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게 맹게 너른 들은 온통 초록입니다.
이보다 더 마음 흐뭇하고 아름다운 풍경은 내게 다시 없습니다.
들판은 이제 막 나락이 패어 노란빛을 띠어 가는 가운데 먼저 심은 올벼논엔 한 귀퉁이 베어낸 자리도 보입니다.
길가엔 부용화 곱게 흔들리고 목백일홍 붉게 한창입니다.
방학중의 문학기행지로 내 고향 부안과 고창을 추천한 것은 고향지리를 좀 안다는 것과 석정선생의 시와 미당선생의 시를 고향처럼 좋아해서 은근히 자랑하고픈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고창에서 나서 자라 부안으로 시집간 나는 아무래도 부안쪽보다는 고창쪽으로 마음이 더 쏠려 고창쪽 답사를 먼저 시작했습니다.
고창읍성(牟陽城)
한동안 고창여고 캠퍼스로 활용되었던 모양성은 학교를 읍성 밖으로 옮겨놓고 이제는 옛모습을 절반 이상 회복하였습니다.
공북루를 들어서니 읍성 중앙에 누각(豊和樓)이 시원하게 서 있습니다. 왼편으로 옥사와 주방으로 쓰인 관청과 이방 집무청인 작청이 언덕위로 차례차례 복원되어 있습니다.
오른편 언덕 위로는 동헌과 내아, 군사들 처소인 장청과 향청 서청 등이 차례로 내려 섰으며 조정관원의 출장숙소인 객사(牟陽之館)가 언덕 제일 높은 곳에 서 있습니다. 그 뒤로는 자생 맹종죽(孟宗竹)숲과 노송군락이 펼쳐져 있습니다.
모양성 아래엔 구전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고 발전시킨 동리 신재효선생의 고택이 오동나무, 모과나무, 해당화에 둘러싸여 조용히 앉아있고 그 옆에는 판소리 자료를 가득 전시하고 있는 판소리박물관이 뜰 안 가득 보랏빛 벌개미취꽃 만개한 채 열려있습니다.
선운사
고인돌 떼무덤 길을 지나 선운사로 갔습니다.
길가에 미당시비가 친필로 새겨져 있습니다.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작년것만 상기도 남었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습디다
남도민요의 1번은 육자배기라하여 서울서 내려오는 차안에서 내내 육박의 가락을 틀어 귀에 담고 왔습니다만 이 시에 와서 그 가락이 제대로 들리는 듯합니다.
해방 후 이른 봄 시인이 봄비 맞으며 걸어 걸어 찾아온 선운사 골짝에 동백은 아직 피지 않았고 술 한 잔 하고 가라 붙잡는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배기 가락에 취하여 내 다시 올 때까지 있겠느냐는 다짐에 그러마고 하였는데 남북전쟁이 일었고 이편인지 저편인지 부역했다는 죄목으로 막걸릿집과 여자는 불에 타버렸으니...
선운사 동구를 떠나지 못하고 목이 쉬어 돌고 도는 육자배기 가락을 시인의 이 몇 마디 말씀으로 귀먹은 나도 듣게 되었습니다.
함께 가던 선생님 한 분이 묻습니다.
-선운사가 왜 유명합니까?
-절들이 다 그렇지요. 절로 유명해지겠습니까? 미당선생의 시 덕분이요, 가수 송창식의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노래 덕분이지요.
함께 간 질경이는 선운사를 돌아 흘러내리는 개울물만 보고 걸어가면서 시를 욉니다.
여자에게 버림받고
살얼음 낀 도랑물을
맨발로 건너며
발이 아리는 시린 물에
이 악물고
그까짓 사랑 때문에
그까짓 사랑 때문에
다시는 울지 말자
다시는 울지 말자
눈물을 감추다가
동백꽃 붉게 터지는
선운사 뒤안에 가서
엉엉 울었다 <김용택, 선운사 동백꽃>
개울물, 시냇물, 강물...
물들은 모두 시인들의 눈물인양 눈시울 붉히며 물만 보고 걸어가다가 선운사 초입에 선 백파선사비만 만져보고 돌아섭니다.
秋史와 白坡와 石顚
질마재 마을의 절간 선운사의 중 백파한테 그의 친구 추사 김정희가 만년의 어느 날 찾아들었습니다.
종이쪽에 적어온 '돌이마(石顚)'란 아호 하나를 백파에게 주면서,
"누구 주고 시푼 사람 있거던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파는 그의 생전 그것을 아무에게도 주지 않고 아껴 혼자 지니고 있다가 이승을 뜰 때, "이것은 추사가 내게 맡겨 전하는 것이니 후세가 임자를 찾아서 주라."는 유언으로 감싸서 놓았습니다.
그것이 이조가 끝나도록 절간 설합 속에서 묵어 오다가, 딱한 일본 식민지 시절에 박한영이라는 중을 만나 비로소 전해졌는데, 석전 박한영은 그 아호를 받은 뒤에 30년 간이나 이 나라 불교의 태종정 스님이 되었고, 또 불교의 한일합병도 영 못하게 막아냈습니다.
지금도 선운사 입구에 가 보면 보이는 추사가 글을 지어 쓴 백파의 비석에는 '大機大用'이라는 말이 큼직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추사가 준 아호 '石顚'을 백파가 생전에 누구에게도 주지 않고, 이 겨레의 미래영원에다 가만히 유언으로 싸서 전하는 것을 알고 추사도 "야! 단수 참 높구나!" 탄복한 것이겠지요. <서정주, 『질마재 신화』중에서>
미당생가, 미당시문학관
선운리의 미당선생 생가는 오래 전에 허물어져 버린 듯합니다.
생뚱하게 새로 이은 지붕과 아직 붉은 흙벽집이 듬성듬성 새로 심은 보리똥나무 울타리안에 낯설게 서 있는데 우측에 선생의 동생 서정태 시인이 사시는 집 쪽으로 오래된 감나무 몇 그루, 커다란 쭉나무, 뽕나무, 매실, 무화과, 대추나무 몇 그루 서 있습니다.
생가 옆의 폐교된 초등학교 자리에 5층 전망대 하나 더 세우고 미당시문학관을 열었습니다.
개관한 지 1년도 안되어 담쟁이는 그새 내 키를 넘게 전망대를 타고 오르는데 운동장에선 안보이던 바다가 5층 위에서 보니 서편으로 환하게 보입니다. 북쪽으로 묘소, 동편으로 질마재 고갯길도 보입니다.
이웃마을 인촌리 김성수댁 마름으로 일하셨다는 미당선생의 부친.
인촌 집안이 줄포리로 옮겨 앉자 미당 집안도 따라간 듯 이곳 학교가 아닌 줄포초등학교를 마치시고 17세에 석전스님 문하로 들어가 서울살이를 시작한 이후론 영 이곳을 떠버린듯합니다. 75년에 회갑기념 시집인 『질마재 신화』를 쓰실 때에사 마음이 이곳으로 돌아선 것은 아닌지요?
海溢
바닷물이 넘쳐서 개울을 타고 올라와서 삼대 울타리 틈으로 새어 옥수수밭 속을 지나서 마당에 흥건히 고이는 날이 우리 외할머니 집에는 있었습니다. 이런 날 나는 망둥이 새우 새끼를 거기서 찾노라고 이빨 속까지 너무나 기쁜 종달새 새끼 소리가 다 되어 알발로 낄낄거리며 쫓아다녔습니다만, 항시 누에가 실을 뽑듯이 나만 보면 옛날 이야기만 무진장 하시던 외할머니는, 이때에는 웬일인지 한 마디도 말을 않고 벌써 많이 늙은 얼굴이 엷은 노을빛처럼 불그레해져 바다쪽만 멍하니 넘어다보고 서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왜 그러는지 나는 아직 미처 몰랐읍니다만, 그분이 돌아가신 인제는 그 이유를 간신히 알긴 알 것 같습니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고기잡이 다니시던 어부로, 내가 생겨나기 전 어느 해 겨울의 모진 바람에 어느 바다에선지 휘말려 빠져버리곤 영영 돌아오지 못한 채로 있는 것이라 하니, 아마 외할머니는 그 남편의 바닷물이 자기집 마당에 몰려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말도 못하고 얼굴만 붉어져 있었던 것이지요.
<질마재 신화 중에서>
몸으로 돌아오지 못한 시인의 외할아버지가 바닷물로라도 돌아오듯이 미당선생은 이제 그의 유품으로 고향에 돌아와 있습니다.
시인 사후 생전에 몸에 닿아 쓰시던 유품들(친필원고와 필기구, 사진들, 책과 책상 책장, 파이프 모자, 옷과 옷장, 이불 요와 이불장 등등)이 모두 이곳으로 돌아와 전시되어 있습니다.
시인의 재기 넘치는 매운 눈매하며 웃음인 듯 아닌 듯 흘릴 듯 말듯한 입매를 한 사진을 보며 전시실을 오르다 시인의 변명인 듯 발을 잡는 시 제목에 끌려 끝까지 읽어봅니다.
하눌이 싫어할 일을 내가 설마 했겠나?
연애지상주의파의 한 노처녀가
사내인 그대의 사십대 후반기쯤 나타나서
나는 줄곧 당신을 혼자서 사모해왔거든요
한다면,
그러고 또 그대가 이미 처자를 거느린 가장이라면
이거 이런 경우엔 어떻게 하면 좋지?
너 좋알라 나 좋알라 받아들여서
사람들 눈 피해서 붙고 노는가?
아니면 참어라 참어라 참어라하며
멀찌감치 피해서 살아가는가?
우연처럼 참 우연처럼 꼭 한 번
내게도 이 시험이 사십대 후반엔 왔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침묵함이 좋겠다.
너 좋알라 나 좋알라 였대면
욕과 팔매질이 뒤따를게고,
참으세요 참으세요 근면했대도
짜식 참 되게는 깨끗한 체라고...
어쩌고 저쩌고 믿지도 안할테니,,,
공자가 이 경우에 써 먹으시던 말씀
하늘이 싫어할 일을 내가 설마 했겠나?
그거나 습용하며 침묵함이 좋겠다
다 읽고는 하아∼ 맥이 빠져 버렸습니다.
공자님 말씀을 인용하여 부끄러움을 덮어버리는 시인의 모습에 사뭇 아조 부끄러워집니다.
김인호 시인이 '거기 가거들랑 눈 감고 있다가 나오라'고 전했다는 질경이의 손을 잡고 그만 서둘러 나와 인촌선생생가로 향합니다.
이웃마을인 인촌생가가 바로 보이지 않고 길은 자꾸 산으로 깊이 들어갑니다. 사전답사때 해안쪽으로 나갔었는데 그때 미처 보아두지 못했던 사잇길로 들어서 버린 모양입니다. 길은 질마재 중턱쯤에서 도로확장공사에 막혀버립니다.
생전 바람으로 떠돌던 미당선생을 불러들인 질마재가 오늘 우리 답사팀들도 게까지 불러들인 모양입니다.
그렇게 질마재까지 올랐다가 인촌생가를 거쳐 부안으로 갔습니다.
매창공원
부안읍 초입에 매창공원이 크게 갖춰져 있습니다.
매창이 잠들어있던 매창뜸에 명창 이중선의 묘와 함께 묘역을 다듬어 시비를 세우고 공원 앞에 문화원 건물을 앉혔습니다. 기생 매창이 명실공히 부안을 대표하는 문화적 인물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화우(梨花雨)
-이매창
이화우 흩날릴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 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신석정 고택
그러나 매창의 한시를 이렇게 아름답게 풀어주신 신석정 시인의 고택은 아직 손을 대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낡고 초라한 군청건물을 지나 전주쪽으로 나가는 길에 시인의 고택이 있습니다.
녹슨 양철대문 옆으로 담장 대신 시누대가 무성해있고 이백평 남짓한 마당엔 콩, 깨, 고추가 가득 심겨 있습니다.
청소관리를 위탁받은 이웃집 할머니가 방과 마루를 닦으시다가 우릴 보고 관리가 소홀한 것에 미안하셨던가,
-군에서 도랑도 좀 쳐주고 뺑끼도 좀 칠해주고 하면 청소해도 표가 날 낀데 내가 허리를 다쳐서 일을 혀도 표가 안 나. 그래서 재미가 없어.
-재미가 안나세요?
-군에다 도랑 좀 쳐 도라고 전화좀 해 줘요.
-네, 전화할께요.
건성으로 대답해드리고 집을 좌로 돌아드니 왼쪽에 도랑물 흐르고 거기 돌미나리 가득 자라 흰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읍내에서 사시던 시인의 집이 이곳으로 옮겨온 것은 26세인 1932년 때랍니다. 한약방 하시던 부친이 빚보증을 잘못 써서 집을 잃고 여러 곳을 전전하시다 손수 이 집(대청 한 칸, 방 두 칸) 청구원을 짓고 1954년까지 이곳에서 사셨답니다.
작은 짐승
난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하늘은 바다보다 푸르렀다
난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난이와 내가
푸른 바다를 향하고 구름이 자꾸만 놓아가는
붉은 산호와 흰 대리석 층층계를 거닐며
물오리처럼 떠다니는 청자기빛 섬을 어루만질 때
떨리는 심장같이 자지러지게 흩날리는 느티나무 잎새가
난이의 머리카락에 매달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난이와 나는
역시 느티나무 아래 말없이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순하디 순한 작은 짐승이었다
개울물 건너(지금은 도랑물처럼 되어 버렸으나) 산으로 오르면 바다가 보이는 언덕이 나온다 했으나 이제 집들이 많이 들어서서 옛 산이 아닙니다.
선생의 거실로 쓰였겠지요. 그 방 벽에 커어다랗게 뜰에 서서 모란을 바라보시는 선생의 사진이 붙어 있습니다. 푸른 산 위의 흰 학처럼 고고해 보입니다. 선생님께 배워봤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꿈꾸어 봅니다.
사전답사 때 모시고 갔던 아버지께 답사소감을 말씀드렸습니다.
-미당선생의 눈매는 매서운데 석정선생의 눈은 참 순해보여요. 선생님 모습이 참 맑아보이고 품격이 높아보여요.
-석정선생은 참 양반이셨지.
본성을 뛰어넘기가 참 어렵구나 생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