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색깔에 약간의 연한 그린을 섞은 듯한 펄이 들어 있는 원피스스타일로 등 허리춤에 구멍이 넓게 파인 일반용 수영복을 입었으며 눈의 깊이를 볼 수 알 수 없는 반사경 미러수경을 낀 숙녀와 다부진 몸이라고 한 곳도 찾아볼 수 없는 순한 길쭉한 몸매와 서울스러운 뽀얀 피부를 타고난 듯한 파란 색 삼각팬티를 수줍게 입은 청년이 함께 실내 수영장 1번 레인 풀의 가장자리에서 서로의 몸을 밀착한 채 신중한 듯 친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수영장의 높은 천장 높이의 울림으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가는지 들리지 않았지만, 굳이 예측한다면 사랑의 속삭임이 틀림없을 만큼의 밀착된 서로의 거리와 그 주변의 햇살이 한없이 빛난다.
갑자기 수영장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아픈 발바닥으로 어느 곳도 닳기 싫다고 엄살 부려서가 아니라 순례길에서 보고 들었던 자연의 울림 졸졸졸 소리가 귓속에서 맴돌기 때문일 것이다.
잡동사니가 가득한 회색빛 줄무늬 팬트리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수영 물품이 있었는지 끝도 없이 찾아 뒤적였다. 세월의 흔적이 눈에 들어오듯 실리콘 소재로 된 하얀 수영모에는 세로로 접어 논 그대로 누런빛이 한 줄로 바랜 채 지난 시간만큼 진하게 그어져 있었고, 검은색 원피스 수영복의 팬티 선과 어깨끈의 탄력은 삭아서 하얀 부스러기가 가끔 실밥 사이를 뚫고 떨어져 나올 만큼 오랜 시간 창고 안에서 방치한 채 여러 해 이삿짐에 끌려다녔음을 짐작하게 했다. 아직도 낡은 수영복을 버리지 않았다는 스스로에 대한 간단한 칭찬과 더불어 왜 낡은 수영복을 아직 버리지 않았는지 의구심이 들면서 한참을 거울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빛바래 검은 수영복을 주섬주섬 입고 거울 앞에 서자마자 한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철 지난 수영복이 문제가 아니라 수영복에 내장된 가슴 캡이 쭈글쭈글한 채 주름처럼 깊게 생겨 가슴 보호 기능 따위는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긴 세월을 훑고 간 얼굴의 주름보다 더 깊고 흉했기에 부엌 안 밥사발 크기의 내 가슴이 그 안에 들어간다 해도 복원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제 늦은 시간까지 수영복 패션쇼를 한 터라 피곤하기도 했고 너무 오랜만에 찾아간 머쓱한 수영장이었기에 오늘은 물장구와 락스 냄새만을 익히고 오자는 생각이었다. 탄력 떨어진 수영복을 구겨 넣은 채 앞장선 터라 뭐든 뻘쭘하며 자신감도 함께 털어졌다.
안내직원이 나눠 주던 키와 표가 아닌 카오스의 앱 결제부터 들어가는 입구까지 모두 리모델링 된 터라 시골에서 막 상경한 읍녀처럼 주춤거리는 채로 락스 냄새가 온몸에 배여 바
쁘게 지나가는 직원에게 물어본 후 입구를 찾아 들어갔다.
수영가방엔 그 흔한 샴푸 하나 없었다.
탄력이라고 찾을 수 없는 검정 수영복, 세로 한 줄로 빛바랜 흰 실리콘소재의 아레나 수모, 새것처럼 보였던 수경의 누런색 실리콘 밴드와 파란색 스포츠 수건만이 전부였다. 속옷도 챙겨 오지 못한 능동적이면서 비협조적인 자세였다. 수영장 풀에 준비 운동 없이 긴장된 상태로 온 신경이 수축한 채로 몸을 텀벙 소리와 함께 물속으로 던져버렸다. 수영장 물이 차갑지 않아 순간 당황했다.
국제 수영경기를 치를 법한 50m의 긴 레인이 한없이 멀게 느껴져 출발에 시동을 걸지 못한 걸까 아니면 그 두 남녀의 눈부시게 빛나는 아우라와 젊음에 취해 물속에 뛰어들지 못한 걸까 한참을 풀장 안에서 이방인처럼 멍하니 그들만 바라보았다.
발칼루스의 이른 아침은 바람이 많이 불어 나뭇가지들마다 피레네 골짜기의 나뭇줄기가 어느 정도 강인한지 보여주듯 마구 흔들렸고 내 몸도 나뭇가지 리듬에 맞춰 앞뒤로 사정없이 흔들렸다. 하지만 겨울 날씨치고는 상쾌하다 못해 발걸음이 경쾌하게 느껴져 빨라지는 걸음걸음마다 다스리고 다스려야만 했다.
피레네산맥에서 내려온 듯한 세찬 시냇물과 135 국도의 긴 도로를 계속 걷는 것이 위험하게 느껴지는 길이였지만 이른 시간이라서 차들이 많지 않아 다행이다 위로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자 숨 쉬는 존재는 세차게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나 뿐인 것처럼 을씨넌스런 공기가 훅하고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대충 40분쯤 걸음을 다스리며 걸었을까 아주 작은 마을인가 싶더니 어느새 마을 끝이였고, 두 갈래의 길이라고 하기엔 길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갈림길에 파란색 바탕에 노란색 화살표가 작은 돌 표지석에 술래잡기라도 하듯 길과 길 사이에 20cm 정도의 크기로 놓여 있었다. 계속 먹구름이 몰려오는 터라 날씨 앱을 열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하마터면 작은 표지석을 놓칠 뻔할 정도로 작아서 반갑게 웃어 주었다. 표지석 위에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작은 소망의 돌멩이들로 싸여 넘쳐서 표지석이 넘어질 것만 같았다. 산티아고 순례길 표지석이 명령이라도 내린 듯 아스콘 길과 시멘트 길은 모두 사라지고 작은 내 신발만을 올릴 수 있을 정도의 아주 좁은 오솔길이 시작되었다. 내가 혼자여서가 아니라 순례길은 이런 길이니 혼자 걸어야 한다고 주장이라도 하는 듯해서 좋았다. 사뭇 몸이라도 잠깐 휘청거릴라치면 길 아래 도랑물로 빠져 수영을 해야 할 느낌의 순례길다운 길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내가 꿈꾸었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자연 속에서 정화된 세균들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한참 코끝을 끙끙거리며 좁은 오솔길을 혼자 조용히 걸으면서 이 길이 빨리 끝날까 싶어 벌써부터 조바심이 났다. 걸음을 멈춰 코와 가슴을 도드라지게 크게 부풀어 올린후 그 귀한 숨이 빠져 나가는 것이 아까워 잠시 멈춘 후 내리고를 반복하면서 신발 끝을 내려다보았다. 230cm밖에 안 되는 내 등산화가 오솔길을 꽉 채워 빈틈이 없어진 좁은 순례길을 보면서 잠시 길을 이탈하고 싶다는 반항심에 가던 오솔길 오른쪽 아래 작은 비탈길을 따라 짧게 내려간 후 시냇물 쪽으로 방향을 바꾼 후 이끼가 덜 낀 바위 위에 배낭을 내 던졌다. 깨끗하다고 표현하기엔 미안할 만큼 시냇물의 순수함과 맑음에 눈물이 핑 도는 채로 양말 한 짝만을 벗은 채 발을 담그면서 시냇물이 나를 불러 앉혔다고밖에 표현이 안 되었다. 피레네산맥 줄기에 있던 회색빛 먹구름이 빗방울로 우박으로 급박하게 변하지 않았더라면 물멍에 빠져 론세스바예스까지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첫댓글 느낌이 생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