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암을 걷다 (이평 중학교 동창모임)
글/김덕길
“무슨 동창회를 새벽부터 가?”
내가 생각해도 새벽부터 동창회를 하는 곳은 없을 터 나는 아내를 설득하지 못한다. 할 수 없어서 나는 친구가 보내준 카톡 내용을 그대로 복사해서 아내에게 보낸다.
-조남일
아침 6시에 만나 낙화암과 고란사를 구경하고 동창회에 가는 게 어떻겠니?
새벽 공기가 차다. 트럭을 끌고 동창회에 가는 것이 우스워 포기한다. 그리고 지하철역을 향해 뛴다. 전력질주다. 1984년도에 졸업한 중학교 동창들을 보러가는 길이다.
집에서 구성역 까지는 걸어서 8분 거리다. 지하철 출발 시간은 2분 전이다. 턱 밑까지 숨이 들이찬다. 역사에 몸을 얹히는 순간 지하철이 온다. 생전에 내가 이렇게 빨리 달리기를 해 본 적이 있는가?
수원역에 도착하니 약속시간 보다 훨씬 일찍 도착한다. 춥다. 잠이 덜 깬 새벽이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지 못해 을씨년스럽다.
‘을씨년스럽다’라는 말은 을사조약에서 기인한다. 이완용 이하 친일파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통탄의 역사가 1905년 을사년에 이루어졌다.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코저 일본이 강제로 체결한 조약이다. 그래서 전에는 ‘을싸년스럽다’라고 쓰이다가 지금에 이르러 날씨가 어수선하고 흐린 것을 표현할 때 ‘을씨년스럽다.’라고 말한다.
수원역의 불빛은 희미하다.
칼바람이 역의 빈 인도를 휩쓴다. 그리고선 윙윙 칼울음 소리를 낸다.
바람은 지나치는 행인의 목도리를 할퀴고 전깃줄에 걸린 비닐봉지를 할퀴고 나사못이 빠진 빈 공간으로 파고든다. 바람이 요동칠 때마다 간판은 윙윙 칼 울음소리를 낸다.
역 광장에 줄지어선 빈 택시의 불빛에 힘이 없다. 모범택시는 언제부터 줄을 섰는지 아예 시동조차 꺼놓은 상태다.
마침내 자가용 한 대가 멈춘다. 그리고 낯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반갑다! 친구야.”
옥형 이와 남일 이다. 그리고 앞좌석에 동숙이가 인사한다.
자동차는 새벽을 가르며 남으로 내려간다.
휴게소에 들려 남자들은 떡라면을, 유일한 홍일점인 동숙 이는 새우우동을 시킨다.
숙이는 새우 3개를 각자의 남자들에게 건넨다.
“새우 못 먹어서 그래. 어서 먹어.”
숙이가 그렇게 말해서 우리는 그런 줄 알고 먹는다. 새벽에 먹는 떡라면의 얼큰함은 임금님의 수라상이 부럽지 않다.
다 먹고 나니 숙이가 말한다.
“사실은 새우 먹을 줄 알아. 내 것만 비싼 걸 시켜줘서 고마워서 그래. 호호”
6500원의 튀김우동과 4500원의 떡라면에서 맺어지는 진한 우정이 훈훈하다 못해 뜨겁다.
부소산성에 차를 주차한 후 우리는 다른 일행을 기다린다.
마침내 그들이 온다. 시인 모자를 눌러쓴 영렬 이와 재순, 영옥이다.
부소산과 낙화암을 향해 우리는 산을 오른다.
햇빛이 숲으로 들어와 나무 사이에서 숨바꼭질을 한다.
낙엽은 도로를 덮고 바람의 방향에 따라 좌우로 뒹군다. 산등성이를 타고 오르는 경사로 마다 떨어진 단풍잎 천지다. 아직 떨어지지 못한 채 우리들이 오기만을 애태웠는지 가지에 남은 단풍은 갓 시집온 색시처럼 수줍게 붉다. 단풍 빛이 얼마나 고혹스러운지 영롱하다 못해 처연하다. ‘처연하다’라는 뜻은 애달프고 구슬프다 라는 뜻이다. 사무치게 아름다우면 기쁘다 못해 눈시울을 글썽이게 한다. 나는 늦은 가을의 막바지 단풍에서 처연함을 엿본다. 서럽도록 아름답고 현기증 나도록 가슴에 방망이질을 한다. 사랑에 막 싹이 틀 때 나도 이런 느낌이었을까?
정자에 올라 부여 시가지를 내려 본다. 멀리 백마강이 유유히 흐른다. 좋다.
마른 잎과 붉은 잎 사이에서 초록은 더 푸르다. 청단풍이다. 남일 이는 들은 풍얼로 말한다. 내가 따진다. ‘추워지면 광합성 작용을 하지 못하고 나무가 겨울을 이겨내려 스스로 수맥을 멈추잖아. 그래서 넓은 활엽수 잎은 붉거나 노랗다가 떨어지고 침엽수 잎은 잎을 밀어내는 것이거늘 어찌 청단풍은 넓은 잎이 겨울에도 푸를 수 있지?’
“와! 대단하다. 덕길이.”
사실은 청단풍은 단풍이 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여름에도 녹색 잎을 띠고 있기 때문에 청단풍이라고 한단다. 추워지면 맨 붉게 물든다고 하니 겨울에도 푸를 거라는 오해는 하지 말자.
“그냥 가게? 이곳에서 막걸리나 한 잔 하고 가는 게 어때?”
옥형이의 제안에 모두 찬성한다.
알밤 막걸리와 한산모시 막걸리가 나오고 따뜻한 묵이 나온다. 나는 모시 막걸 리가 맛있는데 일부는 알밤 막걸리가 맛있단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빙 둘러서서 마시는 막걸리 한잔에 한기가 스르르 녹는다.
다시 걷는다. 재순이가 취기를 이기지 못해 몸을 흔든다. 영렬이가 얼른 부축해준다. 술을 못하는 나와 영옥이의 얼굴이 붉어진다. 낙화함 정자에 올라 굽이치는 백마강을 본다.
삼천 궁녀가 빠져죽었다는 설은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궁녀가 난을 피해 투신을 한 것은 사실인 듯하다. 낙화암 절벽은 가팔랐고 백마강의 빼어난 아름다움은 어디에 내 놓아도 비교 할 수 없었으니까...
고란사에 들린다.
고란초가 많이 자란다 해서 고란사라고 이름 지었다는 이 절은 작고 평범하다. 백마강을 바라보고 있는 사찰이며 임금을 위해 지었다는 설이 있다.
우리는 황포돛배를 탄다.
백마강은 백제의 가장 큰 강이란 뜻이고 지금은 통틀어 금강이라고 부른다. 황포돛배는 천이 노란 물을 들인 천이라 해서 황포라 한다.
기와지붕이 있는 유람선을 타고 백마강을 따라 흐르니 노래가 절로 나온다.
“백마강의 고요한 달밤아 / 고란사의 종소리가 들리어 오면 /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 꿈이 그립구나 // 아..달빛 어린 낙화암의 / 그늘 속에서 / 불러보자 삼천궁녀를……. "
노래를 따라 강물은 하염없는데 건너편 흔들리는 억새의 술렁임은 서럽도록 아름답다.
“남일아! 이 좋은 곳을 새벽부터 운전해주고 달려와 주어 구경시켜 줌에 그저 고맙구나. 나 감동한 것 보이냐?”
한참 걷는데 누가 부른다. 홍순애다.
내가 제주에 있을 때 여행 중에 일부러 연락해 좋은 글 쓰라며 격려해주던 친구다.
그래서 지금 이글을 쓴다. 이번에 2종 소형 면허를 땄다고 자랑하던 그녀가 언젠가는 신랑과 나란히 오토바이 세계 일주에 성공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우정은 주는 것 없어도 배시시 웃음을 짓게 만드는 사이다. 시골 어릴 때 같이 뛰어놀던 그 시절 친구들이 그렇다. 그런 벗들과 함께한 잠깐의 시간이다. 참 고맙다.
나이 들어가는 것을 설워 말자. 이 아름다운 벗들이 함께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