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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건축가(2011) 감독: 정재은
한사람의 궤적을 따라간다는것이 사실 부담이 앞서기도 하는데,
한시간 반 남짓, 어느새 건축가 정기용의 모습과 거친 목소리에, 말들에 같이 흘러갔습니다.
분명 말이 많은 아저씨인데..내 눈에는 말이 앞서기도 하는 삶을 살아온 아저씨로 보이는데
마음에 울리는건 어쩐 일인지....묘하게 귀를 기울이게 되는건..어쩐 일인지
그의 진솔함과 묵묵히 한길을 걸어간 사람에 대한 뭉클함과 존경하는 마음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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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펌)
<말하는 건축가>는 또한 죽음을 앞둔 한 인간을 다룬 휴먼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영화는 대장암 판정을 받은 정기용의 마지막 1년 여의 시간을 함께 하면서, 죽음을 현실적으로 대면하며 살아가는 한 인간의 의연한 태도를 담는다. 최근 사회적으로 ‘웰 다잉(well-dying)’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는 가운데, 아픈 몸을 이끌고도 변함없는 자세로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정기용의 모습에서 우리는 삶과 실존에 대한 많은 질문들을 던지게 된다.
다가오는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정기용의 모습은 큰 울림을 자아낸다. 그것은 ‘건축가’라는 특정 직업과는 상관 없이 삶과 죽음을 경험하는 인간 모두의 보편적인 실존에 관한 문제를 돌아보게 한다. <말하는 건축가>에서 정기용은 죽음과 대화하고 죽음과 공존하기를 꿈꾸며 누군가를 위하는 일, 사회가 원하는 일을 찾아 나선다.
정재은 감독이 직접 말하는 ‘정기용과 나’
1. 첫 만남
나는 오랫동안 건축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간 내 영화에도 건축이나 도시 공간은 하나의 중요한 모티프였다. 2009년 서울에서 열린 건축영화제에서 영화를 보면서 건축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가운데, 주인공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을 접촉할까 알아보던 중 정기용 선생님을 추천 받고 그의 책인 <감응의 건축>을 읽은 뒤 무주 프로젝트를 둘러보러 갔다. 무주의 공공건축은 그간 내가 생각했던 건축과 매우 달랐다. 대개 멋있고 화려한 빌딩을 짓거나 유니크한 공간을 만드는 것을 건축이라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의 작업은 좀 평범하고 보잘것없었다. 대체 이 건축가는 왜 이런 일을 그토록 열심히 했는가.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2009년 12월 말 처음 정기용 선생님을 만났다. 안국동의 선생님 단골집에 밥을 먹으러 가서 “이런저런 이유로 당신을 주인공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내가 건축에 관심이 많고 건축가에 대한 다큐를 찍어보고 싶고 무주도 다녀왔는데 영화로 찍으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얘기했다. 선생님은 한참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네가 계속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니는 것이냐, 그것 참 재미있겠다.” 그러면서 쉽게 오케이를 하셨다. 정기용 선생님은 어떤 기회든 건축가의 삶과 생각을 대중들과 일반인에게 전할 기회가 되면 마다 않고 실천하던 사람이었다. 덕분에 어렵지 않게 취재가 시작되었다. 두세 달 정도 매주 수요일에 선생님의 회사인 ‘기용건축’에 놀러 갔다. 선생님을 만나면 인터뷰를 시작했다. 한번에 한두 시간 정도 살아온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 건축 경험도 이야기하고 했다.
어떤 소재와 주제로 영화의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건축 프로젝트를 택하고 싶었다. 한 사람의 건축가는 어떻게 하나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건축을 완성해 나가는가? 처음 접한 것은 소격동 한옥 프로젝트였다. 오래된 소격동의 한옥을 리모델링하고 새로 재건축하는 작업에 정기용 선생님이 참여하게 되었다. 영화의 초반부에 나오는 조성룡 건축가와 정기용 선생님의 산책 장면이 바로 그 시기에 촬영한 것이다. 한데 두 번 정도 촬영했을 때 선생님이 말했다. “여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분관이 들어오는 자리 옆인데, 그러면 땅의 조건과 상황이 많이 바뀔 것이다. 그 이후에 이 한옥을 어떤 집으로 만들 것인가를 결정해도 될 거다.” 그러면서 이 프로젝트가 연기되었다. 애초의 내 의도대로 작품을 찍어나갈 수 없는 상황이 되었지만, 나와 선생님의 만남은 계속되었다.
2. 기용건축
서울 삼청동의 한 건물에 ‘조성룡도시건축’과 ‘기용건축’이 나란히 세 들어 있다. 기용건축은 우리나라에서도 보기 드문 설계사무소다. 적게는 10년, 많게는 30년씩 선생님과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기용건축을 유지하고 있다. 기용건축은 일반적인 커다란 설계사무소가 아니라 아뜰리에 스튜디오인 만큼 정기용 선생님을 중심으로 그의 건축세계를 흠모하는 젊은 친구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직원은 10여 명 정도였다. 정기용 선생님의 제자이면서 30년 가까이 함께 일해온 김병옥 소장(영화 속 대전청사 설계경기 작업 영상 자료에도 김병옥 소장이 등장한다), 무주 프로젝트만 십여 년 했던 한동훈 실장 등이 선생님의 팔다리가 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그곳을 방문했을 때 서울 구로구 항동 아파트 프로젝트, 김해 기적의 도서관, 그리고 김해 故 노무현 대통령 추모관 등의 작업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기용건축에서 인상적인 것은 방대한 자료들이었다. 기용건축 지하 창고에 선생님이 1970년대부터 수십 년 동안 모아왔던 자료, 건축 도면, 사회 활동에 대한 보고서, 스케치 등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그 가운데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을 선별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정리가 안 되어 있다. 일민미술관의 정기용 건축전 이후,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이 자료들을 아카이빙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최초로 건축 아카이빙 대상으로 선정한 건축가가 바로 정기용이다. 사실 나는 극영화만 만들다가 다큐멘터리 작업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시작 단계에서는 무엇을 찍어야 하는가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처음에는 정말 중요한 것이 아니면 찍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너무 촬영을 많이 못했다. 독립 다큐멘터리로 시작한 만큼 제작비가 없고 카메라를 아무리 싸게 빌려도 진행비에 부담이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촬영을 많이 안 하면서 중요한 이벤트 중심으로 영화를 찍어나갔다. 2010년 초여름까지만 해도 영화의 메인 플롯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3. 무주
2010년 봄, 선생님이 부산시 공무원과 함께 무주 공공 프로젝트를 답사하는 프로그램에 가신다고 해서 함께 촬영을 갔다. 무주에 온 부산 공무원들을 선생님이 안내하는 과정을 찍었다. 그때 선생님은 건축가에게 아무런 상의도 없이 설치된 안성면 사무소 태양열 집열판을 처음 발견하고 웃고 말았다. 하지만 등나무 운동장에도 태양열 집열판이 설치된 것을 보고는 격렬하게 화를 냈다. 그리고는 이후 답사 스케줄을 모두 접었다. 당시 나와 선생님의 관계가 많이 진전되었기 때문에 선생님한테 “화를 필요 이상으로 내시는 거 아니냐. 사람들도 많은데 그렇게 화를 내면 같이 간 사람들이 민망해 하지 않느냐”고 물어봤다. 선생님께서 한참 생각하시더니 “그렇지. 아직은 이런 걸로 화를 내면 안 되지”라고 답했다. 몇 군데를 더 돌아다니셨지만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셨다. 이 일은 인간이 자기의 화를 사람들 앞에 격렬하게 표현한다는 것에 대한 나의 시각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내가 생각하는 사회적 맥락에서는 누군가 화가 나더라도 이를 감추어야 하는 것이 마땅했는데, 돌이켜보면 그런 반응은 선생님의 멋있는 점이 아닌가 한다. 인간이 화를 내고 분노한다는 것, 정확히 자기의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데, 그렇게 화를 낸다는 것은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나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그만큼 자기가 한 것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이 깊다는 뜻이기도 하다. 격렬하게 자신의 감정과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선생님이 가진 가장 중요한 면모였다는 생각이 든다. 화를 내는 게 멋있을 수도 있다.
당시 부산시 공무원들의 답사에서는 무주 추모의 집, 부남면 천문대, 향토박물관 등을 함께 돌아보았다. 화가 많이 나신 선생님을 보내고 나서 따로 찍은 것이 있다. 개인적으로 무주 프로젝트에서 제일 좋았던 것은 ‘추모의 집’이었다. 이곳은 산꼭대기에 있는 납골당인데, 좀더 높이 올라가서 보면 한국의 산하와 자연을 전혀 거스르지 않고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한다는 느낌이었다. 선생님이 그 지역의 인삼밭을 모티브로 해서 마감한 지붕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택이었다. 나는 어디든 좋아하는 공간에 가면 시나리오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데, 추모의 집에서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누군가를 추모하기 위해 온 사람들에게 따뜻한 휴식과 마음의 안정을 주는 공간. ‘추모의 집’이야말로 선생님을 많이 표현해줄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 실상사
2010년 초여름 어느 날 선생님이 촬영을 그만하면 어떻겠느냐고 얘기했다. 왜 그러시냐고 했더니 “너무 건강이 안 좋다, 대장암 수술을 한 지 5년이 되었는데, 보통 환자들은 5년째에 완쾌하거나 병이 더 깊어지는데 내 상태가 더 안 좋아질 수도 있다. 영화를 같이 하다가 상태가 더 나빠지면 어떻게 하냐, 그만하면 어떠냐”고 했다. 그때 난 “그것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어요”라고 얘기했다. “선생님의 건강이 더 나빠질 수도 있지만 그것도 영화의 과정이고 만일 영화가 완성된다면 그것도 포용해서 영화를 찍고 싶다”고 말씀 드렸다.
그러자 선생님은 지리산 실상사를 리모델링하기로 했는데 그걸 찍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래서 실상사를 취재하고 불교 건축에 대해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왜 사찰 건축은 현대화가 되지 않았는가. 절이라는 게 결국 일반 대중들에게 어떤 공간이 되어야 하는가를 공부하면서 실상사를 촬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실상사에서는 ‘100년 내다보는 불사(불교건축을 불사라고 한다)를 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늘 세미나가 열렸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김봉렬 교수, 조성룡 건축가, 불교건축의 거두들이 세미나를 계속하면서 몇 개월을 세미나만 계속 찍었다. 이래서야 언제 건축 다큐멘터리를 만드나 회의에 빠져 있었는데,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5. 기적의 도서관
그 즈음 일민미술관에서 선생님에게 건축전을 제안했다. 선생님은 나에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실상사 세미나 촬영에 다소 지쳐 있었던 나는 “좀 찍을 게 생기네요”라고 답했다. 그리고 나서 전시회 준비 과정을 찍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그간의 건축전이 다소 딱딱하고 일반인이 알지 못하는 개념들만 나열했던 게 안타깝다. 전시 공간이 어떻게 쓰이는지, 좀더 대중적으로 다가가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건축전에 사용할 영상을 만들어달라고 제안을 하셨다. 그래서 기적의 도서관을 찍겠다고 했다.
전국의 기적의 도서관 6개를 2주에 걸쳐서 촬영을 하러 다녔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시점이었다. 먼저 정읍, 순천, 진해, 김해에 갔고, 맨 마지막에 제주와 서귀포에 갔다. 촬영을 다니면서 기적의 도서관이 참 찍기 어려운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도서관 건물 하나에 공간들이 너무 다채롭게 구성되어 있었다. 밖에서 볼 때는 뭔지 상상하기 어렵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매우 아기자기 했다. 아이들이 곳곳에 숨어서 책을 볼 수 있도록 여러 가지를 배려한 흔적이 있었다. 기적의 도서관 촬영을 다니면서 아이들이 조용히 책을 읽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고작 대여섯 살 되는 아이들이 혼자 와서 책을 빌려서 편하게 양말을 벗고 눕거나 의자에 앉아 책을 읽는 게 아닌가. 도서관이라는 게 이런 공간일 수 있구나. 칸막이를 사이에 둔 책상의 나열이 아니라, 아이들이 마음껏 책을 꺼내볼 수 있도록 하고, 또 아이들과 엄마들을 위한 배려가 반영된 이 공간이 무척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기용이 시민단체인 ‘책 읽는 사회만들기 국민운동본부(책사회)’와 함께 만든 전국의 기적의 도서관들은 나에게 건축이 어떻게 사람들의 모습과 일상을 바꿀 수 있는지 보여 주었다.
6. 건축가의 집
선생님이 쓴 글 중에 ‘나의 집은 백만 평’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건축가는 어떤 집에서 살까>(2005)라는 단행본에 수록된 글이다. 현재 활발히 활동하는 십여 명의 건축가들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집에 대해서 설명한 글을 모은 책이다. 다른 건축가들은 자기가 사는 집, 지은 집에 대해 꽤 멋있게 설명을 해놓았다. 그 글들을 읽으며 ‘건축가들은 다 이런 집에 사는구나’ 했다. 한데 정기용 선생님은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집은 백만 평’이라는 제목 그대로, 집은 단지 물리적인 집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생활 반경 모두가 내 집이라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산책하는 곳, 내가 집에 들어올 때 걸어가는 골목, 이 모든 것이 나의 집이다, 집을 이렇게 확장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작은 연립 빌라에 단촐한 방 한 칸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 글을 통해 선생님이 어떤 집에 사는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서울 종로구 명륜동 다가구 주택에 살던 선생님의 집을 직접 방문하게 된 것은 일민미술관 전시회 준비 과정을 찍을 때였다. 그때 그 집을 보고 느낀 것은 바로 ‘의식의 자유’ 였다. 열 평짜리 집에 월세를 살아도 집에 대한 사고를 저렇게 함으로써 어떤 자유로움을 가질 수 있다는 것, 집에 대해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갖는 ‘소유’라는 개념을 떠나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내 집은 백만 평이라는 뻥 같은 말에 대해서 이 사람은 생각을 끝까지 하는 사람, 의식이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7. 일민미술관 건축전
일민미술관 건축전 준비 과정에서는 정기용 선생님과 전시 준비팀이 회의하는 모습을 많이 찍었다. 일민미술관과의 첫 회의 자리, 전시를 기획한 강성원 큐레이터가 등장했을 때 제작진은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영화에 갈등이 시작되고 악역이 나타난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이 대부분 정기용 선생님을 경청했던 반면, 강성원 큐레이터는 선생님의 말을 잘랐다. 강 큐레이터는 정기용 선생님에 대한 애정이 깊은 만큼 전시회를 제안했지만, 선생님의 이야기를 과감히 자르거나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말했기 때문에 선생님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정기용 선생님과 강성원 큐레이터의 갈등, 전시를 준비하는 작가와 큐레이터라면 어디서나 생길 수 있는 보편적인 갈등의 축이 형성되었다.
첫 번째 갈등은 전시 규모와 관련된 것이었다. 애초 일민에서는 선생님의 스케치만 가지고 2층 공간 한 층 정도로만 전시를 하는 것을 제안했었다. 결국 전시 내용을 정리하면서 미술관의 1-3층 전시 공간 모두를 망라하는, 일민 측에서도 역대 최대 규모의 전시로 내용이 확장되었다. 이어 각 층에 선생님의 작업을 배분하는 과정에서 무주 프로젝트와 기적의 도서관을 각각 한 파트로 다루고, 관련 영상과 흙담도 설치하며, 나무와 돌 등 선생님의 수집품도 전시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덧 이 전시는 건축가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정기용 선생님의 회고전 형식으로 변화되었다. 전시 과정에서 정기용 선생님은 모든 것을 다 넣기를 원했고 꼭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집과 사무실에서 온 어마어마한 자료 가운데 큐레이터가 선별하는 게 어려웠던 전시였다.
두 번째 갈등은 전시 구역 중 서울관을 폐쇄하는 문제였다. 정기용 선생님은 오랫동안 도시 문제에 대해 많은 글을 쓰고, 사대문 안의 ‘문화도시 서울’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서울의 새로운 모습을 구상했다. 이러한 선생님의 작업은 하나의 파트를 이뤄 애초 전시 내용에 포함되어 있었다. 전시 공간에 서울관을 따로 만들어 사대문을 실제로 구현하고, 그 안에 문화도시에 대한 선생님의 구상을 설치하는 작업을 하기로 결정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예산도 많이 들고 선생님이 구체적인 아트웍이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그사이 선생님의 건강은 몹시 안 좋아지셨고 계속 입원과 퇴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는 중이었기에 쉽지 않았다. 결국 일민 측은 서울관 폐쇄를 주장했고, 선생님은 무척 아쉬워했다.
일민미술관 정기용 건축전은 2010년 11월 11일, G20 정상회담이 개최되던 날 개막했다. 제목은 “감응: 풍토, 풍경과의 대화”로 결정되었다. 국내 단일 건축전으로는 거의 최대 규모였고, 결과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전시는 여러 모로 뜻 깊었다.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서 이런 건축전이 열린다는 것, 전시의 구성이 전문가 집단이 아니라 일반 대중을 향하고 있다는 것, 다른 건축전과 달리 영상 설치, 애니메이션 등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것 등이 화제가 되었다. 대중들의 근접도가 높은 공간에서 무료로 열린 전시라는 점도 성공의 한 요인이었다. 덕분에 무려 1만 명이라는 많은 수의 관람객들이 전시에 다녀갔다.
전시 오프닝 행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순간은 정기용 선생님의 강연이었다. 오프닝 마지막 순서로 약 30분 정도 선생님의 마지막 대중 강연이 있었다. 사람들은 정기용 선생님의 수척하고 야윈 모습에 너무 충격을 받았다. 때문에 강연의 분위기는 숙연했고 많은 이들이 울면서 강연을 들었다. “문제도 이 땅에 있고 해법도 이 땅과 이 땅의 사람들에게 있다.” 선생님은 자신이 평생 이야기해왔던 것을 다시 한번 요약해 청중들에게 들려주었다. 한국에서 왜 건축가들이 이렇게 무시 당하는가, 왜 한국에서는 건축이 문화가 아니고 건설 토목인가, 우리가 이를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을 온 힘을 다해 역설했다.
8. 자두나무집
일민미술관 전시회 오프닝이 있기 얼마 전, 선생님과 함께 춘천 자두나무집에 다녀왔다. 나는 선생님이 설계한 건물 가운데 꼭 다시 한번 가보고 싶어하시는 곳을 촬영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얼마 후 선생님이 자두나무집에 갈 일이 생겼다고 했다. 완공된 지 10년이 지난 집을 고칠 일이 생겨서 건축주가 선생님한테 연락을 해왔다. 그 집의 주인은 정상명 화가다. 평범한 가정주부이자 화가였던 그는 딸을 잃은 뒤 생명 평화 운동을 하게 되었다. 정기용 선생님은 자신의 건축 중 자두나무집을 가장 좋아하고, 꼭 다시 가보고 싶다고 했다. 집을 멋있게 지었기 때문에 좋아했던 건 아니고, 주인이 좋은 사람이고 소통이 잘 되는 사람이어서 좋아했던 것 같다.
그날 날씨가 정말 좋았다. 완연한 늦가을이었다. 출발할 때 선생님은 다소 지친 상태였다. 그러나 자두나무집에 도착하자 기분이 좋아지셨다. 날씨도 좋고 주인도 집을 예쁘게 관리했고 자연도 햇빛도 너무 좋았다. 선생님은 거실에서 보면 논이 사계절 바뀌는 풍경이 되기를 원해 만든 집이라고 했다. 대부분의 건축가들이 그렇듯 선생님도 누군가의 집을 설계할 때 자신이 살고 싶은 집을 꿈꾸며 설계했을 거다. 선생님은 황금빛 들판을 상상하긴 했지만 막상 그걸 직접 본 것은 처음이라며 굉장히 행복해하셨다. “내가 이 집에서 몇 달 만 쉴 수 있다면 병이 다 나을 텐데.” ‘나의 집은 백만 평’이라며 의식적으로는 자유로웠지만, 정작 선생님은 자신의 몸을 누일 편안한 곳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자두나무집을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타인들을 위해 집을 지었지만 정작 자신을 위한 집을 짓는 건축가는 얼마나 될까?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자두나무집을 보며 사실은 정기용이 굉장히 숨어있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9. 마지막 봄나들이
2011년 초, 일민미술관 전시를 마치고 선생님 건강이 더 안 좋아졌다. 나는 선생님이 돌아가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고, 빨리 편집을 해서 선생님께 보여드리고 싶었다. 매일 8-10시간씩 편집에 매달렸다. 타계 1주일 전인 2011년 3월 5일. 선생님이 갑자기 기용건축 직원들을 불러 모으셨다. “내가 오늘 기용건축 직원들과 함께 갈 데가 있다.” 선생님이 갑자기 봄나들이를 가고 싶어했고, 기용건축 직원들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더 이상 치료를 할 수 없다고 했고, 명륜동 집에서 죽음의 날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앰뷸런스를 대절해서 경기도 광주 아천동으로 갔다. 나는 그때 촬영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촬영자를 섭외할 시간도 없었다. 결국 가지고 있었던 아이폰으로 촬영한 것이 영화에 쓰이게 되었다. 유독 봄을 좋아하셨던 정기용 선생님다운 나들이였다. 이 장면을 촬영하며 나는 세상에 과연 이런 장면을 창조할 수 있는 캐릭터가 또 있을까 하는 생각했다. 이 장면이야말로 진정 내가 쓸 수 없는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 정기용만이 창조할 수 있는 장면이구나 라고.
누가 수십 년간 함께 일한 직원들을 이끌고 침상에 누워 하늘과 바람과 나무에 고마움을 표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건 건축가 정기용이 우리모두에게 남기는 메시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즈음 나는 영화에 내레이션을 쓸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고 있었다. 내가 직접 화자가 되는 건 안 좋겠다고 생각해서 최대한 해설 없이, 감독의 주관을 너무 드러내지 않고 그의 삶을 지켜보는 영화를 만들자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건축가들의 인터뷰를 통해 이 사람에 대한 해설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해서 인터뷰 촬영을 하고 있었다. 3월 11일 건축비평가를 인터뷰 하던 도중에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왠지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어서 선생님 댁으로 달려가서 선생님의 죽음을 눈으로 보았다. 정말 많이 슬펐다.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다 보니 굉장히 밀도 있고 특별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스타일리시한 건축다큐멘터리를 촬영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한 건축가의 마지막 여정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가 되어버렸다. 다큐멘터리의 시작과 끝이 전혀 다른 곳에 와있었다.
승효상 건축가가 장례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소박하고 조촐하게 장례식을 하자고 했다. 너무 크게 하지 말고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소박하고 작게 하자. 혜화동 서울대병원 영안실에서 영결식을 한 뒤 선생님은 모란공원에 안치되었다.
선생님은 자신의 병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신 적이 없었다. 나는 병원에 가서 영양주사를 맞고 쉬었었다는 이야기를 몇 번 들었다. 나중에 사모님에게 정기용 선생님이 어떻게 투병 중이었는지를 자세하게 듣게 되었고 많이 괴로웠다. 과연 육체적인 극심한 고통 속에서 그는 어떻게 그렇게 계속 일할 수 있었는가? 원래 선생님이 당뇨가 오랫동안 있었다. 2005년 8월 대장암이 발견되어 3개월 시한부 인생 선고를 받았다. 수술을 받고 대장을 잘라내고 항암치료를 1년 6개월 동안 했다. 2007년 2월에 암이 간으로 전이 되었고 이어 폐로 전이 되어 수술하고, 그 다음 다시 간 수술을 했다. 영화를 찍기 전인 2010년에는 복수에 물이 차기 시작했고, 허리에 복수를 빼는 장치를 차고 다녔다. 2008년 겨울에는 항암치료의 부작용으로 성대결절이 와서 마이크를 해야만 말소리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선생님은 지난한 투병 과정에서 죽음을 피해 요양을 간 적이 없었다. 수술을 하고 나서 또 일을 하는 등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첫 항암치료를 받은 2006년부터 총 여섯 권의 책을 정리해 냈고, 다큐멘터리를 위해 일하고, 일민 전시회도 치르고, 본인의 작품집도 정리했다. 정기용 선생님은 자기가 사회에 남길 수 있는 모든 말과 생각과 스스로가 생각하는 한국사회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남기고 돌아가신 거다. 투병 과정에서 이렇게 많은 작업을 하고 생산성을 발휘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정기용 선생님은 너무너무 강한 사람이었다. 한번도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곧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고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만큼 다차원적인 흔적을 남기고 간 인물이었다.
첫댓글 귀한 자료를 올려주시어 감사합니다. 감동적인 글이라 제 방에도 걸어놓고 울 집에 오시는 분들께도 나눠보겠습니다. 꾸벅.
집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는군요 감사합니다. ^
며칠 전에 VOD로 "말하는 건축가"를 보았어요. 유언같은 말씀. 나무도 고맙고, 바람도 고맙고, 햇볕고 고맙고, 공기도 고맙고.. 무주에 있는 등나무운동장 그늘아래 앉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에 대한 관심을 건축설계의 본질로 여기는 분의 작품을 맘껏 누리는 것이 그분의 뜻, 나의 행복이지 않을까...싶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