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9월단 VS 모사드”
뮌헨 올림픽 참사 혹은 뮌헨 학살(Munich massacre)로 불리어지는 올림픽 사건은 독일(당시 서독)의 도시 뮌헨에서 개최된 1972년 9월 5일 하계 올림픽 기간에 일어난 테러사건이다. 팔레스타인의 테러 단체인 검은 9월단 11명의 이스라엘 올림픽 팀을 인질로 잡고 협상을 시도했으나, 경찰의 테러 진압 미비로 인해 대표팀 전원이 살해된 사건으로 이스라엘 건국의 상징인 국기(다윗의 별)가 피로 얼룩진 사건이다.
검은 9월단은 팔레스타인해방기구 내 알파타에서 분리된 극좌파 게릴라 조직으로, 아랍계 게릴라가 요르단 정부군의 토벌작전으로 큰 타격을 받은 1970년 9월, 아랍 게릴라 4명이 1970년 11월 당시 요르단의 탈 총리를 이집트 카이로의 한 호텔에서 암살하면서 스스로 검은 9월단이라 칭한 데서 시작됐다.
복면을 한 괴한들은 자신들을 팔레스타인 무장저항단체 ‘검은 9월단’ 소속이라고 밝히며 이스라엘이 억류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포로(양심수) 234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이스라엘 수상 골다 메이어는 이 요구를 거절하고 이스라엘 군대를 통한 사태 해결을 위해 서독에게 양해를 구했으나, 서독의 법률은 외국군의 국내 활동을 제한했기 때문에 서독측은 자신들이 대응할 것이라며 거부했다. 그리고 서독 경찰은 이들과 수차례의 협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결국 강경책으로 대응하기로 결정한다.
한편, 이스라엘의 단호한 대응으로 이튿날인 6일까지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자 무장단원들은 아랍국가로의 탈출을 모색했다. 그리고 인질범은 이집트 카이로로 날아갈 항공기를 요구했고 독일 정부는 이 요구를 수용했다. 6일 밤 10시쯤 인질범과 인질들은 두 대의 헬리콥터를 타고 공항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제공될 비행기 안에는 독일 군인들이 타고 있었고, 공항 곳곳에는 저격 전문 스나이퍼들이 배치돼 있었다. 독일 군경찰 당국은 이들이 헬리콥터에서 내려 비행기로 갈아타는 순간 인질구조작전을 펼칠 계획이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독일 군경은 테러진압경험이 전혀 없었다. 무선통신장치조차 장착하지 않은 독일 저격병들이 신호 착오로 사격을 시작하자, 인질범들은 헬기 한 대에 폭탄을 투척하고 자폭하는 동시에 선수 9명을 모두 살해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 군경 2 명도 사망했다. 결국 인질 전원과 5명의 게릴라가 현장에서 죽고 3명은 생포로 끝이 났다. 실패한 구조작전이었다. 생포된 3명도 10월29일 서독 루프트한자 여객기를 하이재킹 한 무장단체의 요구로 석방돼 이스라엘을 격분시켰다.
이후 자국 선수들의 학살에 분노한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즉각 보복에 돌입했다. 이른바 '신의 분노' 작전이다. 뮌헨 학살 계획에 연루된 팔레스타인 인들과 검은 9월단 요인들을 암살하기 위해 이스라엘 비밀정보원 모사드의 정예 멤버들이 암살단원으로 발탁됐다. 여기에서 모사드 요원과 kGB 요원 선발과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KGB 요원 선발은 갖난애부터 물색되어 전생애를 기계요원을 만들어지는데 비해 모사드 요원은 5세시 모세5경을 습득하고 탈무드를 학습시켜 창의적인 요원을 물색하여 훈련시키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요원들을 몇 년전에 CIA가 대비하여 어느쪽이 우수한가를 여러 실험을 통해 비교했던 흥미로운 분석을 하였는데 이외로 모사드 요원이 우수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기계인간과 창의적 인간의 대비이지만 정보는 종합학문이기 때문에 극히 창의력을 요구한 것으로 나타났다.
작전에 투입된 모사드 요원들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의 내부정보원과 유럽의 친이스라엘 정보기관들의 도움으로 암살 대상 리스트를 작성했고 1순위는 이탈리아 PLO의 책임자이자 검은 9월단 간부로 알려진 와델 아델 자와이터가 표적이 되었다. 그는 10월 16일 이탈리아에서 모사드 요원의 소염기 총에 맞아 사망했다. 그 외도 아부 다우드 : 검은 9월단의 수장. 바르샤바에서 총격을 받고 사망. 바엘 즈바이터 : 로마의 자택에서 12발의 총격을 받고 사망. 마흐무드 함쉬리 : 파리의 자택에서 전화에 설치된 폭탄공격으로 사망. 후세인 아바드 알 치크 & 자이아드 무차시 : 키프로스의 자택에서 침대 밑에 설치된 폭탄공격으로 사망. 바실 알 쿠바시 : 파리에서 12발의 총격을 받고 사망. 아부 유세프 & 카멜 애드완 & 카말 나세르: 이스라엘 코만도의 공격으로 베이루트에서 사망. 아드벨 하미드 쉬비 & 아드벨 하디 나카 : 차량이 폭발하여 사망. 모하메드 부디아 : 운전석 밑에 설치된 폭탄공격으로 프랑스에서 사망. 알리 하산 살라메 : 베이루트에서 폭탄차량공격으로 사망. 아드난 알 가세이 : 뮌헨 공격에 직접 참가한 자, 서독에 체포되었으나 석방되었다. 긴 도피생활 중 한 걸프 국가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모하메드 사파디 : 뮌헨 공격에 직접 참가한 자, 서독에 체포되었으나 석방되었다. 긴 도피생활 중 레바논에서 의문사 했다. 이 역시 모사드의 소행으로 추정 된다. 결국 1992년 프랑스 파리에서 PLO 정보책임자이자 뮌헨사건 모의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아테프 베이소가 암살당한 것을 마지막으로 꼭 20년 동안 이어져 온 '신의 분노' 작전은 사실상 종결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9월단원들은 신원이 철저히 베일에 가려졌지만 모사드는 체코에서 세탁공으로 이름까지 개명하고 제2의 삶을 살고 있던 아돌프 아이히만을 체포해 이스라엘 법정에 세우고 사형선고를 내릴 정도의 신출규모 한 조직망에 의해 악명높았던 검은 9월단은 일망타진 되었다. 1972년 9월 5일 새벽 4시, 운동선수 복장을 한 검은 9월단 8명이 서독 뮌헨의 올림픽 선수촌 담장을 넘어 자동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이들 괴한들은 곧바로 28명의 이스라엘 선수들이 묵고 있던 숙소로 침입해 피의 살육극을 벌려 인류평화의 상징인 올림픽 대회를 무색케 했지만 선수를 비명에 보낸 복수극의 화신 모사드의 총구가 이를 용서치 않았다.
2005년 공개된 스티븐 스필버그감독의 영화 〈뮌헨〉은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가 주도한 보복작전 "신의 분노 작전"에 관련된 "아부나(가명)"(Avner)란 원 공작원의 실화를 기초로 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부 및 모사드의 옛 고위관리 등은 이 사실을 부정했다. 정보요원들에게는 영원한 서약서가 있다. ‘비밀은 무덤까지 가지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