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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감사절설교
감사의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골3:15-17)
<도 입>
오늘은 기독교 3대 절기 중에 하나인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추수감사절은 한 해 동안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을 감사하며 찬양하는 절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감사의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으로 정했습니다.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적인 유래로서 구약의 맥추절에서 유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출23:16). 그래서 현대교회도 추수감사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기독교 역사적인 유래로서 청교도자들의 신앙에서 기인하고 있습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고난과 핍박을 견디다 못해 배를 타고 무작정 바다로 나갔습니다. 150여 명 중에 바다에서 거의 반은 수장되었지만, 남어지는 대륙을 발견하고 입성한 곳이 지금의 미국 대륙입니다. 이들은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지어 첫 열매를 하나님께 감사 예배를 드린 것이 오늘날 실제적인 추수감사절이 된 것입니다.
맥추절과 감사절에 공통점은 열매이지만 특징은 첫 열매입니다. 첫 열매를 드린 것이 감사절의 핵심입니다. 감사절의 핵심이 첫 열매를 드린 것이라면 여러분 중에는 이런 합리적인 의문을 가져 볼 수 있습니다. 감사절은 농촌 지역의 교회는 부합되지만, 그러나 우리 진아 교회처럼 농사를 짓지 않는 도시 교회는 감사절이 동떨어진 것이 아니냐는 생각쯤은 한 번 해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이 정도는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이해하며 바라본다면 열매가 감사절의 포인트이기 때문에 그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만, 열매만 보지 말고 그 이면 넘어까지 보면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넘쳐나고 있다는 것도 보일 것입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은 자연도 다스리고 있어 적절한 비와 필요한 일광을 주기 때문에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농사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고전3:6-7)
아마 세상 사람들은 절대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내가 심었고 내가 열심히 물을 주어 열매를 맺게 한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우리가 심었고 필요에 따라 열심히 물을 주었지만 자라게 하여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신 분은 하나님의 역사’라고 믿습니다. 식물은 물만 준다고 해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식물은 토양의 적합성, 적절한 환경의 조건이 맞아야 잘 자랍니다. 지금 바울이 ‘자라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환경의 조건을 의식하며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역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고 물주는 것은 우리의 역할이기 때문에 열심히 해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근본적으로 자라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역으로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우리의 역할을 열심히 해도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바울의 심고 거두는 농사의 원리는 액면그대로 적용하면 농사를 짓지 않는 도시 교회도 결코 감사절과 동떨어지지 않고 깊이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구약의 맥추절을 지키던 시대나 바울이 선교하던 초대교회 시대나 모두 90% 이상이 농경 시대였기 때문에 농사의 원리로 말씀한 것입니다. 도시교회를 등한시 하여 언급한 것이 절대로 아니니 오해나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현대 도시인들은 직장, 사업 등을 통해 추수(수입)를 합니다. 추수의 방법을 달라도 개념은 같습니다. 내가 아이디어로 심었고, 사업을 창업하여 열심히 일했고, 똑똑하게 공장을 잘 운영하여 돈을 벌었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심었고 내가 열심히 물을 주어 열매를 맺게 한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여긴 농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농사일로 추수(수입)를 하든 도시에서 사업을 하여 추수를 하든 간에 자라게 하신 분은 동일하게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의 원리로는 어떤 환경에서도 원초적 배경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하심이 함께 하기 때문에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농사를 짓지 않은 도시 교회도 추수감사절이 전혀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추수감사절의 정신이며, 신앙이며, 예배입니다.
추수감사절은 이러한 마음과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주일예배입니다. 여기까지 지내온 것이 우리의 노력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농사만이 아니라 사업이 잘 된 것은 우리의 피땀 흘린 노력이 있긴 하지만 그 넘어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돌보시는 은혜가 있음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미국교회는 11월 3째 주일이 추수감사주일로 고정되어 있다시피합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매년 11월 3째 주일에 추수감사주일로 지냅니다. 그러나 우리 중국교회는 미국교회를 모방하여 11월 3째 주일에 추수감사절로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10월, 11월 중에 교회 형편에 따라 지내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眞爱敎会는 11월 4째 주일 오늘 추수감사절 예배를 하는 것입니다.
2017년 한 해를 하나님의 사랑, 은혜, 돌보심, 평안 등을 되새기면서 추수감사주일 예배에 임했으면 좋겠습니다. <본 문>
오늘 본문에는 ‘감사하라’는 말씀이 구구절절이 나옵니다. 15-17절에 각각 한 번씩 세 번 나옵니다. 구약의 감사장은 2016년 감사절에 말씀드린 시편 136편이라면, 신약의 감사장은 골로새서 3장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교인들에게 감사 생활할 것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골로새서 교회는 초대교회 중에 하나입니다. 여기 ‘초대교회’라는 말은 이제 막 개척한 교회로서 성도들의 믿음은 초보적인 단계이며, 하나 같이 핍박으로 고난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 있는 골로새서 교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리스도의 평강’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은 세상에서 얻는 평강하고는 다른 것입니다(요14:27). 세상에도 평강이 있습니다. 친구에게, 남편에게 멋있는 전화 한 통만 받아도 평강은 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평강은 이런 전화 한통의 평강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평강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일컬어지는 성도들에게만 부여하는 특권임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은 온 세상들이 다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만 받는 것이어서 특권입니다.
이것이 골로새서 교회 성도들이 진정으로 감사해야 할 이유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냥 ‘감사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여기 (감사하는) ‘자’는 각 개인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교회 성도들 각자를 의식하며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 ‘또한’은 또 다른 감사의 의미가 있음을 말합니다. ‘감사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적 의미는 “하나님께서 어둠의 세력에서 자기를 구원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 영역으로 옮겨 주셨다”는 깊은 뜻이 담겨져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여기 감사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12-14절을 다 같이 보겠습니다. 13절과 14절은 12절에서 말한 감사의 조건을 말하고 있습니다. 12절의 ‘감사’와 오늘 본문 15절에 나온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는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이런 상황을 깨달은 사람은 감사를 넘어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의 찬양은 평강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교회 성도들이 누구는 편하고 누구는 고난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같이 힘들어 하고 있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을 의식하며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는 감사의 대한 교훈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에 대한 감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을 소유하게 하며, 반면에 이웃에게 하는 감사는 상호간의 평강을 지속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만 감사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의 감사도 잊지 말고 해야 합니다.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평강이 있는 사람이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음에다 풍성하게 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마음에다 풍성하게 담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성경을 읽으며 묵상하며 담는 방법입니다. 성경을 읽은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묵상까지 해야 풍성하게 담을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설교 말씀을 들으며 묵상하는 것입니다. 저의 설교의 특징 중에 하나는 말씀을 마치면 바로 묵상으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설교도 말씀으로 끝나면 마음에 풍성하게 담을 수 없습니다. 묵상은 설교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설교자와 여러분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여러분의 시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묵상은 하나님의 뜻을 마음의 담는 시간입니다.
제가 설교 후에 묵상을 하게 된 것은 바로 바울의 권면을 일찍 보았고,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교회에 가서 설교한 후에 묵상을 했더니 이름 모를 집사님이 묵상 시간이 너무 좋았다고 하기에, 아마 처음해 보니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심을 잊지 말라고 간단하게 멘트를 해 준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말씀을 마음의 풍성하게 담는 두 가지 방법 중에 하나만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성경 통독과 묵상, 설교와 묵상 두 가지 모두를 병행해야 합니다. 그래야 풍성한 말씀을 균형 있게 담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각자의 마음의 풍성하게 담겨지면 교회 공동체에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를 행하게 됩니다. 하나는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고 비판이나 책망보다는 건설적으로 권면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말씀을 마음(영혼)의 풍성하게 담아야 가르칠 수 있습니다. 말씀없이 절대로 가르칠 수 없습니다. 여기 ‘모든 지혜’는 ‘가르치고 권면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해 아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하나는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진정한 감사를 담아 하나님께 찬양하게 합니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 세 가지를 정확하게 구별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다음과 같이 예측은 해 볼 수 있습니다.
‘시’는 시편을 말할 수 있습니다. 시편은 150편까지 있습니다. 150편중에 100편 이상은 하나님의 도우심에 대해 감사의 찬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찬미’는 우리가 흔히 하고 있는 찬송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설거지를 하다가도 마음의 평강이나 감사가 있을 때 나도 모르게 찬양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신령한 노래’는 영적인 요소로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의 예측이 분명하지 않을 지라도 이와 유사한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의 풍성하게 채운 사람은 가르치는 일을 하며,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께 영광의 찬양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 나는 찬양을 못한다며 하나님께 영광을 올릴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찬양을 못하면 시편을 읽으며 묵상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의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또 혹자는 나는 글을 몰라 시편도 읽을 수 없다며 손 놓고 있는 자신의 처신을 말할 수 있습니다. 글을 모르면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면 이것이야 말로 신령한 노래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기억하기 바랍니다. 찬양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으로부터 시작한 입술의 열매이며, 곡조 있는 신앙고백입니다. 아마 찬양은 곡조 있는 기도라는 말은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찬양이 곡조 있는 신앙고백이라는 말은 처음 일 것입니다. 찬양의 가사에는 정말로 신앙 고백적인 내용이 많이 들어서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찬양은 무엇보다도 예배의 행위입니다(히 13:15). 우리가 예배하면서 찬양하는 것은 순서의 의해 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의 행위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찬양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예배의 행위 중에 하나인 찬양은 삶속에서도 그런대로 하고 있는 편이지만 예배의 본질인 삶의 예배는 너무 인색하거나 놓치고 있습니다. 이것만큼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17절은 15절부터 이어온 감사의 대한 결론입니다. 여기에는 감사의 찬양을 해야 할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면을 내포하는 일반적인 권면입니다. 그래서 17절은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말로 모든 것을 시작한다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바울의 권면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 권면은 “모든 일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 중에 하나는 ‘주 예수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구원도 예수 이름입니다. 오순절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도 베드로의 외침입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행4:12). 여기 대상은 이방인이 아니라 유대 종교 지도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당당하게 외친 것입니다. 여기 ‘당당하다’는 말은 거짓이 전혀 없는 진실함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사도는 진실하지 못하면 이처럼 당당하게 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기도도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사도 요한이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14:14). 어떤 분이 기도를 마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로로 기도를 마쳐 깜짝 놀란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뉘앙스는 실수는 아닌 것 같아 더 놀랬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공로라고 이야기 할 수 있지만 기도는 예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심지어는 초대교회에서 세례도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사도 베드로의 증언입니다.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행10:48, 2:38). 초대교회는 예수님이 지상명령을 한대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사도는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 것을 권면 정도도 아닌 명령하고 있습니다. 당시 그 누구도 상상할 없는 아주 획기적인 일입니다.
구원, 기도, 세례 이 세 가지 사례는 초대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적 요소들입니다. 사도들이 아니면 터치할 수 없는 영력입니다. 그런데 사도들은 모두 예수 이름으로 행한 것입니다. 반면에 사도 바울의 권면은 ‘평강, 감사, 찬양’ 등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더욱이 이런 요소들이야 말로 예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 이름으로 하라’고 첫 번째로 권면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권면은 “그를 힘입어”입니다. 여기 ‘그’는 예수를 말하며, ‘힘입어’라는 말은 예수를 의지하라는 말인데 본래적인 의미는 ‘예수가 감사의 중재자’이심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구속적으로만 중보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사의 중재자도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저는 시간상 할렐루야를 세 번만 외쳤지만 열 번, 백번을 외쳐도 지나침 없으며, 지극히 정당한 감사의 외침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시고 하늘로 승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계시지 않고 우편의 않아 계신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기위해 이 세상으로 오셨기 때문에 당연히 하늘의 보좌를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다 이루시고 다시 하늘로 가셨다면 또한 원래 자리인 보좌에 앉으셔야 맞습니다. 이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당연한 위치입니다.
그런데 보좌에 앉아 계실 예수님이 우편에 계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구속의 중보자로 혹은 감사의 중제자의 역할을 여전히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말이 이해갑니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은 재림하여 구원을 완성시키기 까지는 때로는 우리의 중보자로 때로는 나의 중재자로 계시기 때문에 보좌가 아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이 엄연한 사실을 알면 할렐루야를 열 번, 백번을 외쳐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며, 지극히 정당한 감사의 외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 눈물이 범벅이 되도록 할렐루야를 외치며 감사의 찬양을 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권면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모든 감사의 찬양은 하나님께로 집약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으며, 기도하고, 세례를 주지만 감사의 찬양은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올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세 번 감사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15절은 ‘감사하는 자가 되라’, 16절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찬양하고’, 17절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 번의 감사는 나름대로 특징이 있습니다. 15절은 ‘개인적인 감사’에 초점이 맞추어 있으며, 16절은 ‘감사의 목적’에 초점이 맞추어 있으며, 17절은 ‘감사의 대상’에 초점이 맞추어 있습니다.
감사의 대상에서 하나님 ‘아버지’라는 독특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 ‘아버지’는 가족관계를 의미합니다. 아버지는 가족의 경제, 교육, 기타 모든 면에서 책임지고 있는 버팀목 역할을 하지만, 존엄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라는 것은 바로 가장(家長)처럼 가까이 계신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부부는 무촌이라서 격이 없는 가장 가까운 사이이긴 하지만 이혼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은 1촌이기 때문에 지워질 수 없는 필연적 관계이며, 의존적 관계입니다. 여기 하나님은 멀리에 계신 분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계신 아버지와 같습니다. 이것이 골로새서 교인들이 감사해야 또 다른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제자 여러분! 우리는 1년 365일 내내 감사의 찬양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개의치 못해 다른 때는 제대로 감사의 찬양을 하지 못했다하더라도, 또한 오늘 추수감사절에만 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 진정한 마음으로 감사의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감사의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로 정한 것입니다. 주제에 걸맞게 감사, 찬양,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오늘은 끝을 맺지만, 계속 우리의 삶속에서는 끊어지지 않고 연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결 론>
오늘은 2017년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 교회에 감사할 것을 권면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 교회에 권면하고 있는 감사의 의미를 이제 알겠습니까?
결론적으로 감사의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감사는 아무에게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만이 우리가 감사해야 할 대상입니다. 또한 감사는 아무나 할 수 없고 아무 때나 할 수 없습니다. 사랑과 은혜는 아버지가 자녀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반면에 감사는 사랑과 은혜를 받은 자녀가 아버지에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런 원리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녀라고 할지라도 감사는 조건이 조성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감사의 첫 번째 조건은 ‘마음이 평안할 때’입니다(15절). 평강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더라도 굴곡이 있습니다. 전도서 기자는 사람은 매사에 때가 있다고 말합니다. 슬플 때가 있으면 평안할 때도 있습니다. 슬플 때도 감사의 찬양을 한다면 정말 좋겠지만, 슬플 때는 감사의 찬양을 못한다 치더라도 평안할 때는 마음껏 해야 합니다. 평강은 마음의 건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감사의 조건으로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의 두 번째 조건은 ‘말씀이 풍성할 때 감사’가 나옵니다(16절).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생활의 규범이며 척도입니다. 그리고 지식이 아닌 지혜는 말씀에서 나옵니다. 세상의 지식은 배움으로 얻지만, 지혜는 삶의 터전에서 터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풍성하면 감사의 찬양인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가 저절로 나옵니다.
감사의 세 번째 조건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할 때 감사의 찬양을 합니다(17절). 사람은 속사람과 겉사람이 늘 싸웁니다. 내가 할 것이냐 예수님의 이름으로 할 것이냐를 놓고 대립합니다. 만약에 내 뜻과 내 이름으로 해놓고 찬양을 한다면 오만한 찬양입니다. 반면에 이런 찬양은 하나님께 상달도 안 되지만 설사 상달되더라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매사의 하는 모든 말이나 일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한다면 겸손한 찬양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감사의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사랑하는 제자 여러분! 바울이 감사의 조건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 것은 당시 골로새서 교회의 상황(형편)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형편에 따라 또 다른 감사의 조건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니 세 가지에만 얽매이지 말고 여러분의 감사의 조건에 따라 항상 감사하기 바랍니다. 묵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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