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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지자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에 빠져 있던 나라와 민족을 향해서 회개하라고 촉구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했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으면 그들이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았던 아니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던 끔찍한 재앙을 당하게 되리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는 그가 전한 메시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실 그는 “너희가 바벨론에서 칠십년을 채우면...이곳으로 다시 데려오리라.”(렘29:10b)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이는 근동의 패자覇者로 급부상하고 있던 신흥강국 바벨론이 칠십년 만에 멸망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동시에 남 왕국 유다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그는 또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렘31:33)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남 왕국 유다를 바벨론의 손에 일시적으로 맡기시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남 왕국 유다의 전인적이고도 획기적인 변화를 위해서입니다. 당신이 남 왕국 유다의 유일한 하나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남 왕국 유다를 당신의 거룩한 백성 삼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곧 닥칠 남 왕국 유다의 진멸은 그들을 새롭게 개조하기 위한, 새롭게 창조하기 위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룩하게 구별하기 위한 하나의 연단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들을 징계하시는 진짜 목적은 진멸이 아니라 구원이었습니다. “이곳(곧 바벨론의 군대에게 철저하게 짓밟힐 남 왕국 유다)에 있는 집과 밭과 포도원을 다시 팔고 사게 되리라.”(렘32:15)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은 물론 최고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시작해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누구하나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참된 희망을 선포하는 선지자의 메시지를 왜곡했습니다. 나라와 민족의 멸망을 바라는 반역자로 몰아세웠습니다. 핍박했습니다. 타락한 동료 선지자들이 앞장섰습니다. 스스로 진멸을 자초했습니다. 선지자의 예언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성문은 불에 탔습니다. 성벽은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거룩하게 구별되었던 하나님의 성전은 이방인의 말발굽과 창칼에 처참하게 유린당했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군인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일반 백성들의 희생 역시 결코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흘린 피가 강같이 흘렀습니다. 피비린내가 전국을 뒤엎었습니다.
통곡과 절규가 천지에 울려 퍼졌습니다. 유력한 자들 가운데 극히 일부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유력한 집안 출신으로 장래가 촉망되던 그Daniel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희망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는 절망의 한 복판에 던져졌습니다. 한편, 그는 육체적으로 흠이 없었습니다. 도덕적으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용모는 대단히 준수했습니다. 다방면에 걸쳐서 실제적이고 포괄적인 지식을 두루 갖췄습니다. 지식을 가장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지혜로웠습니다. 행동 하나하나에는 사려 깊음이 배어있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바벨론 왕립 학교에서 수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바란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혜택은 아니었습니다. 왕궁생활을 위해서 반드시 갖춰야할 말과 글과 문화와 각종 예절 등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아니 타협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습니다. 매일 우상에게 바쳐진 다음 공급되고 있던 진수성찬이었습니다. 포도주였습니다. 그는 그것들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결단했습니다. 여호와에 대한 절대 믿음과 거룩함만큼은 지키기로 결단했습니다. 자신을 관리하고 있던 궁중 대신에게 뜻을 전달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도움을 청했습니다. 궁중 대신은 그의 간청에 호감을 드러냈습니다. 다만, 만에 하나 채소와 물만 먹은 그의 얼굴이 수척해지거나 약해졌다는 느낌을 풍기게 된다면 자신에게 위험이 닥칠 수도 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는 열흘만 자신의 뜻대로 행한 이후, 결과가 좋지 않으면 어떤 처분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믿음으로 결단한 결과는 대단히 놀라웠습니다. 우상에 바쳐진 왕의 진수성찬과 포도주를 먹은 동료들보다 그의 얼굴 혈색이 훨씬 좋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학문과 다른 모든 것을 통달할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을 부어주셨습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탁월한 꿈과 환상 해석 능력까지 충만하게 부어주셨습니다. 삼년 동안에 걸친 수련 기간을 모두 다 끝낸 다음에는 동료들보다 열 배나 더 뛰어난 지혜와 총명으로 무장시켜주셨습니다. 어떤 문제들도 척척 풀어낼 수 있었습니다. 비록 포로 신세였지만 하나님에 대한 절대 믿음을 놓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특히, 성경은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무릎 꿇고 기도하며...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6:10)라고 증거 합니다.
동료들은 이방인 주제에 승승장구하며 입지를 굳혀가고 있던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끌어내리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음모를 꾸몄습니다. 아무리 살펴봐도 흠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매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말고는 그를 옭아맬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후, 30일 동안 왕 외에 다른 어떤 신에게도 기도할 수 없다는 법안을 발의했습니다. 어겼을 때는 굶주린 사자 굴에 던져 넣는 징벌 조항까지 덧붙였습니다. 왕은 한껏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당장 시행할 수 있도록 승인해 주었습니다.
가장 가까이 두며, 누구보다 아끼던 그를 자신의 만족과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 돌이킬 수 없는 죽음으로 몰아세웠습니다. 사람은 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바벨론 전국을 다스리는 세 명의 총리들 가운데 한 명이었던 그는 졸지에 선택의 기로에 놓였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나서 목숨을 지키든지, 하나님을 붙잡는 대신 오랫동안 굶겨둔 사자들에게 던져져서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든지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절대 믿음으로 무장한 그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하나님을 놓을 수는 없었습니다. 또 다시 뜻을 정했습니다. 결단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쪽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습니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보라는 듯 공개적으로 기도했습니다. 기도한 내용은 감사였습니다. 감사할 것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 감사했습니다. 감사하기로 뜻을 정했기 때문에 곧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하기로 뜻을 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왕립 학교에서 교육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 할지라도 가증스러운 우상에게 바쳐진 왕의 진수성찬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지 않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결단했습니다.
선택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잃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붙잡은 손을 놓지 않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결단했습니다. 선택했습니다. 이렇게 감사는 결단입니다. 선택입니다. 그녀는 한쪽 얼굴에 마치 불에 덴 상처 같은 큰 붉은 반점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정확한 병명은 “화염상 모반Nevus flammeus”입니다. 출생 시나 태어난 후 짧은 시간에 걸쳐서 피부 진피 상부에 이상 혈관 형성으로 인해 반점이 생기는 질환입니다. 분홍색이나 암적색입니다. 부모에게 버림받았습니다. 보육원에서 자랐습니다. 보이지 않는 차별과 냉대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스물다섯 살 때는 모반이 없었던 반대편 얼굴마저 암이 발생했습니다. 무너져 내렸습니다. 천만 다행으로, 그녀의 아픈 마음은 물론 환경과 외모까지 모든 것을 감싸주고 사랑해 주는 착한 남편을 만났습니다. 딸 둘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첫째를 낳아 기를 때였습니다. 자신의 흉한 모습 때문에 아이가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아이를 잘 키워낼 수 있을지 걱정했습니다. 엄마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가슴 아픈 현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이가 상처를 받을지, 않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상처받지 않도록, 자신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아이가 넘어졌을 때 “이것밖에 안 다쳤네, 감사하다!”라고 말했습니다. 비록 어리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도록 가르쳤습니다. 바른 마음의 자세를 가지도록 가르쳤습니다. 아이가 또 넘어졌습니다. 그 때 아이는 “엄마, 이것밖에 안 다쳤어. 다행이죠?”라고 말했습니다. 순간,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키우게 되면 오히려 마음이 위축되고 상처받으며 자라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키우면 아이 마음속에 감사가 자란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제게 아픔이 없었다면 감사를 몰랐을 것입니다. 슬픔이 없었다면 기쁨도 몰랐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 힘들거나, 아픔과 고통을 만날 때(면) 고통의 씨앗이 너무 크다는 이유로 그것만 (바라)봅니다. (그러나) 저는 그 속에서 작은 감사의 씨앗을 발견했습니다. 감사의 씨앗이 따뜻한 햇살과 잔잔한 비와 바람만 맞았다면 그 나무는 (분명) 아주 작게 자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경과 아픔과 상처 덕분에 (오히려) 더 크고 튼튼한 나무로 자랄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 저에게 큰 복점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을 낳아주신 어머니께 왜 그런 흉한 모습으로 태어나게 하였느냐고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기는커녕 오히려 감사드렸습니다. 이렇게 감사는 바른 마음입니다. 바른 태도입니다. 바른 반응입니다. 바른 선택입니다. 주인은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구하기 위해서 인력 시장을 찾았습니다. 일거리를 찾고 있던 일꾼들 가운데 일부와 한 데나리온의 일당을 주기로 하고 계약을 맺었습니다. 포도원 안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아홉시 쯤 되었을 때 다시 인력 시장을 찾았습니다.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을 포도원으로 들여보내며 일한 만큼의 삯을 주기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주인은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에도 인력 시장으로 나갔습니다. 여전히 일자리를 찾고 있던 일꾼들과 똑같은 계약을 맺고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오후 다섯 시쯤에도 인력 시장으로 나갔습니다. 그때까지도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남아있었습니다. 왜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놀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일꾼들은 아무도 자신들에게 일을 맡겨주지 않아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주인은 그들도 포도원으로 들여보냈습니다. 할 일을 주었습니다. 날이 저물었습니다. 주인은 관리인을 불렀습니다. 일꾼들에게 차례대로 품삯을 지불해 주라고 명령했습니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한 데나리온씩 받아갔습니다. 대단히 만족했습니다. 연신 감사했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포도원으로 들어가 일한 일꾼들은 그들보다는 조금 더 많은 품삯을 받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었습니다. 계약한 대로 한 데나리온밖에 받을 수 없었습니다. 투덜거리며 이른 아침부터 하루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자신들을 막판에 와서 겨우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들과 어떻게 똑같이 대우할 수 있느냐고 따졌습니다. 사실 그들은 주인이 자신들을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선택했을 때 너무나 고마웠습니다. 감사했습니다.
일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만족했습니다. 다른 일꾼들과 비교하는 순간, 처음 계약을 맺고 감사하며 만족했었던 마음이 물거품처럼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마음 깊숙이 감춰져 있었던 탐욕과 시기심이 발동했습니다. 분명 계약한 만큼의 대가를 받았지만, 제대로 받지 못했다고 느껴졌습니다. 주인은 분명 공의를 행했지만,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시간을 들여 일을 했어도 정작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면 적게 일한 것입니다. 아무리 적은 시간 일을 했어도 꼭 해야 할 일을 했다면 많이 일한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보다 어떻게 했느냐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은 채 누구도 모르게 조용히 일하시지만, 인간은 누구나 알 수 있도록 부산을 떨며 일하고 반드시 일한 대가를 요구합니다. 합당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루 종일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끝내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죽을 만큼 힘들고 고된 일입니다. 아침 일찍 선택을 받아서 더 이상 마음을 졸이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선물입니다. 은혜입니다. 축복입니다. 감사의 조건입니다. 그들은 문등병자였습니다. 율법에 따라 사랑하는 사람들과 격리된 채 외롭고 고독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각종 질병을 치료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을로 들어오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있는 힘을 모두 다 쥐어짜냈습니다. 자신들에게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의 외침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명령을 내리신다 할지라도 이유를 묻거나 따지지도 않고 즉시, 그대로, 절대, 반드시 순종하겠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설명도 해주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제사장에게 가서 악취가 진동하는 몸을 보여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전히 진물이 흐르고 있는 상태에서는 순종하기가 결코 쉽지 않은 명령이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스스로 고백한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즉시 순종했습니다. 제사장을 향해서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가는 도중인데, 느낌이 이상했습니다. 몸을 자세하게 살펴봤습니다. 문둥병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이제 제사장이 자신들이 회복되었다고 확인만 해주는 일만 남았습니다.
지긋지긋하게 외롭고 고독했던 생활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조심스러워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잠시라도 더 빨리 완치 판정을 받고 싶었습니다. 걷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발걸음이 빨라졌습니다. 급기야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는 성민 이스라엘이 지옥의 땔감 정도로 여기며 비웃고 조롱하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왔습니다. 발아래 엎드렸습니다. 감사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나머지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사마리아인에 비해서 훨씬 더 많은 은혜를 받은 유대인들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다는 사람들이 교만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는 경우가 많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감사하는 이들이 적다는 의미입니다. 너무나 안타깝고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모습입니다. 사도는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7)라고 외쳤습니다.
무슨 말을 하게 되든지, 무슨 일을 하게 되든지 모두 자신이 아니라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라고 외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드리라고 외쳤습니다. “당신이 비참해지기 원한다면”이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누구도 원하지 않겠지만, 만에 하나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음과 같이 따라하면 됩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 생각하면 됩니다. 자기 얘기만 하면 됩니다. 상대방이 어떤 의견을 내놓든지 그 의견 속에 자기만 계속해서 반영하면 됩니다.
사람들이 자기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하나도 놓치지 말고 다 들으면 됩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라면 됩니다. 모두를 의심하면 됩니다. 아무도 믿지 말고 오직 자기만 믿으면 됩니다. 다른 사람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경멸하면 됩니다. 자기를 스스로 계속 비판하면 됩니다. 자기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면 됩니다. 배려와 존경받기를 바라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거나 존경하지 않으면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모든 일에 있어서 자기 의견에 동의하라고 요구하면 됩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베풀어주었던 희생과 봉사를 절대로 잊지 않으면 됩니다.
가능한 한 자신의 의무를 회피하면 됩니다. 가능한 한 남을 위한 일을 적게 하면 됩니다. 오직 자신 하나에게만 온전히 집중하면 됩니다. 만일 누군가 자신이 베풀어주었던 친절에 감사하지 않거든 화를 내면 됩니다. 가장 비참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반면, 신학자인 동시에 사상가인 그內村鑑三는 “감사는 은혜 받는 그릇”이라고 외쳤습니다. 감사하면 고해와 같은 힘겨운 인생을 사는 동안 어떤 환경과 상황과 조건과 사람을 만나게 된다 할지라도 어떤 영향도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래도 감사하고, 저래도 감사하고 있습니까? 범사에 감사하고 있습니까? 한 학자가 매일 아침 고양이로 하여금 쥐가 평화롭게 지내고 있는 지역을 지나가도록 했습니다. 미리 정해 두었던 일주일 동안의 실험기간이 다 지나갔습니다. 쥐의 위장을 열어보았습니다. 피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심장은 거의 다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단순히 고양이가 지나가도록 했을 뿐인데 쥐는 견디기 힘든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보이지 않게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실험이 있습니다. 화를 아주 잘 내는 사람의 입김을 고무풍선에 담아 냉각시켜 액체로 만들었습니다.
주사기로 쥐에게 주입시켰습니다. 약 3분 정도 몸부림치며 발작하던 쥐는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복음주의 작가이면서 탁월한 목사인 그Charles R. Swindoll는 “인생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10%의 일과 그것에 대한 우리의 반응 90%로 이루어진다.”라고 말했습니다. 인생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Hans Seyle는 정신의학 분야에서 스트레스의 대가입니다. 고별 강연을 마치고 강단을 내려가는데 한 학생이 그의 앞을 막아섰습니다. 마치 홍수처럼 쏟아지고 있는 온갖 종류의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 하나만 가르쳐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감사Appreciation”라고 외쳤습니다. 그가 외쳤던 감사라는 단어에는 “공감, 감탄”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감사는 공감하고 감탄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또 감사만큼 강력한 스트레스 정화제淨化劑는 없습니다. 감사만큼 강력한 치료제治療劑도 없습니다. 마음속에 억압되어 있는 온갖 종류의 감정과 응어리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정서적인 안정을 누릴 수도 있습니다. 영혼육의 안정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와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다 창조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유일한 주인이십니다. 사람의 희생, 섬김, 봉사, 피와 땀과 눈물, 힘에 지나도록 드리는 천문학적인 물질 등과는 전혀 상관없이 풍요로우십니다. 부족이라는 단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아니 아예 필요가 없을 정도로 부요하십니다. 인생이 가진 결핍을 충분히,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 생명도 주십니다. 호흡도 주십니다. “내가 빛을 만들었다. 어둠도 지었다. 행복도 주고, 불행도 조장한다.”(사45:7a),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그지없이 높으신 하나님 말씀 없이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애3:38)라는 증거에 따르면, 때로는 괴로움도 주십니다.
고통도 주십니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하는 이를 만들고 듣지 못하는 이를 만들었으며, 누가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거나 앞 못 보는 사람이 되게 하였느냐? 바로 나 여호와가 아니더냐?”(출4:11)라는 증거에 따르면, 표현하기가 참으로 민망하고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아니 거세게 따지며 반발할 수도 있겠지만 지상에 존재하는 온갖 종류의 장애도 주십니다.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받지 못하겠다 하겠소?”(욥2:10a)라는 욥의 고백에 따르면, 복도 주십니다. 재앙도 주십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들의 수만큼...재난을 당한 햇수만큼”(시90:15a), “...여호와께서 그 땅에 기근을 불러들이시고, 온갖 식량을 끊어 버리셨다.”(시105:16)라는 시인의 고백에 따르면, 괴로움도 주십니다. 재난도 주십니다. 기근도 주십니다. 식량을 완전히 끊어버리기도 하십니다. 하나같이 의도적으로 주십니다. 창세전부터 확정하신 지극히 선한 목적을 완벽하게 이루어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암, 유산, 외도, 실패, 실직, 죽음, 전쟁 등 최악으로 치닫는 각종 상황들 속에서도 반드시 이루어주십니다. 믿음의 선진들의 경우들을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선택입니다. 감사는 훈련입니다. 감사는 태도입니다. 감사는 영혼의 건강을 나타내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입니다. 감사는 영혼의 행복을 지키는 강력한 수호자입니다. 감사는 변화된 성도의 마음에서 자라는 가장 아름답고 소중하며 고귀한 꽃입니다. 감사는 영혼을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감사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로 이끌어줍니다. 특히 감사는 고해같이 힘겨운 인생을 승리로 이끄는 미래의 사건입니다. 앞선 현재입니다. 감사는 풀어 놓을 때마다 아름다운 방향을 제시해줍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열매를 선물로 줍니다. 감사는 하지 않는 사람에게 제로Zero 게임이 아닙니다. 끝을 모르고 떨어지는 마이너스 게임입니다. 아직 기회가 주어져 있을 때 감사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래도 감사할 수 있어야합니다. 저래도 감사할 수 있어야합니다.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야합니다. 포로수용소에서 무수히 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었던 그Viktor Frankl는 “인간으로부터 가진 모든 것을 (한 가지도 남기지 않고 다) 빼앗아갈 수는 있지만...삶에 대한 (마음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한 가지만큼은 (절대로) 빼앗아 갈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정신과 교수인 그녀Jean Shinoda Bolen는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에 감사하라. 자신이 얼마나 운 좋은 사람인지 또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노력 없이 얻어진 것들인지 생각하며, 감사와 기쁨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는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선물로 주어져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누리고 있는 것들 가운데 당연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반드시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 주어졌습니다. 어떤 환경과 상황과 조건 속에 놓이게 될지라도 일단 감사부터 선택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고해와 같은 인생 속에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모든 일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오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이래도 감사하고, 저래도 감사하고, 무슨 일에든지 다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복된 삶, 모든 일을 통해서 자신을 위한 창세전 작정을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경험하는 복된 삶, 무엇보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영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고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