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밀꽃을 찾아서 글 / 이시은
두어 해 전 이효석의 생가 터를 찾았을 때는 초가을 저녁 어스름이 내려앉을 무렵이었다. 진입로에는 도로공사를 위해 파헤쳐진 흙더미가 쌓여 있었다. 생가 터 앞에 차를 세우고 돌아본 집에는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홍씨네 일가가 있었을 뿐 썰렁한 가을 날씨만큼 스산해 보이기만 했다. 그곳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메밀을 원료로 한 몇 가지 음식을 팔고 있었다. 메밀묵 무침을 한 접시 사들고 발길을 돌리는 우리에게 집 뒤 비어있는 밭 자락을 가리키며, 그곳에 메밀을 심는다는 말과 함께 메밀꽃이 필 무렵 다시 오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못내 아쉬운 마음으로 둘러보던 행랑채 옆에 문인협회에서 표적사업으로 세워 둔 표석만이 작가가 유년을 보낸 자취를 표시하고 있었다.
얼마간을 취한 듯 거닐었을 때다. 급한 걸음으로 다가오며 나를 부르는 사람이 있어 정신을 가다듬었다. 다시 한번 오던 길을 되돌아 가 달라는 부탁이었다. 노오란 개나리색 파카가 메밀 꽃밭과 잘 어울리어 사진 작품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내가 전경에 도취하여 꿈을 꾸는 동안 그들은 나를 모델로 작품사진을 찍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모르게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며 그 옛날 허생원과 성처녀의 사랑을 생각하던 나의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았다. 붉어오는 얼굴빛을 감춘 채 그들의 주문대로 포즈를 취해 주었다.
모델의 댓가로 나의 모습이 담긴 몇 장의 필름을 받아 들었다. 눈밭같이 하이얀 메밀꽃밭에서 웃음짓고 서 있는 꿈꾸는 듯한 사진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깊은 심연을 울리는 물레방앗간의 물소리가 없더라도, 쏟아져 내릴 듯한 산촌의 달이 밤하늘을 밝히지 않더라도, 꿈길같은 메밀꽃밭에 앉아 성처녀와 허생원이 부러워할만큼 나의 왕자님과 아름다운 밀어를 나누고 싶어졌다.
이시은 수필집 <울타리에 걸린 세월> 수록 |
출처: 이시은의 문학 마당 원문보기 글쓴이: 이시은
첫댓글 아름다운 글.....가슴 두근거리며 감상습니다 좋은 글...감사합니다.
생생하게 펼쳐지는 방앗간과 마귀를 팔아 술값으로 대신하고 동료의 마귀에 짐을 싣고 떠나는 광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네요, 좋은 작품의 울림이랄까요, 감사합니다,
한국 단편 문학의 기념비적 작품,이효석님의 메밀꽃필무렵의 눈물겹도록 정겨운 풍광이 펼쳐지는 문학의 현장에 관한 아름다운 상념을 ...선물 해 주는 좋은 수필 잘 읽습니다...
메밀꽃 필무렵...메밀꽃...달빛 성처녀...물레방아간의 추억...소금을 뿌려놓은 듯... 달빛 속에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밭..언덕을 넘어 가는 나귀의 방울 소리...봉평, 대하의 5일장..풍경 장돌뱅이의 애환...수필로 풀어 쓴 한편의 명시!!...메밀꽃 필 무렵...메밀 꽃 필 무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