조건과 그 기회를 갖지 못했다. 연속적으로 외세의 간섭이나 외세에 대한 동경, 무분별한 중국, 일본, 유럽, 미국문화의 유입과 문화종속화가 어제 오늘의 상황이 아닌 오랜 역사를 통해서 무의식적으로 배어져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나 근대사에 있어서 제기되는 미술사의 반정체적 요인들은 더욱 그 정도를 심각한 상태로 몰아넣는 계기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몇가지 정리해보면
1) 고대회화의 사상, 기법의 단절 - 조선조말 ,구한말의 吾園 張承業 (1843∼1897)과 같은 작가의 맥락이 安中植 (1861∼1918) 趙양晋(1853∼1920)등에의해 이어지기는 했으나 극소수에 그치며 秋史(1786∼1856)이후의 문인화·풍속화·민화등의 전통성이 거의 단절됨, 특히 詩,書,畵 三絶사상의 단절은 그 핵심적인 사상적 붕괴의 초래.
2)「미술」의 의미규정과 낱말의 오류 - 「미술」이란 말은 일본의 明治유신이후 19C 후반에 사용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1883년 漢城旬報(한성순보)에서 가장 처음으로 받아들여 일본식 낱말과정의 해석에 의해 서구 미술의 의미를 규정.
3) 「東洋畵」「西洋畵」개념, 화풍 및 낱말과 장르규정 도입오류 - 1920년 7월 17알 동아일보에 기고한 卞榮魯(변영로)의 〈東洋畵論〉에서 동양화라는 일본식 낱말이 최초로 사용됨. 그 후 일본에서 일본화와 함께 서양화의 상대개념으로 사용해온 의미로서 국내에 일반화되고 鮮展을 통해 동,서양화라는 낱말이 공식적으로 사용됨. 동시에 일제시기를 틈타 과거의 書畵개념이 급속도로 퇴조를 보이고 일본식 동,서양화 화풍과 기법이 등장하게됨.
4) 서양미술 도입의오류 - 1909년 고희동이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하면서 시작된 서양화의 국내유입은 초기 대다수가 구미각국에서 직접 유입되지 못하고 일본을 통해서 유입됨으로서 일본인들에 의해 해석된 서양화에 치우치게됨
위의 결과에 의해 역사가 그렇지만 우리미술에 있어서 근대는 사실상 그 존재의 진실성이 의문스러울 정도로 비주체적 상황으로 점철되었고 고대를 잇는 文史哲의 맥락이 거의 단절되다시피 하였다. 漢學, 특히 조선조말 고증학의 학문적 뒷받침이 채 무르익기도 전에 혼란시기에 접어들게 되면서 이와같은 단절은 가속화되었으며 36년이지만, 극도로 조직적이고 제도화된 일제시기의 문화적 침략은 현재까지도 일본교육에서 볼 수 있는 밑그림(下圖)이나 석고데생의 방식, 사숙, 교실입문식의 방법이 잔류해 있을 정도이다. 이는 고대의 불교가 인도의 범어에 의해 씌어진 불경을 직접 번역해오지 못하고 결국 중국의 한문을 통해 전파 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러니한 역사와도 비견될 수 있는 근대의 암울한 단면들을 쉽게 인식하게 되는 일면이다.
특히나 우리고대의 「書畵」개념으로부터 서구의(techne) 테크닉(technique) 포이에시스(Poiesis) 포에지(Poesie) 아트(Art) 쿤스트(Kunst)라는 말의 변천과정을 「예술」이라는 의미로 해석함에 어떠한 구체적 범주의 설정이나 연구가 뒤따르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 후 지금까지도 우리시각에 있어서의 예술, 미술의 범주, 방법론을 확고하게 설정하지 못하는 오류를 남기게된다. 실제로 이 문제는 「예술론」 「미술론」에 대한 기초 학문이 거의 전무한 현재 우리 상황이 이를 실감케 한다. 그러므로서 근대 이후 우리미술계는 그 본질적 사상연구나 당위성, 구조적 체계에 대한 기초연구가 전무한 상태에 있었으며 그로 말미암은 비정체적 국면이 보다 가속화되었던 것이다.
현대사에 있어서도 여전히 위의 문제는 연속된다. 단적으로 말하여 우리는 근대가 없는 나라처럼 보이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 「근대미술관」이 없는 우리의 실정은 사실상의 역사적 단절로 함몰되는 극단의 우려까지도 낳을 수 있는 문제점을 내포한다. 현대미술관은 도심에서 떨어진 과천에 위치하며 년간 2백만명이 넘게찾는 중앙박물관의 위상은 그리 안정적이지 못하다. 보다 교육적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든가, 유물구입과 연구, 관리의 체계화 ·연구스텝의 진보적인 검증과 집필·고증의 기회를 위한 체재, 경제적 지원이 아직 너무나 낙후되어 있다. 현대미술관과 고대사미술관·박물관의 양극화된 단절. 이 문제는 고대, 근대, 현대로 이어지는 순차적인 역사관에 있어서 지극히 위험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픈 역사의 단면들, 그 역시 우리의 역사이며, 전통을 거슬러 올라가야 되는 중요한 출입구이다. 공허하게 비워진 근대의 체계화는 위에서 살펴본 네가지의 오류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아야 된다는 어떤 교훈과 예시를 가능케 할 수 있다.
근대의 문제점으로서 등장한 위의 두가지 문제 1)고대사의 유산을 바탕으로한 예술·미술본질에대한 현대적 의미가치를 검증하지 못한 오류와 2)근대의 오류를 방관자적인 입장에서만 방치하려고 하는 안타까움은 근대를 바라보는 우리미술계의 가장 중대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역사는 어쩌면 준엄한 반성 때문에 그 가치가 있는지도 모른다. 긍지도 자존도 사실은 반성으로부터 비롯된다. 일본의 문화침략과 우리 미술계의 적나라하고도 진실에 의거한 당시의 대응, 수용과정의 실상을 이제는 비판자적인 시각으로서만이 아닌 객관적 통찰과 자각의 입장으로서 역사화 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이와 같은 근대미술사의 현상들을 예술구조론적 입장에서 살펴본다면 결론적으로 「내용의 방황과 부재에서 오는 형식위주의 일방적 수용」현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생각해보면 구한말이후 우리는 미술 뿐 아니라 모든 분야가 한동안의 혼란시기로 인하여 조선 오백년간의 정신문화적 입장에서의 우리 전통을 계승받지 못한 채 근대에 접어들었다. 어찌보면 사실상 그 근대는 자의적이거나 자연적인 형태라기보다는 타의적이고 강압적인 형태의 근대였다고 말하는 것이 보다 솔직한 표현일 것이다. 철학은 없고 이민족의 화려한 장식적 색채나 기교들이 난무하는 근대에 우리 선조들은 속수무책인 채의 무력감을 맛보아야만 했고 한동안의 기간이 지나면서 무력감의 무게마저도 탕진해 버렸는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서 일부에서는 작품세계의 내면에서도 상당한 일본적 미감을 표출해내는 작가가 생겨나게되고 민족정서나 미감, 즉 내용미학까지를 침략당하게 되는 사례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단적으로 미술, 예술, 동양화, 서양화라는 가장 기초적인 의미 규정까지를 피동적으로 가하게 되는 어쩔 수 없는 국면이었음을 참조한다면 정신문화의 붕괴를 다시금 절감케한다.
4. 현대 한국미술에 있어서 정체성의 문제
4-1.초기현대의 오류 - 무조건적 서구화와 미래지향의 열기
일본의 문화침략을 저주하고 그 잔재를 문제시하는 일은 사실상 객관적으로 본다면 중국의 문화침략과 무비판적인 모화사상 잔재 역시 마찬가지 일 수 있다. 오히려 어느면에서 보면 보다 오래지않은 근대라는 일본 식민시대의 민족감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의 경우는 비교도 안될만큼 우리 미술의 전통성 확립에 있어서 막대한 공급원이자 장애적 요소라는 양면성을 띠고 있다. 근년 일본 교과서의 대한국사관 왜곡문제는 비단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세계 여러나라, 특히 중국, 미국, 유럽등 각국의 공통된 문제로 확산될 수 있다.3) 그렇다고 우리 현대사의 출발이 이와같은 과거의 오류들과는 다른 차원의 노력을 기울인 것도 아니다. 근대사의 역사적 좌절로 인한 후속적 치유나 검증이 가해지지 못한 혼란기에 다시금 전쟁을 겪고난 우리의 현대는 이미 민족유산의 파편과 잔해만을 딛고 있을 뿐이었고 그 역시 내면적 오류를 잉태하고 있었다. 고대의 文史哲, 三絶의 종합적이고도 유기적인 개념이 반세기를 넘게 붕괴된지 오래이고 고증학이 잊혀졌으며, 무엇보다도 식민사관에 의한 주체성 상실이 또 하나의 짐으로 와닿았다. 國學의 연구가 거의 말살되고 漢學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대신 전쟁이후 보다 절규하는 열정으로 접근된 최소한의 존재가치에대한 막연한 투쟁이나 화려한 서구사조의 상륙은 근대사의 돌이키고 싶지않은 공허한 상처들을 치유해 주는 듯 싶었다. 다시 50년대 중후반 근대에서 현대로 전이되는 과정에 발생되는 정체적 오류들을 정리해보면
1) 근대사, 특히 일제시대의 반정체적 사실들에 대한 준엄한 반성과 검증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한 채 40년대 후반을 지나게 되고 50년대의 격변기에 접어듬.
2) 서구현대사조의 수용에 있어서 어떠한 문화적 배경의 이해도 전제되지 못함으로서 그 내용적 미학·정신세계의 사조를 수용하기 보다는 형식적 유파를 검증없이 받아들이는 결과를 낳게됨. 도입이후의 재해석과정의 역부족과 엥포르멜, 추상표현주의 기하학적 추상등에 대한 구체적인 각 유파의 발생배경을 인지하지 못함으로서 내용보다는 형식에 치우친 초기 서구화의 경향을 나타냄.
3) 50년대 서구화의 일면 그간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욕구와 매력의 요인 때문에 급격히 확산 되지만 동양화 중심의 일면에서는 일제시대의 아픈 상처를 잊을 수 있는 방법론으로서 몰입하게됨.
4) 조선조말부터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극도로 약화된 정체성의 원인으로 말미암아 현대사의 서두가 서구에 동화되다시피 하는 비정체성 현상을 초래하게됨.
5) 이미 鮮展을 중심으로 경향이 정형화되어온 동양화의 주요추세가 채색탈피, 수묵추구, 추상도입, 소재확산 등 현대화의 변신이 있었다 하지만 추상위주의 전위적 서구미술과 동·서간의 시간적, 인식개념의 차이를 나타내기 시작함. 그러므로서 동양화는 진정하게 한국미술의 전통적일 수 없는 전통회화로서 변형되는 사조가 파생됨. 다시금 서양화는 근대를 잇는 한국미술의 현대적일 수 없는 현대로서 다분히 허상적인 개념설정이 이루어진다.
6) 현대초입의 미술교육제도가 거의 서구식 사고와 방법론을 위주로 해 온 이유로 전통교육의 내용과 형식상의 붕괴를 보다 가속화 했으며 근대적·고대적 미술유산인 화론이나 미술사·사상사등에 대한 연구 인력양성이 전무하여 전통적인 유산내지는 현대적 사조에 대한 어떠한 조직적인 연구도 어렵게됨.
위와 같은 사항들은 현대한국미술의 초기단계에 있어서 야기된 문제점들로서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정체성부재의 주요원인 이기도 한 것이다. 아무튼 현대의 서막은 우리 미술사에 있어서는 그 유래가 없는 급격한 변신을 거듭하면서 서구화되는 만큼 그나마의 전통적 요소들은 소멸되어갔다. 당시 선두주자들의 변신은 어쩌면 반전통, 반인습을 연결지우면서 부정의 미학을 실천하는 그 자체가 진정한 현대적 전통의 전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현대미술의 교차지점인 '57년 1회 현대미협과 5회전때의 선언에서 보면 쉽게 이해된다.
우리는 作畵와 이에 따르는 繪화運動에 있어서 作畵情神의 과거와 변혁된 오늘의 조형에 어떻게 달라 야 하느냐는 문제를 숙고함과 동시에, 文化의 발전을 저지하는 뭇 봉건적 요소에 대한 안티테제를 모 럴로 삼음으로서 우리의 협회기구를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1회전).4)
우리는이 지금의 혼돈속에서의 生에의 의욕을 직접적으로 밝혀야할 미래에의 확신에 젖은 어휘를 더 듬고 있다. 바로 어제까지 수립되었던 빈틈없는 지성체계의 모든 합리주의적인 것들을 박차고, 우리는 생의 욕망을 다시없는 「나」에 의해서 「나」로부터 온 세계의 출발을 다짐한다. 세계는 밝혀진 부분 보다 아직 발들여 놓지못한 광대한 其餘의 전체가 있음을 우리는 시인한다……未知의 예고를 품은 靈 感에 충일한 「나」의 개척으로 세계의 제패를 보다(5회전).5)
라고 말하고 있다. 이글을 통해 당시 이들이 얼마나 과거의 유산을 일순간에 도전하고 새로운 세계로 약진하려는 노력으로 점철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특히 "봉건적 요소에 대한 안티테제"는 바꾸어 말하면 부인할수 없는 근대 및 조선조말의 우리 미술사가 갖는 진실에 대한 부정이기도 했으며 자아내면에 대한 강렬한 반발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와같은 현대의 의욕적 출발이 과거에 대한 심도있고 구조적이거나 최소한 그 정체적 유산들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반성을 토대로 하기보다는 거의 무조건에 가까울 정도로 지나친 미래지향적인 이상에만 치우쳤다는 문제점이 야기되면서 앞서 정리한 1) 2)항의 정체적 문제점이 야기된다.
한국현대미술의 급속한 서구화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용해되어 있는 상태"6)인 용광로의 위력처럼 재해석하고 분할하며 인식을 달리하는 일단의 혁명적 세계관을 구축해가기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물론 동양화단의 선두주자들인 백양회, 묵림회등도 직·간접적으로 동참하고 있었으며 일본식 채색화로부터 수묵중심의 서구적 추상세계로 진입하는 재료, 소재, 방법론을 주축으로 한 형식상의 전격적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시기의 논리적 텍스트는 어떠한 미학, 예술학적인 입장에서의 체계화된 현장리포트나 본격적인 연구기록을 남기고 있지않다. 탈근대적이어야 할 보다 근원적인 연유와 서구는 곧 현대라는 등식개념의 형성과정에 대한 검증과 비평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혼란을 이경성은 <해방 15년간의 미술회고>에서 "창조의욕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생활태도내지 생리의 발현이 아니었을까"7) 라고 말하고 있다. 이봉상 역시 <1957년의 반성>에서
安逸(안일)한 「아카데미즘」과 虛飾(허식)에 奔忙(분망)한 「前衛(전위)」라는 것에서 벗어나 창조적인 미술관의 확립이라는 근본과제에서 행동함이 참다운 미술문화건설이 될 것이라고 본다.8)
라고 말하고 있음은 이시기의 고답적인 유파와 급진세력의 허구적 위험을 경고하는 내용이다.
4-2. 한국적 모더니즘과 그 정체성 문제
70년대의 모노크롬과 미니멀리즘의 논제는 분명히 우리에게 平面的회화로서의 회귀와 함께 해방 이후 20여 년간에 걸친 과도적 용해와 열정의 시대를 되돌아 보게하는 자기회복의 그 무엇을 탐색하려는 것이었다. 즉 그간 평면 위에 시도된 격렬한 조형구조의 텍스츄어에 기초한 감정이입의 방법론적 전쟁으로부터 이제는 극도로 절제되고 靜照(정조)된 미니멀리즘이 등장하였고 한동안의 지표로서 현대미술의 향방을 가늠하는 듯 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이 미니멀리즘의 문제는 예술의 탈대중적인 본질을 구가하는 독자적 코스모스로서의 자율성(Autonomie)에관한 논제로까지 진전하면서 모더니즘적 현상인 극단적 난해함으로도 연결되었다. 급기야는 흑백의 색채로 전이된 모든 메카니즘이 한국의 미감과 연결고리를 갖게 되면서 자생적이든 타율적이든 그 정체적 위상을 확립하는 듯 했다. 당시 우리는 백색의 화랑가를 거닐면서 드디어 근대 이후의 방황을 거두는듯한 상념에 빠지기도 했다. 실제로 종이작업의 후속적 등장과 모노크롬의 극대화는 모더니스트의 변을 빌리지 않더라도 한국적 미감에 접근하려는 백색·무위정신에 기초된 지극히 자율적이고도 예술지상주의적인 「예술을 위한 예술」의 특징을 만끽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80년대에 접어들면서 미니멀은 여지없이 그 세력이 꺽이고 만다. 민중적 논리, 다변적 위주의 회화개념의 등장은 그들의 파라독스적인 연장선상을 용인하지 못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나칠 수 없는 하나의 중요한 논제에 부딪히게 된다. 즉 미니멀의 침몰과 그 검증이다. 미니멀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적어도 한국미술계에 있어서만큼은 유럽이나 미국에 있어서의 해석과는 상당히 다른 상태로 진전되었다. 즉 말레비치나 마르셸 뒤샹, 쟈스퍼 존스나 죠셉 엘버스, 엔디 워홀등이 보여준 비대성·극단적 간결함, 기계적 엄밀함등의 ABC아트, 환원적 예술이라는 뜻의 개념과 본질적으로는 궤를 같이 하면서도 한국은 우선 백색이라는 색채개념의 두드러지는 강조가 同語反覆的(동어반복적)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극단적 간결함이 추가되지만 그 간결함은 엄밀히 말해 無爲的인 道家사상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상체계로 궤를 형성하고 있다. 색채개념 역시 점진적으로는 유한한 캔버스 평면에서 형성된 백색이 아닌 무한적 개념의 공간으로 전이되고 종이작업의 병행은 그 매체적인 측면에서의 더없는 탈출구 였다.
이와 같은 한국형 미니멀리즘의 구축은 사실상 서구의 그것과는 무관하게 자생적이라는 논리의 저변을 어느정도 수긍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주었다. 이는 물론 객관적 검증을 거친 결론은 아니지만 일부의 논증이 가능할 정도로 그들은 동양적인 전통과 미감으로부터 극단적 간결함을 추구했다. 노자가 말한 즉 損之又損(손지우손) 덜어내고 또 덜어낸다는 철학적 원류를 바탕으로한 無巧之方大巧, 無作爲의 無爲 無技巧의 技巧, 無明, 無節, 無華의 동양, 한국적 요소들과 연결지우려는 일단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미니멀니스트들의 이같은 우리시각으로서의 비약적인 탐색과 전이는 아쉽게도 7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정체적 내용논리의 후속적이고도 심도있는 연구가 뒷받침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극히 玄學的이기까지한 백색의 정체적 미학체계와 회화적 심미의식의 연결고리가 전무했다. 그리고 오히려 同語反復(동어반복)의 매너리즘에 의거한 영속성과 배제하려했던 일루젼(illusion)적인 측면을 오히려 幻影的(환영적) 속성으로서 형식화·정당화하려했다.
이는 미니멀을 통한 과거 30여년간의 혼돈상태를 정리하고 그 형식논리의 모더니티를 이용한 고도의 한국적 내용미학의 구현이 가능했던 더없는 희망과 기회를 소실케되는 안타까운 요인으로 남게돤다. 즉 내용의 존재방식(Daseinsweise)으로서의 표면현상은 그간30여년간에 체득된 서구미술의 체현으로 인한 현대적 구현이 가능했으나 다시금 한국적인 정체성을 바탕으로 전이하려했던 내용미학은 단지 그 욕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여기서 말레비치의 절대주의(supermatisme) 선언이나 뒤샹의 개념예술(Conceptual Art) 등 미니멀 전후 경향에 대두되는 서구의 현상이 얼마만큼 미니멀의 논리를 치열하게 뒷받침해주고 있는 가를 보면 양측의 쉬운 비교가 가능하다. 즉 개념 그 자체만으로도 예술이 가능하다는 뒤샹의 선언이나 네오다다·플럭서스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대두되는 이 경향은 기교와 형식을 거부하는 내용미학의 극단으로까지 치달아 갔던 것이며 관념적 입장의 극치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은 달랐다. 양자 모두가 관념적이면서도 우리 경우는 마치 관념을 위한 관념인 것처럼 그 구체성이나 현실을 토대로 한 정신적 발현의지가 추상적이었다. 70년대를 80년대와 비교하여보면 물론 관념의 시대, 차가운 추상의 시대와 경험의 시대, 뜨거운 형상의 시대로 비유될 수 있을 정도로 불과 몇 년 사이의 변신은 컸다. 그리고 그만큼 모더니즘의 함몰은 환상적이고도 형식논리위주로 반복된 유희로 오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헀던 것이다.
吳光洙는 <80년대 전반기 한국미술의 현황과 과제>에서
80년대 미술의 일각에 도사리고 있는 자생론은 한 시대의 보편적인 이념의 축과 반응관계가 만드는 복합적인 조형의 생성논리를 이해하는 폭넓은 시각을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본다.9)
라고 하면서 80년대가 오히려 자생적인 힘의 발현을 언급했다. 그리고 장석원의 <오늘의 미술, 오늘의 미학>10)을 인용하여 70년대 모노크롬, 미니멀 시대를
이들의 지나치게 정리되고 패턴화되는 경향은 민감한 텍스츄어에의 탐닉과 함께 자기표현의 억제, 物性 자체를 드러내보이는 태도를 보인다는 미학적 입장의 부심에도 불구하고 심하게 다충적인 취약성을 노 출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현대미술의 미학적 요체로 남아있다기보다는 양태화되는 경향이 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본질적 원인은 두말할 나위없는 형식적 관념으로 탐닉된 한국미학의 정체성이다. 문제는 이 시기 모더니즘에서 주로 논의된 문인화라든가 서예, 백색의 미학, 虛無, 無爲 등 일체 사상의 섭렵과 체현이 보다 심도있게 체득되지 못한 까닭에서오는 모더니티의 형식화와 그 노출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일본의 나까하라 유스께(中原석介)도 말했지만 문제는 반채색주의적 시각이나 탈채색화의 경향, 반형상과 무위개념의 유희반복과 같은 단순한 입장으로는 위와같은 진수의 체현은 불가능하다. 체계적으로는 이미 조형논리 이전의 周易이나 四書五經의 문제에 접근되고, 민족미학의 본질에 대한 사상으로 진입되어야만 가능했던 것이다. 거대한 강물, 바다로 나아가는 강물의 원류에는 생명력이 넘쳐 흐르는 해맑은 샘터의 분출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 샘터의 원류를 찾아나서는 일을 우리는 근대·현대사 모두에서 폐기하고 방치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어느 면에서 보면 70년대의 미니멀은 그 출발부터서가 독자적일 수 없는 구조적 어려움을 동반했던 것이다. 동양미술의 구조가 文史哲의 일체화로 귀결되듯이 철학, 그중에서도 회화미학의 조직적인 연구와 분석에 의한 주요 사상적 이해와 미래지향적 비젼을 제시할 수 있는 조형세계와의 유기적 관계형성이 불가능함으로 인해 비평적 역할과 내용적 논리가 함몰되기에 이른 것이다.
동양화단의 70년대는 사실상 현대에 접어들게 되면서부터 그 상당부분의 위상정립을 줄곧 서양화단의 후속적 입장에서 비교적 소극적인 태도로 보수와 혁신의 이중구조로 일관해온 것이 사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70년대에 이미 지극히 동질적인 개념으로 수용된 미니멀리즘과 같은 경향이 전면적으로 유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양화단은 오히려 방관자적인 입장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거나 양태화된 형식들을 다시 형식화하는 등의 오류가 빈번했다. 수묵의 玄學的 미학체계나 자연주의, 三絶세계의 사상체계들이 거의 전면적으로 복구되지 못한 상태의 현대에서 야기될 수밖에 없는 예상된 현상이기도 했다. 그리고 도리어 서양화단에서 야기된 문제제기가 지극히 한국적·동양적인 미의식을 지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견해보면 그 반성과 검증 또한 심각할 수밖에 없다.
5. 80∼90년대의 한국미술과 정체성 문제
70년대에 비해 80년대는 다양한 경향의 사조가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된다. 신표현, 민중, 신구상, 개념, 후기미니멀등이 바로 그러하며 보다 구체적 현실의 논증과 다각적인 메카니즘이 동원된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민중미술의 한 기류이다. 元東石은 《민족미술의 논리와 전망》에서
80년대 한국미술의 기류는 삶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려는 운동에서 출발하여 커다란 파장을 형성하고 있 다.11)
라고 극명하게 설명하면서 민족정신의 흐름속에 미술 역시 필연적으로 합류하고 있다고 강조하고 일상삶과 분리되어온 70년대 모더니즘을 비판한다. 「현실과 발언」「두렁」등의 잇달은 출범이 그렇고 80년대 전반의 민족적, 민중적이라는 언어는 한마디로 두부류로 나뉘는 예술의 근본목적성까지도 뒤흔들어 놓는 돌파력을 구축했다. 그만큼 예술의 무목적성에 대한 상대적 입장인 예술의 목적성을 주지시키는 이론들이 대두되었고 E.피셔의 말처럼 중성적 문화를 부정함과 동시에 어느쪽인가에 봉사를 요구했다. 그리고 중성적 예술이란 부르조아 예술의 자기방어적 속임수라고 공격했다.12) 이와 동시에 민족예술의 깃발을 높이 치켜든 작업에는 예술은 사회로부터 비롯된다는 표제와 함께 그간 소외되었던 제3세계권의 미술까지도 소개되는 계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들의 선전 역시 모더니즘의 생명 그 이상을 연장하지는 못했다.
약 5∼6년간의 집중적인 발언이 이루어 지면서 미니멀리즘에 대한 상대적 약화도 눈에 띄게 되었고 새로운 삶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공감대가 급격히 팽창되어 갔다. 그러나 동시에 파생되는 문제는 역시 민족미술논리의 이념적 후원자들이 연속적으로 보급했어야 할 진정한 민족미학의 기초사상체계가 고갈되었다는 점이다.
적어도 한민족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하나의 이념이 주창될 때 그 당위성이나 방법론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느 집단에 있어서나 자명하다. 더욱이 한 개인, 한 작가의 차원에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닌 집단 발언의 기류에 있어서는 설사 그것이 중성적 예술, 예술을 위한 예술로서 자명성이 상실된 반현실적 사조에 대한 자각과 반성을 불러일으켰다는 자위가 가능하다해도 자칫 그 스스로가 1차원적 형상체계에만 집착하여 그야말로 어떤 환청적인 상태에 머물러 버리게 되는 위험을 내포한다.
아무리 A.하우저가 "위대한 예술이란 우리에게 삶을 해석해준다"라고 했어도 그 예술의 성격규정은 1차원적인 측정가능한 것으로부터 3차원의 지각적인 단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감관과 시지각을 포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13) 그렇다면 모더니즘의 미니멀이 반민족적인 예술이라고 누가 단적으로 반박하겠는가.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한국형 미니멀의 한가운데에는 해방이후 30여년간의 실험과 방황의 어떤 작은 결산같은 응집력이 잉태되어 있었으며 서구식 방법론을 통한 그야말로 민족적 미감에 대한 조심스러운 탐색이 시도되었다. 다만 그것이 민족이라는 전면적인 전제를 내걸고 하나의 집단적 발언으로서의 공동 이슈를 제기하지 않은 것일 뿐 한걸음을 물러서보면 그 의도의 내면에는 80년대의 의지들과 별 다를바 없는 페러다임이 숨쉬고 있었다. 그렇다면 80년대의 민족미술의 내용논리에 대한 비평으로 넘어가본다고 했을 때 초기단계의 그들이 보여준 열정에 비해 훼의 그들, 90년대의 그들은 과연 얼마만한 정신적인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었는가. 초반의 당위성과 방법론의 대두도 다양화의 여러 경향으로 직결되면서 중대한 그 공헌을 인정할 수 있지만 민족미술의 의지로 응집되려면 그와같은 1차적인 구조만으로는 불가능하다. 화려한 선언이나 당위적 주창도 중요했지만 분량과 그 속도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고 완만할지라도 그간 망각지대에 있었던 가장 절실한 분야인 기초 학문분야의 새로운 해석과 논증이 國學차원에서 절실히 필오했다. 과연 민족미술의 구현이 어떤 단기간의 선언적 입장으로만 가능하지 못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 문제는 근 10여년간의 여타 분야에서 제기된 하나의 유행성 문제제기 형식으로 비롯된 인식 현상과도 비교된다. 대중문학에서, 《동의보감》, 《삼국지》, 《토지》, 《태백산맥》, 쉽게 풀이된 노, 장자, 논어, 유산답사기등의 인기와 영화 만다라, 서편제의 신드롬 등은 모두가 미술계뿐 아니라 범국민적 차원에서의 정체적 욕구를 반영하는 지표이다. 성철스님의 열반이 전 국민의 관심으로 대두된 것도 생각해보면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남는다. 이와같은 현상들은 어디까지나 본질은 아니다. 다만 그 본질로 향하는 분위기이거나 인식의 초보적 자각일 뿐이다. 그것도 감각적 자각의 역할로서 종종 부유되고 흘러가버릴 수 있는 위상에서의 한계를 동시에 내포한다. 문제는 미술계의 현상 역시 궁극적으로는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바로 이와같은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철학이 없는 형식만을 유희해왔다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른바 전통회화라고 일컬어온 동양화단의 기류는 오히려 그 배반율이 더욱 극심한 양면성을 지닌다. 재료나 소재주의에 함몰되어 초시대적인 어떤 치외법권적 특권을 누리는 듯한 정체성은 논박의 여지도 없는 쇄국적 단면이다. 오히려 한국적 미니멀의 그 은유적 탐닉이나 민중 예술의 피끓는 열정은 사실 전통화의 몫이었으며 기득권이 부여된 절호의 조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80∼90년대는 제반 다른 분야에서도 필연적이었던 후기산업사회의 공동적 욕구들과 상대적으로 동양화는 그 정체적 기득권을 효과적으로 획득하지 못했다. 그러므로서 유독 가장 다변하고 에너지가 넘쳐흐르던 이 시기에 가장 길고 지루한 깊은 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고 「색채화」는 난무하되 「채색화」는 없으며 그나마 소수의 「水黑畵(수흑화)」는 있으되 「水墨畵(수묵화)」는 이미 그 의미를 찾아보기 힘든 정도에 접어들었다.
오늘날 과연 재료상의 동양화를 구사하는 그들에게 과연 동양적인 유형의 사고나 미학 체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얼마만큼이나 단언할 수 있는가. 모든 것이 어설픈 서구적 형식을 빌리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내용체계까지도 관념적 서구사조의 양태와 다를 바 없는 동양화단은 심각한 자괴의 반성까지도 요구되었다. 그렇고 보면 가장 민족적일 수 있는 분야의 가장 심각한 자괴, 그것이 바로 단적으로 지켜보는 우리미술의 현주소라는 작은 결론이 무색치 않다. 그 실예로는 80년대초부터 공식화되기 시작한 「한국화」라는 명칭의 사용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도 한국화에 대한 어떠한 명확한 의미규정은 없다.
다만 재료에 의한 형식 구분은 이미 근대적 산물일 뿐이며 어떤 측면에서도 설득력이 없다. 그야말로 변속적이면서도 새롭게 구현되 참 존재로서의 전통성을 바탕으로 하지않은 바에야 구태여 우리적인 것의 쇄국화는 우매한 일인 것이다.
6. 正體性 비판과 그 검증
한국 현대미술사에 있어서 정체성을 인식한 가장 중요한 기점은 크게 세단계로 분류된다. 첫째는 해방직후 일제청산의 과제를 앞두고 있을 때였으며 둘째는 70년대 모더니즘 시대의 미니멀리즘을 중심으로한 모노톤의 백색주의, 샛째로는 80년대 민족미술을 높이 치켜든 민중미술 시대로 나뉠 수 있다
부분별로 보면 첫 번째의 경우는 전통회화가 중심이 되고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서양쪽에서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위와같은 세 번의 기회는 이미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당시 마다 가장 핵심적인 이데올로기의 숙제로 등장된 한국미술의 전통계승에 대한 효과적인 노력으로 이어지지를 못했다.
무엇보다도 그 핵심적인 원인으로 들 수 있는 요소는 다시 몇가지로 분류, 정리될 수 있다.
첫째, 근현대 한국미술계의 방향자체가 예술의 구조적 3대 요소중 지나치게 형식론적 차원에만 치우쳤을 뿐 그 심미의식이나 사유체계에 대한 습득, 체현과정이 결여되었다는 점이다 - 이 문제에 있어서는 비단 전통사상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그간 수용되어온 각 서구 사조의 문화적 배경과 사회적 배경에 대한 보다 심도있는 연구나 뒷받침이 진전되지 못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1945년 이화여대에 첫 미술학과 생긴이후 현재 전국미술대학의 전공분포만 보아도 보다 명료히 드러난다. 학과 자체도14) 거의 전부가 실기위주의 성격을 띄고 있을 뿐 아니라, 교육과정 역시 실제로는 대다수가 형식논리 위주의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 심지어 석사과정의 논문제도 마저도 역사적, 사상적 논리 체계를 체험할 수 없는 자신의 창작에 대한 간략한 리포트 형식을 취하고 있는 대다수의 실태는 우리 미술계가 사유체계, 내용논리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취약성으로 나타냈다.
더욱이 정작 서구 현대미술이나 동양의 고전 모두가 공히 첨예한 이념과 이념의 대립에서 파생되는 형이상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이같은 현실은 자신의 창작에 앞서 우선 인간의 실존가치와 그 존재이유, 삶의 체현으로부터 말미암은 일단의 필연적 관계요소들과 조형심리에 대한 결여를 자초할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면 지구상에서 애초에 예술적인 것이란 어디에도 없는 것임을 우리는 자각해야 한다.
작가관의 명료한 구축은 곧 형식의 가변적 범위를 무한히 확대할 수 있다는 이치와 직결된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미술은 그 형식의 극대화마저도 실제로는 극히 어중간한 상태에 머물고 마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즉 우리에게는 그 엄청난 음악인구중에서도 아놀드 쉰베르크(Arnold sch?nberg, 1874∼1951)와 같은 내용·논리체계를 겸비한 음악가를 필료로 하고 있으며, 앙드레 브르통이 「위대한 교란자」라고 불렀던 마르셸 뒤샹(Marcel Duchamp)같은 예술철학적인 창조자를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전위미술은 그가 창조한 것 보다는 그가 거부하는 것에 의해서 거 정의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여기에서의 거부란 곧 「부정의 미학」임과 동시에 심오한 심미체계의 관류와 무한한 형식상의 체현에서 비롯되는 양대구조에서 만이 가능하다. 프랑크프루트 학파의 T.아도르노는 형식과 내용은 서로 轉化(전화)한다고 했다. 서로의 힘과 존재가치가 상호 교환적이자 충돌·견제의 작용을 일으키면서 궁극적으로는 이상적 예술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형식 위주의 단순구조를 중심으로 실기를 지나치게 격리 수용하여 내용과 형식의 그 치밀한 상관관계를 거부하거나 방치했으며 그러므로서 예술원론에 대한 몰이해와 더불어 정체성논리 이전의 커다란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 최근의 미술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심각한 몇몇 경향의 표절·모방사조는 그 극단적 예를 대변한다. 꽃문양 형식과 십자가 색채나 텃치 심지어는 작가의 서명까지도 그대로 흉내내는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창작과정의 작가노트 몇 권 찾아볼 수 없는 이 상황에서 양적인 급성장이 갈수록 무기력해짐을 느낀다.
더욱이 오늘날까지 이 분야 기초학문의 주춧돌이라 볼 수 있는 한국·동양·서양미술사 내지는 미술사상사·한국·동양·서양미학에 관한 1차 학문의 어떠한 텍스트도 우리손에 의해 완결된 예가 손을 꼽을 정도라면 수십만명을 배출한 미술교육의 심각성을 한마디로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1913년 아모리 쇼(Armory Show)15)이후 지금까지 세계 미술의 메카적 역할을 해왔던 미국미술의 실체를 해부하는 어떤 본격적인 텍스트도 없을뿐더러 유럽에 대한 우리시각에 있어서의 연구 역시 마찬가지이다. 혹시 우리는 요청도 없는 그들의 소모적 대리전쟁이나 하고 있지 않은지 자문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예술의 원리에 대한 물음에서 「인간과 가치와 미적창조」라는 다원구조의 후자에만 편향된 교육방법론을 구사함으로서 형식적 범주가 급격히 팽창되어온 외형적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최근과 같은 주체의식 부재의 혼돈만을 낳게된 것이다.
둘째, 현대에 접어들어 철저히 서양중심으로 집중되어온 변이의 추세나 가치관 내용·형식논리로 인한 한국·동양미술사상의 정체성 함몰을 들 수 있다 - 이 문제의 가장 대표적인 예를 보면 우선 각 대학의 회화과 학생비율에서 동서양화의 비율이 서양화 다수로 편중된 것이나 강좌내용이나 교수인원의 절대 편중을 들 수 있다. 정원배정에 있어서는 지원학생들의 비율때문이라지만 그것은 이미 그 제도나 입시내용에서부터 서양미술 편중을 고무시키고 직,간접적으로 당연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실기강좌에 있어서도 심지어는 석고뎃생이라는 근대적 서구방식으로 결정적인 평가를 함으로서 출발부터가 서구인의 흉상, 얼굴을 고답적인 방식으로 주입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된 것이다.
이와 같은 대학교육의 관문은 불과 몇 점의 성적 때문에 서양미술 계열에서 탈락되고 다음 서열의 동양화·조각등으로 동양화 조각등으로 평생의 전공을 선택하게 되는 주관적 의지가 없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최근의 미술계에서 일고있는 매재나 재료·방법론적 자유화바람은 언뜻 이론적으로는 이상적이다. 그러나 동·서미술의 벽을 허물어 버리자는 통합적 차원에서의 본질탐구와도 같은 이 경향은 하나의 엄청난 함정과 변수를 동반하고 있다. 즉 동·서간의 회화개념을 무너뜨리려면 양자간의 의식, 형식적 균형이 전제되어야 한다. 상호간의 팽팽한 대립과 교감의 가능성이 동시에 평행선상에 있을 때 진정한 통합은 가능하다.
漢學이 단절되고 전통적화론, 미학사상에 몰인식하고 한국화론, 조선시대화론 몇편도 완역되지 못하고 三絶의 묵점 한 획이 희귀해져 버린 이 시점에서 통합적 자유의지의 표현은 엄격히 말하여 동양회화 형식의 포기를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어디에서도 관념성이나 자연주의 三絶시대의 寫意정신, 고고한 선비시절의 玄學的 정신세계는 없다. 재료로써 나뉘어지던 동·서개념에서 이제는 재료를 초극함으로서 그 내용적 통합을 구현 한다지만 내용 논리에서의 한국, 동양적 지분은 아무리 보아도 찾아보기가 힘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먹물 한방울이 갖는 「현화무언」이나「幽玄(유현)」한 현학이 없는 그야말로 유한적 색채개념인 「水黑畵(수흑화)」만이 있고 「水墨畵(수묵화)」는 실종된 경향들이 우리 실정이다. 채색화의 경우라고 다를 바 없다. 삼라만상의 물상과 모든 색채를 최종적으로 함축하여 창출시킨 五彩에 의거한 五方色, 북종화, 불화, 민화등의 개념에 의한 동양 전통적 기법체계는 이제 재료개념을 초극한다는 명분으로 더더욱 그 자취를 찾아보기가 힘들어 졌다.
기법이나 방법론, 재료등의 형식은 결코 작가가 표출하려는 정신체계인 내용에 장애가 될 수는 없을뿐더러 강력한 이념의 표출앞에서는 의미없는 메카니즘만으로 전락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형식또한 의식존재를 현현하는 최소한 단계의 형상존재로서의 엄연한 의무수행의 과정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체성의 실체는 내용, 형식이라는 예술 구조의 양대요소 또는 소재를 포합한 3대 요소간의 유기적 관계를 형성해야 된다는 것이다. 즉 최소한 어느 정도의 단계에 이르기 까지는 형식의 轉化(전화)로부터 내용이 발현되고 반영될 수 있다는 뜻이다. 한 예로서, 油性과 水性, 화선지와 캔버스, 목조와 브론즈 이와같은 재료상의 개념은 적어도 그 내용체계가 지각적 단계의 통찰력을 지나기 이전까지는 작가의 정신세계, 심미의식, 회화관의 표출과는 불가분의 차이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우리 미술에 있어서 지적되는 오류는 바로 고도의 지각적 통찰력을 체득한 단계에 이르는 내용논리의 교육과 연구가 뒷받침되지 못한 상태에서 형식적 통합을 꾀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는 자명하다.
그 거대한 미국 산업사회와 물질, 상업무화를 배경으로한 슈퍼스타 엔디워홀의 화려한 재중적 등장인물 제스춰에 우리들의 모습을 대역시키려는 오류와 같다. 자명한 것은 우리는 그것들을 검색하거나 텍스트화 할 수는 있어도 그야말로 후기산업사회의 산물인 워홀의 그것을 우리의 것으로 착각할 수는 없다. 번역이 없는 대형 아트북들이 화집형식으로 국내 대학가 작가군들 사이로 유입되고 있다. 이 또한 마찬가지이다. 검색기능이될 작업배경과 문화·사회적·감성적 배경들이 동시에 번역과 해설을 통해 이해되어야만한다. 익명화된 형식은 그말 그대로 의식의 익명화를 초래한다.
익명화되고 국적의 흔적이 없는 그것들을 자유의지로 표현하고 다시 그 범주에 그나마의 전통적 형식이라는 부류들을 통합한다면 우리 이 시대는 근거없는 부유물들로 전락한다.
셋째, 형식·소재주의의 전통계승 문제이다 - 흔히 한국의 전통이란 남대문,,경복궁,,민속적 초가집,,단청,,탑, 춤사위,,공예품등에서 소재를 찾으려는 경우나 혹은 五方色, 흰색등의 색채개념을 민화, 벽화, 불화, 長生등의 양식개념 등을 자주 대하게 된다. 이 문제는 앞서 이미 버나드 보상케(Bosanquect)라는 영국의 철학자가 말한 세가지 차원의 차이를 말했지만 이같은 형식·소재를 통한 전통의 계승은 물론 1차적 가시적으로 측정가능한 형이하학의 단계를 필요로 한다. 그러면서도 그 1차적 전통의 사물이나 행위, 특히 선, 형, 색의 기본 구조등에 대한 감정이입이나 정신적 지각을 통한 심미체계의 내용이 없으면 그것은 전통의 계승이 아닌 유물보존의 폐쇄적인 1차 나열에 불과하다.
정체성의 논의는 그 형식이나 소재에 앞서서 의식구조의 올바른 전승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아무리 고귀한 고대의 유물이라 해도 그것이 현대인들의 미의식속에 인지되지 못하면 그것으로 1차적 차원의 사물로서 머물고 만다. 여기서 우리는 예술의 전승이란 그 내용의 역사성까지도 확대되는 필연성을 인지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상 예술은 수많은 것들을 차용한 창작을 즐겨 한다. 그렇지만 그 차용의 행위나 차용의 내면적 이미지들은 그 시대, 그 역사의 패러다임적인 일종의 역사적 언어를 지각케 하고 있다. 조형예술의 묘미는 그 형상적 언어를 구사하여 바로 그 역사시대의 문화를 인지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서 한층 큰 가치를 지닌다. "호머는 단순한 호머가 아니며, 일리어드와 오딧세이는 세계 역사의 생생한 章이다"라는 말은 호머와 오딧세이가 무형이지만 바로 그 시대의 사상과 문화를 감응,인지할 수 있는 경지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단순한 형상,소재 중심의 1차원적 「시간적 차용」과 그 메타포, 즉 은유적 언어가 밀장된 역사·문화적 시각에서 「인식적 차용」의 차이를 인지해야만 한다. 정체성의 논의는 한복이나 기와집의 飜仰轉起(번앙전기) 백자의 유백색과 풍만한 곡선의 묘미도 중요하지만 그와같은 곡선이나 색채의 형식을 창출할 수밖에 없었던 미의식의 세계를 감응하고 계승하는 일은 더한층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이 논제는 실로 형식만큼 가변적일 수 없는 절대가치의 기인된 미의식이기 때문이다. 미의식의 감응과 인식이 없는 곡선과 색채는 단지 형상존재의 복제일 뿐이다.
7. 결론
이상과 같은 세가지의 가장 대표적인 정체적 오류와 현상들은 결국 거슬러 올라가 보면 초중등교육에서부터 비롯되는 인문, 사회, 과학 전 분야에 걸친 國學외면 풍조에서 거듭되어온 필연적 결과이기도 하여 그 해결방안이 쉽게 실행되기 어렵게 되어 있다. 사회 구조적 모순이라는 말이 훨씬 적합한 것 같은 이 심각성은 두말할 나위없이 우선 대학교육 과정의 전면적인 의식전환과 개편이 시급하다. 이퇴계나 이율곡, 추사 김정희, 표암 강세황의 사상에 무지한 우리 교육, 미학, 예술론, 조형론, 철학, 현대미술사 등의 전과정이 엄연히 동서이중적 체재여야함에도 당연스럽게 서양만을 강좌하는 대학의 풍토는 개탄스럽기 그지없다. 더 진전해보면 감상자들의 심미체계나 심지어는 미술비평에 있어서 까지도 가치체계는 서구식으로 훈련되고 인습화되어 있다. 서구식 미술사와 미감적 조직에 의해서 비평되는 동양화의 예를 우리는 무의식 중에도 자주 발견하게 된다. 그렇다고 서양미술사상, 역사, 예술체계에 대한 명료한 연구나 체득이 가능했던 것도 아니다. 첨예한 서구화파의 발생근거나 정당성도 인식하지 못하면서 목적없는 허상연습만 하고 있는 현상이나 아직도 관년산수의 대립관계로서 어떠한 사유도 없이 實景, 그 자체만으로 전통자연주의의 표상처럼 생각하는 양극단 모두가 이제 비판되어야 할 시기를 훨씬 넘기고 있다.
앞에서 무조건적인 재료극복의 부정성을 지적하기는 했지만 역시 본질적으로는 진정한 정체성의 조건만 균형을 이룬다면 궁극적으로 동·서양화의 재료적 개념을 장애로 하지 않는다. 그 가능성을 희망적으로 제시해주는 몇몇 거장들의 교훈은 우리에게 멀리 있지 않다. 樹話(수화) 김환기의 작업에서 느껴지는 고도의 한국적 산, 들, 호수들에서 느껴지는 완만한 곡선 미감과 쪽빛, 감빛등 자연의 색채를 머금은 渲染(선염) 기법, 칠해지거나 찍어나가는 인위적 느낌보다 물들여지고 베어져있는 듯한 無爲性(무위성), 여기에 그가 생전에 그렇게 심취했던 도자기의 미감이 있고 우리 선조들의 면면히 흐르는 아름다움이 숨쉰다. 가장 외래적 미술·문화정보가 물밀 듯 교차하는 뉴욕의 한 가운데서 그는 진정한 한국적 회화, 「한국화」라고 할만한 작업을 남겼기에 더욱 기념비적이다. 박수근의 線描(선묘)나 소재에서 오는 拙朴(졸박)함과 서정성, 이중섭의 그야말로 骨法用筆(골법용필) 개념에 의한 드로잉 유산, 小亭 卞寬植(변관식)의 拙巧的(졸교적)이면서도 무한한 純朴(순박)과 玄味로 은유된 자연의 농후한 체취, 그것은 모두가 「한국화」로서의 위상이 가능한 그야말로 정체적 한국회화의 예증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예술에 있어서 내용과 형식, 소재의 모든 요소를 생생한 삶의 가치체현을 통해 현현한 지표들인 것이다.
여기에는 「서양화」나 「동양화」「한국화」등의 의도적 분류가 무의미할 뿐이며 오로지 한국적 위상에서 기인되는 회화적 정체성이 구현되어야 한다는 당위성만이 필연적일 뿐이다. 유채, 수채, 수묵, 캔버스, 종이로서 구분되는 동서양의 개념은 이제 우리의 정체적 의지에 있어서는 모든 한국인들의 회화가 그 형식분류가 아니라 내용적인 입장에서의 「한국회화」를 표출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여기에는 동, 서양미술의 내용, 형식적인 양면에서의 균등한 관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이 어느 한쪽의 편중된 오류는 절대적으로 「한국회화」라는 통합적 관계를 불가능케 한다. 뿐만 아니라 통합이후에 있어서도 이 균형 관계는 마치 陰陽의 양대구조처럼 상대적이고 조화체계적인 상태에서의 이상적인 동반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가치의 양면적 출발이나 美의 인식규정에 대한 대극적인 문화의 양면성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통합이란 보다 확고한 자기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다. 정체성의 부재는 곧 문화 종속의 지름길이며 그 소멸이다.
이상에서는 예술의 기본구조를 그 바탕에 두고 근대이후 현대전반에 걸친 비정체성의 현상들을 정리하고 그 요인들을 간략히 분석하였다. 전통을 모체로 한 변속적이면서도 새롭게 구현된 참 존재의 실체, 근원을 획득하는 그 핵심적 결론으로는 첫째 취약한 근대를 회상하지 않으려는 현대는 절대적으로 고대의 미술사에 근접할 수 없다는 점이다. 둘째는 기초학문의 자각이다. 해방이후 일제청산 백색모더니즘 시대와 민중미술의 집중적 노력은 역사적인 긍정평가 위에 있으면서도 그 내용적 체계,근본 사상체계를 본질적으로 뒷받침하지 못함으로서 정체적 전통전승이 보다 고무적이지 못했던 것처럼 전통적 기초학문의 조직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는 그 원류를 방치,폐기시키면서 지류만을 바라보려는 우매함과 다를 바 없다. 셋째는 내용논리, 즉 전통미의식 사상의 체득과 현대적 재해석은 나아가 형식, 소재의 개념을 초극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서, 최근의 복합적, 탈쟝르적인 메카니즘의 혼란과 「동양화」「서양화」라는 장르 구분을 모두 「한국회화」라는 절대개념으로 전환하고 그 방법론 역시 자유의지로 유도할 수 있다는 점이다.16) 넷째는 무엇보다 교육 체재의 전면개편으로 인한 주체의식의 확립과 진정한 첨단서구사조의 수용이라는 양극적인 조화를 꾀해야 한다는 점 등이다.
21세기가 거의 무국적시대에 접어들 것이라는 정보화 시대의 리포트는 지금 이순간도 빈번히 보고되고 있다. 그러나 무국적 그것은 철저한 정체성의 바탕위에서만 가능한 역설적 소산이라는 점은 심각히 자각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한마디로 수용의 문화였다. 작지만 우리 미의식을 스스로 탐닉하고 관류하여 독자적 코스모스를 형성함으로서 저 넓고 넓은 무한대의 우주공간에 진입시키려는 어떠한 실천도 시도되지 못했다. 이제 우리는 수용문화 일색의 패턴으로부터 우리가 잊어버렸던 우리 역사, 미의식의 실체를 기초부터 쌓아가려는 그야말로 민족적 사명과 의무를 더 뒤늦기 전에 실천해야 한다.
주석)
1) 조선미술전람회의 약칭이며 1922년부터 1944년 23회까지 조선총독부에서 친일적성향의 관전으로 개최
2) 書畵協會가 1918년 창립되면서 1921년에서 1936년까지 15회를 계속하여 협전개최,선전에 상대적인 민족적 전시였음
3)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서구인들이 얼마만큼 편견된 사고로 동양을 바라보았는지를 말하고 있다. 교보문고 刊.
13) 영국의 철학자 보상케(Benard Bosanquet)는 1차적 단계를 측정가능한 상태, 3차적 단계를 지각적 인식의 상태로 분류하는 학설을 제기함. 멜빈 레이더. 버트람 제섬 저 김광명 역 《예술과 인간가치》 pp 46-47. 참조, 1988. 이론과 실천사, 서울
14) 학부과정에서는 서울대 미학과 홍익대 예술학과가 간접적으로 연결되는 분야일 뿐이다.
15) 1913년 뉴욕에서 개최되었으며 피카소, 브라크, 드랭, 칸딘스키, 브랑쿠지등 1600여점의 작품이 전시 됨. 67기병대의 병기고 전시로 더 유명하며 미국 현대미술의 전기가 됨
16) 「동양화」「서양화」의 낱말이 갖는 오류를 극복하고 모두의 공통적 분모를 형성하는 「한국회화」 의 개념으로 통일해 나가기 위해서는 전제되는 요소가 있다. 즉 현재상태와 같은 서양, 동양미술의 식, 방법론의 지나친 서구 편중현상의 해결이다. 이 심각한 오류가 평형화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통합이란 결국 그나마의 정체적 요소들이 소멸되어가는데 가속도를 부여할 뿐이다. 이 평형화와 통합적 체계로의 노력은 어쩌면 우리 현대미술의 가장 당면한 과제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통합된 체계로 나아간다해도 여전히 일면에서는 그 양면적 균형은 유지되어야 하는 구조적 필연성이 있다. 그것은 동서간의 수천년 문화배경의 차이에서 유래되는 양대 정체성의 균형관계라고도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