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수필 <반전(反轉)/ 오동추야 외
왜 나는 유유자적하지 못하는가? 바쁘다는 말을 그저 입에 달고 산다. 가만 있자, 만으로 예순여덟을 넘긴 ‘백수’의 처지에서 봐도 이 푸념 아닌 푸념은 비정상적이다. 몸부림쳐 봤자 어제도 오늘도 나는 어정뱅이일 따름이거늘.
정신없이 1주일을 보내고 나니, 주일(主日) 삼랑진엘 다녀와야만 했다. 그러고선 틈틈이 자리에 드러누워 눈을 감는 게 피로가 풀리는데, 도무지 그럴 틈이 없었다. 걱정 중의 걱정이 기다리고 있어서다. 북구 노인회 노인 대학 수업이 월요일 11시에 잡혀 있기 때문이다. 여느 때 같으면 ‘까짓’ 노인 학교에서의 한 시간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다. 노래 몇 곡과 27년 동안 모아온 하 많은 이야기 중 두서너 가지만 뽑아들면 만사형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로 취임한 S 학장의 전화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니 어쩌랴. 아니 굉장한 부담으로 다가온다. 노인 학교 강사로서 내가 수업을 할 때, 내가 너무 나서는 게 탈이라나? 그나마 노래 솜씨는 괜찮다는 평들이라는 전언을 덧붙였지만, 그게 결점을 감싸기는 역부족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나는 다그쳐 묻지 않고, 가겠다는 대답을 건성으로 하곤 수화기를 놓았다. 그러면서 장탄식을 하였다. 세월 이기는 장사가 없구나, 10여 년 전만 하여도 노인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그런 개념과는 동떨어진 수업을 하는 데, 이의를 다는 학생이 있었던가? 좌충우돌 종횡무진, 나는 그 혼란의 한복판에서 두 발은 공중에 떠 있었다. 심지어는 ‘청춘 등대’ 한 곡만 반복하여 목이 터져라 열창하여도, 학생들은 군소리 않고 열광의 도가니에 빨려 들어왔다.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불러 보자. 파도치는 등대 아래 오늘도 둘이 만나/ 바람에 검은 머리 휘날리면서/ 하모니카 내가 불고 그대는 노래 불러/ 항구에서 맺은 사랑 등댓불 그림자에 아 아 아 아 정은 깊어 가더라.
그러나 어쩌겠는가?
나는 그 무트로 누린 행복의 시간을 여태껏 만끽할 수만은 없는 현실과 맞닥뜨려 있는 것이다. 약속한 당일 무슨 노래든 제대로 몇 곡 골라 선보여야 한다. 그리고 2선으로 물러서서 조연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그것들로써 어차피 주변인일 수밖에 없는 그들과 나의 공통분모로 삼아야 한다. 삶의 양태가 서로 달랐다고 해서 분자(分子)를 비교하는 것까지 포기할 수 없지 않은가? 연산은 내가 한다. 복정을 안긴 S 학장에 대한 원망을 시간조차 없이 그렇게 무심히 시간만 흘러갔다.
밤중에 그만 가뭇없이 잠까지 사라지기 예사였다. 27년 동안의 관록(?)이 무용지물이 되는 현실 앞에 속절없이 애간장을 태웠다. 난수표(亂數表)와 씨름하는 기분과도 같았다고도 하자.
어제 11일 10시, 부스스한 머리카락에 빗질조차 못하고 아침은 먹는 둥 마는 둥하고선 집을 나섰다. 후배가 마침 그쪽으로 가는 길이라 그 차에 편승했디. 노인회 사정으로 몇 달 문을 닫은 적이 있는지라, 학교가 어쩐지 낯선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일순 탄성이 흐르고 여기저기서 학생들이 아는 체하였다. 나는 목례로 답했지만 잔뜩 속내를 쉬 드러낼 수 없었다. 저들 중 어느 누구가 나를 폄하하였으렷다?
드디어 분침과 시침이 11에서 일치되고 나는 교단에 올라서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건 본격적인 기 싸움의 시작일 따름이다. 이런저런 싱거운 소릴 던지고 나서, 갖고 간 두 가지 노래 인쇄물을 나누어 주었다. ‘오빠 생각’과 ‘클레멘타인’, 이 둘이야말로 남녀노소의 한계를 뛰어넘는 환상의 조합이다. 그러나 20분 넘게 온갖 몸부림을 쳐봤는데도-일흔 노인인 내 그 짓거리는 말과 글로써는 표현하기 힘들다. 목격해야 한다.-한계에 부딪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20분을 남기고 나는 번개처럼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내 노인 학교가 제 자리를 잡아갈 그 시절, 나는 120명 학생을 5개 반(班)으로 나누고 기상천외의 이름을 붙였으니----.‘홍도야 물지 마라’ 반/ ‘해조곡’ 반, ‘만리포 사랑’ 반,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 정거장’ 반 등이었고, 정원(?)은 각기 25명 안팎. 그런데 지금 내 앞에는 겨우 32명이 열대여섯 명씩 양분되어 앉아 있다.
섬광! 나는 다시 그걸 확인했다. 그건 머릿속에서가 아니라, 외제(外在)로서 실체를 드러낸 것이다. 나는 오른쪽을 ‘오동추야’반으로 왼쪽을 ‘앵두나무 처녀’반으로 명명했다. 비로소 폭소가 터졌다.
사실 두 노래는 너무나 닮은 점이 많다. 첫째가 가사 내용이 저급(低級)이라는 것이다. 악상은 스윙(4/4박자), 작곡가는 한복남, 여가수가 부른 곡, 3절까지 있는 연년생!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낚시꾼처럼 나는 미끼를 던진 셈이다. 반가(班家) 제창!! 반응은 이내 터졌다. 어느 쪽 소리가 큰지, 그 자연스런 경쟁의식을 부추긴 꼴이었다. 그리고 얘긴데, 대한민국에서 미국 민요 ‘클레멘타인’을 포함해서, 흘러간 이들 두 노래를 모르는 노인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점입가경, 웃고 떠들고, 손뼉 치고 흔들고.
가만히 서서 손짓만 해도 물결이 치듯 열기가 이리저리 오가고 있었다. 나는 쾌재를 부르짖었다. 아, 지난 열흘 동안 나를 짓눌렀었던 무거운 짐을 벗었구나! S 학장의 얼굴에도 어느새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났을 때 그는 학생들 앞에서 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미심쩍어하던 그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기분이 하늘을 날 듯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지금은 내 일상이 평안을 되찾았다. 탄우(彈雨)를 뚫고 나온 것 같은 느낌은 체험해 본 사람의 전유물이다. 그걸 설명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짓임에야 무엇 하러 시도조차 하겠는가? 다시 나는 내일을 준비할 따름이다. 반전(反轉)의 공식을 찾는 척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오동동 타령’과 ‘앵두나무 처녀’에서 비롯되는.
(2010년 10월 12일)
<창작 후기>
무거운 짐에서 벗어났다. 근 열흘 이상 나를 괴롭히던 1/ 1400, 그 노인 학교 한 시간 수업이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온 것이다. 오늘 17장으로 始終을 매듭짓고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主題? 27년 동안의 세월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으나, 섬광이 개입해 해결해 주었다고나 하자.
문학이 가치 있는 체험의 기록이라면, 나는 정말 행운아다. 항상 그 한가운데에 두 발로 서 있기 때문이다. 다만 부족한 게 文才, 안타깝다.
17장이라면 조금 길다, 수필로서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따옴표 안의 대화가 한 군데도 없는데도.
'다' 字로 문장을 끝맺는 거, 매끄럽지 못한 처리인 것 같아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봤으나 역부족이다. 다만, '----이거늘.'이라 해 본 건 바람직한 결과라고 자평한다.
내일 또 컴퓨터에 앉는다. '低級을 길바닥에 뿌리며'. 대중 가요가 애 일상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 그 비결 중의 비결을 외람되게 공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