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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걸레와 촛불 같은 존재가 되게 하소서!
소년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5학년 때 담임을 맡으셨던 박 모(某) 선생님께서 집으로 찾아 오셔서 할머니께 간곡히 말씀하시기를
“현석이 같이 공부를 잘하고 똑똑한 아이는 시골에서 지게 밑에 썩혀서는 안 됩니다. 저희 집에서 먹고 자라면서 공부하도록 하여 제가 책임지고 대학교까지 졸업시키겠습니다.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라고 말씀하셨으나, 할머니께서는 선생님께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사흘만 말미를 주세요! 좀 생각해 본 다음 선생님의 말씀에 대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사흘 동안 밤잠을 주무시지 못하고 고민을 하셨다. 사흘째 되는 날 아침 할머니께서는 어린 손자를 조용히 불러 앉히고 의논을 하셨다.
“네가 세 살 되던 해 어느 도사님이 우리 집에 찾아 와서 하시는 말씀이 너는 이 다음에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가난하여 너를 중학교에도 보내지 못하는데 어떻게 크고 훌륭한 사람이 되겠느냐? 너를 높은 학교에 보내서 글을 가르치지 못하는 이 핼미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구나! 그리고 너의 학교 선생님이 너를 대학교까지 보내주겠다고 하시는 말씀은 너무나 고마우신 말씀이지만, 만약 네가 선생님의 도움으로 공부를 하여 출세하고 성공하게 되면 너는 분명 그 선생님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평생을 바치게 될 것이 뻔하다. 네가 지금 마음 쓰는 것을 보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핼미가 결정 한 번 잘못해 가지고 큰 인물이 되어 큰 일을 해야 될 네 앞길을 가로막는 일이 될까 걱정스럽고 괴롭구나!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하시면서 매우 고민스러워 하시는 것이었다.
할머니를 위로하며 말씀드리기를,
“할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꼭 높은 학교를 나오고 공부만 많이 한다고 크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불량한 사람은 글을 많이 배운다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크게 나쁜 놈이 되는 것입니다. 높은 학교를 나오고 공부만 많이 한다고 크고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바라(正)야 큰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비록 할머니 모시고 지게를 지는 농부가 될지라도, 이 다음에 꼭 할머니 뜻에 어긋나지 않는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강의록이라는 책을 주문하여 공부하면 선생님 없이도 얼마든지 혼자 독학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소년은 강의록으로 독학을 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드디어 사흘 후 답변을 드리기로 한 날 약속대로 선생님이 찾아오셨는데 할머니께서는
“선생님의 말씀은 너무도 고마우시지만 우리는 선생님의 은혜를 함부로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형편대로 살겠습니다.” 하시며 극구 사양하셨다.
그리고 소년은 강의록을 주문하여 독학을 시작하였는데, 낮으로는 부지런히 일을 하고 밤에는 잠을 자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는 소년을 보고 온 동네 어른들이 사랑에 모여서 칭찬을 하면서 동네에서 재산이 좀 있는 몇 분이 힘을 합쳐서 이 소년을 대학까지 가르치도록 하자는 의논이 벌어졌다. 그러나 할머니께서는 그와 같은 동네 분들의 염려해 주시는 뜻은 고맙지만 역시 사양하셨다.
그리하여 다른 동무들은 모두 중학교에 입학하여 아침마다 멋있는 교복을 입고 멋있는 모자를 쓰고 책가방을 들고 학교 가는 길가의 도랑에서 소년은 청소를 하려고 걸레를 빨고 있다가 동무들과 마주치게 되면,
“너희들 학교 가니?” 라고 인사를 하였고, 그 동무들은
“현석이 너 뭐하니?” 라고 묻는 것이었다. 그러면
“나 걸레 빨아!” 라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대답하고 소년은 조금도 부끄럽거나 창피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하는 일에 대하여 항상 부끄러움이 없이 당당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정신보다 물질을 더욱 선호하며 가치 기준이 실종된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하는 신선한 교훈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 때에 이미 소년은 남다른 사색에 젖어 진리를 깨닫기에 이르렀다. 어린 소년은 매일 새벽에 할머니께서 힘드실까 봐 의례 할머니보다 먼저 잠에서 깨어 일어나 도랑에 나가 물을 길어 오며, 또 마당 쓸고 걸레 빨아서 방과 마루를 깨끗이 닦고 청소하는 일을 계속하시면서 한 가지 특별한 사색에 잠기게 되셨다.
‘걸레는 자기의 몸을 깨끗이 하여 더러운 곳을 깨끗이 닦아 내는 역할을 하니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걸레일수록 더욱 깨끗해야 더러운 곳을 깨끗하게 청소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드디어 소년에게는 이것이 하나님께 간절히 향하는 기도의 제목이 되었다.
“이 어린것이 자라서 장차 걸레와 같은 존재가 되게 하여 주소서!” 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어린 시절 소년의 가장 순수한 첫 번째 소망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소년의 정신은 장차 장성하여 결국 구세주가 되어 신령한 하늘의 걸레 곧 죄를 씻어주는 영적 걸레가 되시는 기초가 되었다.
그리고 낮으로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하고 논과 밭에 나가서 일을 하셨으며, 밤으로는 등잔불을 켜 놓고 밤잠을 자지 않고 강의록을 통해 공부를 하였으니, 그야말로 주경야독(晝耕夜讀)이었다.
그러면서 ‘등잔불과 촛불은 자기 자신의 몸을 불태워 주위를 밝게 비춰 주는 훌륭한 역할을 하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모든 사람을 깨우쳐 주고 남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며 일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셨으니, 드디어 이 또한 두 번째 기도의 제목이 되었다. 그래서
“이 어린것이 자라거든 장차 나를 희생하여 모든 사람을 밝게 비춰주는 저 촛불과 같은 존재가 되게 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셨으니, 이것이 어린 소년의 두 번째 순박한 소망이었다.
이와 같이 어릴 때부터 소년은 언제나 자신의 불우한 환경과 부모 없이 자라는 처지에 대해서 한 번도 원망하거나 비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처럼 특별한 환경에서 태어나 자라게 되므로 인하여 부유한 환경에서 자라는 다른 아이들이 생각할 수 없는 생각을 하게 되고 더욱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게 되었으니, 나는 불행하지 않으며 오히려 행운아다!’ 라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이와 같은 고백이 초등학생 때에 쓴 일기장에 기록되어 있다.
소년은 이처럼 어릴 때부터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몸소 친히 경험하게 되었으며, 그 무렵에 벌써 인생 문제 특히 죽음에 대해 깊은 상념에 빠지곤 했다.
요즈음 청소년들이 가정이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나 부모님들이 너무나 잘해 주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탈선을 하여 부랑아(浮浪兒)가 되는 일이 허다한 현실에서, 소년의 자라 온 어린 시절의 일들은 오늘날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청소년 문제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너무나도 신선한 교훈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소년은 이미 보통 아이들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보통 사람들이 하지 않는 남다른 행동을 하게 되었다.
그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마을 어귀에 지리산 노고단 아래 문수리 골짜기에서 흘러 내려오는 시냇물이 있는데, 거기에 ‘가마소’라는 소(沼)가 있다. 현재는 그 상류에 저수지가 생겨서 물이 아주 적게 흐르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추운 겨울이 되면 그 ‘가마소’에는 얼음이 꽁꽁 얼었다. 소년은 그 얼음을 깨고 들어가 매일 목욕을 하면서 몸과 마음을 강하게 단련하는 것이었다. 안 동네 어른들이 냇가 둑길로 지나가다가 어린 소년이 얼음을 깨고 목욕하는 광경을 보면서,
“바깥 동네 동춘댁 큰 손자래 !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한다더니 아마 머리가 돌았나 봐!” 라고 소곤대면서 혀를 ‘끌끌끌!’ 차며 안쓰러워하였다. 그러나 소년은 이처럼 어릴 때부터‘내가 먼저 깨끗하고 올바르지 않고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좋은 일을 할 수 없다’는 이치를 깨닫고 자신을 스스로 냉혹하게 연단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한 매일 새벽 3시 반경이면 일어나서 동네 뒷산에 올라가서 반반한 바위 위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동녘 하늘이 훤하게 밝아 오면 그 때에야 산에서 내려오곤 하였다.
어린 나이에도 그처럼 깜깜한 밤에 어두운 산 속 깊숙이 들어가서 홀로 앉아 기도를 한다는 것은 역시 보통 아이들로서는 도저히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인 것이다. 서리와 눈이 내리는 날이면 산을 내려올 때에 양쪽 바지가랑이가 얼어서 버걱버걱 소리를 내며 부딪치는 것이었다.
이 무렵에 이미 소년에게 하나님께 향한 세 번째 기도의 제목이 있었으니, 그것은
“하나님이시여! 이제 이 생명을 모두 하나님께 바치겠나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살겠습니다! 오직 당신의 뜻대로만 살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였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소년의 모든 소망을 다 묶어서 부르짖는 기도였다. 소년이 이처럼 어린 시절에 벌써 이와 같은 기도를 하기까지는 그 주변 환경이 더욱 그렇게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사방을 둘러 봐도 어린 소년이 마음을 의지하고 위안을 받을 만한 대상이 단 한 군데도 없다는 데서 심히도 외롭고 고독함을 느끼게 되었다. 한마디로 세상은 온통 싸늘한 찬바람만 몰아치고 있었다.
‘아! 천지는 칠흑같이 캄캄한 밤인데, 황량한 광야에 나 홀로 서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으며, 그것을 느꼈을 때에 온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기 시작했던 것이다. 의지하고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아이들은 부모도 있고 부러울 것 없이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으니, 이 소년처럼 애절하고 사무치게 하나님을 찾고 그리워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소년이 어릴 때부터 산 기도를 하였던 것을 영모님께서는 아시고 “이긴자가 산 기도를 통하여 은혜를 받은 것을 안 마귀가 산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므로 절대로 산 기도나 금식 기도는 하지 말라!”고 경계하여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로부터 속담에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하였다. 이처럼 어릴 때부터 다른 아이들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였으며, 다른 아이들이 생각할 수 없는 생각을 하고 계셨다.
그 후에 5 ·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고 국가 유공자 유자녀 학비보조제도가 생겼는데, 그로 인하여 소년은 다음 해에 바로 구례 중학교에 입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완고하신 할머니도 이 때만은 기뻐하시며 중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쾌히 승낙하시면서
“이번만은 할 수 없구나! 나라에서까지 너를 학교 보내라고 하고 네가 그처럼 기어이 공부를 하려고 하니까 이렇게 길이 열리고 마는구나! 이것은 너희 아버지가 피 흘린 값으로 공부를 하게 되는 것이다!” 라고 덧붙이셨다.
그리하여 소년은 중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구례 중학교에 다니게 되었으니, 그 때부터는 어엿한 중학생이 되었다.
학생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동생과 같이 항상 학교에 다녀오면 꼴을 한 망태씩 베어 와야 하고, 일요일이면 오전과 오후에 각각 산에 가서 나무를 한 짐씩 하루에 두 짐을 해 와야 하는 어려운 여건에서 집에서는 부모 없는 자식으로 지극히 불행한 처지였지만, 학교에만 가면 왕자처럼 대우를 받았다. 공부를 잘하고 특히 미술 등의 예능 활동에도 그 재능이 두드러져 선생님들로부터 사랑을 독차지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손자가 상을 타오면 할머니는 너무 기뻐하시며 상장을 큰방 위쪽 벽에다 붙여 두셨고, 계속 타 오는 대로 옆으로 붙이고 다시 두 줄로 붙여 두시고 좋아라 하셨다. 방학 과제물 전시회 때는 모든 분야에서 두루 다 1등 상을 차지하여 상장과 상품을 한 아름씩 타게 되니 할머니는 아예 대나무로 엮어서 상장을 담아서 쌓아 놓는 바구니를 마련하셨다.
할머니는 손자가 여러 가지 많은 상을 타 가지고 와서 앞에다 늘어놓고 설명을 하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뒤로 돌아 앉아만 계셨다. 손자는 영문을 몰라서 어리둥절하였지만 할머니의 눈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중학교 시절에도 역시 학생은 그야말로 황태자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계속 재능이 너무 두드러지게 나타나면 이긴자의 정체가 사람들에게 노출될까 봐 별안간 난데없는 돌발 사건이 벌어지게 하셨으니, 초등학교 3학년 때는 갑자기 온 몸에 열이 펄펄 끓고 앓아눕게 되었다. 2개월 동안 장티푸스를 앓아서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되니 학업성적이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에도 연말 학력 평가에서 전교 수석을 차지하였으나, 중학교 3학년 때는 중간고사 기간에 갑자기 할머니가 고질적인 신병으로 심히 앓아누우시니 밤을 새워가며 간호하였으며, 그 다음날 학교에서는 시험지를 받아 놓고 깊이 잠이 들어 버리므로 시험지를 백지로 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금 학생의 두각이 너무 드러나는 것을 막으셨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전교 재건학생회 위원장’에 당선되었다. 요즈음 말로 하면 ‘전교 총 학생회장’인 것이다. 특히 학생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미술 활동으로 그 능력을 나타내시다가 중학교 3학년 때는 ‘세계 학생 미술 전시회’에 입상하기도 하여 학교의 명예를 빛내기도 했다.
방과 후에 미술실에서 밤늦게까지 석고 데생을 하고 나면 밤 11시나 12시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그러면 그 때에야 학교 교문을 나서서 집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학생은 지금처럼 아스팔트 포장도 되지 않은 비포장 자갈길을 걸어서 토지면 오미리 집에까지 약 십 오리(6㎞) 정도 되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길을 걸어서 돌아오곤 하였다.
그 길은 어른들도 구례 장날 장에 갔다가 해가 지고 나면 도깨비가 나온다고 하며 무서워서 못 다니는 길인데, 어린 학생은 혼자서 그 길을 매일같이 걸어서 다녔던 것이다.
5. 거울 속의 하나님!
그러던 중 충격적인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그 해(1965년도)에 큰 홍수가 났는데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하교 길에 집으로 돌아가려고 하니 구례 앞 들판이 모두 바다같이 물에 잠기고 모든 교통이 막혀서 도저히 집에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학생들은 구례읍의 친척집이나 친구들 집에서 잠을 자야만 했다. 그러나 학생은 이미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구례 토지교회를 다니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기 시작했으므로 학생은 이와 같이 홍수 때문에 집에 돌아갈 수 없게 되자, 조금도 고민스럽게 생각하거나 주저하지 않고 아주 자연스럽게 구례읍 봉성산(鳳城山) 아래 어느 아담한 교회를 향해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동안에 무척 많은 비가 오더니, 이제는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하늘은 맑고 서쪽 하늘에 기울고 있는 태양은 유난히도 해맑아 보였다.
바로 눈앞에 나타난 교회는 아주 조그맣고 아담한 시골 건물이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시무하는 목사나 전도사는 물론, 지키는 사람도 없는 것처럼 보였으며 교회 옆 사택 같은 건물도 빈집이었고, 교회당의 현관문은 열려서 바람에 흔들려 삐거덕거리고 있을 뿐 그야말로 조용한 시골 교회 건물이었다.
교회 주위의 산에는 비가 오고 난 후라서 수목이 더욱 울창했고, 나뭇잎들은 햇빛을 받아 싱싱하고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고, 잡초와 대나무 죽순들이 사람의 키보다 높이 자라 우거져 있었다. 교회는 마치 밀림 속에 묻혀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학생은 스스럼없이 그 교회 현관문을 통해 교회당 안으로 들어섰다. 정면에는 목사나 전도사가 올라서서 설교를 하는 높은 단상이 있고, 그 옆에는 기도실이 있었다. 학생이 오른쪽 기도실 문을 열어 보니, 창문으로 비가 들이쳐서 마루 바닥이 젖어 있고 구석 쪽의 마루 판자가 썩어서 조금 내려앉아 있었다.
학생은 순간 ‘아! 오늘밤은 여기서 기도를 하며 밤을 새워야겠다!’고 마음속으로 작정을 했다. 주인 없는 교회에 찾아 들게 되었으니, 그 날 밤은 학생이 그 교회의 주인이 되었다. 여름철이라 모기들이 떼로 몰려와 얼굴과 양팔에 새까맣게 달라붙어서 극성스럽게 물어뜯었다. 그러나 학생은 거기에 신경 쓰지 않고 모기들에게 아예 맡겨 두고 일체의 잡념을 떨어버리고 정신을 집중하여 일심으로 기도하기를 시작했다.
“오늘밤 안으로 저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세요! 하나님을 보지 않으면 하나님을 확실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하고 기도를 하였다 .
어릴 때는 아무런 생각 없이 무조건 하나님을 믿었다. 그런데 그 무렵 학생에게 하나의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을 왜 볼 수 없는가? 하나님은 분명히 사람들에게 나타나 보여 주실 수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갑자기 몹시도 보고 싶었다.
그리하여 학생은 바로 이 날, 밤을 새워 가며 일체의 다른 잡념을 떨쳐 버리고 정신을 집중하여 기도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는데 밖의 예배실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기도하는 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학생은 “아! 이제 새벽이 되어 사람들이 기도하러 모여 왔나 보다.”라고 생각하고 이제 기도를 그만 마치고 예배실로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보니, 온 얼굴과 양 팔뚝에 모기들이 물어뜯어서 벌써 부스럼 딱지가 시커멓게 더덕더덕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 부스럼 딱지를 손으로 쓸어 내니 쉽게 모두 떨어져 버리고 얼굴과 팔뚝은 순식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깨끗해졌다.
그리고 나서 학생이 기도실 문을 열고 예배실로 나오니 많은 사람들이 모두 엎드려서 이마를 마루 바닥에 대고 크게 소리 내어 열심히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교회 안 벽에 커다란 대형 거울이 걸려 있었다. 학생은 그 대형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이것이 웬일인가? 그 거울 속에 보이는 학생의 모습이 백발의 신선이 되어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머리와 눈썹 그리고 배에까지 길게 드리워진 수염, 모두 백옥같이 하얀 백발이었다. 거기에 하얀 도포를 입고 손에는 묵직한 검은 색의 지팡이를 들고 계시는 신선의 모습이었다.
또한 신선의 눈은 너무나도 근엄하였으며, 속눈썹은 모두 마치 고사리처럼 또르르 말려서 늘어져 있었는데, 그 속눈썹을 만져서 잡아당겨 보니 다시 또르르 말려서 원래대로 다시 감기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거울 속에 나타나 보이는 신선의 모습이 너무나 위엄이 있고 또 그 눈매는 너무나 근엄한지라, ‘이것이 과연 꿈인가 생시인가?’하고 학생은 자신의 왼쪽 손등을 힘껏 꼬집어보았다. 그랬더니 ‘아! 따갑고 아프다! 그럼 꿈이 아니고 생시구나!’하고 생각했다. 그 순간 꼬집은 손등의 따가움에 학생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눈을 떴다.
그리고 나서 정신을 차려 보니 학생은 아직도 기도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로 옆으로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상황은 기도하는 중에 비몽사몽간에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환상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니 엉덩이와 무릎, 다리가 모두 콘크리트처럼 굳어져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한쪽으로 뒹굴어서 한참 동안 옆으로 누워 있다가 몸이 풀려서야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학생은 기도실에서 밖의 예배실로 나와 보았다. 예배실에는 아무도 찾아 온 사람이 없었고 조용하기만 하였다. 창 밖의 숲에서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만 생생하게 예배당 안으로 쏟아져 들려 왔다.
그런데 학생이 그 교회당을 나오면서 문득 간밤에 일어났던 그 엄청난 환상과 함께 참으로 여러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왜냐하면 이 교회는 소위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를 구세주라고 믿는 기독교의 교회당이 아닌가? 하나님을 보여주시라고 하였는데, 예수가 나타나거나 소위 예수의 아버지가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동안 기독교의 고정관념과는 전혀 다르게 학생 자신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학생은 이러한 일에 대하여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밤새 하나님을 보여 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는데 보여 주신 하나님은 바로 신선의 모습을 한 자기 자신이었으니, 이는 감히 두렵고도 엄청난 환상이라고 생각하여 마음속에만 깊이 간직해 두고 아무에게도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 후 학생이 장성하여 전직 전도관 관장 출신으로서 1982년도에 역곡의 영생교 승리제단에서 연단을 받고 계실 당시, 희고 찬란한 석판(石版)에 ‘판석(判席)’이라고 기록하여 주시면서
“이후로는 네 이름을 이와 같이 하리라! 이는 곧 나의 이름이로라!” 하시는 하나님의 영음(靈音)을 다시금 들으시게 되었다. 그때에 온 방안에 앞이 잘 안 보일 정도로 이슬이 뽀얗게 내렸다. 그때에야 비로소 이긴자 성주님은 한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어렸을 때부터 일어났던 지나간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어린 세 살 적에 삿갓을 쓴 도사가 찾아 와서
“이씨 가문에 큰 인물이 나셨도다! 왕이 나셨도다! 장차 그 아이가 장성하거든 이름을 ‘판석(判席)’이라고 지으시오!”라고 하였던 일이나, 중학교 3학년 때(18세)는 하나님을 보여 주시라고 기도를 하니 신선의 모습을 한 자기 자신을 보게 되었던 이 모든 일들이 아무 의미 없는 우연한 일들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시게 된 것이다. 과연 이 모든 것은 미리 짜여진 하늘의 각본에 의해서 그대로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학생은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곧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학생들 간에는 “중학교 학생회장이 결혼한대!”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초등학교를 9살에 들어갔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보다는 나이가 한 살은 많은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가정 형편상 1년 동안 집에서 일을 하다가, 다음 해에 입학을 했기 때문에 동급생들보다 나이가 2살 정도 많았다. 그래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결혼할 때는 19살이었다.
이와 같이 결혼을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결혼하게 된 내막은 그야말로 기막힌 사연이 있었다. 일찍이 조실부모하여 할머니 할아버지의 슬하에서 자라나는 두 어린 손자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제일 고마우신 분들이었다.
그런데, 할머니의 걱정은 항상 두 손자들이 장성하기 전에 혹시나 먼저 돌아가시게 되면 부모 없는 두 손자들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할머니가 이제는 연세가 많으시니 날로 신병으로 앓아누우시는 일이 잦아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어서 속히 우리 현석이를 결혼시켜서 손자며느리 손에 따뜻한 밥 한 그릇만 얻어먹고 죽었으면 여한이 없겠다!”라는 넋두리 같은 말씀을 자주 하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학생이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큰 숙모님과 고모님 두 분이 조카(학생)를 불러 앉히고 조용히 이야기를 꺼내시는 것이었다.
“너 혹시 학교 다니면서 친하게 잘 아는 여학생이라도 있느냐?”
“왜 그러십니까? 저는 오직 공부밖에는 모릅니다. 친하게 잘 아는 여학생은 없습니다.”
“그러면 잘 알겠다. 왜 이런 말을 조카한테 하느냐 하면, 할머니가 저렇게 자주 아파서 누우시니 걱정이 되어 그런다! 할머니가 늘 자주 노래처럼 하신 말씀이 ‘우리 현석이 결혼시켜 손부 손에 따뜻한 밥 한 그릇 얻어먹고 죽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하신단다. 우리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너한테 죄 받을 말인지는 모르겠다만, 일찍 결혼을 하여 할머니께 밥이라도 해 드리면서 편히 모시면 어떻겠느냐?”하시는 것이었다.
그러자, 학생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저는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 공부도 많이 하고, 사회적으로 출세도 하여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을 때에, 느지막하게 결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였는데, 할머니를 생각하면 무어라고 말이 안 나옵니다.”하며 학생은 그 일로 고민을 하다가 큰 숙모님과 고모님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드렸다.
“할머니를 편히 모시는 일이라면 지금이라도 결혼을 하겠습니다!” 드디어 결심이 떨어진 셈이었다. 학생은 자기 자신의 장래만을 중요시 여기지 않고 그토록 정성을 다하여 키워 주신 하늘같이 고마우신 조부모님께 효도하는 일이라면 어떠한 어려운 일이라도 감수하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러자, 학교 다닐 때에 친하게 잘 아는 여학생이라도 있느냐고 물어보시고, 그러한 사람이 전혀 없다고 말씀드리자, 사실은 할머니가 눈여겨보고 계시던 이웃 동네 처녀가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처녀의 집에서도 이미 학생의 할머니가 노령이시니 얼마 안 가서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을 예견하고 있었으며, 양가의 어른들은 이미 서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그 때에야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학생만이 전혀 모르고 있었던 셈이다.
그리하여 학생이 중학교 졸업을 하고 난 10여 일 후에 바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고, 결혼식은 전통혼례로 가마를 타고 갔으며, 동네 선배 형들이 가마를 메고 가게 되었다. 이웃 동네까지도 “하죽 부락 동춘댁 손자는 할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소년 장가를 갔다네!”하고 소문이 났다. 부모 없는 손자들을 애지중지 거둬서 키워 주신 할머니 할아버지를 편히 모시기 위해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 학생의 효심은, 온 동네 어른들의 많은 칭송과 축하를 받기에 이르렀다.
바로 이러한 사연으로 결혼을 그처럼 일찍 하게 되었다. 중학교 3학년 학생회 임원들과 담임선생님도 오셔서 축하해 주셨다. 그 후 학생은 광주로 유학을 하였고, 결혼을 한 부인은 구례 시골집에 남아서 조부모님을 모시고 살게 되었다.
6. 물질의 욕심마귀를 이기다
1967년도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광주 전도관에서 박태선 장로님을 만나 뵙게 되었고, 1970년도에 전도관에서 전도사로 발령을 받고 시무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전도사들의 귀양살이로 여기는 구례 전도관에 자원하여 3년 6개월 동안 보리가루 죽으로 연명을 하며 뿌리치기 어려운 물질의 시험과 연단을 받으면서도, 여건이 좋은 사회 직장에서 초빙하겠다는 권유나, 그 외 여러 가지 사회적인 유혹에도 절대 흔들림 없이 전도사의 길을 사수하였다.
다른 전도사님들은 구례 전도관이 어려운 제단이기 때문에 서로 가지 않으려고 했고 협회에서조차 전도사의 귀양살이하는 곳으로 정해 놓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현석 전도사님은 가족들까지 데리고 그 어려운 제단에 스스로 자원하여 들어가셨다.
전임 전도사들은 독신의 몸으로도 한 두 달만 지나면 더 이상 못 견디고 다른 데로 보내 달라고 애원하는 곳인데 이현석 전도사님은 세 아이들과 함께 모두 다섯 식구가 들어가서 3년 6개월을 견디시며 부여받은 사명을 완수하셨다. 이현석 전도사님이 구례 전도관으로 부임할 때 주위의 동역자들 중에는
“이 전도사는 무슨 통뼈냐? 독신 전도사도 못 견디는 제단에 가족까지 데리고 들어가니 저 친구는 살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죽으려고 들어가는 것이다.”하고 비웃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에 이현석 전도사님은 사택 방안의 벽에다 붓글씨로『殉敎精神』(순교정신)이라고 한문으로 써 붙이고 매일 새롭게 되새기면서 열심히 사명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셨다. 이현석 전도사님은 학생 시절에 환상으로 하나님을 보았던 그 곳 구례에 다시 들어가셔서 험하고 어려운 역경 속에서 기도에 일로 매진하시면서 이긴자의 길을 개척해 나아가시게 되었다.
마치 중학교 시절에 구례읍 뒷산에서 밤새워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보았던 그 교회보다 더욱 더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고 경제적으로 더욱 어려운 구례 전도관에서, 이제는 ‘순교정신(殉敎精神)’으로 사투의 혈전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현석 전도사님은 그 때 당시 구례 전도관에서의 시무 기간이 다른 어느 전도관에서 시무하실 때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속에 가장 깊이 들어갈 수 있었다고 후일 술회하셨다.
곧 이현석 전도사님이 전도사 생활 12년간을 통해서 가장 하나님 앞에 가까이 향했던 기도생활은 오히려 가장 악조건이라고들 말하는 구례 전도관에서의 3년 6개월 동안이었다고 술회하시는 것이다.
다른 전도사님들은 어려운 제단에서 몇 수 안 되는 교인들의 피동적인 신앙 태도에 환멸을 느끼고 실족하여 휴직하거나, 단 몇 개월도 못 견디어 도망을 가 버리기도 하였으나, 이현석 전도사님은 오히려 그러한 악조건 속에서 더욱 열심히 남모르게 기도로 매달리고 온 정열을 다해 충성하셨으므로, 구례 전도관과 같은 악조건이 오히려 이현석 전도사님의 신앙에 자극제가 되어 더욱 강렬한 신앙의 불을 붙여 주고 마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이현석 전도사님은 1974년경 쯤 구례 전도관 시무 당시 서울 제3중앙에서 전도사 재수강을 받으셨는데 수료 후 각자 희망하는 지역으로 발령을 내겠다고 했지만, 당시에 신학원 수료식에서 전국 1위의 성적을 거두셨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교역자들처럼 부임하고자 하는 희망지를 요청하지 않으셨다.
서울 돈암동 제13중앙 등에서 이현석 전도사님이 오시기를 요청하였으나, 그 물질적인 시험으로 고생하고 계시던 구례 전도관으로 다시 발령을 내줄 것을 요청하여 구례 전도관 시무를 계속하시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전도관 협회 인사 기록 카드에도 나타나 있을 것이다.
어려운 악조건이라고 해서 협회에서 발령을 내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스스로 타 지역으로 발령을 요청한다는 것은 올바른 성직자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하셨으며, 물질적인 시험으로 어려움을 겪으시던 구례 전도관에서 이러한 기회에 다른 데로 발령 신청을 한다는 것은 결국 그 시험에서 이기지 못하고 패한 것이라는 생각에서 발령 신청을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이현석 전도사님은 본래 어릴 때부터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면서도 물질의 욕심이 전혀 없으셨다. 그토록 아끼시고 사랑하며 키워 주셨던 할머니께서는 그와 같이 물질의 욕심이 없으신 이현석 전도사님을 보시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눈만 붙어 있는 사람이면 모두 욕심이 차서 돈을 벌려고 눈이 뒤집혀 있는데 네 창자는 도대체 어떻게 된 창자이기에 그렇게도 욕심이 없으며 도무지 돈을 모른단 말이냐? 지금 구례 전도관에서는 밥이나 제대로 먹고 사느냐? 너만 못한 사람들도 다 돈을 벌어서 잘 사는데, 너는 무엇이 모자라 먹고사는 것도 걱정이 된단 말이냐?”
하고 걱정을 하시며, 구례 전도관에서 3년 6개월을 시무하시는 동안 할머니는 손자가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지 늘 염려하시며 눈물짓곤 하셨다.
그 때마다 손자는
“염려하지 마세요! 아무 걱정하실 필요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하고 할머니를 위안시켜 드리곤 하셨다. 할머니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게 된 이유는, 이현석 전도사님이 구례 전도관에서 시무하고 계실 때에 당시 광주 지방원호청(후일의 보훈청) 순천지청에서 직원들이 나와서 한일은행 본점에서 근무하라고 연락하였지만 사양하고 전도사의 길을 고수하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현석 전도사님은 이러한 물질 시험을 못 이겨서 전도사를 그만두고 나가면 신앙을 완전히 저버리게 되는 것이니, 이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셨다. 그토록 고생을 하면서 고귀하게 지켜 온 신앙의 길을 물질의 시험을 이기지 못해 망친다면 되겠는가? 은행에서 근무하라는 통보가 온 것은 물질적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그 약점을 이용하여 거꾸러뜨리려는 간교한 마귀의 시험이라고 생각하셨다. 그리하여 그 보훈청 직원들에게
“그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돌려주세요! 저는 저의 가는 길이 따로 있으니 염려 없습니다.”
라고 정중히 말씀하셨지만, 오히려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멀뚱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구례 전도관의 건물이 너무나 초라한 것을 보고는 식생활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였으리라. 그러면서 그 분들은 이현석 전도사님을 오히려 정신이 좀 이상하게 된 사람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 때는 구례 전도관 시무기간 중에서도 가장 어려울 때였으며 보리가루 죽마저 먹기가 힘들 지경에 이르렀을 때였다. 말하자면 물질적으로 가장 어려울 때에 은행에서 근무하라는 통보가 왔으니 마귀는 가장 절호의 기회에 공격을 해 온 셈이었다.
불경(佛經)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지붕을 엉성하게 이면 비가 새듯이, 마음에 능히 수양이 없으면 탐욕이 이를 뚫을 것이다.’
(佛經 法句經)
또한 성경(聖經)에도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는데, 이는 모든 죄의 근본이 바로‘나’라는 주체의 영을 중심으로 하는 이기심 곧 욕심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聖經 야고보서1장 15절)
이 욕심의 마음이 가장 악한 마음이요 마귀의 영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욕심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당시 이현석 전도사님은 이처럼 험한 물질의 시험을 통하여 그 탐욕의 늪을 헤치고 나오는 마음의 싸움에서 완전히 승리하신 것이다.
그와 같이 보훈청에서 오신 분들을 돌려보내고 이현석 전도사님이 사택 방문을 열고 들어서시는데 ‘아! 그러나 내 가족들에게는 정말 미안하구나!’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 때 부인은 영양실조로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었으며, 이 전도사님께서 등을 받쳐서 일으켜 주셔야 겨우 일어날 수 있을 정도였다.
그 무렵 큰딸은 구례읍 초등학교에 입학하였는데, 번번이 조회 시간에 운동장에서 쓰러져서 동무들의 등에 업혀 오는 것이었다. 구례 전도관에서 3년 6개월 동안 보리가루 죽으로 연명을 하면서도 토지 숙부님 댁에 가서 쌀 한 톨 도움 받으려고도 하지 않고, 어려운 사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시니, 그와 같이 굶주리며 고생하시는 줄을 후일 구례 전도관을 떠나신 후에까지도 숙부님 댁에서는 아마 전혀 알지 못하셨을 것이다.
더군다나 구례 전도관을 떠나실 때까지 숙부님이나 숙모님께서 구례 전도관에 한 번도 찾아 주지 않으셨는데, 이현석 전도사님께서는 아마 자기 실속은 챙기지 않고 하나님만을 열심히 믿는다고 하여 반대하신 나머지 늘 못 마땅히 생각하셨던 것이라고 큰 숙부님의 심정을 헤아리시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사정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1970년도 당시에 광주에서 처음 전도사의 길로 나가겠다는 조카의 뜻을 아시고, 큰 숙부님께서 할아버지 할머니는 시골로 모셔가겠다고 하시며 조카의 명의로 된 시골집과 논은 조부모님이 사시는 동안 생활을 하셔야 되고 돌아가시면 두 분의 제사답으로 써야 한다고 하시며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명의 이전하여 넘기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에 이현석 전도사님은 그와 같은 숙부님의 뜻에 한마디의 대꾸나 불평도 없이 모두 다 내놓으셨다. 큰 숙부님께서는 그 해 가을 추수하여 쌀 한 가마니를 광주로 가져다주시며 금년 농사지은 것 좀 나눠 먹기 위해 가져왔다고 하신 후 그 뒤로 다시는 쌀 한 톨 나눠주시는 일이 없었다.
그러한 일을 보면 집안 어른들의 반대와 핍박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으며, 이현석 전도사님의 사욕이 없는 그 청정한 마음을 또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현석 전도사님이 6살 되던 해에 어머니와 이별하고 구례 집에 돌아오신 후 조부모님께서는 숙부님 식구들과 함께 사시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에 숙부님 식구들을 분가시켜서 내 보내신 후 8년 만에 숙부님 식구들과 다시 합하시게 되셨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숙부님 식구들을 분가시키시면서 “늙은 이 할아버지와 핼미가 일을 하다가 지쳐서 논바닥에 쓰러져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단 한 끼라도 부모 없는 손자들 속 편하게 밥을 먹이면서 하루라도 편안하게 오순도순 살다가 죽겠다.”고 굳게 결심하시면서 어린 두 손자와 따로 사시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할머니께서는 손자가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만을 지극히 소망하는 것을 아시고, 그만큼 자랐으니 이제는 비록 맨 몸뚱이일지라도 열심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고, “네 소원대로 하나님을 잘 믿고 살아가도록 해라!”하셨다. 이리하여 이 전도사님은 사실상 당시에 신앙의 길을 절대 반대하던 집안에서 신앙의 자유를 얻어 완전히 독립하여 나오셨다.
그러나 후일 이 전도사님이 구례 전도관 전도사로 시무하시면서 교인들도 몇 수 안 되고 제단의 살림이 어려운 형편이라 보리가루 죽으로 연명을 하시던 초기에는 아버지의 6·25 전몰군경 유가족 연금 증서로 연금을 타서 생활에 상당한 보탬을 받고 있었다.(당시 6개월마다 3,600원)
할머니께서 손자에게 “그 연금 증서만큼은 어려운 형편인 네가 가지고 있으면서 타서 쓰도록 해라!”하시어 보관하고 계셨던 터에 그 연금은 제대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구례 전도관에서 유일한 생계 대책이 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큰 숙부님께서 구례 전도관에 오셨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할머니가 토지에 계시니 토지 주소로 연금을 타야 되겠다!”고 하시며 그 연금 증서를 내놓으라고 하시므로 “예! 알겠습니다.”하고 아무런 대꾸 한마디 없이 그대로 순종하여 연금증서를 내 드렸다.
이현석 전도사님이 초등학교를 다니던 어리실 때, 아버지의 연금이 크게 목돈으로 나온 적이 한 번 있었는데, 그 돈으로 할머니께서는 숙부님과 의논하여 논을 샀던 일도 있었다. 그 연금은 곧 돌아가신 아버님의 피의 결정체였으며, 가족들의 거의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는데 그 연금 증서마저 빼앗아 가버린 것은 목숨을 연명하는 생명줄을 완전히 끊어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숙부님이 살고 계시는 그 기와집이 바로 그 후로 아버지의 연금을 타서 지은 집이라 하였다.
큰 숙부님께서 그 연금 증서를 가져가신 후 이현석 전도사님이 보리가루 죽으로 연명을 하던 3년 6개월 동안의 구례 전도관 시무를 마치고 충북 제천 전도관으로 떠나시는 날까지 숙부님은 두 번 다시 구례 전도관에 찾아오시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받아야 하는 시험이라고 생각하셨다.
이현석 전도사님은 그 모든 시험을 아무런 불평이나 원망도 없이 잘 이기셨으니, 오히려 더욱 강하게 연단을 시켜 주신 숙부님께 더 감사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또한 숙부님은 집안의 장손인 조카가 미워서 그러신 것이 아니라, 전혀 사리사욕을 모르는 조카에게 일부러 자극을 주시려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셨을 것이라고 지금까지도 굳게 믿고 계신 것이다. 왜냐하면 숙부님과 숙모님도 부모님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가치 기준이 흔들리고 배금사상(拜金思想)이 팽배하여 돈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고 하는 황금만능주의(黃金萬能主義)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이 얼마나 신선한 교훈인가? 이것이 바로 신앙인이 지켜 나가야 할 바른 자세인 것이다. 오늘날 신앙인이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지를 스스로 돌아보아야만 할 것이다.
이현석 전도사님은 이처럼 한 인간으로서 또한 신앙인으로서 가장 참되고 바르게 사는 도리의 근본은 오직 하나님만을 지극히 바로 섬기며, 자기 자신을 던지고 희생하는 신앙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친히 몸소 실천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성신을 받은 사람이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이 그 속에 차 있는 고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한 피 받은 형제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식이므로, 모든 사람을 하나님처럼 서로 섬기며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율법(律法)의 으뜸이 되는 것이다.
돈 몇 푼에 하나님을 향한 고귀한 신앙이 팔려 넘어가는 값어치 없는 인간이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이 물질로만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개인의 욕심 채우기만을 위해 사는 이기주의적 삶은 마치 돼지와 같은 삶인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도리의 근본은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충효(忠孝)’의 정신(精神)에서 비롯된다고 가르쳤다. 충효란 넓은 의미로는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하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살아가는 도리의 근본을 가장 잘 나타낸 것으로서, 부모는 자기가 태어난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같기 때문이다. 이는 곧 하나님을 숭상하는 경천사상(敬天思想)이다. 부모님은 곧 하나님이다.
부모님을 공경하며 효도하지 않는 자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자기를 낳아 주시고 길러 주신 그 높으신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할 줄도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예절을 갖추고 존중할 줄을 알며 은혜에 보답할 줄 아는 참된 인간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조상들은 예로부터 인간의 모든 도리와 예절의 근본은 오직 부모님을 공경하는 효도로부터 비롯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충효의 정신은 인간으로서의 의무와 사명을 가장 잘 나타낸 것으로서, 곧 모든 사람을 위해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아름다운 정신으로 하나님처럼 서로 섬기며 사랑하라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정신인 것이다. 곧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지 말고 모든 사람들을 위해 널리 이롭게 봉사하고 헌신하는 아름다운 인간이 되라는 의미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충성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 성주님의 가르침의 요지가 되는 것이며,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대강령인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에 이현석 전도사님은 오직 전도사의 직책에 충성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에 충성하는 것임을 깨달으셨다. 전도사로서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며, 모든 교인들을 위하고 또 여러 사람들을 전도하여 복된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길이 곧 하나님을 지극히 섬기며 또한 그 나라에 충성하는 길이라고 믿으셨다.
하나님을 직접 만나 뵙고 지극히 경외하며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지극히 충성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일이며 최고로 선한 일인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도 나라에 충성하고 애국을 한다는 것은 목소리 높여 애국이나 부르짖는 국회의원이나 정치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각 분야에서 저마다 자기가 맡은 직분에 충성을 다하며, 힘써 노력하여 다른 사람들과 협동하여 더불어 공생공영(共生共榮)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의 단군성조(檀君聖祖)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의 정신을 잘 설명해 주시는 말씀인 것이다.
이현석 전도사님은 어렸을 때에 일찍이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시기를, “하나님이시여! 이 생명을 전체 하나님께 바치겠나이다!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겠습니다. 앞으로 하나님의 뜻대로만 살도록 인도하여 주소서!”라고 하셨다니, 오늘날까지 오직 이 한 정신으로만 살아오신 꿋꿋한 신앙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이현석 전도사님은 언제나 모든 일을 하나님의 도안에서 행하는 것만이 최고로 의로운 일이라고 판단하셨다.
나라에 대한 충성도, 부모님에 대한 효도도, 형제의 사랑도 온전히 하나님의 자유율법 안에서 행할 때에 더욱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되고 최고의 의가 되는 것이다.
전도사의 길은 순교자의 길이며 동시에 참다운 지도자의 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길은 결코 평탄한 길만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좁고 험난한 길인 것이다. 이현석 전도사님은 스스로 자신을 희생하여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빛을 밝히고 봉사하는 마치 촛불과 같은 신앙으로 자신을 불태우고 계셨다. 스스로 순교자의 길로 나아가셨다.
그리고 마치 자신을 더욱 깨끗하게 하여 세상의 더러운 곳을 깨끗이 닦아주는 걸레와도 같이, 더욱 정결하고 깨끗하게 씻음 받기 위하여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며 울부짖기를 쉬지 않고 계속하셨다.
당시에 아무리 악조건인 제단이라 할지라도 전도사 자신의 희생의 눈물과 기도의 도수가 찰 때에 비로소 그 제단이 부흥되고 모든 악조건도 호조건으로 열리게 된다는 사실을 직접적인 영적 싸움을 통해서 체험하시고 이를 강하게 증거함으로써 모든 교역자들의 귀감이 되셨다.
그 제단이 부흥이 되고 안 되는 것은 교인들이나 외부적인 조건 때문이 아니오, 오직 전도사 자신에게 달렸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현석 전도사님은 어려운 제단에서 고생을 하면서 낙심하고 불평불만을 하는 다른 전도사님들에게 그 체험담을 들려주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셨던 것이다.
이현석 전도사님께서 삼천포 시찰장으로 시무하실 당시, 마산중앙 교역자 하기 수련회에서 구례 전도관에서 시무하시며 역경을 이기고 일어섰던 체험담을 말씀하실 때 많은 교역자들의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기도 하셨다.
구례 전도관에서의 3년 6개월이 지난 후 1975년 3월 7일자로 협회로부터 ‘충북도내 시찰장 제천 전도관 시무를 명함’이라는 발령장을 받고서야 그 곳을 떠나시게 되었다. 제천 시찰장으로 시무하는 동안 영모님을 밀기 위하여 노력하시는 눈물겨운 충성심은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의 표상이 되셨다.
‘나’라는 주체의 영을 죽이는 첫 단계가 물질의 욕심감정 이기심 마귀를 죽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 사함 받는 단계도 첫째 물질의 욕심 죄를 사함 받는 것이요, 그 후에야 두 번째로 음란죄가 사해지게 되고, 그 음란죄가 빠져 나와야 원죄가 빠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죄의 원흉이 바로 ‘나’ 라는 존재 마귀로부터 비롯된 욕심감정 이기심으로 인한 탐욕을 벗어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식욕, 수면욕, 성욕, 명예욕, 물욕 등의 모든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그 죄가 장성하여 사망에 이른다는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날 이긴자 성주님을 통하여 죄를 사함 받고 의롭게 이루어지는 데는 제일 먼저 물질의 시험을 이기고 모든 물질의 탐욕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의 길로 가는 첫 걸음인 것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聖經 야고보서 1장 15절)
죄의 종류는 헬 수 없이 많으나, 피의 흐름으로 구분한 죄의 종류를 대별하여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하면, 아담과 해와가 마귀에게 패함으로써 인생이 죽음에 이르게 된 최초의 원죄가 있고, 혈통을 통하여 조상으로부터 이어받은 유전죄가 있으며, 자기 자신이 지은 자범죄가 있다.
그러므로 이긴자를 통하여 모든 죄를 사함 받으려면, 먼저 모든 탐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다시는 자범죄를 짓지 않고, 받은 바 은혜를 간직할 수 있어야 혈통을 타고 조상으로부터 흘러 내려온 유전죄가 씻겨지고, 그 다음에 비로소 원죄가 뿌리째 뽑아지고 의롭게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누구든지 변하여 의롭게 이루어지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