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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29일은 자유여행을 출발한지 닷세 째 되는 날이다.
Ibis Budget Nuremberg City M에서 조식을 마치고 다시 로텐부르크 오프 데어 타우버(Rothenburg ob der Tauber)로 이동했다.
로텐부르크 오프 데어 타우버(Rothenburg ob der Tauber)를 줄여서 로텐부르크(Rothenburg)라고 도 한다.
로텐부르크(Rothenburg)는 독일 남부, 바이에른 주 북서부 타우버(Tauber) 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다.
오후 시간대라 숙소를 먼져 예약해야 하였다.
그래서 캠핑장으로 이동했다.
캠핑장아라고 하지만 이것도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구할 수 없기때문이다.
로텐부르크(Rothenburg)를 우회하여 변두리를 달리고 있다.
로텐부르크(Rothenburg)성이 보였다.
언덕을 올라 챈 다음 다시 꾸불꾸불한 도로를 돌아 언덕 아래로 이동했다.
캠핑장으로 진입하는 도로는 1차선으로 겨우 승용차 2대가 교차할 수 있었다.
도로 양쪽은 삼림이 울창하고 아름드리 소나무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문명 권하고는 거리가 먼 태고적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주택은 보이지 않고 사람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날씨도 청명했다.
로텐부르크 이정표
로텐부르크 캠핑장
좁은 도로를 따라 계속 이동하고 있었는데 주택이 몇채 보였다.
지역 주민의 보금자리인 주택도 문화의 혜택을 일찍이 포기하고 있는듯 했다.
헐어진 상태 그대로 살아가고 있었기때문이다.
이곳은 캠핑장으로 최고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조금 더 임도를 따라 내려갔더니 캠핑 장이라는 안내 간판이 눈에 띄었다.
로텐부르크성 성문
캠핑장은 외부세계와 단절되어있었다.
사방이 숲으로 우거져있고 녹색 활엽수가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계곡물이 흐르는 소리가 유난히 커서 귀청을 울리고 있었다.
캠핑 카가 주차되어있는 곳은 숲속의 그늘이었다.
그늘은 천연의 휴식공간이었다.
로텐부르크성 내부
그늘 사이에 텐트도 들어서 있었다.
벌목하거나 인위적인 방법으로 공간을 확보한 것 같지는 않았다.
숲속의 공간 그대로를 캠핑장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독일인들의 자연사랑에 대한 진면목을 목격하고 감탄했다.
보도불록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자연사랑과는 개념이 달랐기때문이다.
독일인들에게 캠핑 장은 삶의 가치를 높이는 제2의 보금자리나 다름없었다.
거부 들의 초호화 캠핑 카가 주차되어있는가 하면 텐트도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격식이 없었다.
경제적 신분차이도 느낄 수 없었다.
캠핑 카는 사적 생활공간이다.
텐트도 마찬가지다.
철물로된 상호 무늬 황소
이들은 보금자리를 떠나 마음껏 삶을 즐기고 있었다.
이곳은 은퇴 자와 젊은이들의 천국이었다.
날씨가 무덥기때문에 대부분 사람들이 냇가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거나 타월을 등에 두르고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서 행복을 느낄 수있었다.
노후까지 해로할 수 있는 부부는 축복받은 사람이다.
그들은 마치 20대 연인들처럼 천진난만하게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천생연분의 원앙이었다.
태초에 지구에 등장한 인류가 이러한 모습 이었을 것이다.
욕심이라는 개념이 없었기때문이다.
하늘에 흰구름이 정지되어 있다.
복잡한 생활공간속에서 잠시나마 자연과 더불어하는 것은 경제적인 여유가 있기때문일 것이다.
서양사람들은 우리나라사람들과는 삶의 가치관이 다르다.
돈은 어느 때나 벌 수 있다고 생각하고 주저없이 직장을 팽개치는 쪽은 서양 사람들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쉽게 직장을 팽개치지 못하고 주저한다.
직업의 다과에 따라서 삶의 가치관이 다르기때문이다.
현실생활을 잠시 접어두고 자연속에서 행복을 향유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번 여행동안에 독일에서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캠핑장을 목격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노후라고 할 수없을 정도로 젊어보였다.
숲속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와 냇물소리는 가야금소리 만큼이나 청아하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많은 생각을 하게하고 인생을 뒤돌아보게 했다.
가슴에 파동이 일기도 했다.
로텐부르크의 정식 명칭
“로만틱(romantic) 가도” 라는 안내판도 보였다.
평소에 이곳이 낭만적이고 아름답다고 들었는데 괜히 하는 말이 아닐듯 싶었다.
가는 곳마다 자연의 수려 함이 빼어나서 감탄을 자아내게했기때문이다.
로텐부르크(Rothenburg)성 주변에 캠핑 장은 여러군데가 있다.
은퇴한 부부들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이 많이 찾고 있는 곳이다.
숲속에 앉아 있으면 모든 생각을 팽개치고 싶고 창공을 바라보면 기지개를 펴고 싶어진다.
캠핑장을 걷다보니 자연에 귀의하고 싶은 욕망이 솟구쳤다.
과연 명불허전이란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완벽한 자연환경을 갖추고있었기때문이다.
하루동안 만이라도 캠핑장에서 휴식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관리인에게 방의 유무를 물었다.
그러나 노라고 답변이 돌아왔다.
뒤를 돌아볼 틈을 주지 않았다.
서글펐지만 로텐부르크(Rothenburg)성으로 이동했다.
성곽이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었다.
자연의 조건을 최대한 활용해서 지은 성곽이다.
동쪽은 타우버(Tauber)강이 “S”자 모양으로 흐르고 있다.
북쪽은 천 길 벼랑이 장벽을 이루고 있다.
서쪽과 남쪽은 평야지대와 연결되어있다.
동쪽과 북쪽에 군영을 설치한다면 천연의 요새지로 변할 수 있었다.
대신 서쪽과 남쪽을 개방하여 평야지대의 곡창을 확보했다.
중세시대 지방 영주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서쪽과 남쪽에 두개의 성문이 있었다.
그것은 클린겐 문(Klingentor)과 갈겐문(Galgentor)이다.
이 두개의 성문만 봉쇄하면 시가지가 이민족의 침략으로부터 안전했다.
이것도 불안해서 성곽 밖에 해자를 설치했다.
성문을 통하지 않고는 성으로 진입할 수 없는 이유다.
성은 중세때 건조되었다.
일부는 그대로 남아있었지만 대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괴 되었던 것을 복원한 것이다.
그래서 현대적인 감각이 물씬 풍겼다.
성곽 밖에다 주차를 한 후 Pulverturm 문을 통해 성 내부로 걸어갔다.
도로는 로마시대 도로처럼 돌을 깎아서 만든 보도 블록이었다.
도로의 폭은 비교적 좁아서 마차 두대가 겨우 비껴 갈 수 있었다.
좌우 어디를 가나 건물 앞은 꽃들로 장식되어있어서 여행자의 발길을 멈추게했다.
건물은 대부분 카페와 레스토랑이었다.
거리를 방황하다가 우연히 한글 간판을 발견했다.
이곳은 “정통 일식 점입니다.
우동 있습니다.
다꽝(takuan, 단무지) 있습니다.
라면 있습니다” 라는 글귀이었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일식점일까?
아니면 한국인이 경영하는 일식점일까?
궁금했다.
아름다운 로텐부르크 성
안으로 고개를 쑥 내밀어 들여다보니 한국인이 나와 미소를 짓고있었다.
세계 각곳을 여행할 때마다 그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한국인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의 역동적인 정착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았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한국인이 고국을 떠난 이유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사업문제나 자녀들의 교육문제 등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적 불안이 함 몫 했을 것 같다.
대한민국이 뇌리에 스쳤다.
병자호란과 임진왜란으로 민족의 정체성마져 흔들렸다.
한국전쟁은 민족의 분단을 고착시키고 국토를 초토화시켰다.
이것이 빈부격차를 확산시켰다.
한반도를 이념이라는 카테고리속에 구속시켜 버렸다.
이런한 혼란이 있을 때마다 한국인은 통곡했다.
하늘을 바라보며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울부짖었다.
대한민국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정치지도자의 사리사욕과 무능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계속 울 수만도 없었다.
부르크정원
가족의 생계문제가 목을 조이고 있었기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지게를 짊어지고 선창가로 갔다.
혹시나 일거리가 있지 않을까 해서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가도 일거리는 없었다.
뉘엿뉘엿 해가 사라질무렵이면 항시리 몇 마리를 길가에서 주어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 라고 생각했던 시대가 5~60년대였다.
그러했던 대한민국이 어느덧 G20 국가의 회원국이 된다는 말을 듣고 뛸듯이 기뻤다.
한국전쟁 당시 다른 국가들로 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는데 우리도 이들 국가들에게 도움을 줄 수있다는 희망적인 기대감때문이다.
외국에 나갈때마다 대한민국의 위상이 예전같지 않다는 것을 감지할 수있었다.
한글 간판이 날로 증가하고 있었기때문이다.
이곳 독일도 아직까지는 중국인과 일본인들이 휘젓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위상이 몇년 전과 극명하게 달라 지고 있다.
한글 간판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기때문이다.
로텐부르크성 원점으로 돌아오다.
다음 여행지를 위해 뉘른베르크시로 이동하다가 뉘른베르크 근교에서 하루를 숙박 하기로 했다.
호텔은 Ibis 호텔이다.
비교적 조용하고 깔끔해서 숙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와이파이가 연결되지 않아서 지루하고 어두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조식 후 다시 뉘른베르크 시로 이동했다.
뉘른베르크 시는 성곽도시다.
중세 때 건립된 성곽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성곽을 제외한 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거의 파괴되고 말았다.
현재 눈으로 확인할 수있는 건물은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복원된 것들이다.
카이저부르크(Kaiserburg)성으로 이동했다.
카이저부르크(Kaiserburg)성은 뉘른베르크를 상징하는 성곽이다.
카이저부르크(Kaiserburg)성은 시 북쪽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12세기에 착공하여 15∼16세기에 완공되었다.
내부는 황제의 방과 예배당, 우물 등이 있다.
우물의 깊이는 60m다.
뉘름베르크시내
성 중앙에 감시탑인 짐벨탑이 솟아 있다.
짐벨탑은 카이저부르크(Kaiserburg)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뉘른베르크시 조망은 뛰어났다.
탑이 있는 건물은 본래 왕실 외양간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유스호스텔로 사용 되고 있다.
다시 광장을 구경하고 성 로렌스교회로 이동했다.
성 로렌스 교회가 있었던 자리에 본래 작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가 있었다.
이자리에 1250년대에 고딕 바실리카 양식으로 새롭게 단장한 성 로렌스 교회가 들어섰다.
구시가지 북쪽의 성 제발두스교회(St. Sebalduskirche )가 모델이다.
높은 두 첨탑 사이에 정교한 박공지붕이 특색이다.
박공지붕은 맞배지붕을 말한다.
성 로렌스 성당
제물에 대한 탐욕을 버리고 가난하고 헐벗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성 로렌스 정신이 성 로렌스교회에 새겨져있다.
그래서 성 로렌스교회는 성 로렌스 정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교회 내부 분위기는 경건하고 엄숙했다.
장미 창 사이로 스며 드는 햇볕이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얀 후스의 군상
다시 밤베르크(Bamberg)로 이동했다.
밤베르크(Bamberg)는 바이에른 주 북부, 프랑켄 지방의 레그니츠 강과 마인 강의 합류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렌트 카는 밤베르크(Bamberg) 시가지를 관통하고 있다.
‘프랑켄(Franken)의 로마'로 불리기도 한다는 말이 빈말이 아닌 것 같다.
시가지는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물의 도시라 할 정도로 물이 퐁부했다.
신성로마제국 시절에 밤베르크(Bamberg)에 가톨릭 교구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1802년 교회 령 토지가 소멸되고 바이에른에 귀속되고 말았다.
1817년에 다시 대교구가 설립되어 현재까지 이르르고 있다.
독일 가톨릭교회 중심지 중의 한 곳으로 중세 시대의 성당과 수도원 및 옛 건물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구시가지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록되어있다.
밤베르크 대성당은 하인리히 2세때 건축되기 시작했으나 화재로 파손 되었다가 13세기에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으로 개조됐다.
이외에도 많은 종교 관련 건축물과 시청사, 궁전, 주택 등 옛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밤베르크 역사유적지로 이동했다.
역사 유적지는 대부분 밤베르크(Bamberg)언덕 능선에 위치하고 있다.
성당도 언덕에 있었다.
그래서 언덕으로 이동했다.
맨 위쪽에 자리하고 있는 성당이 성 야곱교회다.
소박하고 검소했다.
루터파교회의 영향을 받은 듯 했다.
성 야곱성당
교회주변에 사람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생업에 열중하고 있었기때문일 것이다.
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조용하고 고즈넉했다.
종교적인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교회가 있기때문일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서유럽의 성당처럼 신성 하고는 거리가 있었다.
교회가 지나치게 현실과 동떨어지는 것을 경계하는 듯 보였다.
내려오면서 신 궁전과 구 궁전을 관람했다.
이어서 장미 정원으로 이동했다.
성 야곱성당
장미넝쿨이 지붕을 이루고 있었다.
전경이 아름다워 장미꽃 한 송이를 사진에 담았다.
장미 정원은 소박했다.
지나치게 화려하지도 않았고 가식적 이지도 않았다.
자연의 섭리를 사랑하며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는 흔적이 역력했다.
야곱교회에서 내려와 밤베르크 대성당쪽으로 이동했다.
어마어마하게 큰 성당이 주변을 압도하고 있었다.
밤베르크 대성당이었다.
바베르크 시내
성당건물도 장관 이었지만 4개의 첨탑은 더 황홀했다.
예수의 사상인 관용과 사랑을 사방에 전파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인간이 어찌 신성에 도전할 수 있을까?
자꾸만 나 자신이 작개만 느껴졌다.
성당 내부로 들어갔다.
화려했다.
서 유럽의 성당만큼 화려하지않았으나 인간 본연의 심성과 신성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밤베르크 대성당(Bamberg Dom)은 주교좌 성당이다.
13세기에 독일 밤베르크에 건립된 로마 가톨릭교회의 대성당으로 현재 밤베르크 시를 지켜주고 있다.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된 성당은 네 개의 첨탑이 숭고한 종교성을 상징하고 있다.
1004년 하인리히 2세 황제의 명에 의해 지어지기시작하여 1012년 5월 6일 축성되었다.
1081년 화재사건으로 일부가 전소 되었다가 밤베르크의 성 오토에 의해 복원되었다.
그리고 13세기에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개축되어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밤베르크 대성당은 길이 94미터, 넓이 28미터, 높이 26미터로 네 개의 첨탑까지 합치면 거의 81미터에 달한다.
밤베르크 대성당을 관람하고 제2의 베네치아로 이동하려했으나 모두가 기가 죽어있었다.
굶주림에 지쳐있었기때문이다.
시원한 맥주 한잔이 분위기를 되살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분위기가 앉아 있었다.
선뜻 맥주 한 잔 먹자고 말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6명이 각각 5백만원씩을 지불하고 여행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음의 평화를 얻기위해 여행에 동참했다.
그러나 여행내내 무엇인가가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
이것이 누적되어 폭발하려고 했다.
패키지 여행이 생각났다.
작금 에서야 후회가되었다.
물의 도시 제2의 베니스(Venice)를 여행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부풀어있었다.
그러나 피로가 누적되어 한사람도 제2의 베니스(Venice)를 희망하지 않았다.
밤베르크(Bamberg)에서 체코 수도 프라하로 이동했다.
체코 프라하로 가는 도로는 예년에 비해 폭이 확장되고 포장되어있었다.
그러나 차량은 뜸했다.
평화롭고 목가 적이었다.
여행은 예정대로 추진되지 않았다.
현지 상황이 수시로 변했기때문이다.
자유여행에서 가장 큰 당면 문제는 숙소 예약문제일 것 같다.
그래서 숙박 공유사이트인 에어비앤비(Airbnb)와 북킹닷컴을 자주 연결시켰다.
에어비앤비(Airbnb)는 현재 1억 5천명이 가입해있고 북킹닷컴도 거의 비슷한 실정이다.
그러나 아무리 유명한 싸이트(site)라 할지라도 그때그때 예약을 하지 안으면 숙소예약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현지 상황은 수시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래서 예약이 갈팡질팡 해졌다.
밤베르크 대성당
패키지여행 때처럼 사전에 숙소가 정해져있는 것도 아니다.
숙소 예약은 항상 현지 상황에 따라 즉석에서 결정했다.
숙소가 주로 캠핑 장이나 여관 및 ‘zimmer(방)'로 밀린 이유다.
그래서 늘 불안하고 불만이 쌓여갔다.
방은 늘 똑 같을 수 없다.
방은 언제나 상∙중∙하로 구별되어 있었다.
나이가 밑에서 두번째이기때문에 후진 방은 늘 내가 차지했다.
이것도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밤베르크 대성당
프라하시에 도착한 것은 오후 6시가 헐씬 넘어서다.
그러나 아직 숙소가 결정되지 않았다.
프라하 시 근처 캠핑장을 내비게이션 (navigation)에 입력하고 이동했다.
그러나 내비게이션 (navigation)은 계속 주변을 맴돌게 했다.
이것을 유심히 지켜본 지역 주민이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왠 낯선 승합차가 길거리를 방황하고 있었기때문이다.
경찰이 즉시 출동해서 검문했다.
다행히 영어로 대화를 시도해 의문점은 해소되었다.
이것이 도리어 경찰의 안전한 도움을 받게돼 다행이었다.
경찰의 도움을 받아 외곽도로로 이동하다가 캠핑장을 발견했다.
캠핑장은 별로 넓지 않았다.
그런데도 캠핑 카가 가득주차되어 있었다.
혹시 여분의 방이 있는가를 물었더니 없다고 하면서 진입 했던 도로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캠핑 장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곧바로 다른 캠핑장으로 이동했다.
캠핑장에 도착하여 방의 유무를 물었더니 있다고 했다.
뛸듯이 기뻤다.
장미정원
접수처에 들려(Reception) 여권을 제시한 후 예약을 시도했다.
의외로 방이 넓고 침대도 깨끗했다.
결국 이곳에서 사흘을 머물기로 했다.
숙소는 Sokol Troja Hostel & Camping 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