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단으로 퍼갈 수 없습니다.* 평화의 댐과 오지마을 비수구미를 찾아서 글/사진: 이종원
평화의 댐 86년 대학시절 MBC 재물조사팀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다. 여의도 사옥 지하부터 꼭대기까지 모든 재산조사를 하는 일을 맡았다. 수 백억원하는 중계차에도 들어가고 이주일, 조용필등 유명 연예인도 원없이 구경하고 얘기도 했다. 그런데 금강산댐 사건이 터진 것이다. 모형 미니어쳐까지 펼치며 63빌딩까지 잠긴 물바다 된 서울의 모습을 연일 방송에서 내보냈다. 갑자기 나는 성금조사팀으로 차출되었다. 매일 성금액을 집계하는 것 뿐 아니라 타 방송사의 성금액을 뽑는 일을 했다. 인력이 부족하면 모금통을 들고 전국에 다니며 사람들에게 애국을 호소했다. 유명연예인, 정치인 뿐아니라 유치원아이들의 코 묻은 돈까지 벽돌 한 장을 올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쌈지돈을 꺼냈다. 그런 정성이 모여서 만들어진 댐이건만 과장되었고 정략적으로 이용했으며 심지어는 그 성금이 대통령 비자금으로 들어갔다는 보도를 접했을 때 참으로 씁쓸했다. 산을 가로 막고 육중한 콘크리트가 흉물스럽게 서 있는 모습이 아쉬울 따름이다. 좋든 싫든간에 분단이 만들어낸 아픔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을 여미게 만든다.
미륵바위와 구만교 화천에서 460번국도를 타고 북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미륵바위를 만난다. 마치 거인이 쪼그리고 않아 있는 모습을 한 바위 5개가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처에 사는 선비가 이 바위에 기도를 올려 과거에 급제하여 양구 현감까지 제수되었다는 전설도 전해오고 소금배를 운반하던 선주들이 안전과 귀향을 위해 제를 올렸다고 한다. 요즘 사람도 제를 올리고 있나보다. 막걸리 통이 하얀 눈밭에 비스듬이 서 있다. 조금 더 가면 구만교가 나온다. 일제때 일본놈이 다리를 설계했고 38선이 갈라지면서 북한땅이 되면서 소련 기술로 기초공사를 했고 휴전후 남측에서 다리를 완성한 것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를 모두 담고 있는 슬픈 다리다.
화천수력발전소 댐 옆에 수력발전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8km 거리에 있는 물을 끌어와 낙차가 큰 곳에서 4개의 수압관로를 통해 쏟아져 내려오는 힘을 이용하여 전기를 얻어내고 있다. 퇴역한 노병사처럼 쓸쓸하게 서 있지만 6.25전쟁때 이 발전소를 쟁취하기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루어야했다. 지금이야 고작 화천시와 춘천시의 전력수요를 담당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전국 수용의 25%에 이르는 전력을 차지하고 있어 기필코 탈취해야 할 발전소였다. 이승만대통령은 설사 연백평야를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화천발전소만은 꼭 확보하라는 명령이 떨여지자 죽기살기로 싸웠던 곳이다. 휴전을 앞두고 양쪽의 공방이 가장 치열했으며 많은 사상자를 내기도 했다. 발전소 한 가운데 훈장마냥 새겨진 '멸공방첩'이란 글씨가 세월에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세상이 바뀌면서 일부러 지운 듯하다.
꺼먹다리 1945년 세워진 다리다. 높이 4.8m, 길이 204m로 철골과 콘크리토 축조된 국내 최고의 교량이다. 콘크리트 교량에 형강을 세우고 그 위에 콜타르를 먹인 목재를 대각선으로 설치했으며 이는 목재 부식을 최소화 시켰다. 단순하면서도 구조적으로 안전감을 주는 공법으로 현대 교량사에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교량상판이 검은색 콜타르목재를 사용하였기에 '꺼먹다리'라고 부른다. 영화 '산골소년의 사랑이야기', '전우'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혜산령 아름다운 딴산을 거쳐 북쪽으로 달리다보면 작은 군사마을인 풍산이 나온고 거기서 평화의 댐을 가려면 강원도 산길의 진수를 맛 볼 수 있는 해산령을 넘어야 한다. 운전하는 사람조차 멀미가 들 정도로 굽이길을 따라 산길을 오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1190 m)에 있다는 해산터널을 만났다. 길이가 1,986 m로 준공년도와 일치한다. 터널을 지나 '이제는 조금 완만하겠지'라는 생각은 '아흔아홉 굽이길'이라는 푯말을 보고 아연실책을 한다. 정상마루 근처에 전망대가 있어 잠시 멈추고 굽이치는 산줄기를 감상하는 것도 좋다. 해산은 '해가 떠오르는 산' 이라는 의미다. 호랑이 출몰로 알려져 세인들의 시선이 집중된 곳이다.
평화의 댐 아흔아홉굽이를 오면서 하도 핸들을 꽉 잡아 어깨가 아플 지경이다. 몇 개 터널을 지나평화의 댐 주차장에 도착했는데 도무지 그 큰 댐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옆차에 물었더니 방금 타고 온 도로가 평화의 댐이라고 한다. ^^ 약간 옆으로 나와보니 정말 댐이 보인다. 나무도 숲도 보지 못한 아둔함. 국민들의 피와 땀이 어우러진 댐,말도 많고 사연도 많았던 댐.
댐하류는 조용한 겨울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댐의 바깥쪽. 작년 10월에 2단계 공사를 마쳤다. 본댐 높이 125m, 저수가능량 26억 3000만톤, 댐 저수용량은 소양강댐, 충주댐에 이어 세 번째다. 높이는 소양강댐보다 2m가 더 높은 국내 최고의 댐이다.
댐 안쪽은 물이 하나도 없다. 철원의 철의 삼각지-평화의 댐-양구 펀치볼전적지-고성 통일전망대등 통일안보관광지의 벨트를 차지하고 있다.
평화의 댐 중간에서 바라본 풍경 정면에 보이는 산이 백암산이며 백암산 정상 전망대에서는 평화의 댐과 북한의 임남댐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세계 평화의 종 댐 아래쪽에는 한반도와 이라크등 분쟁지역의 탄피로 만든 평화의 종을 비롯하여 섹각국의 종을 수집하여 종공원을 만들 예정이다.
비목공원 가곡 '비목'의 탄생지를 기념하는 비목공원이 평화의 댐을 바라보고 있다. 1960년 늦가을 북쪽 백암산 지역에 배속된 한 청년장교는 잡초 우거진 비무장 지대의 양지쪽 산기숡에서 무명용사의 유택인 돌무덤을 만났다. 녹슨 철모와 이끼 덮힌 돌무덤, 그 옆에는 하늘거리는 들꽃, 화약냄새가 쓸고간 계곡의 노을지는 석양, 젊음을 채 피우지 못하고 산화한 무명용사. 어쩌면 그 역시 자기와 같은 장교였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한 편의 시를 남긴다.
비목(한명희 작사,장일남 작곡) 초연이 쓸고간 깊은계곡 양지녘에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흐르는 밤
비목 노래비
기념탑 외에도 철조망을 두른 언덕 안에 녹슨 철모을 얹은 나무 십자가들이 여러개 서 있어 민족비극의 아픔을 되새기게 해준다. 매년 6월 3일부터 비목문화제가 열린다.
군인장승도 보인다.
남자 모습을 세워 놓았다.
수자원공사에서 만든 물문화관이 자리잡고 있으며 분수와 공원이 꾸며져 있다.
오지마을 비수구미 오지마을을 만나면 늘 가슴이 설레인다. 미지의 땅에 과연 누가 살아갈까? 무엇을 먹고 살아갈까? 비수구미 마을도 마찬가지다. 6.25 전쟁이 끝나면서 이곳으로 들어와 농사짓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많을 때는 6가구가 밭을 일구면 생계를 이었지만 화전이 금지되면서 모두 떠나 3가구 6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평화의 댐이 들어서고 마을위에 도로가 나기 전까지만 해도 완전한 오지다. 하류에서 보트를 빌려 파라호 상류로 거슬러 올라와야 했으니까... 지금은 평화의 댐 가기 전에 우측으로 가다보면 비포장 도로가 마을까지 연결되어있다. 2005년까지 자연휴식년제 실시로 출입이 제한되었지만 지금은 차로을 갈 수 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 비포장도로에 미끄러운 눈까지 쌓여 있고 차 한 대만 간신히 다닐 수 있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차라리 초입에 주차를 하고 마을까지 트레킹 하는 것도 멋진 추억거리가 되리라. 정수와 함께 물안개를 헤치며 강을 따라 가고픈 곳이다. 날이 풀리면 꼭 다시 찾고 싶은 곳이다. 비수구미 민박 3만원 033-442-0145 산채정식 5천원
마을에 들어가면 얼음을 뚫고 빙어를 낚을 수있다.
秘水九美..'아홉개의 구비를 돌면서 소와물이 함께 어우러져 비경을 연출한다.'라는 의미란다. 씽싱 바람부는 날. 한 여인이 빙판을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다. 오래오래 기억속에 간직하고 픈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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