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특이하게 계절을 모르고 피는 돌연변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꽃은 피는 날이 정해져 있습니다.
꽃은 절기를 따라 [피는 때]가 있습니다. 성급하지도 게으르지도 또 절대로 서로 경쟁하지도 않습니다. 때가 되면 스스로 피었다가 스스로 질 뿐 다른 꽃을 의식하여 빨리 핀다던가 아니면 늦추어 피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 집 주변을 지나 제가 섬기는 학교 사무실까지 차를 몰고 가다 보면 소박하고 낙천적인 멕시칸들 집 뜰에 한국에서나 볼법한 접시꽃, 봉숭아, 채송화, 카네이션, 장미, 민들레, 금계국 심지어 밭에는 오이꽃, 고추꽃, 감자꽃, 토마토꽃, 호박꽃 등이 피어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 밖에도 이름 모를 수많은 꽃들이 피었다가 졌거나 앞으로 피려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꽃은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꽃이 피는 날짜는 신기하게도 해마다 거의 일치합니다.
사람도 꽃입니다. 아니 꽃보다 더 아름다운 꽃입니다. 제각각 활짝 필 때가 있습니다. 일찍 성공하는 사람도 있고 늦게 성공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 자기 때가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분의 아들이 하바드 대학 4년에 대학원까지 졸업했다고 신문에 대서특필된 적이 있습니다. 이 기사를 본 다른 분이 내 자식들은 언제 그렇게 공부를 잘 할 수 있을까 걱정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꽃은 그렇게 피었지만 이 꽃은 이렇게 필 것입니다. 때가 되면요.
그러니 먼저 성공했다고 자만하면 안되고, 아직 성공하지 못했다고 좌절할 일도 아닙니다. 다 때가 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의 때를 알고 그 때에 맞춰 활짝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동물학자들이 빨강 셀룰로이드 비닐을 카멜레온의 눈에 붙였더니 푸른 나무에서 카멜레온의 몸은 빨강색으로 변했습니다.
카멜레온은 환경에 따라 몸의 색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눈이 인식하는 대로 몸의 색이 보호색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지나 환경 때문에 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가치관 때문에 인격이 변하는 것입니다.
소매치기를 하다가 경찰에게 붙잡힌 도둑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옆에 경찰이 서 있는 것도 못 봤냐?"
"돈에 눈이 멀어 돈만 보이고 아무것도 안보였습니다."
절대진리이시며 선과 공의가 되시고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의 인격과 삶은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분인 예수를 바라 보아야 합니다(히12:2)
오늘 우리의 시선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그 시선의 방향을 따라 나의 발도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얼른 알아 차려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어려서부터 '성공학'과 더불어 반드시 '실패학'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는 성공자보다 실패자가 훨씬 더 많으며, 살면서 실패를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성공보다는 실패할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공했을 때 누릴 영광만 꿈꿀 것이 아니라, 실패했을 때는 어떻게 대처해서 다시 일어서야 하는지를 배우는 것도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실패학'은 정상에서 어떻게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는지도 가르친다고 합니다. 영원한 성공은 없습니다. 정상에 섰으면 반드시 내려와야 합니다. 산을 올라갈 때 힘들면 중단하면 되지만, 내려올 때는 힘들다고 중단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올라가며 당하는 사고보다 내려오면서 당하는 사고가 훨씬 더 많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교회가 성장하여 교인들이 많아지고 주변에서 사람들이 성공했다고 부러워하는 순간 스스로 사임하고 다시 개척교회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개척지를 향하는 그 뒷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이룬 성공인데... 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고 자식에게 대물림 하거나.... 좀 더 큰 교회나 조건이 좋은 교회로 가면서 [비전]이란 명분을 내세워 지금 섬기는 교회를 버리듯 떠나는 그런 뒷모습은 추하기 그지없습니다.
사람은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래서 비전이라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큰 교회 말고 작은 교회.... 아니 더 험한 사역지를 향하여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풍운아처럼 홀연히 그 자리를 떠나는 사람이 참 멋있어 보입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을 오랫동안 마음에 두고 그리워할 것입니다.
사람은 떠나는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진짜 멋쟁이입니다.
비전(vision)은 꿈, 목표 방향 그런 뜻이고요. 소명(Vocation)은 명령, 의무, 어명 그런 뜻입니다.
비전은 자기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면 소명은 절대자에게서 일방적으로 내려오는 명령입니다.
비전과 소명을 혼동하지 맙시다. 제발.
특히 소명 Vocation은 라틴어 Voice에서 온 단어입니다. 즉 소명이란 [목소리]입니다.
소명은 이루어야 될 무슨 [일]이 아니고 [목소리]입니다. 소명은 내가 들어야 할 [그 분]의 목소리입니다. 잘 들어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목소리 .....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목소리인 비전을 소명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생 비전을 이루었지만 말년에 가서 뒤늦게 목소리(소명)을 듣고 나서 후회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나는 내 일(자기 일)을 죽어라 하면서 하나님의 일이라고 착각하는 예수쟁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쯔쯔쯔...
나는 영화 [방자전]을 인터넷으로 봤다. 초점이 춘향이도 이몽룡도 아닌 방자에게 가 있는 춘향전 개정판이다.
고전에 나오는 춘향이는 절개와 지조를 지키는 일편담심의 지고지순한 여인이었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사랑을 불태우는 과거판 자유여인이다.
춘향이(조여정 분)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방자(김주혁 분)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시나리오.
춘향이의 몸종 향단이는 오히려 자신의 상전인 춘향이와 경쟁하며 이몽룡에게 사랑을 갈구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러한 점에서 기존의 춘향전이 보여주었던 인물들의 전형성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21세기가 요구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성적욕구를 구가하는 인물들이 종횡무진 한다.
그러고 보면 요즘 여배우들이 참으로 대담해졌다. 쌍화점에서의 송지효, 미인도에서의 김민선, 그리고 이번엔 조여정까지 과감하게 벗어 제친다. 관객은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유명 여배우의 벗은 몸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닐지. 색(色)에 그렇게 집착하는 영화에서 춘향전의 정신은 완전 왜곡 되어 있다.
왜곡된 춘향전이라면 프랑스판 춘향전이 있다.
1890년도에 홍종우라는 사람이 프랑스에 유학을 갔다가 로니 교수에게 '춘향전'을 들려주자 그 교수가 너무 흥미진진해 하며 프랑스말로 받아 적은 것이 최초의 프랑스판 '춘향전'이 되었다 한다.
그런데 그 프랑스판 춘향전에 보면 그네를 뛰는 춘향이는 반팔의 드레스를 입고, 이도령과 춘향이가 서양식 무도회에 나가 춤을 추고, 옥중에서 키스를 하고, 변학도는 이몽룡의 칼에 죽임을 당한다.
그러니까 춘향전을 완전히 프랑스식으로 변질시켜 자기 맘대로 번역을 한 것이다.
프랑스판 춘향전은 조선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어쩔 수 없는 오류 작품이라면, 방자전은 작가가 관객들을 사로잡기 위해 일부러 고도의 에로 심리 기법을 동원하여 춘향전을 왜곡시킨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둘 다 흉측한 짝퉁 춘향전이다.
나는 요즘 성경을 위의 두 가지 짝퉁 춘향전처럼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설교하는 것을 가끔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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