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악산 산행기 (629 미터)
“우수가 지나면 대동강 물도 풀린다”는 말처럼 봄이 눈앞에 다가오니 날씨도 확연히 달라져서 포근해 지는 때에 서울산악회와 합동산행으로 관악산을 향했는데 경부고속도로를 달려서 대전에서 산악회 삼총사인 이용응교수와 이장현 카페주인장,이재복 서예가를 태운 후 관악산입구에 닿으니 김성규서울회장님을 비롯한 많은 회원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따뜻하게 맞아주니 마침 꽃샘바람이 불어도 따뜻한 화기가 감돌았다.
관악산은 서울특별시와 경기도 안양시, 과천시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서 북한산, 남한산과 함께 서울 분지를 천혜의 요새로 만들면서 이중으로 둘러싼 자연의 방벽으로서 그 줄기는 과천의 청계산을 거쳐 수원의 광교산까지 이르는 한남정맥에서 북서쪽으로 마지막으로 우뚝 솟은 산이며 검붉은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 꼭대기가 마치 큰 바위기둥을 세워놓은 모습으로 보여서 “갓 모습의 산”이란 뜻의 “갓뫼”또는 관악이라고 하였으며 그 형상이 마치 관처럼 생겼기 때문에 붙여졌는데 처음의 산이름은 주위 산세에서 으뜸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산의 높이는 높지는 않으나 바위가 많은 암산으로서 예로부터 개성의 송악산, 파주의 감악산, 포천의 운악산, 가평의 화악산과 더불어 경기 5악으로 불렸던 산으로 산의 형세가 아기자기하고 빼어난 수십개의 봉우리와 바위를 비롯하여 오래된 나무와 온갖 풀이 어울려서 철따라 변하는 모습이 마치 금강산과 같다 하여 소금강 또는 서쪽에 있는 금강산이라 하여 서금강이라고도 하며 또 도심에서 가까워서 70여명의 산악회원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올라가니 산행객들도 많아서 복잡할 정도였으며 하마바위등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정감있고 여상하게 생겨서 지루한 감도 없고 군데군데 의자등 쉴곳도 마련해두고 있었다.
얼마간 오르니 벼슬(관)산답게 우리나라의 인재의 요람인 국립 서울대학교가 큰 골짜기에 자리하고 있어서 서울대 출신인 박용배, 윤혜철동기와 장남이 서울대 법대에 재학하고 있는 이정갑동기와의 사진 촬영에 홍정우 카페 운영자가 바쁠 정도였다.
올라갈수록 전망이 좋아져서 서울의 관악구일대와 과천, 안양의 시가지가 눈아래 아른거리고 원근 산세를 감상하면서 오르다가 정상밑 계곡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이응탁 서울동기회 산악회장이 준비한 푸짐한 김밥과 유과 그리고 과일(야콘)까지 먹은 후 연주대로 향했는데 연주대바위는 마치 하늘로 치솟은 바위같기도 하고 하늘에서 바위째 내려와 앉은것 같기도 한 우뚝한 암봉으로서 위용과 기개가 넘치는 바위였는데 원래는 의상대사가 수도하던 의상대였으며 고려조의 충신이었던 강득룡과 서린, 남을진등의 선비가 이 자리에서 고려의 수도였던 송도를 바라보며 두문동에서 순국한 72인의 충신열사와 망국 고려를 연모하며 통탄하였다 하여 “주인을 그리워하다”의 의미로 연주대로 불리워졌다고 한다.
달도 차면 기울듯이 500년 가까이 이어져오던 고려의 국운이 비색하여지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이래 명궁이자 무장출신인 이성계라는 영걸이 나타나서 수십년동안 홍건적과 왜구를 격퇴하면서 피폐해진 민심을 쓰다듬고 인망을 얻어서 조선을 개국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사건인 위화도 회군시에 팔도도통사(최영),좌군도통사(조민수)에 이은 세 번째 서열이었는데 조민수와 손을 잡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실권을 잡은 후 조민수까지 축출하고 중망을 모으면서 고려조 최후의 충신인 정몽주마져 이방원의 심복인 조영규에게 선죽교에서 격살당하자 조정의 대세는 완전히 기울어서 대부분의 신하들의 추대로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를 하였다.
역성혁명으로 개국을 하여 국호마져 조선으로 바꾼 이상 500년동안 번성하였던 왕씨세력의 개경을 떠나서 도성을 옮기기로 하였는바 남쪽의 계룡산 신도안(현재의 육본 터)도 저울질하다가 한반도의 중심인 한양에 자리를 잡았는데 왕궁터를 정하는데 정궁인 경복궁에서 보면 관악산은 풍수적으로 화산(불산)에 해당되어서 “관악산을 정면으로 하면 궁성을 위압하여 국가가 평안치 못하다”는 무학대사의 주장과 “남쪽에 한강이 있어서 무방하다”는 정도전의 주장이 양립되었다고 하니 “불산”이라는데는 같은 의견으로서 관악산의 불기운을 끊는다는 풍수설에 따라 서울의 모든 성문들이 가로인데 반하여 숭례문은 세로로 되어 있는데 이는 이 불의 산에서 옮겨 붙을 서울의 화재를 막기 위함이며 “예”는 오행의 ”화“가 되고 또 방위로 보면 남쪽에 해당되기 때문인데 말하자면 "崇”은 불꽃이 타오를 상형문자이기에 “숭례”는 세로로 세워야 불이 타 오를수 있고 또 타오른 불을 막아낼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이것으로도 모자라서 경복궁 정문에 화기를 진압하기 위하여 해태상을 세우고 숭례문 바로 앞에 “남지”라는 인공 연못을 팠는데 1960년대 이후 도시 개발로 인하여 남지가 매워졌기에 화마는 예상되었던 것이고 조선 개국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에도 건재하였고 또 현대의 6.25한국전쟁시에도 서울을 든든하게 지켰던 국보 1호 숭례문이 화마에 휩쓸려 처참하게 전소되었는데 610년을 버텨온 자랑스럽고 소중한 문화재가, 붉은 화염속에 스러져가는 숭례문을 보며 국민들의 마음은 새까맣게 타들어갔고 문화민족의 자존심에 씻을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중국의 자금성에는 소방부대가 있어서 항상 감시와 순찰을 한다고 하는데 명색이 우리나라의 국보1호라는 곳은 밤이 되면 서울역의 노숙자들이 몰려와서 술을 먹고 라면을 끓여 먹는 놀이터로 변하였고 또 문화재 당국자의 말이 “그렇게 홀랑 탈줄을 누가 알았겠느냐?”고 한다니 코메디같은 소리에 아연할 뿐인데 수백억원을 들여 똑같은 모습으로 복원하더라도 그것은 예전의 숭례문이 아니고 역사적 가치는 물론 추억조차 지니지 못한 21세기의 건축물일 뿐인데 민심을 이반한 정부에게는 항상 심판을 내리게 되어있으며 10년간의 좌파 정권이 물러나고 희망찬 신천지가 도래되었으니 민주공화 정부에서는 모든 국민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남탓을 하지 말고 모두 “내탓이요”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것이다.
연주대밑의 연주암은 대한 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이며 나한도량으로서 677년(신라 문무왕 17년)에 의상이 창건한 절로서 암자라기보다는 사찰에 가까울 정도로 컷으며 의상은 연주봉 절벽위에 의상대를 세우고 그 아래 골짜기에 절을 짓고 관악사라 이름을 지었는데 고려말까지는 거의 폐사되다시피 하다가 1392년(조선 태조1년) 이성계가 의상대와 관악사를 중수하고는 조선왕조의 번창을 비는 200일 기도를 한곳으로 세종조에 동생인 충녕(세종)에게 보위를 양보하고 전국을 떠돌던 양녕과 효령이 이곳에 머무르면서 관악사를 현위치로 옮기고 연주대의 이름을 따서 연주암으로 고쳐 불렀는데 관악사의 원래 위치에서는 왕궁이 바로 내려다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과천방면의 남태령도 보이는데 서울시와 경기도의 경계가 되는 고개이며 원래는 “여시(여우)고개”라고 불리워졌으나 어느해 정조가 생부인 사도세자의 융릉에 가는 길에 이 고개마루에서 잠시 쉬던중 수행하는 사란들에게 고개의 이름을 물었는데 이때 과천현 이방이 그런 요망스러운 이름을 감히 아뢸 수 없어 “삼남대로상에서 첫 번째로 맞이하는 큰고개로 남태령입니다”라고 고하여 이후부터 남태령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하산은 낙성대방면으로 하였는데 이곳은 낙성대에서 출생한 고려의 명장 강감찬과 관련한 전설이 서려있는 곳으로 그가 하늘의 벼락방망이를 없애려 산을 오르다 칡넝쿨에 걸려 넘어져 벼락방망이대신 이산의 칡을 모두 뿌리째 뽑아 없앴다는 이야기와 작은 체구의 강감찬이지만 몸무게가 몹시 무거워 바위를 오르는 곳마다 발자국이 깊게 패였다는 전설도 있으며 이 전설들을 뒷받침해주듯 관악산에서는 칡넝쿨이 없고 곳곳의 바위에 아기발자국같은 타원형 발자국도 보였다.
산악회원 모두 무사히 하산하여 서울대 입구의 동구나무식당에서 닭도리탕으로 회식을 하면서 여흥을 즐겼는데 대전의 이재복동기와 김정우본부회장은 피리(소금)와 섹스폰으로 산행의 피로를 씻겨 주었고 또 나사모(모교 선배인 봉계출신의 작곡가 고 나화랑(본명 조광환)을 사랑하는 모임)회원들도 산행에 참가하여 정태수가수는 나화랑 작곡의 “무너진 사랑탑”등을 열창하였는데 문화불모지인 김천에 앞으로 “나화랑 가요제”가 열려서 중요한 문화 콘텐츠로 자리 잡을 날이 곧 오리라 생각되었다.
시간관계상 오래 여흥을 즐길수 없어서 6시경 서울을 출발하였는데 31회 이광수선배님과 인천광역시에 근무하는 김홍종동문은 산악회의 열성이 돋보였고 김성규서울회장님과 이장구총무는 안내와 접대에 세심하게 배려를 해서 회식외에 “내려가면서 목을 축이라”면서 소주를 한박스나 버스에 실어줘서 음주가무를 즐기면서 내려왔는데 좋은 산을 다녀보니 갈수록 많이 다니고 싶고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첫댓글 이영규부회장님!정신없이 봤습니다.조민수-조영규.....까치도 조씨라 했자너유 ㅋㅋㅋ 실금실금 타던 숭례문이 그렇게 홀랑 탈 줄 나도 몰랐어요.ㅉㅉㅉ 그때 나두 기와를 깨어라고 전화 했어야 했는데 못한....내 탓 입니다....난 50사단 신병훈련 마치고 남태령 부대 배치후 돌아가는 삼각지의 육군본부서 군 생활 마감해 이번 산행 감회 깊었답니다. 역시 영규 부회장님 글입니다.
관악산의 유구한 역사성과 아름다움을 산행기를 읽고 다시 한번 절감합니다. 수차례 다니면서도 코스에 대한 정보에만 신경을 썼지 .... 본부/대구/대전에서 오신 많은 동문들과 가족들을 잘 환대하지 못하고 준비가 미흡했음을 죄송하게 생각 합니다. 뒤풀이 시에 나눈 31회. 32회 재경동문들이 합동으로 산행하는 문제도 구체적으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두들 건강하세유!!!!!
이영규부회장님!관악산에 대해 연주대의 명칭에관한 유래정도만알고있었는데 산행기와 더불어 역사적 지리적 고찰은 물론 경기5악에관한 저의 궁금증까지 해소하게되어 감사합니다 유려하고 사려깊은 글은우리 송설동문의 대표적인석학인듯합니다
이영규 부회장님은 학창시절 헌법을 외었답니다. 신산정무한글(산행기)들은 때가되면 산행자료로 만드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