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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5월호 |
제 33 話 역술인 김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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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의 싸늘한 눈가에 고이는
이슬이 아름다워 하염없이 바라보네
내마음도 따라우네 가여운 나의 여인이여
외로운 사람끼리 아 만나서 그렇게
또 ~ 정이들고 어차피 인~생은
빈 술잔 들고 취하는 것
그대여 나머지 설움은
나의 빈잔에 채워 주
이 노래는 원래 국민가수 남진이 부른 <빈잔>인데 몇 년전에 [나 가수다]라는 프로에서 임재범이 편곡하여 불렀다.
젊은층에게는 신선하게, 나이든 사람들에게는 향수를 불러일으켜 화제가 되었다는데 나에게는 또 다른 감회가 있는 곡이다.
나와 참으로 막역하게 지냈던 지금은 고인이 된 역술가 친구 김광일의 18번 곡이기 때문이다.
사석에서 나와 술잔을 기울일 때면 그는 <빈잔>을 꼭 빠짐없이 불렀기 때문에 귀에 익은 곡인데 다시 방송으로 그 곡을 들으니 그의 깊은 설음(슬픔)을 희석이라도 시키듯 악동같이 짓궂고 철없이 행동하던 모습이 떠올라 나의 눈가에도 아름다운 이슬은 아니지만 핑하고 이슬이 돈다.
방송과 스포츠신문에 자주 등장하여 유명한 역술인이였지만, 자신의 뛰어난재능을 장애자라는 한계 때문에 마음껏 펼칠 수 없었던 설움을 마치 자신을 학대하듯 독설과 짓궂음으로 방출하려 하였던 불운한 운명의 사나이.
나는 그의 깊은 심연의 슬픔을 누구보다 잘 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나 할까.
아직까지는 우리나라가 장애인이 살기 편한 나라는 아니다.
생활은 커녕 생존하기에도 버거운 나라다.
김광일이나 나나 어느 정도 돌 머리는 면했기에 그럭 저럭 살아는 왔으나 많은 장애인들은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살고 있을 뿐이지 행복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먼 것이 어쩔 수 없는 현재의 현실이다.
그 어려운 여건속에서 그 어려운 역학을 터득하여 고수 수준에 오르기가 어디 쉬운가. 김광일은 그 험난한 과정을 극복한 사람이었다.
더구나 친어머니가 아닌 계모에게 그런 끔찍한(?) 효심을 나타냈던 보기드문 의인(義人)이었다.
“이보게 김광일! 현세의 모든 슬픔은 저승에다 버리고 다음 내세에는 좋은 사주 복 많은 팔자로 태어나 빈술잔 들고 취하는 인물이 되지 마시게....”
제 34 話 신숙주의 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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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일 월 년
甲 丁 丁 丁
辰 酉 未 酉
59 49 39 29 19 9
辛 壬 癸 甲 乙 丙
丑 寅 卯 辰 巳 午
신숙주(申叔舟) 영의정 역임.
1417년 음력 6월 13일 辰時生.* [1475년 59세(乙未년) 사망]
丁火 일주가 여름에 태어나 연, 월간에 비견이 있어 신강하며 연, 일지의 酉金 재성은 월지 未중 사령신인 己토가 생하여 약하지 않다. 왈 <식신생재격>이다.
비견이나 겁재가 천간에 2개이상 투출하면 조실 부모하기 쉬운 운명이라 그도 17세[癸丑년]에 아버지를 잃었다. 22세 23세에 연이어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29세부터 水·木의 운으로 가니 뛰어난 재주와 학식이 세종 임금의 눈에 들어 관로가 순탄하였고, 특히 세조가 등극한 1455년 39세 癸卯 대운이후 20여년 파죽지세로 출세하여 영의정에까지 올라갔다.
辛丑 대운에 접어들자 식신격을 충하며 金이 갑자기 강하여져서 사주원국의 강한 火와 전쟁을 일으켜 흉하다. 더욱 乙未년은 대운과 연운이 천충·지충(天冲·地冲)하니 그만 사망하고 만다. 충신의 길을 버리고 영화의 길을 선택한 것도 자신의 팔자이리라.
제 35 화 강간당한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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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일 월 년
己 丙 癸 己
亥 午 酉 丑
59 49 39 29 19 9
己 戊 丁 丙 乙 甲
卯 寅 丑 子 亥 戌
월지가 酉金이라 <재백격>이다. 천간에 癸水의 정관이 투출되어 있는데 그 정관 癸水를 연, 시간에서 己土가 나타나 극을 하니 남편과 해로하기는 글렀다.
더욱 연주 기준으로 보면 일주가 공망이고, 월주를 기준으로 보면 시주가 공망이다. 허무한 인생이며 허망한 생각에 빠지기 쉬운 성격이 형성된다.
丙子 대운중 辛酉년 戊戌월 丁丑일 유부녀로서 강간당하고 정부(情夫)에게 금품을 갈취당하다가 결국 남편의 고소에 의해 입옥(入獄) 당했다고 친정 모친이 와서 설명을 했으나 과연 강간일까?
슬하에 4남매를 두었다.
대운 丙子가 부부궁을 충하니 가정이 온전할 리 없고 子·午·卯·酉의 대운에서는 반드시 남녀풍기의 문란함이 있다.[사주가 혼탁할 경우]
제 36話 여성 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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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일 월 년
戊 己 己 乙
辰 亥 丑 未
61 51 41 31 21 11
丙 乙 甲 癸 壬 辛
申 未 午 巳 辰 卯
재물을 극하는 비견이나 겁재가 많아 얼핏 보면 금전복이 없는 가난한 서민으로 보기 쉽다.
자세히 보면 일지 亥水 재성이 있는데 丑월이 나란히 있고, 그 중간에 子水가 공협으로 숨어있다. 즉 亥·子·丑의 북방 水방국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일간도 丑土월이라 신왕하고 또한 재도 왕하다. 고로 부자의 운명이라 무역업과 기타의 업등으로 큰 부(富)를 축적하여 서울 요지에 빌딩을 소유하고 지방에도 토지가 있는 알부자의 사주이다.
다만 己亥일에서 보면 생시 辰이 공망이고 戊辰시에서 보면 일지 亥가 공망이다.
이런 경우를 “호공(互空)”이라 부르는데 일시가 호공이 되면 가정복이 없이 고독하게 산다. 고로 이 여인도 60세 넘도록 결혼하지 않은 채 독신으로 살고 있다. [사주실록에서 발췌함.]
제 37 話 역술인 李靑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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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술인 이청산(존칭 생략)과의 인연은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의 상담실에 어느날 말끔하게 생긴 젊은 사람이 찾아왔다.
생년, 월, 일, 시를 불러주며 사주를 봐 달라하여 아무생각 없이 사주 명리를 보아 주었는데 사주 감정이 다 끝나자 악수를 청하며 자기는 일반 상담객이 아니고 전문 역술인이라고 하면서 지나가다 낯선 간판이 보여서 인사나 터놓으려고 들렸단다.
그 후 가끔 지나가다 들리곤 하였는데 나이도 같은 연배고 하여 술도 같이 먹기 시작하였고 내 쌍둥이 딸들의 돌날에는 같이 어울려 축하도 해 주어 제법 친해졌다. 더욱 친해진 계기는 어느날 우울한 얼굴로 나타나선 나보고 갑자기 강원도 춘천 소양강에 가서 쏘가리나 먹자고 하는게 아닌가.
지금이야 내 차도 있고 운전해줄 사람도 있지만 당시로선 먼 길을 나간다는 일이 쉽지 않은 처지였고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아 망설였는데 그는 마장동에 가면 강원도에서 올라와 빈차로 내려가기 싫어 기름값만 받고 가는 택시가 많다하면서 자꾸 가자고 청한다.
그래서 나름 큰 맘을 내어 소양강가 횟집으로 간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강원도 하늘이 무척 파랬던 걸로 기억한다(나는 성남 하늘만 파란줄
알았었다).
그 후 그와 어울려 생맥주집을 수시로 가게 되었는데 술이 싱거워서 미리 소주를 사들고 가서 타서 마셨는데 그것이 요즘의 폭탄주라 할 수 있다.
청산은 역학 친구라기 보다는 오히려 술친구로서 많이 어울렸다.
그때 같이 어울렸던 인물로는 나중에 스님이 되어 모 종단의 총무원장까지 지낸 남불승과 지금은 역술업에서 은퇴한 최황씨등이 있었다.
당시 술집의 풍경은 지금의 룸싸롱과는 많이 달랐다.
마이크와 반주 대신 시중드는 아가씨들의 생음악과 젓가락으로 술상을 두드려 박자를 맞추던 시절이었는데, 최황씨의 젓가락 장단은 천하 일품이었고 남불승씨의 노랫 솜씨 역시 구수하기 이를데 없었는데 나중에 그 구수한 노랫솜씨로 염불을 하여 신도들의 인기를 한몸에 모으기도 했다.
청산 역시 노래 솜씨는 일품이었었다. 그 후 그의 그 끼가 늦게 다시 꽃을 피워 가수로 데뷔하여 <넋살이 가기전에> <성남의 연가> <돈좀풀어> <몹쓸 사랑>등의 노래를 취입하여 [역술인의 노래인생]을 살고 있다.
70년대 후반기에 작명을 하러 오신분 중 여러 사람들이 한결같이 [이 작명소에서 이름을 짓고 다른 작명소에 가면 나쁘다하니 누구 말을 믿어야할지 혼란스럽다]라는 말을 하는 것을 여러번 듣게 되었다.
그래서 곰곰 생각해 보니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작명이 불신을 받게되어 결국 역술업이 타격을 입을것 같은 위기감이 들어 같은 지역에 사는 역술인끼리 친목회라도 만들어 학문적 통일성을 이루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어 뜻을 같이 할 사람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김정태 최황 백종헌 박필두 목정언 이철안과 여류 역술인 백경재씨 등등을 모아보니 나까지 13명이 모이게 되었다. 첫 모임 장소는 최황씨 집을 빌려서 모였다.
이청산은 이때 타 지역에 나가 있기도 했지만 성남에서 별로 영업도 안하는지라 첫 모임에서는 빼고 결성되었다.
요 잘난 모임도 단체라고 느닷없는 변수가 생겼으니 갑자기 목정언씨가 회장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처음에 내 의도는 가장 연세가 많은 초해(楚海) 김정태(金正泰) 선생님이나 아니면 정암(靜岩) 백종헌(白宗憲) 선생을 회장으로 앉힐 생각이었는데 초해 선생님은 극구 사양(그 후에도 회장자리는 극구 사양하셨다)하여 백종헌으로 마음을 굳혀두었는데 성남에 와서 개업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영업(상담) 장소도 여관에 임시로 와 있는 사람이 회장을 하겠다고 나섰으니 이는 목(睦)선생의 과욕이었다.
갑론을박하다가 결국 백종헌선생이 회장이 되고 내가 부회장이 되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성남시 역술인 모임이 시작되었다. 이때가 1979년도 겨울이었다.
이렇게 얼마간 친목회로써 모임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청산이 나타나서 하는 말이 친목회로써 지내지말고 사단법인 [한국역리학회] 겸 사회단체 [한국역술인협회]에 단체로 가입하여 성남시 지회로 변질시키는 것이 어떠냐하여 나는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런데 초해선생과 정암선생은 이미 찬성하였고, 회를 소집하여 회원들의 뜻을 물으니 거의 모두가 찬성하는게 아닌가.
내가 공들여 만든 모임에서 나만 빠질 수 도 없어서 울며 겨자먹기로 졸지에 생각도 안했던 [한국역술인협회] 회원이 되고 말았다.
그 후 나는 1981년도에 회장으로 선출되었었고 나중에 한번 더 뽑혀 2번이나 회장을 해보는 불행을 겪었었다.
이청산의 본명은 이찬형(李燦炯) 1952년 음력 正월 28일 巳시생
시 일 월 년
己 己 壬 壬
巳 亥 寅 辰
54 44 34 24 14 04
戊 丁 丙 乙 甲 癸
申 未 午 巳 辰 卯
정관격(正官格) 사주라 얼핏보면 상당히 좋아 보인다.
그러나 일주에서 보면 時가 공망이고, 시에서 보면 일주가 공망이라 일과 시가 서로 공망이 되어있다. 이런 경우를 호공(互空)이라 하는데 일과 시가 호공이 되면 승려나 역술인의 운명이 된다.
지살(地殺) 사맹(四孟: 寅,申,巳,亥)중에 3개나 명조안에 있으니 떠돌이 인생이 될 수밖에 없다.
그의 말에 의하면 8세때 절에 동자승으로 출가했다가 그곳에서 역학을 익혀 14세부터 환속하여 역술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한다.
전국 어느곳 안가본 곳이 없으며 심지어 섬에까지 가서 사주 명리를 봐 주었다.
한곳에 길게 머물러야 6개월, 평균 3개월씩 머물며 농촌 사람 어촌 사람들의 사주팔자를 보아주고 다녔으며 아직도 다니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동해안은 여름에 오징어가 많이 잡히는 철에 가야 돈이 돌므로 역술업이 잘되고, 제주도는 양력 12월~ 5월사이에 조왕제(그 곳 사람들은 용왕제라 부르지 않는단다) 풍습이 있어 그때 가야 된단다.
사실 사석에서는 청산에 대한 호칭을 자연스럽게 <자네>라고 부르지만 청산은 몇 안되는 역술업계의 선배이다.
요즘 나이가 고령인 역술인들도 대부분 나보다 역학계 입문이 10년이하 후배들이다. 역술업에 빨리 입문한 것이 결코 자랑은 아니지만 경력을 날조하는 사람들을 볼 때 마다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 것도 사실이다.
역술인 이청산의 역사를 기록하다가 잠시 옆길로 새서 내 얘기가 너무 많이 들어간것 같다.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끝으로 그가 절규하듯 부른 넋살이(황혼을 뜻한다) 가기전에 라는 노랫말을 적어본다.
인생사 한마당을 어느 누가 짧다했나
주워진 생명하나 기댈곳은 어디인가
오매도 숨져가고 아비마저 떠나가고
이 한몸 하나 남아 어이 어이 살아갈꼬
넋살이 가기전에 이름하나 남겨질까
이 청 산 [역술인의 노래인생]
신나게 부르시게나 !
제 38 話 일본 여인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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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늦 가을.
전에 일본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가 이혼하고 돌아 온 여성 한분이 나에게
자주 오는데 하루는 낯 선 여인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일본 여자였다.
시 일 월 년
甲 壬 己 辛
辰 申 亥 卯
53 43 33 23 13 03
乙 甲 癸 壬 辛 庚
巳 辰 卯 寅 丑 子
보러온 시점이 卯대운 말이다. 부부궁 일지와 원진살이 들고, 기문 사주로
정관(正官: 남편)이 없고, 중궁에 귀(鬼: 애인이나 재혼의 남편)만 있으니
분명 이혼한지 얼마 안 된 것 같다.
“이혼하셨지요.”
“하이!”
꿇어앉아 있던 자세를 다시 한번 바로 한다.
“이혼하고 애들과 이별해서 마음이 산만하시군요.”
통역을 듣고 나자 여인은 눈물을 쏟으며 연신 ‘하이,하이’ ‘센세이 상’ 하는데 다소 당혹스러웠다. 간혹 고객중에 상담도중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분처럼 이렇게 진심으로 감정을 진하게 표출하는 분은 없었다.
나중에 곰곰 생각해보니 일본의 역학 풍토와 우리나라의 역학 풍토가 다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일본에서는 사주팔자를 보는 행위보다는 점(占)을 보는 문화이기 때문에 술사들이 과거사를 말해주지 않는 편이고, 고객도 아예 과거사를 들을 기대조차 안한다. 그런 풍토에 젖어 있던 분이니 한국 여성 같으면 고개나 까딱했을 정도의 얘기에 그렇게 반응했던 것이리라.
“하루꼬(春子)상 힘내세요. 아이들과는 몇 해 후에는 같이 지내게 될 겁니다.”
이 말을 듣고서야 그녀는 겨우 눈물을 씻으며 연신 고맙다하고 돌아갔다.
제 39話 인도의 신개척 종교 철학자. 라즈니쉬(Osho Rajnee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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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일 월 년
甲 庚 庚 辛
申 子 子 未
51 41 31 21 11 1
甲 乙 丙 丁 戊 己
午 未 申 酉 戌 亥
[1931년 양력 12월 11일 ~ 1990년 양력 1월 19일 사망]
월령 사령이 초기 壬水라 <식신격>이 된다. 시간의 甲木까지 연결되면 <식신생재격>이 되어 거부(巨富)가 되었을 수 있는데 연간 辛金과 월간의 庚金이 천간에 같이 투출하여 甲木을 극제(剋制)하니 단순 <식신격>으로 보아야 한다.
금백수청(金白水淸)이다. 연지에 未土가 있으나 흙이 약하여 물을 흐리게 하지 않으니 물이 맑다. 고로 정신이 맑은 사람이다. 그러나 金水의 상관격이나 식신격은 양화(陽火)의 따듯한 기운이 필요하나 아쉽게도 未中의 지장간의 丁火(촛불) 정도의 음화(陰火)로는 조후가 완벽하지 않아서 속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기는 부족하다.
인도사람으로 대학교수로도 봉직했었으나 세계의 각종 종교와 철학을 재해석하여 많은 사람의 정신적 스승이 된 것도 타고난 사주와 무관하지 않다. 甲午 대운 끝 무렵 己巳년 丑月에 사망한 것은 <식신격>을 충한 대운의 영향이라 학 수 있겠다. [『사주실록』庚日子月에서 발췌]
제 40話 처와 자녀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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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일 월 년 <- 1915년생 남자
壬 辛 辛 乙
辰 亥 巳 卯
54 44 34 24 14 4
乙 丙 丁 戊 己 庚
亥 子 丑 寅 卯 辰
44세에 상처(喪妻)했다. 천간에 편재가 투출하면 장가를 여러 번 간다.
장애자 아들은 일찍 죽었고 딸도 죽고 현재 남매만 생존. 자손궁인 時에서 상관이 자손 성인 정관을 극하니 자손 복이 없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게 살았는데, 연간에 비록 乙木 편재가 있어도 월간의 비견이 바로 옆에서 극을 하니 금전이 안 모아진다.
재가 뿌리가 있어도 가난한 것은 金克木이 심하기 때문이다. 乙卯는 연주로 초년 어려서의 재물일 뿐이다. 길한 것은 연, 월에 있고, 흉한 것은 일, 시에 있어 초년만 복(福)이 있고 나이 들면서 고생과 고난이다.
巳-亥의 상충으로 월지장간 정관(正官)이 깨져서 자녀복과 사회적인 출세가 힘든 사주다.[『사주실록』辛日巳月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