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기독교는 원래 서양 종교가 아니다
마르코 폴로와 도마의 최후
도올 김용옥 | 제48호 | 20080209 입력
헤르몬산으로 올라가는 골란고원 길목에서 마이달 샴스(Majdal Shams)라는 작은 마을을 지나게 된다. 원래 시리아 땅이었는데 1967년 6일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점령지가 되었다. 드루즈(Druze)족이 사는 곳인데, 시장통 그들의 특별한 의상이 눈에 띈다. 메시아는 남자 가랑이에서 태어난다고 믿기 때문에 애가 풍 빠질 것을 염려하여 가랑이 밑에 포대가 형성되는 큰 바지를 입고 발목은 단단히 묶는다. 일설에 이들은 모세가 시내 광야에서 만난 현명한 장인 미디안 족장 이드로의 후예라고 한다. 이들은 불교·기독교·유대교·그리스철학이 융합된 이슬람을 신봉하는데 유일신과 7명의 선지자를 믿는다. [임진권 기자] | 기독교를 생각할 때 검토되지 않은 우리의 일반관념 중에서 가장 거대한 오류가 기독교를 그냥 맹목적으로 서양 종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양코배기 서양 사람들에 의하여 만들어졌으며 그들에 의하여 팽창되었으며 그들에 의하여 최근에 동방에 전도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나라 거개의 기독교인은 예수는 서양 사람이며 기독교신학은 서양 사람들이 만든 교리체계이며 따라서 기독교에 관한 한 서양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하여 말하는 모든 것이 정통이고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관념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이 생각하는 ‘서양(the West)’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이들은 우선 이탈리아나 프랑스·스페인·영국·독일 등등을 떠올릴 것이다. 역사적으로 말하면 라틴 웨스트(Latin West), 즉 서유럽 문화권을 두루뭉실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언컨대 초기 기독교운동은 라틴 웨스트와 전혀 관련이 없다.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공인함으로써 로마 중심의 가톨릭 정통성을 확립한 이후의 기독교를 가지고 기독교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는 팔레스타인 사람이며, 예루살렘에 특별한 예속감을 지니지 않았던 갈릴리 지역의 사상가요 운동가였다. 내가 1972년 대만대학에 유학 갔을 때 철학과 대학원 석사과정 학생으로 입학한 동기생 중 아주 특이한 인물이 있었다. 이름은 요아브 아리엘(Yoav Ariel)! 그는 히브리 바이블과 탈무드, 카발라 미스티시즘(Kabbala mysticism)에 정통한 학자였는데 텔아비브대학 철학과에서 그를 중국철학 전공 교수로 키우기 위해 대만대학으로 파견했던 것이다. 그는 중국말이나 한문을 아직 습득하지 못했기에 영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나와 단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정직·충성·효·박애·희생, 그리고 유일신이 드루즈 삶의 원칙이다. 첩 제도, 담배, 술, 돼지고기, 드루즈족 외혼을 금한다. 이들은 매우 점잖고 개방적이며 친절했다. 시리아 문명의 깊이를 전해준다. | | 나의 대만대학 유학 생활이란 아이러니컬하게도 중국철학을 공독하는 본업보다 이 유대인 이방인에게 중국철학을 가르쳐주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그것은 심오한 사상투쟁의 과정이었다. 그가 유대교 전통에 관하여 가지고 있는 모든 관념과 중국철학적 가치를 편견 없이 습득한다고 하는 노력 사이에는 태양열보다 더 뜨거운 마찰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와 나는 만나기만 하면 싸웠다. 유대인은 성격이 한국인처럼 직선적이고 활달하고 다혈질이다. 그리고 말 습관이 에두를 줄을 모른다. 우리들의 충돌은 가관이었다. 그러나 우리 둘 사이에 존속했던 첨예한 사상대결의 이면에는 진리를 향한 청춘의 열망이 불타고 있었다. 우리는 위대한 우정을 나누었다. 기실 오늘날 내가 이렇게 도마복음서 주해를 집필하게 된 이면에는 이러한 20대의 치열한 사상역정이 뚜렷한 여로를 그리고 있다. 그런데 내가 이 친구를 처음 만났을 때 들은 놀라운 이야기가 있다. 난 그를 서양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왜 서양인인 당신이 중국철학을 공부하겠다고 대만까지 와 날 괴롭히느냐고 반문했을 때 그는 매우 명쾌하게 답변했다.
“I am an Asian.(나는 아시아사람이오.)”
예수는 아시아 사람이다. 아시아대륙의 서단 갈릴리에서 태어나고 활동한 사람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활약한 지역도 코엘레 시리아(Coele Syria·현 레바논의 알 비카[al Biqa]지역)이고, 바울이 초대 교회를 개척한 곳도 소아시아 지역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국가종교로서 최초의 공인을 얻은 곳도 서구의 어느 곳이 아닌 동방의 나라 에데사(Edessa)였다.
우리에게 친숙한 고전,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의 『동방견문록』에 바로 도마복음서의 저자이자 예수의 쌍둥이 형제로 알려진 도마의 최후를 전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는 17년간의 중국 체류를 끝내고 베네치아로 돌아오는 길에 남인도 서해안 말라바르 지방(the Malabar Coast)의 한 작은 마을에서 성 도마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 지역에 내려오는 도마의 이적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도마가 어떻게 죽었는지 듣게 된다. 폴로는 말한다: “기적에 관해서는 이상으로 충분히 말하였으므로 다음에는 성 도마가 살해된 광경을 그곳 사람들로부터 전승되어 온 대로 이야기할까 한다.”
도마는 어느 날 숲 속에 있는 암자에서 밖으로 나와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지방은 공작새가 많이 사는 곳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했다. 그때도 도마 주변으로 공작새가 떼 지어 날아다니고 있었다. 도마가 열중하여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가비족의 사냥꾼이 도마 주변으로 떼 지어 날고 있는 공작을 잡으려고 화살을 당겼다.
가비족 사람은 그곳에서 도마가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화살이 공작에 맞 았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그 화살은 도마의 오른쪽 겨드랑이를 관통했다. 화살을 맞고도 도마는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는 그런 가운데 평온히 잠들었다.
전해 오는 바에 따르면 도마는 오순절 사건 이후 사도들이 세계 각지로 책임선교를 맡아 떠나는데, 인도로 배정되었다고 한다. 가는 길이 너무도 험난하여 병약을 구실로 이를 피하려 하자, 예수가 꿈에 나타나 “도마야! 두려워 말라. 나의 축복이 너를 지켜줄 것이다. 너는 인도에 가 복음을 전해야 한다” 하고 도마를 고무했다. 때마침 인도 서북부 아라코시아(Arachosia)와 인더스강 상류 지역을 통치하고 있던 곤다포루스(Gondaphorus)왕이 건축공을 물색하기 위하여 파견한 상인 압바네스(Abbanes)를 예루살렘에서 만난다. 도마는 성령의 인도를 받아들여 상인 압바네스와 함께 인도로 가 왕의 부탁으로 궁전을 짓기로 한다. 그러나 도마는 받은 건축비로 궁전을 짓지 않고 불쌍한 과부와 고아를 구제하는 일에 다 써 버린다. 왕이 대로 운운.
『이방민족지』에 따르면 도마는 예수 승천 2년 후에 전도 사명을 띠고 인도로 가던 중 에데사와 파르티아(Parthia), 부카라(Bukhara), 박트리아(Bactria)에 들러 기독교를 전했다. 도마가 인도에 온 것은 AD 52년이며 그가 죽은 것은 AD 72년으로 사료되고 있다. 그러니까 도마가 에데사에서 기독교를 전파한 것은 AD 52년 이전의 사건이 된다. 에데사는 헬라 문명권과 교류가 있었지만 시리아 문화권의 센터였으며 시리아어 문학의 전통을 유지했다.
에데사에 첫 동방교회가 건립되고 타티안(Tatian, 110~180), 바르데산(Bardesane, 154~222), 바루트(Barut) 등 탁월한 기독교 학자들이 나타나 초기 기독교 교리와 복음을 정리했다. 아브가르왕이 박해받고 있는 예수에게 안식처를 제공해 주겠다고 한 약속은 결국 훗날 신앙적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 에데사로 모여들어 기독교를 동방으로, 전 세계로 전하게 되는 구심점이 된 것이다.
에데사의 타티안이 바로 최초의 4복음서 체제인 『디아테사론』(Diatessaron)의 편집자다. 바르데산은 타티안의 시리아어로 된 『디아테사론』을 후세에 전했다. 그리고 AD 144년, 구약의 하나님과 단절을 선언하고 구약의 전면적 폐기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로마교회에서 파문당한 마르시온(Marcion, ?~160)의 신봉자들이 세운 마르시온교회(Marcionism)의 활동무대가 바로 에데사였다. 그리고 에데사는 마니교(Manichaeism)의 주요한 활동지였다.
바울이 기독교를 소아시아와 희랍 지역에 전파하였다는 이야기는 신빙성 있게 들리지만, 동시대에 도마가 기독교를 에데사와 인도에 전파하였다는 이야기를 하나의 전설로 취급해 버리는 우리의 사고방식의 저변에는 자료 빈곤 이외에도 기독교는 서방 종교라는 선입견이 짙게 깔려 있다. 이제 우리는 기독교의 역사와 말씀 전승에 새롭게 아시아적 사유를 복원시켜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아시아 대륙문화의 유기적 일부로 재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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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예수와 페니키아문명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도올 김용옥 | 제49호 | 20080216 입력
내가 바라보고 있는 저 평화로운 동산이 예수가 산상수훈을 행한 곳이다. “이제 우는 그대들이여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그 동산 언덕 중턱에 산상수훈교회가 자리잡고 있다. 저 산 너머에 갈릴리바다가 있고 그 주변으로 가버나움, 벳새다, 고라신이 있다. [임진권 기자] | 독자들은 누구든지 예수의 산상수훈(the Sermon on the Mount)을 기억할 것이다. 그 산은 갈릴리바다(호수) 북단에 있는 가버나움 부근 타브가(Tabga) 지역에 있다. 이 자그만 동산에서 예수는 “가난한 그대들이여!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라”고 외쳤던 것이다. “주린 그대들, 부드러운 그대들, 자비를 베푸는 그대들, 마음이 깨끗한 그대들, 평화를 만드는 그대들, 나로 인하여 핍박받는 그대들이여! 그대들이야말로 천국의 지복(Beatitudes)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외쳤던 것이다. 굶주린 자가 배부름을 얻고, 우는 자가 기쁨으로 충만케 되리라는 예수의 말씀은 소외된 민중들에게 “기쁜 소식” 즉 복음(유앙겔리온)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런데 이 기쁜 소식을 들으러 온 군중들은 결코 갈릴리의 헐벗은 농민들만은 아니었다.
이 산상수훈의 핵심은 Q복음서에 들어가 있으므로 예수운동의 리얼한 정황을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의 설교를 들으러 갈릴리바다 북단에 몰려든 사람들을 누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산상수훈교회(Church of the Beatitudes)는 이탈리아의 건축가 안토니오 발루치의 설계로 1938년에 완공되었다. 8복설교를 상징하여 8각의 돔이 있다. 로마 가톨릭 프란시스칸 신부들이 이 교회를 주지하고 있다. | | “제자의 허다한 무리와 또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얻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눅 6:17). 여기 “제자의 허다한 무리”(a great crowd of his disciples)라는 표현으로 알 수 있듯이 예수의 제자는 결코 12명에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12명의 제자라는 것은 불트만이 주장하는 바 후대 초기교회의 종말론적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다. 예수의 재림, 혹은 최후의 심판 이후 12제자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다스리게 되리라는 유대화파 교인들의 선민의식을 반영한 것이다(눅 22:30, 마 19:28).
문제는 그 다음의 군중에 대한 설명에 있다.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및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이라는 표현은 매우 상이한 두 문화권 사이에 예수의 갈릴리 선교지역이 완충지대로서 끼여 있었던 지정학적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이란 갈릴리의 입장에서 보면 남방의 유대문명(Jewish civilization)을 가리킨다. 그러나 “두로(Tyre)와 시돈(Sidon)”은 갈릴리의 북방, 지중해 해안으로 펼쳐져 있는 페니키아문명(Phoenician civilization)을 가리킨다. 두로와 시돈이야말로 비블로스(Byblos, Gebal, Jubayl), 베이루트(Beirut, Berot, Berytos)와 함께 페니키아문명의 4대 중심 도시였다.
우리는 팔레스타인문명을 생각할 때 이스라엘 중심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에 젖어 있다. 사실 그런 관념은 우리가 미국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에 생겨난 편견일 수도 있다. 아니, 인류문명의 4대 발상지라는 메소포타미아를 생각할 때도 우리는 신·구약성서 중심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바빌론문명이다. 그리고 바빌론문명과 더불어 생각해야만 하는 문명이 페니키아문명이다. 그러니까 현재 국가 개념으로 생각하면 이라크·시리아·레바논을 연결하는 비옥한 초승달(Fertile Crescent)지대야말로 중동 전체 문명의 핵심적 주축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갈릴리는 그 아이덴티티가 남방의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대지역보다는 이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개방적 선진문명에 더 근접해 있었고 더 동화되어 있었다. 당시 두로와 시돈의 찬란한 역사에 예루살렘을 비교한다는 것은 우리의 상식적 관념의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다. 갈릴리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예루살렘은 변방의 촌락에 지나지 않았다. 성전 하나 덩그렁 있는 촌구석으로 비쳐졌을 가능성도 있다. 다음의 예수의 말씀(로기온 자료)을 한번 되씹어보자!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삶의 방식을 바꾸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마 11:21~22, 눅 10:13~14, Q31).
여기 예수의 저주의 언사 속에 나오는 고라신(Chorazin, Kirbet Keraze)과 벳새다(Bethsaida)는 예수가 활동한 가버나움 부근의 도시로서 갈릴리바다 북부의 부촌들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를 배척하는 이 동네들을 향하여 저주를 말하면서 상대적으로 두로와 시돈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의 관념에서 본다면 두로와 시돈은 저주스러운 이방도시요, 바알신앙의 본거지며, 역사적으로는 북이스라엘의 최전성기를 구가한 오므리왕조의 왕 아합(King Ahab)의 부인 이세벨 여왕(Queen Jezebel)의 고향이었다(왕상 16:31~33). 이세벨은 사마리아에 바알산당을 짓고 바알제단을 세워 선지자 엘리야와 대결한다. 결국 엘리야는 바알의 예언자 450명을 기손 시내(the Kishon Valley)에서 도륙하는 참극을 벌인다.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쓴다”는 것은 낙타 털로 짠 거친 옷을 맨살 위에 입고 재를 머리에 부어 누추한 모습을 만드는 유대인의 관습을 말하는데 이것은 참회를 상징하는 것이다.(욘 3:5~6).
예수는 두로와 시돈의 사람들이야말로 자기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훨씬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참회하고 삶의 자세를 바꾸었을 것이라고 희망과 기대에 찬 언사를 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말한다. 심판의 날에는 두로와 시돈이 오히려 유대인들의 도시보다 더 축복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너무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러한 성서 구절들을 역사적 정황과 단절시켜 간과하고만 있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의 입장에서 이 도시들을 감지하는 느낌을 말한다면 주변의 고라신과 벳새다가 충청도의 작은 도시에 비유된다면 두로와 시돈은 뉴욕 맨해튼의 느낌이었다. 당시 지중해 연안의 최대 도시였다. 지금도 두로에 가면 예수와 동시대의 히포드롬(대전차 경기장)이 남아있는데 길이 480m에 달하는 세계 최대 규모다.
페니키아문명은 상업과 무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에 도시국가들의 연합체 형식을 견지했으며 따라서 제국문명의 건설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오랫동안 서구문명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집트 기자의 대피라미드를 건립한 제4왕조(BC 2613~2494) 시절부터 이미 왕성한 무역을 통하여 이집트문명을 흡수하였고, 아카디아, 힛타이트, 필리스틴,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의 지배를 차례로 경험하면서 그들의 문명을 배합하였다. 알렉산더 대왕의 정벌 때도 두로는 극렬하게 저항하였다. 알렉산더 대왕 사후 프톨레미왕조에 속했다가 셀레우코스왕조에 병합되었으며 BC 64년에는 폼페이우스에 의하여 로마제국에 복속되어 시리아주로 편입된다. 그러나 두로와 시돈은 상인들에 의하여 왕권이 제약되는 형태의 자치왕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페니키아문명은 희랍문명보다도 훨씬 오래된 고문명이며 BC 15세기에 이미 22글자의 알파벳을 발명하였고 그것이 희랍문자의 모체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근세 서방 알파벳의 조형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사실 서양문명의 시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희랍문명보다는 페니키아문명에 도달케 된다. 예수는 이 페니키아문명의 역사적 배경과 개방적 성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예수가 말한 아람어(Aramaic)도 페니키아어군에 속하는 것이다. “페니키아”라는 말 자체가 후대에 희랍인들이 명명한 것이며, 그들 자신은 가나안(Canaanites, 아카디아말로는 Kinahna)이라고 불렀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이라고 동경했던 그 가나안이 페니키아의 별칭이었다. 그러니까 같은 페니키아·시리아문명에 속한 에데사왕국의 아브가르왕이 갈릴리의 예수를 초청했다는 이야기도 결코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의 쌍둥이 형제며 제자인 도마는 예수의 사후 에데사왕국으로 갔고 거기서 도마기독교를 정착시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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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상 아래 개들도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 자신의 이방선교
도올 김용옥 | 제50호 | 20080224 입력
두로는 원래 섬이었는데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그리고 페니키아 함대가 정박해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에 강력하게 반발하여 7개월을 저항한다.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은 육지에서 두로섬까지 방파제를 쌓아 두로를 함락시킨다. 두로가 함락되자 시돈은 저항 없이 알렉산더 대왕의 통치를 환영한다. 그리고 페르시아 지배에 놀아난 왕을 바꾸어 줄 것을 요청한다. 알렉산더 대왕은 그의 친구 헤파이스티온(Hephaistion)에게 그 일을 위임한다. 헤파이스티온이 새로 세운 시돈의 왕이 아브달로니모스(Abdalonymos)이다. 위의 대리석 석관은 이 시돈의 왕 아브달로니모스를 위하여 BC 325~311 사이에 제작되었다. [임진권 기 | 예수는 페니키아문명권에 직접 갔는가? 두로(Tyre)와 시돈(Sidon)에 간 적이 있는가? 이러한 나의 질문, 그 자체를 많은 독자가 낯설게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수의 삶을 기록한 복음서에 명료하게 주어져 있다. 자! 마가복음 제7장을 펼쳐 보라. 개역한글판을 정정함이 없이 그대로 여기 인용하겠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또 하나의 시돈의 석관. 이스탄불 고고학박물관 소장품. BC 4세기 중엽. 고인이 된 주인의 영면을 애통해하는 18명의 여인이 석관 삥 둘러 조각되어 있는데, 석관 그 자체가 이오니아식 석주회랑의 그리스 신전 모습이다. 그 석주 사이사이로 여인들이 서서 우는데 그 표현이 우아하기 그지없다. 예수보다 4세기나 앞선 이 페니키아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그 문명의 찬란한 영화를 엿볼 수 있다. 바로 예수에게 나타난 “수로보니게” 여인이 이 중 한 여인과도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 |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 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예수께서 다시 두로 지경에서 나와, 시돈을 지나고, 데가볼리 지경을 통과하여, 갈릴리 호수에 이르시매, …(막 7:24~31).
지금 4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성립한 마가복음서의 저자가 예수의 행적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는 지리적 표상은 그 스케일이 거대하다. 예수는 분명 맨발로 걸어다녔을 텐데, 그러기에는 한 큐에 움직이기 어려운 거대한 지역의 여정을 한순간에 지나치듯이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단화(短話)의 시작구인 “거기를 떠나”의 “거기”는 갈릴리 호수 북단의 서쪽에 위치한 게네사렛(Gennesaret)이다. 가버나움에서 갈릴리 해변을 따라 서남쪽으로 15리 정도 떨어져 있다. 예수의 여정은 일단 이 게네사렛을 출발하여 서북쪽으로 약 200리가량 가면 나오는 지중해 해변의 항구도시 두로에 도착했다. 거기서 한 소녀의 치유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지중해 해변을 따라 한 150리를 걸어 올라가 당시 지중해 연안의 가장 중심적 역할을 했던 화려한 항구도시 시돈에 도착한다.
시돈은 페르시아제국의 함대가 있었던 도시였으며 세계에서 가장 선진의 유리제조업이 발달한 도시였다. 아마도 우리나라 경주 왕릉에서 출토되는 유리병의 족보도 이 시돈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예수는 다시 이 시돈에서 내륙지방으로 내려오면서 골란 고원을 가로지르고 트랜스요르단지역의 데가볼리(데카폴리스·Decapolis)를 경유하여 다시 갈릴리 바다를 서쪽으로 에워싸고 북단의 가버나움 지역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우리나라 지형으로 말하자면 서울에서 출발하여 해주항으로 갔다가, 다시 해변 따라 평양 부근의 남포항까지 북상하였다가, 다시 내륙지방으로 태백산맥을 건너 금강산으로 가서 속초·강릉·삼척까지 내려갔다가, 강원도·경기도를 통과하여 서울로 돌아오는 여정의 느낌인 것이다. 지금의 국가 개념으로 말해도 이스라엘 북부에서 레바논·시리아·요르단을 거쳐 다시 갈릴리 북단으로 돌아와야 한다.
불트만은 이 단화가 Q자료에 수록된 가버나움 백부장의 종을 치유하는 설화와 함께 원격치유(Fernheilung)를 주제로 한 전형적 전기적 아포프테그마(Apophthegma)에 속하는 문학장르이며, 아포프테그마에 있어서는 전혀 시간·공간을 나타내는 보도가 리얼한 상황에 기초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따라서 예수의 “북방여행”은 추리된 공상(phantasy)이라고 단정한다(『공관복음서전승사』, 허혁 역, p.75). 불트만의 이러한 주장에 일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마가의 기술을 하나의 픽션으로 간주한다 하더라도 마가 시대 사람들의 예수 인식은 이미 예수의 활동영역이 갈릴리지역과 페니키아문명을 연결하는 광범위한 북부지역공동체를 전제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최근의 스칼라십은 예수운동이 당대에 이미 페니키아문명권에까지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숙지한다.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다”라는 것은 예수가 자기를 잘 아는 갈릴리 가버나움 지역에서는 편하게 쉴 수가 없으므로 조용히 지내고 싶을 때에는 타국의 대도시로 잠입하는 관행이 평소 있었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숨길 수 없더라”라는 것은 이미 이방의 대도시에까지 예수의 명성이 자자했다는 현실적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이에 두로에 나타난 여인은 누구였던가?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그 여자는 문화적 소양으로는 국제적 감각의 헬라인이었으나, 핏줄로 말하면 “수로보니게” 사람이라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개역판의 발음 표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눈치를 못 채고 간과해버리지만, “수로보니게(Syrophoenician)”란 “시리아 계열의 페니키아인”이란 뜻이다. 페니키아는 아프리카 북부 카르타고(Carthage) 지역에 식민지를 개척했다. 그러니까 제2차 포에니전쟁(BC 218~201)에서 코끼리부대까지 휘몰아 알프스산맥을 넘어 로마로 진군하여 로마를 공포의 도가니로 빠뜨린 한니발 장군(Hannibal, BC 247~c.181)이 바로 페니키아인이었다. 이 아프리카 북부지역의 페니키아 사람들을 흔히 리비오페니키아인(the Libyo-Phoenicians)이라고 불렀는데, “수로보니게”란 이에 대하여 시리아계 페니키아인을 지칭한 것이다.
이 시리아페니키아 여인과 예수의 대화는 아람어로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지만, 예수가 이 여인과 직접 희랍어로 소통했을 가능성도 배제되지 않는다. 예수는 이미 당시의 희랍문명에 깊은 조예가 있는 인물로서 재조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여인은 예수에게 귀신 들려 집 병상에 누워 있는 딸의 치유를 호소한다. 그러나 예 수의 대답은 냉혹하다: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기 “자녀”와 “개들”의 관계를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로 명료하게 규정해버리는 것은 문제가 있으나, 하여튼 예수는 인정머리 없게 자기에게 구원의 손길을 요청하는 타국의 교양 있는 여인을 “개새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한정된 공동식사 테이블이 전제되어 있고 그곳에서 사람들이 앉아 먹을 수 있는 음식의 양도 결정되어 있다. 이것을 집에서 키우는 개새끼들에게 던져 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여기 “개새끼(kynarioi)”는 들판의 야생 늑대가 아니라 집에서 식탁 주변을 맴도는 강아지(puppies)를 지칭한다. 따라서 이 표현은 알레고리가 아닌 직유(Vergleich)이다.
이러한 냉혹한 예수의 답변에 이 교양 있는 페니키아 여인은 예수의 논리를 이용하여 예수를 제압한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의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페니키아 여인의 논리는 강렬한 자기주장을 나타내면서도 동시에 유머와 위트와 신념(faith)과 겸손(humility)을 은은하게 표현하고 있다. 예수의 말씀 속에도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라는 표현은 이미 유대인의 구원의 특권에 대한 시간적 한정성을 암시하고 있다. “먼저” 먹게는 하겠지만, 그들이 먹기를 거부할 때는 그 구원의 밥상은 이방인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패배를 솔직히 시인한다: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예수는 기적적 치유의 행위를 하지 않았다. 오직 말씀으로 원격치유를 행한 것이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오직 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이었다. 그 믿음이 좁은 예수운동의 동아리나 유대인의 민족의식에 갇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미 이방인에게 개방되어 있었다는 맥락에서 예수는 이미 세계인의 예수였다. 이방선교가 사도 바울의 전유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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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지브란과 견유 예수
샌들과 속옷,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
도올 김용옥 | 제51호 | 20080302 입력
‘거룩한 산’ 헤르몬을 바라보다. 2814m. 만년설로 뒤덮인 이 산은 요단강의 시원을 이룬다. 장엄한 헤르몬산은 이스라엘 정복의 북쪽 경계였다(신 3:8). 안티 레바논 산맥의 꼭대기로 동북, 서남으로 30㎞ 뻗어있다. 시돈 사람들은 이 헤르몬산을 시룐이라 불렀고, 아모리 사람들은 스닐이라 불렀다(신 3:9). 이 산은 가나안의 신 바알(Baal), 희랍신 판(Pan)과도 관련 있다. 많은 사람이 예수가 변모한 ‘높은 산’(막 9:2)도 헤르몬산이라고 추정한다. [임진권 기자] | 사랑은 소유하지도, 소유되어지지도 않는 것. 사랑은 다만 사랑으로 충분할 뿐. 사랑할 때 그대들은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되리라, “신이 나의 마음속에 계시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라. “나는 신의 마음속에 있노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에 속박되지는 말라. 차라리 사랑하는 그대들 영혼의 기슭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 가슴을 주라, 허나 간직하지는 말라. 오직 삶의 수고로움만이 그대들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나니. 함께 서 있으라, 허나 너무 가까이 서있지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거늘. 너는 진실로 자유로우리라. 너의 낮이 근심으로 가득차고, 너의 밤이 욕망과 슬픔으로 범벅이 되는 바로 그때에. 이런 것들이 너를 칭칭 감으나 네 스스로 발가벗고 사슬을 끊고, 이들 위로 솟아오를 그때에 너는 진실로 자유로우리. 너는 네 몸뚱이와 하나가 되었을 때 선하다. 그러나 네가 네 몸뚱이와 하나가 되어있지 않더라도 악한 것은 아니다. 내분(內分)된 집이라 하여 그것은 도둑의 소굴은 아니다. 오직 내분된 집일 뿐. 기도란 게 무엇이뇨? 생명의 하늘 속에 너 스스로를 활짝 펴는 것이 아니고 또 무엇이뇨? 허공 속에 너의 어둠을 쏟아 버리는 것이 너의 안락이라면, 너의 가슴속에 피어오르는 새벽빛을 쏟아버리는 것 또한 너의 기쁨이리라. 죽음의 비밀을 알고 싶어 하느뇨? 삶의 한가운데서 죽음을 찾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것을 찾아낼 수 있단 말가? 낮에는 멀고 밤에만 뜨는 올빼미는 결코 빛의 신비를 벗길 수 없나니, 그대 진실로 죽음의 혼을 보고자 한다면 생명의 몸을 향해 너의 가슴을 활짝 열라! 삶과 죽음은 한몸, 강과 바다가 하나이듯이. 희망과 욕망의 심연 속에 저 너머 세상의 고요한 깨달음이 조용히 출렁이도다. 알미트라는 말이 없었다. 안개 속으로 배가 사라질 때까지 응시하면서. 그리고 사람들 모두 흩어질 때까지, 그녀는 홀로 방파제 위에 서서, 그녀의 가슴속에 새겨진 그의 말들을 되새겼다. “잠깐, 바람 위에 일순의 휴식이 오면 또 한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
함석헌 선생께서 천안의 씨알농장에서 한 손에 호미를 들고 밭이랑에 웅크린 호기심 어린 소년 도올에게 들려주시곤 했던 이 주옥같은 말들. 이 칼릴 지브란(Kahlil Gibran, 1883~1931)의 예언자적 외침을 회상할 때, 우리는 예수의 말같이도, 석가의 말같이도 들리는 이 언어들의 본류를 더듬지 않으면 안 된다. 칼릴 지브란은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두로, 시돈 저 위켠 만년설로 덮여 있는 레바논산 기슭의 아름다운 소읍, 베차리(Bsharri)에서 태어났다. 그야말로 “수로보니게 여인”(막 7:26)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지브란의 엄마는 레바논 마론파 신부의 딸이었다.(마론파 기독교의 신부는 초대교회의 전통에 따라 결혼한다.) 그는 뉴욕에 정착하여 레바논의 동포들과 문학동맹(The Pen League)을 결성하면서 『예언자』의 언어를 쏟아내었지만, 그의 내면적 초월의 자유와 저항의 세계 속에는 페니키아문명의 오랜 전통이 면면히 흐르고 있는 것이다.
지브란의 언어와 도마복음서의 언어 사이에서 어떤 공통된 흐름을 조망하는 우리의 시각 속에는 역사적 예수의 실존을 지배하는 아시아적 사유의 진면목에 대한 직시가 있어야 한다. 헬라적 사유전통이 알렉산더대왕의 동정(東征)을 계기로, 우주론과 인식론에서 인간실존의 제문제를 탐색하는 인생론으로 사유패턴이 근원적으로 전환하는 그 이면에는, 제국문명의 정치적 분위기나 폴리스의 정체성 상실과 구성원의 자아상실의 허탈감을 운운하기 이전에, 아시아적 사유의 서점(西漸)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 대변하는 고전시대(Hellenic Age)의 치열한 논리적 탐색이, 헬레니즘 시기(Hellenistic Age)로 들어서면서 스토아학파(Stoicism), 에피쿠로스학파(Epicurianism), 견유학파(Cynicism), 회의학파(Skepticism) 등 제사조가 추구하는 인생의 궁극적 행복이나 평정과도 같은 비근한 주제로 자리를 양보하는 문명의 전환, 바로 그 전환을 가능케 한 것이 아시아적 사유였다.
헤르몬산 기슭의 드루즈족 주민. 샌들과 지팡이가 인상적이다. | |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전륜성왕이라 불리는 아쇼카왕(King Ashoka, BC 265~238, 혹은 BC 273~232 재위)이 서방세계에 대규모의 불교 포교단을 파견한 사실도 전설로서만 치부해 버릴 수는 없다. 다르마(Dharma, 佛法)에 의한 덕치주의를 표방한 아쇼카왕은 스리랑카와 미얀마, 시리아, 이집트, 마케도니아, 그리스, 북아프리카 등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의 세 대륙에 불교 포교단을 공식 파견하여 불교를 세계종교로 격상시켰던 것이다(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 p.468).
서양철학사에서 알렉산더대왕 이전의 고대 우주론과 인식론에는 비중을 크게 두는 반면, 헬레니즘 시대의 인생철학적 신사조를 소략하게 다루는 경향성의 배면에는 아시아적 사유에 대한 편견이 자리 잡고 있을 수도 있다. 헬레니즘 시대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추구한 것은 지식이 아닌 지혜였고, 우주의 원질에 대한 통찰이기보다는 인생의 아타락시아(ataraxia)의 체득이었다. ‘아타락시아’란 과도한 쾌락이나 고통 그 어느 것에 의하여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정이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욕망으로부터의 해탈(解脫, moksa)이었다.
이 해탈을 가장 철저하게 구현하려고 하였던 사람들이 견유학파였다. ‘견유(犬儒)’란 문자 그대로 ‘개처럼 사는 지식인’이라는 뜻이다. 영어로 ‘시닉(cynic)’이라고 부르는 것도 개를 뜻하는 희랍어 ‘퀴온’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들은 모든 전통과 문명을 거부했다. 기존의 종교와 도덕, 의복, 주거, 음식, 일상예절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들의 삶의 수단은 ‘걸식(begging)’이었고 끊임없는 무소유의 방랑이었다.
알렉산더대왕은 절구통 속에서만 생활하던 견유학파의 대가 디오게네스(Diogenes of Sinope, BC 412~323)를 방문했다. 알렉산더는 절구통 속의 그를 바라보며 말한다: “여기까지 당신을 찾아왔으니 내가 당신을 위하여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이오?” 이에 디오게네스는 대답한다: “햇빛을 가리지 마시오.”(Please stand out of my light.) 이것은 권력에 대한 용감한 도전이나 무시만을 과시하는 사건은 아니다. 알렉산더대왕이 추구하는 거대한 제국건설의 영욕과 무관하게 햇빛만 있어도 평온하게 살 수 있다는 디오게네스의 항변은 기존의 모든 문명적 가치에 대한 사유의 전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인간에게 요구하면서 동시에 “나는 현존하는 모든 가치를 재주조한다.(I recoin current values.)”고 외쳤던 것이다. 그는 천상에서 불을 훔쳐와 인간세를 인위화시키고 복잡하게 만든 프로메테우스를 저주했다. 니체가 주장하는 가치의 전도는 디오게네스의 현대적 표현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야말로 디오게네스의 제자였다는 역사적 아이러니 또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예수는 견유학파적 리얼리즘을 철저히 실천한 사람이었다. 예수는 그의 운동에 가담하는 제자들에게 돈을 담은 전대는 물론 지팡이나 가죽샌들도, 그리고 속옷조차도 지니지 못하게 했다(마 10:9~10, 눅 9:3, 10:4). 지나치는 사람들과 문안인사조차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견유학파의 덕목은 최소한의 질박한 삶(simplicity)이었고, 모든 세속적 가치에 대한 절제(self-control)였다. 역사적 예수를 가장 잘 조명한 신학자 크로상(John Dominic Crossan)은 예수를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규정한다: “역사적 예수는 갈릴리의 견유(cynic)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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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에데사의 도마행전
예수가 편지를 쓰다
도올 김용옥 | 제52호 | 20080309 입력
히브리대학 교정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희랍정교회 신부. 이 신부는 히브리대학에서 구약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는데, 기독교의 대세를 아르메니아정교회, 희랍정교회, 가톨릭으로 삼분하였다. 왜 프로테스탄티즘은 포함시키지 않느냐고 묻자,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톨릭 집안 내의 문제일 뿐이라고 일축하였다. 그리고 가톨릭은 후대의 이방문화 전통이 마구 삽입된 비정통의 기독교집단이며, 초기 기독교 사도들의 전승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것은 아르메니아·희랍정교회일 뿐이라고 못 박았다. 여기 감람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이 예루살렘에 야고보의 교회가 있었을까?
히브리대학 교정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희랍정교회 신부. 이 신부는 히브리대학에서 구약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는데, 기독교의 대세를 아르메니아정교회, 희랍정교회, 가톨릭으로 삼분하였다. 왜 프로테스탄티즘은 포함시키지 않느냐고 묻자, 그것은 어디까지나 가톨릭 집안 내의 문제일 뿐이라고 일축하였다. 그리고 가톨릭은 후대의 이방문화 전통이 마구 삽입된 비정통의 기독교집단이며, 초기 기독교 사도들의 전승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 것은 아르메니아·희랍정교회일 뿐이라고 못 박았다. 여기 감람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이 예루살렘에 야고보의 교회가 있었을까? [임진권 기자] | 오스로외네 왕국 에데사를 중심으로 일찍이 도마기독교(Thomas Christianity)의 전통이 성립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후대에 대중적 인기를 얻은 마태기독교나 베드로기독교와는 다른 또 하나의 전통인, 야고보기독교나 도마기독교의 전통이 에데사와 관련돼 보존되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야고보나 도마는 모두 예수의 친형제라는 가설의 진위를 떠나 역사적 예수와 보다 밀착된 어떤 로기온 전승을 지킨 그룹의 상징이었다. 흔히 이들은 예루살렘 중심으로 활약했지만 어떠한 계기로 인하여 시리아 동북 지역의 에데사로 그 거점을 옮기게 되었다.
재미있게도, 도마복음서 속에서는 야고보와 도마는 예수말씀의 정통적 지킴이로 등장한다. 그리고 살로메(Salome)와 마리아(Mary)는 진실한 제자를 대변하며, 바른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베드로와 마태, 그리고 집단적인 용례로서의 ‘제자들(the disciples)’은 항상 어리석은 질문을 던지며, 도마 전승의 사람들이 배척하는 예수그룹을 대표한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전쟁이 일어나면서 AD 70년 전후로 도마기독교 사람들이 그들을 지원하는 안전한 북방의 에데사로 거점을 옮겼다는 가설은 쉽게 이해가 간다. 그러나 4세기 초의 교회사가 유세비우스는 이미 예수 당대에 에데사의 왕 아브가르와 역사적 예수 본인 사이에 구체적 서한의 왕래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 아브가르왕은 질병과 정신적 고통으로 시달리고 있었으며, 예수가 행하는 기적을 소문으로 익히 알고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쳤던 것이다.
유세비우스는 에데사의 문서 보존 창고에서 아브가르왕과 예수 사이에 오간 편지를 기록한 시리아문서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고 자랑하면서, 그것을 시리아어로부터 다음과 같이 희랍어로 번역해놓았다. 전령(courier) 아나니아스(Ananias)를 통해 예수에게 보내진 아브가르의 편지는 다음과 같다.
“나 아브가르 우카마, 에데사의 군주, 예루살렘 지역에 나타난 훌륭한 구세주 예수에게 문안하오. 나는 당신과 당신의 치료에 관하여, 특별히 마약(pharmakn)이나 약초(botann)를 쓰지 않고 잘 고친다는 이야기를 들어왔소. 더욱이 장님에게 시력을 회복시키고, 절름발이가 걷도록 하며, 문둥이를 깨끗이 하고, 더러운 악령과 악마를 몰아내며, 고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고쳐주며, 심지어 죽은 자를 다시 일으키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는 소식을 익히 들었소.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는 당신에 관하여 다음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이르렀소. 당신은 이런 일을 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하강한 하나님(theos)이거나 하나님의 아들(a Son of God)일 수밖에 없소. 이러한 이유로, 나는 당신이 빨리 나에게로 와서 나의 고통을 해방해 주도록 탄원하는 편지를 보내는 바이외다. 더구나 유대인들이 당신을 조롱하고 박해한다고 들었소. 나는 작지만 오랜 전통을 지닌 훌륭한 도시를 소유하고 있소. 당신이 지내기에 이상적인 곳이라 생각되오.”
이 편지를 받은 예수는 아나니아스를 통해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냈다.
“나를 보지도 않고 나를 믿는 그대여, 복이 있도다. 나에 관하여 이미 기록된 바, 나를 본 자는 나를 믿으려 하지 않고 나를 보지 않은 자가 오히려 나를 믿고 생명을 얻는다 하였도다. 그대가 나에게 왕진을 요청하며 쓴 것에 관하여, 나는 먼저 이곳에서 내가 보내진 사명을 완수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리노라. 이곳에서 나의 임무가 완수되면, 나는 나를 보낸 그이에게로 다시 들리우리라. 내가 들리울 때 나는 나의 제자 중 한 사람을 그대의 고통을 고치기 위해 파견하리라. 그는 그대와, 또 그대와 같이하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리라.”
그 편지 말미에 시리아어로 예수 사후에 실제로 벌어진 일들이 매우 상세하게 기술돼 있다고 한다. 도마(쌍둥이)인 유다는 아브가르왕에게 70제자 중 한 사람인 다대오(Thaddaeus)를 보냈는데, 그는 에데사에서 토비아스(Tobias)의 아들, 토비아스의 집에 머물면서 이적을 행한다. 결국 다대오는 아브가르왕을 대면하기에 이른다. 다대오를 대면한 아브가르왕은 이와 같이 말한다: “나는 그대의 스승 예수에게 무한한 신념을 품었노라. 로마제국의 권세가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면, 나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들을 군대를 보내어 쳐부쉈을 것이다.”
다대오는 말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그대 머리 위에 손을 얹노라.” 그 순간 그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질병과 고통이 사라졌다. 마약과 약초를 쓰지 않는 다대오의 치유와 선교는 계속된다. 드디어 전 국민과 왕이 모여드는 광장에서 그는 설교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혔고, 지옥 하데스로 사흘간 내려가 있다가(descended into Hades), 모든 군중이 보는 자리에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다시 올라간 사건을 선포한다. 이 일들은 340년에 일어났다. 에데사 기원 340년이란 AD 30년을 의미한다.
과연 독자들은 이러한 문서기록을 진실한 역사의 기술이라고 믿을 것인가? 우리는 4세기 초의 기독교인들이 인식하고 있었던 예수상의 일단을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쾨스터는 도마기독교가 에데사에 일찍 정착된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에데사 도마기독교(Edessene Thomas Christianity)가 2세기에 마르시온파를 포용하는 등 로마 정통기독교와 대항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자 에데사를 견제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따라서 그 원조인 도마의 족보를 폄하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팔루트(Palut)가 에데사의 비숍으로 임명되면서 그는 에데사의 도마기독교를 서방정통교회(Western orthodoxy)로 전향시켰고, 그에 대한 반발로 도마기독교 신봉자들의 상당수가 마니교로 흡수되었다고 본다. 하여튼 이러한 서방화의 과정 속에서, 아브가르의 전설도 원래는 도마가 주인공이었으나, 도마가 탈락되고 다대오로 대치되었다고 본다.
많은 사람이 AD 3세기 초 에데사에서 성립한 것이 확실한 것으로 간주되는 문헌, 『도마행전』(Acts of Thomas)과의 관련성 때문에 도마복음서가 에데사에서 성립한 문헌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도마행전』의 첫머리에 “쌍둥이(디두모)라 불리는 유다 도마”가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바라 알란드(Barbara Aland)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에데사 전승을 거부한다. 1)에데사는 시리아어 권역이며 희랍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도마복음서는 당초에 희랍어로 쓰여졌다. 2)‘유다 도마’라는 이름은 동부 시리아권의 전유물이 아니다. 3)『도마행전』의 저자가 도마복음서를 참고했다는 퓌에쉬(Peuch)의 분석은 문헌적 근거가 박약하다.
나 도올은 도마복음서가 에데사 전승의 산물이라는 비정은 억측의 소산이라고 간주한다. 도마복음서는 예수운동의 가장 오리지널한 층대를 형성하는 것으로 팔레스타인에서 성립한 독자적인 문헌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이제 도마복음서 본문에 즉(卽)하여 논의되어야 한다.
▶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는 제39편까지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시중에 나와 있다. 다음주부터 본문의 주석이 시작된다. 단행본『도올의 도마복음 이야기-이집트·이스라엘 초기 기독교 성지순례기』를 참고하면서 따라오면 보다 효율적으로 본문이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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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인간의 언어는 문자라기보다 소리의 체계
콥트어와 성각문자
도올 김용옥 | 제53호 | 20080315 입력
아문신을 모신 룩소르 카르낙신전의 기둥들에 새겨진 성각문자들. 히에로글립스의 ‘히에로’는 성스럽다(sacred)는 의미이고, ‘글립스’는 글리페인(glyphein) 즉 각(刻)한다는 의미이다. 상형문자라는 의미는 전혀 내포되어 있지 않다. 성각문자는 실제적으로 기념비적인 건물의 석벽이나 비문에 새겨진 것이며 특수한 지배계층에게만 통용된 것이다. 지식과 권위를 독점하려는 지배층들은 성각문자가 일반 민중에게 경외의 대상으로 인식되기만을 바랐다. 해독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사제들이나 서기관들은 파피루스에 사제문자를 썼다. 나중에는 대중적인 민용문자가 발전하기에 이른다. [임진권 기자] | 도마복음서 텍스트는 콥트어(Coptic)로 되어 있다. 물론 도마복음서가 최초로 콥트어로 집필되었다고 간주되지는 않는다. 앞서 우리가 논의했듯이 옥시린쿠스사본(POxy)을 통하여 콥트어 텍스트에 선행하는 희랍어 텍스트의 존재가 입증되기 때문이다(『도올의 도마복음이야기1』, 통나무刊, pp.325-328.). 그러나 희랍어 텍스트는 부분 편린만 남아 있는 데 반하여 콥트어 텍스트는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콥트어를 통하여 도마복음서의 전모를 파악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콥트어는 비록 외견상으로는 희랍어의 자모를 빌리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집트말이다. 즉 희랍어 자모를 이집트말에 대한 이두식 표기로 활용한 것이다. 희랍어 자모는 24개가 있는데, 24개만 가지고는 이집트말의 발음체계를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이전 단계의 민용(民用)문자인 디모틱문자(Demotic)에서 7개의 글자를 빌려왔다. 그 7개 글자의 음가만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 : Sch(Schei), F(Fei), Ch(Khei), H(Hori), Dsch(Djanjia), Sch(Shima), Ti(Ti).
콥트어는 함·셈어족(the Hamito-Semitic language family)에 속하는 고대 이집트언어 발달사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되는 말인데, 이집트 언어사에서 최초로 구어의 발음체계를 온전하게 표기하는 체계라는 의미에서 매우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 이전의 이집트말 표기방식은 우리가 흔히 ‘상형문자’라고 알고 있는 것인데 그것으로는 이집트말의 발음체계를 온전히 알 수 없다. 그러니까 고대 이집트문자의 발음체계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콥트어라는 창문을 통하지 않을 수 없다.
영국박물관에 진열된 로제타 스톤의 일부. 1799년 8월 알렉산드리아 부근의 로제타에서 나폴레옹 휘하의 프랑스 장교가 발견했으나 프랑스군이 패하자 영국 외교관이 전리품으로 압수했다. 그러나 프랑스 학자들은 빼앗기기 전에 복사본을 만들어 두었다. 샹폴리옹은 12세 때 이 복사본을 보고 해독을 결심했다. 프톨레미5세의 칙령(BC 196)인데 같은 내용이 성각문자와 민용문자와 희랍어로 병기되어, 쉽게 알 수 있는 희랍어로부터 이집트 고대문자의 수수께끼를 파헤쳐 나갈 수 있었다. 이 현무암이 근대 이집트학의 출발이다. | | 1799년 발견된 로제타 스톤(Rosetta Stone)의 해독을 놓고 영국의 의사이자 물리학자인 토머스 영(Thomas Young, 1773~1829)과 프랑스의 언어학자 샹폴리옹(Jean-Francois Champollion, 1790~1832)이 경쟁을 벌였을 때 토머스 영의 연구가 샹폴리옹에 필적할 수 없었던 것도, 샹폴리옹이 콥트어에 달통한 데 반하여 영은 콥트어를 알지 못했다는 사실로부터 귀결된다.
콥트어는 1세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7세기 이슬람이 이집트를 정복하기까지 거의 유일한 이집트의 공식 언어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알파벳을 사용하여 구어를 표기하는 것이 너무도 편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콥트어가 1세기부터 이미 이집트말의 표기방식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언어발달사적 이유로 고찰되는 사태가 아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종교적 이유다. 즉 콥트어의 등장은 이집트가 기독교국가로 변해버렸다는 거대한 역사적 사실을 입증하는 사태이다. 기독교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기독교와 관련된 모든 문헌이나 제식을 민중에게 전달하는 데는 전통적 상형문자는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뿐만 아니라 상형문자는 그 자체가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종교적 신념을 표방하는 성스러운 세계였기 때문에 기독교와 융합되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프톨레미왕조가 이집트를 지배하는 기간(BC 305~30) 동안에는 국제 통용어인 희랍어가 상용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콥트어는 희랍어의 명사 어휘를 대거 차용하였으며, 명사 이외로도 형용사, 동사, alla, gar, de, men, hina와 같은 기능어도 차용하였다. 그리고 단어의 어근(語根)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콥트어 문학은 파코미우스를 계승한 수도원운동의 대부 셰누테(Shenute, c.360~c.450)의 저작활동에 이르러 정점에 이른다. 콥트어 자체가 기독교문화의 소산이기 때문에 이집트를 정복한 아랍인들은 콥트어를 좋아할 리 없었다. 아랍인들은 997년 공식적으로 콥트어를 금지시켰다. 그렇지만 콥틱 기독교는 무슬림의 탄압 속에서도 줄기차게 살아남았고 오늘날 이집트 인구의 10%가 콥틱 정교회(Coptic Orthodox)에 속해 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일상용어로서의 콥트어는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콥틱교회의 제식언어, 제식음악으로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사어(死語)라 해야 할 것이다.
콥트어 이전의 이집트문자를 말할 때, 우리가 흔히 ‘상형문자’라고 부르는 것은 좀 어폐가 있다. 상형(象形)이란 문자 그대로 사물의 형태(形)를 본뜨는 것(象)이다. 우리가 아는 뫼 산(山) 자는 산의 모양을 본뜬 것이고, 내 천(川) 자는 시내의 모양을 본뜬 것이다. 그런데 중국문자이든 이집트문자이든 이런 상형자(象形字)는 지극히 제한된 것이다. ‘사랑’이나 ‘신’이나 ‘은총’이나 ‘구한다’와 같은 형체 없는 개념들을 상형의 방식으로 다 표현할 수는 없다. 이에 우리는 고대언어라 할지라도 인간의 언어에 대한 아주 근원적이고도 원칙적인 이해를 해야 한다. 인간의 언어는 표기되기에 앞서 소리로서 소통된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의 언어는 문자의 체계라기보다는 소리의 체계인 것이다. 따라서 소리의 체계와 무관한 표의문자(ideogram)와 표음문자(phonogram)를 이원적으로 대비시키는 것은 언어학의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표의문자라고 알고 있는 한자의 경우를 한번 살펴보자! 옛 고(古)라는 글자의 형태에서 ‘古’가 어떠한 이유에서 ‘옛’이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는지는 갑골문에 있어서도 상고할 길이 없다. 그런데 古와 관련된 글자를 보면, 沽, 故, 姑, 固, 痼, 枯, 苦 등에서 알 수 있듯이 古라는 것은 단지 go라는 소리를 나타내는 성부(聲符)일 뿐이며, ‘옛’이라는 의미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자를 단순히 뜻글이라고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 소리글적인 요소를 단음절의 글자 내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이집트의 문자가 새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단순히 ‘새’를 의미하는 표의자라고 한다면 그런 방식으로는 도저히 인간의 말을 표현할 길이 없다. 새 모양의 글자라 할지라도 그것이 단순히 a라는 음가를 나타낸다면, 그것은 상형자나 표의자가 아니라, 좀 회화적으로 약속된 알파벳 한 글자에 지나지 않는다. 로제타 스톤에 1419개의 사인이 있었는데 겹치지 않는 모양은 66개밖엔 없었다. 이 66개를 상형문자라고 해버리면 복잡한 의미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토머스 영은 이집트 문자가 표음적 성격이 있음을 암시했으나 샹폴리옹은 그러한 가능성을 배제하는 고집을 피웠다. 그러다가 어느 날 프랑스의 중국학 학자로부터 한자도 표음적 요소로써 풍요롭게 발전한 언어라는 사실을 듣고 충격에 휩싸인다. 그리고 생각을 바꾼다. 그리고 이집트 문자가 표음문자(phonogram)와 표어문자(表語文字·logogram)와 한정사(determinatives), 3요소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체계라는 사실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표음문자에 해당되는 사인은 24개의 알파벳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밝히고 그 음가를 정확히 재구성해 내었다. 1822년! 이집트의 고대사가 개벽되는 순간이었다. 고대 이집트의 24개의 알파벳 시스템은 페니키아 알파벳에 영향을 주었고, 그것이 오늘날 서구문명의 알파벳 시원이 된 것이다.
현대언어학에서는 표의문자(ideo- gram)라는 말보다 표어문자(logogram)라는 말을 즐겨 쓴다. 지아비 부(父) 자는 아버지라는 단어(語)의 로고(logo)라고 파악한다. 한자의 경우에는 일자일어(一字一語)의 원칙이 고수되지만 이집트문자나 그 이전의 설형문자에서는 복합적 자형들이 동원된다.
이집트의 히에로글립스(hieroglyphs)를 상형문자라고 부르지 말자! 그것은 단어의 뜻 그대로 성각문자(聖刻文字)라고 불러야 한다. 보수적 성향의 성각문자는 BC 3200년경부터 AD 4세기까지 장례와 종교적 목적으로 줄기차게 쓰였다. 그리고 성각문자보다 한 5세기 늦게(제2왕조 말기, BC 2686년경) 사제문자(hieratic)가 발전한다. 그리고 제26왕조(BC 6·7세기) 때부터 행정·상업·문학용의 민용문자(demotic, 민중문자라고도 함)가 널리 쓰였다. 민용문자는 희랍어와 병행되다가 콥트어의 발전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집트문자의 변천사는 인간의 말의 표기체계가 표어적 성격에서 표음적 성격으로 변천해 가는 하나의 보편적 양태를 반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도마복음의 첫마디는 다음과 같다: “이는 살아 있는 예수께서 말씀하시고 쌍둥이 유다 도마가 기록한 은밀한 말씀들이라.” These are the secret sayings that the living Jesus spoke and Judas Thomas the Twin record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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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도마복음서 해독 기초자료
프롤로그에 숨은 뜻은?
도올 김용옥 | 제54호 | 20080323 입력
나그함마디 문서는 그 문서를 둘러싼 인간들의 탐욕 때문에 기구한 운명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세계인의 양심의 호소와 협조에 따라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다. 나세르 대통령이 골동상의 소유물을 국유화했고, 심리학자 융이 소유했던 코우덱스도 결국 반환되었다. 현재 대부분의 코우덱스가 카이로의 콥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중 오직 도마복음서 첫 두 페이지가 전시되고 있는데 콥틱 박물관은 촬영을 일절 불허했다. 나는 박물관 사무실을 찾아가 신분을 밝히고 도마복음서 하나만 촬영케 해달라고 통사정을 했으나 절대불가라는 방침만 되풀이했다. [임진권 기자] | 서장(序章, Prologue) 이는 살아있는 예수께서 이르시고 쌍둥이 유다 도마가 기록한 은밀한 말씀들이라.
These are the secret sayings that the living Jesus spoke and Judas Thomas the Twin recorded.
도마복음서가 발견된 게벨 알 타리프. 이곳에 AD 367년에 매장되었다가 1945년 12월에 우연히 발견되었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내가 62년 만에 이 역사적 현장을 방문한 것이다. | | 이제야 겨우 도마복음 본문을 주해하고 강론하는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지난 일 년간의 기나긴 역정을 회고하면서 회의와 고난과 희열로 가득 찬 열정의 시간을 함께해 준 독자들에게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지금 막상 본문을 대하는 나의 가슴은 말할 수 없는 감회와 두려움으로 회오리친다.
도마복음서는 114개의 로기온 파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나의 새로운 저작물인 『큐복음서』(통나무 刊, 2008) 속에서도 1개의 로기온 파편에 대해 장(章)이라는 개념을 부여했듯이, 도마복음서에 대해서도 장이라는 개념을 쓸 것이다. 우리 동양고전의 감각으로 보면 로기온 하나를 한 장으로 규정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중용』이나『대학』에 그러한 용례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도마복음서는 11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도마복음서 원문은 희랍어 텍스트나 콥트어 텍스트를 막론하고 띄어쓰기도 없을 뿐 아니라 장의 구분 같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하게 한 덩어리로 연결된 모습으로 고대의 서기관들은 기록하였던 것이다. 장을 구분하고 번호를 매긴 것은 물론 20세기 학자들의 노력의 소산일 뿐이다.
114장의 구분 방식은 로빈슨 교수가 편집한 최초의 나그함마디 문서의 영역전집, 『콥틱 그노스틱 라이브러리』판본에 의거한 것이다. 그중 도마복음서 부분의 서문은 쾨스터(Helmut Koester)가 썼고, 콥트어 원본은 레이턴(Bentley Layton)이 편집했으며, 영역은 램브딘(Thomas O. Lambdin)이 하였다. 서지 정보는 다음과 같다.
James M. Robinson, general editor. The Coptic Gnostic Library. 14 vo- lumes. Leiden: Brill, 1975~95.
이 14권짜리 브릴판은 현재 구매하기 어렵다. 그러나 2000년에 5권으로 묶어 같은 회사에서 리프린트판으로 출간하였는데 현재 구입이 가능하다. 상당히 고가의 책이다.
그러나 이 내용을 한 권으로 축약시킨 책이 있다. 싼값에 쉽게 구할 수 있다. 비록 콥트어 원문 텍스트는 생략되었지만 일반 독자들은 이 책 한 권으로도 14권짜리 분량의 내용을 충분히 숙지할 수 있다.
James M. Robinson, general editor. The Nag Hammadi Library in English. Revised edition. New York: Harper & Row, 1988.
영역과 함께 보다 정교한 콥트어 텍스트 교정본이 실린 책으로 내가 참고한 단행본은 다음과 같다. 정확한 번역과 주석으로 정평이 나 있다.
Marvin Meyer. The Gospel of Tho- mas: The Hidden Sayings of Jesus. San Francisco: HarperSanFrancisco, 1992.
이외에 내가 참고한 책은 수백 권에 달하지만, 영역을 위해 주로 활용한 저서를 세 권만 꼽으면 다음과 같다.
1. John S. Kloppenborg, Marvin Meyer, Stephen J. Patterson, Michael G. Steinhauser. Q-Thomas Reader. Sonoma, California: Polebridge Press, 1990.
2. John Dart & Ray Riegert. Unear- thing the Lost Words of Jesus: The Discovery and Text of The Gospel of Thomas. Commentary by John Do- minic Crossan. Berkeley, California: Seastone, 1998.
3. Stephen J. Patterson, James M. Robinson, Hans-Gebhard Bethge. The Fifth Gospel: The Gospel of Tho- mas Comes of Age. Harrisburg, Pennsylvania: Trinity Press Inter- national, 1998.
그리고 콥트어 사전으로는 다음의 두 권이 필수다.
1. W. E. Crum. A Coptic Dictionary. With a New Forward by James M. Robinson. Eugene, Oregon: Wipf and Stock Publishers, 2005.(원본은 옥스퍼드대학 출판사에서 1939년에 출간)
2. Jarislav Cerny. Coptic Etymo- logical Dictionary. Cambridge: Cam- bridge University Press, 1976.
크럼(W. E. Crum, 1865~1944)은 영국학술원(British Academy)의 회원이었으며 베를린대학에서 명예박사를 받은 콥트어 전문가였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도 중단함이 없이 적국 학자들과도 교류해 가면서 24만 매 이상의 카드 작업을 통하여 30년의 노고 끝에 상기의 위대한 사전을 완성하였다. 1000페이지에 달하는 이 방대한 사전(1)이 완성된 것은 1939년, 나그함마디 문서가 발견되기 이전의 사건이었다. 크럼은 나그함마디 문서를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그러나 이 사전이 있었기에 나그함마디의 방대한 문헌이 해독될 수 있었고, 초기기독교의 역사가 밝혀질 수 있었고, 신약성서의 원전 자료들이 해석될 수 있었다.
이 사전은 20세기 콥톨로지(Coptology)의 원점이다. 나그함마디 문서의 총편집자인 로빈슨은 말한다: “크럼 이외의 대안은 없다.”(There is in fact no replacement for Crum.)
체르니의 『콥트어 어원사전』(2)은 콥트어의 고대이집트어 어원을 밝힌 것이다. 20년 형설의 공을 쌓아 만든 이 사전도 크럼의 성과 위에서 이루어진 노작이다. 기재어가 2000개가량 되는데 고대이집트어 고유의 어휘로서 알려진 것의 3분의 2에 해당된다.
이제 우리는 서장을 이야기해야 한다. 여기 서장이라고 하는 것은 앞으로 전개될 114장을 관(冠)하는 장(章)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114장의 가라사대 파편 외로 114장을 총괄하는 어떤 메시지로서 그 위에 얹혀져 있는 것이다. 114장의 본체 외로, 앞에는 서장이 있고 맨 끝에는 제목에 해당되는 ‘도마복음서(Peuaggelion Pkata Thomas, The Gospel According to Thomas)’라는 아름다운 서체로(칸을 띄고 큰 글씨로 썼다) 대미가 장식되고 있다고 할 때, 우리는 이 서문이 전체로서 어떤 의도된, 유기적 구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 내용을 이루는 114장의 순서에 특별히 주제별로 의도된 어떤 시스템이 엿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부분적으로 비슷한 성격의 로기온들이 모여 있을 때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114개의 로기온은 무작위적인 컬렉션(random collection)이다.
스테반 데이비스(Stevan Davies)는 도마복음서가 2~37장, 38~58장, 59~91장, 92~113장의 4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속에 어떤 스트럭처가 내장되어 있다고 말하지만 별로 설득력이 없다. 도마복음서는 분명 어떤 컨스트럭션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컨스트럭션을 과시하는 방식이 디컨스트럭션의 양태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컨스트럭션과 디컨스트럭션의 긴장감을 단적으로 드러낸 명구들이 바로 서장의 언어를 구성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114개의 로기온 전체의 운명을 지배하는 서장의 언어를 세밀하게 분석해 들어가야 한다. 이 서장이야말로 도마복음서로 진입하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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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교회 밖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나?
영지주의와 도마복음
도올 김용옥 | 제55호 | 20080330 입력
사막은 고독이다. 사막은 인간의 모든 욕망을 무화(無化)하는 힘이 있다. 사막은 관계를 단절시킨다. 사막은 나(我)를 신(神)에게 가깝게 다가가게 만든다. 사막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미세한 음성을 듣는다. 고독한 수행자 안토니와 폴의 고행처를 찾아가는 도올이 아라비아 사막을 헤매고 있다. [임진권 기자] | 이는 살아있는 예수께서 이르시고 쌍둥이 유다 도마가 기록한 은밀한 말씀들이라.
요즈음도 나 도올을 ‘길 잃은 양’처럼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나에게 ‘참된’ 기독교 신앙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나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하는 것인 양 외친다: “이제 그만 돌아오라!”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어디로 돌아오란 말인가? 참된 신앙을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요구하는 것은 매우 단순한(簡) 것이다. 그리고 매우 쉬운(易) 것이다. 그들이 “돌아오라”는 것은 매우 명료한 기준이 있다.
이 시대의 누가 과연 길 잃은 양인가? | | 교회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신앙 기준은 다음과 같다. 1)매주 일요일마다 빠지지 말고 열심히 교회에 나올 것. 2)다니는 교회나 관련된 교회단체에 열심히 십일조나 그 이상의 연봇돈을 낼 것. 다다익선. 은혜충만. 3)신약정경 27서의 유일한 권위를 인정하고, 열심히 읽고 그 말씀대로 실천할 것.
만약 내가 이 세 조항을 엄격히 준수한다면 대한민국은 물론 지구상 어디에서도 나를 훌륭한 크리스천이라 부를 것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나라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이 세 조항을 열심히 지키고 있다. 그리고 이 세 조항은 참으로 어려울 것 같으면서도, 마음만 먹으면 너무도 쉽고 단순한 것이다. 쉬움과 단순함은 모든 대승(大乘)종교의 특질이다. 대승종교는 그 대중성(popularity) 때문에 항상 정통성(orthodoxy)을 쉽게 획득한다. 그리고 그토록 쉽고 단순한 조항을 지키려 들지 않는 사람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나쁜 놈들’이다. 이 나쁜 놈들에 비하면,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교회공동체의 화목에 이바지하는 순진한 사람들은 물론 아주 ‘좋은 놈들’이다. 종교적 용어로 좋은 놈들은 ‘정통’이라 부르고 나쁜 놈들은 ‘이단’(heretic)이라고 부른다.
대승이라는 말을 초기기독교 교회사에서는 ‘보편적’이라는 희랍어 카톨리코스(katholikos)를 취하여 가톨릭이라고 불렀다. 가톨릭의 신념은 이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있을 수 없다.”(Outside the church there is no salvation.) 이 명제 하나를 받아들이면 정통이 되고, 이 명제 하나를 거부하면 이단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2000년의 가톨릭교회사를 일관하는 정칙이다. 가톨릭에 대해 종교혁명을 일으킨 프로테스탄티즘의 모든 근대적 조류도 이 아우구스티누스적인 교회론의 대세를 본질적으로 어김없이 수용하였던 것이다.
교회라는 공동체의 조직에 복속되는 것이 신앙의 정도일까,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공동체의 조직성을 무시하고 예수와 하나님을 나의 삶에서 무매개적으로, 다시 말해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전도사 같은 중간 브로커가 없이 만나는 것이 정도일까, 하는 문제는 이미 예수의 사후 직후부터 예수의 가르침을 사모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크게 문제가 되었다.
인간의 라이프 스타일이나 성격 유형에 따라 어떤 사람은 조직을 좋아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조직을 거부하고 고독을 선호하기 십상이다. 이런 인간의 성향에 따라 다양한 종교운동의 방향성이 생겨나기 마련인데, 조직적 공동체운동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뭉치게 마련이고, 고독을 선호하는 사람들은 흩어지게 마련이다.
조직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날로 날로 세력이 강성해지게 마련이고, 고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날로 날로 세력이 미약해지게 마련이다. 더구나 종교는 철학과 달리 도그마(dogma)의 체계다. 따라서 강성해지는 사람들이 정통이 되고, 미약해지는 사람들이 이단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초기기독교 운동에서는 이 이단이라는 말을 부르는 묘한 용어가 있었다. 그것이 바로 그노스티시즘(Gnosticism), 즉 영지주의(靈知主義)라는 말이었다. 이 말은 이단이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로 쓰였지만, 그 실 내용인즉슨, ‘고독한 구원’(solitary salvation)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사상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들은 조직에 대한 충성심의 강약으로 구원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에게로 다가가는 나의 고독한 실존 내면의 앎을 구원의 척도라고 생각했다. 그 특별한 앎을 그들은 그노시스(gnosis), 즉 영지라고 불렀던 것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많은 학자가 나 도올이 도마복음서라는 저작물을 영지주의의 소산으로 간주하고 있지 않나 하고 의구심을 품을 것이다. 도마복음서가 영지주의에 속하는 작품이 아니라는 것은 현재 신학계의 정설이다. 도마복음서를 영지주의 문서의 일환으로 간주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더구나 내가 지금부터 다루려고 하는 문헌은 예수의 죽음을 AD 30년경으로 잡는다면 그의 사후 30년간, 즉 AD 30~60년 사이의 팔레스타인과 그 주변의 시대상을 역사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크로상(John Dominic Crossan)이 제1기층(The First Stratum)이라고 부르는 이 시기에는 아직 기독교(Christianity)라는 개념도 정립되지 않았고, 따라서 이단과 정통의 구분도 없었고, 더구나 성경이라는 것도 없었고, 교회라는 것도 없었고, 영지주의라는 것도 운동의 실체로서 윤곽이 드러나지 않았던 시대였다.
그러므로 도마복음서가 영지주의의 저작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제기조차 무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마복음서와 영지주의의 관련성은 영지주의를 우리가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엇갈리는 문제다. 하버드대학의 여류 신학자 카렌 킹(Karen L. King) 교수가 요약하고 있듯이 전통적으로 영지주의에 대한 우리의 상념은 다음의 네 카테고리로 규정된다.(What is Gnosticism?, p.172).
1.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한 이단적 발전이다(a Christian heresy). 2.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다양한 측면 중 하나이다(one variety of Christianity). 3. 영지주의는 기독교 이전의, 혹은 기독교의 모태적인 원형이다(a pre-Christian or proto-Christian religion). 4. 영지주의는 기독교와 병존한 또 하나의 독립된 전통이다(an independent tradition).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엔 영지주의를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기존의 네 가지 규정 모두를 말끔하게 털어내 버려야 한다. 기독교와 비교되는 그 무엇으로서 영지주의를 실체화하는 어떠한 작업도 궁극적으로 무의미한 것이다. 영지주의를 서구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주의(-ism)로써 규정되는 편견이나 분별심의 장벽을 근원적으로 허물어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2000년 동안 정통주의라는 어떠한 주의적 기반 위에서만 기독교사의 모든 흐름을 설계하여 왔기 때문이다. 영지주의라는 어떠한 이즘의 안경으로 도마복음을 엿봐서는 아니 된다. 모든 이즘의 규정이 파괴된 무전제의 편견 없는 시각으로 우리는 도마복음을 이해해야 한다. 그 진실 속에서 후대에 영지주의라고 잘못 규정된 어떤 사상적 경향성을 규탐할 수 있을 뿐이다.
도마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려는 그 첫마디는 무엇인가? “살아있는 예수”(the living Jesus)라는 그 한마디! 살아있는 예수란 무엇이뇨? 물론 ‘살아있는 예수’는 ‘죽은 예수’를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죽은 예수는 무엇이고, 살아있는 예수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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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교회는 종말론적 회중이었다
메시아니즘과 도마복음
도올 김용옥 | 제56호 | 20080406 입력
지금은 다 헐려 사라졌지만 내가 쳐다보고 있는 감실이 판신전 내부의 신상이 모셔져 있던 곳이다. | 이는 살아있는 예수께서 이르시고 쌍둥이 유다 도마가 기록한 은밀한 말씀들이라.
도마복음서를 만든 사람들에게는 목사나 신부나, 사도신경이나, 신약정경 27서와도 같은 오늘날 교회 조직이 강요하는 일체의 권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아니, 그러한 문제가 스트레스를 주는 실체로서 형상화되기 이전의 시대였다. 그러나 이미 예수 사후 직후부터 예수운동은 다양한 발전경로를 걷기 시작했다.
그중 가장 강력한 운동이 뭐니 뭐니 해도 에클레시아(ekklesia), 즉 교회운동이었다. 에클레시아란 뜻은 어원적으로 부름을 받은 자, 즉 선택받은 자들의 모임이란 뜻이다. 이러한 회중이 선택받았다고 하는 특별한 의식(일종의 선민의식)을 강하게 갖기 위해서는 특별한 이론적 장치가 필요했다.
바울만 해도 그의 서신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라고 말했다(골 1:18, 24, 엡 1:22, 5:23).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바울이 선택하고 있는 단어가 예수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사실 바울은 그의 서한에서 예수를 거의 말하지 않는다. 그가 만난 것은 예수가 아니라 그리스도다. 그가 예수라는 말을 쓸 때에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의 축약형일 뿐이다. 예수는 이 땅 위에서 우리처럼 밥 먹고 똥 싸고 살았던 한 인간이다.
이곳이 바로 가이사랴 빌립보(Caesarea Philippi). 아마도 이스라엘을 여행하다 보면 가나안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풍요로운 정취가 감돈다. 마가의 기술에 의하면 예수는 두로, 시돈, 데가볼리 지방을 거쳐 갈릴리 호수로 돌아왔다가, 다시 벳새다를 거쳐 가이사랴 빌립보로 갔다. 이곳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묻는다.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아, 선지자 중의 한 사람 등등의 대답이 나왔으나 베드로가 결정적인 대답을 한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마태에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가 첨가되어 있다. 임진권기자 | | 그러나 그러한 예수를 가지고서는 교회운동을 일으키기 힘들었다. 더구나 그 당시 사람들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이집트인이든 동방제국의 사람이든 간에 모두 짙은 신화적 전통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신화는, 현대인에게 있어서의 과학(science)과 대비되는 신화(myth)가 아니라, 그냥 일상적 어휘였고 상식적 인식방법이었다. 따라서 교회운동을 하기 위하여서는 그들에게 어필될 수 있는 어떤 신화적, 아니면 그에 필적하는 어떤 새로운 개념이 필요했다.
이 개념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리스도(christos)는 메시아(mesiah)라는 히브리말의 헬라어 번역이며 그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the anointed)라는 뜻이다. 왕이 될 때 그 머리 위에 기름을 붓는 대관례에서 비롯된 것인데, 기름 부음을 받는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이라는 칭호를 얻었다(삼상 10:1, 16:1~13, 시 2:7, 89:26). 이 전통은 사울에게서 시작하여 다윗 때 확립된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에게 “메시아=그리스도”라는 개념은 다윗처럼 이민족을 물리치고 이 팔레스타인 지상 위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는 지도자를 의미했다. 이러한 개념은 예수시대가 마침 로마라는 이민족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시대였기 때문에 당연히 로마군단을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리듯이 물리칠 수 있는, 현실적인 대로마항쟁의 투사적 왕(a belligerent King)을 의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과연 역사적 예수는 그러한 투사적 왕이었을까? 구약의 신화들을 철석같이 믿었던 유대인에게는 야훼라면 로마군단 정도는 간단히 해치울 수 있어야 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어찌하여 그러한 하나님의 권능을 과시할 수 없단 말인가?
그러나 예수는 AD 30년경 매가리 없이 죽고 말았다. 아무런 정치적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식민지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하등의 사회변화를 초래하지 못하고 시시하게 죽고만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운동을 하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이런 문제가 매우 고민거리였다. 죽어버린 예수를 가지고서는 메시아운동이 성립하지 않는다.
메시아운동이란 사람들에게 정치적 해방의 기쁨이나 소망을 던져주어야 한다. 최소한 그러한 희망의 환상이라도 심어줄 수 있어야 한다. ‘정치적 해방’이란 결국 ‘삶의 해방’이다. 삶의 해방이란 정신적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다. 결국 메시아니즘은 이런 모든 가치와 연계되어 있었다. 따라서 예수를 메시아로서, 그러니까 그리스도로 만드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예수가 그의 삶의 소신에 따라 의리 있게 죽었다는 바로 그 사실을 이용하는 것이다.
죽었기 때문에 부활할 수 있고, 부활했기에 승천할 수 있고, 승천했기에 다시 올 수 있는 것이다. 이 ‘다시 옴’을 재림 즉 파루시아(parousia)라고 불렀는데(마 24:3, 살전 4:15, 약 5:7 등에 이 단어의 용례가 있다), 에클레시아 즉 교회라는 것은 재림사상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회중이었다.
이 긴박한 재림사상(the imminent Second Coming)이야말로 그 시대 사람들의 신화적 상식과 미래에 대한 희망과 현실적 공동체의 결속력을 창출할 수 있는 최적의 옵션이었다. 불트만은 그의 대저 『신약성서신학』(Theology of the New Testament)에서 아주 간결하게 말한다: “초기교회는 종말론적 회중이었다.”(The earliest Church regarded itself as the Congregation of the end of days.)
여기 종말론이라는 뜻은 재림의 다른 표현이다. 재림이란 그냥 ‘다시 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시 옴의 사건과 함께 인간세의 역사 즉 시간의 종말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사는 이 더러운 세상을 싹 쓸어버린다는 것이다. 말끔히 자취 없이 끝내버린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상식으로 보면 ‘재림=종말’을 공포가 아닌 희망으로 삼는다는 것은 참 어색하고 아둔하기 그지없는 인간들의 소치로 느껴지지만, 그 당시의 현실적 절망감이 그것을 공포 아닌 희망으로 만들었다면 그러한 종말론적 역사상황이 이해될 만도 한 것이다. 교회가 선포하는 것은 예수가 아닌 그리스도였다. 선포하던 예수가 이제 선포되기에 이른 것이다.(The proclaimer became the proclaimed.) 교회는 예수를 메시아로 선포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이미 바울의 서한과 공관복음서에 충분히 반영되어 있다.
그러니까 바울은 산 예수를 만난 것이 아니라 죽은 예수를 만났다.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홀연히 하늘에서 비추는 빛 속에서 들은 음성이 그가 만난 예수의 전부였다. 바울은 죽은 예수를 만났기 때문에 바울이 교회운동에서 천착한 핵심적 테마는 ‘부활’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현현한 예수는 육신으로 죽었다가 부활한 예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 부활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예수 부활의 의미를 우리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교회의 회중에게 선포하는 신앙의 내용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예수는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그리스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기 도마복음서는, 우리에게 오히려 익숙지 않은 새로운 예수를 선포한다. 죽은 예수가 아니라, 살아있는 예수를 선포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예수’는 죽음의 전제조차 없는 예수다. 그의 말씀을 듣는 살아있는 회중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예수다. 이 살아있는 예수에게는 죽음의 전제가 없기 때문에 부활도 있을 수 없다.
부활을 운운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승천도 재림도 있을 필요가 없다. 일체의 신화적 장치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일체의 종말론적 전제나 개념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 대신 남는 것은 오로지 하나!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인 것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